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말리는 시간
게나조, 약 치치미즈
트위터 썰 기반
9월이 된 지 오래인데, 여전히 날이 덥다. 미즈키는 앓는 소리를 내며 툇마루에 털썩 드러누웠다. 지구온난화가 심각하다지만 이건 너무하지 않나 싶다. 태양과 지구가 인간을 녹이기로 작정한 듯하다. 마침 욕실 문이 열리면서 게게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게게로는 수건으로 대충 머리카락을 틀어올린 채 마당으로 나오며 미즈키에게 핀잔을 주었다.
“미즈키여, 그렇게 누워 있으면 감기 걸리네.”
“넌 덥지도 않냐…. 안 덥겠지…. 유령족이니까….”
“그렇다면 자네도 아예 요괴가 되는 게 어떤가? 겨울에는 춥지 않고 여름에도 덥지 않은 이 쾌적한 삶! 그야말로 자네가 부러워하는 삶 아닌가!”
“요괴가 되어서 개구리 눈알을 먹어야 한다며 사양할게.”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군, 진미 중의 진미이거늘…. 매몰찬 거절에 게게로는 입술을 비죽이며 수건을 풀었다. 이 살인적인(혹은 살요적인) 더위에도 꿋꿋하게 기르고 있는 머리카락이 물기를 머금어 무겁게 툭 떨어졌다. 목덜미가 젖음에도 아랑곳않고 마당으로 나간 게게로는 허리를 숙이더니 목욕을 마친 강아지처럼 사방으로 고개를 털어댔다. 인지를 초월한 속도에 놀란 물방울이 이곳저곳으로 뛰쳐나갔고, 순식간에 물기가 날아가고 금방 부드러운 머리카락으로 돌아갔다.
벌써 70년 째, 이 같은 기묘한 유령족의 머리 말리기 광경을 보고 있는 미즈키는 더 이상 신기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저 모습을 볼 때마다 키타로는 제대로 머리 말리는 법을 알려줘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디 가서 키타로도 저런 식으로 머리를 털었다면 또래한테 미움을 받았겠지…. 분명 몇 번이나 수건 혹은 드라이기를 써서 말리라며 직접 시범도 해줬건만 게게로는 이쪽이 더 편하다며 들어먹지를 않았다. 수백 년 동안 저 방식을 고수해왔으니 70년 만에 고치는 게 어려울 만도 하지만, 저러다가 이웃에게 들켜서 소문이라도 돌까봐 두렵다. 안 그래도 유령이 나오는 집이라고 은은하게 말이 돌기 시작했는데 말이지(실제로 유령족이라는 요괴가 살고 수시로 요괴가 놀러오는 집이니 거의 맞는 말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게게로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어내리며 다가오자 미즈키는 더위를 먹어 무거워진 몸을 일으켜 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툇마루로 나온 그의 손에는 게게로가 두고 나온 수건과 드라이기, 보어 브러쉬가 들려 있었다. 예전에 별 생각없이 일자빗으로 머리카락을 빗어주었다가 잔머리 폭탄을 받게 된 후로 애용하게 된 녀석이다. 미즈키가 자리에 앉아 바닥을 두드리면, 게게로는 주인의 부름을 기다린 고양이마냥 그 앞에 털썩 앉아 아무 의심 없이 머리카락을 미즈키에게 맡겼다.
지금부터는 미즈키의 시간이다. 미즈키는 수건으로 남은 물기를 털어낸 다음, 보어 빗으로 한 번 대강 빗어주었다. 얇은 모발은 살에 걸리지 않고 부드럽게 빠져나와 끝으로 떨어진다. 햇빛을 받은 은발이 보랏빛으로 반짝였다. 대강 정리해주면 긴 콘센트를 끌어와 드라이기를 꽂은 다음 수분을 날려준다. 여름이라면 드라이기를 쓸 필요 없이 바람과 더위에 맡기면 되지만 환절기에 제대로 말리지 않으면 감기에 들기 쉽상이다. 설마 요괴가 감기에 걸리겠어, 라고 안일하게 생각했다가 인플루엔자에 걸렸던 시절을 떠올리고 미즈키는 혼자 큭큭 웃었다.
수분이 적당히 날아갔다 싶으면 드라이기를 끄고 다시 빗으로 정돈해준다. 미즈키는 버석하다싶을 만큼 말리는 편이지만 게게로는 그렇게 했다간 머리카락이 상하기 쉬워 적당히 포근한 느낌이 남을 때까지만 말리고 마지막 단계에 돌입한다. 바로 이 순간이 미즈키가 가장 평화롭고 행복한 시간이다. 느긋하게 게게로의 긴 머리카락을 빗어내리며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시간. 게게로는 아침에 목욕을 하기 때문에, 이때는 언제나 새소리를 들을 수 있다. 새가 날아다니고, 햇빛은 아직 부드러운 적당한 시간. 미즈키의 손길이 점점 느려진다. 게게로가 점점 멈추는 손을 눈치채고 미즈키를 깨운다.
“자면 안 되네 미즈키.”
“안 잤어. 잠깐 존 거야.”
“그게 그거 아닌가.”
이 평화로운 시간의 유일한 단점이라면 너무 느긋한 나머지 잠까지 솔솔 온다는 점이다. 미즈키는 게게로의 말을 부정하듯 고개를 빠르게 털고 다시 빗질에 집중했다. 대체 뭘 하면 그렇게 머리카락을 무식하게 털고 툭하면 산과 들을 쏘다니는데도 머리카락이 고운지 모르겠다. 손가락 사이로 소리없이 흘러내리는 부드러운 모래알 같은 느낌.
미즈키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빗을 내려놨다. 능숙하게 머리카락을 여섯 갈래로 나누어 척척 땋은 다음 손목에 끼운 머리끈으로 끝부분을 살짝 묶어준다. 무릎 위에 대기하고 있던 비녀로 두 번, 세 번 말아 똬리를 틀어 꽂아주면 세팅 끝이다. 미즈키가 비녀를 사준 후로 요괴 시장이 열릴 때마다 조금씩 모았더니, 어느 새 한 바구니를 차지할 만큼 늘어났다. 안 쓰는 건 나눔을 하자고 미즈키가 말해도 게게로는 다 자네가 사준 것인데 어찌 함부로 하냐고 고집을 꺾지 않았다. 미즈키는 게게로의 쪽진 머리를 조심스럽게 만져보다가, 고개를 내밀어 물었다.
“내일은 만두머리 한 번 해볼래?”
“그건 또 어디에서 배워온 스타일인가.”
게게로는 최근, 자신의 동거인이 딸을 가진 아빠마냥 자신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노는 데 재미가 들렸다고 확신했다. 처음에는 평범하게 비녀를 꽂다가, 어느 순간부터인가 기교가 하나씩 들어가더니 급기야는 비녀와 상관없는 헤어스타일까지 배워와서 게게로에게 실험을 했다. 게게로야 어떻게 하든 상관 없다는 태도였지만 뭐랄까…, 마치 인형놀이를 당하는 것 같은 기분이랄까. 이런 느낌은 아내가 주말마다 백화점이라는 곳에 끌고 가 이 옷 저 옷을 입혀보던 그 시절의 것과 똑같았다.
“아, 게게로. 아직 물 안 버렸지? 그럼 나도 씻으러 들어가야겠다….”
미즈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갈아입을 옷을 들고 나가는 그의 등에 대고 게게로가 말했다.
“다 씻으면 말해주게. 나도 그대 머리를 말려줄 테니.”
“엥? 굳이?”
이건 대체 무슨 대답이지? 게게로는 한 대 얻어맞은 표정으로 미즈키를 바라봤고, 미즈키 역시 말 그대로 ‘굳이 그런다고?’라고 되묻는 표정으로 게게로를 쳐다봤다. 미즈키가 뜸을 들이며 말했다.
“아니…. 내 머리 만질 게 뭐가 있다고. 너처럼 긴 것도 아니라 금방 마르는데.”
“하지만…, 하지만 그대도 내 머리카락을 정성껏 말려주지 않는가.”
자네가 내 머리를 만지는 것이 좋으니 나도 자네의 머리를 만지고 싶다. 내게 기분 좋은 일은 자네에게도 해주고 싶어. 그렇게 솔직하게 말하면 될 것을, 게게로는 사랑을 전하는 데에는 서툴러 저것이 한계였고 최선이었다. 미즈키는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했다. 아니, 사내 머리카락 만지는 게 뭐가 좋다고…. 그렇게 중얼거리다 미즈키는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 게게로에게 물었다.
“너 저번에도 비슷한 말 하지 않았나?”
“음? 그랬던가?”
“그랬어. 한 달 전인가 이발하고 왔더니 왜 머리카락 잘랐냐고, 네가 다듬고 싶었다고 했잖아.”
그리 말하니 게게로도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한 달 하고도 보름 전 게게로는 두부동자를 도와준 대가로 은으로 만든 쪽가위를 얻었다. 그 은가위로 머리카락을 자르면 한 해 액운이 날아간다고 두부동자가 말했지만 그것보다는 미신을 핑계로 미즈키의 머리카락을 만질 수 있겠다는 생각에 게게로는 들떠 있었다. 그러나 웬걸, 한 달 뒤 자신이 잠깐 집을 비운 사이에 미즈키가 바버샵이라는 곳에 가서 머리카락을 다듬고 온 것 아닌가. 그 후로 무려 보름 동안 게게로는 ‘이걸로 머리카락을 자르면 한 해 운이 좋다고 했는데~’라며 우는 소리를 했다.
“음, 그래서. 혹시 드디어 머리카락을 기를 생각이 난 겐가?”
“아니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
“어째서!”
하늘이 무너진 듯한 표정을 짓는 게게로를 보고 미즈키는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대체 쟤는 왜 내 머리카락에 집착하는 거야? 사람 머리카락 뜯어먹는 요괴도 아니고…. 미즈키는 욕실로 들어가면서 대꾸했다.
“왜긴 왜야. 뻣뻣하기만 하고 만지는 맛 하나도 없는데 뭘.”
게게로가 반박을 하기도 전에 욕실 문이 매정하게 닫혔다. 게게로는 흐릿하게 보이는 안쪽을 뚫어져라 응시하면서 미즈키가 남긴 말을 곱씹었다. 뻣뻣하기만 해서 만지는 맛이 없다고? 그렇다면 미즈키의 머리카락 역시 내 것처럼 부드러워진다면 만지게 해주겠다는 건가? 게게로는 삐져나온 잔머리를 매만지며 골몰히 생각에 잠겼다.
머리 말리는 시간
“미즈키여, 그러면 다녀오겠네.”
“또? 뭐…. 그래.”
미즈키는 의아해하면서도 순순히 게게로를 보냈다. 게게로는 휘파람을 부르면서 유유히 집밖으로 나갔다. 미즈키는 게게로의 등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를 지켜보다가, 영문을 모르겠다며 뒤통수를 긁적이며 방으로 들어갔다.
최근 게게로의 외출 빈도가 높아졌다. 다른 요괴를 만나러 가는 건지 한 번 떠나면 사나흘은 기본, 보름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렇게 귀가하면 손에는 항상 이름도 모르는 식물이나 약재를 한아름 들고 왔는데, 전부 식용이 아니었다. 이건 뭐에 쓰는 거냐고 물어봐도 나중에 알게 될 거라는 말만 하고는, 그것을 모두 목욕할 때 쏟아부었다.
게게로의 기행은 그뿐이 아니었다. 그렇게 뭔가를 들고 돌아온 날에는 꼭 미즈키와 목욕을 하면서 온갖 수발을 들었다. 처음 머리를 감겨주고 말리려고 할 때는 혼자 할 수 있다고 얼마나 발버둥을 쳤는지. 그러나 게게로의 고집을 꺾을 수 없음을 깨달은 후에는 그 좋을 대로 내버려두었다. 그 짓이 석 달이나 반복되니 게게로가 집을 비운다고 하면 그의 몸 걱정은 물론이고 목욕물을 어떻게 맞추나 걱정이 먼저 들 정도로 익숙해지고 말았다.
워낙 강하고 튼튼한 놈이니 무슨 짓을 당하진 않겠다만, 미즈키는 조금 서운했다. 단 하나 밖에 없는 인간 친구한테 좀 알려주면 어디 덧나나. 하지만 묘하게 선물을 가득 들고 와선 저를 씻기고 단장시키는 게게로의 표정이 매우 해맑았던 탓에 미즈키는 시원하게 말도 못하고 끙끙 앓고만 있었다.
그래도 역시 말해주는 쪽이 좀 더 안심되는데, 미즈키는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습관처럼 뒤통수를 긁었다. 손가락에 걸리는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떨어졌다. 미즈키는 제 손을 한 번 쳐다봤다가, 조심스럽게 앞머리를 만져봤다. 이전처럼 뻣뻣하고 거친 감촉이 아니다. 게게로만큼은 아니지만 부드럽게 한 가닥씩 사부작대며 떨어진다. 어라, 하고 그제야 의문이 몰려왔다. 내 머리카락이 언제 이렇게 되었지?
게게로는 흥얼거리면서 산속을 휘젓고 있었다. 분명 이곳에 나는 빨간 꽃의 씨를 짜 만든 기름이 머릿결에 좋다고 하였지. 참빗에 발라서 쓴다고 했던가? 게게로는 요기 레이더를 바짝 세우고 빨간 꽃을 찾아다녔다.
미즈키와의 설전 이후, 게게로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미즈키가 자신의 머릿결을 핑계로 손대기를 거부한다면, 머릿결을 바꾸면 되지 않을까. 그때부터 게게로는 두 달여 간 여러 요괴를 찾아다니며 무엇이 머리카락에 좋은지 캐묻고 다녔다. 요괴 대부분은 유령족이 왜 외양 따위를 신경쓰는지 이해가 안 간다는 투였지만, 종족의 입지 덕분에 정보는 쉽게 얻을 수 있었다. 청포를 푼 물에 머리를 감으면 결도 좋아질 뿐더러 병도 걸리지 않는다더라, 에도 시대의 기생들은 목욕물에 무슨 꽃을 넣어 썼다더라, 어떻게 말리면 머리카락이 더 고와진다더라 등등.
흠, 분명 물가에서 많이 떨어진 곳에 무리지어 피어 있다고 했는데. 게게로는 카와우소가 전해준 정보를 머릿속으로 더듬으며 안쪽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익숙한 기척에 고개를 드니 잇탄모멘이 나무 사이를 유영하며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보나마나 또 마음에 드는 여성을 발견해서 구애하기 위한 꽃을 찾고 있는 셈이겠지. 게게로는 그에게도 도움이 될까 싶어 말을 걸었다.
“오랜만이구려, 잇탄모멘.”
“오오, 키타로의 아버지!”
잇탄모멘이 손을 흔들며 아래로 내려왔다. 이름이 붙은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요괴들은 여전히 그를 ‘유령족 나리’나 ‘키타로의 아버지’ 등으로 불렀다. 기실 인간과 요괴를 모두 통틀어 그를 ‘게게로’라고 부르는 이는 미즈키 하나밖에 없었다. 게게로는 그것이 영 마뜩찮으면서도 까닭 모를 만족감을 느꼈다. 세상에 오직 단 한 사람만이 부르는 이름이라니, 특별하지 않은가.
“자네 혹시 여성에게 줄 꽃을 찾고 있는 겐가?”
“어이쿠, 이거 부끄럽군요. 정확히는 동백을 찾고 있습니다. 그 씨를 짜서 만든 기름이 머리카락에 좋다고 하더군요. 안 그래도 그분께서 머릿결이 상했다고 속상해하길래 도움이 될까 싶어 찾고 있습니다.”
잇탄모멘은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면서도 그 여성의 일므이 히마리이며, 이 산자락 아래에서 책방을 운영하는 소설가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역시 사랑하는 살마의 얼굴일나 좋은 것이구나, 물론 잇탄모멘은 금방 사람에 빠졌다가 금방 차여서 자제할 필요가 있겠지만. 짝사랑하는 여성에 대해 주절주절 늘여놓던 잇탄모멘이 물었다.
“그러고 보니 나리께선 여기까지 무슨 일이십니까?”
“참 우연이군. 실은 나도 그 꽃을 찾고 있다네. 동백 기름을 만들기 위해서지.”
“예? 설마, 정말로 후처가 생기신 건….”
안 그래도 몇 달 동안 일본의 산천을 돌아다니며 머릿결에 좋다는 걸 모으고 계시다더니…. 잇탄모멘이 진지한 얼굴로 중얼거렸으나 게게로는 멀뚱히 그를 쳐다보며 묻기만 했다.
“후처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그럼 아니란 겁니까?”
“뭔가 오해가 있었나 보군. 그건 전부 미즈키를 위한 것이라네.”
“엑, 그 같이 사는 인간 말입니까?”
잇탄모멘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게게로는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미즈키가 자신의 머리카락은 뻣뻣하고 만지는 맛도 없는데 왜 말려주려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하길래, 여기저기에서 약재를 구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만들고 있지! 그라면 언젠가 미즈키도 내 손길을 익숙하게 받아주지 않겠나!”
“뭐…, 아주 틀린 말은 아니긴 합니다만….”
모질을 바꾸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 인간은 도무지 남의 손을 타지 않을 것 같다는 게 가장 큰 문제입니다만, 잇탄모멘은 목구멍에 걸린 말을 애써 삼켰다.
미즈키는 끙, 앓는 소리를 내면서 욕실 천장을 채운 각종 병을 노려봤다. 게게로가 욕조 물을 받을 때 뭘 넣었더라. 기억을 더듬어 병 두세 개를 꺼냈다가 도로 넣기를 반복했다. 아, 이건 머리 감을 물을 따로 받을 때 썼지. 이건 얼마나 넣었더라, 다행히 평범한 인간일 때부터 남들보다 머리가 좋았던 미즈키는 금방 게게로의 목욕물 레시피를 떠올려내 욕조에 약재를 뿌렸다. 문득 게게로를 따라하고 있는 자신이 퍽 우스워 피식 웃음이 나왔다. 불과 석 달 사이에 그의 목욕 루틴에 완전히 적응해버렸는지, 저번에 아무것도 넣지 않은 목욕물에 몸을 담갔을 때 덜 씻긴 느낌에 일주일 내내 찝찝했다.
목욕물이 알맞은 온도가 되자 미즈키는 수도꼭지를 잠그고 몸을 담갔다. 데일 만큼 뜨거운 물에 몸을 지지기를 선호하는 게게로와 달리 미즈키는 김이 올라오진 않을 만큼, 뜨뜻미지근한 정도를 선호했다. 욕조에 들어가자마자 으어어, 하고 개운해하는 소리가 저절로 입에서 흘러나왔다. 무슨 귀족이나 부자도 아니고, 혼자 목욕하는 데 뭔 이파리며 꽃잎을 띄워 놓았는지. 미즈키는 물장난을 치면서 멋쩍음에 혼자 얼굴을 붉혔다. 아무튼 이건 다 게게로 탓이다, 이 자리에 없는 사람을 탓하면서 미즈키는 욕조에서 꾸벅꾸벅 졸았다.
욕조에 둔 타이머가 울리며 20분이 지났음을 알렸다. 몸을 충분히 데운 미즈키는 가물거리는 눈을 깜빡이며 일어났다. 비누로 꼼꼼히 몸을 닦은 다음 욕조물로 비눗기를 씻어낸다. 욕조에 받은 물을 내리고, 새로운 물을 받아 게게로의 두 번째 레시피대로 머리 감을 물을 만들었다. 청포를 비롯한 식물 달인 물을 섞은 다음, 그것을 대야에 덜어 사용한다. 게게로도 없으니 예전처럼 찬물에 비누로 대충 감아도 되건만, 미즈키는 그를 따라 시간을 들였다. 게게로, 그 녀석이 돌아오면 대체 나한테 무슨 버릇을 들였냐고 따져야지. 미즈키는 얼굴을 찡그리면서 한층 부드러워진 머리카락 위로 물을 끼얹었다.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머리카락 위에 수건을 얹은 채 밖으로 나가니 부엌 쪽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게게로가 일주일 만에 돌아왔다. 이번 외출은 의외로 얼마 안 걸렸구먼, 미즈키는 속으로 생각하며 부엌 쪽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게게로, 왔어? 나 머리 좀 말려….”
게게로가 뒤를 돌아보자, 그의 손에 들린 웬 씨앗이 보였다. 부엌 바닥으로 시선을 내리니, 붉은 꽃이 달린 가지와 거기에 맺힌 검은 씨들이 눈에 들어왔다. 씨를 따내는 작업을 하고 있었나 보다. 식용인가, 아니면 저것도 약재인가? 게게로는 평소처럼 동그란 눈으로 미즈키를 올려다봤다. 미즈키는 고작 머리 말리는 것 때문에 그의 작업을 방해했다는 생각에 시선을 돌렸다.
“아, 미안. 바쁜가 보네. 이번엔 그냥 나 혼자 말릴게.”
헛기침을 뱉으면서 횡설수설한 다음 미즈키는 바로 등을 돌렸다. 대체 왜 그랬지, 그냥 나 혼자 말리면 되는 걸. 이것도 전부 석 달 동안 게게로가 직접 말려줘서 버릇이 든 거라고, 대체 무슨 꿍꿍인지 모르겠지만 손을 타고 너무 많이 탔다는 생각에 미즈키는 저도 모르게 조금 쿵쿵대는 발걸음으로 방에 들어갔다.
부엌에서 우당탕 소리가 들리더니 게게로가 다급히 자신을 따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게게로가 미즈키의 방문 틀을 잡고 말했다.
“기, 기다리게 미즈키! 내가 말려줄 테니!”
“됐네요! 혼자 말릴 수 있다니까.”
“미즈키이이이! 내 소중한 시간을 빼앗지 말아주게!”
“무슨 소리야. 남정네 머리카락 만지는 게 뭐가 좋다고….”
미즈키는 저번과 똑같은 말을 하다가, 게게로가 제 뒤에 앉아 수건으로 머리를 비비기 시작하자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후후, 천 너머로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에 게게로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말했다.
“이젠 제법 부드러워졌으니 만지기 좋지 아니한가? 미즈키.”
“…너, 너 그럼 지금까지 모으던 게…!”
그제야 게게로가 벌이던 기행의 목적을 깨닫고 미즈키는 고개를 홱 돌렸다. 게게로는 후후, 하고 기분 좋게 웃기만 했다. 웃지 마! 미즈키가 팔꿈치로 옆구리를 찍어도 게게로는 그저 즐겁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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