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삽니다

게나조, 약 치치미즈

篝火 by 므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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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즈키는 여름이 싫다. 살갗에 들러붙는 습기며, 그늘도 소용없을 만큼 내리쬐는 뙤약볕, 에어컨을 틀지 못하면 잠들지 못하는 밤과 온몸에서 뚝뚝 떨어지는 땀. 여기저기에서 앵앵대는 모기와 맴맴대는 매미. 안 그래도 더위를 잘 타는 체질인데 본격적인 폭염이 시작되면 물에 적신 손수건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보다 지금 더 신경 쓰이는 것은….

“으무, 해가 갈수록 여름이 더 더워지고 있는 거 같군. 내가 어릴 때는 이 정도로 덥지는 않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날이 덥다고 말하는 주제에 게게로는 혼자 얼굴이 보송보송했다. 땀방울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얼굴은 얄밉게도 선풍기를 독점하고 있었다. 강풍으로 틀어 놓은 바람을 따라 긴 머리카락이 나풀거렸다. 그래, 저거 때문이다. 저 치렁치렁한 동거요괴의 머리카락. 미즈키는 제 머리카락도 아닌데 너무나 신경 쓰였다. 저렇게 기르면 안 덥나? 쪄 죽을 거 같은데…. 아닌 게 아니라 머리카락을 시원하게 밀었음에도 미즈키의 뒷목은 땀으로 푹 절어져 한 시간 단위로 닦지 않으면 미끈미끈해졌다.

“비켜, 나 더워.”

“너무하군 미즈키, 이몸도 선풍기를 조금 즐기고 싶네만.”

“너는 지금 좀 덥다 정도지 나는 지금 더워 죽을 거 같다고.”

발로 게게로를 밀어낸 미즈키는 수고를 들이지 않고 선풍기를 차지했다. 게게로는 미즈키의 발길 한 번에 바람에 나부끼는 종잇장마냥 나가 떨어졌다. 으어어, 살 만하다. 미즈키는 시원한 바람을 만끽하며 아저씨 같은 탄식을 흘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열을 받은 선풍기는 곧 더운 바람을 내뿜었다. 씁, 이제 저 고물딱지를 버릴 때가 왔나. 15년이면 많이 쓰긴 했지. 괜히 선풍기를 노려보며 자리에 드러눕자 게게로가 그 위로 쓰러졌다.

“미즈키여, 우리도 이제 에어컨을 설치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나?”

“나도 마음 같아서는 그러고 싶은데…. 그럴려면 이 집을 다 뜯어 고쳐야 해….”

미즈키의 집은 쇼와 시대 단독주택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10년 단위로 보수를 했지만 내부 구조는 아직 70년 전 그대로라, 에어컨을 설치하려면 말한 대로 벽이며 마루를 다 뜯어내고 설치해야 한다. 당연히 돈은 일반 아파트나 멘션에 설치할 때보다 훨씬 더 많이 들어간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선풍기를 바꾸거나 땅을 파고 들어가고 말지. 그런 생각을 하다가 미즈키는 몇 해 전 게게로가 열대야에 허덕이다가 마당에 거대한 구덩이를 파고 들어간 것을 기억했다. 니가 개도 아니고 뭔 짓이냐고 호통치며 들어갔다가 생각 외로 시원해서 같이 드러누워 잤지. 바로 다음 날 아침 놀라온 두부동자가 ‘키타로네 아버지들이 나란히 죽으려고 한다’고 이상한 소문을 내는 바람에 더는 하지 못하게 되었지만. 그때 부리나케 달려온 키타로의 표정이 정말 가관이었지. 미즈키는 그날을 회상하며 피식 웃었다.

미즈키는 제 몸 위로 퍼진 게게로와, 마룻바닥 위로 늘어진 그의 흰 머리카락을 보았다. 게게로는 백발이라기보단 은발에 가까운 편이었다. 그늘진 곳으로 들어가면 회색이 아니라 회청색을 띄었고 햇살을 받으면 빛을 받은 물결처럼 반짝였다. 그런데 정말 이렇게 머리카락을 길어놓으면 안 덥나? 미즈키는 머리카락을 한 움큼 쥐어 비비듯이 만졌다. 땀이 거의 나지 않으니 뭉텅이 지지 않고 고운 실타래처럼 가닥가닥 흩어진다.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실보다도 곱고 아름답다. 만약 인간이 유령족은 머리카락을 자유자재로 늘릴 수 있다는 걸 알았다면 옷감으로 쓰기 위해 수없이 사냥했을 것이다. 어쩌면 실제로 그런 사냥이 벌어져 수가 줄었을지도 모르지.

게게로가 눈을 들어 미즈키를 흘끔 쳐다봤다. 너무 많이 만졌나, 눈치가 보여 슬쩍 손을 내려놓자 묘하게 울상이 된다. 울상보다는 ‘왜 그만 만지냐’고 투정 부리는 표정이라고 할까? 미즈키가 다시 슬쩍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만지자 그제야 만족한다. 머리카락 만지는 걸 좋아하다니, 유령족이 아니라 개 아닌가? 미즈키는 아예 자리에 앉아 양손을 써서 게게로의 풍성한 머리카락을 쓸어주었다. 게게로를 보니 아주 좋아 죽고 있었다. 그가 고양이었다면 고롱대는 소리를 냈을 것이다.

“그런데 너, 왜 이 더운 날에도 머리카락을 길게 내리고 있는 거냐?”

“음?”

문득 궁금해져서 물어보니 게게로가 무슨 소리냐는 듯 안 그래도 동그란 눈을 더 동그랗게 뜨고 미즈키를 올려다봤다. 미즈키가 따라 눈을 깜빡거리자 서운한 표정으로 되묻는다.

“자네, 정말 기억나지 않는 겐가?”

“뭘?”

“자네가 말하지 않았던가. ‘게게로 네 머리카락은 몽실몽실해서 만지는 느낌이 좋네’라고.”

“아….”

그제야 기억이 났다. 거의 30년 쯤 전 보름달이 환하게 뜬 가을이었다. 그들은 툇마루에 앉아 기분 좋게 취한 상태였다. 미즈키는 앉아 있고 게게로는 미즈키의 무릎에 누워 있었다. 기분 좋게 취한 게게로가 능력을 주체하지 못하고 머리카락을 늘어뜨렸고, 똑같이 만취한 미즈키가 양손으로 은실타래를 만지면서 꼬부라지는 발음으로 말했다.

‘게게로 네 머리카락은 몽실몽실해서 만지는 느낌이 좋네, 키타로하고는 좀 다르지만 기분 좋아~.’

확실히 그때부터 게게로의 머리카락이 길어졌던 것 같다. 하지만 벌써 30년 전 일인데, 아직도 이렇게 긴 머리카락을 고수하고 있다고? 심지어 그 말을 한 미즈키는 까맣게 잊어버렸는데 말이다. 미즈키는 어이가 없는 한편 요괴의 사랑이 얼마나 무거운지를 다시금 깨달았다.

그때도 그럤다. 평소답지 않게 진지한 얼굴로 무릎을 꿇고 앉아 이쪽으로 오지 않겠느냐고 애원하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놈의 영생과 영화永華 떄문에 일족을 모두 잃은 자가 자신에게 그것을 주겠다고 갈애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당시 미즈키는 당황스럽기만 했다. 인간 외의 존재가 된다는 걸 상상해본 적도 없고, 애초에 그런 것을 바라지도 않았다. 그에게 소원이 있다면 무사평탄하게 생을 마감하는 것과, 자신이 죽었을 때 부자가 너무 슬퍼하지 않는 것 두 가지밖에 없었다. 그래서 미즈키는 정중하게 딱 잘라 거절했다. 미안, 게게로. 나는 그쪽으로 갈 마음이 없어.

어쩌다 보니 요괴…까지는 아니고 불로불사가 되었지만, 근간이 인간이었기에 미즈키는 종종 오래된 일을 잊어버리거나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무심코 한마디 무거운 말을 흘려버리기도 했다. 그러면 게게로는 비정상적인 기억력으로 그 모든 말과 상황을 기억하고 애정의 형태로 미즈키에게 고스란히 돌려주었다. 머리카락도 그렇다. 30년 전 일이면 어지간한 사건이 아니고서야 인간은 잊어버릴 시간이다. 그러나 게게로는 잊어버리지 않고 30년 동안 긴 머리카락을 고수함으로써 사랑을 보여주었다. 이런 순진한 요괴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거 때문에 더운 거 아냐?”

미즈키가 게게로의 머리카락을 양손으로 들면서 물었다. 얇고 가벼운 모질이지만 양손으로 잡아 들어올리자 무게가 꽤 된다. 이런 걸 달고 있으니 덥지, 미즈키가 중얼거리자 게게로도 시무룩해져서 구시렁댔다.

“그치만 자네가 내 머리카락을 좋아하니까….”

“아니, 이렇게 찌는 더위에도 기르고 다니라는 뜻은 아니었다고.”

요괴는 원래 이렇게 중간이 없나? 어처구니 없는 얼굴로 게게로를 바라보던 미즈키는 순간 좋은 생각이 났다. 미즈키는 제 무릎에서 게게게로를 내려놓은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즈키? 게게로가 몸을 돌려 엎어진 채로 미즈키를 쳐다봤다. 미즈키는 나시를 벗고 하얀 바탕에 하늘색 줄무늬가 그려진 셔츠를 걸쳤다. 미즈키, 어디 가려고 그러는 건가? 게게로가 졸래졸래 따라와 말을 걸었다. 미즈키는 게다를 신으면서 물었다.

“게게로, 오늘 숲 쪽에서 시장이 열린다고 했지?”

“음, 그렇지. 아마 지금쯤 손님으로 북적거릴 걸세.”

“빨리 가자. 좋은 게 떠올랐거든.”

아오키가하라 숲 내부에 있는 게게게의 숲은 이제 일본에서 유일하게 요괴가 모여 사는 숲이 되었다. 쇼와 40년(1965년)까지만 해도 숲마다 주인이 있고 그 주인을 따르는 요괴들이 살았지만, 벌채와 관광지화가 가속되면서 인간이 침범하는 바람에 모두 흩어지고 말았다. 아오키가하라 숲 역시 자살 명소니 심령 스팟이니 입소문을 타는 바람에 인간의 손때가 묻어 사라질 위기에 처했지만, 그러한 소문으로 인해 도시전설이 되면서 숲 자체가 요괴가 되었다. 그 덕에 키타로와 그 친구들도 헤어지는 일 없이 여전히 게게게의 숲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이 게게게의 숲 앞에, 보름달이 뜨는 이틀 동안 시장이 열린다. 이 시장은 당연하게도 요괴들의 시장으로, 인간 세계에서는 볼 수 없는 온갖 물건이 등장한다. 키타로와 그 친구들은 물론, 게게로와 미즈키 역시 식자재 이외에 필요한 물건은 이곳에서 산다. 인간의 시장이나 마트에서 살 수도 있지만, 알아보는 눈이 워낙 많아 이용하기가 조심스럽다.

오랜만에 시장에 발걸음을 한 아버지들을 보고 요괴들이 분주해졌다. 그들은 두 사람에게 온갖 화려한 물건과 진귀한 술, 음식들을 보여주면서 열심히 호객 행위를 했다. 신상을 볼 때마다 게게로의 눈이 반짝였으나 미즈키의 관심사는 그쪽이 아니었다. 열심히 시장을 두리번거리는 그에게 네코무스메가 다가왔다.

“오랜만이에요, 미즈키 씨.”

“안녕, 네코. 혹시 여기 비녀 아저씨는 오지 않았니?”

“비녀 아저씨요? 저기 양조점 옆에 있는데…. 헉, 혹시 미즈키 씨 여자친구 생겼어요?!”

“뭣?!”

“뭐시라?”

네코무스메가 얼굴을 붉히며 한 말에 주변에 있던 모두가 경악했다. 키타로가 독립한 후에도 몇 십년 동안 사귀는 인간이나 요괴 하나 없이, 게게로가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혼자 살았던 그 미즈키다. 그런 사람이 갑자기 비녀를 찾는다고 하니 모두의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없다. 인간 여자인가? 아니, 인간이라면 미즈키가 이상하다는 걸 바로 알아챌 걸. 그러면 역시 요괴인가? 요괴 중에 유독 미즈키에게 치대던 녀석 많지 않아? 그놈들이 이 소식을 들으면 살벌지겠네…. 아니 어쩌면 여자가 아니라…. 점점 거세지는 웅성거림에 미즈키가 당황하며 손사래를 쳤다.

“아니, 애인이라거나 그런 거 절대 아니고….”

“미즈키이…. 어째서 나한테 한마디도 해주지 않은 겐가….”

이런, 가장 위험한 폭탄이 터지려고 한다. 미즈키는 식은땀을 흘리며 뒤를 돌아봤다. 역시나 게게로가 부들부들 떨면서 눈물을 퐁퐁 흘리고 있었다.

“흑…. 그대에게 새로운 인연이 생겼다니…. 다행이구려…. 그런데 어찌하여 내게 일언반구도 없이 이럴 수가 있나….”

“아니, 그런 거 아니라고!”

미즈키는 당황한 마음에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이며 이마를 짚었다. 허겁지겁 뒷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게게로의 눈가를 벅벅 문질러 닦은 뒤 손목을 잡고 자리를 떴다. 이미 소문을 좋아하는 몇몇 요괴들이 말을 나르고 있었다. 미즈키는 시장 외진 곳에 있는 나무에 다다르고서야 멈추어서 게게로를 진정시켰다.

“게게로, 그런 거 아니야. 애인이 생긴 것도 마음에 드는 사람이 생긴 것도 아니라고.”

“훌쩍, 그러면 왜 비녀를 찾는가…?”

그대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면 진심으로 축하해주려고 했는데. 게게로가 코를 훌쩍였다. 방금까지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펑펑 울던 사람이 그런 말을 해봤자. 미즈키는 답답한 한숨을 흘리고 게게로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너 주려고 찾는다, 왜!”

“내, 내게?”

“그래. 그러니까 잠자코 따라와. 네 마음에 드는 걸로 사줄 테니까.”

“아니, 나는 그런 것이 필요 없네만.”

“필요해. 완전.”

미즈키는 단호하게 말하곤 다시 게게로의 손목을 잡아 시장으로 들어갔다. 역시나 여러 요괴들이 미즈키를 흘끔거리면서 호객행위를 했다.

“미즈키, 이거 어떤가? 요즘 인기 있는 향수라네!”

“이 유카타 한벌이면 그 아가씨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을 수 있을 게야!”

“미즈키, 이런 참빗은 어떤가? 비녀도 좋지만 이런 선물도 꽤 좋다고!”

미즈키는 그 목소리들을 무시하면서 비녀 아저씨의 노점상을 찾아갔다. 네코무스메가 말한 대로 그는 텐구의 양조점 옆에 있었다. 박수를 치면서 여성 고객을 모으던 비녀 아저씨, 탄탄포는 가게로 다가오는 두 남정네를 보고는 물음표를 띄웠다.

“어라, 미즈키와 유령족 아닌가. 두 사람이 웬일이지? 이와코의 무덤에 놓을 비녀를 사러 왔나?”

“아니, 이 녀석이 쓸 거 사러 왔는데.”

미즈키는 그러면서 손가락으로 게게로를 가리켰다. 엑? 탄탄포는 예상 외의 손님에 멈칫하더니 탁자 아래로 몸을 숙였다. 잠시만, 남성용 비녀가 있을지 모르겠네…. 중얼거리는 그를 뒤로 하고 미즈키는 매대를 가리키며 원하는 대로 고르라고 말했다. 화사한 장신구가 박혀 있는 여러 비녀들 사이에서 게게로가 고른 것은 밋밋한 나무 비녀 하나였다. 끝부분에 빗살무늬가 들어간 것 외에는 수수하다못해 재미없기까지 한 모양새였다. 미즈키는 그것을 한참 들여다보는 게게로에게 물었다.

“정말 그거면 됐어? 이런 것도 괜찮을 거 같은데.”

그는 가운데에 청금석이 박힌 흰 꽃장식이 달린 비녀 하나를 들었다. 게게로는 미즈키가 고른 비녀를 유심히 보다가 조심스럽게 그의 손에서 빼내 탄포포에게 건넸다. 남성 비녀가 없다며 사과하려던 탄포포는 게게로의 손을 보고 멀뚱히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했다. 게게로가 짤막하게 말했다.

“이거 두 개로 하겠네. 어떤가?”

“어…. 그거 두 개면 사금 두 조각, 아니 세 조각이면 될 거 같은데.”

“사금 세 조각이라고? 아무리 그래도 조금 비싸지 않나?”

게게로가 고개를 끄덕이려는 순간 미즈키가 잽싸게 끼어들어 흥정을 시작했다. 비싼 청금석으로 만든 거네, 순도가 높지 않네 한참 입씨름을 한 끝에 미즈키는 사금 두 조각을 주고 의기양양하게 비녀를 손에 얻었다. 이제 가자, 미즈키는 게게로의 손을 꼭 잡고 시장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반대편에서 키타로가 링고아메 하나를 손에 들고 다가왔다. 역시 네코무스메가 키타로에게 언질을 해주었나 보다. 표정이 어색한 것을 보니 그 이야기도 들은 것 같은데. 미즈키는 무릎을 굽혀 다가오는 키타로를 맞이했다.

“아버지, 미즈키 씨.”

“오랜만이네 키타로. 잘 지냈고?”

미즈키는 어린 아이를 대하듯 키타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키타로의 머리카락 속에 숨어 있던 게게로의 왼쪽 눈알이 튀어나와 본체로 돌아갔다. 잔뜩 예쁨을 받던 키타로가 쭈뼛거리며 미즈키의 손에 들린 비녀 봉투를 흘끔거렸다. 아, 이거? 선뜻 입을 열기 어려워하는 키타로를 대신해 미즈키가 봉투를 들며 미소를 지었다.

“이거? 네 아빠 꺼다. 한여름에도 저렇게 치렁치렁하게 다니니.”

“아, 아버지 거….”

“그 정도로 덥지는 않네만.”

“보는 사람이 덥다고 보는 사람이. 그렇다고 다시 짧은 머리로 돌아갈 생각도 없잖아.”

“그렇지. 미즈키 자네가 내 머리카락을 얼마나 좋아하는데. 아깝지 않은가.”

게게로가 흐뭇하게 웃으면서 머리카락을 둥실둥실 들어 올렸다. 알겠으니까 정신 사납게 그러지 좀 마. 미즈키가 게게로의 이마에 가볍게 꿀밤을 놓았다. 아버지들의 만담을 보고서야 키타로는 조금 안심한 표정이 되었다. 신체와 정신은 같이 간다고 했던가, 어린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는 키타로는 생각도 여전히 어린 티가 난다. 분명 미즈키가 다른 사람이랑 행복하게 지내는 모습을 상상하고 기분이 미묘해졌을 테다. 미즈키는 네코무스메와 놀라며 사금 세 조각을 용돈으로 쥐어주었다. 자주 얼굴 좀 보이라는 잔소리는 덤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툇마루로 올라가자마자 게게로가 봉투를 빤히 쳐다봤다. 보나마나 빨리 해달라는 거겠지. 미즈키는 자리를 잡고 앉아 제 앞 쪽을 탁탁 두드렸다. 게게로는 신난 얼굴로 재빨리 자리를 잡았다. 미즈키는 비녀를 꺼내 게게로에게 보여주며 물었다.

“뭘로 할래?”

“미즈키 자네가 고른 것으로 하지.”

“아, 이거?”

미즈키는 청금석 비녀를 마룻바닥에 내려놓고 참빗을 가져왔다. 워낙 머릿결이 좋아 손질할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빗어주고 싶었다. 역시 게게로의 머리카락에 완전히 넘어간 거 아닌가. 미즈키는 회의적인 생각을 하며 사락사락 머리카락을 빗어내렸다.

그의 머리카락 타래를 잡고 고민하다가 세 갈래로 나누었다. 워낙 길어서 한 번에 틀어 올리지 못할 것 같다. 한 번 땋아서 길이를 좀 줄인 다음에 비녀를 해야겠다. 미즈키는 천천히, 머리카락이 꼬이지 않게 조심하면서 촘촘하게 땋았다. 게게로는 기분이 좋은지 알 수 없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미즈키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어느 새 그는 게게로의 제멋대로 콧노래에 장단을 맞추고 있었다.

집에서 굴러다니던 끈으로 머리카락 끄트머리를 묶었다. 군데군데 튀어나왔지만 처음치고는 꽤 괜찮게 땋았다. 미즈키는 혼자 뿌듯해하며 비녀를 들었다. 비녀를 머리카락 위에 울리고 두 번, 세 번 감아올린다. 길이가 애매했는지 마지막에 비녀를 꽂을 때 틈이 빡빡해서 고생을 좀 했다.

“아아아아! 아프네 미즈키!”

“잠깐만, 에이씨, 왜 이렇게 안 꽂히냐.”

“자네, 설마 나를 암살하려고!”

“그럴 리가 있겠냐!”

겨우 비녀를 통과시키고 무늬가 보이도록 대를 조심스럽게 돌렸다. 음, 이 정도면 처음치고 꽤 잘한 거 아닌가? 군데군데 머리카락이 튀어나와 폭탄 맞은 모양새가 되었지만 그래도 꽤 괜찮아 보였다. 시원하게 드러난 뒷목을 보니 이제야 미즈키도 개운한 기분이 들었다. 키타로가 마련해준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어 게게로에게 보여주었다.

“어때, 마음에 들어?”

“음, 이것도 마음에 드는군.”

무엇보다도 미즈키 자네가 해준 거니까 말일세. 게게로가 돌아보며 빙긋 웃었다. 어쩐지 여름밤이 더 더워진 기분이 들었다. 미즈키는 잇달아 헛기침을 하고, 턱을 긁다가 피식 웃었다.

“오냐, 앞으로도 계속 해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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