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창작

라일락

프리마베라 : 더 비기닝 / 다이앤 아르터스 오프더레코드의 이야기 / 요젶루시 cp 요소 / 2020.04.04 업로드

* 이 글에 나오는 닉네임과 계정 아이디는 모두 지어낸 것으로, 실제 인물과 관련이 없습니다.


루시는 서치를 잘하는 편이다. 특히 작품이 개봉한 이후로는 매일 반응을 살피는 게 하루 일과가 되었을 정도다. 가끔 나쁜 글도 보이지만, 곧잘 잊는 편이라 괜찮다.

으연 @diesilla3517
다이앤한테 밟히고 싶다
오후 2시 20분

이 사람은 '다이앤'이라고 서치하면 바로 나오는 계정 중 하나다. 매일 다이앤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나도 모르게 프로필 사진과 닉네임을 외워버렸다. 실수로 마음이라도 찍으면 난리가 날 테니 조심하도록 하자.

징징이앞다리살 @zingzingBob
루시 필모깨기 하고 싶은데 필모가 세 개 뿐임 작품해! 작품하라고!
오전 11시 59분

곧 들어간다. 기다려달라. 안 그래도 프리마베라 이후에 들어오는 작품이 몇 개 있어서 고르는 중이었다. 다 괜찮아 보이기는 하는데, 청춘물 쪽이 제일 끌리기는 한다. 이 나이에 고등학생 연기하려고 하면 안 어울리려나.

가느다란물방울 @thinwater
근데 룻은 딕션 평소에 괜찮다가 왜 긴 대사만 나오면 th 발음을 그렇게 하는 거임 약불호 포인트... 다 괜찮은데 그게 자꾸 들려서 대사 빠른 부분 넘기게 됨
오전 11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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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징어먹고싶다 @zingeat
@thinwater님께 보낸 답글
데뷔작보단 나아진 거임... 좀 입덕할까 싶어서 찾아보다가 끔... 귀지 오억개 생성하고 들으면 괜찮을까 나 그래도 데뷔작 보고 싶은데
오후 12시 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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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느다란물방울 @thinwater
@zingeat님께 보낸 답글
님 이미 찐사랑인 듯
오후 12시 8분

이건 서치 방지를 했지만 서치가 걸린 경우다. 정직하게 '루시'와 '다이앤'만 검색하는 게 아니라, 온갖 서치 방지 단어를 다 긁어모으므로 웬만한 건 다 걸린다. 그나저나 발음이 그랬나? 요새 연기 연습한다고 발음 연습을 소홀히 했더니 예전 습관이 나왔나 보다. 데뷔작은 내가 들어봐도 단점이 두드러질 정도이니, 또 입에 펜 물고 연습해야겠다.

구명조끼좀주세요제가아이라눈에빠져헤어나오질못 @skfsskzkziseo244
오... 그림 진짜 내 취향으로 그리는 사람 봤는데 앤아일 판다... 나 리버스 개지뢴데... 시발 이게 적진의 명장임?
오전 11시 2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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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명조끼좀주세요제가아이라눈에빠져헤어나오질못 @skfsskzkziseo244
@skfsskzkziseo244님에게 보낸 답글
아 근데 진짜 너무 취향인데... 눈 딱 감고 앤아일 먹어? 미쳤어? 누가 5억을 줘도 안 먹어
오전 11시 2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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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켜줘사무엘명예코톡톡 @imnose123
@skfsskzkziseo244님게 보낸 답글

난 누가 5억 주면 앤사무도 먹음
오전 11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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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명조끼좀주세요제가아이라눈에빠져헤어나오질못 @skfsskzkziseo244
@imnose123님께 보낸 답글

앤사무 리얼 마이너다 파는 사람 울고 있을 듯
오전 11시 3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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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켜줘사무엘명예코톡톡 @imnose123
@skfsskzkziseo244님께 보낸 답글

나 얼마전에 앤사무 팬픽찾음 볼래?
오전 11시 4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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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명조끼좀주세요제가아이라눈에빠져헤어나오질못 @skfsskzkziseo244
@imnose123님께 보낸 답글

오~~~ 노우 안 보고 싶음 앤왼 죄악; 근데 요새 누가 팬픽이라 그래ㅋㅋㅋㅋ 알페스도 아니고ㅋㅋ
오전 11시 45분

이런 이야기도 모르는 편은 아니다. 한창 10대인 동생 덕분에. 근데 요새는 왼른이라고 쓰나 보네. 동생은 아직도 공수 쓰던데. 안 그래도 동생이 영화 보고 와서 앤총수각이라며 적폐 해석을 해대는 덕에 지겹게도 들어서 궁금해진 건데, 왜 앤왼이 마이너야?

사실 얘가 유한 성격도 아니고, 얼굴도... 내가 솔직히 순하게 생기진 않은 것 같은데. 이게 그건가? 정장 입은 캐릭터는 후줄근하게 입히고, 잘 웃는 캐릭터는 정색시킨다는 그거? 멘탈 센 캐릭터를 쿠크다스처럼 부숴버린다는 그릇된 욕망?

프리마베라는 로맨스 라인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 딱 한 커플을 제외하고는 공식에서 이어진 러브라인이 없는데, 그럼에도 뿌려놓은 건 많아서 관객들이 알아서 주워 먹고 있는 것 같다. 며칠 서치해본 결과 요제프 팬들 사이에는 사무앤, 사무일, 사무몰리 정도가 메이저인 것 같고, 제인 팬들 사이에는 아일앤, 사무일, 몰리아일... 아, 레브일도 봤다. 그리고 내 팬들은... 뭐, 가리는 게 별로 없는 것 같다. 근데 그 앤사무 소설 나도 좀 보면 안 되나. 솔직히 궁금한데.

리얼펄슨은당신을고소할수있다음고소해마트다녀오 @gosogak777
4무엔 파다가 yo쥎루싀 팔 거 같음 아니 근데 둘이 진짜 묘해 님들아 들어보라니까
오전 9시 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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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코코넛 @pumppumpcoco
@gosogak777님께 보낸 답글

님은 왜 맨날 공계로 알페스 파요
오전 9시 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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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펄슨은당신을고소할수있다음고소해마트다녀오 @gosogak777
@pumppumpcoco님께 보낸 답글

그게 짜릿해
오전 9시 1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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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펄슨은당신을고소할수있다음고소해마트다녀오 @gosogak777
@gosogak777, @pumppumpcoco님께 보낸 답글

농담이고 플텍 답답해서 못 하겠음 근데 둘이 이거 보라고 이게 안 사귀는 건가요?
동영상 1개
오전 9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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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코코넛 @pumppumpcoco
@gosogak777님께 보낸 답글
허미? 너한테 영업 당한 게 좀 자존심 상하는데 아주 쬐끔 맛있는 거 같음 어머니 딸내미 이거 퍼먹고 고소당하러 갑니다
오전 9시 41분

두 눈을 의심해야 했다. 이거 사무앤이 아니라 요제프루시 판다는 거지? ...소문으로만 듣던 RPS를 다 당해보네. 오... 오... 느낌 이상하다. 저번에 한 번 열애설이 날 뻔한 적은 있었다. 기사로 터지지는 않았는데, 기자들이 우리 사이에 뭔가 있을 거라 생각하고 몰래 붙은 적이 있다더라. 난 몰랐지만. 최근 요제프의 인터뷰 중에 언급됐던 것도 있고 해서 더 그런가. 난 그 항목 보면서 사무앤 파는 사람들이 좋아할 줄 알았더니, 배우끼리 엮어버리는 사람도 다 있네.

동영상을 재생해보니 평범한 동료 간의 스킨십 정도다. 다 모아서 영상 하나로 만드니 양이 많아서 그렇지. 말로만 듣던 RPS의 당사자가 된 게 신기하긴 하지만 딱히 큰일일 것까진 없다. 공개적인 장소에서 과하게 하지만 않으면 그냥 넘어갈 문제지. 이미 많은 연예인들이 그렇게 하고 있고. 솔직히 이런 건 명예훼손이라고 하기에도 뭐한 데다가, 소속사에 말해봤자 그냥 놔두는 게 좋다고 할 게 뻔하다. 첫째로, 내가 기분이 상하지 않으면 된 거지.


단장 뭐해요

1

진짜 짜증난다 뭔일

화보

아 잘 나가네~ 부러워~


생각난 김에 연락이나 해봤으나 이 사람은 일할 땐 늘 단답형이다. 그래도 나보다 낫다. 나는 집에 가서 답장해야겠다고 마음만 먹고 까먹어서 늘 읽씹하게 되던데.

"지금도 요제프 배우님을 단장이라고 부르신다고 들었어요. 이유가 있나요?"

"그냥 편해서죠, 뭐. 다른 배우들도 종종 극 중 이름으로 불러요. 아무래도 본명보다 많이 불러서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게 있더라고요. 가끔 요제프 놀릴 때는 제삼황자님, 이러고."

그러고 보니 잡지 인터뷰에서 그 부분 잘렸네. 얼마 전 만났던 인터뷰어의 밝은 얼굴을 떠올린다. 이불에 머리카락이 마찰하는 소리가 고요한 방안을 울렸다. 이제 진짜 봄인가 보다. 두툼한 후드티의 목 부분을 자꾸 끌어내리게 되는 걸 보니. 잠옷으로 쓰고 있는 이 후드티는 프리마베라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단체로 맞춘 옷이다. 등에 영화 제목이 쓰여 있는. 종종 파파라치 사진이 찍히는데, 그때마다 한결같이 이 옷을 입고 있는 바람에 팬들이 호크룩스라고 부르기도 하더라. 그나저나 추울 때 머리카락 길러보려고 했는데, 이번에도 그른 것 같다.

띠링.

짧고 청아한 알림이 울렸다. 아, 요제프네. 아까 연락했을 때 이미 촬영이 막바지였나 보다.


심심해?

나도 시간 애매해서 밥이나 먹고 들어가려고 했는데 같이 먹어?

소속사에서 단장 만나지 말랬는데? 사진 찍힌다고

너 무슨 아이돌이야?

몰라 곧 핸드폰도 뺏기는 거 아냐?ㅜㅋㅋ

미리 안녕

근데 나가면 밥 황자님이 사주는 건가요

그렇게 부르면 사주겠나요

^^ 한 시간만 기다려


근데 뭐, 사장님 말도 그냥 권고사항인지라 상관없다. 밥 사준다는데 나가야지. 몰골이 말이 아닌 것 같기는 하지만, 원래 돈 안 들어올 때는 배우들 다 이러고 사는 거 아니겠는가.

칫솔에 치약을 꾹 눌러 입에 물었다. 새로 산 치약이 과하게 맵다. 용량이 큰 편이라 버리기도 애매하고, 고통스럽지만 익숙해지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꼼꼼하게 이를 닦고 물을 머금었다. 매워서 오래 물고 있지 못하고 빠르게 헹궈내나, 덕분에 가글 횟수가 늘어 입안에 남는 치약은 확실히 없을 것 같다.

원래는 겨울에도 적당히 찬물로 샤워하는 걸 좋아했는데, 요새는 왜 따뜻한 물이 좋은지 모르겠다. 나이 먹어서 그런가. 머릿속에 흐르는 생각들을 아무렇게나 내버려 두니, 그 흐름은 곧 누군가의 이름으로 찰박이며 멈춘다.

등짝의 글씨가 튀는 프리마베라 후드 대신 다른 후드티를 꺼냈다. 오렌지색? 너무 밝은데. 검은색... 오늘 바지랑 모자가 전부 검은색이라 다른 거 입고 싶다. 대충 어두운 파란색 후드티를 꺼내 머리를 밀어 넣었다. 열심히 뒤적이느라 서랍이 한껏 어질러졌으나 그건 갔다 와서 정리하면 될 테다.


근데 나 어디로 나가?

집 앞

이 근처에 맛있는 것도 없는데 매번 뭐하러 여기까지 와ㅋㅋ

어차피 차 타고 가는데 뭐

준비 다 했어?

응 지금 가~


매번 집 앞으로 데리러 오고 집 앞까지 데려다주는 게 조금 미안하기는 하나, 그가 해줄 수 있는 나름의 배려일 것이다. 요제프 본인은 파파라치를 피하려는 노력을 안 하는 사람이라, 누구랑 같이 있을 때 사진이 몇 장이 찍히든 그러려니 하곤 했다. 그러나 내 쪽은, 정확히는 내 소속사 쪽은 그것을 꽤 꺼리는 분위기인 점을 신경 써준 거겠지. 솔직히 내 생각에는 오히려 그 비밀스러운 점 때문에 '저 둘 뭐 있는 거 아니야?'라는 생각을 불러일으킨 것 같지만.

흰색 운동화를 자연스레 발에 끼워 넣었다. 하도 편히 신었더니 이리저리 때가 묻어 조만간 세탁해야겠다고 다짐은 하나, 미루고 미루다 보니 오늘까지도 그대로다. 오늘은 외출할 거니까 힘들어서 안 되고, 내일이나 모레쯤에는 꼭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신발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자니, 그 옆에 가지런히 놓인 하늘색 스니커즈로 시선이 옮겨갔다. 예뻐서 사긴 했지만 새것이라 뻑뻑한 탓에 자주 손이 가지 않은 것이다. 신발 두 켤레를 나란히 들고 눈만 굴리다가 결국 새 신발을 신기로 했다. 흰색 운동화는 너무 구겨지고 더러워서 안 되겠다는, 평소엔 신경 써보지도 않은 점을 변명으로 내세우면서.


신발이 너무 딱 맞아 불편한 탓인지 오늘따라 계단이 길다. 발뒤꿈치가 꽉 눌리는 낯선 기분에 미간을 좁혔다가, 익숙한 차의 색이 보여 재빨리 주름을 폈다. 이 얼굴로 만났다간 얻어먹는 주제에 표정이 왜 그러냐고 할 게 뻔하다.

"오랜만."

"이렇게 얼굴 보기가 힘들어서 어째. 단장 슈퍼스타네."

"왜, 보고 싶었어?"

"앞으로 계속 얼굴 보기 힘든 것도 썩 나쁘지 않을 것 같아."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만나면 매번 이렇게 투닥대는 게 작품 캐릭터의 영향인지, 아니면 이 사람과 나의 원래 상성인지 모르겠다. 그래도 '기어오르지 마라, 루시 맥머드.' 안 하는 게 어디인가.

"너도 작품 제의 세 개나 들어왔다며."

세 개씩이나 들어오기는 했다. 갈등하고 있는 이유가 있어서 그렇지. 작품 호불호가 확실한 편이라 이미 어렵지 않게 하나를 골라놓은 지 오래다. 문제는 남은 두 개 중의 하나가, 잘하면 이 사람이랑 같이 들어가는 드라마일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단장, '후원의 라일락' 대본 그쪽에 들어갔어?"

"어. 너 그거 할 거야?"

"모르겠는데."

이 사람도 들었나 보다. 내가 상대역으로 거론되고 있다는 거. 솔직히 쓸데없는 고민이다. 하고 싶은 작품이 따로 있으면 그걸 해야 맞다. 평소 내가 작품을 고르는 기준에 '친한 사람의 유무'는 없었으니까. 여유 부릴 시간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며칠 안에는 확실히 정해야 했다. 천천히 하자는 명목으로 그 며칠이라도 질질 끌겠다고 대답을 미루고 있지만.

"단장은? 해?"

"나도 글쎄. 대본은 좋은데 여유가 안 될 것 같아서."

"그래?"

더 할 말은 없었다. 애초에 오래 생각할 사안도 아니었다. 밥 뭐 먹자고 할지나 고민해봐야겠다. 무릎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머리를 굴리다가, 문득 옆을 보니 깔끔한 올블랙 차림으로 운전대를 잡은 요제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들이 왜 그렇게 '남친짤' 같은 것을 좋아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지금 이 각도에서 사진 찍어 올리면 꽤 화제 될 것 같은데. 그건 그렇고, 검은 후드티 안 입고 오길 잘했다. 오늘 나까지 올블랙이었으면 정말로 칙칙했을 것 같으니.

"뭐 먹을래?"

"초밥."

"그럴 줄 알았지."

그럴 줄 알기는. 이 사람은 무슨 내가 매일 초밥만 먹는 줄 안다. 안 먹은 지 2주나 됐는데. 이미 가게도 알아봤는지 익숙하게 내비게이션을 찍는다. 화보 촬영 끝나고 바로 온 거 아니었나? 얼굴에 화장도 그대로인데.

"단장 화장하고 올 거라는 걸 깜박했네. 나도 하고 나올 걸 그랬나."

"너 입금 안 되면 화장 안 하잖아."

"말을 그렇게 극단적으로 해."

사실이다. 일하러 가는 거 아니면 화장은 잘 안 하는 편이었다. 데이트 같은 걸 해본 적도 손에 꼽으니, 말 그대로 일할 때 외에는 없다고 봐야겠다. 오늘은 진짜 사진 안 찍혀야겠다. 만약 찍힌다고 해도 투 샷만은 절대. 혹시 모르니 선글라스도 미리......

"아, 맞다. 나 선글라스 안 가져왔어."

생강 씹은 표정으로 가방 안쪽을 노려보고 있으니 요제프가 한 손을 뻗어 조수석 앞에 달린 서랍을 두드린다. 얘는 사람 코만 톡톡 치는 게 아니라 만물을 톡톡 치는구나.

"저번에 안경 놓고 간 거 거기 있어."

"아, 그거 어디 갔나 했더니."

선글라스 쓰기 답답할 때 대신 착용하는 알 없는 안경이 사라진 적이 있었다. 집을 다 뒤져도 안 나오는 데다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니라서 잃어버렸겠거니 했는데, 언젠가 이 차에 두고 내렸었나 보다. 서랍을 여니 손수건이며 맥가이버 칼이며 각종 잡동사니가 굴러다니는 와중에, 익숙한 무늬의 안경집이 서랍 벽에 부딪히며 가벼운 소리를 냈다. 테만 있는 안경을 대충 얼굴 위에 얹어놓고 의자에 몸을 푹 기댔다.

"프리마베라 누적 관객 수 50만 곧 넘겠더라."

"그거 해야 되나? 종이에 50만 관객 감사합니다, 써서 사진 찍는 거."

"하라고 연락 올 것 같은데."

"하라면 해야지."

요새는 먼 친척들과 연락 뜸하던 친구들에게까지 안부 문자가 오곤 했다. 대부분 영화 잘 봤다며 잘 지내냐는 내용이고. 그래도 꽤 흥하고 있어 다행이다. 스케일이 큰 영화라 손익분기점이 좀 높아서 걱정했는데.

"안 피곤해? 운전 내가 할까?"

"너한테 맡겼다가 내 차가 아니라 구급차 타고 밥 먹으러 갈 것 같아서 안 돼."

그 정도로 운전 못 하지는 않는데, 좀 자존심 상하네?

"자존심 상해?"

극 중 단장이나 현실의 단장이나 자주 이런다. 가끔은 한 대 쥐어박고 싶기도 하고. 5분 더 가면 도착한다는 목소리를 가볍게 흘려넘기고 또 쓸데없는 생각에 잠겨본다. 다이앤이 진짜로 사무엘 한 대 쥐어박았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에 대한, 정말 쓸데없는 상상에. 처형 장면까지 진도가 극단적으로 흐를 즈음, 차가 멈추며 처음 보는 가게 하나가 시야에 담겼다.

"저녁에 일 있어서 빨리 먹고 너 데려다주고 가야겠다."

"무슨 일?"

"CF."

"진짜 미쳤다. 제일 잘 나가네?"

대답 없이 웃으며 내리는 단장을 따라 차 밖으로 몸을 끄집어냈다. 가게 내부가 크지는 않았지만, 오밀조밀한 인테리어가 마음에 들었다. 이런 데는 어떻게 찾는 거래. 이미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머물고 있던 탓에, 직원의 안내를 따라 빠른 걸음으로 방에 들어가 버렸다.

"요새 혼자 뭐해?"

"나? 집에서 책 읽어."

"로맨스?"

"철학."

"뻥치지 말고."

"응, 추리 소설."

영양가 없는 대화가 한참 오갔다. 이 자리는 분명한 목적을 가진 것도 아니었고, 주어진 대사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됐고, 모든 것에서 의미를 찾아내지 않아도 됐다. 별거 아닌 대화만 잔뜩 나누고 헤어질 수 있다는 점이 편안했다.

"근데 진짜로 소속사에서 뭐라고 해? 나 만나면?"

"응. 오늘도 사진 찍혔으면 잔소리 정도는 듣겠지. 솔직히 단장이 나랑만 찍히는 것도 아닌데 갑자기 좀 억울해질라 그러네."

"나는 너랑만 찍히는 게 아니지만, 너는 나랑만 찍히잖아."

"..."

왜 오늘따라 맞는 말만 하지. 이상하게, 평소에 친구와 단둘이 거리를 쏘다녀도 사진이 올라오는 걸 본 적이 손에 꼽는다. 근데 꼭 단장만 만나면 그렇게 피라냐처럼 들러붙는단 말이야. 사람 인연 끊어놓는 주범이다, 아주.

뚱한 표정으로 초밥을 입에 넣었다. 단장이 고른 집이야 맛없던 적이 없지만, 밖의 테이블에 사람이 그렇게 많은 게 이해가 되는 맛이다. 솔직히 남의 사진 허락 없이 찍어서 돈 벌 거면 당사자한테 이런 초밥 한 끼 정도는 사줘야 하는 게 아닐까. 차를 타고 와야 할 정도로 거리가 있는 편이라 오가기 귀찮다는 것을 제외하면 고득점이다.

"맛있어?"

"응. 근데 예약했어?"

"당연하지. 안 했으면 여기 어떻게 들어왔겠어."

건조하게 수긍하고 연어를 이로 꾹꾹 눌러 씹었다. 10분마다 한 번씩 확인하는 손목시계와, 뒤집어놓은 핸드폰에서 종종 울리는 진동을 보아하니 바쁘다는 말이 진짜인가 보다. 저 정도면 그냥 촬영지 근처에서 휘리릭 먹고 가는 게 나았을 텐데.

"먼저 먹고 갈래?"

"운전 좀 서두르면 돼."

그렇다니 더 할 말은 없지만, 괜히 나까지 마음이 조급해져 평소보다 먹는 속도가 빨라졌던 것 같다. 밥 잘 먹고 체하기는 싫은데 괜찮으려나 모르겠다. 마지막 한 피스까지 볼에 넣고 가방을 주섬주섬 챙기니 요제프가 웃는다.

"다 넘기고 하지?"

대답하고 싶어도 입에 초밥이 있어 열 수가 없었다. 바쁜 건 저쪽인데 빠릿빠릿한 건 나다. 지각하면 어쩌려고 저러는지 모르겠네. 계산대로 다가가는 요제프를 붙들어 손에서 말없이 차 키를 뽑았다.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 시선도 있고 해서, 먼저 나가 있겠다는 뜻이었다. 얘랑 만날 때마다 이랬더니 이제는 얼굴에 물음표 하나 안 띄우고 키를 넘겨준다.

계산 하나 하는데 뭐 이렇게 오래 걸리는지 모르겠다. 아마 가게 주인이 사인이라도 해달라고 한 거겠지. 종종 그런 경우가 있다. 창문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핸드폰을 만지고 있자니 옆자리 문이 금방 열렸다. 무릎 위로 사탕 두 개가 떨어졌다.

"고마워. 잘 먹었어."

"그래. 다음엔 단원이 사."

"오, 다음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없으면 있게 만들어야지."

또 나왔다. 그전 작품들의 영향인지, 아니면 그냥 본인이 좋아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요제프는 종종 저런 집착남 같은 대사를 치곤 했다. 요새 말로 뭐라더라. 광공?

"방금 찾아보니까 근처에 지하철역 있더라. 거기 내려주고 가."

"왜?"

"뭐가 왜야. 촬영 간다며."

그 말에 손목시계를 잠깐 보더니 별거 아니라는 얼굴로 시동을 건다.

"데려다주고 가도 안 늦을걸."

"그럴 거면 그냥 밥을 천천히 먹고 지하철역에 내려주고 가는 게 낫지 않았을까?"

"뭐래, 빨리 먹은 건 너잖아."

그것도 맞는 말이다. 아니, 자기 배려해주려고 그런 건데 괜히 억울하네?

"억울해?"

방금까지는 억울하기만 했는데 분이 차오르려고 한다. 조용히 입을 닫고 고개를 돌려 가게가 시야에서 멀어지는 것을 바라봤다. 가게 이름 봐둔다는 걸 까먹었네. 요제프한테 알려달라고 문자 보내놔야겠다. 다행히 체기는 없는 것 같고, 집에 들어가서 운동 좀 하다가 낮잠이나 자면 될 것 같다.

바퀴가 구르는 속도가 아까보다 훨씬 빨라서, 그제야 안전벨트를 손에 쥐었다. 버튼이 딸깍이는 소리를 시작으로 가벼운 대화가 오감으로써, 차 안의 정적은 언제 존재했냐는 듯 트렁크의 구석으로 몰려갔다.

"작품 할까?"

"뭘 해?"

"후원의 라일락."

창문 너머를 바라보던 눈동자가 데구륵 굴러 옆자리를 향했다. 고개는 고정한 채 눈만 굴린 탓에 요제프의 얼굴이 다 보이지는 않았다.

"여유 없다며?"

"여유가 없다고 좋은 작품을 놓치면 배우가 아니지."

"말은 잘하네."

"말 잘해야 배우도 하는 거고."

"하든가."

안 한다고 했으면 나도 망설임 없이 청춘물 쪽을 선택했을 것이다. 대본만 봤을 때 제일 하고 싶은 작품을. 밥 잘 먹고 와서 갈등만 커지게 생겼네. 차가 흔들려 무릎에 놓인 사탕이 바닥으로 툭 낙하했다. 허리를 굽혀 주워서 포장지를 찢었다.

"대본 리딩 때 보겠네, 루시."

"난 한다고 안 했는데?"

"마음 있으니까 물어본 거 아니야?"

"그거야 그런데."

멜론 맛 사탕이 입안을 굴렀다. 내가 안 하면 그 자리에 누가 들어가는 걸까. 제작진이 나 다음에 누구에게 콜을 찍느냐에 달려 있으므로 나는 알 길이 없다. 팬들이나 일반 대중들은 뭘 더 좋아하려나. 어차피 둘 다 전의 출연작들이랑은 겹치는 느낌이 없어서 새로운 도전이기는 한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사탕을 녹이고 있을 무렵, 익숙한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별 이야기도 안 했는데 벌써 동네네. 슬슬 줄어드는 속도에, 붉은 버튼을 눌러 안전벨트를 풀어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손바닥 안에서 바스락거리던 빈 사탕 포장지를 가방에 버리고, 아직 먹지 않은 사탕도 가방 속에 함께 떨어뜨렸다.

"가방을 쓰레기통으로 썼으면 집에 가서 좀 비워. 연예인이."

"언제 한 번 내가 단장네 집 쳐들어간다. 그러는 자기는 정리 제대로 하고 사는지."

말이 없는 걸 보니 찔린 게 분명하다. 가방 지퍼를 지익 닫고 차가 완전히 멈출 때까지 기다렸다. 문득 궁금해졌다. 저 사람이랑 나랑 로맨스를 찍으면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무슨 느낌일지. 하는 우리의 기분이 아니라, 완성본을 볼 제삼자들의 감상 말이다.

"촬영 잘해."

"어, 들어가."

습관적으로 모자를 더 눌러쓰고 바닥을 디뎠다. 차로 이동해서 얼마 걷지 않은 탓인지, 아니면 그사이에 적응해버린 것인지, 신을 때는 분명 불편했던 신발이 꽤 괜찮았다. 탁 소리가 나도록 문을 닫고, 허리를 굽혀 손을 한 번 더 흔들어주었다. 요제프가 엄지와 새끼손가락을 세워 귀 옆에 댔다. 아무리 요새 인기가 좋다고 해도 지각하면 평판 확 나빠질 텐데, 제발 제시간에 가길 빌어줘야겠다.

현관문에 비밀번호를 넣고 신발장에 들어서자마자 흰 운동화를 집어다가 욕실 바닥에 내려두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세탁은 내일 해야지. 다시 신발장으로 향해 스니커즈를 신발장 안에 고이 넣어두고, 냉큼 서랍을 열어 아까 휘저은 옷들을 보기 좋게 말아두었다. 집에 들어오니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어쩔 수 없는 집순이인가 보다. 원래 잠옷으로 쓰던 프리마베라 후드티도 슬슬 세탁하기로 하고, 잠옷으로는 그것보다 조금 얇은 긴 팔 티와 트레이닝복 바지를 입었다. 마지막으로 가방 속 쓰레기들을 한 움큼 꺼내 쓰레기통에 집어넣고, 확 비어버린 내부에서 핸드폰을 뽑아 들어 홀드를 풀어보았다.


오늘 밥 같이 먹어줘서 고마워~

다음에는 다른 메뉴 좀 먹자ㅋㅋ


어울리지 않게 움직이는 이모티콘과 함께 온 메시지 2개가 알림창에서 반짝였다. 초밥 좋아하면서 뭘. 답장을 하려고 베개에 옆으로 누웠다가, 눌리는 기분에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맞다, 안경 쓰고 있었지.


그럼 다음에는 고기 사달라고 할까 봐

초밥이 최고지

ㅋㅋㅋ

농담이고 그래 다음엔 물고기 말고 땅고기 좀 먹자

오~ 요새 돈 많이 버나 봐 진짜로ㅎㅎ

ㅎㅎ에 많은 감정이 담겨있는 것 같다

ㅎㅎ

ㅎ 나 촬영 들어가야 될 것 같은데? 이만

헤어진 지 10분도 안 됐는데요 단장

아 나 이제 폰 꺼야겠다~

ㅋㅋ아 그래? 알았어~ 촬영 잘해~


1 표시는 곧 사라지고, 이쯤이면 정말로 답장은 없을 것이다. 지금이 운전 중이든, 촬영 중이든 간에. 액정을 끄고 침대에 바르게 누웠다. 밥 먹고 두 시간은 깨어 있어야 한다지만 지금은 딱 낮잠 자기 좋은 시간이다. 지금을 놓치면 완벽한 낮잠은 없을 것이다. 내일은 꼭 운동화를 빨겠다 다짐하며, 의식이 흐려져 가는 것을 즐거운 마음으로 내버려 두었다. 자고 일어나면 요제프의 '후원의 라일락' 캐스팅 기사가 뜰 것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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