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세카

미노하루미노, 연기와 현실은 다르다

재업

키리타니 하루카는 양손으로 가방의 손잡이를 쥔 채 복도를 걸었다. 시간은 이제 오후 5시 30분을 넘어 정규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하루카는 교과서와 노트, 그리고 필기구가 들어 조금 묵직하게 느껴지는 가방 옆에서 열쇠고리-하루카가 좋아하는 펭귄이었다-가 짤랑이는 소리를 들으며 기분 좋게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따라 느낌이 좋았다. 특별히 좋은 일이 벌어진 것은 아니었으나 유달리 마음이 들뜨는 것을 보면 어쩌면 좋은 일이 생길지도 몰랐다. 혹시 미노리가 찾아오려나. 하루카는 낮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제 MORE MORE JUMP! 모두와 함께하는 연습이 끝난 후 미노리가 반 행사 준비로 오늘 연습에 오지 못하겠다고 한 말을 들었는데도 미노리와의 만남을 기대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그때 미노리는 정말 미안해 죽겠다는 얼굴로 연신 사과를 반복하면서 오늘 연습에 빠지는 만큼 다음에는 2배, 아니, 3배, 아니, 10배로 노력할 것이라는 포부를 남겼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미노리의 각오는 아이리의 핀잔에 금방 사그라들었다. 빠진 만큼 노력하는 건 당연하지만 10배까지는 노력하지 않아도 돼!

후후, 하루카는 다시 웃음소리를 내었다. 아이리의 말에 바로 어깨를 늘어뜨렸다가 곧장 기운을 차리고 주먹을 쥐며 ‘그럼 2배로 노력하겠습니다!’라고 외치는 미노리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미노리는 세상에 존재하는 밝음과 노력과 반짝임을 하나로 뭉쳐 예쁘게 빚어낸 사람 같았다. 특히 하루카의 예상을 뛰어넘는 긍정성을 보여줄 때, 하루카는 자기도 모르게 미노리를 멀거니 쳐다보고만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건 어둠 속에서 아름답게 반짝이는 빛을 보는 것과 같았다. 그렇게 하루카는 홀린 듯이, 어떤 강제력에 묶이기라도 한 사람처럼 미노리를 뚫어져라 보곤 하였는데, 단 한 번도 미노리가 그 시선을 눈치챈 적이 없어 바라보는 이유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있었지만 그것은 분명 사랑이었다.

키리타니 하루카는 하나사토 미노리를 사랑한다. 명제는 당연하다는 듯 하루카의 마음에 자리 잡았다. 하루카는 그것을 거부하지 않았다. 거부하기에는 미노리라는 존재가 너무 사랑스러웠다. 하루카는 잠시 복도에 멈춰 서 창문에 비친 자신을 응시한 채 고민했다. 미노리를 생각하고 있으니 미노리가 보고 싶어졌다. 그렇지만 당장 미노리를 보러 가도 되는지 선뜻 확신이 서지 않았다. 갑자기 찾아갔다가 행사 준비를 방해하게 되지나 않을지 걱정이 되었다. 하루카는 입술을 앙다문 채 망설였다. 유리창에 비친 모습은 언뜻 보기에 덤덤해 보였으나 얕게 주름진 미간에서 고민이 느껴졌다. 우뚝 서 있는 하루카의 옆으로 학생들이 두세 명 지나갔다. 그 순간, 그녀의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루카―!”

한창 행사 준비로 바빠야 할 미노리가 저 복도 끝에서부터 열심히 뛰어오고 있었다. 꽤 오랜 시간 돌아다녔는지 멀리서 보이는 미노리의 얼굴은 새빨갛게 물들다 못해 땀으로 젖어 있어 힘들어 보였다.

“미노리?”

하루카가 조용히 미노리의 이름을 읊조렸다. 그사이 미노리는 하루카의 앞에 당도해 헉헉거리며 숨을 골랐다.

“흐아아. 하루카, 아직 가지 않아서 다행이다…….”

기운 빠진 목소리에는 채 가시지 않은 안도가 담겨 있었다. 미노리는 몸에서 힘을 빼고 두 손으로 무릎을 짚은 채 좀 더 편하게 숨을 고르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얇고 곧은 갈색 머리카락이 중력에 이끌러 사르르 미끄러져 내려갔다. 하루카는 잠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시야에 담다가 눈을 깜빡이고 미노리의 정수리로 눈길을 돌렸다. 처음 미노리를 봤을 때의 의아함은 사라지고, 어느샌가 표정은 온화함으로 가득 찼다. 하루카는 가만히 서서 미노리가 진정하고 말을 꺼낼 때까지 기다렸다. 본래도 재촉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대상이 미노리가 되어서 그런지 이렇게 기다리는 일이 제법 기껍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하루카는 미노리가 자신을 찾아올 일이 무엇일지 생각하며 미노리가 할 말을 예상해보았다. 급하게 찾은 걸 보니 무언가 부탁하려고 하는 걸까? 아니면 아이돌 일과 관련하여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있는 걸까?

“하루카! 부탁이야. 저 좀 도와주세요!”

전자였구나. 하루카는 두 손을 맞대며 거의 빌 듯이 부탁하는 미노리의 행동에 기쁨과 난감함을 동시에 담은 웃음을 흘리고는 차분하게 되물었다.

“내가 뭘 도와주면 돼, 미노리?”

“으으, 하루카 고마워! 그게 있지……”

미노리가 원통으로 말아 손에 꼭 쥐고 있던 종이 뭉텅이를 펼쳐 하루카에게 보였다. 하루카는 미노리가 보여준 종이를 슬쩍 훑어봤다. 하얀 종이에는 검은색 글자가 가지런하게 인쇄되어 있었다. 대충 보기만 해서는 무슨 내용인지 알기 힘들었다. 간간이 눈에 들어오는 몇몇 문장들을 통해 이것이 어떤 이야기를 써놓은 것임을 짐작해 볼 수 있었지만 그게 전부였다. 하루카는 뺨에 손을 얹고 고개를 기울였다. 미노리가 이것과 관련해서 어떤 도움을 구하려고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황에 하루카의 표정이 점점 묘해지자 미노리는 다급하게 설명을 추가했다.

“이건 이번에 우리 반에서 준비하는 연극 대본이야! 그런데…… 주연을 맡고 있던 친구 중 하나가 사정이 생겨서 무대에 설 수 없게 됐어! 그래서 그 친구가 하기로 한 역을 다른 사람이 맡기로 했는데……”

“그게 미노리 너구나.”

“맞아! 역시 하루카야! 먼저 이야기하지 않아도 알 수 있구나!”

이후 여느 때와 다름없이 미노리의 긴 칭찬 세례가 시작됐다. 부탁보다도 하루카의 장점을 이야기하는 걸 우선시하는 모습은 어딜 봐도 최애에 관해 즐겁게 이야기하는 오타쿠의 전형이었다. 하루카는 이전의 경험을 기반으로 이번에도 쉽게 미노리의 흥분이 가라앉지 않으리란 걸 예감하고 좀 전과 달리 조심스럽게 말을 끊어냈다.

“그래서 미노리, 내가 뭘 도와줘야 하는지 알려줄 수 있을까?”

“아, 맞다! 하루카! 저한테 연기를 알려주세요!”

연기? 하루카가 속으로 되묻는 동안 미노리는 반짝이는 눈으로 하루카를 열렬하게 바라봤다. 하루카가 연기에 관해 알려줄 것이라고 믿어마지않는 눈빛이었다. 하루카는 살짝 아득해지는 기분에 웃는 얼굴 그대로 표정을 굳히고 조그맣게 침음을 흘렸다. 아무리 그녀가 연예계에 오래 몸을 담았다고 해도 하루카는 아이돌이었지, 배우는 아니었다. 연기에 관해서는 문외한과 다름없다는 뜻이었다. 미노리도 이를 모르지 않을 텐데 어째서 자신에게 찾아왔는지, 하루카는 알 수 없어졌다.

“미노리, 미안해. 하지만 난 연기는…….”

잘 못 해.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미노리가 외쳤다.

“괜찮아!”

“그렇지만 미노리, 무대에 서기로 했다면…….”

“그래도 괜찮아! 나, 연기를 정말 못 해서 대사를 할 때 딱딱한 로봇처럼 느껴질 정도야. 그래도 다른 사람들 하는 만큼은 할 수 있도록 하고 싶어. 물론 하루카가 연기를 해본 적 없다는 사실은 알아! 하지만 당장 생각나는 사람이 하루카 밖에 없어서…… 물론 하루카가 어렵다면 무리해서 도와주지 않아도 괜찮아!”

미노리는 최대한 밝고 긍정적인 목소리로 이야기했지만 그 밑에 깔린 불안까지 완전히 감추지는 못했다. 하루카는 손바닥으로 뺨을 문지르며 고민했다. 그녀도 가능하다면 미노리를 도와주고 싶었지만 잘 모르는 영역에 함부로 말을 얹어 오히려 미노리의 방해가 되지 않을지 걱정되었다.

“아이리랑 시즈쿠는?”

“아이리는 아이리네 반에서 준비하는 행사로 바쁘댔어. 시즈쿠는 부활동도 하니까 시간 맞추기가 힘들 것 같아…….”

미노리에 대답에 하루카는 가능한 사람이 자신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노리는 초조함이 가득 담긴 기색으로 전전긍긍하며 하루카의 눈치를 보았다. 그녀 딴에는 부탁받는 사람이 부담을 느끼지 않게 하려고 웃는 얼굴로 도와주지 않아도 자신이 노력하면 어떻게 할 수 있으니 괜찮다는 어필을 계속하였지만 도리어 그 행동이 곤란함을 더욱 부각했다. 하루카는 가만히 미노리를 살핀 뒤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어쨌든 하루카는 미노리를 사랑했고, 사랑하기에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도와주고 싶었다. 그리고 내심 이렇게 미노리가 의지해주는 것이 기쁘기도 했다. 결국 이건 하루카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 무언의 허락에 미노리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하루카, 정말 고마워!”

미노리가 하루카에게 달려들어 그녀를 두 팔로 감싸 안았다. 기쁨으로 가득 찬 미노리의 표정은 하루카의 심장을 간질간질하게 만들었다. 하루카는 포옹에 팔뚝이 눌린 채로 팔꿈치만 접어 미노리의 등을 쓰다듬었다. 피부에 닿는 미노리의 체온은 따뜻했고, 하루카는 심장에서 느껴지는 간질거림과 온기에 기분이 들떠 자꾸만 웃음이 났다. 미노리는 그런 하루카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따라 헤헤 웃음소리를 흘렸다. 늦은 오후 복도에서는 두 사람의 웃음이 화음을 맞춰 울려 퍼졌다.

* * *

도와주기로 한 이상 하루카에게 대충은 없었다. 하루카는 미노리에게 부탁받은 다음 날 도서관에서 연기와 관련된 책을 골라 빌리고 연기를 잘 아는 지인에게 물어 기초적인 연기를 배워 미노리를 가르쳤다. 하루카가 미노리를 위해 큰 노력을 기울인 만큼 도움은 엄했다. 미노리는 하루의 3시간은 무조건 하루카와 함께 연기 연습을 해야 했다. 이것도 가장 적은 시간이었고, 사실상 그들은 필수적으로 해야 하는 일을 제외한 남은 시간 전부를 연기 연습하는 데 썼다. 다행스럽게도 미노리나 하루카나 노력에 많은 신경을 기울이는 사람들이라서 긴 연습 시간은 둘에게 힘겨움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너무 많은 시간을 연습하는 데 쏟아 밤늦게 집에 돌아가는 것이 문제가 될 정도였다. 이것도 하루카가 연습 시간을 제안하면서 어느 정도 해결되었으나 종종 미노리의 의욕이 넘쳐흐를 때가 있어 잘 지켜지지 않았다.

오늘도 그런 날 중 하나였다. 하루카는 보랏빛으로 어둑해져 가는 하늘을 올려다보다 미노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미노리는 주먹을 꼭 쥔 채 대본에 적혀 있는 대사를 열심히 외고 있었다. 맨 처음 미노리가 말했던 대로 로봇과 같이 딱딱했던 연기는 꽤 부드러워져 보통 사람보다 조금 더 나은 연기를 보여줬다. 암담함을 주었던 시작에 비하면 크나큰 발전이었다. 그간 미노리가 들였던 노력이 빛을 발한 것이다. 하루카는 어쩐지 마음이 뭉클해져 가슴 중앙에 손을 얹고 옅게 미소 지었다.

“미노리, 이만 돌아갈까?”

슬슬 귀갓길이 걱정되기 시작한 하루카가 물었다. 미노리는 하루카의 목소리에 연기를 멈추고 허둥대며 “잠깐, 잠깐만!”을 외쳤다.

“나 조금만 더 연습할게! 오늘이면 연습도 마지막인걸!”

“괜찮겠어?”

“응, 괜찮아! 하루카는 먼저 돌아가도 돼. 나는 이것만 조금 더 보고 돌아갈게! 앞으로는 상대역을 하는 친구랑 맞추면 되니까 하루카는 편하게 가도 괜찮아. 지금까지 고마웠어 하루카!”

너는 마지막까지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는구나. 하루카는 심장이 거세게 뛰는 듯한 느낌에 주먹을 꽉 쥐고 고개를 숙였다. 왜인지 얼굴이 뜨거워졌다. 부끄러움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설렘에 가까웠다. 그러나 하루카는 그것이 전부가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심장 한구석을 갉아 먹는 감정은 마냥 반짝인다고만 보기에는 어둑했고 뾰족한 바늘에 찔린 것처럼 미세한 통증을 자아냈다. 하루카는 어째서 노력하는 미노리를 보면서 이런 느낌이 드는지 알 수 없었다. 미노리가 먼저 돌아가라고 해서 그런 걸까? 정의되지 않은 묘한 감각이 가슴을 들쑤셨다.

하루카는 붉어진 얼굴을 애써 가라앉히고 바닥에 놓아둔 가방 위에 올려둔 대본을 손에 쥔 뒤 미노리를 향해 다가갔다. 지금 드는 감정이 어떻든 미노리가 마지막까지 노력한다면, 하루카는 그 마지막까지 미노리 옆에서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내가 상대역을 해줄게.”

“정말!?”

미노리가 반색하며 되물었다. 여태껏 연기를 알려주는 데 집중하느라 상대역을 해준 적이 별로 없으니 기쁜 것 같았다. 그러나 곧 차분하게 표정을 다듬으려는 것이, 연습을 도와주다가 하루카까지 늦게 돌아가게 되면 어쩌나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하루카는 미노리에게 괜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할까 하다가 미노리가 거절함으로 서로 괜찮다며 실랑이를 벌이게 될 미래가 예상이 가 바로 대본에 적힌 대사를 외웠다.

“아아― 히카리. 너는 내게 너무 눈이 부셔.”

하루카가 미노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맥락 없이 튀어나온 말과 행동에 어리둥절해하던 미노리는 곧 하루카의 의도를 깨닫고 자신도 따라서 연기를 하기 시작했다.

“우미, 어째서 그렇게 불안해하는 거야? 나는 네가 왜 그런 표정을 짓는지 모르겠어.”

미노리가 하루카의 손 위에 자기 손을 올리고 슬픈 얼굴을 만들어냈다. 이 부분은 극 중 인물인 히카리와 우미가 대사를 주고받는 장면이었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 두 사람은 독백에 가까운 말만 전할 뿐 진정으로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다. 그들은 진심으로 서로를 사랑했지만 히카리는 우미의 속마음을 전혀 알지 못했고 사랑을 제대로 표현하지도 못했으며, 우미는 반짝이는 히카리를 동경하고 사랑하나 언제든 멀어질 것 같은 불안감에 하루하루를 초조해하며 보냈다. 하루카는 이 대본을 만든 사람이 내용을 정말 잘 짰다고 생각했다. 이상하게 이 대목을 볼 때마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너는 모르겠지. 언젠가 너는 내 곁을 떠나게 될 거야. 히카리, 나는 네 반짝임이 사랑스러우면서도 두려워.”

우미-하루카가 히카리-미노리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러나 맞잡은 손은 언제든 미끄러져 내려갈 수 있다는 듯 힘이 없었다. 우미의 마음은 불안으로 점철돼 있었다. 그런 우미의 손을 히카리가 조심스럽게 잡았다.

“나의 반짝임은 우미 네게서 왔다는 걸 아직도 몰라주는 거야? 나는 우미가 있어야 빛날 수 있어.”

“뭘 모르는구나, 히카리. 너는 이미 혼자서 빛나고 있어. 너에겐 이제 내가 필요 없어. 너에겐 많은 사람이 생기겠지. 그때 과연 내가 있을 자리가 있을까?”

“나에게 우미는 우미 하나뿐이야. 왜 그걸 부정하는 거야?”

히카리가 약하게 호소했다. 우미는 히카리의 시선을 피해 아래로 고개를 떨궜다. 그녀는 히카리의 말을 믿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는 없었다. 우미는 두려웠다. 히카리는 너무도 빛이 났다. 반짝이는 사람들은 늘 타인의 관심을 모았고, 그렇기에 그들의 주변은 늘 사람이 북적였다. 지금은 아직 그 빛이 널리 알려지지 않아 아주 적은 사람들만 히카리의 옆에 존재했으나 시간이 지나면 더 많은 이들이 그의 곁에 생겨날 것이다. 우미는 그런 히카리 옆에 있을 자신을 상상했다. 그러자 우미의 손에 힘이 풀리며 맞잡은 손은 틈 사이로 쉽게 미끄러져 빠져나갔다. 우미가 말했다.

“네 안에서 내가 차지하는 자리가 아주 작아질 테니까.”

하루카는 이어서 대사를 내뱉지 못하고 그 자리에 멈춰선 채 뻗었던 팔을 밑으로 늘어뜨렸다. 눈에서 눈물 한줄기가 흘러내리며 뺨을 타고 턱에 괴인 뒤 바닥으로 떨어졌다. 미노리는 하루카가 눈물을 보이자 깜짝 놀라 대본을 내팽개치고 달려왔다. 그녀는 허둥지둥 말을 쏟아내며 하루카의 주변을 뱅뱅 맴돌았다. “하루카 괜찮아?”, “혹시 무슨 일 있었어?”, “눈이 아파?” 대부분이 하루카를 향한 걱정이 담긴 말이었다. 하루카는 그에 대답해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차마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어 아래를 내려다본 채 고개를 좌우로 돌렸다.

어떤 말들은 어느 순간 속에서만 이해할 수 있었다. 하루카는 이전까지 대화 속 우미가 어떤 심정으로 이런 말을 하는지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이때, 정의할 수 없던 감정을 느끼고 미노리의 상대역을 하며 그것을 말로 하는 순간 하루카는 우미의 마음을 이해함과 동시에 자신이 미노리가 돌아가라고 했을 때 느꼈던 감정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미노리는 언젠가 하루카의 도움을 필요하지 않게 될 것이다. 앞으로는 상대역을 할 아이와 대본을 맞추면 되는 것처럼, 하루카 외에 다른 사람이 생겨나고 그들에게도 도움을 구하게 될 것이다. 미노리는 아직 미숙하고 빛이 미약하여 많은 사람이 알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이었으니까. 하루카는 언젠가 사람들이 미노리의 반짝임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좋기만 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몰랐다.

“나는 괜찮아 미노리.”

하루카는 안절부절못하는 미노리를 다독이며 활짝 미소 지어 보였다. 미노리는 잠깐 의심했지만 하루카의 얼굴을 보곤 괜찮다고 생각되었는지 따라서 환하게 웃었다. 하루카는 속이 따끔거렸으나 한편으로는 생각보다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하루카는 우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녀는 우미를 이해할 수 있었지만 우미처럼 미노리 안에서 제 자리가 작아지는 것이 불안하여 초조하기만 하지 않았다.

하루카를 향한 미노리의 마음은 얄팍한 불안마저 금방 날려버릴 만큼 확실했다. 비록 미노리의 마음이 하루카와 같은 사랑을 담고 있지는 않았지만 하루카는 이 마음이 언제든 같아질 수 있다고 믿었으며 설령 같아지기 전에 줄어들더라도 꾸준하리란 사실을 알았다. 그렇기에 하루카는 미노리에게 다가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포근한 온기가 하루카의 가슴 속에 남은 초조함을 쓸어내렸다. 불안마저 녹여내는 확실한 온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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