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커플링Non-Coupling

[게나조] 그리고 내일이 다가오겠지 당신의 폐를 부풀리면서

게게게의 키타로 극장판 게게게의 수수께끼 키타로 탄생

※후세터 글을 약간 손본 버젼입니다

※극장판 내용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러니 저러니해도 아이를 키우다보면 행동이 그에 맞춰 달라지는 법이다. 아기 울음을 닮은 소리가 귓가에 닿으면 소스라치게 일어나게 된다거나 식당에 갔을 때 아기가 쓸 만한 작은 앞접시를 찾는다거나 손등에 떨어진 분유 몇 방울로 대략적인 온도를 가늠할 수 있게 된다던가. 그렇지만 역시 제일 민망한 건 그거지. 그거? 식사 시간에 모두가 듣는데 맘마 먹으러 가자고 한다던가…. 예전에 옆 팀의 누가 실제로 그랬다고 들은 것 같은데. 미즈키 씨도 조심해.

젠장, 그냥 흘려듣지 말걸. 미즈키는 문간에 선 채 깊은 후회에 빠지지만 이를 어쩌나. 저지른 행동은 뒤로 무를 수도 취소할 수도 없다. 그래서 현관 문간에 서있는 어머니와 미즈키 사이에 무척이나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오늘 하루 이래저래 힘들었다며 푸념을 늘어놓던 얼굴에는 의아함이 가득 담겨있었다. 양쪽으로 벌린 팔도 미치도록 민망스러운데 가까운 혈육에게서 받는 이 시선은 또 얼마나 겸연쩍은가. 팔 근육도 생각처럼 매끄럽게 움직여주지 않아서 미즈키는 얼굴이 벌개진 채로 더듬더듬 변명을 쥐어짜냈다. 음, 어머니, 그러니까 이건, 뭐랄까, 맨날 키타로 안아주던게 버릇이 되서, 그래서.

각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어머나, 하고 웃기 시작했다. 미즈키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세상에! 너 엄마가 몇 살인지도 잊어버렸니?”

“알아요! 실수한 거에요! 어쩌다보니까!”

“어휴, 우스워라. 깜짝 놀랐잖니. 옛날 네 아버지가 하던 행동이랑 꼭 닮아서.”

“…….”

“시간이 참 빠르기도 하지….”

중력은 사람의 몸을 아래로 끌어당기고 어떤 감정은 시간보다 빠른 속도로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긴다. 미즈키는 제 피부에 닿는 오래된 천의 질감이나 가만한 체향과 팔 안쪽의 존재감을 느끼고서야 자신이 한 행동을 알았다. 의미는 바로 이해되지 않는다. 아마 어머니도 눈을 깜빡이고만 있을 것이다. 누군가가 본다면 상당히 흐뭇한 마음이 들 풍경 속에서 정작 당사자들이 어리둥절한 목소리를 나누었다.

“미즈키?”

“네.”

“지금 위로해주는거니?”

“아마도요.”

“아마도라니.”

“일단 놀리는 건 아니에요.”

“그렇겠지.”

천천히 침묵이 이어진다. 자신이 벌인 행동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해서 식은땀이 샘솟던 미즈키의 등에 문득 작은 감촉이 닿았다. 가벼운 무게로, 몇 번인가 등을 토닥여주는 감각. 딱히 바라고서 한 행동이 아닌데도 무언가가 전해지는 기분이 든다. 심장 어딘가가 다시금 두근거리는 착각이 일었다. 바보같은 이야기다. 살아있는 사람은 원래 심장이 뛰게 마련인데.

“살다보니 별 일도 다있구나. 네가 엄마를 안아주기도 하고.”

“…그건, 음….”

“아들 낳은 보람이 이런 거겠지.”

어머니가 웃는다. 나이에 걸맞지도 않은 행동을 한 자신을 한 대 때려주고 싶던 마음이 그 소리 하나에 천천히 가라앉아 사라졌다. 하긴 착각이 일든 어떻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남이 본다면 다소 민망스럽겠지만 여긴 우리 집이고 이 사람은 나의 어머니인데. 미즈키가 팔에 조금 더 힘을 싣는다. 어머니가 토닥토닥 말을 이었다.

“미즈키.”

“네.”

“행복하게 살아주렴.“

*

“임종하셨습니다.”

*

그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는 것 같다. 다만 정확한 시기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멀리서 매미가 울었던 것 같기도 하고, 사실은 비가 내렸던 것 같기도 하고, 현관에서 벚꽃잎이 말라가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니 단풍이, 아니 날려온 눈송이가. 온갖 단서와 상념들이 머리 속을 휩쓸다가 지나간다. 잠잠해지다가 다시 휘몰아친다. 장례식이 이어지는 내내 그런 식이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찾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모친의 장례식은 소박하게 치뤄졌으나 미즈키는 '소박하게'의 규모를 파악하는데 살짝 애를 먹었다. 하여간 살면서 장례식에 참여한 적이 그리 많지도 않거니와 전쟁터에서는 장례식이 치뤄질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어제 누구누구를 포함한 몇 명이 죽었다. 모두 모여서 묵념하도록. 했나? 좋아, 끝. 그런 식이었기에 미즈키는 장례 일정이 며칠동안 이어지리라는 말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나마 비용 얘기가 나오면서부터 정신이 돌아온 게 다행이었다.

“아드님이 식을 잘 이끌어주셨으니 고인도 안심하고 잠드실 겁니다.”

몇 명인가의 조문객이 자리를 찾아온다. 승려의 불경 소리가 뺨을 스쳐지나간다. 마지막 발인에 들어가기 전 미즈키는 직원에게 간곡히 부탁하여 관 속에 누운 어머니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마주했다. 한때는 살아서 자신과 이야기를 나눈 얼굴에 죽음의 기색이 진득하게 달라붙어 있었으나 고통스런 주름은 잡혀있지 않았다. 미즈키는 그 모습을 단단히 눈에 새긴 뒤 뒤로 물러섰다. 관이 닫히고 화장터로 운구된다. 그가 직접 긴 젓가락으로 집어낸 뼈와 가루들이 작은 항아리에 담겨 묘지에 안치되었다.

언젠가 나도 여기에 묻히겠지.

그게 비탄인지 안도인지는 구분도 가지 않았다.

돌아왔을 때에는 저녁이 가깝다. 현관문을 열고 복도로 들어온 미즈키는 버릇처럼 거실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장례식장에 아이를 데려올 수는 없다는 판단 아래 키타로를 맡는 것은 그의 아버지와 친근한 요괴 몇몇의 몫이 되어 있었다. 그들이 돌아온 미즈키를 보고는 알아서 자리를 정리하고 떠나간다. 남겨진 말에 의하면 키타로는 유달리 몇 시간 전부터 미즈키를 찾으며 칭얼거렸다고 했다. 모두가 힘을 모아 어떻게든 달래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는 모양이다. 미즈키는 그 말을 가볍게 곱씹어보며 잠든 키타로의 옆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 옆에 앉은 동그란 눈알(물론 이것이 키타로의 아버지다)의 그림자가 어째 평소보다 새카맣게 느껴졌다.

“다 끝난겐가?”

“응.”

“힘들었겠군.”

“키타로, 울진 않았어?”

“…살짝.”

“나중에 달래줘야겠네.”

키타로가 일어나면 불러줘. 미즈키는 그 말만 남기고 제 방으로 빨려들어가듯 걸음을 옮겼다. 아까부터 공연히 집안의 그림자가 짙고 어두운 것 같은데 그게 기분 탓인지 실제로 밤이 가까워지는 탓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리 깊이 신경쓸 필요가 있겠는가. 어차피 이 어둠은 불을 키면 물러갈 것이고 아침이 오면 물러갈 것이고 또 물러간 듯 하다가도 제 시간이 되면 아무렇지도 않게 밀려올 것이고.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겠지.

미즈키, 잘 들어라. 나무를 도끼질 할 때는 가끔 손을 멈추고 귀를 기울여야 해.

어째서?

그래야 나무가 어느 쪽으로 쓰러질 지 가늠할 수 있으니까.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어떻게고 자시고, 깔려 죽을지도 모른다?

남방 어딘가에서 나무가 우직우직 쓰러진다. 거대한 충격음이 울린다. 발밑이 흔들리고 새가 날아간다. 습기가 폐를 채운다. 그리고 뭔가가, 뭔가가 발끝을 저리게하고 머리를 텅 비게 만드는데 정체를 알아낼 수 없었다. 이런 감각을 그곳에서, 모래와 진흙과 죽음이 가득한 그곳에서 분명히 몇 번이고 맛본 것 같은데. 이 어지럽고 차갑고 한없이… 이어지는….

(전원 묵념하도록.)

(했나? 좋아, 끝. 이제)

“미즈키.”

(너희의 슬픔은 끝이다 주어진 명령을 수행해라)

“미즈키.”

(너희의 마음 생각 의지는 무의미하다 복종해라 순응해라 기꺼이 목숨을 바쳐라)

“키타로가 일어났다네.”

고개가 돌아간다. 분명 문을 닫은 것 같은데 다다미는 빠끔히 열려있었다. 키타로는 이제 두 다리로 걷고 뛰고 젓가락을 쥘 수도 있으니 문을 밀어 여는 것 정도야 그리 어렵지도 않겠지. 몸을 움직이려 했으나 작은 발걸음이 다가오는 것이 더 빨랐다. 다다미 위를 달리는 조그마한 아이가 제 바로 앞에서 멈춘다. 어떤 일이 벌어진다. 미즈키의 시야가 그걸 이해하지 못해서 삐걱였다.

"……."

아이의 숨소리가 들린다. 어른의 머리가 느리게 회전했다. 침묵이 너무 길면 좋지 않다. 이런 때에 유용한 것은 비슷한 상황의 대응을 그대로 끌어오는 것이겠지만.

"……."

짧고 오동통한 팔은 모든 걸 이겨낼 수 있다는 듯이 양쪽으로 벌어져 있고 미즈키는 자신에게 팔이 붙어있는 것도 (어쩌면 머리까지도) 잊어버린 사람처럼 굴었다. 이래서야 답답해진 아이가 먼저 움직일 수 밖에 없다. 작은 몸이 폭 부딪치고 부드러운 팔이 자신의 몸을 꼭 붙잡자 서늘한 건지 따스한 건지 모를 체온이 달라붙었다. 먼 동굴에서 뻗어나오는 바람소리가 들린다. 잘 들어보니 자신의 목소리였다.

“키타로.”

“응.”

“…지금 위로해주는거니?”

“응.”

장하구나, 아주 착해. 나도 덕분에 괜찮아졌어. 그런 말을 하면 적당히 얼버무릴 수 있을 텐데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무언가가 꽉 막혀있는 듯한… 아니, 그게 아니라, 사실은 너무 많은 것이 지지대를 잃고 한 번에 무너져내릴 것 같았다. 이 아이는 이렇게나 작고 조그맣고 자신은 제 감정을 충분히 제어할 수 있는 한 사람의 어른인데, 그 몸을 끌어안고서 갈 곳 없는 슬픔을 쏟아낼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번뜩였다. 그것만은 있어선 안되는 일인데 아이는 여전히 온 성을 다해 자신을 다독여주려 하고.

“미즈키여.”

작고 동그란 눈빛은.

“자네 어머님께선 분명 편히 잠드셨을걸세….”

*

“그건 또 무슨 말이에요.”

“부모가 자식에게 늘 품는 생각이지.”

“불길하게.”

“가끔은 울고, 짜증내고, 염증도 내보렴.”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거 맞아요?”

“그러다보면 분명 살아있기를 잘했다고 생각하는 날이 올 거야.”

“…….”

“엄마도 그랬으니까.”

“언제 그랬는데요?”

조그마한 웃음소리….

“지금.”

*

정말 그런 날이 올까. 울다가 절망하다가도 문득 살아있길 잘 했다고 생각하게 되는 날이 정말로 오게 될까. 해가 뜨는 것을 기대하고 바람이 부는 것에 평온함을 느끼고 내일을 기대하게 될 수 있을까. 누군가와 이야기하는 즐거움을 알고 슬픔을 나누는 법을 알고 기쁨을 함께하며 이 땅에서 숨을 쉬는 순간의 소중함을 알고.

(내가정말그렇게될수있을까?)

(엄마가 언제 거짓말 한 적 있니?)

깨닫고 어쩌고 할 사이도 없이 눈가는 뜨겁게 달아오르고 오열은 이미 사방에 가득하고 품에 안긴 온기도 누군가도 어쩐지 같이 훌쩍이는 것 같은데 미즈키는 단 한 사람의 눈물도 닦아내지 못한 채 하염없이 염원한다 바라건데 바라건데 다만 바라건데

선한 사람들은 평온한 곳으로 가기를.

(그럼 살아보기로 할게 거짓말이 아니라고 믿을게)

지금은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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