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터 막간의 이야기
치치미즈
네브님(@rounev)과 떠들었던 게게로 얼터와 수호자 백즈키
페이트 그랜드 오더 시공, 크로스오버물입니다
하단에 부가설명이 있습니다
아, 저 유령족들을 살리고 싶다고? 그건 좀 무리인데
자신을 뻔뻔하게 세계라고 칭한 그것은 나를 비웃듯이 말했다. 흐릿해져가는 의식으로, 자존심도 버리고 무릎을 땅에 대고 기도하는 심정으로 빌었다. 자신의 목숨을 내놓아야 한대도 상관없으니 저 부부를 구해달라고. 마지막 유령족들의 최후를 바라보던 세계는 이렇게 하면 되겠다는 듯, 선심이라도 쓴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면 네 사후를 바쳐라. 사후에 나의 권속이 되어 세계를 지키겠다고 약속하면 이 모든 걸 없던 일로 해주지
방금 전까지는 무리라고 했으면서, 사후에 종이 된다면 모든 걸 없던 일로 해주겠다니. 갑자기 후해진 혜택에 의심이 들었으나 그것이 이 아이의 미래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싼 값이다 못해 이쪽에게 이득이다. 사실 나보다는 유령족에게 득이겠지만, 나 하나 희생해서 저들의 불행을 무효화할 수 있다면야. 어차피 나는 지은 죄도 있어 천당에는 가지 못한다. 그러면 세계를 지킴으로써 속죄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흰 빛덩어리로부터 하얀 빛줄기가 뻗어져 나와 나를 감싼다. 이렇게 해서라도 이 아이를 지킬 수 있다면…. 포근한 느낌이 드는 것과 반대로 내 몸은 체온을 잃어갔다.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말 그대로 온도가 존재하지 않는 몸. 그 기이한 감각에 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 얼터 막간의 이야기
보더마스터의 직장, 칼데아가 외부 세력에 의해 반파된 후 대피해온 임시거처의 한쪽, 서번트 강화실.
“재료가 모자라아아아아!!”
인류 최후의 마스터는 평소처럼 통곡을 하며 강화실 바닥에 머리를 감싸고 엎드렸다. 마슈가 달려와 옆에 쪼그리고 앉아 마스터를 위로했다. 포우라는 털북숭이 동물도 앞발로 마스터의 뺨을 두드려 위로해주고 있었다. 이 촌극에 유일하게 동참하지 않는 자, 검은 유령족은 팔짱을 낀 채 무표정하게 두 사람과 한 생물을 내려다봤다. 인간을 위로할 마음따위 조금도 들지 않지만 이 이상 계속 우는 소리를 하게 내버려두는 것도 귀가 따가우니, 유령족은 마스터에게 가만히 말을 걸었다.
“뭐가 부족한겐가.”
“뼈다귀…, 뼈다귀가 부족해애….”
그가 뼈다귀라고 칭하는 것은 아마 흉골이라는 재료일 테다. 자신의 스킬을 강화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했던가. 얼마 전에 마스터로부터 ‘당신은 왜 이렇게 뼈다귀를 많이 먹어?! 세상에, 정령근도 먹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 기억이 났다. 손이 많이 가는고로, 이래서 인간은…. 유령족은 한숨을 쉬고는 마스터에게 충고했다.
“그러면 얼른 모으러 가라. 보아하니 며칠 전 수복한 특이점에서 스켈레톤이 다량 발생했다던데.”
“으윽, 파밍은 너무 힘들고 귀찮은데…, 하지만 어쩔 수 없지.”
마스터는 비틀거리면서 일어나더니 유령족의 뒷덜미를 잡고 레이시프트실로 향했다. 너한테 써야 하는 거니까 네가 같이 벌어와야지! 하고 외치는 목소리가 기억에 없는 누군가가 하던 말과 비슷했다. 그때는 흉골이 아니라 과일이었던가. 유령족은 문득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모르는 이의 음성을 새롭다는 표정으로 되새김질했다.
마스터는 그 외에 유령족과 궁합이 좋은 서번트 몇 명을 추려 특이점으로 향했다. 레이시프트, 신체를 영자 단위로 해체해 지정된 시공간으로 전송하는 기술. 인간의 과학 기술은 경이롭지만 그는 그것을 찬양하거나 높이 쳐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에게 동포를 모조리 잃고 외톨이가 된 유령족에게 꺼림찍하고 불쾌한 기술이었다. 안 그래도 쪽수에 밀려 서서히 개체가 줄어들고 있던 유령족을, 단 50여 년 만에 멸망시킨 것이 저 과학기술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면 유령족은 도무지 인간을 좋아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유령족은 현재 인간의 종복이 되어 이리저리 불려다니고 전투를 하고 있는 제 꼴이 초라하다고 자조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이들이 패배하도록 둘 수도 없었다. 칼데아의 패배는 곧 이 땅이 축적해온 역사의 패배다Fate/Go 2부 기준 세계는 현재 크툴루에 의해 인류사가 백지화되고, 가망이 없다 판단하여 사라진 평행세계가 자리를 잡은 상태이다. 유령족의 역사 역시 소리소문 없이 사라질지 모르기에.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그것은 비단 자신뿐만이 아니라, 항상 어딘가 슬픈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또 한 명의 유령족 소년을 위해서였다.
“늘 당부하는 거지만, 레이시프트 후에 특이점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항상 조심해야 해.”
“네이.”
보더의 시스템과 기기를 총괄하는 서번트, 과학자가 마스터에게 주의를 주었으나 레이시프트라면 질릴 만큼 익숙해진 마스터는 주의사항을 살짝 흘려듣고 있었다. 사고란 언제 어느 순간이든 일이날 수 있는 것이거늘…. 유령족은 베테랑이라는 이유로 안일한 태도를 보이는 마스터를 향해 작게 혀를 찼다. 한편으로는 고작 스무 해 남짓밖에 살지 않은 저 인간이 이 대자의 모든 생명을 지고 세계를 수복해야 한다는 임무를 부여받은 것에 동정심을 느끼긴 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저 인간이 가여워서가 아니라, 비슷한 사명을 등에 지고 있는 어린 유령족이 저절로 떠오르기 때문이었다.
곧 레이시프트가 시작되었고, 유령족은 제 몸이 영자 데이터가 되는 찝찝한 감각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무사히 특이점에 도착했을 때, 유령족은 제 곁에 마스터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의외로 마스터는 일행과 떨어져 착지하는 상황이 익숙한지 유령족의 예상보다 훨씬 더 침착하게 대응했다. 유령족은 이 부분에서 그가 평소에는 나약해 빠진 소리를 하지만 유능한 지휘관임을 인정했다. 그는 바로 자신의 위치를 파악한 다음, 원래 목적지와의 거리를 계산하고 유령족에게 꼭 필요한 명령만을 내렸다.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자신을 호위할 것. 그것이라면 전혀 어렵지 않았다. 이곳에 있는 몬스터는 모두 하급이므로, 유령족이 감당할 수 없는 영기는 존재하지 않았다. 남서쪽 방향으로 걸어가면서 마스터는 칼데아와 통신을 시도했으나, 역시나 특이점이 또 다른 문제를 야기했는지 통신은 연결되다가도 금방 끊기기 일쑤였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칼데아 또한 마스터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는 것과 문제 원인을 조사하고 있다는 것 정도였다.
―아무래도 이건 특이점이 마스터와 유령족을 끌어들인 것 같군.
칼데아의 브레인을 담당하고 있다는 탐정이 담배 연기를 흘리면서 말했다. 마스터가 차분하게 질문했다.
“특이점이 끌어들인다고?”
―정확히는 선배와 서번트들이 레이시프트한 순간 해당 특이점에 있던 무언가가 유령족을 탐지하고 억지력을 동원해 그곳으로 끌고왔다, 는 쪽이 더 맞다고 하시네요.
마슈가 옆에서 부연 설명을 해주었다. 유령족은 화면 너머의 기이한 인간 소녀를 한 번 보았다가, 제 옆에서 사태 파악을 하느라 말 그대로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 마스터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그럼 이 인간은 왜 끌려온 거지.”
―글쎄, 뭐 마스터야 이상한 일에 자주 휩쓸리니까 딱히 이상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데!
“인류의 구원자라는 녀석을 이리 허술하게 관리해도 되는 겐가.”
이러니 인간은 몇 백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게야. 유령족은 한심하다며 허공에 중얼거림을 흘렸다가 눈을 부릅 떴다. 안 그래도 작아서 점처럼 보이는 눈이 더 작아졌다. 다른 머리카락에 섞이지 않고 항상 나풀거리는 세 가닥 머리카락이 안테나처럼 바짝 서고.
―선배!
―마스터! 무슨 일이야?!
“급습이야! 그런데 내가 아니라….”
내동댕이쳐진 마스터는 급히 일어나면서 적과 유령족의 동태를 살폈다. 게게로는 마스터를 등진 채 서서 한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미 기습을 한 번 허락해 왼팔에 스친 총상이 남았다. 탄환은 금방 푸른빛 에테르로 산화해 사라졌다. 맞은편 설산 너머에서 영기 하나가 느껴져 급히 시력을 강화하자, 흐릿한 인영이 하나 포착되었다. 마스터가 신속하게 칼데아와 통신을 재개하며 말했다.
“마슈! 다 빈치! 확인했나요?”
“지금 파악 중에 있어! 무기는 뭐였지?”
“총이에요! 높은 확률로 아처, 혹은 어새신, 아니면 라이더나 버서커….”
왜 클래스 선정 기준은 제멋대로인 거야! 마스터는 상대의 정체에 대해 추측하다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비명을 질렀다. 그러는 사이 유령족과 보이지 않는 적과의 대치는 이어지고 있었다. 유령족이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려 총알을 쳐내자, 원거리 공격으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그것은 총격을 중지하고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온다.
―고 감지한 순간, 두 영기가 강렬하게 충돌했다. 유령족이 버티고 선 바닥이 쩍 하고 갈라질 정도의 충격이었다. 으악! 마스터가 단말마를 지르면서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얼굴을 들어 사태를 파악했다.
유령족이 손으로 잡고 있는 것은 도끼였다. 그들에게 익숙한 형태가 아니라, 좀 더 무기에 가까운, 살상용으로서의 도끼였다. 그 자루를 쥐고 유령족을 내리치듯 힘을 주고 있는 사내는, 여러 특이점과 이문대를 거쳐 오며 수많은 영령을 만났던 마스터에게도 낯선 얼굴이었다. 백발에 왼쪽 귀와 눈에 흉터를 달고 있는 정장 차림의 사내. 그 독특한 모습은 칼데아 보드의 영기 일람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너는, 뭔가?”
유령족이 뱉은 질문에 마스터는 순간 그들이 서로 아는 사이임을 직감했다. 그러나 그 예감과 달리 백발의 사내는 얼굴을 찡그리면서 되물었다.
“너는, 뭔데?”
아무래도 그들을 습격한 정체불명의 영령은 아라야의 수호자인 모양이다.
칼데아의 명탐정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수호자로서가 아니라 영령으로서 소환된 건지, 자아가 있다는 게 의외인 부분이지만 때때로 수호자는 임무의 편의를 위해 생전의 자아를 갖추고 현현하기도 한다고 칼데아의 수호자 출신 서번트가 증언했다.
수호자는 철저하게 유령족만을 노렸다. 마스터가 몇 번이나 빈틈을 보였음에도 그는 무시하고 유령족의 목을 노렸다. 그러나 수많은 인간을 척살해오며 살아남은 유령족은 순순히 제 목숨을 넘겨주지 않았다. 마스터는 그들의 전투를 유심히 관찰하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첫째로 영령의 심장이나 다름없는 영핵을 노리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평소라면 간단히 부서버렸을 유령족이 이번에는 영모 팔찌를 이용해 속박을 하려고 한다는 점. 무슨 연유인지는 몰라도 두 사람 모두 상대 영령을 퇴거시키는 것을 꺼리고 있었다.
결국 승패는 판가름나지 않았다. 당장 유령족을 무너뜨리는 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는지 수호자는 마스터가 명령을 내리기 전에 영체화하여 자리를 이탈했다. 재정비 스킬인가, 놓친 건 아깝지만 그래도 꽤나 길게 전투를 치뤘고 통신이 계속 연결되어 있었으니 데이터는 충분히 쌓였을 것이다. 마스터는 자리에서 일어나 유령족에게 질문했다.
“아는 사이였어?”
“아니. 전혀.”
단언하듯이 말한 것치고 유령족은 오랫동안 수호자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봤다. 그러고보니 이자는 정식 영령이 아니라, 키타로의 아버지가 성배의 오탁을 뒤집어써 탄생한 가공영령이다. 그렇다면 오탁을 쓰기 전 아버지의 기억 속에 있는 사람일까. 마스터는 다시 한 번 유령족을 추궁했다.
“혹시 모르잖아. 정말로 만난 적이 있는데, 기억 속에서 지워졌다던가….”
“그럴 일은 일절 없다. 내 기억은 그 특이점에서의 일과 소환 이후가 전부이니까.”
음, 그렇겠지. 마스터는 고집쟁이에 불통인 유령족과 대화를 그만두고 다시 발을 움직였다. 유령족을 노리는 수호자가 있음을 알았으니 더욱 신중하고 조심해서 움직여야 한다. 그들은 근처에 있는 바위나 나무 등에 몸을 숨겨가며 천천히 이동했다. 중간에 다른 서번트들과 연락이 되었는데, 다행히 그들은 재료 수급을 끝내고 마스터와 유령족이 합류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쪽은 별탈이 없어서 다행이야, 마스터가 안도하는 순간 불길한 영기가 그들 사이를 훑고 지나갔다. 방금 전 그 수호자다. 마스터는 바로 유령족에게 명령을 내렸다.
“아버지! 오른쪽 45도 각도!”
“알고 있네.”
유령족이 바로 손을 뻗어 총을 쏘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손가락 끝에서 파란 마력이 뭉쳐 탄환처럼 발사되자, 허공에서 무언가와 부딪쳐 충돌음을 냈다. 몇 초 간격을 두고 두 번째 탄환이 날아왔고, 유령족은 다시 손가락포를 날렸다. 마스터는 첫 발과 두 번째 발의 시간을 재고는 자동식 소총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지금 유령족을 처단하려는 자는 자동소총이 나오기 전이거나, 그것이 보급되어 일반화되기 전 시대를 살았던 인물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언제지? 전략과 전술에서는 뛰어난 감을 발휘하는 마스터지만 전쟁사나 무기에 관한 지식은 일반인 수준밖에 되지 않는 마스터로서는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수호자가 장전하는 사이 마스터와 유령족은 몸을 움직여 근처 바위로 피신했다. 타이밍 좋게 칼데아로부터 통신 연결 요청이 왔다. 창을 열자 과학자와 수호자 출신 영령의 얼굴이 먼저 보였다. 과학자가 설명했다.
―영기 그래프 조사 결과, 놈은 근현대 일본 출신 인물이야. 하지만 대단한 공적을 세운 기록은 없어. 이쪽에 있는 빨간 아처보다도 정보가 없지.
“그렇다면…. 기준 미달인 일반인이 아라야와 계약을 했단 건가?”
―그 과정에서 무언가의 거래가 있었겠지. 세계사, 혹은 일본사의 기록 일부를 바꿀 수 있을 법한 규모의 거래였을 거다.
수호자 영령이 팔짱을 낀 채 덧붙였다. 그는 질리도록 익숙하단 낯으로 말을 이었다.
―그놈의 수법이야 뻔하지. 절박하게 바라는 것이 있으면서 잠재력이 충분한 자에게 다가가 거래를 구한다. 그 소원이 구국求國일 수도 있고, 누군가를 살리는 것일 수도 있고, 생명의 연장일 수도 있지.
“하지만 저 자는 그런 지엽적인 소원으로도 수호자가 될 수 없을 만큼 잠재력도 개연성도 턱없이 부족했다는 뜻이군.”
유령족이 바위 뒤쪽을 흘끔거리며 말했다. 그들의 위치를 특정하지 못한 것도 아닐 텐데, 수호자는 이후 반격을 하지 않았다. 아니면 우리가 바위에서 나와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는 건가. 마스터는 차분하게 숨을 골랐다. 그자의 소원이나 수호자가 된 경위는 지금 상황에서 중요하지 않다. 지금 가장 큰 문제는 수호자의 공격이 끊이지 않는다는 것이며, 집요하리만치 유령족만을 노리고 있다는 것이다. 마스터는 과학자와 명탐정에게 물었다.
“유령족을 공격하는 이유는 알아냈어?”
―음, 아무래도 그 녀석이 얼터인 것과 관련이 있겠지. 그리고 얼터로서 특이점에서 보인 행적도.
탐정은 다시 담배를 한 모금 빨고는 유령족을 가만히 바라보며 말했다. 유령족은 별 감흥 없는 표정으로 등 뒤에 신경을 세우고 있었다.
본래 이 유령족, 그러니까 키타로의 아버지는 평화를 좋아하는 느긋한 성격이었으며, 과거 한 인간의 도움을 받아 키타로가 무사히 태어나고 성장했기에 인간에게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몇몇 요괴는 인간친화적인 유령족 부자를 달가워하지 않았고, 우연히 손에 넣은 오염된 성배를 이용해 키타로의 아버지를 얼터로 물들였다. 사랑하는 가족과의 추억도, 소중한 인간 친우와의 기억도 모두 잃어버린 얼터는 무미건조하게 자신들을 박해한 인간을 학살했다.
―아무래도 그것이 원인이 된 거 같군. 그곳에서 너는 지나치게 많은 인간을 죽였으니까.
“그래서 인류의 억지력이 수호자를 보내 나를 살해하려 했다는 겐가.”
유령족이 기가 차지도 않는다는 듯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 붉은 영령은 어깨를 으쓱이면서 뭐, 대충 그렇지, 라고 대꾸했다. 인간이 우리를 죽인 것에 비하면 새발의 피에도 미치지 않거늘…. 그렇게 중얼거린 순간 유령족은 마스터를 어깨에 대충 짊어진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격이다.”
“뭐? 우왁!”
유령족이 뛰어오름과 동시에 그들이 있던 자리로 폭탄 하나가 떨어졌다. 잠시 후 굉음과 함께 그들이 서 있던 자리가 가라앉았다. 유령족은 공중에서 떠올라 왼손을 내밀었다. 생명을 가진 것처럼 움직이던 영모 팔찌가 작은 손도끼를 칭칭 묶어 떨어트렸다. 방금 전 그들을 습격한 영기가 빠르게 다가왔다. 유령족은 아래로 하강하면서 게타를 투척했다. 유령족의 영기가 실린 게타가 수호자를 향해 날아들었으나 수호자는 그것을 도끼로 간단히 튕겨냈다.
무사히 땅에 착지하자 수호자가 다시 도끼를 던졌다. 마스터는 슈트의 힘을 끌어올려 유령족에게 회피를 걸어주었다. 도끼를 가볍게 피하면서 유령족은 착지한 수호자를 향해 왼손을 내밀었다. 어느 새 수호자의 뒤로 날아온 영모 팔찌가 길게 늘어나 그의 온몸을 칭칭 감았다. 구속되어 균형을 잃은 수호자가 땅에 엎어졌다. 유령족은 천천히 그에게 다가가 눈앞에 쭈그려 앉았다. 수호자도 고개를 들어 유령족을 노려봤다. 노인처럼 하얗게 새어버린 머리카락과 왼쪽 눈과 귀에 남은 화상 자국. 어쩐지 낯이 익은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수호자는 한참 동안 유령족과 마스터를 노려보다가, 이내 패배를 인정하겠다는 듯이 한숨을 쉬면서 설득했다.
“알았어, 당장은 해치지 않을 테니 이것 좀 풀어주지, 게게로?”
“게게로?”
마스터와 유령족이 동시에 중얼거리며 서로를 쳐다봤다.
“너 설마 그런 이름이었어?”
참 희한한 이름이라는 듯이 마스터가 묻길래 유령족은 단칼에 부정하면서 수호자를 향해 물었다.
“이몸에게 이름은 없다. 대체 왜 그런 이름으로 부르는 거지?”
“내가 지은 이름이야. 뭐라도 호칭이 있는 쪽이 편하잖아.”
그가 천연덕스럽게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흠, 게게로. 게게로…. 유령족 사내는 그 이름이 마음에 드는 건지 아니면 석연치 않은 건지, 한참동안 수호자가 지어준 제 이름을 중얼거렸다.
“흠, 그러니까 이제 저 유령족은 인간 학살을 하지 않고 인류사 복원에 도움을 주고 있다는 거지?”
“그렇다.”
수호자의 질문에 유령족은 무미건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다 보니 세 사람은 함께 원 레이시프트 장소로 향하고 있었다. 마스터가 이제 해가 되지 않을 테니 풀어줘도 되지 않느냐고 했지만 게게로―라는 이름이 생긴 유령족은 거부하고 그를 끌고 다녔다. 흡사 죄수를 오랏줄로 묶고 연행하는 사또 같은 모습에 마스터는 이제 맞는 건지 계속 아리송한 채로 걷고 있었다. 수호자 역시 게게로에게 놓아주지 않겠느냐고 호소했으나 그는 거짓말쟁이를 믿지 않는다며 거절했다.
“내가 왜 거짓말쟁이야?”
“이유는 모르지만 내 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네. 자네는 생전에 사소한 거짓말을 하고 다녔어.”
“흥, 그렇게 따지면 저 마스터도 한두 개 정도는 하고 다녔을 걸? 세상에 거짓말을 아에 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어?”
“이몸은 그랬다만.”
“네, 잘나셨습니다.”
어째 두 사람, 서로 으르렁대면서 말싸움 하는 모습이 영 남고생 같지 않나…. 마스터는 그런 생각을 머리 한 구석을 밀어넣은 다음 수호자에게 물었다.
“그런데, 당신 이름은 뭐야? 칼데아의 영기그래프 데이터나 소환 가능한 영령 목록에서 본 적이 없는데.”
“단순히 아직 인과가 형성되지 않아서 그런 거겠지.”
그의 대답을 게게로가 대신했다. 신원 미상의 수호자는 네가 끼어들지 말라고 타박한 후 이름을 불었다.
“확실하지는 않은데…. 아마 미즈키라는 이름이었을 거야.”
―‘확실하진 않은데’? 진명에 대한 기억도 없는 건가? 이쪽의 유령족처럼 진명이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니라?
지금까지 삼인방의 영양가 없는 대화를 가만히 관조하던 명탐정이 끼어들었다. 미즈키는 명탐정을 빤히 바라보다가 귀찮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글쎄다. 아라야에게 거의 모든 걸 넘겨버려서. 누군가가 날 그렇게 불렀다는 기억은 있는데.”
―그렇다면 확실하군. 이 녀석의 소원은 단순히 개인 수준이 아니라, 세계의 인과를 수정해야 하는 수준이었던 걸 거다. 아라야가 악독하긴 해도 진명을 포함한 모든 기억을 가져가진 않아.
“젠장, 나는 대체 왜 그런 계약을 해가지고 이런 고생을.”
선배 수호자의 말에 미즈키라는 수호자는 거친 말을 뱉었다. 이런 고생이라, 아라야의 수호자가 어떤 직책인지 간접적으로 들어 아는 마스터는 마냥 웃지 못했다. 아라야는 인간의 존속 욕구 그 자체. 그 수호자는 시공을 초월해 나타나 인류사의 위협이 될 존재를 학살한다. 말 그대로 미래를 위해 존재하는 살인기계이자 청소부라고, 칼데아의 수호자 출신 영령들은 입 모아 말했다. 저 수호자도 다르지 않을리라. 세계를 위해, 인류의 존속을 위해, 대의를 위해서라는 말로 크고 작은 것들을 베어 왔겠지.
그나저나 세계의 인과를 수정해야 할 만큼의 소원은 대체 어떤 걸까. 마스터는 문득 그가 빌었을 소원의 내용이 궁금했지만 진명에 대한 기억까지 흐릿하다면 아마 본인도 떠올리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마스터는 개인적인 호기심을 뒤로 하고 지도를 확인했다. 열심히 걸어온 덕에 합류지점까진 이제 50미터 정도 남았다. 이 거리라면 천리안 스킬 보유자들에겐 우리가 보이겠지. 인근의 영기를 확인해보니 당부한 대로 다들 흩어지지 않고 잘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옆에서 일렁거리는, 불온한 영기 하나가 섞여 있었다.
“…아버지, 미즈키. 그쪽도 느꼈어?”
“확실히.”
“이거…, 영 불안한데.”
미즈키의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그들의 발치에서 거대한 원념이 솟구쳤다. 푸른 불길이 닿는 곳마다 따끔거리고 이명이 울렸다. 마스터는 저도 모르게 머리를 부여잡았다. 미즈키가 이를 악물로 외쳤다.
“젠장, 쿄코츠다!”
“쿄코츠라고?!'”
쿄코츠라면 수복 전 특이점에서 유령족과 사요라는 여자애가 다루던 그 원령 아닌가? 그 후 몇 번 이곳으로 레이시프트했지만 쿄코츠를 마주한 적은 없었다. 완전히 퇴치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멀리서 마스터의 위기를 알아채고 서번트들이 공격을 시작했다. 그러나 상대는 영체이자 원령인 쿄코츠. 물리공격이 그렇게 쉽게 통할 리가 없었다. 유령족 역시 영모 팔찌를 뻗어 쿄코츠에게 휘둘렀으나 어째서인지 팔찌는 제 힘을 내지 못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사령 특공이나 악 특공 서번트를 데려올걸!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미즈키의 도끼질은 어느 정도 통한다는 부분이었다. 미즈키는 마스터와 유령족을 감싼 물줄기를 끊어낸 다음 무사 착지까지 시키며 말했다.
“아무래도, 내가 임무에 실패했다고 생각해서 대지가 쿄코츠를 추가로 보낸 거 같은데.”
“쿄코츠도 수호자야?”
“그건 아니지만…, 내가 처음으로 죽인 게 쿄코츠였거든. 그 잔류사념 일부를 아라야가 흡수했고.”
그 말을 하면서 미즈키는 골치 아프다는 듯이 얼굴을 찡그리고 이마를 짚었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그 낯빛은 단순히 괴로워하는 게 아니라…. 무언가 중요한 기억을 떠올린 듯 과거를 더듬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미즈키는 그에 대한 이야기를 삼키고 총알을 재장전하며 마스터에게 일갈했다.
“칼데아의 인간, 미안하지만 령주 한 획을 나한테 써주지 않을래?”
“령주? 그거라면 뭐 충분한데…, 알았어.”
령주, 마스터의 증표나 다름없는 그것은 얼핏 보면 마력 덩어리에 불과하지만 그렇기에 서번트에게 어떤 명령이든 내릴 수 있는 강력한 주술이다. 이것으로 보구 전개에 필요한 마력을 제공할 수도 있고, 본래라면 불가능한 임무를 수행할 수도 있다. 정통 령주는 단 3획밖에 없기에 신중하게 골라서 사용해야 하지만 칼데아의 보급형 령주는 24시간마다 수복되니 리스크가 크지 않다. 그래도 절체절명의 순간 외에는 사용을 자제하는 게 최선이지만, 지금 안 쓰면 어디에 쓴다는 건가. 마스터는 호흡을 가다듬고 왼손을 내밀어 명령했다.
“령주로 명한다! 수호자 미즈키, 쿄코츠를 박살내버려!”
소총 끝에 파란 마력이 모인다. 마력은 벚꽃 색이 되더니 방아쉬를 당김과 동시에 응축된 마력이 음속으로 날아갔다. 쿄코츠가 입을 벌리고 총탄을 삼키려고 했으나 쿄코츠의 몸 안으로 들어간 총탄은 더 강한 빛을 내면서 내부에서부터 그것을 터트려버렸다. 쿄코츠의 몸에서 떨어져 나와 흩날리던 물방울은 핏빛 벚꽃잎으로 변해 땅으로 팔랑대며 떨어졌다. 보구인지, 아니면 단순 마탄인지 모르겠지만 위력은 발군이었다.
“어, 라?”
마스터는 미즈키를 격려해주려 했으나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가 있던 자리에는 아직 사라지지 않은 푸른 에테르가 쓸쓸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것이 미즈키의 전력이었나 보다. 유령족과 마스터는 꽤 오랫동안, 짧은 시간이나마 함께였던 수호자를 위해 묵념했다.
“마스터, 이거 봐봐. 유령족의 영기 데이터에 변화가 생겼어.”
강화를 마치고 나오자 과학자가 마스터와 유령족을 불러 업데이트된 정보를 보여주었다. 크게 달라진 점은 없지만 한 가지 눈에 띄는 변화가 있었다. 식당으로 향하던 키타로도 걸음을 멈추고 그들에게 다가와 데이터를 읽었다. 그의 머리카락에 달라붙어 있던 눈알아버지는 짤막한 한 줄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진명 : 게게로.’
+) 수호자 백즈키 루트에서, 게게로는 이와코를 구하는 데 실패하고 류가에게 잡혀버립니다. 미즈키가 죽어가면서 한탄할 때, 아라야가 나타나 계약을 제안합니다. 류가의 착취와 그들에 의한 유령족 사냥이 없던 일이 되면, M도 사라지게 되므로 근현대 전쟁사가 바뀌게 됩니다. 이는 곧 세계사의 일부가 바뀌는 조치이므로, 대가가 많이 필요했습니다.
페그오 인물들의 이름은 마슈를 제외하고는 익명 처리하였습니다. 아마 플레이하신 분들이라면 누가 누군지 바로 알아챘으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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