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시즈, 그림자는 빛을 이길 수 없다
NCP
아리사는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당당한 걸음으로 세트장 밖을 향해 걸어갔다. 등 너머에서 전 QT, 이제는 MORE MORE JUMP!로써 활동하는 모모이 아이리가 쏟아내는 불만이 들려왔지만, 그것이 세트장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아리사의 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어떤 방식이 되었던 그는 히노모리 시즈쿠에게 하고 싶은 말을 했고, 히노모리 시즈쿠는 그것에 대한 나름의 대답을 돌려주었으니 더는 뒷일을 신경 쓸 필요 없었다.
세트장을 나서는 아리사의 움직임이 점점 더 빨라졌다. 얼마 걷지 않았는데 아리사의 몸은 벌써 조명을 떠나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한눈에 잡아끌 만큼 화려했던 세트장과 달리 그 경계를 벗어난 곳은 회색빛 철골과 휑한 공간만이 밖으로 나가는 사람들을 문밖으로 서늘하게 밀어냈다. 차가운 공기가 아리사의 목덜미를 간지럽히며 그의 걸음이 점점 늦춰졌다. 복도로 나가는 문에서는 세트장보다는 밝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환한 빛이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아리사는 빛까지 딱 한 걸음 남은 상태에서 나아가는 걸 멈추고 그 자리에 우뚝 섰다. 그의 가슴이 알 수 없는 감정으로 술렁거렸다. 그건 대본에 없는 질문을 시즈쿠가 흠잡을 곳 없이 차분한 모습으로 대답했을 때부터 계속되었다. 아리사는 지금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이 분노인지, 질투인지, 그도 아니면 절망인지 확실하게 정의할 수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시즈쿠를 겨냥한 기습공격은 통쾌함보다는 불쾌감을 더 크게 남겼다는 것이다. 지금 와서는 무얼 바라고 그런 질문을 한 것인지 그는 떠올릴 수 없었고, 떠올리고 싶지도 않았다.
“계속 힘내 봐…….”
아리사는 멀뚱히 발끝에 닿은 빛을 응시한 채 자신이 시즈쿠에게 남긴 말을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그건 진실로 그가 의도하고 한 말이 아니었다. 그의 무의식이 의지와 무관하게 멋대로 뱉어낸 것일 뿐이었다! 히노모리 시즈쿠가 Cheerful*Days를 탈퇴하고 그들의 인연은 완전히 끝이 나다 못해 최악으로 치달았는데 응원 같은 걸 남길 의리가 있을 리 없지 않은가. 아리사가 비꼼에 가까운 태도로 상대를 응수한 것도 결국 그러한 맥락에서였다. 설사 바뀐 상황에 친밀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고 하더라도 히구레 아리사와 히노모리 시즈쿠는 무슨 짓을 해도 결코 사이가 좋아질 수 없었다. 서로 다른 그룹으로 갈라져 인연은 끝났으나 과거는 변하지도, 사라지지도 않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리사는 시즈쿠에게 사과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아리사의 시야가 부옇게 변하며 앞코에 놓인 빛이 조금씩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흔들거리는 빛과 더불어 사물 또한 형체를 잃고 울룩불룩한 모양으로 아리사의 눈에 비추어졌다. 마치 작금에 그의 마음이 일그러진 시야로 표현된 것 같았다. 아리사는 그것이 시즈쿠를 향한 감정처럼 못생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즈쿠가 Cheerful*Days에 있을 적에는 떠올리지도 못한 생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는 모든 게 시즈쿠 잘못이었다. 그렇기에 아리사는 한 점의 부끄러움 없이 자신의 행동에 당당할 수 있었다.
누군가는 가지고 싶어도 가지지 못하는 자리를, 단지 아름답다는 이유로 차지해 놓고는 어정쩡한 태도로 활동을 이어간 게 시즈쿠였다. 그래도 아리사는 참을 수 있었다. 시즈쿠가 언제 실수를 저지를지 몰라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던 것도, 시즈쿠의 백댄서 비슷한 것으로 취급받으며 그룹 외 활동은 잘 받지 못했던 것도, 시즈쿠가 외부 활동을 하느라 라이브 연습에도 자주 빠졌던 것도, 아리사는 정말 다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생방송 촬영을 이유로 극장 공연에 빠졌던 일은 용서할 수 없었다. 심지어 시즈쿠는 극장 공연에 나오기 위한 노력도 제대로 하지 않았었다. 시즈쿠를 보기 위해 비싼 돈을 들여 티켓을 사고, 먼 거리를 이동해 공연장까지 오는 팬들이 많다는 걸 모를 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아리사를 더욱 화나게 한 건 시즈쿠가 자신은 센터를 하기엔 역부족이라며 다른 사람이 그 자리에 있었어야 한다고 말했던 것이었다. 아리사는, 아리사는 가능했다면 자신이 센터에 서고 싶었다. 그 자리는 아리사에게 죽을 만큼 손에 넣고 싶은 기회였다. 그런데 히노모리 시즈쿠는 외모로 얻어걸린 것뿐이면서 그것을 언제든 가볍게 버릴 수 있는 자리처럼 말하며 아리사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언젠가 아리사가 시즈쿠에게 말했던 것처럼, 시즈쿠는 단 한마디로 아리사의 마음을 짓밟아 버린 것이다. 아리사는 눈가에 고인 눈물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눈에 힘을 주었다.
“그런데 네가 그렇게 대답하면……!”
이 악문 외침이 아리사의 입에서 조그맣게 비어져 나왔다. 아리사의 머릿속에는 어느 쪽이 진짜 시즈쿠냐는 질문에 그가 했던 대답 중 일부가 계속 맴돌았다.
‘원래의 나만이 전할 수 있는 게 있다고…… 꾸밈없는 평소의 내가 좋다고 말해 주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야. 그때도 지금의 나와 마찬가지로…… 팬들에게 희망을 전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활동했으니까.’
그 말은 아리사에게 놀라움을, 그다음에는 그의 몇 배가 넘는 당혹스러움을 안겨다 주었다. 그 순간의 시즈쿠는 그 자리에 있는 누구보다도 아이돌다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리사는 시즈쿠가 아이돌이라면 응당 가져야 하는 자세를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다는 말을 믿을 수 없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시즈쿠의 캐릭터가 제대로 잡히기도 전, 그가 혼자 남으면서까지 연습을 이어간 시절 또한 있었다는 걸 불현듯 자각했다. 그 시기 시즈쿠는 어쩌면 아리사가 아주 조금은 인정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초기에는 시즈쿠가 실수해도 커버해 주겠다고 담담하게 협력에 수긍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한때였으며, 그 이후 시즈쿠의 태도는 실망스럽기만 했다는 것을 아리사는 잊지 않았다. 만약 아리사가 시즈쿠와 같은 상황이었다면 아리사는 팬을 위해서, 그리고 Cheerful*Days를 위해서 죽을힘을 다해 자신 아닌 자신을 연기하며 모든 것이 완벽하게 돌아가도록 노력했을 터였다. 본모습으로 활동해야만 아이돌 활동을 소화할 수 있다는 건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다는 걸 자백하는 꼴과 다름없었다. 시즈쿠는 원래의 자신만이 전할 수 있는 게 있다고, 꾸밈없는 평소의 자신이 좋다고 말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였지만, 만들어진 시즈쿠가 전할 수 있는 게 있을 리 없다고, 그 모습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도 하지 않았다. 시즈쿠도, 아리사도 희망이 환상을 통해서도 전달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애초에 희망은 환상 없이 성립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팬을 위해, 그들이 원하는 모습에 응할 수 있도록 본인을 갈고닦는 건 당연했다.
그는 과거를 반추하면서도 있는 힘껏 자신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고자 했다. 그러지 않으면 인정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가 무엇을 인정해야 한단 말인가? 그것을 파고들자, 아리사의 내면에서 계속해서 꿈틀거리던 울림이 작게 퍼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 울림은 아리사가 시즈쿠가 가진 올곧음과 강인함, 그리고 선함을 마주하게 했다. 아리사는 밀려오는 수치감과 열패감에 몸을 떨었다. 눈가에 고였던 물은 한계까지 차올라 한줄기의 눈물이 되어 아리사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어둠 속에서 눈물은 바로 앞에 내리치는 빛살을 머금고 희미하게 반작였다. 마치 빛이 눈물에 옮겨붙은 것 같았다. 곧 눈물은 턱까지 내려와 턱살에서 달랑거리다 밑으로 떨어졌다. 그렇게 떨어진 눈물은 자국조차 남기지 못한 채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아리사만큼은 눈가에서 흐른 눈물이 어떻게 흘러 사라졌는지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높게 치켜들었다. 이 이상 눈물을 흘렸다가 애먼 곳에서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게 될까 두려웠다.
이제 하나는 인정해야만 했다.
히구레 아리사는 히노모리 시즈쿠 단 한 순간도 이겨본 적이 없었다.
오디션에서도, 함께 Cheerful*Days에서 활동했을 때도, 더불어 오늘 아이돌 대전쟁에서도 아리사는 시즈쿠에게 패배하기만 했다. 과거를 떠올리는 지금 순간에서조차 모든 것을 담담하게 마주한 시즈쿠와 달리 아리사는 이전에 저질렀던 잘못만은 제대로 마주 볼 수 없었다. 그것까지 받아들이고 나면 아리사는 자신이 다시는 노력할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시즈쿠를 향한 괴롭힘이, 노력하지도 않는 그를 향한 실망감 때문이 아니라 사실은, 단 한 번도 그를 이기지 못한 열등감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수용하면 아리사는 자신의 추함을 그대로 목도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아리사는 스스로가 그렇게 형편없는 사람임을 받아들일 정도로 강인한 사람은 아니었다. 프라이드가 높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그는 노력하는 자신이 자랑스러웠고, 노력에 뒤따르는 보상에 더없는 만족감을 얻었으며, 동시에 그러지 못하는 사람들에게서 미약한 경멸과 함께 우월감을 느꼈다. 무엇보다 열등감으로 남을 괴롭히는 사람은 그가 가장 한심해하는 부류였다. 아리사는 자신이 그런 한심한 사람이 될 수 있으리라곤 조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난 절대 사과하지 않아.”
아리사는 다짐하듯 강한 어조로 자기 생각을 중얼거렸다. 아이돌로서 활동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노력하는 히구레 아리사가 필수 불가결했다. 이 업계는 노력한다고 모든 것이 주어지지는 않았지만 노력하지 않으면 자그마한 것이라도 얻을 수 있는 기회조차 떨어지지 않아 금방 도태되고 마는 곳이었다. 적자생존은 단순히 동물의 세계에서만 적용되는 말이 아니었다. 아리사는 제대로 주목받지 못했던 과거를 지나 지금은 Cheerful*Days의 센터로 승승장구하고 있었으나 여기서 미끄러진다면 다시 올라갈 수 없음은 물론이고 아이돌로서의 활동마저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걸 누구보다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그는 절대로 노력하는 것을 멈추어서는 안 됐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리사는 계속 아이돌로 남아 있고 싶었다. 팬에게 희망을 전하는 아이돌은 그가 평생을 바쳐 이루고자 하는 목표였다.
아리사는 허리를 펴고 다리에 힘을 준 뒤 앞을 향해 똑바로 나아갔다. 컴컴한 어둠을 지나 빛을 향해 걸어가는 몸짓은 주저가 없어 당당했다. 그 뒤로 아리사의 그림자가 마치 빛에 대항하듯 몸을 길게 뻗어 늘어졌다. 그림자는 최대한 본인의 몸을 부풀렸지만, 세트장과 이어진 복도 전체를 비추는 환한 빛 앞에서는 제아무리 크기를 키워도 왜소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어느 순간부터는 더는 몸을 늘릴 수 없어 그림자는 일정한 길이를 유지하게 됐다. 그 모습은 마치 아리사의 앞날을 예견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리사는, 그 또한 무의식적으로 예감하고 있듯, 평생 히노모리 시즈쿠를 이길 수 없을지도 몰랐다. 과거의 모든 부분을 수용하고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한 시즈쿠와 달리 아리사는 단 한 가지만큼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아이돌로 남아 있을 터였다. 언젠가 한층 더 성장한 시즈쿠에게 밀려나게 되더라도, 이 바닥에서 끝까지 살아남아 이름을 남길 것이었다. 아리사는 강하게 자신을 다지며 빛 속에 파고들 듯이 긴 복도를 걸어 나갔다.
복도는 아리사가 걸어가는 내내 수많은 조명으로 인해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리사는 다만 그곳에 있을 뿐인데도 눈이 다 아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빛은 그의 눈이 견뎌내기엔 너무나도 강했다. 아리사는 눈알의 따끔거림을 잊어보려는 듯 애써 힘을 주어 눈꺼풀을 닫았다 열었다. 그러나 눈을 괴롭히는 통증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지속되는 따가움에 아리사는 다시 한번 눈을 깜빡였다. 그사이, 굵은 눈물이 한 방울 그의 눈에서 툭 하고 떨어져 사라졌다. 그것은 울었다는 흔적조차 남기지 못한 채로, 아리사에게 발견되지 못하고 영원히 잊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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