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글

재회의 밤에 약속을

루이네네 #백업

Daydream of RINN by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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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네네 전력60분 서른다섯번째 <소꿉친구>

백업 원본 : https://posty.pe/l1x0nx

로봇연구소 부속 과학관은 규모가 작아 방문객이 적었다. 허나 그것도 옛말, 아이를 데리고 오기 좋다는 소문이 나서 매일 관람 신청이 꽉 찼다. 홈페이지 서버가 터져서 곤혹을 겪은 일도 있었다.

그 사태의 주범, 카미시로 책임연구원은 원래도 많은 업무에다 홍보팀과의 합작 업무가 추가됐는데도 매일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그의 쇼는 특히 아이들에게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다. 보호자로 따라온 부모들까지도 탄성을 터뜨리며 그 세계로 빠져들게 하는 공연이었다.

주어진 공간의 분위기를 뒤바꾸는 희열은 단조로운 일상을 즐겁게 물들이며―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했기에.

무대는 그의 방. 배우, 연출가, 관객, 모두 둘만으로도 충만해서, 감정이 가슴을 가득 채우고도 넘쳐흘렀던 나날. 돌아갈 수 없어 더 애틋하고 찬란한 빛으로 반짝이는 추억.

로봇 쇼 프로젝트의 과정과 결과는 그 파편과 닮아 있어서 마음이 따스해지곤 했다. 의욕에 차서 아이디어를 짜내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비록 낮에는 업무로 바빠서, 파트타이머에게 로봇 조작법을 전수하고는 관여할 일이 없었다만 그것만으로도 족했다.

그러나 이 정도로 괜찮다, 충분하다, 고 느꼈던 건 오만이었는지. 전조도 없는 평화로운 날 가슴 속 호수에 돌이 던져졌다.

아르바이트하는 학생이 눈을 번쩍번쩍 빛내며 가슴 앞으로 내민 것은 생각지도 못한 사람의 사인이었다.

“책임님! 제가 아까 5시 타임에 누구를 봤게요?”

루이는 눈을 깜빡였다. 가느다란 필체, 그리고 모를 수 없는 한자다. 기묘하게도 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목구멍이 턱 조여 왔다. 대꾸가 없어도 그의 커진 눈을 본 상대는 들떠서 말을 늘어놓았다.

“모자랑 마스크 쓰고 있었는데요, 진짜 어디서 본 거 같아서 긴가민가했거든요? 근데 끝나고 마지막으로 나가길래 슬쩍 물어봤단 말이에요?”

학생이 사인지를 팔락팔락 흔들다가 흠칫하곤 소중히 잘 내려놓았다. 그러고도 입은 멈추지 않았다.

“설마 했는데 진짜 쿠사나기 네네!!”

이상한 일이다. 소꿉친구는 유명한 배우가 되어서 타인에게 이름을 듣는 일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때마다 어쩐지 속이 거북해 오던 자신은 대학원을 졸업하며 함께 떨쳐낸 줄 알았다. 아니었던가?

물기로 젖어 있던 보랏빛 눈의 기억이 두통처럼 스쳤다. 사고의 물줄기는 로봇 쇼에 닿았다. 그 애는 무대 위의 휴머노이드 로봇을 보고도 괜찮은 걸까? 아니, 효용 없는 생각이다. 네네는 극복했다. 오만하게도 도움이라 믿었던, 그의 참견 때문에 상처받고도.

여전히 미안해서. 언제나 응원하고 있으니까. 그의 소녀를 의식할 때마다 명치를 난자하는 통증은 아득히 멀어진 거리감 때문이라고, 카미시로 루이는 생각해 왔다.

자발적 반응같이 의문이 떠오른다. 네네는 나를, 보러 온 걸까?

“실물 정말 대박이던데요. 키는 작은데 비율이 엄청 좋고, 얼굴이 엄청 작은데 눈은 커서 진짜 예쁘고, 엄청 상냥하게 이름까지 물어봐 줬어요. 저 이제 팬 될 것 같아요.”

그럴 리 없지. 자의식 과잉이다.

“흐음, 그렇구나. 쿠사나기 씨는 재미있게 보고 가셨을까?”

얼굴을 무너뜨리고 싶지 않아 가장 쉬운 미소를 지었다. 속이 쓰리다.

“그럼요. 이 공연을 안 즐기는 사람도 있나요?”

“후후, 잘됐네.”

평정을 유지할 자신이 없어 적당히 업무 핑계를 대며 빠르게 대화를 끝냈다.

네네가 굉장히 가까이 왔다가 돌아갔다. 연구소는 도쿄도 외곽의 시골에 있었다. 기숙사에서 사는 그는 시부야의 본가에서도, 지금의 네네와도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은 지 오래됐다. 왜인지 섭섭한 마음이 들었지만, 막상 마주쳤더라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고 있단 걸 깨닫자 좀 더 착잡해졌다.

며칠 뒤 네네의 인스타그램에는 과학관 입구가 살짝 보이게 찍은, 마스크로 중무장한 셀카가 올라왔다.

루이는 SNS 계정이 없었지만 네네의 게시글이 연구소 안의 화제로 떠올라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망설이다 그 애의 계정을 찾아보았다. 이것 좀 음침하지 않나, 스스로 생각했지만 멈출 수 없었다.

썸네일 사진으로 본 게시글들은 계정의 주인이 나온 것이 반, 그렇지 않은 게 반 정도였다. 제일 최근에 올라온, 익숙한 배경의 사진을 눌렀다. 웃음기가 남아 있는 눈가. 마스크로 눈 아래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완전한 표정을 완성해낼 수 있었다. 재미있게 보고 간 모양이네. 다행이다.

로봇 쇼 재미있었습니다

짤막한 코멘트 밑에는 해시태그로 연구소와 과학관 명칭이 달려 있었다. 역시 네네다워. 연구소 홍보팀이 기뻐 날뛸 만했다. 루이는 무심코 손끝으로 사진 속 네네의 뺨을 건드렸다가, 옆으로 넘어가자 숨을 짧게 들이켰다.

거기에는 약간 흔들렸지만 로봇 쇼의 한 장면이 담겨 있었다. 15초 정도의 짧은 동영상이었다. 그는 재생되는 장면을 알고 있었다. 빠른 템포로 로봇들이 만담을 주고받는다.

- 인어공주라니 말도 안 돼.

- 왜, 왜? 내 꿈이란 말이야!

- 당연하잖아. 넌 로봇이라고! 물에 들어가면 고장난단 말이야!

관람객들이 웃는 소리, 그리고 가까이서 들리는 나직한 웃음소리. 루이는 그 영상이 몇 번이고 반복되는 동안 물끄러미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 안 있어 연말이었다. 연구소 사회 안에서 한 달 전쯤의 쿠사나기 네네 방문 대소동 여파가 잦아들기에 충분한 사유였다. 어디나 그렇지만 연말은 가장 바빠서, 루이는 복잡한 마음 위에 잠시 천을 덮어 치워두고 몰려오는 일에 매진했다. 아무리 천재라지만 복잡한 절차와 관료적 체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피곤한 일상을 익숙하게 커피로 채워 가며 처리한 뒤 얻은 신년 휴가. 그는 어언 반년 만에 본가로 귀가했다.

부모님과 한바탕 밀린 이야기를 나누고, 익숙한 자신의 방에서 잠든다. 몰아서 낸 휴가라 일주일쯤 그렇게 있다 보니 이젠 자꾸만 떠오르는 어린 시절이 아무렇지도 않아졌다. 더 신경 쓰이는 건이 생겼다는 말이 옳을까.

네네에게서, 정확히는 네네의 소속사에서 명의를 빌려 보낸 메일 연하장. 루이는 아직 그 메일을 열어보지 않았다. 이것도 처음이 아니라 자신도 연하장을 보내 놓기는 했다. 그렇대도 쓸쓸했다. 이 정도가 그들의 사이. 멀어져 버린 소꿉친구. 그렇게 정의당한 기분이니까.

정신을 반쯤 빼놓고 있는 아들을 걱정스럽게 보던 어머니가 넌지시 말했다.

“루이. 오늘 저녁에 네네가 노미네이트된 시상식이 방송된대서, 옆집 쿠사나기 씨네가 초대를 해주셨거든. 별일 없으면 가지 않을래?”

가고 싶은 기분은 아니지만, 거부하고 싶지도 않았다. 루이는 웃으며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이후의 시상식 중계까지 고려한 저녁 식사 초대였다. 바로 옆집이지만, 대학원 입학 이후로는 본가에 오는 일이 드물었다. 쿠사나기 가를 방문하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부모님들끼리 화기애애하게 인사를 하고, 도통 집에 오지 않는 불효자인 루이가 넉살 좋게 웃으며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든다. 식탁으로 발을 옮기다 부엌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네네로보를 마주쳤다.

네네가 애착을 가져서 버리지 못하게 된 것. 고등학생 때 루이는 로봇에 간단한 가사 도우미용 인공지능을 추가했었다. 계속 쓰이고 있구나. 쿠사나기 부부도 네네로보를 아껴서 루이가 없을 때는 같은 전공자인 아버지에게 맡겼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건 그의 발명품이고 예전에 만들어 놓은 토대에 조금씩 덧붙인 구조가 있었다. 분명 아버지가 할 수 있는 것은 제한적이었을 테다.

식사 중 그 로봇의 화제가 나왔기 때문일까. 네네의 어머니는 차를 마시려 거실에 모여 앉았을 때 네네로보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루이 군, 그래서 말인데 얘를 한 번 봐줄 수 있을까? 요즘 영 반응이 느린 것 같아서.”

“그럼요. 자연스러운 노후화라면 조금만 손보는 걸로 끝날 거예요. 걱정 마시고 이야기 나누세요.”

사실 두 부부가 대화를 나누는데 루이가 꺼낼 말이 무엇이 있겠는가. 집중할 과제가 주어진다면 오히려 환영이었다. 예전의 그가 놓고 간 공구 상자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루이는 약간의 향수에 젖어 네네로보의 기판을 열었다.

피닉스 원더랜드의 원더 스테이지가 철거된다는 소식에 네네는 그에게 비밀 지름길을 물었다. 당연히 그 길에 동행했고, 낡은 스테이지에 방치되어 있던 네네로보를 회수했다.

그때 네네는 미안하다고 했었다. 그럴 필요 없는데도. 마음 여려 보이지만 곧은 심지를 품고 있는 다정한 그의 인어공주.

어쩌다가 이렇게 서먹해졌을까? 그건 아마, 그가 포기했을 때 네네는 용기를 내서 다시 무대 위로 올라갔기 때문이다. 중학생 시절과 다를 바 없이 루이는 미숙하기 짝이 없었고, 네네는 오랜 시간 미뤄두었던 과제를 해내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그래서 결과가 이 지경이다.

그가 로봇공학으로 도피하지 않았다면, 하는 가정도 우스웠다. 분명히 다가갈 수 있었는데도 하지 않은 이는, 겁낸 쪽은 자신. 제 본질이 바뀌지 않는 이상 관계가 변하기를 바라는 것도 무의미하지 않나.

“네네로보.”

왜 네네는 널 데려가지 않았을까?

재부팅이 끝나 네네로보의 눈에 불이 돌아왔다. 그는 스스로를 깎아먹는 질문은 그만두기로 했다.


쿠사나기 네네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신인 뮤지컬 배우였다. 그때는 누구나 알 만큼 유명하지는 않았다. 뮤지컬계에서 중요한 조연을 맡으며 연기력과 실력을 입증받았지만 유명세는 팸플릿의 역할 위 얼굴 사진이 붙어 있는 정도였다.

점점 유명한 극에 출연하게 되니 전체 관객 중 네네를 알고 보러 오는 사람의 비중은 늘어나기 힘들었다. 그런데도 공연이 끝나면 관객들이 달리 보고 기억하게 되었다.

루이가 아는 한 네네는 가능성 있는 원석이 아니었다. 이미 두각을 드러내는, 1차 가공을 끝낸 보석이라고 할까. 무대 위에서 몰입하면서도 판단력이 좋고,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때 좌중을 장악하는 배우였다. 극장에서 TV로, TV에서 스크린으로. 규모 있는 영화에 얼굴을 비췄다가 유명 영화감독에게 캐스팅되었다는 소식에 놀라지 않았다.

네네의 첫 상업작 주연.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작년의 상징이 된 뮤지컬 영화. 루이 역시 그 영화를 보았다. 순식간에 매혹되어 빠져들었다.

신선한 마스크와 아름다운 목소리를 지닌 네네는 마치 주인공 캐릭터를 연기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다고들 했다.

다들 모르고 있다. 오래전부터 네네를 봐 온 자신조차 마력에 끌려들어 갈 정도인데. 이건 라이징 스타라 신선한 매력이 있는 정도가 아니야.

어릴 때는 함께 쇼를 했고, 지금은 적어도 네네의 성장을 지켜보고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이조차 자만이었던 거다. 몰라보게 발전해 사람의 마음을 쥐락펴락하고, 관객을 납득시키다 못해 주인공에게 몰입하게 만든다. 꽤 날카로운 눈을 가졌다고 자부하는 그조차도 네네가 아닌 캐릭터에게 사로잡힌 순간이 수많았을 정도로.

성장했구나, 네네. 대견하면서도 속이 아팠다.

세상은 그의 소녀와 사랑에 빠졌다. 박수를 보내며 멋진 이야기를 보여준 영화였다고 칭찬하기만 하면 되는데. 왜 아쉬울까? 역시 그가 만든 무대 위가 아니어도 네네는 멋진 연기를 해내서? 이건 질투일까. 아니면, 나라면 네네를 더….

“아, 시작한다!”

기나긴 시상식 방송과 네네를 보기 위한 모임. 기다림의 시간은 시시콜콜한 잡담으로 채워졌다. 루이는 양식 있는 청년이었기에 적당히 맞장구를 치면서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리면서 그 사람을 생각하지 않기란 무의미한 일이었으므로 당연히 실패했지만.

리무진에서 네네가 내렸다. 차 문 밖으로 쏟아지는 드레스에 호흡이 멎었다.

새파란 드레스를 입은 배우는 강렬한 레드카펫 위에서도 존재감을 발했다. 풍성한 머리는 말아 올려 뒤통수에 고정하고, 애교머리는 약간 말려 뺨 위에서 간당간당했다. 플래시가 터지는데도 당당히 걸어 포토존에 선다. 손을 흔들며 만족스러운 얼굴을 한 모습은 마치 여왕 같았다.

두 부부가 난리인 것도 의식에서 제쳐두고, 루이는 눈을 끔뻑였다. 네네가 참석한 시상식은 몇 번이나 보았지만 이렇게… 압도적인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던가? 온몸으로 스타라고 외치는 듯하다.

소녀는 점점 빛나는 혜성처럼 멀어져 가고 있다. 쫓아가고 싶어도 그는 외톨이 우주선, 우주를 항해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티끌에 불과했다. 한때 그는 대단히 운이 좋지 않았나. 그때 자신의 위치를 알고 있었다면 네네가 다시 돌아와 주었을까?

괜히 그 빛을 쫓았다가 궤도에서 이탈해 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망상 같은 위기의식, 반짝이는 모습에 순수한 찬탄과 아득한 황홀이 뒤섞여 조여드는 심장. 마침내 서글프고 애달파서 바짝 말라 오는 입술을 짓씹었다.

속이 탈 때마다 찻잔을 비웠더니 주전자도 바닥을 보인다.

차례차례 시상이 이어졌다. 네네의 영화는 음악상과 감독상을 받았다. 그때마다 기쁘게 손뼉을 치는 네네가 카메라에 잡혔고, 천천히 여유를 찾은 루이는 전파를 타고 전해 오는 행복을 가만히 음미했다.

자신의 일처럼 기뻐해 주면 된다. 오늘의 주인공은 단연 네네니까, 자신의 너저분한 감정은 잠시 잊자.

조연상 시상이 끝나고 드디어 하이라이트였다. TV 화면을 가득 채운 '여우주연상' 글씨. 그 자리의 모두가 고쳐 앉거나, 손을 모으거나, 숨을 들이키는 등 각자의 방식으로 긴장을 표했다.

후보 호명의 세 번째 차례.

“〈도시의 머메이드〉, 쿠사나기 네네 씨.”

세 번째 칸에 네네를 잡은 카메라가 송출됐다. 기쁜 얼굴로 가슴을 짚고 있었다. 발간 뺨을 하고 카메라를 향해 고개를 까닥인다.

영화 자료화면이 나왔다. 메인 OST이자 네네가 부르는 넘버도 함께 송출됐다. 옥구슬처럼 또렷하고도 아름다운 노랫소리. 이제는 전국민이 다 알게 되었을.

그 다음 후보들도 나왔지만 쿠사나기 가는 긴장과 기대로 가득 차서 방송 내용도 잘 귀에 들어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이름이 들어 있을 봉투를 개봉하고 진행자가 차분히 멘트를 읊었다.

“최우수 여우주연상은,”

네네.

“〈도시의 머메이드〉의 쿠사나기 네네 씨입니다.”

TV 스피커에서 박수갈채 소리가 울리는 동안, 역설적으로 거실은 조용했다.

네네가 수상했다.

2년 전 신인상을 받은 것과 같은 시상식에서, 굉장히 젊은 나이에 여우주연상을 받은 거다. 루이는 네네의 수상을 예측했지만 영화계에는 무지했기에 확신하지는 못했다. 아, 이제 실감이 난다.

벅차올라서 심장의 벽이 터질 것만 같다. 사실은 전신이 충만함으로 터지지 않을까 걱정이다.

정말 잘됐다, 네네. 축하해.

이 말을 직접 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믿기지 않는 듯이 빨개진 얼굴로 일어나,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긴 네네가 이윽고 단상에 도달했다. 주변의 다른 영화 관계자들이 힘껏 박수를 치는 모습이 보였다.

“아, 저어, 정말로 감사합니다.”

저 수줍은 듯 솔직한 표정을 알고 있다.

지금 정말 행복해 보여, 네네.

“이번 작품을 많은 분들이 사랑해 주셔서 행복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상까지 받게 되어서, 이 마음을 감사한 분들께 전하고 싶습니다. 감독님과 각본가님, 제작자님. 함께한 동료 배우 분들과 스태프분들. 무엇보다 극장에서 봐 주신 관객 분들, 감사합니다.”

네네는 평소에는 낯가림이 많고 내성적이지만, 중요한 순간에는 의외로 단단한 모습을 보여준다. 지금이 바로 그런 때였다. 흔들림이 점점 작아지는 또렷한 음성으로 소감을 말하고 있었다. 클로즈업한 카메라가 두 눈에 잔뜩 그렁그렁한 눈물을 잡아낸다.

“그리고 정말로, 이 자리에 오기까지 전폭적인 지지와 응원을 보내주신 부모님께 감사드립니다. 두 분의 딸로 태어나서 기쁘고 자랑스럽습니다.”

딸을 보며 꾹 참고 있던 쿠사나기 내외가 결국 눈물을 보이자 옆에 있던 부모님이 칭찬과 축하, 토닥임을 내민다. 루이도 진심으로 웃으며 한 마디를 보탰다. 그때였다.

“또, 어린 시절 함께 꿈꾸고 무대에 서 준 소꿉친구 카미시로 군에게도 고마움을 전하고 싶습니다.”

생각이 멈추는 것 같았다. 웃고 있던 그대로 마비된 것처럼 꼼짝할 수가 없다.

한쪽 벽면을 차지한 디스플레이를 가득 채우고 네네가 웃고 있다. 눈물을 글썽이면서, 정면을 직시하면서, 보고 있는지 아닌지도 모를 자신을 꿰뚫어 보고 있다.

“이렇게 큰 영광을 받아서, 한고비를 넘겼다는 생각이 듭니다. 보내주신 과분한 사랑에 보답할 수 있는, 멋진 작품활동 이어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그렇게 주어진 짧은 소감 시간이 끝났다. 화면은 남우주연상 이야기로 넘어가고 있었지만, 루이는 여전히 TV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네네, 왜 나를 불렀어? 날 잊어버렸다고 생각했어. 너는 아주 바쁠 테고 신경써야 할 것도 많을 테니까. 굳이 너를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았어. 어쩌면 난 네 반응을 확인하는 게 무서웠을지도 몰라. 그런데 너는 나를, 그때, 굳이.

가슴속 동요는 곧 잦아들었지만, 카미시로 루이는 그 순간을 기억 속에 박제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는 천재였으므로 곧 그렇게 될 것이다. 마치 네네쨩이 그의 쇼를 좋아한다고 말해 주었을 때처럼.


구름이 완전히 물러가 노란 달이 환하다.

눈물과 웃음으로 가득했던 밤이다. 기분이라며 아껴 두었던 술을 딴 여파로 소파에 늘어진 장년 부부들을 편안히 기대도록 해두고서, 루이는 1층 베란다에 걸터앉았다. 겨울 바람이 차갑다.

네네로보가 도와서 뒷정리도 빠르게 끝났다. 한 번 술렁인 가슴이 진정될 기미가 없어서 그렇지. 잡일이라도 하면서 머리를 비워 보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장소의 탓이 아닐까. 자신의 방도 모자라서 쿠사나기 가까지 왔으니까. 추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꾸만 멈춰 서게 된다. 구질구질하도록.

그때, 이 집 앞에서 차가 멈추는 소리가 났다.

가슴이 쿵쿵 뛰었다. 기대하지 말자고 주문을 걸어도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을 때 의식적 통제의 영역을 넘어서 아드레날린이 분비됐다. 심장박동에 따라 빠르게 흐른다. 이게 긴장감일까, 고양감일까.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여자는 루이를 발견하고는 잠깐 놀란 듯이 가만히 섰다.

아름답던 드레스는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었고, 화려하게 틀어 올렸던 머리도 익히 알던 곱슬머리로 늘어뜨렸다. 무심코 달빛 속의 모습에서 신데렐라를 연상해 버렸다.

“루이. …오랜만이네.”

커졌던 눈은 다시 상냥하게 깊어진다. 달이 지나치게 밝아서 그 모든 것이 가깝게 다가왔다. 그는 반사적으로 가장 익숙한 어투를 선택해 대답했다.

“안녕, 네네.”

사박사박 발걸음 소리. 마당을 가르고 현관까지 다가온 네네는 방향을 틀어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때까지도 루이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고 예상대로인 상황에 자조했다. 떠오를 때마다 피하지 않고 깊게 생각했더라면 최소한 이런 머저리는 되지 않았겠지.

그의 얼굴을 본 네네가 툭 말을 던졌다.

“안경 썼네.”

“아, 눈이 좀 나빠졌거든.“

“계속 밤 새우는 거야? 무리하지 말라니까.”

“그게 쉽지 않더라고.”

얼굴을 보는 것은 3년 만.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눈 것은 그보다 더 오래되었다. 오가는 말에서는 어색함도 끊어졌던 시간도 드러나지 않았고, 역설적으로 그래서 편안하지 못했다.

스크린 위도 아닌 눈과 눈을 마주치는 건 정말 오랜만이라 목이 조여든다. 그는 쉬운 주제로 말을 돌렸다. 그에 이르러서야 자연스럽게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아, 그렇지. 수상 축하해. 네네밖에 받을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어.”

“방송 봤구나. 고마워.”

네네가 작게 웃었다. 이제 수상소감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려나, 긴장하고 있던 그는 조곤조곤하게 이어지는 이야기에 삐끗했다.

“나, 얼마 전에 루이가 일하는 곳 갔었어.“

“어?”

“연구소 과학관에서 로봇들이 공연하는 거 봤는데. 잘하던걸. 귀여워서 엄청 웃었어.”

머릿속에서 사고회로가 꼬인다. 연산 순서가 엉망이 된다. 알고 있었어? 일부러 보러 온 거니? 무슨 질문을 던져야 할까. 물어봐도 되는 걸까.

“연락해 줬으면, 좋았을 텐데.”

무의식에 항상 담아놓았을지 모를 생각이 혀끝을 박차고 튀어나간다. 네네가 난처한 듯이 눈썹 끝을 내리며 웃음지었다.

“으응, 루이는 일하는 시간이었잖아. 방해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그때는 이렇게 이야기할 수 없었을 테니까.”

목을 뒤로 젖히면서까지 그를 가만 보고 있던 네네는 낯을 땅으로 내렸다. 잠시 동안은 나뭇가지가 바스락대는 소리가 가장 큰 소음이었다. 루이 역시 무슨 말로 공백을 채워야 할지 몰라 다시 눈을 앞으로 돌렸다. 배려해 주었구나. 그리고 네네는 여기서 마주칠 걸, 알고 있었어.

잠시나마 부조리극의 주인공이 된 기분. 〈트루먼 쇼〉의 한 장면이 떠오르며 어지러운 가운데, 정면을 보고 있던 네네가 다시 고개를 돌려 그를 직시했다.

“루이. 기억나? 내가 「츠카사리온」 공연을 망쳤을 때. 그때 정말 많은 사람한테 미안하고 부끄러웠지만…… 루이한테 제일 미안했어.”

기억 속에 묻혀 있던 공연의 이름. 그리고 생각지도 못했던 말.

왜 네네가 그런 말을 해? 그 일은 내 책임이었어. 네가 연습하는 걸 지켜보지만 말고 같이 있으면서 로봇을 체크했어야 했어. 참견할 거면 확실하게 하고, 그렇지 않을 거라면 로봇을 내밀며 쇼를 하자고 억지를 부리지 말았어야지. 자신이 미숙해서 남에게 폐를 끼친 일은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네네는 그때마다 나를 믿어 줬는데.

상처주고 말았다. 울게 했어.

슬픈 빛을 띤 눈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오래 전의 기억도 방금 전처럼 선명하게 떠오른다. 우후죽순 순서를 다투는 생각이 자라나 할 말을 고르고 있으면, 네네가 우울한 얼굴로 속내를 털어놓았다.

“그 뒤에도 계속 미안했어. 그 일 때문에, 나 때문에. 루이는 더 이상 쇼를 하지 않게 됐다고 생각했으니까.”

“네네 잘못이 아니야.”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는다. 하지만 정말이야, 네네.

여자는 다리를 굽혀 끌어올리고 두 무뤂을 품에 안았다. 어린애처럼 앉은 채로 조용조용히 말했다.

“어리광부리고 있었으니까 루이가 걱정해 준 것도 당연하지. 좀 더 믿음직한 모습을 보여줬어야 했는데. 외면하고 피하기에 급급했어.”

네네는 지그시 눈을 감고, 고백하듯이 읊조렸다.

“사실은 나, 루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서 무서웠어. 이렇게 한심하기만 한 내가, 싫었어.”

물기 어려 금방이라도 잠겨들 듯한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래도, 쇼를 하고 싶어서. 무대 위에 서고 싶었으니까. 열심히 하다 보니, 운 좋게 일은 잘 풀렸지만. 제일 처음의 목표를 잃어버려서.”

그런 줄 몰랐다.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네네를 봐 왔으니까. 멈춰 있는 그와 다르게.

난 항상 이기적이어서 네 옆에 있어야 할 때는 도망치고 없었던 거야.

웃으며 이쪽을 돌아본 여자의 미소가 얼핏 흐려진다.

“…네네.”

“그런 표정 짓지 마.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니까. 오히려 난 루이한테 고마운걸.”

내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데? 무심코 손을 올려 코 아래를 가렸다. 네네의 선해에 양심이 쿡쿡 찔려 온다.

지금 아주 무방비해져 있다는 자각. 항상 입가에 건 미소도 밤의 마력 앞에서는 유지할 수가 없고, 눈앞에는 소녀 때와 다를 바 없는 얼굴로 여자가 속삭이듯 말을 건넨다.

“있잖아, 루이. 나 이제는 믿음직한 배우지?”

“물론이지.”

넌 내게 응답해 준 이후로, 줄곧 내 최고의 배우였어.

지나친 말은 너무 늦지 않게 목으로 삼켰다.

“응. …그럼 나, 다시 루이의 배우가 될 수 있으려나.”

생각에 너무 몰두해서 착각한 건가 했다. 눈을 크게 떴다. 제대로 들었다고 확인해 주는 듯한 네네의 굳센 얼굴. 의지를 가진 사람이 발하는 안정적인 온기. 밤바람이 쌀쌀해 발개진 귀와 코끝이 눈에 밟혔다.

“뭐…?”

“너무 늦게 말하는 거 알아. 그래도 말이야, 나, 루이의 쇼를 제일 좋아하니까.”

“네네. 난―”

“루이, 로봇으로 쇼를 하고 있잖아. 혼자서 꾸준히, 열심히. 아직도 쇼를 좋아하는 거구나 싶어서, 조금 안심됐달까나.”

변명은 듣지 않겠다는 듯이 가로막혔다. 말문이 막혀서 그는 애꿎은 빈 손을 쥐락펴락했다. 네네의 말이 끝나고 나자 간신히 웃는 얼굴을 꾸며낼 수 있게 됐다.

“무슨 말이니, 네네. 지금 최고의 배우가 됐으면서. 나는 네네의 관객으로 충분해.”

“응. 극장에 있을 때는 항상 첫 공연에 꽃을 보내 줬지? 리시안셔스로. 볼 때마다 힘이 났어. 그것도 고마워. 루이는 서툰 인어공주였던 내 첫 번째 관객이었잖아. 그 이후로도 계속.”

모를 거라고 생각했던 일들은 네네의 손바닥 안에 있었다.

이러지 마, 네네. 나를 착각하게 두지 말아 줘. 그렇게 상냥하게 말하면 내가 여전히 너의 하나뿐인 소꿉친구였던 때로 돌아간 것 같잖니. 달라진 게 없는 나는 또 너를 배려하지 못하고 상처입힐지도 모르지.

그러나 뒷걸음쳐 멀어지기에는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외로웠다.

“하지만 루이, 난 약속을 지키러 왔어. 오래전에 소꿉친구와 맹세했거든.”

네네가 한숨을 들이키고 눈웃음을 짓자, 조금씩 엿보이던 긴장과 불안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이 자리의 공기를 자연스럽게 자기 것으로 만들어서, 숨죽이고 몰입하게 만든다. 상대의 반응을 자연스럽게 유도해 극을 제 선로로 올려놓는 프로페셔널리티.

루이가 그렇듯이, 쿠사나기 네네는 소꿉친구의 성격을 잘 알아서. 의뭉떨며 빠져나갈 구석 앞에 버티고 서서는 손을 내민다.

“다시, 같이 쇼 하자.”

남자는 답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것처럼 멀거니 소꿉친구를 바라보았다.

극적인 조명도 필요 없어. 달이 너를 환하게 비추고 있으니까. 배경음악도 소용없어. 지금 내 귀에는 어떤 음악도 들리지 않을 지경이거든. 무대가 다 뭐겠니. 네가 내 옆에 앉아 있는 지금 더 특별한 공간은 세상에 없을 거야.

밤바람이 불었다. 네네의 머리카락은 들풀처럼 흩날리고, 그의 가슴도 파도치며 술렁인다. 굳건한 눈동자 안에 자신이 담겨 있다. 어느샌가 마음이 고동쳤다.

우리 둘은 이렇게 될 운명이었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건 필연이니 법칙이니 그런 게 아니야. 왜냐하면 네가 손을 뻗어 주었기 때문에. 나는 항상 너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응, 그럴까?”

돌고 돌아서, 카미시로 루이는 아주 오랜만에 소꿉친구와 재회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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