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창작

흰 까치

프리마베라 : 더 비기닝 / 사무앤 동양풍 / 하단 그림 출처: 사무엘 오너 / 2020.07.03 업로드

지식을 얻는 일보다 어려운 것은 사람을 얻는 일이고,

지식을 잃는 일보다 쉬운 것은 사람을 잃는 일이며,

그중 가장 까다로운 것은 사람을 잊는 일이다.


계승권도 없는 세 번째 황자가 쓸데없이 인재 보는 눈만 좋다고 소문이 자자하기에 못난 주인이 총명한 개들을 데리고 있어 봐야 이리저리 끌려다니기나 한다고 비웃었는데, 이제 와서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겠다. 적어도 그 개들 목에 줄을 채우는 실력 하나는 출중한 인간이라는 것을.

"이게 무어야? 선물인가? 정인 있다는 소리는 안 했잖어."

"정인은 무슨. 주군이 준 건데."

"세상에, 죽은 이가 준 거라구?"

"됐다. 가라."

내 눈을 닮았다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듣고는 빛 하나 들이치지 않을 검은 상자에 가두고서 한 번도 열어보지 않았다. 때가 아닌 곳에서 열었다가는 가치를 소멸하는 물건이다, 그리 여기고서는 만일 놓친다면 아무도 손 뻗지 못할 곳에 묻어두고 다시는 꺼내지 않을 생각이었다.

나는 개가 되기 싫었다. 인간의 귀와 코는 참 둔하여서, 특히나 이런 작은 지역에서는 눈만 살짝 돌리면 주변의 악취와 소음 정도는 외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오래 지켜온 삶이었다. 이 나라는 내게, 맡지 않아도 될 냄새를 맡고 듣지 않아도 될 소리를 들으면서까지 지키고 싶은 나라가 아니었다.

"저를 전하의 사람으로 들이시려면 주제도 모르고 감히 손톱을 내어 기어 오르는 것을 감당하셔야 할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7년간 전란 속에서 살아왔다. 이보다 더한 것도 견뎌왔으니, 어찌 너를 버티지 못할까."

"살다 보면 종종 그리 무시하던 것에 발을 밟히는 일이 생깁니다."

"확신할 때까지 말해주지. 혹 그대의 칼이 내게로 향할지언정 나는 타당한 이유 없이 그대들에게 칼을 들지 않겠다. 내 이마의 문양을 걸고 약조하마."

"그 약조가 나라와 백성의 가치만큼 무거운 것인지, 아니면 전하께서 품으신 문양이 고작 새털처럼 가벼운 것이었는지는 나중에 알게 되겠지요."

그 눈빛이 참으로 단단해서, 겨우 그런 이유로 나는 그 눈을 피하지 못하였을까. 나를 원하는 자의 안광이 그리 서늘할 줄 미리 알았더라면 아예 푸르른 옷자락이 살랑이는 쪽은 쳐다도 보지 않았을 것이다. 감히 황실 내에서 황자의 목에 칼을 겨누고도 살아남은 것이 죄다.

하지만 나는 그때 필시 그래야만 했다. 나는, 저자의 이치가 궁금했다. 그 타당한 이유라는 것이 어떤 선에 존재하는지, 그것을 쥐고 장난을 걸면 과연 어찌 반응할지, 주먹 속의 것을 빼내어 손이 닿지 않는 더 높은 곳에 올려둘지 아니면 그 커다란 검으로 숨을 끊어낼지, 그런 것들이 나를 무섭게도 긁어댔다. 어쩌면 하자를 찾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역시 황족이란 쓸데없이 목 위에 힘이나 주고 허리 한 치를 굽히지 못하여 아래서 내미는 손을 붙들지도 못하는 족속들이라고 확신하려 했겠지.

"자네도 들었겠지. 천 년에 한 번 나올 탈옥수가 나왔다더군. 혜옥에서."

"얼마 못 가서 잡혔다고 보고 받았는데요."

"안다. 그래서 지금 평화롭게 차 마시고 있지 않느냐."

"…그 건을 어떤 일보다 우선으로 처리하라고 하신 게 이해가 잘 안 가네요. 더 급한 일이 많은데."

"내 시야에 있던 자가 도망가는 걸 두고 보는 성격이 아니라서라고 해두면 좋겠군."

"…그걸 왜 저를 보고 말씀하시는데요?"

숙련된 어부는 그물을 찢을 물고기를 기가 막히게 알아보는 법이다. 그 곁에 머문 기간이 결코 짧지 않음에도, 백합 위를 디딘 모든 순간에 나는 겉은 아름다우나 등 어딘가가 끊임없이 따가운 옷을 걸친 기분이었다. 책상 위 쌓인 서류들과 그 안에 적힌 불길한 글자들에 깨어난, 태어나서 처음 겪어보는 예민한 감각이 뇌를 수도 없이 찔러대었다. 모르고 살고 싶었다. 이런 우울한 이야기들. 그 소용돌이의 한복판에서 알고도 모른 척하기란 불가능했다. 내가 보지 않으면 아무도 바라보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 사실만은 도저히 모를 수가 없었다.

"…황제 폐하께서 스스로 수족들을 내치셨단 말씀입니까?"

"자네 덕이지. 정확히는 자네가 물어온 정보꾼 덕이지만."

"…"

"왜 그러지?"

"바뀌지 않을 줄 알았어서요."

"그런 사람의 눈이 아니던데."

"제 눈이 왜요."

"녹색의 불길. 해내고야 말겠다는 눈."

"해내야 했으니까요."

"자네의 그런 점이 마음에 든다고 말했었나?"

"아니요."

"지금 했으니 됐군."

영영 이대로일 줄만 알았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버티고 앉을 것 같던 황제가 덫에 걸려 끝내 홀로 살기 위해 검은 꼬리를 잘라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깨달았다. 어쩌면 군자의 지략을 얕잡아 보았는지도 모르겠다고. 그때 내 눈에 보인 황자는 전쟁통에 장군과 책사를 겸하고도 거뜬히 승리를 취할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마저도 일 순위의 목표는 희생의 최소화였으리라. 현실성이 없다. 이런 자가 우두머리로 서지 못한다는 것이 제국의 불행으로 느껴질 정도로.

"내 너를 방앗간에서 본 듯한데. 아니다, 주막서 허드렛일을 하던 것 같기도 하고. 그게 아니면 외양간에서 송아지를 받고 있던가? 그것마저 아니라면… 서당에서 보았을 수도 있겠구나."

"주막서 허드렛일을 하다 쫓겨나 방앗간에서 쌀을 찧고, 또 쫓겨나 외양간에서 송아지를 받았었죠. 이제 갈 곳도 없어 서당서 글이나 깨우치려 하는데 쉽지가 않더이다. 높으신 나리께서 어찌 저를 찾으시는지?"

"하."

쌀을 어떻게 찧어야 고와지는지, 주막에서 남들이 쉬는 동안에 얼마나 많은 노동이 이루어지는지, 갓 태어난 송아지를 어찌 받아야 어미와 자식 둘 다 다치지 않는지, 서당에서 처음 배우는 글자는 무엇인지… 나랏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할 것들이나, 안타깝게도 그들이 밟고 다니는 바닥은 기름기와 때로 범벅이 된 터라 밑을 내려다보려 해도 보일 리가 없었다. 아니, 그 전에 내려다보려는 시도를 하기는 하던가.

그러나 놀랍게도 당신은 그것을 알았다. 솔직히 말해서 자존심이 상하기까지 하는 일이었다. 평민의 옷으로 갈아입고 시찰을 나간다기에 그저 장이나 몇 번 돌고 아이가 크게 우는 집에나 어설프게 집중할 줄 알았지, 마치 언젠가 과거에 정말 그 모든 일을 다 해본 적이 있는 것처럼 이것저것 손 봐야 할 점을 쏙쏙 골라내어 서류로 작성해서 내려주는데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다 나올 지경이더라. 정말로,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내일이다."

"그거 알려주려고 오셨어요?"

"실수는 용납하지 않아. 확실하게 점검하고 일찍 잠들도록."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하거라."

"정말 괜찮으십니까? 주제를 모르고 머리끝까지 기어 올라도."

"갑자기 그런 것을 묻는 이유가 뭐지?"

"이유가 필요한 질문이면 거두겠습니다."

예전의 것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내게 줄을 채우도록 허락해주기 전의 도발이었다면, 이것은 내게 걸린 줄의 손잡이를 스스로 그 사람에게 쥐여주기 전의 확인이었다. 거사를 앞두고 모두가 숨을 죽인 채 각자의 자리에서 긴장하던 그 날, 마지막 물음에 던져진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영영 그곳을 떠났을 테다.

"…기어 올라라. 마음껏 기어오르고 진탕을 만들거라. 단, 잡히면 너는 영영 내 사람이 되어야 한다. 너야말로 나를 감당할 수 있겠느냐."

"감히 올려다보지 않고 발 옆에 서 있다가는 언제 차일지, 혹은 밟힐지 모르는 일이죠. 멀리 도망가겠습니다. 그리고 쉽게 잡혀드리지 않겠습니다. 그거 무섭다고 일을 포기하면 실망하실 거잖아요?"

"세상 사람들이 너 같지 않아 다행이다. 누구나 내 마음을 읽고 그에 응해주었다면 나는 응석받이가 되었을지도 모르니까. 그래. 그러니 멀리멀리 도망치거라. 나는 계속 쫓아갈 테니. 어디로 도망치든 끝까지 쫓아가 주마. 네가 내 올무에 걸릴 때까지. 나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싸우는 편이거든."

"응석받이 주군은 저도 필요 없습니다. 이 점도 제가 아니라 전하께 다행이네요. 한 번 걸리면 빠져나갈 방법이 죽음뿐이라는 그물이라 듣기만 해도 소름이 끼칩니다, 아주."

승자가 누구일지는 뻔한 일이었다. 나는 승리를 원하면서도 당신의 패배를 바라지 않았고, 당신은 이런 겨루기에 져본 적이 없었다. 대답을 듣는 순간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신세인 것을 알았다. 다만 눈을 감고 순순히 잡혀주고 싶지만 않았을 뿐이다. 어린아이처럼 괜한 반항을 부린다고 해도 좋았다. 치기든 뭐든, 나의 모든 행동은 상대가 받아주었기 때문으로 일어난 것이었다. 그런데도 그것이 나쁜가?

"안정되고 나면 중앙으로 찾아와라. 나는 아직도 네가 필요하고, 이 나라 또한 사람이 필요해. 이건 내 비녀다. 비취색이 꼭 네 눈 같길래 언젠가 쥐여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쓰일 줄은. 문지기에게 비녀를 보여줘라. 그럼 알아서 너를 들여줄 테니 별다른 건 필요 없을 것이다. 잃어버리지 말거라. 내겐 아주 소중한 것이니."

여인에게 선물로 비녀라니, 끝까지 주변 신경 안 쓰는 것이 당신답기도 하다. 덕분에 머리를 오래 기른다고 애인이 생겼냐는 소리를 종종 듣는다. 어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는 여전히 나라에는 별 관심이 없다. 내 속을 꿰뚫지 못한 적 없는 사람이니 내 당신에게 돌아가는 이유가 무엇인지 모를 리 없겠지. 그 어느 겨울처럼 눈이 소복이 나리는 날, 황실에 까치 한 마리가 지저귀며 날아들면 가벼운 발걸음으로 마중을 나가도 좋을 것이다. 분명 반가운 손님이 그곳을 찾을 테니.

"물건도, 사람도 무사히 전하의 곁으로 돌아왔습니다."

나는 나라의 개가 되기 싫었다. 그래서 대신 그대의 사람이 되려 한다. 사람을 잊는 일이 까다로워 나는 그대를 알고도 모른 체 살아갈 수 없으니, 끝내 줄이 아니라 정으로 잡히려 한다.

그러니 그대, 광풍이 닥칠지라도 나를 잃지 말라. 만약 잃는다면 후에는 필히 잊어야만 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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