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으로 태어나
NCP
미즈키 기일 기념
“다시 태어난다면 뱀이 좋겠어.”
죽어가는 내 머리맡을 지키면서 그 녀석은 능청스럽게 말했다. 이제는 무뎌져 영민하지 못한 머리로 곰곰히 그 짧은 문장을 곱씹었다. 지금 여명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은 내 쪽이니 아마 생략된 주어는 ‘미즈키’일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뱀일까. 어째서 따뜻한 털이나 깃털로 덮여 있지도 않고, 네 발이 달려 있는 것도 아니고, 사냥을 해서 남의 목숨을 주워먹고 사는 육식동물인 걸까. 살면서 떳떳하지 못한 짓을 몇 번 저질렀으니 인간이 아닌 미물로 환생할 거라 어림짐작하고는 있었지만 뱀은 좀. 같이 산 지 수십 년이 지났는데 너무 정이 없는 선택지 아닌가. 나는 꺼져 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왜 많고 많은 생물 중에서 뱀이지.“
“후후, 불만스러워 보이는군.”
게게로는 귤을 까느라 노랗게 물든 손으로 내 이마를 가볍게 두드리고는 귤락까지 벗겨내 깨끗한 과육만 남은 귤 조각을 내게 건넸다. 이러느라 귤 까는 데 한참이나 걸렸군. 나는 누워서 받아먹으려다가 때마침 귀가한 키타로의 제재를 받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
“인간은 누워서 먹으면 체한다니까요, 하물며 미즈키 씨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그리고 나에게도 똑같이 잔소리를 한다.
“미즈키 씨도, 힘들다고 누워 있지 말고 계속 일어나 있거나 걸어 다니려고 노력해야 해요.”
엄격한 보호자 같지만 사실은 내 앞날을 조금이라도 늘릴려고 초조해하고 안달복달하고 있음을 안다. 그러니 걱정시키지 않게 더 열심히 돌아다녀야 하는데 이 나이가 되니 몸이 영 말을 듣지 않는다. 알았다면서 나는 주름진 손으로 키타로의 머리를 쓰다듬고 게게로가 까준 귤을 먹는다. 두 알 정도 입에 넣고 천천히 뭉개듯이 먹다가 키타로에게 고자질을 했다.
“맞다, 키타로. 네 아버지가 나보고 뱀으로 태어나란다.”
“뱀…. 이요?”
“오오, 그러고 보니 키타로에게도 아직 가르쳐주지 않았구나.”
키타로가 얼굴을 찡그리면서 되묻자 게게로가 아차차, 하면서 주먹으로 손바닥을 때리는(굉장히 구시대적인) 제스처를 취했다. 그는 다시 귤까기에 집중하면서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키타로야, 네 몸에 빈 공간이 있을 게다. 아마 위장과 간 사이 어딘가겠지.”
“네, 어느 순간부터 느껴지더라고요.”
“자기 신체 내부를 열어보지 않고도 알 수 있다고….”
동고동락한 지 어언 40년 째이다만 들으면 들을수록 유령족은 기이한 존재이다. 머리카락과 혀를 제멋대로 늘리거나 전기뱀장어처럼 고압 전류를 방출하기도 하고, 사물에 영력을 실어 날려보내거나 동물과 소통하는 건 예사고 이제는 몸속을 들여다보지 않고도 알 수 있단다. 이 나이 먹고서도 알게 되는 것이 있구나 하고 신기해하기에는 아직 일렀다. 게게로는 귤락을 벗겨내고 드러난 주황색 알갱이에 감탄하면서 그걸 미즈키에게 넘겨주었다.
“원래 그곳은 뱀을 키우는 장기란다. 뱀에게 먼저 허락을 구한 다음에, 그 안에 뱀을 넣어 키우지.”
“그래서 뱀의 말을 먼저 가르치셨군요.”
뱀을 키워? 전혀 상상도 못해본 장면이다. 나는 속으로 게게로와 키타로의 입속에서 뱀이 기어 나오고, 그들이 먹은 것을 뱀이 같이 나눠 먹는 상상을 했다…. 딱히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게게로는 미즈키가 세 번째 알갱이를 다 먹은 것을 확인하고 새 것을 손에 얹어주며 말했다.
“그렇게 우리의 몸에 살며 영력을 받아먹은 뱀은, 같은 요괴가 되지.”
본래라면 키타로는 진작 뱀을 받아 키워야 했으나 도시와 인근 숲에는 뱀이 살지 않아 오랫동안 그 자리가 비어 있었다고 한다. 게게로 역시 이와코와 살 때까지만 해도 뱀을 키우고 있었으나, 아내를 찾기로 하면서 그와 이별했다고 한다. 지금쯤 어느 울창한 숲의 대장이 되어 있을 거라며 떠나보낸 제 파트너를 회상하다가 게게로는 미즈키의 쭈글쭈글한 손을 잡으며 부탁했다.
“그러니 미즈키, 자네에게 다음 생이라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는 자네가 뱀으로 태어났으면 좋겠다네.”
다시 작은 뱀으로 태어나, 키타로의 뱃속에 들어가서 우리의 정기를 먹으며 자라주게나. 그리고 자네가 요괴가 된다면, 어쩌면 우리는 평생 살 수도 있을 테야.
그 언젠가 달밤 아래에서 술을 나눠 마시며 그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키타로가 성인이 되는 건 보지 못하겠다는 내 목소리 뒤에 따라오던 눈빛. 무언가를 권유하고 싶어하는 눈치였으나 그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결국 이쪽에서 먼저 말을 꺼냈다. 요괴가 되라느니 이쪽으로 오라니 하면서 붙잡을 줄 알았는데. 그러자 게게로는 바로 얼굴을 찡그리면서(화가 나서 찡그렸다기보단 울음을 참느라고 그런 표정이 된 것 같았다) 말했다. 안 돼, 미즈키가 망가져버릴 거야. 그런 짓은 하면 안 돼.
혀를 차면서 고개를 저었으나 나는 그가 정말로 하려던 말이,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진작에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나 역시 인간으로 죽을 생각이었고 게게로는 억지로 밀어붙이지 않았으니 그 이야기는 그 날 밤을 끝으로 더 우리의 화제에 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게게로는 그 뒤로도 이따금 생각했던 것이다. 내가 죽은 다음에도 만날 방법을, 어떻게 하면 우리가 다음 생에서 같은 수명을 누릴 수 있을지를. 그리고 맹한 모습과 어울리지 않게 영민한 구석이 있는 머리로 알아챈 거지. 아직 제 아들의 뱃속에 똬리를 튼 것이 없음을. 그리고 언젠가 제 뱃속에서 동고동락하던 옛 파트너의 존재를.
수작질이라면 수작질이겠으나 그게 딱히 싫지는 않아 더욱 곤란했다. 만약에 다음 생이 있다면 미물로 태어나도 괜찮으니 한 번 더 키타로를 보고 싶다. 상대를 다시 한 번 보고 싶은 마음은 게게로만이 아니었기에.
“그 수많은 뱀 중에서 나를 찾느라 고생하겠네.”
“반드시 찾아낼 걸세. 우리가 미즈키를 못 알아볼 리 없으니.”
게게로가 눈을 휘면서 웃었다. 그의 손을 다시 보니 끝은 노랗다못해 주황색으로 물고, 손톱 사이사이엔 흰 귤락이 잔뜩 끼어 흉했다. 반대쪽 손에 들린 귤도 하도 만지는 바람에 조금 뭉개져 즙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두 내게는 사랑으로 느껴졌다. 느긋하고 불로하며 불사하는 유령족이 내 곁에 머물러준 근 40년의 세월과 똑같은 무게였다. 그들은 내게 부디 다음에도 만나달라고 간곡히 부탁할 자격이 있었다. 아니, 그들에게 부디 다음 생의 나를 찾아달라고 부탁할 자격을 갖춘 건 나였다.
“죽기 전에 찾아야 해.”
젊은 날처럼 장난스럽게 웃어보려 했으나 주름 때문에 쉽지 않았다. 하지만 게게로는 그 순간을 엿본 사람처럼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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