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작업물

Beautiful Stranger

1차 / 4천 자

황혼녘, 울창한 숲 한가운데에서 눈을 뜬 여자는 자신이 이곳에 누워 있게 된 경위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삐걱대는 몸을 간신히 추슬러 고개를 들면 커다란 나무에 처박혀 새까만 연기를 피워올리고 있는 자동차가 보인다. 그 너머로는 그저 끝없는 초록뿐인 것을 보아하니 사람이 오가는 도롯가에서는 한참 멀어진 게 분명하다. 온몸에서 매캐한 냄새가 난다. 빽빽이 솟아오른 나무들 틈으로 지는 태양의 빛이 따갑게 들이친다. 그러나 그녀는 겨우 이 정도 일로는 죽지 않는다. 넝마가 된 자동차와 다를 바 없이 망가진 뱀파이어의 육체가 재생하다가 다시 불타기를 반복한다. 아직 해가 완전히 지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곤란하다고 해도 손쓸 수 없이 망가져 폭발 직전처럼 보이는 차 안으로 기어들어갈 수는 없는 일이다. 뱃멀미라도 하듯 속이 울렁거린다. 충돌의 후유증으로 군데군데 끊어진 기억이 그녀가 지나온 시간을 덮어쓰고 한꺼번에 밀려든다. 파도치는 이미지들, 그렇잖아도 혼란스러운 여자의 머리에 열이 오른다. 한데 엉킨 필름이 서로 뒤섞이며 녹아내린다.

해가 떨어질 때까지, 여자는 한동안 나무그늘 속에 숨어 등을 기대고 앉는다. 머리를 젖히고 눈을 감는다. 엉망이 된 머리카락이 뺨을 스치며 뭉텅이로 쏟아져내린다. 무릎에 걸쳐 놓은 손에서 오래된 반지가 은근한 빛을 낸다. 드러난 살갗은 온통 재투성이, 거무스름하게 그을린 옷에는 피가 잔뜩 말라붙어 있다. 어둠이 충분해질 때까지 숨죽이던 그녀가 어느덧 완연해진 밤 속에서 마침내 몸을 일으켜 세운다. 아까보다는 걷기가 훨씬 수월하다. 어둔 숲길이지만 여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나뭇가지들 사이를 헤친다. 타이어 자국을 따라 걷던 그녀가 끝내 숲의 초입으로 빠져나간다.

쭉 뻗은 도로가 펼쳐진다.

길가는 그야말로 텅 비어 있다. 얼마나 그렇게 버티고 서 있었을까, 그나마 곁을 스쳐간 자동차 몇 대는 너절한 꼴로 히치하이킹을 시도하는 여자를 보자마자 하나같이 속도를 올리고 도망쳤다. 그 뒤로는 개미 한 마리 지나가지 않는다. 동이 트기 전에는 돌아가고 싶은데, 이래서야 무작정 걷는 편이 빠를지도 모른다. 한숨과 함께 고개를 숙이려는 찰나.

저만치에 희미한 헤드라이트 불빛이 다가오기 시작한다. 이번 기회마저 놓칠 수는 없다. 여자는 도로 한가운데로 나가 선다. 요란한 라디오 소리와 함께 가까워지던 스포츠카 한 대가 그녀를 발견하고 급브레이크를 밟는다. 여자를 들이받기 직전에 멈춰선 차에서 흘러나오던 음악이 뚝, 멎는다. 운전석 창문이 미끄러지듯 내려간다. 여자는 그 앞으로 고개를 들이민다. 아까 보았던 노을보다도 새빨간 머리칼, 특이한 인상의 남자가 그녀를 보고 무어라 묻는다. 그 입술이 달싹이는 모양을 보고 있었던 것 같은데. 간헐적인 이명과 두통으로 순간 시야가 뒤흔들린다. 상처투성이 허름한 사내의 모습이 눈앞의 얼굴 위로 오버랩된다. 찢어질 듯한 웃음 소리가 귓가에 쏟아진다. 인상을 찡그린 여자가 지끈대는 이마를 짚는 동시에, 다시금 시야가 전환된다. 어지럽게 요동치던 풍경이 잠시 얌전해진다. 운전석의 남자만이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미소짓고 있다.

 

―이런 시골엔 무슨 볼일?

 

벽난로 속에서 방금 걸어나오기라도 한 것처럼 피와 재로 더러운 모습, 그런데도 왼손 약지에는 반지를 낀 여자라니. 그녀를 꼼꼼히 훑어보고도 능청스레 웃던 남자가 깜빡했다는 듯 그의 옆자리를 턱짓한다. 일단 타서 이야기하죠. 여자는 별말 없이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한다. 조수석은 생각보다 아늑하다. 제 이름을 마이크,라고 소개한 남자는 첫인상만큼이나 입이 가볍고 호기심 많은 타입인 것 같다. 그는 좀처럼 운전에 집중하지 않고 여자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어디까지 가는지, 어쩌다 이런 꼴이 됐는지 사사건건 캐묻는다. 그러나 여자는 무엇 하나에도 제대로 답하지 못한다. 그사이 남자가 다시 틀어둔 라디오에서 쉬지도 않고 재잘대는 목소리들이 겹쳐진다. 터져버릴 것 같은 머리를 부여잡고 한참 묵묵하던 그녀가 한 마디 겨우 내뱉는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으니, 하루만 신세를 지죠. 경찰서까지만 데려다 줘요.

―자기 이름도 몰라? 내가 지어 줄까요?

 

좋을 대로, 여자가 중얼거린다. 때마침 라디오는 고전 영화 삽입곡을 소개하는 코너로 넘어가고 있다. 둘 모두의 귀에 익은 노래가 흘러나온다. 낭만적인 피아노 선율 위로 부드럽게 흘러드는 허밍, 이런 상황에 이토록 로맨틱한 무드라니. 남자는 저도 모르게 비죽 웃는다. 문득 그가 손가락으로 여자를 가리킨다.

 

―러브.

 

어때요. 괜찮지? 웃음기 섞인 남자의 목소리 너머로 다시 이명이 울린다. 여자가 미간을 찌푸린다. 머리를 반으로 쪼개는 것 같은 두통이 희미하게 느껴질 듯하던 기시감을 씻어낸다. 거친 오프로드를 달리는 스포츠카가 덜컹댈 때마다 의식이 드문드문 끊어진다. 혼곤한 가운데 여자는 잠꼬대처럼 중얼거리며 남자에게 말을 붙인다. 그에게서 어쩐지 익숙한 냄새가 난다거나…… 그리웠다거나.

잠시 화면이 끊긴다.

 

다시 눈을 뜨면 저택, 아니. 낡은 호텔 앞이다. 차키를 주머니에 넣은 남자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휘청대는 여자를 자연스레 에스코트한다. 그녀는 제 손을 익숙하게 잡아 쥔 사내의 약지에서 기묘한 흉터를 발견한다. 결혼반지 대신 자리한 상흔이 호텔의 백열등 불빛 아래 은은하게 반짝인다. 시선이 이끌리는 찰나, 남자가 다시 그녀의 이름을 부른다. 러브, 남은 방이 더블뿐이라는데. 여자는 뒤늦게 고개를 들어 카운터 직원과 남자를 번갈아 바라본다. 미심쩍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던 직원이 슬그머니 눈을 내리깔았다. 여자는 난처한 기색이라곤 조금도 없이 괜찮다고 답한다. 그 말에 직원이 냉큼 열쇠를 건네 주었다. 그것을 받아든 남자가 고개를 갸웃, 기울인다. 아무래도 이만큼 경계심 없는 여자는 보기 드물다. 이런 태도에는 응당 무언가 이유가 있을 텐데. 어쩌면 오늘밤 위험해지는 것은 마이크,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상상에 남자가 웃음을 삼킨다. 검붉은 카페트가 깔린 복도를 지나가는 동안 얇은 커튼이 슬몃슬몃 흔들린다.

여자의 시야에 두 남녀가 오래된 잔상처럼 스쳐 간다.

그녀는 기어코 그들의 이름을 기억해낸다.

 

*

 

열린 창에서 서늘한 겨울 냄새가 새어들어와 마이크가 물고 있는 담배의 연기와 뒤섞인다. 조용한 방 안에는 그가 두들기는 노트북 자판이 달각대는 소리, 그리고 샤워 가운을 걸치고 침대에 누워 있는 여자의 조용한 숨소리뿐이다. 눈을 감고 있는 그녀의 시야에 조각난 과거의 편린들이 어렴풋이 스쳐 지나간다. 무질서하게 뒤섞이는 장면들 틈에서 루브는 제 얼굴에 한가득 튀었던 질척하고 비릿한 액체의 향기를 떠올려 낸다. 그것을 상기하는 순간 갑작스레 낯익은 체취가 훅 끼친다. 더없이 달콤한 냄새, 그리고 지금껏 느끼지 못했던 허기가 조급하게 닥쳐온다. 문득 루브가 눈을 뜬다. 아직 몽롱한 시야에 노트북을 만지고 있는 남자의 뒷모습이 들어온다. 그가 앉은 테이블은 머리맡에 있다. 손을 뻗으면 닿을 만한 거리. 루브가 나지막이 그를 부른다.

 

―잭.

 

그 호명에 마이크가 뒤를 돌아본다. 남자친구 이름이야? 그의 노랗고 검은 눈동자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듯 그저 단순한 호기심만으로 일렁이고 있다. 루브의 몸이 그에게로 기울어진다. 이불이 바스락대는 소리가 난다. 숨결이 섞이는 거리까지, 그녀의 고개가 가까워진다. 설마 싶은 마음으로 마이크가 눈을 내리감는다.

루브의 입술은 그의 뺨을 스쳐 목덜미로 향한다.

그녀가 숨을 깊이 들이쉰다. 무언가를 확인하듯, 혹은 무언가에 안도한 것처럼.

날카로운 송곳니가 그의 살갗을 뚫고 박힌다. 반사적으로 손을 뻗으면서도, 마이크는 차마 그녀를 밀어내지 못한다. 달고 시원한 생명수가 루브의 혀를 적신다. 그녀는 얼마 만인지 모를 식사를 만끽한다. 그녀에게 붙잡힌 마이크의 호흡이 차츰 가빠진다. 온몸의 감각이 한데 쏠리는 듯 어지럽고 황홀한 기분, 한참 헐떡이던 그가 끝내 루브에게 몸을 맡긴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그녀의 허리를 간신히 붙잡고 있던 마이크가 차츰 여유를 되찾고…… 그가 느른한 숨을 내뱉는다. 뜨거운 손길이 루브의 흉곽을 타고 올라간다.

 

아침이면 그는 방 안에 혼자뿐이다.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