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미션] 무제

리야님(@liya841417), 와독추님(@ArK_Drhan) 작업물

모밀일기 by 모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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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가슴속에 켜켜이 쌓여가는 차가운 바람이 낯설면서도 익숙해 모리오르는 미묘하게 다른 한 쌍의 눈동자를 느릿하게 움직이며 주변을 살폈다. 하늘에서는 끝 없이 새하얀 것이 쏟아지고, 내뱉는 숨에 하얗게 서리가 끼는 것을 보면 여기는 아마도 커르다스겠지. 제 기억 속에 이렇게나 추운 지역은 커르다스밖에 없었으니, 아마도 제가 또 무의식중에 여기까지 걸어온 건가 싶어 끝 모를 바닥으로 처박히는 느낌이 들었다.

드문드문 잘려져 떠오르는 기억의 파편들과 어딘지 모를 곳에 우두커니 서 있는 건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새롭게 기분이 더럽고, 새롭게 분노가 들끓어 고요하던 심장을 누군가가 거세게 두드리는 것처럼 난폭하게 뛰기 시작해 다급하게 주변을 둘러보며 인기척을 찾아 헤맸다.

저 혼자만 이렇게 덩그러니 서 있는 게 아니어야만 했다. 언제나처럼, 자그마한 그녀가 제 곁에…….

티티아, 티티아! 어디 있어? 날 혼자 두지 않겠다고 했잖아. 왜 나는 또 혼자 있는 거야? 티티아!

티티아의 옅은 녹색의 머리카락 한 올도, 하다못해 그녀에게 몇 없는 노란색조차 찾을 수 없는 새하얀 설원 위에서 애착 인형을 빼앗긴 어린아이처럼, 양팔을 허우적대며 정신없이 주변을 돌아보다 모리오르는 문득 깨닫고 말았다. 자신이 여기에 얼마나 오랜 시간을 서 있었는지조차 모르게, 어느 방향에서 걸어와 멈추어 섰는지조차 모르게 정말로 고립되어 버린 채 눈밭 위에 가만히 서 있었다는 것을. 정신을 조금 더 일찍 차렸다면 발자국의 흔적이라도 남았을 텐데, 제 머리 위며 어깨에까지 소복하니 눈이 쌓인 것을 보면 꽤 오랜 시간을 이렇게 서 있었던 것 같아, 발자국은 지워진 지 오래였고 방향감각조차 무뎌져 눈앞이 새하얗기만 했다.

여기가 이슈가르드 근처 지역은 맞는 것 같은데. 이렇게 눈이 많이 오는 지역은 이슈가르드와 그 근처 지역뿐이니까 다른 선택지 없이 그쪽이 맞을 테지만, 지금 자신이 서 있는 곳이 하얀테 설원 쪽인지 큰 바위 언덕 쪽인지 구분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시야가 하얗고, 하얗고, 하얗기만 해서 정말로 가야 할 방향을 잃어버린 채 우두커니 서 있는 게 고작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 머릿속까지 새하얗게 물드는 기분이라 그는 두 눈을 끔뻑대며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니, 여기가 용머리 전진기지 쪽은 맞을까?

어쩌면 자신은 북녘별호 위에 덩그러니 서 있는 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장소를 구분할 수 있는 건물이나, 특징적인 지리 환경도 없이 그저 하얗기만 하니 여기가 어딘지 도대체 알 수가 있어야지. 주변을 돌아다니는 야생 짐승이나 몬스터라도 보인다면 대충 어디쯤인지 가늠할 수라도 있을 텐데, 아무리 신경을 곤두세워 봐도 들리는 인기척조차 없으니 정말로 외따른 곳에 감금이라도 당한 것처럼 주변을 파악할 수가 없어 모리오르는 느릿하게 심호흡했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제 근처에 티티아가 없다는 사실이 더욱더 중요했으므로.

아니, 오히려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 만약, 티티아가 자신처럼 이 추운 눈밭에 오래 서 있기라도 했다면 몸살감기에 걸릴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티티아가 몸져눕게 된다면 간호를 핑계로 그녀를 독점하고, 곁에 오래도록 서 있어도 괜찮을 테니 자신의 입장에선 두 팔 벌려 환영할 일이었지만, 티티아가 요양하는 동안 그녀가 신중하게 짜 두었던 계획이 어그러지고 손해를 보는 일이 늘어날수록 그걸 수습하기 위해 함께하는 시간이 줄어드니까, 그녀가 아프지 않고 오래오래 건강하게 있는 편이 더 좋다는 것을 이미 한번 경험했기에 모리오르는 지금 자신의 곁에 티티아가 없다는 사실을 겨우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이해했다고 해서 그의 가슴 깊숙한 곳에서 뜻 없이 끓어오르는 분노와 살의가 삭혀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미코테 특유의 예민한 청각과 후각에도 아무것도 잡히지 않아 모리오르는 살기를 고요히 갈무리한 채 두터운 눈밭에 저벅, 저벅 자신의 흔적을 남기며 앞으로, 또 앞으로 계속 걸어 나갔다. 하다못해 작은 들짐승이라도 있었다면 도륙이라도 해서 이 뜻 모를 살의와 분노를 미약하게나마 가라앉힐 수 있었을 텐데, 폭닥하니 내리는 함박눈이 모든 소리를 먹어 치웠는지 그저 고요하기만 해서 모리오르는 묵묵히 그저 걸어갈 수 있었다. 시야가 막힌 탓에 주변을 살펴볼 수 없으니, 자신이 걸어가는 방향이 맞는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이 방향이 옳은 방향이라 믿으며 계속, 한 방향으로만 나아갔다. 계속 걸어 나가다 보면 여기가 어딘지 가늠할 수 있는 무언가가 눈에 보일 테고, 그러면 그때 다시 방향을 생각해 봐도 될 일이니까.

사박, 사박 눈이 밟히는 소리 사이로 절그럭대는 방어구의 소리가 섞이고 들이마시는 공기가 더욱더 차가워질 때쯤, 눈 위에 길게 늘어진 자신의 그림자가 묘하게 움찔거린다 싶더니 붉은 점 두 개가 생겨서 모리오르는 물끄러미 발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착각일까, 싶었지만 착각이 아니리라.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그림자가 늘어지거나 붉은빛이 생기면 깜짝 놀랄 테지만, 모리오르는 일반적인 사람이 아니었거니와, 제 그림자가 자신에게 해를 가할 리가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그는 그저 덤덤할 수 있었다.

“주인, 어째서 또 방황하고 계십니까.”

“몰라.”

귓가에 들려오는 일렁이는 듯한 목소리에 간결하게 대꾸하며 또다시 걸음을 떼자, 일렁이던 그림자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이쪽을 바라보다 천천히 모리오르를 따라 걷기 시작해 새하얀 설원에는 두 사람분의 발자국이 천천히 찍혀갔다. 모리오르의 것보다 다소 얕았던 발자국은 조금씩 짙어지고, 깊어져 끝내는 모리오르와 완벽히 똑같은 길이와 높이로 눈이 패기 시작했고, 그가 힘을 얻어 실체화했다는 걸 눈치챘음에도 모리오르는 침묵했다. 구태여 먼저 말을 걸 것도 없었거니와, 둘 다 과묵한 존재들이었고, 따지자면 저쪽이 더 많은 말을 하는 쪽이었기에 더더욱.

사박, 사박, 사박. 두 존재 사이에 끝 모를 설원보다 더 서늘하고 차가운 침묵이 깊게 내려앉고, 내뱉는 숨이 더 짙은 하얀색으로 변해갈 때쯤, 그때까지 묵묵히 따라 걷던 그림자가 느릿한 목소리로 모리오르에게 물었다. 아니, 그건 물음이 아니라 혼잣말에 가까웠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내뱉는 탄식, 혹은 절망. 혹은… 비웃음일지도.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그리 걸어가시는 건지.”

그림자의 말에 모리오르는 침묵했다.

그에게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도 했고, 어딘지 모르는 것은 사실이기에 대답할 말이 없기도 했다. 그저 지금 궁금한 것은, 그간 침묵하던 저 존재가 갑자기 다시 제게 말을 건 이유였다. 제 세상의 모든 것인 티티아를 제외하면 제일 신뢰할 수 있으며 저를 온전히 믿어주고 자신의 편을 들어주었던 유일한 이해자가 그림자 속으로 녹아 사라졌을 때 제가 얼마나 슬퍼하고 서러워했는지 알면 저렇게 말을 걸면 안 되는 게 아닌가? 그래서 모리오르는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척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래. 그에게 화가 났기 때문에 그를 무시하고 있었다. 필요할 때 이렇게 먼저 말을 걸어 올 수 있다는 건, 평소에도 말할 수 있는데 침묵하고 있었다는 뜻과 같지 않나. 그런 서운함과 짜증이 켜켜이 쌓인 채로 그림자가 몸을 일으킨 이유를 차분히 생각할 만큼 모리오르라는 사람이 복잡한 사람이 아니었기에, 그는 묵묵히 자신이 잘하는 것을 하기로 했다. 그저, 티티아에게 돌아가는 길을 찾아 앞으로 걸어가는 것.

“주인.”

다시 한번 단정한 목소리가 자신을 불러왔지만, 모리오르는 침묵했다. 당연하게도 그 목소리는 자신과 닮은 듯, 미묘하게 닮지 않은 구석이 있어서 낯선 이와 함께 걷는 듯한 착각을 일으켰지만 이미 자신은 잘 알고 있지 않는가. 저 그림자의 이름을.

“왜, 이런 곳에서 헤매고 계시냐 물었습니다.”

고막에 끈질기게 달라붙는 목소리에 희미하게 서린 분노를 읽고서야 모리오르는 걸음을 멈췄다. 그건 퍽 익숙한 것이었다. 뒤를 돌아보자 길게 늘어졌던 발자국이 절반 이상 사라질 정도로 눈에 파묻혀 있었고, 그림자는 이제 익숙한 모습으로 완전히 변해 절그럭대는 쇠갑옷의 소리를 내며 저벅, 저벅 제게 걸어오고 있었다. 까맣고 파란 갑옷에 덕지덕지 달라붙은 흰 눈은 체온이 없는 그를 보여주듯 한 줌도 녹지 않은 채 소복이 쌓여, 까맣기만 하던 그가 절반 정도는 흰 모습이 되었지만, 다가오는 그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저 붉은 안광을 번뜩이며 무언가에 불만을 가진 채 제게 무언가를 종용하는 듯 묵묵히 그저 걸어올 뿐.

“말했었지, 모리오르.”

이제는 존댓말조차 사라진 채 붉은 눈동자가 저를 꿰뚫듯 노려보고 있었다.

아, 이 풍경은 익숙한 것이었다.

떠올리기조차 싫은 그때의 그 감정을 강제로 끌어와 저도 모르게 등에 매달고 있는 대검에 손을 뻗게 만드는 최악의 기억이었으니,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소복이 눈이 내리던 날,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티티아에게 대검을 들이밀던―

“프레이.”

으르렁, 하고 잇새로 살기가 섞였다.

그건 모리오르에게 불가항력에 가까웠다.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최악 중 최악의 날. 제 모든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해해 주던 사람이 제 세계를 부수려 들었던 기억이었으므로.

그걸 다시 끄집어내는 건 암묵적으로 금지 사항이나 다름없었고, 애써 무저갱 속에 파묻어 잊고자 노력했던 것이었는데 발가벗겨진 기분이나 다름없어서 꽤 불쾌했고, 낯선 곳에서 눈을 떴던 처음처럼 분노가 끓었다. 일부러 프레이가 그때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는 게 느껴졌으므로 더더욱.

왜, 끄집어내는 거지? 내게 무슨 말을 듣고 싶어서. 

“나는 이제 너의 눈물이 되고, 분노가 되고, 힘이 될 거라고.”

붉은 안광이 새까만 투구 속에서 가늘게 일그러졌다 다시금 동그랗게 변하는 걸 보며 모리오르는 말없이 대검을 강하게 쥐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빼 들어 베어버리고 싶다는 듯, 자글자글 끓어오르는 살기를 억누르지조차 못한 채 그렇게 프레이를 바라보자, 프레이는 큭큭 소리가 나게 웃음을 짓다 느릿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때의 제 말을 기억하시느냐고, 물었잖습니까. 다시금 존댓말로 돌아온 그가 나지막하게 말하는 목소리도 모리오르의 귀에 닿았지만, 모리오르를 억누르는 티티아는 근처에 없었다.

저걸 죽여. 죽여도 어차피 그림자라 다시 살아나잖아?

네 짜증과 분노가 가라앉을 때까지 마구 찢어발겨도 ‘저건’ 네게 거역하지 못해. 알잖아? 저만한 상대도 없어.

혹시 또 모르잖아, 티티아를 인질 삼아 너를 협박할지도 모르는데!

이 기회를 놓칠 거야? 아무도 널 막을 수 없는 이 텅 빈 눈밭에서?

뜻 모를 악의가 귓가에 살근살근 속삭이는 목소리도, 어디서 기인하는지 모를 분노에 제 안의 암흑이 들끓는 것도 선명했지만 그 모든 것을 눈치챘다는 듯 프레이는 가만히 양팔을 뻗은 채 희극적으로 웃었다.

“모든 것을 억누르고 ‘보통 사람’처럼 굴겠다 하지 않았습니까. 나의 주인이여. 고된 길이 될지라도 본능을 거스르겠다고 말했던 건 당신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 무얼 하고 계십니까. 당신의 그림자에 살기를 드러내고, 망망대해 위를 떠도는 조각배처럼 길을 잃고 헤매고 계시지 않습니까.

프레이의 뒷말은 목소리로 들리지 않았지만, 귓가에 그렇게 닿았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울리는, 지금의 모리오르를 탓하고 애처롭게 여기는 듯한 안쓰러운 목소리에 모리오르는 신경질적으로 대검을 빼 들어 프레이를 노렸다. 네가, 네가 그런 말을 할 입장은 아니지 않아? 뚝, 뚝 떨어지는 살기에 노출되었음에도 프레이는 여전히 무방비한 자세로 웃고 있었다. 가련하고, 안쓰러운 나의 주인.

“남을 위해 살지 말고, 너를 위해 살아. 내가 바라는 건 그거 하나뿐이라고 누누이 말했을 텐데요……. 그저 ‘살아달라’ 이야기하던 제 진심을 말입니다.”

웃음기가 걷히고, 프레이는 그렇게 말하며 붉은 안광을 꺼트렸다. 그가 눈을 감았는지, 혹은 그의 분노가 사그라들었는지 모리오르는 느낄 수 없었지만, 대검을 쥔 손에 힘을 빼지 않고 있다,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서 대검을 집어넣었다. 예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의 자신은 타인의 감정을 조금이나마 ‘존중’하는 방법을 배우지 않았나. 자신의 깨달음을 ‘저것’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동안 어렴풋이 느껴왔었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던 감정들을, 네 덕분에 뚜렷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노라고. 정상적인 사람들이 어떻게 사고하고 행동하는지 공감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어쭙잖게나마 흉내라도 내니 어떻게 섞여서 살 수는 있게 되었다고.

“억누르지 마십시오. 예전처럼 화도 내고 살기도 드러내고 하셔야지요. 당신답지 않게 사니, 이런 곳을 헤매고 있는 게 아닙니까.”

모리오르가 자신의 감정을 누르는 모습을 보고 프레이는 그를 충동질하듯, 혹은 회유하듯 말했다. 그런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모리오르는 차분히 심호흡했고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프레이는 여느 때와 같이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느릿하게 이야기했다.

“그렇게 억눌러서, 주변을 존중해서, 당신이 편해졌습니까?”

“응.”

“거짓말.”

프레이는 제 주인을 비웃었다. 비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그가 편해졌더라면 제게 느껴지는 이 감정들이 말이 안 되는 것이기에. 그는 예나 지금이나 암흑 그 자체였고, 억누르지 못하는 혼돈이었으며, 빛보다는 그림자에 더 가까운 성정이었다. 그걸 가까스로 억누르고, 제어하고, 희생하고 있으니, 제가 또 이렇게 그림자 속에서 기어 나온 건데도 그걸 애써 무시하는 게 우습고 또 우스워서. 그렇게 괴로우면 차라리 제게 모든 것을 맡기라 말하고 싶었지만, 그건 이미 제가 이해하고 포기했던 말이기에 혀끝까지 올라온 말을 삼키고, 손을 뻗어 허공을 가리켰다. 

“그딴 거짓말이나 하니 여길 나갈 수 없는 거지.”

“여기가 어딘데.”

“제게 묻는다 해서 답을 드릴 것 같습니까.”

 잘난 체하는 거야? 모리오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가, 주변을 휘휘 둘러보고서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분명 한참을 걸어 나왔던 것 같은데, 어쩐지 처음 기억하는 그 장소로 돌아온 것만 같은 기묘한 위화감이 제 온몸을 감쌌기 때문이었다. 분명 앞으로, 앞으로 쭉 걷기만 했는데 왜 지금 보이는 풍경들이 묘하게 익숙한 걸까. 마치 빙글빙글 제자리를 돌고 있는 것처럼.

“그래요, 지금 당신은 길을 잃고 빙빙 돌고 있습니다. 보다 못한 제가 끄집어내질 정도로.”

“그럼, 더 일찍 말해주면 좋았잖아.”

이제야 현실을 깨달은 제 주인이 어이없다는 듯 노골적으로 한숨을 내쉬며 말하는 프레이의 목소리에 모리오르는 충동적으로 말을 툭, 뱉어내며 짜증을 감추질 못했다. 그가 자신의 마음을 읽은 것 같이 느껴졌지만, 프레이니까 그렇겠거니 하고 넘기고, 이래서야 티티아와 떨어져 있는 시간이 길어질 뿐이니 짜증이 안 날래야 안 날 수가 없는 상황에, 프레이까지 제 속을 긁고 있으니 감정 표현이 매우 솔직한 그로서는 부글대는 감정을 날 것 그대로 뱉어내는 건 당연한 일이었을 터였다. 그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는 것과 짜증이 나는 건 별개의 일이니까.

그러자 프레이가 그를 빤히 바라보다 큭, 하고 웃음을 지었다.

여전히 모리오르는 ‘모리오르’였다.

그럼에도, 최초의 모리오르와 지금의 모리오르는 아주 미욱하게나마 다른 빛으로 반짝이고 있어서 그가 제게 말해주었던 ‘변화’라는 것이 그를 바꾸어 놓은 것 같아 웃음이 날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제게 손 내밀지 않고 짜증이나 조금 내고 말지 않았나.

조금 더 날을 바짝 세워 돌아가겠다 종용한다면 제 무거운 입이 열릴지도 모르는데.

그냥 마음 편한 대로, 발길 가는 대로, 칼끝에 걸리는 모든 것을 베어 넘기고 가도 아무도 손가락질하지 않을 텐데. 언제나 그랬듯이 그를 쓰기 좋은 도구 취급을 하고, 그가 바라지도 않는데 영웅입네 떠받들며 그의 내면에 어떤 소용돌이가 치고 있는지조차 들여보지 않은 채로 모리오르를 더욱더 사지로 내모는 존재들처럼, 그는 본능대로 이기적이고 제멋대로 굴어도 충분했다.

본능을 억누를 필요가 대체 뭐가 있겠는가? 사람들과 무리를 지어 섞여서 살아야만 하는 이유가 대체 뭐란 말인가? 그가 날뛰면 날뛸수록 멍청이들이 더욱더 그에게 빛 좋은 개살구처럼 가시로 된 왕관을 머리에 씌우고 찬양할 텐데. 거짓된 찬양 속에서 부와 명예만 쏙 빼내어 받아들이고, 그 외에 모든 것은 제 하고 싶은 대로 해도 충분할 것을, 그는 그럼에도 섞여서 살아가는 쪽을 택했으니, 그 꼴을 가만히 지켜만 봐야 하는 이쪽을 한 번이라도 생각해 줬다면, 그렇게 짓눌린 채로 살아갈 필요는 없다고- 그런 말들이 필터를 거치지 않고 우수수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았지만, 프레이는 웃음이 서렸던 입매를 무뚝뚝하게 굳힌 채로 모리오르에게 조용히 물었다.

혼란 속에 살면서도 질투심과 독점욕, 외로움과 분노를 품은 채로 그럼에도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주변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비슷한 흉내라도 내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 제게는 훤히 보였음에도 여전히 주변에서는 이해받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스스로 인지하지 못한 곳부터 조금씩 바뀌고 있는 그에게 그림자는 질문할 수밖에 없었고, 대답을 들어야만 했으니까.

네가 걷겠다고 했던 그 길을, 정말로 후회하지 않느냐고.

그러기 위한 ‘세상’에 불려 나오지 않았나. 

“당신께서 정말로, 지금이 ‘편하다’라고 생각하십니까.”

“아, 정말! 편하지 않으면? 네가 어떡할 건데. 내가 편하다고 하잖아. 몇 번을 묻는 거야?”

제법 날이 선 목소리로 베일 것처럼 튀어나오는 말이 뾰족하기 그지없어서, 프레이는 어둠 속에서 그저 빙긋 웃어 보였다. 몇 번이고 같은 대답이 나오는 것을 보아 그의 마음이 그때처럼 뚜렷하고 확고한 방향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게 느껴졌다. 대답을 듣고 나니 발밑이 조금씩 무감각해지는 게 자신이 이렇게 걷고, 움직이며, 그에게 제 의견을 전할 수 있는 시간이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는 게 느껴졌지만 그럼에도 어둠 속에서 내내 생각하고 있었던 이것 하나만큼은 말해주고 싶어서. 

“네가 편하다고 생각한다면 네가 애써 억누르고 버텨도 괜찮겠지. 잘하고 있어.”

 그날의 당신이 ‘나’에게 보여주었던 건 그런 거였잖아.

왜 사람들과 섞여서 살아야만 하는지, 왜 나는 다른 사람과 다른지, 왜 나는 이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지, 내 안에 갇혀 스스로만을 고민하고 고민하던 내가 다른 사람이 겪는 고통을 조금이나마 생각할 수 있게 되면서 나만이 아닌 타인을 생각할 수 있게 스스로 변화하고, 멈춰있는 것이 아닌 나아가는 길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는 걸. 내게 보여주었었잖아? 그러니, 여기서 이렇게 맴돌고 있으면 안 되는 거잖아. 네가 지금이 ‘편하다’라고 말했으니까, 나는 앞으로도 네가 ‘편한’ 길을 갈 수 있도록 응원하고 또 응원하겠지만.

 “그럼에도 힘들고 괴로워서, 마음속에서 울리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싶어지면 망설이지 않아도 돼.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상관없어. 그 무엇보다, 너 자신을 우선시해 줘.”

 너를 살리기 위해 나도 앞으로 계속 노력할 테니.

너 또한,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아.

 

프레이의 목소리가 음성으로, 혹은 직접적으로 마음에 닿아 읽히는 것처럼 느껴지며 그는 조금씩 바스러져 갔다. 잔뜩 망그러진 것이 인간의 형체를 잃고 다시금 길쭉한 그림자로 녹아가며, 웃음 서린 목소리로 ‘그게, 내가 너를 존중하는 하나의 방식이야.’라고, 속삭이며 조금씩 고요해졌다.

정말 제가 하고 싶은 말만 줄줄 내뱉고서 사라져 버린 프레이를 보며 모리오르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퉁명스럽게 툭, 내뱉었다.

 “그래서 여기서 어떻게 가야 하는 건데? 그건 왜 안 알려주고 가?”

티티아가 보고 싶단 말이야. 왜 이상한 말만 하고 가는 거야? 모리오르는 틱, 틱 말을 뱉어내곤 프레이가 서 있던 자리를 가만히 바라보다 그 자리에 대검을 푹, 깊숙하게 꽂았다. 빙글빙글 말을 돌리다 끝내는 뜻 모르게 사라져 버린 프레이에게 복수라도 하려는 것처럼 폭신하게 눈이 쌓인 곳을 찌르고 가르며 힘을 썼더니 ‘정말이지, 당신이란 사람은!’ 하고 프레이가 큭큭 웃는 것처럼 차디찬 바람이 모리오르의 복슬복슬한 귀를 간지럽히고 지나갔지만, 모리오르는 대검을 갈무리하고 갈라진 바닥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터덜터덜 앞으로 걸어 나갔다.

얼마나 걸어가야 할까? 이제 프레이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고, 혼자서 차디찬 길을 걸으려니 끝 없이 외롭고 서러워져서 모리오르는 무거워지는 두 다리에 애써 힘을 주고 저벅, 저벅 걷다 수북이 쌓인 눈 위에 털퍼덕 드러누워 눈이 쏟아지는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쉬고 싶어.”

 걷는 것도 지겹고, 끝이 보이지 않는 눈밭은 더더욱 지겨웠다. 티티아가 없는 곳에서 이렇게나 오랜 시간 혼자 있었던 적이 드물었으므로, 모리오르는 불안정해지는 정신을 애써 붙잡으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이제 눈은 지겨워. 티티아의 옆에서, 따듯한 온기가 있고 만족스러운 식사가 있는 아늑한 집에서 두 다리 쭉 뻗고 쉬고 싶어.

 ‘내가 눈을 뜨고 있을 때 그렇게 말했으면 좋았을 텐데.’

 프레이의 자그마한 목소리가 귓가에 흐릿하게 들리며 모리오르의 눈이 가물가물 감겨갔다.

그제야, 자신이 걷고 있었던 곳이 어디인지 눈치챌 수 있게 된 모리오르는 흐릿해지는 정신으로도 입꼬리를 밀어 올리며 프레이에게 닿지 않을 웃음을 그리고 있었다.

여기, 내 마음속이었구나. 그렇지?

그러니 네가 나에게 먼저 말을 걸 수 있었던 거였어.

내가 걷고자 했던 길이 이렇게 차갑고 아무것도 없는 곳을 의미 없이 맴도는 거라는 걸, 너는 내게 보여주고 싶었던 거지. 그리고, 내가 잘하고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던 거지?

여기가 어딘지 인지하자마자 내쫓기는 것처럼 몸이 부드럽게 땅 아래로 스며드는 듯한 감각이 느껴져 모리오르는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 두 눈을 감았다.

그러자 마치 텔레포를 타는 것처럼 몸이 산산이 분해되고 재조립되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모리오르는 그 감각에 온몸을 내맡기고서 아무것도 없이 황폐한 끝 없는 눈밭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제 그림자에게, 혹은 황폐하기 짝이 없는 제 마음속 풍경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모호한 말을. 

있지, 설원에도 꽃은 핀다고 티티아가 말해줬어.

피어나기까지 꽤 많은 노력을 해야 하고, 까다롭고 찾기 힘들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는 꽃이 커르다스 같은 설원에도 있다고 했어. 그러니 나도 노력하고,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 귀한 값어치를 하게 될 거라고……, 말해줬어.

이런 나라도, 언젠가는…….

그러니까 나는, 노력할 거야. 노력해야만 해…….

그 말에 그림자가 일렁거렸지만, 마음속 풍경에 녹아든 그에게는 닿지 않았다. 무언가 할 말이 있다는 것처럼 흔들리다가도 그저 차디찬 바람만이 불다 모든 것에 까맣게 어둠이 달라붙어 흔적도 없이 녹아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처음부터 흰 것은 없었던 것처럼.

 

이것은 누구의 악몽이었을까.

혹은, 누군가의 절망이나 침잠이었을까.

어느 쪽이라 명확히 말할 수 없는 어둠이 작게 일렁거리다 이내 움직임도 없이 고요해졌다.

 

이제, 깨어날 시간이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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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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