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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더스 게이트 3 - 게일 데카리오스 드림 / 6천 자

머리가 아프다. 목소리가 들린다. 계속해서 귓가를 맴돌며 어두운 충동을 부추기는 낯익은 음성.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선잠에서 깨어난 흰토끼는 참았던 숨을 겨우 몰아쉰다. 시야 바깥에서 어스름하게 밝아 오는 새벽하늘은 언뜻 물 탄 핏빛 같기도 하다. 사방이 고요하다. 다시 잠들기는 어려울 것 같네. 흰토끼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앉는다. 곁에 아직 잠들어 있는 위저드가 보인다. 그러면 간신히 억눌렀던 충동이 다시금 튀어나와 뇌리를 휘젓는다. 무엇이든 좋으니 어서 찢어발기라는 속삭임. 이 손을 기어이 붉게 물들이고픈 욕망. 왜 참아야 하지? 내맡기면 모든 게 편해질 텐데. 굴복은 언제나 유혹적인 선택지다. 하지만 안 돼. 흰토끼는 게일이 제게 가르쳐준 것들을 하나씩 천천히 곱씹는다. 야생 허브의 종류를 구분하는 방법이나 포도주의 맛을 구별하는 기준 같은 것들. 더러워진 머리칼을 깨끗이 정돈하는 순서라든가,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을 왜 믿어야 하는지에 대해.

눈앞에 있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게일 데카리오스. 그는 하나뿐인 연인이자 동시에 은인이나 다름없는 사람이다. 지금껏 쌓아 온 시간들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는 없지 않을까. 그와 함께라면, 이전의 삶에서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들을 희미하게나마 상상할 수 있다. 함부로 꿈꾸게 된다. 여태까지와는 전혀 다른 생활이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흰토끼는 가만히 눈을 깜박인다. 게일이 일어나면 충동에 대해 털어놓아야지. 그러면 그는 분명 해답을 줄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잠에서 깬 게일은 코앞에서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붉은 눈동자와 마주친다. 소스라치게 놀라는 것도 잠시, 그는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 기울이는 연인을 알아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일찍 일어났네.” 게일이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그뒤로는 익숙한 일장연설이 이어진다. 흰토끼의 위저드는 누가 뭐래도 말이 많은 편이었다. 아무리 내가 좋아도 말이지, 그렇게 가까이에서 들여다보고 있으면 누구라도 놀랄 수밖에 없어. 내가 일어나다가 부딪혔으면 어쩔 뻔했어? 끝도 없이 길어지려는 잔소리에 흰토끼가 슬쩍 시선을 돌린다. 그녀의 집중력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게일이 뒤늦게 이야기를 정리한다. 아무튼. 내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던 거라면, 얼마든지 말해 줘. 내 사랑. 흰토끼는 게일의 고동색 눈을 빤히 들여다본다. 그 매끄러운 표면에 입 맞추고 싶은 생각은 차라리 온건한 축이다.

“목소리가 들려.”

충동 말이야. 게일은 더 이상의 부연 없이도 그녀의 말을 이해한다. 그리고 곧장 고민에 빠진다. 마냥 참기만을 강요하는 것은 능사가 아니다. 환영술을 사용하는 대책도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아, 하지만 무고한 지성체를 파괴하는 대신에 적당한 ‘식량’을 손질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어떨까. 슬슬 요리하는 법을 가르쳐 줄 때가 된 것 같기도 하고. 이미 몇 차례 실패한 전적이 있기는 해도, 시도해볼 만한 가치가 없는 일은 아니었다. 좋았어. 자리를 털고 일어난 게일이 연인에게 손을 내민다. “잠깐 나갈까?” 흰토끼는 그것을 물끄럼 올려다보다가, 얌전히 잡고 일어난다. 혹여 손톱을 세우거나 힘을 너무 주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그의 부드럽고 따스한 온기가 손안에 차오르는 감각은 언제라도 생경하고 그만큼 기분 좋은 것이다.

 

*

야영지 근처의 숲은 깊어질수록 울창하고 빽빽하다. 인적이 드문 만큼 거칠고 울퉁불퉁한 흙길 위로 황금빛 볕뉘가 어룽진다. 여전히 손을 맞잡은 채로 게일과 나란히 걸으며 흰토끼는 종종 그의 옆얼굴을 올려다본다. 게일은 시선이 느껴질 때마다 꼬박 그녀를 돌아보지만, 그녀가 제게 특별히 할 말이 있어서 그러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역시 알고 있다. 그래도 뭐 어때. 보고 있으면 좋은데. 그는 연인이 밤사이 충동을 참느라 짓씹었는지 부르튼 입술의 상처가 못내 안쓰럽다. 손에는 별다른 흔적이 없었던 걸 보면 나름대로 애를 쓴 모양이기는 해도. 그렇지만 그와 함께 새로운 것들을 하나씩 배워나가고 있으니, 머잖아 그 충동이란 것도 잘 다룰 수 있게 될 거라고 게일은 생각한다. 적어도 그녀를 처음 만났던 그 때보다는 모든 게 나아지고 있는 것 같으니. 이것은 막연한 희망이라기보다는 이미 그녀의 앞날이 그렇게 정해져 있다는 확신에 가깝다. 다른 누구도 아닌 워터딥의 게일과 함께인데, 어떻게 상황이 더 좋아지지 않을 수 있겠어? 그는 스스로 연인을 신뢰하는 만큼 그녀 또한 마찬가지로 제게 의지하고 있으리라고 믿는다.

한동안 이어지던 걸음은 숲속 어디쯤에서 멈춘다. 사납게 돋아난 가지들, 틈없이 자란 잎사귀가 하늘을 촘촘히 뒤덮어 한낮인데도 어느새 사방이 어둡다. 왜 여기까지 들어왔지. 흰토끼가 게일을 가만히 응시한다. 그는 쉬잇, 하고 연인의 입가에 손을 가져다 댄다. 그러고 보니 설명이 한참 늦었다. “사냥하러 온 거야.” 난데없는 말에 흰토끼는 멍하니 눈을 깜박인다. “누구를?” 본능적으로 단검을 찾아 쥐며 그녀가 한 박자 늦게 반문한다.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피며 경계 태세를 취하려던 게일이 펄쩍 뛴다. “아니지, 내 사랑. ‘누구’가 아니야. 우린 곰이나 사슴 같은 걸 잡으러 온 거라고.” “왜?” “그야 먹을 게 필요하니까. 네 충동을 해소시킬 만한 것도 필요하고.” 그냥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죽이면 안 되는 걸까. 훌륭한 위저드라면 아마 훌륭한 식사가 될 수도 있을 텐데. 문득 두통과 이명, 흰토끼의 시야가 이지러진다. 하지만 ‘안 돼’. 그녀는 고개를 세게 흔들어 저항한다. 그리고 동시에 그녀는 알고 싶다. ‘그러면 안 되는 이유’를. 흰토끼가 원하는 것은 보다 합당한 명분이고, 명확한 정답이다. 그녀는 그것을 손에 움켜쥐기를 원한다. 남김없이 씹어 삼키기를 원한다. 마침내 충족될 때까지. 더는 허기지지 않을 수 있을 때까지. 그러니 가르쳐 줘. 나는, 어떻게.

겁없는 짐승이 때를 맞추어 어슬렁거리며 그들 곁으로 다가온다. 큰 뿔이 돋아난 수사슴이 나무들 사이를 헤치고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은 무구한 눈을 빛내며 흰토끼를 바라보고 있다. “네 거야.” 게일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난다. 그는 그저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연인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흰토끼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그녀의 맥박이 마구 펄떡이며 날뛴다. 귓가에 울리는 박동이 점점 커진다. 그녀가 순간 숨을 멈춘다. 도약한다. 그다음의 일은 모두 순식간에 벌어진다. 날카로운 단검이 사슴의 미간을 푹 찌르고, 서슴없이 목을 베고…… 갈라진 뱃가죽 사이로 시뻘건 내장이 쏟아져 나온다. 피를 흥건하게 뒤집어쓴 채로 흰토끼는 조금도 주저하는 기색이 없다. 그녀의 눈앞에 보이는 것은 오로지 붉은색, 그것뿐이다. 강렬한 피비린내가 진동한다. 사슴은 이미 죽은 채로 경련하고 있다. 그러나 흰토끼는 멈추지 않는다. 그럴 생각이 없다. 짐승의 사체를 다시 한 번 꿰뚫기 위해 그녀의 손이 허공으로 들려 올라간다.

게일이 그것을 붙잡는다.

흰토끼의 새빨간 눈동자가 그를 직시한다. 거칠어지다 못해 으르렁대는 그녀의 숨소리가 게일의 귓가에도 선명하게 들린다. 하지만 그는 움츠러들지 않는다. 그는 연인이 두렵지 않다. “내 사랑.” 게일이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감싼다. 그리고 그녀 손을 벌려 단검을 떨어뜨리게 한다. “진정해.” 이제 됐어. 죽었다고. 더 난도질했다가는 우리가 먹을 게 남아나지 않을 걸. 흰토끼는 더 저항하지 않는다. 끝모르고 솟구치던 아드레날린이 모닥불에 찬물을 끼얹은 듯 한순간에 사그라든다. 그녀가 힘 빠진 몸을 게일에게 툭 기댄다. 그는 연인을 받아 안고 가만히 토닥인다. “잘 했어.” 너는 아직 모르겠지만, 재료를 해체하는 건 아주 섬세한 과정이라고. 그냥 아무렇게나 토막낼 수는 없단 말이지. 먼저 피도 빼야 하고, 뿔도 잘라야 하고. 부위별로 잘 나눠서 먹을 것만 가져가자. 나머지는 여기 사는 다른 친구들이 알아서 깨끗이 치워 줄 걸. 자연을 위해서 남겨 두자고. 야영지에서 멀리 나왔으니 괜히 귀찮은 일이 생길 걱정은 안 해도 될 거야. 흰토끼는 말없이 게일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 언제나처럼 부드럽고 나긋나긋한 그 음성에 집중하자면 어느덧 고통은 모조리 날아가고 발밑이 둥실 떠오르는 것 같기도 하다……. 아니. “숨 막혀.” 그녀가 게일의 품속에서 바르작댄다. 저도 모르는 사이 긴장이라도 했던 걸까, 게일은 화들짝 놀라 연인을 놓아 준다. “이런, 미안해.” 흰토끼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다. 괜찮다는 뜻이다.

 

두어 시간 후, 그들은 핏기를 싹 빼낸 고깃덩어리를 각자 양손에 하나씩 들고 야영지로 복귀했다. 돌아오는 길에도 게일은 어찌나 말이 많은지. 흰토끼는 그 이야기를 전부 한 귀로 듣고 흘리며 터덜터덜 걸었다. 다행인지 그는 연인이 조금도 집중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이미 익숙해진 듯 했다. 사슴을 분해하는 건 생각보다 품이 많이 드는 일이었다. 흰토끼는 어깨에 걸치고 있던 가죽을 그녀의 천막 안에 벗어 내려놓는다. 게일이 설명해 주는 대로 사체를 조각내는 동안 그녀는 무언가 평소와는 다른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었다. 그건 단지 행위만을 위해 저지르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그저 피부를 가르는 감각을 느끼고 흘러 넘치는 피를 만끽하고 싶다거나, 죽어가는 생물의 단말마를 듣고 즐기려는 마음에서 비롯된 일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이번에는 처음부터 게일의 지시에 따라 식량을 확보한다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 그러니 꼭 그녀의 머릿속에서 지겹도록 메아리치는 충동이 시키는 대로만 움직인 것만도 아닌 셈이다. 이상한 일이었다. 흰토끼는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동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짐승을 잡는 일은 그들에게 해가 되는 지성체를 죽여 없애는 일과 어떻게 다른가? 애초에 인간의 형태를 한 생물과 그렇지 않은 생물의 목숨에 경중을 두는 것은 당연한가? 온갖 채소와 허브를 가지러 간 게일을 기다리며, 흰토끼가 느리게 눈을 깜박인다. 살갗이 조금 따가웠다. 아까 숲에서 피라도 튀었던 모양이다.

가져온 고기는 게일이 만들어 놓은 조리대 위에 방수포를 깔고 널어 놓았다. 식칼을 든 게일은 그 앞에서 다시 설명을 시작한다. “우선 껍질을 마저 벗길 거야.” 지방도 좀 잘라내야 하고, 근막이나 힘줄 같은 것도 손질해야 해. 평소 사용하는 무기들 못지않게 예리한 칼끝이 고깃덩어리를 군데군데 차례로 가리킨다. 그냥 통째로 구웠다가는 냄새도 나고, 질겨서 한 입도 못 먹을 걸. 게일은 진지한 표정으로 시범을 보인다. 커다란 덩어리에 불과했던 고기가 그의 성격만큼이나 깔끔하게 잘려나가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해 볼래?” 아직 정돈이 덜 된 조각을 앞에 가져다 놓고, 게일은 연인에게 식칼을 넘겨 준다. 잠깐 머뭇대던 흰토끼는 그가 말했던 순서를 하나씩 되새기며 천천히 손을 움직인다. 버려야 할 부분과 살점이 같이 썰려 나가고 있기는 했지만, 이만하면 처음치고는 나쁘지 않은 실력이었다. 어설픈 솜씨로 손질을 끝낸 그녀가 게일을 빤히 올려다본다. “괜찮아.” 뭐, 어떻게 한 번에 완벽하게 해낼 수 있겠어? 네가 날 위해서 이렇게 노력하고 있다는 게 좋은 거지. 그리고 게일이 환하게 웃는다. 그는 흰토끼보다도 훨씬 더 흐뭇한 표정이다. 그렇게 밝은 얼굴을 바라보며 흰토끼는 그가 지겹도록 했던 이야기를 이제야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어쩌면 이것저것 복잡하게 따질 필요 없을지도 몰라. 그냥 ‘널 위해서 노력하는’ 걸로 당분간은 괜찮을 것 같아. 내가 사랑하는,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네가 이런 표정 짓는 걸 계속 볼 수만 있다면 뭐든. 그리고 이런 마음은 혹 내게만 있는 것은 아닐 테지. 누구에게나 소중한 무언가 있기 마련이니까, 그러니까.

게일의 요리 수업은 한참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낸 고기에 어떻게 칼집을 내는지, 또 기름과 향신료는 무얼 쓰면 좋은지. 버터를 곁들이면 풍미가 더 좋아진다는 것, 채소를 함께 올려 구우면 식감을 더 다채롭게 만들 수 있다는 것까지도. 비록 소금통을 받아 쥔 흰토끼가 그걸 왕창 쏟아 버리는 실수를 저지르기는 했지만. 게일이 잽싸게 손으로 받아낸 덕에 사슴 구이는 무사했다. “조심할게. 다음부터.” 흰토끼가 작게 중얼거린다. 게일은 그런 연인을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본다. 아무렴 어때. 그들에게는 아직 더 많은 것을 시도할 수 있는 기회가 수없이 남아 있다.

 

그렇게 오랜 과정에 걸쳐 훌륭한 한 끼 식사가 완성되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접시를 앞에 나란히 두고, 게일은 뿌듯한 얼굴로 흰토끼를 바라본다. “포크랑 나이프 쓰는 법은 기억하지?” 그녀가 고개를 끄덕인다. 서툴게 움켜쥔 식기가 사슴 구이를 한 입 크기로 어설프게 잘라낸다. 연인이 분투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도, 게일은 못 말리겠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의 접시를 제 것과 바꾼다. 흰토끼는 퍼즐처럼 말끔한 모양으로 조각난 고기를 신기한 듯 내려다본다. 게일이 그것을 하나 집어 그녀의 입가에 가져다 준다. 그러면 그녀는 얌전히 입을 벌려 받아 먹는다. “어때?” “맛있어.” “당연하지, 우리가 만들었는데.” 게일은 연인이 으깨 놓은 제 몫의 고기를 마저 집어 먹기 시작한다. 그야말로 완벽한 저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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