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삽니다

집 수리하는 날

게나조

篝火 by 므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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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

미즈키는 별 생각없이 마루를 걸어다니다가 뒤꿈치가 꺼지는 감각에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무릎을 구부리고 자세히 보니 뒤꿈치가 닿은 자리가 푹 꺼져 땅이 보였다. 하마터면 걸려서 뒤로 자빠지거나 앞으로 넘어질 뻔했다.

그러고 보니 수리한 지 꽤 시간이 지났지. 미즈키는 구덩이를 피해 건너가면서 생각했다. 헤이세이 시대 개막을 기념해 게게로와 함께 집 이곳저곳을 매만지고 수리했으니, 거의 30년이 되어간다. 덕분에 폐가 수준은 아니지만 꽤나 허름한 집이 되었다. 그나마 고택이라는 느낌이 나는 건 게게로가 이 집에 애착이 있어 매일매일 보살피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아들이 자라고 친우와 함께 여생을 보내는 이 집이 게게로는 어지간히도 좋은 모양이었다.

미즈키는 거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게게로가 외출하면서 일몰 전에는 온다고 했으니, 아마 저녁 시간이 되어서야 올 것이다. 그러면 오늘 당장은 못하겠네. 미즈키는 쟁반을 들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가 돌아올 때까지는 시간이 많으니, 돌아다니면서 수리할 부분을 좀 찾아볼 심산이었다.

역시나 보수공사를 한 지 30년이나 지난 탓에 군데군데 흠이 많았다. 부엌의 가스레인지는 열이 약해졌고, 수돗물도 가늘게 나왔다. 수압이 낮아진 거라면 아마 화장실도 그럴 것이다. 손님맞이 방과 두 사람의 침실, 거실에도 바닥이 꺼지거나 벽이 더러워진 부분이 있었다.

가장 심한 곳은 창고였다. 오래 전 게게로가 요괴 친구에게 받아 놓고 처박아둔 물건들이 기묘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유령족의 기운을 너무 오래 받아 요괴가 될랑말랑한 것들도 있었다. 함부로 버리면 큰일나겠지. 미즈키는 창고를 더 뒤지지 않고 바로 문을 닫고 나왔다. 저기는 게게로의 도움이 절실해 보이니까 패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쓰던 것들이, 집을 고치기로 마음 먹고 보니 흠으로 보였다. 지금까지 별 문제 없이 살았는데 그냥 둘까? 싶지만 언제 다른 문제가 생겨 큰일이 날지 모른다. 게다가 이 집에는 에어컨도 없고, 난방이라고는 이로리에 의존하고 있지 않은가. 내진설계도 현대 기준에 맞추어 되어 있는지 모를 일이다. 아, 왠지 거대한 공사가 될 거 같은데. 미즈키는 귤을 까먹으며 푹 한숨을 내쉬었다.

“다녀왔네 미즈키~.”

“게게로? 해 지기 전에 온다며?”

예상 외로 이른 귀가에 미즈키는 아닌 척 반가워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게게로는 들뜬 미즈키의 표정을 보고는 오호호, 웃었다.

“지금도 해 지기 전 아닌가.”

“그, 그렇긴 하지. 그런데 너 보통은 그 즈음 돌아오잖아. 나 심심하다고.”

“그러게 미즈키도 같이 가면 좋을 것을.”

그놈들 너무 부담스럽다고…. 미즈키는 중얼거리면서 시선을 돌렸다. 요괴와 음양사 사이에서 미즈키는 그야말로 소문 속의 사내이다. 요괴나 음양사를 만날 때마다 온갖 질문 공세와 관심이 퍼부어지다보니 곤란한 상황을 마주할 때도 있었다. 그게 피곤해서 그들에게 얼굴을 보이지 않다 보니, 시간이 지나면서 소문이 과장되어버려 이제는 진짜로 가면이라도 쓰지 않는 한 그들의 모임에 끼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미즈키가 그 소문 때문에 친한 요괴 외에는 만나려 하지 않는 걸 알기에 게게로도 같이 가자고 보채지는 않지만, 이따금 이런 식으로 꼬실 때가 있었다. 이런 날은 보통 둘 중 하나다. 요괴 모임에 갔다가 미즈키에 대해 안 좋은 소문을 들었거나, 아니면 요괴로부터 아주 좋은 것을 받았거나.

“뭐, 됐고. 오늘은 뭘 받아온 거야? 짐이 한가득인데.”

“음. 히네즈미가 며칠 전 효고 현에서 열린 잔치에 갔다 왔다면서 남은 음식을 주었다네. 참새들이 만들었다니 아주 별미일 걸세.”

“참새면 텐구 쪽인가? 아니면 시타키리스즈메?”

“시타키리스즈메 쪽 일가일세.”

일전에 시타키리스즈메 일가를 도와주고 밥을 얻어먹은 적이 있었기에 미즈키는 바로 화색이 되었다. 오오, 기대가 되는데. 미즈키는 게게로가 싸들고 온 찬합을 가지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찬합을 하나씩 열어보니 모두 반지르르해 입맛이 돌았다. 오늘 저녁은 이것만 먹어도 배가 차겠는데. 차곡차곡 냉장고에 넣는데 마루 쪽에서 우지끈 소리가 들렸다. 맞다, 마루! 미즈키가 급히 밖으로 뛰쳐나가며 말했다.

“아, 마루에 꺼진 부분이 있는데…, 이미 늦었군.”

“미즈키여, 나 좀 꺼내주게나.”

방금 전 미즈키가 밟은 자리에 게게로가 푹 하고 꽂혀 있었다. 하필이면 집이 낮은 탓에 어정쩡하게 박혀서 나오지 못하고 멀뚱히 미즈키만 쳐다보고 있었다. 아, 저거 꺼내려면 다른 마루도 부숴야 하는데. 미즈키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마루를 깰 도끼를 찾으러 창고로 향하자 게게로가 말했다.

“…그냥 제자리뛰기를 하면 빠지지 않을까 싶네만.”

“지붕까지 아작낼 생각 있어?”

물론 수리를 하기로 마음을 먹긴 했지만, 기물을 다 부수고 시작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집 수리하는 날

“아무튼 그래서, 집 수리를 할 거야.”

미즈키는 참새 일가가 해준 밥을 먹으면서 게게로에게 진지하게 말했다. 게게로는 입안 가득 담은 밥을 우물거리면서 물었다.

“음, 그럼 언제 즈음 할 건가?”

“일단은 나무며 슬레이트 판 같은 걸 다 모아야 하니까…, 족히 일주일은 걸리지 않을까?”

“철물점과 목수 일을 하고 있는 요괴들에게 물어보지. 인부는 오니가 괜찮겠나?”

음, 오니라. 미즈키는 5년 전 수해로 난리가 난 정원을 치울 때 도움을 주었던 오니를 떠올렸다. 힘은 장사였지만 성격이 영 그랬지…, 오죽하면 사태를 보러 온 키타로가 살짝 눈살을 찌푸릴 정도로. 미즈키는 규동을 목구멍으로 넘기며 떨떠름함을 표했다.

“그 녀석 너무 거칠어서 별론데…, 이 계절이면 갓파를 써도 괜찮지 않겠어?”

“흠, 갓파 녀석들은 슬슬 동면기에 접어들 때라 어려울 듯한데. 히네즈미 녀석에게 도와달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너구리 군단에게 사정해도 되고. 그런데 일급을 어떻게 줘야 하지?”

“자고로 요괴는 맛있는 술과 음식이 제일이지. 아직도 인간처럼 생각하는겐가 미즈키여.”

그러면서 게게로는 태평한 얼굴로 눈앞에 있는 장어를 먹어치웠다. 힘 쓰는 일이 생길 줄 알고 미리 넣어둔 건가, 미즈키는 허무맹랑한 생각을 하면서 게게로가 제 몫이라며 따로 빼둔 장어를 우물거렸다.

“아, 그리고 이번에는 에어컨이랑 보일러도 설치할까 생각 중이야.”

“뭣이! 드디어 우리도 문명의 이기를 누리며 사는 건가!”

지난 여름에 게게로가 땀을 흘리며 힘들어하던 것이 생각나 덧붙이자 게게로가 과하다 싶을 만큼 들떠서 말했다. 술이라도 한 잔 걸쳤으면 그 자리에서 일어나 기괴한 요괴 춤이라도 추었을 기세다. 이렇게 좋아하는데 진작 설치해줄걸 그랬다며 미안한 마음이 고개를 들었다.

앞으로는 에어컨이나 난방 기구 없으면 지내기 좀 힘들 것 같고…, 말을 흐리자 게게로는 착한 생각을 했다며 미즈키를 끌어안았다. 떨어지라며 게게로를 밀쳐내고 싶지만 손에 음식을 들고 있어 그럴 수도 없었다. 미즈키는 거대한 사내를 등에 달고 음식을 빠르게 해치웠다.

“그러면 다른 요괴들에게 전해줘. 일주일 뒤에 미즈키가 집 수리를 하니까 시간이 비는 녀석은 꼭 와서 도와달라고.”

“하모, 다들 분명 팔을 걷어붙이고 도우러 올 게야.”

게게로는 고개를 정신 사납게 끄덕이며 맞장구를 쳐주었다. 알았으니까 일단 밥부터 마저 먹자. 미즈키는 그러면서 계란초밥을 집어들었다.


미즈키와 게게로가 집을 수리한다는 이야기는 이틀도 채 되지 않아 일본 전역에 있는 요괴들에게 퍼져 나갔다. 온갖 요괴들이 미즈키의 집으로 몰려들면서 재료 수급도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어느 산에서 백 년 묵은 나무를 베어오거나(이러면 나무의 정령에게 미움을 사는 거 아닌가, 미즈키는 잠깐 등골이 오싹해졌다), 좋은 흙으로 만든 기와 수백 장을 지고 온 이들 덕분이었다.

오랫동안 요괴들의 집을 만들어주었던 땅두더지는 들뜬 표정으로 새 집 설계도를 무려 열 개나 만들어 가져왔으나 전부 미즈키에게 반려당했다. 둘밖에 안 사는데 3층짜리 빌라는 너무하지 않은가. 게게로가 유일하게 마음에 들어한 개량 나가야가 채택되었다. 그늘이 길게 드리워지니 여름에도 마루에서 술을 마실 수 있겠다는 이유였다. 미즈키도 그 의견에는 찬성이었다. 하여튼 술주정뱅이들이세요, 땅두더지가 시무룩하게 설계도를 말면서 중얼거렸다.

아버지들이 거하게 일을 벌렸다는 소식에 키타로도 게게게의 숲을 나와 오래만에 옛집에 들렀다. 키타로는 마당을 다 채우고도 모자라 길가까지 나와 도열한 요괴 무리를 보고 중얼거렸다.

“백귀야행이 따로 없네요.”

“미안하다, 그냥 도와줄 요괴를 찾는다는 게….”

“음, 그래도 수리할 동안에는 시끌벅적하니 외롭지는 않을 듯하네!”

그게 문제가 아니라 주변에서 민원이 들어오지 않을까. 미즈키는 자신의 집으로부터 약 1km 떨어진 곳에 있는 아파트 단지가 쏟아낼 항의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키타로가 머리를 굴리더니 좋은 수를 하나 생각해냈다. 조마조마한 인간의 속도 모르고, 요괴들은 오랜만에 잔치가 벌어졌다며 즐거워하기만 했다.

설계도를 확인하던 키타로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말했다.

“그런데 미즈키 씨, 나가야로 하면 난방이나 냉방이 어렵지 않을까요?”

“그래서 겨울에는 마루에 작은 난로를 두고, 여름에는 서큘레이터를 설치하려고. 마루 전체를 데우거나 식힐 필요는 없으니까.”

“그래, 술 마실 때만 잠깐 꺼내면 되지.”

게게로가 옆에서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잘한 인테리어를 수정하고 있던 땅두더지가 물었다.

“거실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음, 거실에 에어컨을 다는 게 낫나, 아니면 그냥 방에?”

“난방을 각 방에 설치하고 에어컨은 손님방과 거실에 두는 게 어떠한가. 어차피 이전에도 여름이 되면 거실에서 자지 않았나.”

“그건 거실이 제일 바람이 잘 통했으니까 그렇지. 그런데 난방은 왜 거실에 안 깔고?”

“그야, 나베는 이로리로 만들어 먹어야 진국이지 않나. 코타츠에 나란히 앉아 귤을 먹는 것도 재미가 있고.”

“아, 그건 그렇지.”

이로리에 해 먹는 전골과 코타츠에 앉아서 먹는 귤. 겨울은 아직이건만 생각만 해도 벌써 군침이 돈다. 미즈키는 흘러나올 뻔한 침을 꼴깍 삼키면서 말했다.

“아, 그리고 가스 공사랑 내진 설계도 다시 해야 해. 최근에 이곳저곳에서 지진 소식이 나다 보니까 걱정이 되더라고.”

“음, 우리의 소중한 집이 무너지면 안 되지. 안 되고 말고.”

“게다가 내가 있을 때 나면 잔해에 깔려서 죽는단 말야. 안 돼.”

“죽지 말게나 미즈키!”

죽는다는 이야기를 꺼내기 무섭게 게게로가 눈물을 펑 하고 터트렸다. 애굣살 있는 사람은 툭하면 눈물을 흘린다는 낭설은 대체 어디에서 나온 거야. 나보다 저 녀석이 더 많이 우는데. 미즈키는 급히 손수건을 꺼내 게게로의 뺨과 눈가를 벅벅 닦아주었다.

“알았어 알았어. 안 죽을게. 100년이 지났는데도 안 죽었으니까 괜찮아.”

“만약에 죽는다면 내 피를 먹여서라도 살릴 걸세.”

“아니, 그건 좀….”

“그럼 그대로 죽을 거란 말인가 미즈키!”

“아니 얘기를 끝까지 들어!”

미즈키는 손수건으로 눈가를 닦아주다 말고 호통을 쳤다. 아버지들의 무의미한 말싸움에 키타로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제 방으로 들어갔다.


본격적인 수리에 들어가기 이틀 전, 미즈키는 애써 외면하던 창고를 개방했다. 창고 안을 흘긋 바라본 게게로는 휘파람을 불면서 나지막히 감탄했다.

“요사스러운 게 많네만.”

“다 네가 갔다 놓은 것들이거든?”

“흠, 여기 있는 것 몇 개를 팔았으면 수리 비용을 쉽게 벌었을 것도 하군.”

게게로는 태평하게 말하고는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위험한 건 네가 알아서 처리해, 그렇게 말한 다음 미즈키는 손전등을 입에 물고 닥치는 대로 물건을 꺼내기 시작했다. 부모님의 유품이 담긴 상자, 키타로의 장난감, 게게로의 옛날 옷들과 이제는 불을 붙일 수 없는 등, 너무 낡아버린 선풍기와 도자기로 만든 재떨이.

한참 정리하던 중 곰방대를 발견하곤 미즈키는 피식 웃었다. 50년 전 게게로가 오니가 쓰던 물건이라며 주워온 것이다. 무슨 요술이 걸려 있다고 했는데 잘 기억나지 않았다. 이건 내가 함부러 건드렸다가 무슨 꼴이 날지 모르니 일단은 보류하고. 미즈키는 팔을 걷어붙이고 계속 창고 정리를 했다.

그 사이 게게로도 요사스러운 물건을 얼추 정리해가고 있었다. 거짓말을 한 상대를 가둘 수 있는 상자, 카라스텐구의 술을 담았던 병과 두레박불을 담아서 썼던 호롱불, 영력으로 작동하는 텔레비전과 여름에 함께 덮고 자려고 했다가 독 때문에 포기한 도롱이 이불 등은 하나로 모아 거대한 보자기에 꽁꽁 쌌다. 이것들은 다음에 요괴 시장에서 팔면 꽤 좋은 값으로 팔릴 것이다. 그렇게 벌어들인 사금으로 미즈키에게 괜찮은 술잔을 선물해줄까. 상상만 해도 입꼬리가 실룩거리고 콧노래가 나온다.

“미즈키여, 이쪽은 거의 다 되었네만….”

게게로가 창고 밖으로 두 보따리를 꺼내며 미즈키를 돌아봤다. 미즈키는 어떤 통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미즈키가 입에 문 손전등이 아니었으면 게게로 역시 제가 예전에 방범용으로 주워온 벌레통인 줄 알고 가볍게 넘겼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런 상냥한 종류의 물건이 아니었다. 게게로는 순식간에 미즈키에게 다가가 그의 손에서 죽통을 낚아챘다. 갑자기 나타난 게게로 때문에 미즈키가 놀란 가슴을 갈무리할 새도 없이, 게게로가 서늘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대, 이걸 열었나…?”

“아, 아니? 방금 발견했는데, 살짝 열려 있길래 뭔가 하고 들여다 보려다가….”

“안을 보진 않았지.”

“않았어, 않았어. 까매서 애초에 아무것도 안 보였는….”

손사래를 치던 미즈키의 코에서 주륵, 하고 뜨뜻한 핏물이 흘러내렸다. 미즈키와 게게로는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았다. 젠장, 미즈키가 욕을 뱉어내자마자 게게로가 죽통 뚜껑을 닫고 생체 전류를 흘려보냈다. 안에서 시커먼 울음소리와 악에 받친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 수십, 수백 명의 갓난아기가 동시에 우는 듯한 굉음에 미즈키는 귀를 막고 물러섰지만 머리가 깨질 것 같은 통증은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미즈키는 웅크리고 앉아 소란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생체 전류를 맞고 기절한 건지 원령의 울음소리가 잦아들었다. 게게로는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낸 다음 죽통에 ‘禁’자를 새기고 바로 미즈키의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 완전히 노출된 건 아닌지 코피 외에 다른 이상은 없어 보였다. 게게로는 혹시 몰라 미즈키의 손전등으로 자신의 손을 비추면서 세 손가락을 펼쳐 보였다.

“미즈키, 이거 몇 개로 보이나?”

“으윽…, 당연히 세 개지. 날 바보로 알아?”

이제 곡성 정도로는 기절하진 않는지 미즈키는 바로 벌떡 일어나 게게로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았다. 에구, 기껏 걱정해 주었더니. 게게로가 속상한 듯이 웅얼거리자 미즈키는 바로 미안한 낯빛을 띠며 어깨를 다독였다. 아니, 그런 게 아니고 나는 놀리는 줄 알았지. 내가 정신이 나갈 때마다 네가 장난 친 게 어디 한두 번이냐…. 그러나 이번에는 정말로 속이 상했는지 쳐다보지도 않는다. 아씨, 곤란한데. 달랠 방법이 생각나지 않아 애먼 뒤통수만 벅벅 긁고 있을 때 키타로가 튀어나왔다.

“아버지들! 괜찮으세요? 요괴 레이더에 험한 게 감지되어서…!”

“어, 어어. 다행히 잘 수습했어. 그래서, 그건 대체 뭐였어?”

미즈키는 키타로의 놀란 가슴을 진정시켜주고 죽통에 대해 물었다. 화제를 바꾸자 이제는 대화할 생각이 들었는지 게게로가 유카타 안으로 팔을 넣어 팔짱을 끼면서 말했다.

“으음, 라는 것일세.”

“태자귀?”

“새타니나 염매라고도 하는데, 조선의 원귀일세. 조선 사람들은 아이의 영혼이 신에 가깝다고 하여 동자신을 강한 신으로 모셨는데, 그 동자신을 억지로 만들기 위해 아이를 갖은 방법으로 잔인하게 죽여 만든 게 바로 이들일세. 우리 쪽으로 치면 코토리바코와 비슷한 걸세.”

“으엑, 신력을 얻겠다고 아이를 죽여?”

미즈키는 역겹다는 듯 혀를 내밀었고, 키타로도 안색이 흐려졌다. 게게로는 죽통을 바구니에 넣으며 말했다.

“저 죽통에는 희생당한 아이들의 손가락이 담겨 있다네. 손가락에 혼을 봉인해 귀신으로 부렸던 게지. 신사에 맡겨 성불시킨다는 것을, 여기에 넣어두고 깜빡 잊었나 보오.”

“그런 건 제때제때 해결하라고! 갇힌 애들이 불쌍하지도 않냐!”

미즈키가 호통을 치며 게게로의 뒤통수를 또 한 번 주먹으로 때렸다. 아이고, 오늘은 유독 주먹이 맵군, 아프지 않으면서 게게로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머리를 매만졌다. 키타로는 아버지들만 두어선 안 되겠다고 판단했는지 따라 팔을 걷어붙였다.

“저도 도울게요. 버릴 것과 놔둘 것만 구분하면 되는 거죠?”

“오, 도와주게? 우리 아들이 언제 이렇게 씩씩하게 자랐담.”

“암, 누구를 닮았는데.”

흐뭇해하는 아버지들 때문에 키타로는 차마 본심을 말할 수 없었다. 그저 배시시 웃으면서 창고 정리를 시작할 뿐이었다.


창고도 다 정리했겠다, 드디어 집을 수리하는 날이 밝았다. 키타로는 서양 요괴에게 배운 결계술로 집 위에 결계를 둘렀다. 이걸 둘렀으니 인간이 멋모르고 들어오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허리에 손을 짚고 말하는 것이 꼭 칭찬을 바라는 아이 같아 머리를 쓰다듬었더니 화들짝 놀라며 멀어진다. 그러고 보니 인간 나이로는 벌써 70살이지, 미즈키는 미리 구해온 <공사중> 팻말을 머쓱하게 치웠다.

땅두더지는 정말 오랜만에 요괴의 집을 짓는다며 신이 났다.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그들의 습성을 생각하면 땅두더지의 들뜸도 이해가 되었다. 여기저기에서 활기차게 일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오니들은 가장 크고 무거운 것을 날랐고 발이 빠른 이들은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공구와 재료를 옮겼다. 기둥과 주춧돌이 세워지고 서까래가 올라가 지붕 틀이 갖추어지자 갓파들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기와를 놓았다. 바닥에는 보일러를 깔고 벽에는 에어컨 설치를 위해 전선을 놓았다. 그 위로 고급 참나무로 만든 자재를 올리고 하얀 벽지를 발랐다. 미즈키가 카페를 운영하면서 번 돈과 게게로가 요괴를 도우면서 받은 사금을 털어 만든 에어컨이 방에 설치되고, 거실엔 대장간에서 태어난 츠쿠모가미가 만든 이로리가 걸렸다.

미즈키와 게게로는 현장을 돌아보며 인부에게 지시를 내렸고, 키타로는 도움이 필요한 요괴들에게 손을 빌려주었다. 서까래를 들고 걸어가는 키타로를 보고 미즈키는 그를 도와주려다가 도리어 키타로를 서까래와 함께 달랑 들어올리고 말았다. 뒤를 돌아본 미즈키는 허공에 들려서 발을 허우적거리는 키타로를 보며 폭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와하학! 키타로, 그 나이 먹고도 이렇게 작아서 어떡해~. 저번에 보니까 네코무스메가 너보다 크더라!”

“놀리지 마세요….”

“게게로, 너도 이와코 씨 만나기 전까지 이렇게 작았어?”

“흠, 오랜만에 아내의 이름을 들으니 그립구먼. 내가 아내를 만났을 때는 말일세…,”

“아, 그건 오늘 일 끝나고 술 마시면서 들을게.”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아 미즈키는 말을 끊어버렸다. 게게로는 너무하다고 투덜대면서도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위로했다.

“걱정 말거라 키타로. 너도 운명의 사람을 만나 잘 보이고 싶다는 마음이 들면 이 아비만큼 자랄 게다. 못해도 미즈키만큼 자라야 하지 않겠느냐?”

아무래도 마지막 말은 나 들으라고 한 소리 같은데. 네가 무식하게 큰 거지 나 정도면 그래도 쇼와 시절에는 큰 편이었다고. 미즈키는 묘한 짜증을 숨기고 일을 전두지휘했다. 키타로는 두 아버지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이고는 할 일을 찾아 뒷마당으로 향했다.

마당에선 작은 요괴들이 정원과 텃밭을 꾸미느라 정신이 없었다. 토끼 요괴들은 밭을 갈고 있었고, 오리들은 잔디를 심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까치들이 감나무를 심을 위치를 두고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고, 코다마와 요부코들은 작은 몸을 합쳐 나무를 나르고 있었다.

어느 새 게게로와 미즈키도 다가와 천천히 모습을 갖추어 가는 마당을 바라보면서 세세한 주문을 넣고 있었다. 아, 연못은 안 만들어도 된다네. 어, 라일락은 좀 더 왼쪽에 심는 게 나을 거 같은데. 키타로는 완성된 마루에 앉아 쉬다가, 왜가리가 물고 온 묘목을 보고 미즈키를 불렀다.

“미즈키 씨, 저거….”

“응? 어라?”

미즈키의 반응에 게게로도 같은 곳을 보았다가 순간 몸을 굳혔다. 여름이라 초록잎만 무성히 나 있지만 그들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봄이면 연분홍빛 꽃잎을 흐드러지게 피우는 나무, 벚나무였다.

미즈키는 순간적으로 게게로의 낯빛을 살폈다. 자신도 그렇지만, 게게로는 특히 벚나무가 달갑지 않을 것이다. 동족의 피를 뽑아먹고, 아내를 빈사 직전까지 몰아넣어 시한부로 만들고, 뱃속에 있던 키타로까지 위험하게 만들었던 구덩이 속의 피벚꽃. 그 후로 게게로는 벚꽃이 한창 피는 봄이 되면 외출을 꺼렸고, 지금도 어딘가에서 벚꽃잎이 날아오면 몸을 움츠리곤 했다.

역시나 게게로의 표정이 굳었다. 미즈키는 텃밭을 뒤로 하고 왜가리에게 다가가 항의했다.

“이봐, 내가 벚나무는 안 심겠다고 한 거 같은데. 어떻게 된 거야?”

“엑? 난 복숭아나무랑 버드나무만 안 심는다는 줄 알았는데?”

“분명 벚나무도 있었어. 봐봐, 여기 계약서 세 번째 줄에 보면….”

“이미 가져왔는데 어쩌겠나, 그냥 심으세.”

의외의 말이 게게로의 입에서 떨어졌다. 미즈키는 한달음에 게게로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짚으며 진지하게 물었다.

“너 정말 괜찮아? 아직도 벚꽃 보면 흠칫거리는 주제에. 봄이 되면 저 꽃잎이 집안 곳곳에 날릴 걸?”

“음, 그래도 괜찮을 걸세. 무엇보다 그 때문에 미즈키가 좋아하는 벚꽃 구경을 한 번도 못 가봤지 않은가.”

게게로가 부드럽게 웃으면서 미즈키를 바라봤다. 그건, 그렇지만…. 미즈키는 시선을 피하면서 말을 흐렸다. 민망한 기분이 들면 뒷목을 매만지는 버릇은 70년이 지나도 고쳐지지 않는 모양이다. 게게로는 흐뭇하게 웃으면서 왜가리에게 벚나무는 앞마당에서 툇마루와 가장 가까운 곳에 심어달라는 주문을 넣었다.

미즈키는 계속 뒷목을 쓸어내리면서 어쩔 줄 몰라했다. 벚꽃 구경을 좋아하는 것도 맞고, 게게로와 같이 봄이 왔음을 느끼고 싶었던 것도 맞지만, 그 꽃이 게게로에게 안 좋을 기억을 계속 상기시켜준다면 평생동안 그 즐거움을 포기할 수 있었다. 정 보고 싶은 날에는 혼자 다녀오면 되었으니까. 그런데 게게로는 또 미즈키의 즐거움을 줄일 수 없다는 이유로 집안에 기꺼이 벚나무를 들였다. 나 참…. 미즈키는 부끄러움에 중얼거렸고, 툇마루에 앉아 턱을 괴고 아버지들을 바라보던 키타로는 따라 옅은 미소를 지었다.

왜가리가 가져온 벚나무는 그렇게 앞마당 툇마루 양 옆에 자리를 잡았다. 5년만 있으면 금방 자라서 멋진 꽃을 피울 걸세. 게게로는 벚나무 묘목의 가지를 쓸면서 웃었다. 미즈키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어색한 미소를 따라했다. 얼쑤 얼쑤, 좋은 날이야~. 요괴들이 집을 수리하며 내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요괴들의 도움으로 사람을 불렀으면 일주일은 족히 걸렸을 수리가 무려 이틀 만에 끝이 났다. 새로운 집에서 게게로는 텐구가 빚은 술과 참새 요괴들이 만든 음식을 잔뜩 꺼내 요괴에게 대접했다. 의도치 않게 요괴의 잔치가 벌어졌다. 마침 맑은 밤하늘에 보름달도 걸렸겠나, 청취가 이리 좋을 수 없었다.

어린 요괴는 방에 넣어 재우고, 얼큰하게 취한 요괴들은 마당에 대자로 뻗어 저들끼리 노래를 부르거나 훌쩍이거나 웃거나 잠들었다. 집주인인 게게로의 경고와 미즈키의 일갈 덕에 싸우면서 소란을 피우는 요괴는 없었다. 키타로는 오렌지 주스를 받고는 입술을 비죽였다.

“저도 성인인데요.”

“성인은 무슨, 훌쩍 자라서 와라.”

미즈키가 손을 휘휘 저으며 시원하게 웃었다. 오늘만 벌써 두 번째, 성장으로 놀림을 받았다. 키타로는 괜히 퉁명스럽게 웅얼거렸다. 그게 어디 제 마음대로 되나요…. 고부토리지상에게 아내 이야기를 하며 훌쩍이던 게게로가 아들과 어깨동무를 하며 진지하게 말했다.

“걱정 마라 키타로. 아버지도 너처럼 꽤 오랫동안 아이의 모습이었단다. 하지만 네 어머니를 만나고 이렇게 자랐지. 어느 날, 평소처럼 그와 함께 한밤중에 강변을 걷다가 나는 문득 깨달았지. 이 사람이 없으면 안 될 거 같다고. 이 사람에게 듬직하고 멋진 사람이 되고 싶다고. 그랬더니 다음 날, 갑자기 훌쩍 커졌지. 문제는 너무 커져서 옷이 안 맞았던 게야. 하지만 나는 그보다 드디어 이와코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었다는 게 기뻐서 바로 자리를 박차고 나갔지. 그 차림으로 이와코를 만나러 갔으니, 그도 퍽이나 놀랐을 게야. 하지만 네 어머니는 내 옷차림따위 신경도 쓰지 않았단다. 오히려 함께 내 성장을 축하해주고….”

“어어, 그래그래.”

구구절절 이어지는 게게로의 러브 스토리에 미즈키는 진절머리를 치며 적당히 끊어주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게게로는 아들을 붙잡고 사랑론을 주절거렸다.

“키타로, 모든 사람에겐 운명의 상대가 있는 법이란다. 그것을 만나면 바로 알아볼 수 있고, 보이지 않던 게 보이지. 비록 미즈키는 그것을 찾지 못하고 나와 함께 꼼짝없이 70년을 보냈지만….”

“어이. 누구 때문인데.”

미즈키는 짜증스럽게 대꾸하고는 게게로에게 술병을 내밀었다. 게게로는 어느 새 빈 잔을 바라보고는 가득 따라달라며 미즈키에게 내밀었다. 미즈키는 부족하지 않게 잔을 채워주고는 제 잔을 내밀었다.

“그래도 뭐, 누구 덕분에 나쁘진 않았어.”

“오호, 솔직히 자네도 싫지 않았나 보지?”

“그럼. 그러니까 내가 죽을 때까지 같이 이 집에서 살아야 한다?”

“벌써 죽을 생각을 하는 겐가! 아직 백 년 밖에 안 되었는데?!”

“아니, 인간 기준으로는 벌써 백 년이라고….”

누가 울보 아니랄까봐 역시나 터진 눈물주머니에 미즈키가 어이 없는 미소를 지으면서 잔을 맞댔다. 새단장한 집에서 처음 나누는 건배 소리가 꽤나 경쾌했다.

오늘은 달도 밝은 것이 기분 좋게 취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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