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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상] 투 마이 비러브드, 프롬 유어 디어리스트 完

10년 묵은 짝사랑이 이루어지는 순간.

*약 5만2천자

*투 마이 비러브드, 프롬 유어 디어리스트 합본


https://youtu.be/GeTz0DkHZvo?si=3VeM1DOpnc-til4O

...희차이 자나. 우리 어색해질까 봐 내 여태 말 못 한 게 하나 있다.

니나 나나 낯간지러운 말은 안맞는다아이가. 그 핑계 대가꼬 일부러 피했었는데.

피하는 게 능사는 아니었는갑다. 몇 년이 지나도 일케 후회하니까.

고등학교 때부터 니 좋아했었다. 친구 말고, 연애 상대로.

....가오 상하게 이게 뭐 하는 짓이고.

 

*

 

버스가 방지턱을 넘었다. 차체가 크게 덜컹거리면서 상호는 유리창에 옆머리를 부딪쳤다. 피곤함에 한참을 졸다가 맞은 머리 때문에 잠이 달아난 상호는 비몽사몽 한 얼굴로 눈을 비볐다. 수능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내부는 한산했다. 어둑한 창밖은 자동차의 후미등이 길게 줄을 이었다. 붉은 잔상이 실 같다. 희찬은 상호의 어깨에 기대어 쿨쿨 졸았다. 희찬의 긴 뒷머리가 상호의 목을 간질였다. 상호는 희찬의 머리칼을 굳이 치우지 않고 그의 정수리에 볼을 대었다. 버스 기사는 차가 요동쳐도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상호는 어깨 위에서 진동하는 무게감에 양손을 쥐었다. 손에는 땀이 찼다.

 

이렇게 같이 버스를 타는 것도 끝이구마. 상호는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재유햄이랑 준수햄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상호는 대학 농구 리그에서 한창 뛰고 있을 선배들을 떠올렸다. 고등학교 1학년이 엊그제 같았는데 어느 순간 졸업을 앞두게 되었다. 독립과 새로운 시작에 마냥 설레야 하는데 왜 이렇게 서글픈지 모르겠다. 상호는 이유를 알고 있지만 무던히 관망했다. 상호는 어쩔 수 없는 일에 힘을 빼지 않았다. 보는 사람이 불편할 정도로 고개가 꺾인 희찬이 어깨 방향을 바꾸었다. 상호는 지금을 길게 기억하기로 했다.

 

*

 

매미가 귀청 떨어지게 울어대고 태양 빛이 미친 듯이 내리쬐는 여름이었다. 상호는 빠삐코를 물고 흙길을 밟았다. 여름방학을 맞이한 뒤 처음으로 나온 나들이였다. 어슬렁거렸던 동네 공원이나 야외 농구장 따위는 오늘 같은 날엔 지루한 공간이었다. 거진 4년을 같은 곳만 뺑뺑 돌아다녔더니 머리통이 질린다고 찡얼댔다. 사람들은 일상에 지루함을 느끼면 여행을 떠올린다던데. 상호와 희찬도 딱 그 꼴이었다. 하지만 달리 어딘가로 가보고 싶은 장소도 없어서 희찬과 상호는 좀 더 오랫동안 지하철을 탔다. 종점에 와서야 도착한 삼림공원은 조경이 아름다웠다. 아름다운 조경으로 입소문이 난 장소였는지 사람이 무척 많았다. 상호와 희찬은 세 걸음에 한 번꼴로 가족 단위의 인파와 불쾌한 접촉을 겪었다. 공원 안쪽으로 들어가고 나니 키가 높은 나무와 무성하게 난 나뭇잎이 촘촘하게 그늘을 만들었다. 후덥지근한 바람이 불어오며 상호의 뒷목을 말렸다. 희찬은 상호보다 앞서서 걸었다. 희찬의 머리카락은 조금 길었다. 희찬의 밝은 머리카락이 햇빛 아래서 산란했다.

 

“쌍호! 여 와바라.”

“뭔데?”

 

희찬은 다 먹은 아이스크림 막대를 뱉지 않은 채 휴대폰을 꺼냈다. 상호가 희찬의 곁에 서자 희찬은 상호의 팔을 잡고 새파란 수국 더미 앞에 세웠다. 수국 철이라 그런지 꽃잎이 싱그러웠고 향이 풀풀 났다. 상호는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어 물고 있던 쭈쭈바 아이스크림을 손으로 들고 입술을 쭉 내밀었다. 희찬은 상호가 무슨 표정을 짓든 아랑곳하지 않았다. 희찬이 두어 걸음 뒤로 걷자 행인이 그 사이로 지나가지 않고 피했다. 공원 방문객 대부분이 수국을 찍고 다녔다. 사람들은 멀대 같은 남자 고등학생 둘이 휴대폰을 들고 서 있는 걸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무슨 날이라고 사진까지 찍노.”

“이런 게 재미 아이겠나. 상호 니 인스타 안하나?”

“하는데 내는 DM만 쓴다.”

 

말은 그래도 상호는 희찬의 카메라를 향해서 브이 자를 올렸다. 희찬은 손가락으로 신중하게 화면을 몇 번 두드리더니 다른 자세도 해보라며 채근했다. 상호는 뚱한 얼굴로 입술을 핥았다. 아이스크림을 쥐지 않은 손으로 손가락 하트를 만들었다. 희찬은 그것만으로 충분했는지 다 찍었다며 굽힌 허리를 폈다. 상호는 희찬에게 다가가 결과물을 보았다. 자연광이 얼굴 피부를 희게 비추었다. 햇빛 아래 상호의 얼굴이 환했다. 희찬은 이걸 보더니 진훈정산전 사진보다 지금 사진이 선녀 같다며 놀렸다. 상호는 그때 굴욕이 떠올라 하지 말라며 희찬의 팔을 쳤다. 희찬은 자신의 폰을 상호에게 건네더니 자기도 찍어달라며 수국 앞으로 가버렸다. 상호는 희찬의 휴대폰을 쥐고 프레임 안에 희찬을 담았다. 프레임 속 희찬은 요즘 유행하는 훈남 포즌지 뭔지를 따라 한다고 삐딱하게 서서 카메라가 아닌 풍경 저 어드메로 고개를 돌렸다. 상호는 아이스크림을 입안에 넣고 양손으로 희찬의 사진을 찍었다. 다 찍었나? 쫌만 있어봐라. 카메라 화면이 깜빡이며 희찬을 저장했다.

 

“다른 자세 없나?”

“이것도!”

 

희찬은 틱톡에서 유행하는 큐피드 자세를 했다. 손등을 내민 브이 자와 활시위를 당기는 반대쪽 팔이 상호를 겨누었다. 상호는 시야를 괴롭히는 빛 아래서 눈두덩이를 찡그리고 사진을 다시 찍었다. 흰 이를 드러내고 웃는 희찬의 얼굴이 영락없는 18세 청소년이었다. 상호는 희찬이 귀 뒤로 쓸어넘긴 머리칼을 보고서야 시간이 흐름을 실감했다. 점마 쌍용기 때만 하더라도 앞머리 안 넘기지 않았나. 카메라 프레임 속 희찬의 머리카락은 앞머리뿐만 길지 않았다. 희찬의 뒷머리는 땀에 젖어 뒷목을 뒤덮고 있었다. 카메라 액정에 희찬의 상체를 한가득 담은 상호는 퉁명스레 말했다. 다 찍었다. 희찬은 훌쩍 상호 앞으로 와서 휴대폰을 받아갔다. 상호가 찍은 결과물을 확인한 희찬은 감탄했다. 니 사진 잘 찍네. 맞나. 상호는 희찬의 칭찬에 지나가듯 대답했다. 희찬은 다 먹은 아이스크림 막대를 입에 물었다. 휴대폰을 들고 사람들을 가리켰다.

 

“여 다른 사람한테도 우리 찍어달라 카자!”

 

상호는 인쟈 더운데 고마 편의점에 들어가면 안 되나 싶었다. 상호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희찬은 순식간에 커플에게 다가가 사진을 부탁했다. 상호는 얇은 검정 티를 잡고 펄럭였다. 커플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희찬의 폰을 가지고 섰다. 상호는 팔짱을 꼈고 희찬은 상호의 어깨를 잡았다. 찍습니다- 하나, 둘, 셋. 한 번만 더요. 하나, 둘, 셋! 셔터음이 몇 번 들리고 나서야 커플은 휴대폰을 내밀었다. 상호와 희찬은 감사하다며 고개를 꾸벅였다.

 

두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본 사진은 잘 나왔다. 사진 속 두 사람은 땀내를 풍기지도 않았고 새파란 수국 사이에서 웃는 모양이 밝았다. 화면 속 희찬의 흰 티셔츠 위로 물방울이 떨어졌다. 상호는 부슬한 제 머리털을 적시는 물기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느샌가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희찬도 떨어지는 물방울을 알아차리곤 휴대폰을 주머니 안으로 쑤셔 넣었다. 햇볕이 다 가려지고 나니 먹구름은 순식간에 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우수수 쏟아지는 소음이 산발했다. 주변이 갑작스러운 비에 어수선해졌다.

 

희찬은 놀라 한 손으로 가림막을 만들고 다른 손으론 상호의 팔을 잡았다. 상호도 희찬도 부산스럽게 발을 움직였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네! 희차이 니 이러다 넘어지겠다.”

“아이 오늘날이 좋아가 소나기 올 일 없다고 캤는데.”

 

상호는 팔을 빼지 않고 숨 가쁘게 뛰었다. 공원에는 마땅히 비를 피할 곳이 없었다. 달리는 내내 비는 우박처럼 온몸을 때려댔다. 두 사람은 공원 내부를 뺑뺑 헤매다가 비를 막아줄 것 같은 고목 아래에 서서 숨을 돌렸다. 비를 고스란히 맞은 두 사람은 폭삭 젖은 채로 머리카락을 넘기고 젖은 옷을 쥐어짰다. 나무가 막아주지 못한 빗물이 간헐적으로 등을 적셨다. 온몸이 축축해서 불쾌했다. 운동화에도 물이 차 발을 구를 때마다 쿠션이 내려앉고 천이 찌그러졌다. 상호는 맨손으로 팔다리에 맺힌 물방울을 털어냈다. 희찬은 뒤 머리카락을 꾹 쥐었다. 붓처럼 모인 머리카락 끝에서 물방울이 긴 선을 만들어내며 떨어졌다. 펑퍼짐한 희찬의 흰 티가 물기 때문에 몸에 달라붙었다. 희찬은 인상을 찡그리고 물을 짜낸 흰 티를 탈탈 펄럭였다.

 

“이래가지고 집에 어케 가노.”

“소나기니까 금방 그치지 않겠나. 근데 희차이 티 안 비치나.”

“어, 비치긴 하는데 짜고 터니까 쫌 덜하다.”

 

희찬의 반소매가 살갗을 비추었다. 상호는 제 티셔츠 밑단을 잡고 흔들었다. 조금이라도 찝찝한 기운을 없애기 위해서였다. 이마에 맺힌 물이 자꾸만 눈 위로 흘러 들어갔다. 땀이랑 섞였는지 눈이 따가웠다. 아 씨, 상호는 눈을 깜빡였다. 희찬은 상호의 얼굴을 빤히 보더니 제 손으로 상호의 눈썹과 이마의 물기를 훔쳤다.

 

“자. 됐나.”

 

상호는 눈을 끔뻑였다. 이마에 닿은 희찬의 손은 축축했고, 뜨끈했다. 닦아내기에도 무색하게 관자놀이를 타고 흐른 물방울이 턱 밑으로 추락했다. 상호는 눈을 크게 떴다. 잉잉거릴 때마다 희찬이 거칠게 닦아주며 달랬던 건 늘 있는 일이다. 맨손이 얼굴에 닿는 것도 늘 있는 일이다. 상호는 희찬의 눈을 마주하다가 몇 박자 느리게 대답했다.

 

“잘 안된 거 같은디.”

“이럴 땐 고맙다고 캐라 좀.”

 

희찬이 다시 상호의 이마를 눌러 쓸었다. 주먹 쥔 손날로 힘을 주어서인가 상호는 아프다고 하면서도 희찬의 손을 제지하지 않았다. 상호의 이마가 벌게졌다. 상호는 좀 더 선명해진 시야로 희찬의 머쓱한 표정을 관찰했다. 희찬도 방금 전의 접촉은 이상한 종류라는 걸 알았나 보다. 희찬이 손을 물리고 나서야 상호는 친구니까 자기도 해주겠다며 희찬의 이마빡을 늘리듯이 밀어 닦았다. 악. 내 탈모 만들라고 작정했나!

 

희찬이 상호의 손목을 잡으면서 눈 맞춤이 끊어지고 나서야 상호는 어떤 위기감을 실감했다. 가슴께가 따끔했다. 상호는 애써 속을 치고 나간 감각을 무시했다.

 

*

 

"우수 포인트가드, 지상 고등학교 3학년, 정 희 찬."

 

스피커가 목소리를 뭉갰지만 상호는 수상자가 누구인지 똑똑히 들었다. 희찬은 단상 위로 올라가 상패를 받고 내려왔다. 추계대회 내내 열심히 뛰어다닌 보람이 있었다. 희찬은 상패를 품에 안고 활짝 웃었다. 마지막 고교대회에서 받게 된 개인상이 무척이나 기뻤는지 희찬은 상호를 향해 상패를 흔들었다.

 

추계대회 마지막 실적은 3등이었지만 2학년의 부재로 거의 2년 넘게 주전으로 뛰었다. 현 3학년 모두가 대학에 붙는 건 어렵지 않을 거다. 감독은 첫 제자들이 훨훨 날아갈 때가 되자 감동에 젖어 코 밑을 매만졌다. 현성의 콧속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났다. 지상고 농구부 후배들은 왁왁거리며 주장인 희찬의 개인상을 축하해줬다. 희찬 햄 유종의 미 최고에요!! 다은과 태성은 희찬의 등을 퍽퍽 두드렸다. 마, 고생했다 희차이. 사랑하는 만큼 휘둘러진 손에 희찬은 악악 소리를 냈지만 피하지 않았다.

 

상호는 난타에 참여하지 않았다. 다만 희찬을 껴안고 들어 올렸다. 져지 깃에서 땀 냄새가 났다. 희찬은 꽉 죄는 상호의 팔을 두드렸다. 낄낄거림이 메아리처럼 울렸다. 기쁨으로 찌그러진 얼굴은 멀지 않은 꿈을 외쳤다. 준향대 합겨어억!

 

*

 

호기롭게 합격을 외친 추계대회 이후로 희찬과 상호는 발목을 관리하기 위해 한의원에서 침을 맞았다. 농구선수에게 관절은 수명이고 생명이다. 상호는 따끔거리는 발목을 돌리고 싶었지만 침이 잘못 건들까 봐 발끝만 까딱였다. 옆 침대에 누운 희찬은 간간이 침을 삼켰다. 희찬은 빠른 주력만큼 발목도 많이 쓰였다. 앓는 소리를 낸 희찬은 고통을 무시하기 위해 손으로 배 위를 통통 두드렸다.

 

"마이 아프나 희차이."

"어. 그래도 참을 만하다."

 

고개를 움직일 때마다 촌스러운 자주색 콩 베개가 바스락거렸다. 희찬과 상호 사이의 거리는 사람 하나만큼 멀었지만 조곤조곤한 말소리는 선명하게 들렸다. 의료용 침대는 진분홍색 면 이불로 덮여있었지만 더럽게 딱딱했다. 상호는 불편함에서 오는 뒤적거림을 참았다. 아킬레스건을 받치는 따끈한 찜질팩과 발등을 데워주는 적외선 등이 따끔함과 별개로 정신을 노곤하게 만들었다. 상호는 온몸에 힘을 빼고 느리게 심호흡을 했다.

 

한의원 안은 조용했다. 상호와 희찬 말고는 환자가 없다. 한의사는 침구 실이 아닌 진료실에 가 있다. 침을 꽂은 채로 한참을 기다리는 건 지루한 일이었다. 상호는 희찬의 자리로 얼굴을 돌렸지만 정작 희찬을 볼 수는 없었다. 침대 사이에는 누런 체크 무늬 커튼이 희찬의 어깨 아래를 가렸다.

 

침대 맡의 작은 창은 뉘엿뉘엿 노을이 져 갔다. 하지가 지난 지 한참 된 때라 하교할 때 하늘을 보면 온통 노랬다. 상호의 얼굴엔 주황빛이 앉았다. 간간이 행인들의 말소리가 들렸지만 웅얼거림에 가까웠다.

 

희찬의 얄쌍한 발가락이 꼼질거린다. 상호는 새끼발가락을 희찬 쪽으로 벌렸다.

 

"희차이."

"뭔데."

"저주파랑 침 중에 뭐가 더 아프노."

"지금은 침인 거 같다. 쓰으읍."

 

희찬은 발뒤꿈치를 멀리 밀었다. 침이 파르르 떨렸다. 발등에 솟은 핏줄이 새파랗게 서다 흐릿해졌다. 상호는 희찬의 발목을 한 손으로 쥐는 상상을 했다. 웨이트를 열심히 쳐도 희찬의 여리한 신체는 노력을 뛰어넘는 성과를 보여주진 못했다.

 

상호는 양손으로 뒷목을 감쌌다.

 

"태성행은 저주파가 끝장난다고 하던데."

"그 햄은 손톱 긁히는 거에 쫄드니 뾰족한 건 잘도 맞네."

"몸싸움하다 난 거랑 의사가 봐 주는 거랑 같나."

 

상호가 모순을 꼬집자 희찬은 상황의 차이라고 일축했다. 두런두런 오가는 말이 조금 잠겼다. 침대 옆 협탁에는 미니 가습기가 습기를 퐁퐁 내뿜었다. 빛결 아래 작은 먼지가 습기를 맞고 추락한다. 병실이 조용해지자 상호는 제법 무난한 대화거리를 꺼냈다.

 

"맞다, 니 자소서 다 썼나."

"아니. 쫌 남았다."

"니 준향대 마감일은 언젠데."

"담달 1일. 상호 니는?"

 

다담주 금욜. 상호는 마지막 질문을 남겨 둔 자소서를 떠올렸다. 만화만 줄곧 읽었지 줄글이라곤 소설화된 라노벨뿐이라 상호는 매번 담임과 감독에게 첨삭으로 처맞기 일쑤였다. 그래도 여러 사람의 손과 도움을 거쳐서 그런지 결과물이 나쁘진 않았다. 실적으로 합격이 판결 나는 체특판에서 자소서는 구색에 가까웠다. 여태 쓰인 역사가 시스템을 무장시켰을 뿐이지.

 

"희차이 진짜 주익대 안갈끼가."

"내 거 가면 4학년에 주전 단다꼬."

 

희찬은 준향대 지망이고 상호는 주익대 지망이었다. 주익대의 주전 포워드인 전영중은 2학년이었다. 상호와 플레이 스타일이 다른 동 포지션의 영중이 굳건히 대학농구리그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잘하면 2학년부터 출전 경험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주익대의 가드 라인이 견고했다. 희찬의 말대로 주전 가드가 부상 당하지 않는 이상에야 대학 경기에 나오긴 힘들 터였다. 상호도 알고 있어 아쉬워하면서도 더 권하지 않았다. 준향대에 박병찬이 있으나 병찬은 3학년 과정을 마치자마자 프로로 갈 거라며 바쁘게 일상을 영위하고 있었다. 준향대의 포인트 가드는 박병찬을 제외하고 다 고만고만했다. 희찬이 준향에 들어간다면 무리 없이 2년 차부터 주전을 노릴 수 있을 것이다.

 

상호는 서울로 놀러 갔을 때 맑은 미소로 밥을 사준 병찬햄을 기억했다. 상호도 서울 와서 형 경기하는 거 봐달라던 병찬의 말에 미래를 기대했다.

 

"붙으면 뱅찬햄이랑 다니겠네. 좋겠다. 희차이."

"병찬햄 얼리 준비한다고 바쁘던데 경기 볼 수야 있겠나."

"1년이면 감지덕지제."

 

상호도, 희찬도 눈을 끔뻑였다. 대입 준비한다고 피를 토해가며 실적을 세웠지만 멀거니 희미한 이야기였다.

 

"잘할 수 있을끼다."

"?"

 

상호는 혼잣말하듯이 읊조렸다. 희찬이 상체를 일으키고 커튼을 걷었다. 체인이 도르륵 부드럽게 굴러갔다. 희찬은 오른쪽 눈썹을 위로 들었다. 무슨 말이냐는 표정이었다. 상호는 고개만 돌려 희찬을 보고 빙그레 미소지었다.

 

"농구."

"맞나."

 

단호한 단정에 희찬은 풀썩 침대에 누웠다. 희찬은 맞장구쳤다.

 

"재밌을끼다."

"맞나."

 

희찬이 선창을 하고 상호가 후창을 했다. 농구에 불안은 한쪽도 섞이지 않았다. 중학생 때로 돌아간 기분이다. 실없는 대화를 끝으로 두 사람은 구태여 더 말을 나누지 않았다.

 

*

 

치료가 끝난 상호와 희찬은 여느 때처럼 동네 도시락집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공원으로 향했다. 상호의 손에는 개인 빵집에서 떨이로 사 온 조각 케이크가 들려있었다. 희찬에 손에는 아이스티 두 병이 자리했다.

 

가을밤은 쌀쌀했다. 가로등에는 날파리 무리가 파닥였다. 하네스를 찬 강아지와 츄리닝을 입은 사람이 느지막한 시간을 틈타 산책로를 걸었다. 바람은 불지 않았지만 걸어가면서 생긴 미풍이 뺨을 스쳤다. 정자에는 노인들이 바둑을 두고 있길래 희찬과 상호는 흰 가로등 아래 덩그러니 놓인 벤치 위에 마주 보고 앉았다.

 

흐린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가며 케이크 포장을 뜯은 상호는 희찬에게 플라스틱 포크를 건넸다. 상호 나름의 개인상 감투였다. 희찬의 포크가 갈색 시트와 흰 생크림을 푹 찔렸다. 희찬은 의리 양보냐며 상호를 놀렸다. 길에서 아무렇게나 보던 빵집 케이크라 입맛에 맞지 않을 법도 한데 희찬은 케이크가 달고 맛있다며 우물거렸다. 상호는 벤치 아래로 내린 오른발을 휘 휘 흔들었다. 따지도 않은 아이스티를 손에 들고만 있자 희찬은 너도 맛보라며 첫입보다 크게 뜬 케이크를 내밀었다. 상호는 희찬의 손에 들린 포크를 물었다. 당근 케이크 특유의 단 내가 입안을 감돌았다. 맛있네. 그치.

 

"대회 끝나고 자축하는 것도 이제 마지막이긋네."

"대학 가서도 하면 되지."

"되긋나. 우리 다 딴 대학 가고 직접 뛰 댕기라면 멀었는디."

 

케이크는 포크 질 몇 번으로 사라졌다. 상호는 현실 직시가 먼저였고 희찬은 미래에 대한 희망이 먼저였다. 시야는 달랐지만 누구도 그것을 못마땅해하지 않았다.

 

"내는 꼭 대회가 아니어도 된다. 사소하더라고 축하할 일 생기면 먼저 달려와 주고 뭔가를 같이 하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쌍호 3점 슛 3연속 득점한 것도 기념으로 챙기자."

"희차이 너무한 거 아이가. 내 슛 구리다고 조리돌리는기가!"

 

상호가 그 말 취소하라며 희찬의 손목을 잡고 흔들었다. 희찬이 왁왁거리며 잡힌 손목에 힘을 주었다. 엎치락뒤치락하는 모양새였지만 진심은 아니었다. 됐다. 그딴 기념 줘도 안 가진다. 투덜거린 상호는 금방 포기하고 손을 놓았다. 희찬은 자유로워진 손으로 상호의 어깨를 덮었다. 쥐어진 어깨에 체온이 전달되었다.

 

도심지의 공원엔 풀벌레나 비둘기 울음소리가 나지 않았다. 상호와 희찬은 다 먹은 케이크 포장지를 사이에 두고 불편하게 마주 보고 앉았다. 맨투맨이 손의 무게로 쭈글해졌다. 상호는 도톰한 눈꺼풀을 감았다 떴다. 희찬의 손에 잡힌 어깨를 거절하지 않았다.

 

길게 직진하는 자동차의 엔진소리가 멀리서 가까워지고 또 멀리 떨어진다. 희찬의 손은 상호의 어깨 위를 한동안 머물다가 분위기를 털어내듯이 세게 두드렸다.

 

"떨어져도 같은 서울이다. 니나 내나 앞으로 4년은 찡하게 볼 거고 방학, 생일, 공휴일 다 챙길라믄 마이 만난다."

"....알겠다. 인쟈 치우고 가자. 춥다. 희차이."

 

상호는 속말을 삼켰다. 희차이, 그게 아이다.

 

상호의 마음을 모르는 희찬은 쓰레기를 버리러 간 뒤였다. 희찬은 상호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상호는 가슴께를 북북 긁었다. 떨이 케이크는 아무래도 상한 거였나보다. 속이 쓰렸다.

 

*

 

"다은이 축구 유니폼 갖고 가라."

"거기 있었음?"

 

태성이 유니폼을 다은에게 던졌다. 안정적으로 옷을 캐치한 다은은 여러 사람이 돌려 입어 낡아빠진 7번 유니폼을 더플백에 쑤셔 넣었다. 연말이 다가오면서 지상 고등학교 농구부 숙소는 소란스러웠다. 겨울방학을 앞두고 곧 졸업하게 될 3학년 세 사람이 숙소를 나가게 되었다. 15평 1.5룸에 닭장같이 모여 살던 곳은 세 사람이 빠지자마자 황량해졌다. 내년에 또 전학생과 신입생이 들어온다면 북적거릴 테다. 다만 이번에 입학할 신입생의 수가 많은 덕에 학교 측은 농구부 숙소를 좀 더 넓은 곳으로 바꾸겠다며 감독, 코치와 이런저런 의논을 나누었다.

 

상호는 쩝 하는 소리를 내었다. 새벽에 김찌 돼지고기 먹다가 준수햄한테 걸려 까였던 부엌이나 단체 식중독으로 화장실 쟁탈전을 겪었던 여름이나, 중간고사 준비가 귀찮아 장롱에 숨겨두었던 문제집이 낱낱이 떠올랐다. 그때는 언제 대학가냐 언제 졸업하냐 대회에서 타 학교를 쫓고 쫓겼었는데 지금은 벌써 합격 발표다 추합이다 멈춰서서 얼간이처럼 액정만 바라보고 있다. 상호는 옷으로 무거워진 백팩을 맸다.

 

더이상 아침 훈련이나 고등학교 3학년의 이른 등교를 할 필요가 없어 김해 본가로 올라갔다. 상호는 옷가지를 서랍에 개켜놓은 뒤 제 방 침대에 드러누웠다. 지상 고등학교 농구부 카톡방은 조용했다. 상호는 휴대폰으로 우마무스메를 돌리다가 그마저 재미없어진 기분이라 휴대폰을 던지고 눈을 감았다. 침대 옆 창문에서 한낮의 태양 빛이 눈을 괴롭혔다. 상호는 몸을 벽 쪽으로 붙였다. 찡그린 콧등이 다시 펴졌다. 창가가 가까워지자 간간이 사람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상호는 소음을 자장가 삼아 짧은 낮잠을 잤다.

 

상호의 꿈에는 희찬이 나왔다. 두 사람이 후덥지근하게 껴안고 키스하고 그런 꿈은 아니었다. 어딘지 모를 체육관에서 상호는 희찬을 마주 보며 농구공을 튀겼다. 농구공은 일정한 속도로 상호의 손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희찬은 순식간에 손을 뻗었다. 간발의 차로 상호가 공을 사수했다. 제껴내기 위해 상호가 스핀을 돌면 희찬은 사이드 스텝으로 따라붙는다. 상호는 입술을 깨물었다. 실없는 웃음이 나왔다. 희찬은 구태여 가까이 가지 않고 새깅했다. 상호는 희찬에 새깅에 불퉁거리며 그 자리에서 점프슛을 했다. 농구공이 호선을 그렸다. 공이 골대에 들어갔는지는 알 수 없었다. 바스켓 그물이 철썩이기도 전에 잠에서 깨버렸으니까.

 

띠띠거리는 소리에 상호는 손만 대충 더듬어 휴대폰 알람을 껐다. 뭐 그런 꿈이 다 있냐. 상호는 눈곱을 떼고 입을 쩍 벌려 하품을 했다. 농구를 쉬어서인지 희찬을 보지 못해서인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상호는 꿈에서 영감을 얻었다. 희차이랑 경기 보러 가자고 할까. 어차피 면접도 끝났고 할 일도 없구로. 상호는 휴대폰을 뒤적였다. 이불 속에서 따끈하게 달궈진 휴대폰 액정을 켰다. 액정에는 추계 농구대회 단체 사진이 잠금화면으로 설정되어있었다. 지상고 져지를 입은 상호와 희찬이 어깨동무를 하고 카메라를 향해 씩 웃는 사진이었다. 보정을 더했지만 확대를 거친 탓에 흐릿했고 썩 멋지다고 할 순 없었다.

 

1 [희차이]

1 [이번 주에]

1 [시간 되나?]

 

톡을 보낸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1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상호는 희찬의 프로필을 터치했다. 배사는 NBA 농구선수였고 글귀는 ‘대학합격기원’. 프로필은 작년 여름엔가 상호가 찍어주었던 희찬의 사진이었다. 상호는 비가 억수같이 쏟아 내렸던 그 여름을 복기했다. 가슴이 다시 따끔해지자 상호는 프로필을 닫았다. 그 사이 희찬에게서 답장이 왔다.

 

[ㅇㅇ 왜]

[아껴쓰라고?]

 

[아놔]

[농구경기보자고]

[할라했는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상호는 침대 밖으로 내놓은 다리를 휘둘렀다. 답은 좀 뒤에 돌아왔다. 희찬은 검색하다 들어왔는지 링크를 가져왔다.

 

[#부산 농구 경기]

[주말에 하는데]

[갈 돈 있나]

 

상호는 그냥 집에서 노트북으로 같이 볼 생각이었는데 이왕 희찬과 직관하는 것도 좋겠다 싶어 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였다.

 

[용돈받음!!]

 

[그럼 ㄱㄱ]

[점심도 같이ㄱ?]

 

상호는 잠시 휴대폰을 이마에 대었다. 경기만 보고 헤어질 줄 알았는데 점심약속까지 잡는다면 거절할 필요가 없다. 상호는 다시 팔을 들었다.

 

[좋은데있나]

 

[#OO동 맛집]

[여기어떰?]

[수제버거 로만 피클스 www.]

[철판 볶음밥 화끈쌀알 www.]

[일본 라멘 전문 다이스키 www.]

 

링크가 주르륵 올라갔다. 세 곳 다 양도 많고 가격도 괜찮은 편이었다. 상호는 저린 팔을 내렸다. 양반다리로 앉아서 다시 휴대폰을 들었다. 고개가 밑으로 떨궈졌다.

 

[니 요새 배고팠나]

 

[아니 걍]

[이래 나가서먹는게]

[올만이라]

 

상호는 괜스레 찔끔한 기분이 들어 빠르게 답했다. 외식하는 게 간만이긴 했다. 지난 11월과 12월 초는 면접으로 서울을 몇 번이나 오갔는지, 교통비만 20만 원 정도 태운 것 같다. 대학은 서로 일정을 짜기라도 한 듯 재수 없으면 일주일 간격으로 면접 일정을 내놓아 상호는 울면서 교복 셔츠를 차려입었었다. 그래도 부모님이 고생한다며 상호의 면접 준비를 도왔기 망정이지 이마저도 없었으면 집에서 손가락이나 빨며 우울하게 수능 할인…을 중얼거렸을 것이다.

 

그래도 면접관들 표정이 괜찮아 보여 결과는 걱정되지 않았다. 기상호는 주익대 면접에서 확신의 합격 질문을 들었었다. '주익대 농구부에 들어가면 어떤 훈련을 중점적으로 할 생각인가요?' 달리 해석하자면 넌 이미 주익대 스포츠융합과 신입생이란 의미였다.

 

[글치]

[서울서 먹은 게]

[김천뿐이라]

[질린다ㅠㅠㅠㅠㅠ]

 

희찬도 서울을 오간다고 고생이 심했었다. 중요한 면접 자리에서 배앓이는 용납 못 한다며 편의점 삼김도 마다하고 깁밥천국, 김밥 파는 사람들만 주야장천 들어갔었다. 그 당시 희찬은 단톡방에서 김밥 질린다를 외치며 울적해 했다. 쌍호 내 대학 합격 못 하면 김밥은 안먹을끼다. 며칠 전 학교 급식실에서 희찬이 한 말이 떠올랐다.

 

상호는 휴대폰 캘린더를 열었다. 상호가 원서를 넣었던 각 대학교들과 준향대의 발표 일정이 주르륵 나왔다. 발표 일정은 주익대와 준향대가 제일 빨랐다. 타이밍 묘하게도 주익대와 준향대는 농구 경기 날 합격 발표를 하겠다 안내를 했다. 상호는 카톡으로 창을 옮겼다.

 

[포식하자 희차이]

[포식포식포식]

 

[그럼 버거집가자]

[여 양많아 보인다]

 

약속 장소와 시간까지 순식간에 잡은 상호는 휴대폰을 내리고 천창을 한참 바라보았다. 도어락 벨 울리는 소리가 났다. 마침 저녁 시간이었는지 부모님은 예정보다 일찍 집에 들어왔다. 상호는 벌떡 일어나 현관으로 달려갔다.

 

"어무이!"

"상호 와 있었나."

"응. 내 용돈 도!!"

"닌 어무이 얼굴 보자마자 하는 소리가 돈 얘기가! 이 머스마가."

 

상호의 엄마는 타박하면서도 안 준다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신발을 벗고 들어온 엄마는 롱패딩을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밥 차리게 상이나 닦아라, 똥강아지야. 용돈은 저녁 먹고 주께."

 

상호는 신나서 부리나케 부엌으로 달려갔다.

 

*

 

상호는 아침부터 일어나 부스스한 머리털을 연신 만지작거렸다. 화장실 거울 앞에서 가르마를 탔다가 흩트렸다가 아예 뒤로 넘겼다가. 난리였다. 세면대엔 물기가 가득했다. 널브러진 면도기엔 덜 씻겨낸 쉐이빙 폼이 묻어있었다. 상호 아빠는 전기면도기를 쓰지 왜 이렇게 난리냐며 턱을 관찰하는 상호 옆에서 아침 똥을 거하게 해결하시고는 다시 자러 들어갔다. 분명 어젯밤에 남자 헤어 스타일링 유튜브를 보았는데 상호에겐 별로 도움이 안 된 것 같다. 관찰력이 좋으면 뭐하노, 내 사람 꼴도 제대로 맹들지도 못하는데. 상호는 턱으로 호두알을 만든 뒤 엄마의 헤어세럼을 짜서 발랐다. 화장품 특유의 꽃향내가 코끝에 스쳤다. 비추어진 거울 속 기상호는 얼빵했다. 젖살 가득한 볼과 튀어나온 아이홀 사이 난 눈물점을 콕 찔렀다. 상호의 눈썹 사이가 좁아졌다. 어느 각도로 바라보든 맨날 보던 그 얼굴이었다.

 

여자애들은 분칠 몇 번으로 변신까지 하던데.

 

고개를 푸르륵 흔든 상호는 세면대의 난장판을 치우고 방으로 쏙 들어갔다. 쭉 펴진 회색 이불 위에는 온갖 옷가지가 방지되어있었다. 회색 후드티, 진청바지, 검정 목폴라, 감색 맨투맨, 챠콜색 코르덴 바지, 갈색 스트라이프 슬랙스. 스타일도, 형태도 천차만별이었다. 상호는 잠옷 차림으로 제 방 전신 거울 앞에서 옷을 대어보다가 침대로 던지다가를 반복했다. 거실에서 TV를 보던 상호의 엄마는 활짝 열린 방문 너머로 상호의 패션쇼를 관찰하더니 대뜸

 

“똥강아지야. 니 좋아하는 사람 생깃나.”

“아이다!!”

“저저 어무이한테 소리 지르는 거 보소.”

 

정곡을 찔린 상호는 빨개진 얼굴로 방문을 쾅 닫았다. 입술을 삐죽 내밀고 꺼내둔 옷을 서랍에 넣었다. 방문이 살짝 열렸다. 엄마였다. 상호의 엄마는 신난 얼굴로 말을 붙였다. 아들의 첫사랑이 누군지 궁금했고 또 무뚝뚝한 아들이 저렇게 유난이니 가만두고 싶지 않았다. 엄마는 상호의 침대 위에 놓인 미색 맨투맨을 가리켰다. 작년인가 엄마가 백화점에서 사 온 옷이었다.

 

“니 저거 아이보리색 맨투맨 잘 어울리대.”

“아 어무이 쫌!!!”

 

상호는 빽 소리를 질렀다. 엄마는 낄낄거리며 방문을 닫았다. 상호는 서랍장에 옷을 넣느라 쪼그렸던 다리를 폈다. 거실 티비에선 청소년 드라마 소리가 들렸다. 드라마 속 여자애의 대사가 상호의 방 쪽으로 웅웅거렸다.

 

‘야! 내가-! 너 좋아한다고 티를 냈었냐. 이 나쁜 놈아-!’

 

*

 

연말이라 그런지 시내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상호는 약속 장소 앞에서 휴대폰을 들고 한참을 서 있었다. 다른 사람들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상호는 군중 속에서도 눈에 띄었다. 겨울 추위에 코끝이 얼었다. 부산 시내 곳곳에는 수험생 할인이란 입간판이 세워져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머플러나 패딩으로 단단히 겨울 추위에 맞섰다. 숨을 한 번 불어넣을 때마다 흰 연기가 펑펑 나왔다. 패딩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상호는 콧물을 삼켰다. 12월이라 그런지 거리에는 캐롤 노래와 사랑 노래로 시끌시끌했다.

 

상호는 무심코 뒤를 돌았다. 사람들 틈에서 적갈색 머리통이 보였다. 희찬이었다. 희찬은 면접 탓에 뒷목을 덮던 머리칼을 다 쳐냈다. 1학년 때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희찬도 고등학교 재학 동안 키가 자라 미어캣마냥 목을 쭉 빼지 않아도 금방 찾을 수 있었다. 희찬은 상호의 얼굴을 보고 손을 들어 크게 흔들었다. 귀를 괴롭히는 노래 탓에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멀리서 보이는 입 모양만으로도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었다. 상호! 상호는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희찬에게 걸어갔다. 희찬은 오랜만의 약속이라고 공을 들였는지 품 넓은 니트 스웨터에 부츠를 신고 왔다.

 

둘 다 보폭이 커서 그런가 처음 볼 때는 둘 다 멀찍한 거리였는데 너덧 걸음 만에 간격이 확 좁아졌다. 희찬도 겨울 칼바람에 얼굴을 맞았는지 볼따구가 벌겠다. 상호는 희찬의 볼을 잡아당겨 보고 싶단 생각을 하다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추위에 대한 어쩔 수 없는 반응이었다. 희찬은 패딩 주머니에서 손난로를 하나 꺼내 상호의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상호는 놀라서 희찬을 불렀다.

 

“희차이 이거 뭐꼬?”

“뭐기는. 손난로다 아이가.”

 

상호는 주머니 속 손난로를 쥐었다. 희찬이 쓰던 것이었는지 손난로는 따끈했다. 상호는 쑥스러운 마음에 사족을 붙였다.

 

“니나 써라. 내는 개안타.”

“개안키는. 얼굴이나 보고 말해라. 누가 보면 감기 걸린 줄 알겠다.”

 

희찬은 상호의 상기된 얼굴이 추워서인지 두근거려서인지 몰랐다. 상호가 일찍 나왔나보다 하고 넘겨짚은 희찬은 상호의 옆에서 걷기 시작했다. 상호는 제 볼에 열이 올랐나 손바닥으로 감싸다가 뒷목을 주물렀다. 희찬의 말대로 상호의 얼굴과 목은 홍조가 가득했다. 상호는 손난로를 꺼내 흔들 생각도 하지 않고 제 큰 손으로 꽉 쥐었다. 주머니에 갇힌 손난로가 열기를 만들어내지 못해 체온과 비슷한 온도로 식었다. 희찬은 손은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다가 외투 주머니에 들어갔다. 희찬은 손난로를 쥐고 왔을 텐데도 추위를 정통으로 맞은 모양이었다. 상호는 희찬에게 손난로를 돌려주려 했지만 희찬은 기어코 거절했다. 오히려 배고프다며 희찬은 상호를 채근했다.

 

수제 햄버거집은 북적였다. 제 체격이 얼마나 큰지 아는 희찬과 상호는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상호가 코를 훌쩍이자 희찬이 냅킨을 뽑아 상호에게 건넸다. 상호는 그걸 받아 콧물을 훔쳤다. 상호는 구겨진 냅킨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일회용 물티슈 두 개를 뽑아 하나는 희찬에게, 하나는 제 손을 닦는 데 썼다. 두 사람은 근 한 달 만에 약속을 잡았는데 물 흐르듯이 서로를 챙겼다. 사람들 목소리 사이에서 묻히지 않도록 상호와 희찬은 목에 힘을 주어 만나지 못한 한 달을 이야기했다. 한 달이랬지만 학교에서 질리도록 보았을 텐데도 대화거리는 떨어지지 않았다. 서로의 반 친구들 이야기. 집 이야기. 면접 이야기. 상호와 희찬은 운이 좋지 않아 3년 내내 다른 반이었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개의치 않았다. 다른 반이면 어떠리,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본 것보다 친구가 입으로 직접 말해주는 게 더 좋았다. 두 사람의 수다는 버거가 나오고서야 멈추었다.

 

성장기는 다 지났지만 운동하는 남자답게 버거 세트 2개에 단품 2개, 사이드 3개를 시킨 두 사람은 눈앞의 음식을 빠르게 먹어치웠다. 볼이 쉴 새 없이 커졌다가 줄어들기를 반복했다. 음식이 나온 지 30분 만에 메뚜기 떼가 지나간 것처럼 트레이에는 음식 부스러기만 남았다. 상호는 스프라이트를 꿀꺽 삼키며 입속을 정리했다. 희찬은 손가락에 묻은 소스를 냅킨으로 훔쳤다. 상호는 희찬의 입가에 남은 소스를 손끝으로 가리켰다. 희차이 입에 묻었다.

 

희찬은 냅킨으로 입가를 닦았지만 반대쪽이었다. 상호는 정정했다. 다른 쪽. 여기? 희찬이 다시 훔쳤지만 소스가 비껴갔다. 상호는 보다못해 새 냅킨을 뜯어 희찬의 입을 문질렀다. 희찬의 입가에 자리한 핫소스가 사라졌다. 아, 희찬은 뭔가 깨달은 단말마를 내다가 고맙다며 빨대를 빨았다. 플라스틱 컵에는 얼음만 있어 텅 빈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얼음이 달그락거렸다. 상호는 직접 해결해주고 나서야 아차 싶어 제 입도 냅킨으로 닦았다. 왁자지껄했던 식전과 달리 식후는 조용했다.

 

“곧 있음 경기 시작하겠다.”

“빨리 치워야겠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두 사람은 트레이를 들었다. 일상적인 행위임에도 어떠한 뉘앙스가 존재했다. 상호는 위기감을, 희찬은 의아함을 느꼈다. 발걸음이 뚝딱였다.

 

부산 조선제과 티렉스와 춘천 금성제약 윙즈의 경기는 엄청났다. 둘 다 상위권에 속하는 구단이었던데다 두 국대출신 선수 조형석과 이기원의 매치업은 직관하는 게 축복이었다. 희찬과 상호는 2시간 내내 응원하고 웨이브를 탔다. 팔도 들었다 내리고 노래를 부르고. 희찬과 상호는 휴대폰에 ‘가드남신 조형석’ 따위의 주접 문구를 적고 열광했다. 학업에 치여 프로 농구를 자주 보지 못했지만 두 사람은 농구 꿈나무였고 농구를 아주 사랑했다.

 

후끈한 경기장을 나오고 나서야 상호와 희찬은 걸걸해진 성대를 붙잡았다. 경기 뽕에서 빠져나가지 못한 두 사람은 서로 어깨동무를 했다. 담에도 경기 보러 가자 희차이! 마, 당연한 거 아이가 쌍호! 야외로 나온 두 사람의 머리 위로 김이 났다. 흥분과 열기에 잠갔던 외투 지퍼를 풀었다. 겨울바람이 옷 아래 맨살을 훑었다. 상호는 후우 하고 입김이 길게 나오게 숨을 뱉었다. 외투가 보폭 큰 걸음에 흔들렸고 주머니 안에서는 손난로가 바스락거렸다.

 

밥을 먹고 경기를 보았다고 이대로 헤어지기엔 아쉬웠다. 상호는 괜히 희찬과 더 오래 있고 싶었다. 낮은 온도가 식은 땀을 날려버리고 체온마저 앗아갔는데도 상호는 덥다는 체했다. 희찬은 상호가 입을 떨고 있는데도 모른 척하며 그럼 걷다가 가자며 상호의 어깨에 올린 팔을 풀지 않았다. 경기장 근처 공원에는 해가 잘 들어서인가 아직은 밝았다. 몇몇 간이 무대에는 사람들이 버스킹을 했다. 공연은 대부분 크리스마스와 관련된 노래였다.

 

음악 취향이 확고한 상호는 심드렁한 얼굴로 구경꾼들 뒤에 섰다. 희찬은 대중음악을 곧잘 듣기에 지금 부르는 노래가 어떤 곡인지 단박에 알아듣곤 흥얼거렸다. 친구란 이름으로 지내 왔기에 새삼 말하기도 어색했던 그 고백 기억할 게~ 가사가 어쩐지 자기 얘기 같아 상호는 희찬의 옆얼굴을 힐끔 보았다. 희찬은 한창 빠져서는 고개를 까딱이기에 여념이 없었다. 희찬이 패딩 후드가 움직임에 맞추어 부스럭거렸다. 산타복을 입은 가수들이 박수를 유도했다. 신나는 박자 사이로 손뼉치는 소리가 울렸다.

 

노래가 끝나고 난 뒤 두 가수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사람들이 호응을 해주자 감사합니다를 외쳤다. 가수는 다음 곡 소개를 했다.

 

“이번 곡은 크리스마스 이브입니다. 일본어 그대로 공연해서 생소할지도 모르지만 무척 좋은 곡이니 즐겨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간주와 동시에 노래가 시작되었다. 가수의 담담한 호소력이 간이 무대를 채웠다.

 

もしも君が僕を思い出してくれてたら.

 

상호는 가사가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알아들었다. 오타쿠 소리를 들을 정도로 만화에 통달한 데다 상호는 자막 없이도 애니를 곧잘 시청했으니까. 이래 좋은 날에 뒤숭숭한 노래를 불러도 괜찮나. 상호는 반쯤 눈을 내리뜨다가 오오, 좋다. 하고 듣는 희찬의 반응에 좋으면 상관없으려나 싶어 귀를 기울였다. 상호는 눈가에 눈물이 고이는 착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준향대랑 주익대 합격 발표한댔는데. 상호는 일부러 휴대폰을 열어보지 않았다. 같이 있을 날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기한을 상기하고 싶지 않았다. 가사는 잘 모르지만 제목은 크리스마스 이브랬으니 뭔갈 축하하는 내용이겠거니 짐작한 희찬은 노래가 끝나자 박수를 쳤다.

 

공연은 잠시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땀도 다 말랐고 손끝이 추위로 얼얼해지자 상호와 희찬은 근처 베이커리 카페에 들어가기로 했다. 희찬은 가장 기억에 남았던 한 소절을 흥얼거렸다. 이마모 스키닷테 코토 소레다케다요~ 쌍호 이 노래 뜻 알려도. 입에 달라붙는다. 상호는 심통을 부렸다. 싫다 희차이. 아 머꼬. 내 이런 부탁 잘 안 한다 아이가.

 

“희차이 발음 구려서 말해도 뭔지 몰겠다.”

“뭐라꼬! 니 말 다했나!”

 

희찬이 버럭했다. 상호는 달려서 베이커리 카페 안으로 쏙 들어갔다. 희찬도 따라 달렸다.

 

부산스럽게 카페에 들어왔지만 더 이상의 소란을 피우지 않았다. 상호도 희찬도 진열대 앞에서는 점잖은 사람인 척 메뉴를 골랐다. 물론 이 생쇼를 직관한 카페 직원은 입술을 말아 물었다. 상호의 귓가가 부끄러움으로 벌게졌다. 주문을 끝내고 자리를 잡은 상호는 희찬에게 검색해보면 되지 않냐며 볼멘소리를 내었다. 희찬은 상호가 직접 해석해주는 게 좋다며 채근했다. 상호는 아아아아 싫다~라며 모르쇠로 일관했다. 희찬은 흰 눈을 뜨다가 진동벨이 울리자 의자에서 일어났다.

 

상호는 음료를 가지러 가는 희찬의 뒷모습을 보다가 휴대폰을 들었다. 희찬이 오면 대학 합격 통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상호가 주익대 카톡방에 들어가는 동안 희찬이 트레이를 내려놓고 앉았다.

 

“대학교 발표 시간 됐다.”

“맞나. 빨리 확인해보자!”

“천천히 해라. 어데 도망 안 간다.”

 

희찬이 호들갑을 떨며 휴대폰을 들었다. 카톡에는 각자의 대학교 합격자 발표 안내 메시지가 와 있었다. 희찬이 달달 떨었다. 상호 하나둘셋 하면 링크 들어가 보는 거다. 상호도 다리를 떨었다. 두 사람은 진동모터를 단 인간이 되어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주익대학교 합격통지서]

[모집 전형 | 체육특기자

모집단위 | 스포츠 융합

수험번호 | 8643591

성명 | 기상호

합격 여부 | 합격 <등록하기>]

 

[준향대학교 합격통지서]

[모집 전형 | 체육특기자

모집단위 | 체육교육과

수험번호 | 6478243

성명 | 정희찬

합격 여부 | 합격 <등록하기>]

 

“허어어어억.”

 

상호는 숨이 막힌 소리를 냈다. 눈이 화등잔만 하게 떠진 상호는 맞은편의 희찬을 바라보았다. 희찬은 입이 쩌억 벌어져 있었다. 양손으로 공손히 휴대폰을 잡은 손가락은 힘을 너무 주어 끝이 하얗게 질렸다. 희찬은 숨이 넘어갔다. 두 사람은 한참을 아무 말이 없었다. 야 너도..? 야 나도..! 누군가가 삿대질을 하며 그윽하게 바라볼법한 대치였다. 두 사람은 약속하기라도 한 듯 어정쩡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서로를 얼싸안았다. 테이블이 덜컹거리고 한 입도 마시지 않은 스무디가 엎어졌다. 과일 스무디가 바닥으로 쏟아지든 말든 희찬과 상호가 서로를 부르짖었다. 와아아악!! 카페에 있던 사람들이 놀라 두 사람을 쳐다봤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미칫다. 합격이다!! 우리 대학 간다. 호야!”

“1지망에 바로 붙은 거 꿈 아니제!!! 찬이 우리 꿈꾸는 거 아이제!”

 

한참을 끌어안고 합격의 기쁨을 만끽한 두 사람은 고요해진 카페와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던 손님들을 인지하고는 엉망으로 만든 자리를 치웠다. 휴지로 테이블을 치우며 밀대를 들고 온 직원에게 고개를 연신 숙이며 사과했다. 직원은 허허거리며 상호와 희찬의 사과를 받아주었다.

 

*

 

3학년의 언젠가 봄. 상호는 후배에게 연애할 생각 없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

별건 아니고요. 저희 사촌 누나가 고교농구 잘 보는데 햄 얼굴이 취향이래요. 햄 관심 있으면 소개해드릴게요.

 

“맞나.”

 

상호는 이런 식의 대쉬를 받은 적이 없어 당황한 얼굴로 후배에게 대답했다. 소개가 너무 뜻밖이라 솔직히 할 말이 없었다. 자기가 이성에게 먹히는 얼굴인가 긴가민가했고 또 정희찬과 농구에 빠져 타인을 떠올릴 새가 없었다. 상호는 뿌듯한 얼굴로 농구공을 돌렸다.

 

“근디 내는 안즉 연애할 생각이 읎다. 3학년인데 실적 쌓고 준비해야제.”

“태성햄은 여친이랑 럽스타그램 한다고 바쁘시던데요.”

“내, 내는 와 부르노!”

 

태성은 괜히 바락 소리를 지르며 실실 웃던 표정을 갈무리했다. 방금까지 은재의 과잠 셀카를 보던 태성은 휴대폰을 바구니 안에 넣었다. 훈련 시작 전이지만 지적당한 게 신경 쓰였나 보다. 태성은 재작년 쌍용기에서 우승한 뒤로 은재에게 고백했고 은재는 이를 받아주었다. 태성은 건들거리는 행동거지나 죽어도 섬세하지 못한 태도 탓에 금방 깨지거나 고백을 거절당할 거란 농구부의 예상을 깨고 연애를 잘했다. 서로가 첫사랑이던 두 사람은 2년 차를 향해 순조롭게 달려가고 있었다. 롱디, 대학생과 고등학생의 환경 차이, 운동부 성질 더러운 남친, 스카이 과탑 여신. 아무튼 이별하기 딱 좋은 요소란 요소는 전부 타고났으면서 태성과 은재는 종일 깨를 볶았다.

 

“그럼 대학 가서는요? 그때는 여유 있잖아요.”

“대학에 깔롱쟁이 많던데 그때 돼서 내 좋다고 할 수 있겠나. 느그 사촌 누나한테는 폐 끼치는 거 같아가 소개는 못 받겠다.”

 

결국 후배의 권유는 시간이 없다로 끊겼다. 후배는 아쉬운 눈치였지만 형이 거절하니 더 붙일 명분도 없었다. 상호는 짝사랑을 앓고 있는데도 사랑에 대해선 여전히 잘 몰랐다. 아침 드라마에선 일주일 만에 사랑에 빠지고 고백하고 지지고볶드만. 글타고 내가 희차이한테 들이박는 게 되긋나. 난 얘 마음도 모르는디. 코치와 함께 들어온 희찬은 연애에 관해 이야기를 할 새도 없이 체육관 돌기를 시작으로 반나절 내내 훈련에 매진했다.

 

생각해보면 희찬은 여태 여친을 사귄다던가 썸을 탄 적이 없었다. 또래 친구들과 마주칠 일이 적은 운동부 학생의 비애였다. 여자애들이랑은 잘만 말하던데. 상호는 희찬에게 누구누구 관심 있냐며 무심코 물은 적이 있었지만 희찬은 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웃음을 터뜨린 뒤 그냥 친구라고 일축했다. 썸이라고 오해받으면 상대가 자길 죽일 거라는 살벌한 농담과 함께. 그래서 상호는 정희찬은 연애에 관심 없나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그 추측은 오늘로 깨졌지만.

 

꽃샘추위 조심하라는 교사의 언질이 있었지만 하루종일 움직이는 운동부에게 꽃샘추위란 땀내를 씻겨줄 개운한 온도였다. 상호는 이온 음료를 벌컥벌컥 마셨다. 지구력 키운다고 온종일 달리고 사이드 스텝을 밟았더니 심장이 두방망이쳤다. 웨이트가 절실한 희찬은 울렁거리는 속을 진정시키려 활짝 열린 창문 앞에 서서 바람을 쐬었다. 구력을 늘린답시고 지문이 닳도록 농구공을 만진 후배는 드러누운 채 멍 때렸다. 후배는 몽롱한 표정으로 천장을 바라보다 대뜸 희찬에게 물었다.

 

“희찬 햄. 햄은 연애할 생각 없어요?”

“뭐? 내? 와 내한테 묻노. 다은햄이나 상호한테 물어봐라.”

 

희찬은 질문이 의외였는지 당혹스러운 투였다. 후배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붙였다.

 

“상호 햄은 생각 없댔고 다은 햄은 자만추라든디요.”

“글나.”

 

희찬은 찬물을 한 모금 입에 물었다. 어지러운 정신을 가다듬고 있는 듯 입에 문 물을 천천히 넘겼다. 희찬은 음. 하는 소리를 냈다. 무언가를 결정했을 때면 희찬은 약간 결연한 추임새를 넣었다. 창문에 매달린 몸을 빼서 후배 쪽으로 틀었다. 희찬은 밝은 태양 빛을 그대로 맞았다. 피부가 희게 탈색되었다.

 

“내는 과팅 해보고 싶다. 과잠 입고 단체로 만나서 술도 마시고 노래방도 가고.”

 

희찬은 이런 부분에선 무척 적극적이었다. 사람 만나기를 주저하지 않는 사교적인 성격 때문인지 연애라는 환상에 매료된 모솔의 특징 때문인지는 아무도 몰랐지만. 상호는 희찬이 제 얼굴을 보지 못하게 고개를 돌렸다. 희찬은 상호가 어떤 마음인지 알지 못한 채 조잘거렸다.

 

“이왕이면 흑발에 아담하고 토끼 같은 아랑 사귀고 싶다 안카나.”

“뉴진스 하니요?”

“맞다! 내 하니랑 여자아이들 미연도 좋아한다.!”

 

희찬이 꺼낸 유명인들은 죄다 상호와 정반대의 특징을 가졌다. 순한 인상에 쌍꺼풀 진하고. 여자 평균 키긴 한데 어차피 키가 중요한 농구계에서 160은 남자 농구선수에게 굉장히 아담한 키다. 희찬의 말을 가만 듣던 다은이 님 피지컬에 가능한 사람이겠냐 깠지만 희찬은 자기도 양심이 있다며 대충 그런 느낌의 여자를 만나고 싶다고 희망했다. 상호는 고개를 푹 숙였다. 코로 숨을 마시고 입으로 숨을 내쉬었다. 짝사랑하는 사람의 이상형을 들었다고 절망할 연약한 멘탈도 아닐뿐더러 상호와 희찬은 여전히 친구였다. 상호는 스포츠 타올로 땀을 훔쳐냈다. 희찬은 벽에 기대섰다.

 

“내 여친 생기면 느그한테 소개해줄게.”

 

희찬이 호언장담을 했다. 상호는 시큰둥했다. 내가 니 여친 봐서 뭐할라꼬. 쏘아붙였지만 희찬은 친구 사이에 할 수 있는 농담이라 여겼다.

 

*

 

상호는 심란한 얼굴로 1월 2일 캘린더를 바라보았다. 대학도 무사히 합격했고 졸업한 3학년 형들에게 축하도 받았다. 재유는 전화통화로 주익대에 붙은 걸 축하한다며 같이 경기 뛰기 힘들어도 잘 해보자는 덕담을 했다. 희찬이 말하던 잘하는 가드는 바로 재유햄이었다. 준향대에서 한창 활동하고 있는 준수는 대학 합격했다고 설렁설렁하면 죽여버린다…. 라는 무시무시한 말을 했다. 고교 시절 동고동락한 후배가 농구 리그 상위권 대학에 붙은 건 경사가 맞지만 한 편으로는 경쟁 상대가 되었으니 더이상 봐주지 않겠다는 선전포고였다. 준수햄은 내가 주익대 붙은 것보다 영중햄이랑 같은 대학이라는 데서 눌린 거 같구마.

 

상호와 희찬 둘 다 새해 첫날은 가족들과 보내야 하는 집안이라 신년 해돋이를 보러 갈 엄두는 못 냈다. 민증이 나오고 제야의 종이 치자마자 술을 사러 갈 수 있는 나이가 된 희찬은 돌아온 새해를 반겼지만 상호는 마냥 좋아하지 못했다. 상호는 빠른이었고 고등학교를 졸업해도 여전히 미성년자 딱지를 달았다. 자정에 만난다고 둘이서 특별한 일을 할 수는 없기에 두 사람은 얌전히 각자의 집에서 일찍 잠들었다.

 

10대를 마무리 짓고(상호는 아직 19살이다. 하지만 미성숙의 전유물인 고등학교를 졸업하니 대충 마무리 짓는다고 치자.) 인생의 새로운 장을 맞이해야 하는데, 기대를 해야 하는데 상호는 기쁘지 않았다. 고등학생 때처럼 부대끼던 생활에서 떨어진다. 아니다, 상호는 기숙사에 들어갈 테니 부대끼던 생활은 여전할 것이다. 햄들과 찢어진다. 아니다, 태성햄도, 다은햄도 무사히 체특자 전형으로 대학 농구선수가 되었다. 4년 내내 대회에서 질리도록 얼굴을 볼 것이다. 등록금이 비싸서 그렇다. 돈 이야기를 오가기엔 상호는 아직 어렸다. 대학 입학금 지원. 대학 등록금 대출 따위로 한국 장학재단과 한바탕 씨름을 했지만 상호에겐 실감 나지 않는 주제에 가까웠다.

 

나고 자란 부산을 떠나 서울로 간다…? 슬픔의 핀트가 달랐다. 상호는 3년 중 시간 대부분을 본가가 아닌 숙소에서 지냈다. 거리만 조금 다를 뿐이지 상호는 가족이 보고 싶다고 우는 어린애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역시 희차이다.

 

더 이상 희찬을 보러 학교 복도를 가로지르지 못한다. 같이 급식을 먹기 위해 기다리는 일도 끝이고. 지루한 수업을 피해 꾀병을 부리고 커튼 사이로 서로 마주 보고 낮잠 자던 꿈은 깨야 했다. 가끔 풀밖에 없는 반찬이 나올 땐 개구멍을 넘어 둘이서 몰래 외부 음식을 먹을 수 없다. 전날 밤 사 온 간식을 주머니에 몰래 쑤셔 넣고 고플 때 먹으라는 장난은 못 친다. 체육 수업이 겹칠 때면 운동장 계단에 엉덩이를 붙이고 짝피구를 하네 축구를 하네 토론도 그만두어야 한다. 빼빼로 데이나 화이트데이 따위의 커플 이벤트가 생기면 모솔끼리 챙기자고 위안하던 때도 지나갔다.

 

상호는 침대에 엎드렸다. 베개에 고개를 비볐다.

지독한 자기 확신이다.

*

 

1월 2일엔 메모가 적혀있었다. ‘일몰 구경.’ 기괴한 약속이었다. 1월 1일 해돋이도, 12월 31일 제야의 종소리도 아닌 1월 2일 일몰. 말이 일몰 구경이지 둘의 약속 시각은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오후였다. 겨울옷을 단단히 챙겨입은 상호는 머플러를 품 안에 넣었다. 추워서 챙긴 건 아니었다. 1월의 바다는 매서우니까. 상호는 패딩 후드티를 쓰고 밖으로 나왔다. 칼바람이 얼굴을 정면으로 치고 갔다. 읏추, 읏추. 소리가 입에서 나왔다.

 

약속 장소에는 희찬이 먼저 나와 있었다. 희찬은 지하철역 입구 근처에 서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상호는 희찬을 발견하자마자 그를 향해 걸어갔다. 희찬은 상호를 발견하지 못했다. 상호가 희찬의 옆에서 어깨를 팡 치고 나서야 상호를 인지했다. 상호는 반갑게 웃었다. 희차이! 먼저 와있었나.

 

“쌍호. 오늘따라 버스가 빨리 도착했다.”

 

글나. 상호는 짧게 대답했다. 카톡으로 어디 어디를 갈지 미리 계획을 짰던 두 사람은 곧장 오락실로 향했다. 거리에는 신년 동물 띠를 테마로 한 캐릭터라던지 팬톤 뉴컬러라던지 헌 것을 새로운 체하는 판촉으로 가득했다. 하늘은 구름이 껴 있었지만 햇빛은 충분해서 집을 막 나왔을 때보단 덜 추웠다. 희찬과 상호는 기숙사와 선배들 덕담으로 떠들썩했다. 희찬도 준수에게 전화를 받았었다며 입시 악귀가 성불 된 준수햄이 의외로 무섭게 뭐라고 하지 않았다고 했다. 아니 그 햄 진짜로 내가 주익대 가서 무섭게 이야기한 거였냐고. 상호는 힝구 얼굴로 잉잉거렸다. 희찬은 상호의 뒤통수를 북북 쓰다듬었다.

 

희찬은 상호의 머리털이 본 것보다 부드럽자 크게 뜬 눈으로 제 손을 보았다. 그리고 다시 상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상호가 당황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와, 와 그라는데.”

“니 머리가 왤케 부드럽노. 미장원 갔다 왔나.”

“아이다. 그럴 돈도 없구로.”

 

희찬의 얄쌍한 손가락이 두피를 매만지고 머리털을 헤집었다. 차갑고 단단한 촉감이 뒤통수에서 떠나지 않는다. 상호는 희찬의 손목을 밀었다. 그만 만지라 희차이. 희찬은 그제야 손을 떼고 주머니에 넣었다. 희찬은 상호가 새해 꽃단장을 했나보다 하고 생각을 흘렸다.

 

오락실은 학생들로 북적거렸다. 방학이라 그런지 교복을 입은 사람은 없었지만 얼굴 면면이 앳되었다. 상호와 희찬은 농구공 기계를 보자마자 홀린 듯이 그 앞에 섰다. 농구라면 지긋지긋하게 해왔을 테지만 오락실 농구는 또 달랐다. 상호는 지갑에서 천 원권을 꺼냈다. 저거 해보자 희차이. 이 거리라면 신기록 쌉가능이다. 청소년 특유의 자만스러운 가오였다. 희찬은 오~ 하는 소리를 내더니 슛 없는 아기상호도 할 수 있는 거리 아이가라며 상호를 깠다. 상호는 슛 있다며 앙칼지게 반박했다. 천 원짜리 지폐가 농구 기계의 입속으로 들어갔다. 뾰롱뾰롱 거리는 시끄러운 소리가 나오고 기계가 카운트다운을 셌다. 상호는 농구공을 양손으로 들고 슛 폼을 쟀다. 스피커가 버저를 울리자 슛을 날렸다. 첫 구는 골을 통과했다.

 

양손으로 열심히 공을 날렸지만 속도가 느려서인가 게임기에 표시된 점수만큼 도달하지 못했다. 희찬은 풉키풉키하는 소리를 내며 상호의 허세를 깠다. 3등에도 들지 못한 점수를 본 상호는 에이씨하고 아쉬운 소리를 냈다. 희찬은 자기가 한 번 해보겠다며 오락실 기계에 돈을 넣었다. 농구공 기계가 뾰롱거리는 소리를 냈다. 희찬도 상호처럼 양손으로 자세를 잡았다. 버저에 맞춰 슛을 날린 희찬은 상호보다 빠르게 공을 림에 통과시켰다. 제한시간은 빠르게 소진되는 만큼 희찬의 손도 바빠졌지만 그게 끝이었다. 희찬도 신기록에 들지 못했다. 상호는 손바닥으로 입을 막고 저를 놀렸던 것처럼 풉키풉키거렸다.

 

“아무리 빨라도 양손은 역시 힘들지.”

“말 다했나.”

 

희찬은 발끈했지만 거기서 반박하지 않았다. 둘 다 양손으로 신기록을 넘기기 힘들단 걸 알고 있었다. 유튜브 쇼츠에 나오는 농구 게임기 신기록자의 플레이를 보면 죄다 양손으로 저글링 하듯이 넣었으니까. 실제 농구에서 슛을 그렇게 넣으면 개같이 깨지기 마련이었다. 슛 폼 그따위로 잡아서 40분 어떻게 뛸 거냐는 코치의 잔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렸다. 상호랑 희찬은 농구공 게임기에 관심을 끄고 다른 게임기로 갔다.

 

일본어로 무슨 큐브라고 외쳐대는 리듬 게임기부터 시작한 두 사람은 하나하나 게임을 같이 플레이했다. 총으로 좀비를 쏘는 총싸움에서는 희찬이 먼저 죽자 상호가 희차이~ 소리를 내며 영화에 나오는 오바스런 총잡이에 빙의해서 총을 난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상호도 죽어버리자 희찬은 빈 수레 아니냐며 낄낄거렸다. 철권 게임기는 서로 맞은 편에서 대전을 했다. 둘 다 조이스틱이 부서저라 돌리고 버튼 스프링이 망가지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난타했지만 캐릭터는 애매한 거리에서 깔짝거리다가 약 공격 한 대 맞고 승부가 결정 났다. 속도가 빠르면 뭐하나, 두 사람은 농구만 한 발컨 겜알못이었다. 코옵 기능으로 2 대 2 철권도 해보았지만 결과는 순삭이었다. 겜이 너무 어렵다 쌍호. 내는 손가락 아프다 희차이.

 

마지막으로 한 건 DDR이었는데 몸을 쓰는 게임이라 그런지 그나마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었다. 철 지난 걸그룹의 히트곡을 고르고 노말 난이도를 택한 두 사람은 느린 파트에선 그럭저럭 발판을 잘 밟았다. 하지만 화면에 나오는 발판의 개수가 늘어나자 스텝이 꼬이기 시작했다. 희찬은 솜씨 좋게 발재간을 굴렸지만 상호는 어어 하다가 고장 나선 ‘이거 어떻게 하는 기고…?’ 라고 중얼거렸다. 돌아온 쉬운 파트에서 다시 감을 잡아 발판을 눌렀지만 점수 차는 벌어질 대로 벌어진 뒤였다.

 

신나게 게임을 하고 나서야 희찬과 상호는 일몰을 보러 간다는 목적을 뒤늦게 깨달았다. 해는 아직 떠 있었지만 뉘엿뉘엿 져 가려 했다. 상호와 희찬은 급하게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바다 쪽으로 가려면 버스를 타야 했다.

 

*

 

버스를 타고 도착한 해변은 파도가 높지 않았다. 포말이 모래를 적셨다. 색 바랜 인도를 걷다 보면 해변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나왔다. 모래가 운동화 안으로 살금살금 들어갔다. 해는 어느새 바다의 지평선에 근접해있었다. 희찬은 모래 위에 서서 발을 털었다. 신발 안으로 들어간 모래가 탈탈 튀어나왔다. 양말 낀 발가락이 찝찝함을 호소했다. 상호는 희찬의 옆에서 해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바다의 짙은 파란색이 하늘의 색과 대비되어 선명했다.

 

희찬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전봇대에 감긴 정보지 보관함을 발견했다. 상호 내 잠깐만. 희찬은 발이 푹푹 꺼지는 모래를 건너 정보지 보관함 안의 신문 한 부를 가져왔다. 배부된 지 오래된 신문이라 종이에서 곰팡내가 났다. 희찬은 신문 몇 장을 상호의 품에 안겨주었다. 희찬이 모래 위에 신문지 두어 장을 올린 뒤 깔고 앉았다. 상호는 희차이 센스봐라. 라고 띄워주면서 희찬의 옆에 신문지를 깔고 앉았다.

 

둘 주위에는 갈매기 우는 소리와 파도 부서지는 소리가 생경했다. 둘은 바다를 끼고 살았으면서 생애에 바다를 가까이 둔 적이 없었다. 해운대야 관광객으로 넘쳤고 다른 해수욕장은 부산 사는 직장인이 영혼 털린 얼굴로 나타나서 멍 때리다 가는 곳에 가까웠다. 태양과 바다의 지평선이 겹쳐지면서 하늘이 주황색으로 물들었다.

 

희찬은 고개를 돌려 상호의 얼굴을 보았다. 주홍으로 그늘진 상호의 얼굴은 중학생 그때보다 성숙했다. 눈 아래 눈물점이나 별로 차이나지 않는 눈높이는 여전했지만 굵어진 목과 벌어진 등판을 보면 우리 이제 성인이구나 하는 감상을 들게 만들었다. 희찬은 친구의 얼굴이 낯설었다. 상호의 무표정은 종종 보던 것이지만 툭 튀어나온 아이홀이나 정나미 없단 평가를 듣는 눈꼬리를 살피자면 희찬으로선 숨이 떨렸다. 졸업할 때가 되니 괜히 감성적으로 변하는구나 싶어 희찬은 손 끝으로 제 무릎을 두드렸다. 짭짤한 바닷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지나갔다.

 

“쌍호. 우리 사진 찍자!”

“사진? 갑자기?”

“갑자기는 무슨 갑자기고. 찍고 싶으니까 찍는거지. 일나라.”

 

희찬은 상호의 손을 잡고 억지로 일으켰다. 상호는 어어 하면서도 얌전히 일어났다. 희찬이 휴대폰을 들고 셀카 모드로 바꾸었다. 거센 바람이 귓가를 쳤다. 상호의 목에 팔을 감은 희찬은 바다를 배경 삼아 둘의 얼굴을 찍었다. 휴대폰에서 찰칵거리는 음이 연속으로 들렸지만 상호나 희찬이나 자연스럽게 찍히지는 못했다. 바람이 멈추지 않고 계속 불어댔기에 머리는 산발했다. 모래 때문에 제대로 서지도 못해 자세도 어정쩡했다. 상호는 어색하게 브이 자를 내밀었다. 희찬은 상호의 뒷머리에 검지를 펴서 뿔을 만들었다. 상호의 눈가 경련이 그대로 찍혀서 엉망이었다. 희찬은 갤러리를 훑다가 낄낄 웃었다.

 

다시 휴대폰을 들고 바다와 노을 배경을 뒤로 두었다. 팔이 긴 편인 상호가 희찬 대신 휴대폰을 쥐었다.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마음에 드는 사진쯤은 찍어둬야지 싶어 두 사람은 뒤로 걸었다. 발에 밟히는 모래가 점차 단단해졌다. 더 뒤로 가면 파도에 젖으리란 예상도 못한 채 사진에 몰입했다. 젖은 모래에 두 사람의 족적이 남겨졌다. 상호가 손가락으로 카메라 버튼을 누르는 순간 파도가 높게 철썩이며 희찬과 상호의 운동화를 적셨다.

 

“으악!”

 

놀란 두 사람은 발을 잘못 굴러 뒤로 넘어졌다. 찰칵거리는 소리가 언뜻 들린 것도 같았지만 엉덩방아를 찧은 상호와 희찬은 신경 쓸 새가 없었다. 다시 파도가 치며 바닷물이 바지와 옷소매를 끼얹었다. 철썩이는 파는 쉬지 않고 덮쳤다. 놀라서 굳은 두 사람은 바다를 돌아보았다. 이내 서로를 바라보다가 바람 터지는 소리를 내며 웃음을 터뜨렸다. 얼빵해진 얼굴도, 모래 범벅이 되어버린 옷차림도, 넘어지느라 잔뜩 흔들린 사진도 우스웠다. 미친 우리 어케 집가노! 신발에 물 다 들어갔다 아이가!

 

모래로 온통 더러워진 손을 털고 일어난 상호는 희찬에게 손을 내밀었다. 희찬도 대충 모래를 털어낸 뒤 상호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이제 집에 가자 희차이.”

 

해는 이미 다 졌다. 하늘은 온통 검푸르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날 저녁 희찬은 톡방에 둘이서 찍었던 사진들을 올렸다. 그중에는 넘어지면서 찍힌 흔들리는 사진도 있었다. 애써 챙겼던 목도리를 둘러주지 못한 상호는 그 사진을 저장했다.

 

*

 

대학에 입학한 두 사람은 고등학생 때처럼 자주 만날 수는 없었지만 간간이 밥집을 간다든지 카페에 모여서 과제를 했다. 둘 다 기숙사 생활 중이라 더 이상 서로의 집에 자고 간다던가 할 수는 없었다. 농구 훈련도 빡셌다. 아는 형, 모르는 감독과 코치, 고등학교보다 늘어난 스태프. 대학에 들어가면서 농구부의 규모가 커지자 선배에게 치이는 건 일상이었다. 상호는 노트북 앞에서 머리를 박았다. 희차이…. 내 과제가 안 풀린다. 맞은편에서 전공 서적을 뒤적거리는 희찬도 죽어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내도…. 이게 한국어가 외국어가.

 

두 사람은 아직 1학년이라 대학 농구 리그에는 참가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실전에 투입되지는 못했다. 다만 규모와 열기는 벤치에서도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기엔 충분했다. 상호와 희찬은 농구를 사랑했다. 농구를 하는데 문제가 될 법한 요소는 피하고 싶었기에 두 사람은 과제도, 출석도 할 수 있는 선에서 열심히 참가했다.

 

숨 가쁘게 바빠진 생활은 급속도로 서로에게 소홀해지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대학생활은 술자리의 연속이었다. 과제는 하루가 멀다 하고 늘어나고 민증 잉크도 덜 마른 동기들은 술이다 모임이다 위장에 알코올부터 들이부었다. 아직 20살이 되지 못한 기상호는 늘 그 술자리에 배제당했지만 술이 없어도 바쁜 건 매한가지였다. 상호와 희찬은 만나는 횟수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일주일에 두 번 세 번 만나던 게 중간고사 이후로는 일주일에 한 번. 희찬이 동아리에 들고나서는 이주에 한 번. 희찬이 소개팅으로 여친을 사귀고 나서부턴 한 달에 한 번.

 

요즈음 상호는 실물 희찬보다 인스타 속 희찬을 더 자주 보게 되었다.

 

희찬은 그때 호언장담하던 대로 흑발 생머리에 순한 여자친구를 만들었다. 유아교육과랬나. 아무튼 소개팅도 나쁘지 않았고 애프터를 몇 번 이어가다 보니 느낌이 좋아 남자친구, 여자친구 하기로 했댄다. 상호는 콩나물국밥을 먹으며 여친 자랑을 하는 희찬의 수다를 한 귀로 흘렸다. 상호는 무심하게 아 그렇나. 라고 답해주며 희찬의 주저리를 끊지 않았다.

 

어라, 나 좀 식었을지도?

 

상호는 티셔츠에 튄 고춧가루를 닦아내며 자신의 마음이 헷갈림을 느꼈다. 사랑은 타이밍이라던 밴드의 노래가 떠올랐다. 상호는 희찬에 약속에 옛날처럼 들뜨지 않았다. 여자친구를 사귀었다고 세상이 무너지거나 하지 않았다. 그냥…. 그랬구나. 축하한다. 이제 희차이 모솔이라도 못 부르겠네. 상호의 입에서 나온 건 날 선 질투도, 그 자리에 내 것이어야 하는데 같은 추한 드라마 대사도 아닌 친구로서 속 시원한 농담이었다.

 

여자친구라면 닭살 돋도록 떠받드는 주접 남자친구 희찬에게 짜증이 나서 딱밤을 먹이고 싶은 게 한 두 번이 아니었지만 상호는 감정도 시간 앞에서는 허망하단 말처럼 사랑을 담담히 방치했다. 첫사랑도 이렇게 지나가는 걸까. 입안이 씁쓰름했다. 하루가 멀다하고 올라오는 여자친구와의 투 샷이나 디데이 카운팅에는 빠짐없이 하트를 누르는 게 일상이 되었다.

 

상호는 희찬이 소식을 알려준 날 아무 동전 노래방에 들어가서 노래나 실컷 불렀다. 어디로 가야 하죠~ 아저씨~ 우는 손님이 처음인가~요~ 복도를 지나가는 학생들이 웃든 말든 상관없었다. 상호는 눈물을 주륵주륵 흘리며 이별 택시부터 오늘 헤어졌어요까지 완창했다. 360도 돌아서 봐도 실연당한 남대생의 꼴값 그 자체였다. 밥 먹고 난 뒤에는 식었을지도 몰라! 하더니 헤어지고 나서는 그만 할래를 부르짖으며 감성에 젖었다. 아직도 사춘기 질풍노도 같은 감정변화를 벗어나지 못한 미숙함의 정점이었다.

 

민증이라도 나왔으면 강변에서 깡소주라도 했을 텐데! 상호가 입에 대 본 술이라곤 부모님이 맛만 보라 따라 준 맥주가 다인 주제에 본 건 있어서 외친 패기였다.

 

이번 여름방학에는 본가에 돌아가지 않고 기숙사에 남기로 했다. 대학 농구 리그는 봄부터 가을까지 하기에 합동훈련부터 개인훈련을 감안하고 몸을 미친 듯이 움직여야 했다. 희찬은 그래도 아직 벤치니까 여유를 부려 짧게 부산에 다녀오고 여자친구와 데이트도 했다. 상호는 체육관에 드러누워 지상고 후배들의 대회 결과를 인스타로 들었다. 쟈들도 열심히 하고 있구나. 상호는 동질감을 느꼈다.

 

*

 

대학 농구 리그의 치열한 접점은 캘린더의 월이 하나씩 넘어가면서 그 우승자가 천천히 가려지기 시작했다. 포인트가드 박병찬의 영입 이후로 대세가도를 탄 준향대. 유구한 전통으로 대학 농구 탑티어 붙박이를 유지 중인 주익대. 플레이오프 결승전은 준향대와 주익대의 무대였다. 상호는 벤치에 앉아 목이 터져라 팀을 응원했다. 박병찬이 디펜스를 제껴내고 전영중이 순식간에 다가가 디펜스했다. 성준수가 슛을 날리면 진재유가 찬스를 만들어냈다. 버저비터가 울렸다. 관중이 환호했다. 우승은 준향대가 차지했다.

 

상호는 플레이오프 뽕을 빼지도 못하고 정신 놓고 2학기를 다녔다. 병찬햄 폼 안 죽었다 아이가. 상호는 기어코 대학농구리그를 찢고 얼리로 프로 진출한 박병찬을 떠올리며 다짐했다. 내도 농구 열심히 해서 얼리로 조기 졸업 해버릴끼다.

 

대학농구리그가 끝나자 시간은 또 순식간에 흘렀다. 상호는 망해버린 성적표를 무시했다. 1년 잘 보낸 걸로 충분하다고 위로한 상호는 기차역 플랫폼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올겨울 방학에는 본가에 돌아가서 쉬다가 봄학기 시작 전에 올라올 생각이다. 상호는 같이 만나서 내려가기로 한 희찬이 언제 오나 카카오톡 창을 켰다 끄기를 반복했다. 역사에는 난방이 되어있지 않아 피부가 시렸다.

 

“쌍호!”

 

상호는 희찬의 목소리가 들리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희찬은 상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상호는 반갑게 입을 열었다. 아, 희차이!

 

“니 왜 늦었냐. 5분 안에 안 오면 버리고 갈라 캤다.”

“봐주라. 내 여친 데려다준다고 그랬다.”

“맞나. 오래 사귀네.”

“저번 달에 200일 찍었다.”

 

희찬은 커플링을 낀 왼손을 들었다. 그 손에는 병두유가 있었다. 두 달 만에 본 희찬은 여전했다. 달라진 점이라면 다시 기른 머리카락이었다. 반으로 묶은 머리카락이 겨울 외투에 정전기가 올랐다. 상호는 목도리에 고개를 숨겼다. 귀 끝이 추위로 빨갰다. 희찬은 상호에게 손을 내밀어보라고 말했다. 상호가 물음표를 띄우면서 개처럼 손바닥을 내밀자 희찬이 그 위에 병두유를 올렸다. 두유는 방금 온열기에서 꺼낸 듯 따뜻했다. 상호는 얼떨떨한 얼굴로 물었다.

 

“이게 뭐고.”

“뭐기는, 오래 기다리게 해서 사 왔다. 니 손 시려우면 맨날 춥다 춥다 그랬잖아.”

“내가 글케 많이 잉잉댔나.”

 

상호는 소중하게 두유를 쥐었다. 온기가 퍼져나갔다. 희찬은 양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었다.

 

“아니. 그냥 생각나서 사 와봤다.”

 

상호는 눈을 끔뻑이다가 희찬에게 병두유를 넘겼다. 니나 마시라. 내는 괘안타. 희찬은 고개를 흔들었다. 내는 버스에서 히터 쬐고 와서 필요 없다. 상호는 희찬의 거절에 구태여 더 권하지 않고 두유를 품에 넣었다. 기차는 금방 왔다. 상호와 희찬은 예약해둔 좌석에 앉아 아는 형들의 근황을 나누던가 하면 지상고 후배가 어느 대학으로 간다느니 같은 학창시절을 공유한 자만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두런두런 나누었다. 한참 조잘거리다가 지치면 서로 머리를 기대어 자고 부산에 도착해서 깨어나면 졸린 얼굴로 부산역에 나와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식사를 하고 헤어진다던가 하는 일은 없었다. 두 사람 다 자연스럽게 샛길로 빠지지 않고 각자의 집으로 향했다. 상호는 교통버스에서 내린 뒤 주머니에 방치되어있던 두유를 꺼냈다. 미적지근하게 식은 두유는 마시기 좋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달았다. 상호는 입가에 묻은 두유를 닦은 뒤 병뚜껑을 단단히 닫았다. 귀가한 상호는 희찬이 준 두유를 버리지 않고 본가 책상 서랍에 보관했다.

 

상호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제 책상에 볼을 대고 엎드렸다. 다 마신 유리병을 버리지 않고 보관하는 자신의 행동에 은은한 현타가 왔다.

 

*

 

희찬을 짝사랑하는 기간 내내 상호가 고민 상담을 해보지 않은 건 아니다. 다만 비좁은 농구계와 손쉽게 들킬 수 있는 내용은 상호가 어쩔 수 없이 인터넷의 세계를 유영하게 만들었다. 익명성의 힘을 빌린 상담과 고인물 수준의 서치를 해본 결과 동성 친구 사이 짝사랑은 95퍼센트의 확률로 이루어지지 않으니 얌전히 접으라는 속 터지는 답 밖에 못 얻었지만. 아무튼 그랬다. 기상호는 여전히 정희찬을 짝사랑한다. 정희찬은 여전히 기상호의 짝사랑을 모른다.

 

대학교 2학년이 되면서 기상호는 경기에 오를 수도 있다는 감독의 언질을 들었다. 물론 4학년에 전영중이 단단히 자리 잡고 있지만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교체선수는 늘 필요했다. 디펜스 기술과 높은 기량을 가진 상호는 지상고 3년, 주익대 1년 간 감독과 코치에게 좋은 의미로 눈도장을 찍었다. 상호는 학기가 시작되자마자 토나올 정도로 훈련과 웨이트를 반복했다. 중간중간 휴식시간을 가지면 그 뒤에는 과제가 미친 듯이 밀려 들어왔다. 지친다. 상호는 학생 때도 느껴보지 않은 탈력감을 지금에야 실감하게 되었다. 몸은 건강해지고 있는데 정신은 피폐해지고 있다. 유흥이 필요했다.

 

다시 찾아온 초여름. 상호는 희찬의 전화를 받았다. 전화상으로 들려온 희찬의 목소리는 쳐져 있었다. 상호 니 오늘 시간 되나. 술 마시자. 내가 쏠게. 상호는 고개를 기울였다.

 

희찬이 보내준 주소로 상호가 갔을 때는 이미 희찬이 소주병을 딴 뒤였다. 자작이라도 했는지 과일 소주병은 양이 조금 줄어있었고 소주잔은 투명하게 찰랑거렸다. 희찬은 취기 도는 얼굴로 손을 들었다.

 

“왔나.”

 

상호는 희찬의 맞은편에 앉았다. 가성비 좋기로 유명한 포차는 시끄러운 노랫소리와 웅성거림으로 복작였다. 상호는 당혹스러워하며 소주를 원샷하려는 희찬의 팔을 잡았다.

 

“뭐. 뭔데. 뭔일이고. 희차이??”

 

희찬은 소주잔을 내려놓았다. 부푼 망막이 전등알처럼 올망거렸다. 희찬은 눈물을 참으려는 듯 이를 앙다물었다. 하지만 눈에는 물기가 촉촉했다. 감정을 추스르지 못한 희찬은 오열하기 시작했다.

 

“내 방금…. 민지랑 헤어졌다. 크흡, 흐어엉.”

“헤어졌다꼬??”

 

요즘 희찬의 인스타에서 여자친구 태그가 줄긴 했었다. 연애 기간이 길어져서 덜 티내는갑다 하고 생각 없이 넘어갔었는데 위기상황이었나보다. 상호는 희찬에게 냅킨을 건넸다. 뚝 그치라며 서투르게 위로를 하자 희찬은 코 삼키는 소리를 내며 울음을 멈추었다.

 

“왜 헤어졌는데.”

“싸우다 보니 글케 됐다. 저번에 민지가 내한테 그러드라고 내가 집착이 심하다꼬.”

“어, 어어. 어..?”

 

상호는 고장 난 얼굴로 호응했다. 희찬과 집착은 동일 선상에 놓이기 어려운 말이었다. 상호는 희찬이 집착하는 걸 상상하다가 그만두었다. 전혀 상상이 안되었다. 상호가 고장 나던 말던 희찬은 얘기를 계속했다.

 

“내는 편한 순간까지 같이 공유하고 싶은디 민지는 그게 싫은 갑다.”

“여친이랑 대화는 계속해봤나.”

“해봤는디…. 내도 모르겠다! 자기한테 너무 매달리는 거 같아가 부담스럽다고 그래서 한 번 시간을 가졌었는데. 다 틀린 것 같다.”

 

희찬은 제 머리를 헤집었다. 길게 자란 병지가 더부륵했다. 상호는 지나가는 종업원을 불러 맥주 한 병을 주문했다. 희찬은 안주로 나온 땅콩을 오독오독 씹었다.

 

“민지한테 섭섭하지 아닌 게 몇 번 있었지만 사귀다 보면 잘 맞춰지겠지 하고 넘기면 괜찮은 줄 알았다.”

“희차이 닌 사람한테 잘 맞춰준다 아이가.”

“글나…. 민지는 내가 챙겨주면 좋다고 웃어줬었는데. 어디 놀러 가자고 하면 재밌다고 해줬는디.”

“....”

 

희찬은 다시 과일 소주를 원샷했다. 상호는 제 몫으로 나온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목 안이 따끔거렸다. 상호는 희찬의 술주정을 잠자코 들었다. 검은색 긴 생머리가 청순한 여자친구, 웃으면 접히는 애교살이 귀여운 여자친구, 꽃무늬 원피스가 살랑이면 연한 분내가 풍겨 나오는 여자친구. 주접인지 염장인지 모를 말이 끊임없이 나왔다. 그래서 그 예쁜 여자친구랑은 깨졌고 자기는 재결합을 하고 싶은데 여자친구는 맘이 완전히 떠버렸다. 희찬은 다시 울기 시작했다. 상호는 옆 테이블에서 꽂혀오는 시선에 얼굴을 붉히며 휴지로 희찬의 얼굴을 박박 닦았다. 희찬이 아프다며 볼멘소리를 냈다.

 

“부산 수국 축제서 찍었던 사진이 아직도 내 폰 안에 있는데….”

“맞나.”

“추운 날 집 갈 때 손난로 쥐여주면 설렌다고 미소를 지어줬는데….”

“맞나.”

“거리에서 버스킹 공연 같이 보는 것도 좋아했는데….”

“맞나.”

 

희찬은 말하다 보니 묘한 기시감에 엎드린 상체를 일으켰다. 상호는 반쯤 건성으로 대답하며 애꿎은 맥주만 들이켰다. 좋아하는 사람이 힘들어하는 것도, 다른 사람을 떠올리면서 애닳아하는 것도 상호에겐 퍽 괴로운 일이었다. 희찬은 상호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기억을 되짚어보니 여태 나열했던 일들은 모두 상호와 했던 일들이었다. 상호는 희찬과 시선이 부딪치다 어색한 얼굴로 맥주잔을 내려놓았다. 상호는 반응이 너무 후루꾸였나 찔려했다.

 

“상호 니는 여친 안 사귀나.”

“내? 인쟈 주전 단다만다 감독님이랑 면담하고 왔는디. 여친 사귈 시간 없다.”

“아이. 그래도 고딩 때보단 여유 있다 아이가. 내였으면….”

 

희찬은 뒷말을 흐렸다. 뒷목이 당겼다. 기시감이 재현되었다. 희찬은 양손으로 제 목덜미를 감싸 눌렀다. 여기서 한마디만 더 한다면 돌이킬 수 없단 직감이 옆 통수를 지긋이 눌렀다. 희찬은 입을 멈추지 않았다.

 

“내가 니였으면…. 내같은 사람하고 사귀었을 것 같은디….”

“그게 뭔 소리고?! 희차이 마이 취했네.”

 

상호는 왁왁거리며 희찬의 입에 물컵을 꽂았다. 유리컵과 앞이빨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희찬이 작게 비명소리를 냈다. 악. 희찬은 입안으로 무식하게 들어오는 물에 사레가 들렸다. 콜록거린 희찬은 짜증을 부렸다.

 

“내가 뭐 틀린 소리 했나. 니 안 그런 척 하면서 내 하자는 건 잘 따라오데!”

“안 싫으니까 따라간 거지. 왜 갑자기 사귀네마네 하는데!”

절묘한 조명 덕에 상호의 빨개진 귀는 그리 티 나지 않았다. 목소리가 커졌다. 희찬과 상호는 한동안 서로 떼를 써가며 자기 말이 맞다고 밀어붙여 댔다. 두 사람이 멈춘 건 상호가 희찬의 양 손목을 잡고 긴 시간을 씩씩거릴 때부터였다. 상호는 흥분인지 술기운인지 알 수 없는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부들거렸다. 대비가 심한 조명이 상호의 표정을 가렸다. 희찬은 주먹을 꽉 쥔 채 흔들던 손목을 가만 멈추었다.

 

“내, 진짜로 누구 사귈 여유 없다. 희차이….”

“맞나…. 미안타.”

 

두 동갑내기 또래 친구의 자그마한 몸싸움은 미묘한 분위기에서 끝나버렸다. 상호는 코를 훌쩍였다. 희찬은 정신이 돌아온 얼굴로 냉수를 마셨다. 안주는 손도 안 댄 두 사람은 조용히 앉아있었다. 상호는 쯥하고 혀 차는 소리를 냈다. 인제 가께. 술 잘 마셨다. 도망친다를 선택한 건 상호였다. 희찬은 어어 하다가 상호를 잡지 못하고 잘 가라는 어색한 인사로 배웅했다. 상호는 돌아보지 않고 머리통만 까딱였다. 두 사람은 어떤 뉘앙스를 느꼈던 감정에 대해 내색하지 않았다. 다만 다시 만날 때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

 

그 뒤로 상호는 희찬에게 먼저 연락하지 않았다. 희찬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지상고 동창회라던지 대학 연합 훈련 덕분에 아주 연이 끊기지는 않았다. 가는 길목에서 우연히 마주치면 반갑게 서로의 이름을 부르고 요즘은 어떤지만 묻는, 예전만큼 친하진 않는 친구 사이처럼. 상호는 그걸로 충분하다 되뇌었다. 괜히 고백했다가 친구도 못 되는 건 너무 싫었다.

 

생일이나 기념일 같은 날 서로가 궁금해지면 인스타그램을 찾았다. 희찬의 인스타 스토리에는 농구화나 과제, 훈련 이야기로 가득했다. 종종 가지던 동아리 모임도 주전 딱지를 달고나선 조금씩 줄이고 있는지 후배들이 희찬 선배 언제 오실 거냐며 덧글로 이루어진 눈물이 줄을 세웠다. 인스타를 메시지 어플로만 쓰던 상호는 한 달에 한 번은 꼭 자신의 근황을 올렸다. 과제가 너무 힘들다. 오랜만에 본가에 갔다 왔다. 혹은 친한 형이랑 놀다 왔다 같은 일상이었다. 희찬은 매번 상호의 스토리에 하트를 눌렀지만 덧글을 쓰지 않았다.

 

떨어질 때부터 불안하게 칵하는 소리가 났다. 가방을 앞으로 메고 전공 서적을 넣다가 생긴 사고였다.

 

“앗.”

 

상호는 떨어뜨린 휴대폰을 주웠다. 상호는 설마설마하는 마음으로 천천히 휴대폰을 돌려 액정을 보았다. 액정은 산산조각 나 있었다. 조졌다…. 상호는 휴대폰의 전원 버튼을 눌렀다. 화면은 보이지만 터치하기가 무서웠다. 잔 실금도 아니고 누가 돌로 찍어놓은 것마냥 박살이 나 있어 유리가 손가락에 박힐 것 같았다. 상호는 휴지로 액정을 조심조심 털었다. 옆에서 참사를 본 동기가 물었다. 상호야. 너 폰 어떡하냐.

 

상호는 한숨을 쉬었다. 수리 맡겨야지. 요즘은 2년마다 휴대폰을 바꾸는 시대라지만 상호는 굳이 그러고 싶지 않았다. 수능 할인으로 희찬과 같은 색, 같은 기종으로 바꿨던 폰이었다. 그때는 나름 최신형에 라인도 S라 비싸게 주고 샀었는데.

 

상호는 일과가 끝나자마자 삼성 서비스 센터로 달려갔다. 수리기사는 상호의 휴대폰을 분해해서 확인한 뒤 심각한 얼굴로 당부했다.

 

“수리할 수는 있는데 교체할 부품이 많아서 차라리 새로 사시는 게 더 금액이 덜 나갈 거예요”

“아,...그럼 그냥 주세요.”

 

상호는 휴대폰 홈 버튼을 눌렀다. 액정이 깜빡이며 잠금화면을 보여주었다. 20살 일몰을 보러 갔을 때 찍었던 둘의 셀카 사진이었다. 액정에는 흰 선이 나타나며 희찬의 얼굴을 가렸다. 바꿀 때까지 최대한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스카치테이프로 이리저리 붙였다. 상호는 손가락으로 흉한 휴대폰 액정을 밀어 패턴을 입력했다. 화면이 바뀐다고 흰 선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상호는 아쉬운 얼굴로 휴대폰을 넣었다.

 

돈 없는 대학생은 새 폰을 S 시리즈로 바꿀만한 여력이 없었다. 결국 인터넷에서 싼 중고폰을 샀다. 예전 핸드폰은 버리지 않고 기숙사 서랍에 고이 넣었다. 병두유를 버리지 않고 보관한 것처럼.

 

*

 

드디어 주전으로 뛰게 된 3학년과 4학년은 대체 어떤 생각으로 보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순식간에 지나갔다. 오히려 주전이라 하루하루 남 신경 쓸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내년이 되면 시간이 나겠지하고 낙관적으로 대했는데 정작 대학교 전 학년을 보내보니 자유시간은 허상에 가까웠다. 동기들은 동아리도 가고 연애도 하고 CC까지 하는 놈도 있던데 왜 내는 그런 청춘을 못 즐기고 뽈만 돌리고 앉아있냐. 상호는 번아웃이 올 것만 같은 무기력함에 체육관 바닥에 널브러졌다. 근처에서 슛을 연습하던 형이 상호에게 다가갔다. 상호야.

 

“네?”

“너 소개팅 할 생각 없어?”

“소개팅요? 아뇨?”

 

상호는 눈을 크게 껌뻑이면서 삑사리에 가까운 소리로 거절했다. 소개팅을 권한 형은 바람 빠진 얼굴로 다시 한번 설득했다.

 

“친구가 너처럼 키 크고 싸나운 남자애가 취향이라던데 한 번 만나봐. 형 너랑 4년 내내 농구하면서 너 여자친구 사귀는 꼴 못 봤다.”

“아니, 시간도 없고 돈도 없는데 어떡해요. 그럼.”

“하여간에 특이한 놈이라니까. 알았다.”

 

형은 툴툴대며 다시 슛 연습을 하러 갔다. 상호는 말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청춘을 못 즐기는 건 나였구나…! 키 190대의 몸 좋고 잘생긴 청년이 여친 없이 서성서성 거리는 건 내가 노력하지 않아서 그런 거구나. 여태 찐따짓을 자주 해서 그렇지 상호는 수요가 있는 사람이었다. 이제 와서 소개팅을 받겠다고 하기엔 상호는 상대방을 실망하게 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혀 차는 소리를 낸 상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드리블 연습을 시작했다. 마지막 대학농구리그를 잘 보내야 프로에 무사히 입성할 수 있다. 상호는 진지한 얼굴로 훈련에 임했다.

 

대학농구리그의 우승은 주익대가 가져갔다. 2연승이었다. 희찬이 있던 준향대는 아쉽게도 4강에서 떨어졌다. 상호는 팀메이트와 함께 우승 트로피를 들었다. 관중들의 환호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벅차오르는 감동의 물결이 상호를 온통 휩쓸었다. 관중석에는 프로로 한창 활동 중인 재유가 보였다. 재유는 박수를 빠르게 치며 상호가 만든 유종의 미를 축하했다.

 

*

 

프로 드래프트도 무사히 마친 올 9월. 상호와 희찬 둘 다 구단은 다르지만 프로 선수가 되었다. 4학년 2학기는 졸업반과 프로가 된 학생들을 배려해서 수업도 극단적으로 적었다. 상호는 이제야 휴식을 즐기며 구단과 학교를 오갔다.

 

그동안 상호는 못다 한 여가를…. 취할 수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겨울방학이 시작되면 기숙사를 나가야 했다. 상호는 신인계약금과 집에서 모아두었던 저금으로 구단 근처 자취방을 잡았다. 자취방 계약은 부모님이 도와주셨다. LH 주택공사나 서울시 청년 월세 지원이라던지 이런저런 복지 신청이 어려워 많이 헤맸지만 부모님은 노련하게도 상호의 사회초년생 연수익과 무연고자 가산점으로 최대한 품을 적게 들이고 좋은 집을 족집게처럼 찾아냈다. 상호는 7평 원룸 한 가운데에 누워서 영혼 털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서울 집값 엄청나네….

 

그래도 처음으로 자취하게 되어 신이 난 상호는 제 딴에 열심히 집을 꾸몄다. 색 감각이 좋은 편은 아니라서 집 안은 흰색과 베이지색투성이였지만 그래도 통일감이 있어 깔끔했다. 상호는 개상호 얼굴로 뿌듯하게 자신의 집을 둘러보았다. 자취 최고다! 상호는 소리 없이 만세를 했다.

 

연말이 돌아오자 상호는 술자리부터 파티에 불려 나갔다. 상호 말고도 다른 사람들도 자취를 시작했고 프로든 취직이든 어딘가 들어가고 했으니 어떤 약속이라도 핑계를 대어 빠질 순 없었다. 상호는 처음으로 술로 숙취를 푸는 경험을 했다. 술 도미노 행사가 끝난 건 비로소 해가 지나고 나서부터였다.

 

상호와 희찬이 약속을 잡은 것도 그쯤이었다. 상호는 상에 맥주캔과 치킨을 세팅하면서 달달 떨리는 허벅지를 주먹으로 두드렸다. 둘이서만 만나기로 한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체감상 2년은 넘은 것 같다. 상호는 휴대폰을 뒤집고 덮고를 반복했다. 원래 상호의 집들이는 희찬 뿐만 아니라 지상고 햄들도 다 함께였는데 어쩌다 보니 희찬만 오게 되었다. 태성은 은재와 해외여행. 다은은 동생이 갑자기 아파서 김해로. 준수와 재유는 시즌이라 아예 불가능이었다. 안락한 냉장고에서 나온 맥주캔은 겉면에 물기를 맺었다. 물기가 물방울이 되고 바닥으로 추락할 때쯤 초인종이 울렸다. 상호는 벌떡 일어나 현관문을 열었다. 왔나 희차이. 긴장한 것 치곤 담담한 목소리였다. 희찬은 집들이 선물로 사 온 두루마리 휴지를 들고 씩 웃었다. 오랜만이다. 쌍호!

 

무던했던 반응 치고 상호와 희찬은 고등학생 때처럼 앉아서 치킨을 뜯고 맥주를 마셨다. 둘 다 인스타 상으로 맞팔인 데다 동종업계인으로서 귀를 닫고 있으려고 해도 들을 수 밖에 없었다. 서로의 일은 잘 아는 듯하면서도 내막은 잘 몰랐기에 제법 어색하지 않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종수햄 느바 갔다 온 뒤로 넘사 돼버렸다. 병찬햄 요번에 국대 선발됐다. 내 창현햄이랑 같은 구단이다. 준수햄이랑 재유햄은 구단 겹쳐서 별명이 재결합이라더라 같은 주변인들 소식도 있었다.

 

맥주캔을 들고 서로를 삿대질하면서 낄낄거리자 상호는 미묘한 기분을 느꼈다. 상호와 희찬은 여전히 친구인데도 친구가 아닌 타인처럼 느껴졌다. 상호는 단지 낯섦이라 여겼다.

 

“희차이 요새 여친 안 사귀나.”

“몇 번 썸은 탔었는데 잘 안됐다.”

“혹시 민지 씨를 아직도…?”

“미친! 언제 적이고. 내 마음 확실하게 떴다!”

 

희찬은 전 여자친구의 이름이 나오자 학을 뗐다. 헤어질 때는 온갖 염병을 떨었으면서 홍역을 치르고 나니 이성이 돌아온 모습이다. 희찬은 다 마신 캔을 상 위에 올렸다. 입맛이 달아난 얼굴이었다. 희찬은 단호하게 상호의 말을 정정했다.

 

“그냥…. 한 번 연애하고 나니까 환상이 다 깨져서 그런 것 같다. 남녀 사이도 크게 보면 인간관계인데 내가 너무 쉽게 봤다.”

“난 적어도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니 억수로 좋아하지 않았나.”

“오~ 쌍호. 대학교 졸업하더니 사회성이 진화했구만.”

 

희찬은 상호의 머리를 북북 쓰다듬었다. 상호는 희찬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상호는 눈을 못마땅하게 떴다. 희찬은 상호가 연애를 하지 않은 게 더 이상하단 듯이 말했다. 희찬도 학창시절 주위에서 상호에게 미팅을 받아보라 찔러대던 걸 보았었다. 희찬은 상호에게 왜 여자친구를 만들지 않는지 물었다. 이유가 이상해도 뭐라고 하지 않겠다며 상호를 달랬다. 상호는 풀린 발음으로 웅얼거리며 설명했다.

 

“이 상황에서 사귀면 상대방한테 실례인 것 같아서 뭐 해보자고 시도도 못하겠다.”

“상황?? 아, 바쁜 거 때문에?”

“그런 것도 있고. 아무튼 그렇다.”

“글나.”

 

두 사람의 대화는 맥없이 끊기고 말았다. 상호와 희찬은 다 비운 캔들과 치킨 포장지를 치웠다.

 

상호는 희찬이 온 김에 재워주기로 했다. 시간은 벌써 자정이 지나 있었고 서울의 택시비 할증료는 무서울 정도로 비쌌다. 상호는 침대 옆에 이부자리를 깔았다. 희찬은 화장실에서 샤워를 하고 있었다. 상호는 침대 위에 앉아 오늘이 별일 없이 지나가기를 빌었다. 머리를 탈탈 털고 나온 희찬은 잠옷 대용으로 지상고 체육복을 입고 나왔다. 뒷머리를 짧게 유지하고 있던 터라 고등학생 때 모습이 오버랩 되었다. 희찬은 욕실 잘 썼다며 빨리 씻으라고 상호를 보냈다. 상호는 취기가 도는 얼굴로 화장실에 들어갔다. 상호는 양손으로 세면대를 받치고 서다가 샤워기를 들었다. 뜨거운 물로 씻고 나면 술기운도 다 사라질 것이다.

 

화장실에서 나오니 희찬은 침대에 기대 앉아서 휴대폰을 하고 있었다. 방 안의 등은 모두 꺼져있었고 침대 선반에 올려둔 수면등만 어스름하게 주변을 비추었다. 상호는 침대에 누우면서 아이고 소리를 내었다. 상호는 휴대폰에 꽂힌 충전 중 표시를 확인한 뒤 엎었다.

 

“희차이 내 알람 꺼놨는데 니 일찍 일어나야 할 일 있나.”

“아니. 난 없다. 너는?”

“나도.”

 

희찬도 휴대폰에 충전기를 꽂고 누웠다. 희찬도 긴장 풀리는 소리를 내며 이불을 덮었다. 상호는 희찬 쪽으로 돌아누웠고 희찬은 정자세로 누웠다. 침대 머리 쪽엔 긴 창이 나 있어 은은한 달빛이 두 사람의 얼굴을 비추었다. 주택가라 그런지 창문을 뚫고 나오는 소음 하나 없이 집 안은 고요했다. 상호는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잘 자라. 어, 너도. 희찬도 잠결에 대답을 했다.

 

*

 

침대의 전기장판과 방의 온돌은 열심히 돌아가는데 이사를 오면서 정작 가습기를 사놓는 걸 깜빡했다. 상호는 목이 버썩 말랐다. 오죽하면 꿈에서 사막에 조난 당하고 모래 다이빙까지 했다. 상호는 잘 떠지지 않는 눈에 힘을 주어 번쩍 잠에서 깼다. 죽어가는 선인장처럼 물,..물을 중얼거리며 침대에서 나와 비척비척 주방으로 걸어갔다. 두어 번 찬물을 원샷하고 나서야 상호는 침대로 돌아와 누웠다. 상호는 잠을 청했지만 목마름에 바짝 달아나버려서 그런가 쓸데없는 뒤척임만 늘었다. 상호는 건조함으로 머리통까지 띵해 오자 결국 일어나 앉았다. 옆에는 희찬이 곤히 색색거리는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상호는 때깔 좋아 보이는 희찬의 얼굴을 보다 괜히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다. 내가 누구 때문에 모솔을 유지하고 있는데. 근거 없는 잘잘못을 희찬에게 넘기며 속풀이를 꾹꾹 담았다. 상호는 길게 숨을 쉬었다. 새벽 한복판에서 상호는 자는 희찬에게 못다 한 말을 했다.

 

“...희차이 자나. 우리 어색해질까 봐 내 여태 말 못한 게 하나 있다.

니나 나나 낯간지러운 말은 안맞는다아이가. 그 핑계 대가꼬 일부러 피했었는데.

피하는 게 능사는 아니었는갑다. 몇 년이 지나도 일케 후회하니까.

고등학교 때부터 니 좋아했었다. 친구 말고, 연애 상대로.”

 

희찬은 잠버릇 하나 없었다. 상호는 괸 턱을 풀고 다시 누웠다.

 

....가오 상하게 이게 뭐 하는 짓이고.

 

자는 사람한테 하는 고백은 멋이 하나도 없었다. 상호는 이게 바로 새벽 감성인가 하…. 별거 없다. 라고 꼴값을 떨었다. 정작 희찬은 상호가 침대를 뒤척거릴 때 깨서 그 말을 고스란히 다 듣고 있었는데. 희찬은 스르르 일어나서 상호의 팔을 붙잡았다. 상호는 제 팔이 잡히자 꽤액 소리를 질렀다. 으아악!!

 

“뭐뭐뭐뭐뭐꼬!! 희차이 깨 있었나!”

 

심장이 미친 듯이 두방망이질 쳤다. 암순응이 끝난 시야는 희찬의 얼굴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상체를 일으킨 희찬은 동그랗게 뜬 눈과 꾹 다문 입으로 쏘아붙였다.

 

“니 물 마시고 올 때 잠깐 깼다. 근데 쌍호 나 좋아하고 있었나!”

“지지지금은 아이다.”

“아이기는 무신. 아니었음 자는 사람한테 고백 안 했겠지.”

 

희찬은 상호가 수습하기도 전에 미친 듯이 쏘아붙였다. 그래서 먼저 연락 안 한 거냐부터 시작해 왜 표현하지 않았는지, 마지막에는 자기가 여자친구 사귀고 헤어진 것까지 보면서 괴롭진 않았냐며 울분인가 몰아치는 억울함인가 엇갈리는 소리를 쏟아냈다. 희찬은 이제야 안 것이 서러운 사람마냥 침대에 손을 짚고 무릎을 세워 상호에게 다가갔다. 상호는 희찬이 가까이 가면 갈 수록 뒤로 물러나다 벽에 막히고 나서야 거칠게 숨을 내쉬며 팔로 제 얼굴을 가렸다. 상호는 기어가는 목소리로 애원했다.

 

“그, 그만해라 희차이. 제발….”

“....미안하다. 내가 자다 깨서 정신이 없었다.”

“괜찮다.”

 

상호는 기죽은 얼굴이었다. 희찬은 침대 중앙까지 올라갔던 다리를 움직여 침대에 걸터앉았다. 희찬은 마른세수를 했다. 둘 사이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희찬은 머뭇거렸다. 친구의 독백 같은 고백과 편두통처럼 치고 올라오는 숙취가 꿈 같았다. 상호는 망했다는 직감에 눈부터 비볐다. 희찬은 목을 가다듬은 뒤 차분히 물었다.

 

 

“니 그래서 어케하고 싶은데.”

“모르겠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가.”

 

희찬은 어이없어했다. 상호는 희찬의 반응에 의아함을 두서없이 드러냈다. 그러면 희차이 니는 왜 이렇게 흥분했는데. 크게 당황하긴 했지만 상호는 관찰력이 좋고 머리 돌아가는 속도도 빠른 편이었다. 희찬이 상호를 단 하나의 사심 없이 친구로만 바라보았다면 모르겠다는 말에 반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희찬은 상호가 무슨 생각을 하던 주절거렸다. 말이 주절거린다지 횡설수설에 가까웠다. 나는 네가 편해지려고 밤중에 고백한 게 싫고 그 마음이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고등학생 때부터라면 최소 4년은 품고 다닌 마음일 테니 너를 그만큼 속앓이 시킨 게 미안하고 근데 이 마음을 끝까지 티 내지 않고 지금에 와서야 고백한 게 섭섭하고 아무튼 결론은.

 

희찬은 숙취와 졸음으로 브레이크 없이 내면을 드러냈다. 상호는 희찬의 말에 이거 사실 되는 주식이었나? 하고 아리송했다. 상호는 희찬의 말을 끊고 대뜸 물었다.

 

“모르니까 하는 말인디. 닌 왜 그렇게 열을 내는데.”

 

상호는 상대의 약점을 찌를 줄 알았다. 정곡을 찔린 희찬은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상호의 무릎을 제 손으로 감싸 덮었다. 희찬은 상호를 정확히 마주 보았다. 상호는 침을 삼켰다. 망막에 반사된 희찬의 얼굴에는 상대방에 대한 혐오나 친구의 몰랐던 일면에 대한 거부감은 없었다. 같은 속도로 두근거리는 심장을 붙잡은 새로운 관계의 지평선이었다. 동일한 원색으로 덮인 그림자였다. 달이 사라진 새벽의 밤에서 희찬은 좀 더 가까이 앉았다.

 

“좋아하니까 그런다. 니 얘기 듣고 나니까 이제 알겠다. 내는 쌍호, 니 좋아한다.”

 

상호는 자기가 꿈을 꾸고 있는가 분간이 안 가 손을 들어 제 뺨을 때렸다. 희찬이 놀라 상호의 손을 잡았다. 희찬이 기겁했다. 미쳤나 기상호! 상호는 붉게 부은 얼굴로 혼이 나간 소리를 했다. 꿈 아이네…. 희찬은 불을 찾았다. 마찰음이 컸던데다 상호가 헛소리까지 하자 애가 단단히 잘못된 듯한 직감이 들었다.

 

밝은 백열등이 눈을 덮치자 두 사람 다 얼굴을 찡그리며 좀비처럼 신음했다. 빛에 천천히 익숙해 질쯤에야 희찬은 상호의 볼을 살폈다. 상호의 볼은 다행히 조금 부었을 뿐 멍이 들거나 할 정도는 아니었다. 상호는 얼떨떨한 심정으로 희찬의 걱정을 받았다. 희찬은 손등으로 상호의 볼을 눌렀다. 다음부턴 그러지 말라는 부탁과 함께였다. 상호는 불이 차게 눌린 채 이다음은 어떻게 되는지 물었다.

 

“근데 이 뒤는 어떻게 되는 건데. 그대로 사귀면 끝인 거가.”

“상호…. 갈 길이 멀다.”

 

희찬은 깊은 고구마를 느꼈다. 상호는 진심으로 궁금한 눈치였다. 그도 희찬의 반응을 보고 이게 아니다 싶었는지 변명을 하기 시작했다.

 

“아니, 우리가 한두 번 봤던 사이도 아니고 막 드라마에서 나오는 것처럼 오늘부터 1일 외치는 것도 아니고….”

“....”

“사귄다고 해서 우리 사이가 바뀔 것 같지도 않고 내는 너무 오래전부터 좋아해서 그런가 사귀고 만지고 그런 게 와닿지가 않는다….”

“....”

“....희차이 내 무섭다 말이라도 해도.”

 

상호는 울먹였다. 말 없는 희찬이 무슨 반응을 할 지 몰라서였다. 정작 상호의 변명을 듣던 희찬은 이 관계가 어떤 어려움을 가졌는지 고뇌하느라 조용했다. 상호는 너무 오랫동안 좋아했고 희찬은 이제야 상호에 대한 마음을 자각했다. 사랑 앞에서 두 사람은 코끼리 코로 너무 길게 돈 나머지 연애 세포의 반고리기관이 심각하게 망가졌다. 비상이다. 이대로 어영부영하다가 희찬과 상호는 ‘상상하던 만큼 좋지는 않더라 연애ㅎ 사랑은 역시 어려워~’라는 꼴값 레전드. 연알못이면서 연잘알인척하기. 이 모습을 본다면 누구나 중얼거렸을 지X염X 한다…. 의 단계로 발전할 게 뻔했다. 상호가 사고 친 강아지처럼 발발 떨기 시작하자 희찬은 결심을 했다.

 

“상호 그러면.”

“그러면?”

“데이트를 해보자. 손도 잡고.”

 

상호는 희찬의 말에 콜럼버스가 세운 달걀을 본 선원처럼 깨달았다. 희찬은 냅다 지르기를 선택했다. 니 언제부터 시간 되는데. 우리 둘 다 지금은 시즌 중이니까 바로 만나기는 힘들 거고. 상호와 희찬 모두 데이트할 여유를 내려면 2달 뒤인 3월 말이 되어야 했다. 시기가 좋지 않았다. 마음이 괜히 급해졌다. 그래도 양 손뼉이 있으니 박수가 시원하게 났다. 데이트 약속은 순식간에 잡혔다. 얼레벌레 약속과 함께 상호와 희찬은 일단(?) 사귀게 되었다. 엄청난 사건을 겪고도 두 사람은 호들갑 없이 불을 끄고 누웠다. 깨어있기엔 한참 이른 시간이었던데다 두 사람 다 졸음과 숙취가 심했다. 방 안이 어두워지자 상호는 뒤척이려는 움직임을 최대한 줄였고 희찬은 숨소리를 최대한 조용히 쉬었다. 후폭풍이 다가왔다. 가슴이 쿵쿵거렸다. 두 사람이 다시 잠들기까지 한참 걸렸다.

 

*

 

그날 이후로 희찬과 상호는 디데이 어플을 깔았다.

 

*

 

플레이오프가 남아있긴 하지만 둘 다 신인으로선 괜찮은 결과를 내며 이번 시즌을 마쳤다. 상호는 데이트 약속을 하루 앞두고 혼란스러움을 삭혔다. 데이트에 가면…. 뭘 해야 하는 거지? 모태솔로 상호에겐 난제 중의 난제였다. 계획 자체는 짜여있긴 했다. 카페 가고 식당가고 영화 보고 헤어지기. 전형적인 데이트 루트였다. 그러나 상호는 거기에서 언제 손을 잡고 무슨 이야기를 하고 호칭은 또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했다. 주변에서 본 커플들은 서로를 자기야, 여보야라고 부르고 길거리에서 팔짱을 끼고 사랑한다 좋아한다 같은 낯간지러운 고백을 하던데. 정착 희찬과 그런 일을 하게 된다니 조금….

 

깬다고 해야 할까….

 

상호와 희찬은 연인이기 이전에 친구니까. 당연한 이야기였다. 변화하는 과도기 앞에서 상호와 희찬은 일생일대의 모험을 하고 있었다. 상호는 눈을 감고 억지로 잠을 청했다. 잠을 설쳤다가 약속 시각에 꾸벅꾸벅 조는 비매너는 저지르고 싶지 않았다.

 

상호는 제법 멀끔한 차림으로 카페에서 희찬을 기다렸다. 약속 시각까지 10분은 남아있는데도 기대가 상호의 발을 채찍질했기 때문이었다. 매일 카톡으로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고 사진도 나누고 했지만 실제로 보는 건 달랐다. 떨리는 손으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커피의 쓴 맛이 입을 감돌았다. 카페인이 들어오자 정신에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쌍호. 일찍 와있었네.”

“어, 희차이!”

 

희찬은 상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상호는 희찬을 반겼다. 전화 상으로 자주 대화한 것 치고 두 사람은 낯설은 인사를 나누었다. 희찬은 자기도 마실 걸 주문하고 오겠다며 상호가 말을 더 하기도 전에 카운터로 가버렸다. 상호는 어깨를 덮었던 희찬의 손을 잡으려다 사라져서 민망해진 제 손을 최대한 자연스럽게 내렸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고 금방 돌아온 희찬은 상호의 맞은 편에 앉았다. 두 사람은 드물게도 입을 열지 않았다. 카페 안의 잔잔한 음악 소리만 들렸다. 이제 봄이라고 사랑 이야기 가득한데 상호와 희찬의 사이는 침묵만 가득했다.

 

고민하다가 꺼낸 이야깃거리는 결국 자신이 속하게 된 구단 이야기와 주변 지인들의 소식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가 아는 선에서 두서없는 대화를 나누었다. 아시안 게임 선발이라던가, 이직, 업종 변경 같은 현실적인 장래까지. 상호는 말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게 아닌데 하는 괴리가 느껴졌다. 상호가 테이블에 올린 손을 꼼지락 거리자 희찬은 상호의 손을 제 손으로 덮었다. 상호는 머리가 삐쭉 서는 경험을 했다. 상호는 머뭇거리다가 제 손을 뒤집어 희찬의 손을 맞잡았다가 손을 뺐다. 희찬은 상호의 인색한 반응에 아쉬워하면서도 구태여 지적하지 않았다.

 

두어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상호와 희찬은 분위기 좋은 양식집에서 식사를 했다. 테이블 주변에는 온통 커플 뿐이었다. 상호와 희찬은 옆 테이블 커플의 자기야 아앙~이나 우리 애기 이것만 먹어서 오또케 같은 닭살의 현장을 직관했다. 두 사람도 연인인데 염장질을 보니 가슴이 차게 짜졌다. 두 사람은 빠르게 음식을 비우고 나왔다. 저 안에서 뭉그적대고 싶지 않았다. 쌍도남의 영혼이 비명을 질렀다.

 

예정보다 일찍 나온 탓인가 영화 상영 시간까지 붕 뜨게 되었다. 상호와 희찬은 영화관 안에서 시계를 멀뚱히 쳐다보았다. 희찬은 영화관 한쪽에 세워진 인생 네컷 부스를 보곤 상호의 팔을 잡고 이끌었다.

 

“우리 폰으로만 찍었지 저기서 찍은 적은 없지 않나.”

“맞다. 다은햄이랑 한 번 해봤는데 괜찮더라.”

“오~ 상호 연애 점수 5점 감점.”

 

부스 현수막을 들추고 들어가자 내부가 꽉 찼다. 멀대같은 남자 둘에겐 좁은 공간이었다. 어깨가 딱 붙었다. 상호는 지폐를 기계에 넣었다. 기계는 아기자기한 효과음을 냈다. 상호와 희찬은 카메라 앞에서 쭈뼛거렸다. 기계 내부는 후덥지근했다.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는 착각이 들었다. 하트를 만드네, 어깨동무를 하네. 둘 다 없는 모델 감각에 어떻게든 아이디어를 쥐어 짜냈다. 상호는 희찬에게 여친이랑은 어떻게 했는데라고 물어보려다가 말았다. 전 애인이랑 했던 추억을 물어보는 건 에바였다. 상호가 의식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희찬의 팔이 자꾸 부스 벽에 부닥쳤다. 쇠철이 둔탁하게 울렸다.

 

“아, 희차이 안 아프나.”

“난 괜찮다. 부스가 좁네.”

 

셔터의 카운트다운은 점점 줄어만 가는데 이대로면 4000원을 그대로 날리겠다 싶어 희찬은 상호의 허리를 양손으로 붙잡았다. 몸이 밀착되었다. 상호는 기습적으로 튀어나온 딸꾹질에 숨을 참았다. 상호는 희찬의 어깨에 제 팔을 감았다. 차마 희찬의 어깨를 잡을 자신은 없어 애꿎은 제 주먹만 핏줄이 설 정도로 쥐었다. 상호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볼이 빵빵해졌다. 희찬은 화면에 나온 상호와 자신의 얼굴이 꽤 우습다고 생각했다. 몸은 상호 쪽으로 틀려있고 얼굴만 카메라를 향했다. 희찬의 갈색 머리카락이 상호의 볼을 가렸다. 희찬의 한쪽 눈가가 경련으로 떨렸다. 희찬은 웃고 있지만 입꼬리가 굳어서 그런가 썩소인지 고장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셔터음이 들리자 상호와 희찬은 떨어졌다. 둘 다 얼굴이 빨갰다. 다시 기계에서 카운트다운을 셌다. 방금 전처럼 부담스러운 포즈를 또 할 수는 없어 두 사람은 예전에 하던 것처럼 어깨동무하고 브이 자를 했다. 이다음은 긴장이 풀렸는지 손 하트를 만들었다. 상호는 희찬과 합동해서 손 하트를 만들었다는 데에 감격했는지 카메라를 보지 못했다. 셔터음이 들리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화면을 봤지만 시선 처리는 망한 뒤였다. 희찬이 화면을 보며 어이없는 웃음을 날렸다. 놀림 투가 강한 희찬의 반응에 상호는 뚱한 얼굴로 불만을 피력했다. 마지막은 희찬과 상호가 손깍지를 낀 손을 든 사진이었다. 깍지 끼고 잡은 손을 삿대질하며 입을 벌린 상호, 남은 한 손으로는 따봉을 날리며 이를 드러내고 웃는 희찬. 두 사람의 첫 인생네컷은 그렇게 완성되었다. 두 사람은 터치스크린 앞에서 필터를 고르고 장수도 선택했다.

 

기계에서 프린터기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사진은 금방 나왔다. 막 따끈하게 인화된 사진을 손에 든 희찬은 현타를 느꼈다. 데이트라고 못 박고 나온 약속인데 내내 친구 같은 무드라니. 인화된 두 사람의 모습은 어느 모로 보나 사귀는 컨셉의 우정 사진이었고 심지어 예매한 영화는 액션영화였다. 상호가 실망하면 어쩌지, 희찬은 여태 상호가 말해왔던 모르겠다, 실감이 안 난다 했던 관계의 반응을 상기했다. 희찬이 본 상호의 상태는 탈진에 가까웠다. 혼자 오랫동안 품고 있는 감정이 돌처럼 가라앉기 전에 다시 불붙여야 했다.

 

희찬이 초조해하거나 말거나 상호는 제 손에 들린 사진을 보다가 배시시 웃었다. 볼 위에 홍조가 앉았다.

 

“이거 재밌다. 희차이.”

“그렇나. 상호 너 좋다면 됐다.”

 

희찬은 자신의 뇌리에 깊게 박힌 상호의 미소에 안심했다. 아주 실패한 건 아니었다. 희찬은 내친김에 상영관에서 상호의 손을 맞잡은 채로 영화를 보았다. 비록 그 영화에 나온 커플은 개같이 헤어져서 서로에게 총을 겨누고 주인공은 혼자가 최고야를 부르짖으며 폭발씬으로 엔딩크레딧을 장식했어도. 영화 밖의 두 사람은 커플이니까.

 

*

 

“상호 니는 나 만지는 상상했던 적 없나.”

“아니. 많은데.”

 

상호는 희찬의 옆에서 예능을 보다 말고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화면 속에선 연예인이 밤낚시를 하고 있었다. 상호와 희찬은 커플 잠옷을 입고 있었다. 희찬의 자취방은 상호의 집과 다를 것 없었다. 원룸이고 침대가 있는. 침대 위에 앉아 벽을 등받이 삼아 기대고 침대 옆에 협탁처럼 놓아둔 작은 책상에는 노트북이 TV 역할을 대신했다. 몸을 붙여 앉은 터라 상호의 팔과 옆구리에는 희찬의 체온이 느껴졌다. 새로 산 긴 팔 파자마에 주름이 졌다. 상호는 희찬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희찬은 고개를 틀지 않았다. 고개를 틀면 상호의 얼굴이 너무 가까울 것 같아서였다. 노트북 스피커가 시끄럽게 효과음을 내었지만 둘 다 집중하고 있지 않았다.

 

“근데 왜 이렇게 건조하냐. 손도 내가 먼저 잡고 포옹도 내가 먼저 하고.”

“지금 사귀고 있는 거로도 충분한디….”

 

상호는 시무룩한 투로 말했다. 상호는 늘 희찬의 앞에서는 강아지처럼 치대었다. 몸이 아니라, 말로. 희찬은 상체를 움직여 상호를 향해 무게를 실었다. 상호는 무게가 실리는 대로 몸을 기울였다. 완전히 침대에 엎어지기 전에 상호는 팔꿈치로 침대 바닥을 짚어 제 몸을 받쳤다. 희찬은 바깥쪽 손으로 침대를 짚었다. 상호는 깔리기 직전이 되어서야 희찬을 불렀다. 희차이 무겁다. 상호 니는 그게 남친한테 할 소리가. 희찬은 상호에게 볼멘소리를 냈다. 상호는 희찬의 눈을 피했다.

 

“말하면 징그럽다고 할 것 같다. 니는 또 남자 만나는 거 처음이고.”

“그래? 그럼 내부터 말할게. 난 니랑 키스하는 꿈 꿔본 적 있다.”

 

희찬은 자세를 바꾸어 덮치듯이 엎드렸다. 천장 등이 희찬의 뒤로 숨었다. 상호가 희찬의 그림자에 완전히 가려졌다. 상호는 희찬의 잠옷 아랫단을 붙잡았다. 희찬은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목소리가 떨고 있었다. 예능은 안중에도 없었다. 연예인이 대어를 잡든 말든 희찬은 핑글핑글 도는 눈으로 상호가 뭐라고 할지 반응을 기다렸다.

 

참고로 희찬이 상호와 키스하는 꿈을 꾼 건 첫 데이트를 완수한 날 밤이었다.

 

“뭐꼬, 희차이 갑자기 두근거린다!”

“상호 니는 갈 길이 멀다….”

 

상호는 첫사랑을 마주한 소녀처럼 양손으로 제 하관을 가렸다. 동그랗게 뜬 눈이라던가 얼굴에 난 빗금이라던가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건 맞는데 연애한다는 상황을 즐기고 있는 건지 희찬의 대시를 즐기고 있는 건지. 희찬은 빛이 조금 사라진 동공으로 허망하게 충고했다. 키스 각이 잡히려다 연기처럼 사라지자 맥이 빠진 희찬은 무릎을 꿇고 앉았다. 상호도 손을 짚고 일어나 앉았다. 상호는 희찬의 질문에 진지하게 대답하려는 제 뒤통수를 긁적였다. 희찬이 먼저 드러내어준 덕이었다.

 

“구체적으로 상상한 건 키스가 다다.”

“언젠데!”

 

상호는 희찬이 여자친구랑 헤어졌다고 엉엉 울던 날을 회상했다. 희찬이 상호와 사귀었을 거라고 장담하지 않았더라면, 아니 희찬이 상호의 손목을 잡지 않았더라면 상호는 자기감정 주체 못 하고 입술을 부볐을거다. 상호는 그러지 않아서 다행이라며 기억을 덮었다. 희찬은 상호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어지간히 궁금한지 희찬의 목소리가 커졌다. 상호는 눈을 굴리다가 말 한마디를 끝으로 입에 지퍼를 채웠다. 안알랴줌. 마, 기상호! 희찬이 심통을 부리며 상호를 밀쳤다. 상호는 뒤로 넘어가면서 희찬의 멱살을 잡았다. 침대가 출렁였다. 두 사람은 끌어안은 채로 티격태격했다.

 

*

 

디데이 어플이 진동 소리를 냈다. 100일을 앞둔 두 사람은 연인 간의 이벤트인 호캉스를 준비했다. 호텔은 희찬이 준비하고 케이크와 와인은 상호가 샀다. 희찬이 씻고 나올 동안 상호는 파자마 위에 샤워가운을 걸치고 옆으로 드러누웠다. 희찬이 욕실에서 나오자마자 상호가 턱을 치켜들고 어서 와, 라고 반기자 희찬은 바람 터지는 소리를 내며 폭소했다. 여지없이 나온 개그에 깔깔거리다가도 희찬은 눈치 챙기라고 상호를 타박했다. 희찬은 침대 위에 올려둔 파자마를 입었다. 상호는 희찬을 등지고 서서 샤워 가운을 벗어 원래 있던 자리에 돌려놓았다. 희찬이 옷을 다 갈아입고 식탁으로 갔다. 테이블은 상호가 미리 세팅해두었다. 포크 두 개와 케이크 한 판. 케이크 한 판은 둘이서 먹기에 너무 많아 보였지만 체육인인 두 사람에겐 적당한 양이었다. 희찬이 유리잔에 와인을 채웠다.

 

“상호 100일 축하한다.”

“희차이 너도 100일 축하한다.”

 

두 사람이 말하는 폼은 꼭 ‘취직 축하한다.’와 같은 수준의 축사였다. 희찬은 반쯤 해탈했다. 이런 친구 같은 연인관계도 있는 거지. 누군가가 했던 명언이 떠올랐다. 세상에 커플이 50쌍 있다면 사랑하는 방식은 100가지가 있다고. 이런 플라토닉한 사랑도 결국 사랑이다. 희찬은 잔을 부딪친 뒤 와인을 마셨다. 와인의 쓴맛이 입을 맴돌았다. 끝 맛이 셨다. 희찬은 와인이 영 익숙지 않았다. 대학 시절 부어라 마셔라 끼고 다닌 맥주와 소주는 안주 없이 들이부어도 잘 넘어갔는데 와인은 혀가 아려 안주가 꼭 들어가야 했다. 포크로 푸듯이 뜬 케이크를 한입에 먹고 나서야 희찬은 떫어진 입가가 풀린 걸 느꼈다.

 

상호는 와인을 마시지 않고 케이크부터 먹었다. 상호는 술을 잘 즐기지 않았다. 특별한 날이니까 와인을 마셔보자는 희찬의 제안이 아니었다면 케이크만 홀랑 사 왔을 것이다. 상호는 당근 케이크의 단맛에 제 입술을 핥았다. 희찬은 상호의 어깨를 두드렸다. 상호가 희찬을 바라보자 희찬이 호텔 창밖을 가리켰다. 보름달 떴다. 희찬은 순수하게 달 보라고 상호를 불렀다. 바깥에는 도심지의 야경이 별처럼 빛났고 조그만 보름달은 구름 사이로 겨우 고개를 내밀었다. 객실 조명과 빌딩의 불빛이 달빛보다 훤해 하늘이 검푸르지 않았다면 달 없는 날이라 착각할 수준이었다.

 

“날씨 좋네.”

 

희찬은 지나가듯 말했다. 상호는 창밖을 보다 말고 희찬의 얼굴을 관찰했다. 처음으로 사랑에 빠졌던 희찬의 얼굴은 바뀐 것이 없었다. 상호에게 온전히 집중하는 적갈색 눈빛. 일일이 답해주던 행동. 익숙한 존재. 담백한 다정함과…. 투명한 친애. 상호는 제 마음이 이끄는 대로 희찬의 볼에 뽀뽀했다. 쪽 하는 소리가 났다. 희찬은 놀란 얼굴로 상호의 입술이 닿았던 제 볼은 손으로 감쌌다. 상호가 먼저 연인다운 스킨쉽을 한 건 처음이었다. 상호는 희찬이 입을 떼기 전에 다시 몸을 기울였다. 이번에 닿은 건 입술이었다.

 

둘 다 케이크를 먹고 있어서인가 입술에는 생크림 기름기가 느껴졌다. 뜨뜻 미끈한 감촉이 싫지 않았다. 상호는 속으로 3초를 세고 얼굴을 떼었다. 희찬의 얼굴이 곧 터질 토마토로 변했다. 상호는 이 분위기를 깨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는데도 결국 숨을 내뿜었다. 으악 하는 추임새는 덤이었다. 멋없이 웃어 재끼는 상호의 모습에 희찬은 상호의 승모근을 꼬집었다. 아악 희차이 아프다!

 

“쌍호!! 이익…!”

 

사람의 언어를 망각한 희찬은 집게손가락으로 집은 승모근을 놓고 상호의 뒷목과 뒤통수를 양손으로 감쌌다. 상호는 당기는 힘에 포크를 놓고 희찬의 허벅지 위에 손을 얹었다. 몸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입술이 겹쳐졌다. 상호의 눈꺼풀이 부르르 떨리다가 감겼다. 희찬은 애진즉에 눈을 감았다. 드라마에서 나오는 것처럼 살이 요란하게 접 붙는 소리는 나지 않았고 호텔 방은 적막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혀가 들어갔다. 말캉하고 축축한 살덩이에는 알콜 섞인 신내가 났다. 상호가 희찬의 어깨를 그러쥐었다. 손가락이 움찔거리며 진득하게 어깨를 잡고 놓기를 반복했다.

 

희찬의 손이 상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겉으로 보기엔 거친 머리카락은 손 아래서 부드럽게 바스락댔다. 턱이 벌어지다 좁아지기를 한참 반복했다. 입가가 침으로 번들거리고 머릿속이 아찔해지고 나서야 두 사람은 입술을 떼고 상기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얼이 나가 멍청한 얼굴을 한 두 사람은 이마를 맞대고 숨을 가다듬었다. 미친 듯이 상승 곡선을 타고 올라가는 행복에 두 사람은 바보처럼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

 

상호 자는 거 맞제?

…우리 사귀는 동안 설마 니가 마음 접었나 싶어서 불안했었다.

사귀기로 했을 때 니가 생각보다 덤덤해서. 내 고백 승낙해줬을 땐 너무 힘들어서 편해지고 싶은 건가, 정말로 그렇다면 놔줘야지 마음먹고 있었는데.

오히려 놓지 않고 계속 잡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내 첫사랑은 상호가 아니어도 마지막은 상호로 남게 해볼게.

그래야 그동안 니 마음고생 한 거 조금이라도 풀릴 것 같아가 그런다.

 

....부끄럽구마. 자는 사람한테 혼잣말하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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