[게나조] 왜 그런 말을 해 이미 부서져 버렸는데
게게게의 키타로 극장판 게게게의 수수께끼 키타로 탄생
※후세터 글을 약간 손본 버젼입니다
※준공님(Junezero0621)과 얘기하던 중 떠오른 아이디어로 연성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망 소재가 나옵니다. 참고 부탁드립니다.
나는 유령이다.
아마도 그렇다.
유령이 된 이유를 질문 받으면 답하기는 곤란하다. 아마도 여기서 상당히 억울한 일을 당한 게 아닐까? 나 자신의 일인데도 상당히 뜬구름 잡는 태도라는 건 자각하고 있지만 별 수 없다. 애초에 기억나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 덕분에 내가 죽은 이유나 시각은 고사하고 본래 내 이름도 떠오르지 않는다. 차에 치여 땅에 처박히거나 괴한의 칼에 심장이 찔리는 바람에 기억이 전부 날아간 모양이다. 더욱이 유령이기 때문인지 물웅덩이나 거울에도 내 모습이 비치지 않아서 나는 자신의 얼굴 형태도 알아낼 수 없다. 환장할 노릇이군. (그보다 반사면에 얼굴이 안보이는 건 흡혈귀 아니야?)
결국 이 교차로에 우두커니 서 있을 수밖에 없다. 하루인지 한 시간인지 일 년인지 모를 시간이 내 어깨를 스쳐지나가는 동안 날은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고 비가 내리기도 했으나 유령에게는 큰 의미가 없는 일이다. 애초에 유령에게 의미가 있는 일이 있을까? 노하우를 전수해주는 선배 유령이 있는 것도 아니니 별 수 없이 도로를 달리는 차의 창문 갯수를 세어보거나 저 멀리 보이는 고양이의 그림자에 손을 흔들어 볼 뿐이다. 어쩌면 알아볼 수 있는 얼굴이 지나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있던가요?
없었어.
유령으로 지내면서 어렴풋이 깨달은 게 있다. 하나는 이 세상에 요괴라는 게 존재한다는 사실. 하지만 아무래도 유령과 요괴는 서로 어울려 노는 사이가 아닌지 그쪽에서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일은 없었다. 하긴 요괴는 인간을 놀리는 걸 재밌어하지 유령을 놀리는 걸 재밌어하지는 않을 것이다.
좀 더 자세히 보지 그래요?
자세히 봤는데도 그래.
또 다른 하나는 나를 ‘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 그렇지만 대부분은 내 모습을 보더라도 얼른 지나가거나 고개를 돌려버린다. 유령이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하면 이상한 일도 아니겠지. 하지만 그런 반응을 보다 보면 싫어도 ‘여기에 있어선 안 된다’는 생각이 강해지니 좋은 기분은 아니다. 나도 원해서 이러는게 아닌데 공연한 책임을 뒤집어쓰는 기분이랄까.
참 무정한 사람이네요.
무정해서 미안하네.
헌데 한쪽 눈을 가린 작은 아이만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아무래도 이 아이도 유령이나 요괴 같은 존재가 보이는 모양이다. 부모님이 아신다면 기절초풍하겠군. 그런 생각도 했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언제부터 여기 있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감각이 닳아버린 유령이라도 말상대가 생겼다는 기쁨은 쉬이 억누르기 힘든 탓이다. 아이도 그걸 아는지 매일같이 꽃을 들고 나를 찾아왔다. 꽃을 여기 근처에 놔두고 혼자서 무어라 말하고 있으면 다들 말을 걸지 않아서 편하다나. 덕분에 나는 팔자에도 없는 공양을 받고 있다.
담배 피울래요?
매번 묻지 마. 안 피워. 안돼. 불 붙이지마. 성냥 넣어. 집어넣어. 집어넣으라고 했어!
아무 생각 없이 응, 이라고 대답했다가 아이가 담배에 불을 붙여 한 모금 빨아들이는 모습을 보고 기절초풍한 이래 내 거절은 완고하다. 저는 이래 보여도 나이가 많아요. 라지만 애가 하는 거짓말에 대체 누가 속겠는가. 아이는 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곤 꽃다발 근처에 불도 안 붙은 담배 한 개비를 적당히 올려두었다. 내버려두면 누군가가 주워가거나 바람에 구르는 쓰레기가 되어 사라질 것이다.
애초에 왜 자꾸 나한테 담배를 권하는 거야.
집을 정리하다보니 나와서….
창고 정리냐.
나는 아이의 이름을 모른다. 아이도 내 이름을 모른다. (기억이 안 나서 소개도 못했으니 당연하다.) 다만 서로를 인지할 수 있을 뿐이다. 유령과 인간이 서로 손을 잡고 어디 놀러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보니 (아이는 처음에 나를 데리고 무작정 어디로 가려했으나 실패했다) 우리는 이 교차로에서 영양가 없는 대화나 나눈다. 유령같은 대화로군. 언젠가 그런 말을 꺼내자 진짜 썰렁하다고 야유받았다. 이런 것도 죽은 자의 숙명인가.
궁금하지 않아요?
뭐가?
당신이 여기 있는 이유.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이 세상은 이리도 넓은데 내 의식과 정신이 굳이 이 교차로에 붙박혀 있는 이유는 대체 뭘까. 아이는 그걸 어느 정도 짐작한 모양이다. 하긴 영리한 아이니 맹한 유령의 속내를 짐작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이어지는 목소리는 깊은 동굴에서 새어나오는 바람소리 같았다. 궁금하지 않아요? 죽은 이유를 알아봐줄게요. 당신이 누구였는지 찾아볼게요. 원한다면 누가 범인인지도 찾아낼게요. 어찌 보면 어둠 속에서 빛나는 미끼같은 말이지만 이쪽을 바라보는 얼굴은 진지하다. 그러므로 나도 진지하게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아니. 괜찮아.
어째서요?
왜냐면….
유령은 이승에 강한 미련이 남아서 생기는 것, 이라고 한다. 나도 그와 비슷한 미련인가 뭔가가 남아있는 거겠지. 아마 높은 확률로 이 장소와 얽혀있을 사정일 것이고 이걸 해소하지 않으면 영영 이 상태로 묶여있을 거라는… 막연하지만 확실한 예감은 있다. 그러니 아이가 하는 제안을 고마워할지언정 거절할 입장은 아닐 테지. 하지만 역시 거절의 답밖에 나오지 않는다. 아이는 도무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도 그 심정을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이건 분명 나의 잘못일 테니까. 너를 말려들게 할 순 없어.
아이는 나보다 훨씬 작고 어리고 머리카락이 한쪽 눈을 가리고 있고 튼튼해보이는 조끼를 입었고 나막신을 신었고 다가오면 달각달각 나막신 소리가 나서 아주 멀리서 오더라도 그 소리가 들리고 나는 그걸 듣고 아이가 오는 것을 알고
어차피 타인이라는 건가요?
바~보. 그런 뜻이 아니잖아.
그럼 뭐죠?
나에게 얽매이지 말라는 뜻이야.
아마도 친구가 생기고 소중한 사람을 만나게 되고 부모에게 감사하고 누군가를 돕고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싫은 일에는 싫다고 거절을 하지만 자신이 지켜야 할 신념을 위해서라면 아픔을 감내하는 법을 알 것이고
얽매이지 말라뇨?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일 뿐이잖아.
이 세상을 오래오래 살아가겠지.
왜?
그 질문은 좀 철학적인데….
왜 당신이 그냥 죽은 사람이죠?
아, 그런 의미?
당신은 분명히 의미가 있었어. 당신이 죽어서 슬퍼하는 사람이 있고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있어요. 이 사태를 초래한 자가 있다면 당연히 그 댓가를 치뤄야죠. 내가 걱정되나요? 그럴 필요 없어요. 나는 사실 엄청 강하거든요. 정말로, 뭐든지 할 수 있어요. 몰랐다면 이제 알게 될 거에요. 그러니 도와달라든가 알겠어라든가 고마워라든가 뭐든지 내키는 한 마디를 하세요 그럼 내가
저기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원수를 잡아내서
저기!
…….
…그러지 마.
어째서요?
나는 유령이다. 아마도 그렇다. 나는 내 이름도 내 얼굴도 소중한 사람의 이름도 가족의 목소리도 온기도 모른다. 태어난 고향도 모른다. 내가 살던 곳의 주소도 모른다. 내 방에 발린 벽지의 색깔을 모른다. 매일 밥을 먹었을 부엌의 풍경이나 내가 쓰던 밥그릇의 크기를 모른다. 집에 마당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모른다. 거기서 누가 기다리고 있었는지 모른다. 자주 입던 옷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슬플 때 무엇을 했는지 모른다. 기쁠 때 누굴 찾았는지 모른다. 홀로 있기를 즐겼는지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즐겼는지 모른다. 무엇을 사랑했는지 모른다. 무엇을 미워했는지 모른다. 이 세상에 부는 바람의 감촉을, 머리 위에서 내려오는 햇살의 뜨거움을, 하늘에 두텁게 내려앉은 노을의 색깔을, 흘러가는 구름의 옅은 그림자를 모른다. 나는 모든 것을 모른다. 나를 이루던 모든 것을 이제는 모른다.
네가 그러지 않기를 바라니까.
내가 그러기를 바란다 해도?
(나는 정말로 살아있었던 걸까?)
그래도 안돼.
나는 내가 바라는 대로 행동할 수 있어요.
나도 내가 바라는 대로 행동할 수 있지.
당신이 바라는 게 뭔데요?
이 세상을 감각하는 거.
바람은 지금 어느 방향으로 불고 있는가. 햇살은 어느 정도의 온기를 머금고 있는가. 비는 금방이라도 내릴 듯한가 아니면 아직은 아득히 멀었는가. 박탈된 유령의 감각은 무엇도 감지하지 못한다. 살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는 이룰 수 없는 이야기다만.
그래요, 그러니까 내가….
그러니까 네가 대신 살아주면 안될까?
아이가 고개를 든다. 이상하다. 분명 몇 번이고 얘기를 나눈 것 같은데 이 얼굴을 전혀 모르겠다. 무슨 표정인지 가늠할 수가 없다. 이제 슬슬 유령이 된 이후의 일도 잊어가게 되는 것일까? 어쩌면 이렇게 모든 기억이 쓸려나간 끝에 타인을 저주하는 기능만 남는 것이 지박령의 운명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것은 싫다. 다행이다. 아직은 무언가를 제대로 싫다고 인식할 수 있는 자아가 있다. 손가락 한 마디 뿐인지도 모르지만, 확실하게 있다. 그렇다면 지금 분명히 전해두자.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을.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강하게 바라는 것을.
배고프면 밥 잘 먹고, 울고, 웃고, 좋은 데 놀러도 가고…. 가끔 들러서 인사나 해주면 좋을 것 같거든.
…….
사실 뭘 하든 네 자유긴 하지. 근데….
"너는 남을 저주하기 위해 태어난 아이가 아닐 거야."
감각이 멀다. 이 세상이 멀다. 아이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위로해주려던 손이 작은 몸을 통과해서 맥없이 뻗어나갔다. 그렇다. 나는 유령이다. 유령이라서 어디에도 닿지 못한다. 어디로도 가지 못해서 빙글빙글 헤매는 마음이 이 교차로로 되돌아온다. 묶여있다. 매여있다. 그렇다면 하다 못해 이 말이라도 제대로 전하고 싶은데.
아이가 미즈키 씨, 라며 울기 시작한다.
어쩌면 그게 내 이름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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