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365
가비지타임 전영중 드림
대한민국에서 학교를 다닌 게 총 12년. 그중 교복 입던 시절만 꼽자면 6년. 남들 따라 학원 다니고 방학 특강 듣고, 독서실에 다니고, 유명하다는 어느 인터넷 강사의 강의를 들은 시간을 수능이라는 단 하루에 쏟아부었다. 아침에 일어나 청심환 먹고 엄마가 챙겨준 도시락 들고 교실에 들어서기까지 탐구 정리를 훑어보는데 실감이 나지 않았다. 비문학 지문에 뺨을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시간도 남아서 검토하고, 오엠알 마킹 실수한 것도 잘 바꿨고. 수학 시간엔 앞자리 애가 훌쩍이며 울었다. 미치는 줄 알았다. 점심시간이 되어 우리 반 애들끼리 모여 도시락을 먹었다. 칙칙한 파란색 도시락. 밥 한술 떠도 입으로 넘어가는지 코로 넘어가는지 몰랐다. 숟가락으로 된장국을 떠먹는데 차가워서 먹다 말았다. 너무 배를 채우면 졸려서 집중을 못 한다고들 했다.
친구들끼리 초콜릿을 나눴다. 배를 꺼지게 하려고 돌아다니다 보면 중학교 때 친구들도 만나 인사했다. 얼굴이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아, 그냥 교과 넣을 걸. 넌 오늘 최저만 맞추면 되잖아. 걔 준향대 붙었대. 플래카드까지 걸었다잖아. 걔 누구지? 인서울 붙었다는데 그냥 전액장학금 받고 지거국 갔다더라. 쉬는 시간이 아니라, 그냥 딱 시험만 안 보는 시간. 미처 치우지 못한 도시락을 넣으려 급하게 앞으로 나왔다. 다른 애와 부딪혀 바닥에 쿵 소리 나게 떨어뜨렸다. 완전히 뒤집어진 거나 다름없었으나 다행히 국이 쏟아지진 않았다. 그런데 도시락 바닥엔 내 이름이 아니라 다른 사람 이름 세 글자가 보였다.
전영중.
헤어진 지 딱 365일 된 전 남자친구.
그 뒤에 어떻게 문제를 풀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 가채점표에 정답을 쓰지도 않았다.
아마 영어 듣기에서 몇 문제 나간 것 같다.
울면서 시험장을 나왔다.
집에 가서 일단 누웠다. 누우면 그냥 어제로 다시 돌아갈 것 같았다. 눈 감았다가 떠도 그런 일은 없었다. 수고했다는 말을 흘려들었다. 나를 응원한다며 친척들이 보낸 떡에 초콜릿에 뭐 온갖 상술들이 베란다에 쌓인 걸 보니 화가 났다. 다. 수시 넣을 걸. 교과 하나라도 넣어볼 걸. 면접 준비하겠다 할 걸. 이미 지나간 시간을 후회하다 이젠 원망까지 했다. ...전부 전영중 때문이야.
전영중은 중학교 때까지 같은 학교를 다녔다. 아파트도 같은 단지 내에 살았다. 초등학교 땐 그냥 여자애들 놀리고 이상한 만화 주인공 따라 하다가 방과 후엔 농구 하러 가는 애. 여자애들도 전영중 짜증 난다고 구시렁댔다. 나도 그랬다. 앞으로도 계속 그럴 줄 알았다.
중학생이 되어 무릎 아슬아슬하게 오는 치마를 입자 세상이 달라졌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걔는 유치하고 바보 같고 수학 문제도 못 풀고... 하며 욕하던 남자애를, 여자애들은 뭐가 그리 좋은지 졸졸 따라다녔다. 아니 정말 따라다닌 건 아니고. 매일같이 농구만 해서 키가 훌쩍 커 웬만한 3학년 남자 선배들만큼 커진 전영중. 그 당시 여자애들은 얼굴은 잘 보지도 않고 키만 크면 멋있다고 후하게 쳐줬다. 그런데 전영중은 얼굴도 그럭저럭 잘생겨서 사람을 더 끌어들였다. 하도 남들이 멋있다 잘생겼다 하니까 나도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문득 남들이 다 갖고 싶은 남자애랑 사귀게 되면 어떨지 궁금했다. 그래서 그냥 방과 후에 불러서 고백했다. 그리고 사귀게 되었다. 발렌타인데이도, 화이트데이도, 걔 생일도 내 생일도 크리스마스도 아닌 평범한 날에.
전영중과 사귄다고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고 꽃바람이 부는 건 아니었다. 천사들이 축하한다고 나팔을 불지도 않았다. 그냥 남들 사이에서 전영중 여자친구 생겼대, 얘기 좀 돌고. 말 한 번 나눈 적 없는 여자애들이 와서 너 전영중이랑 사귄다는 거 진짜야? 묻고. 남자애 하나 사귀는 것뿐인데 다들 내가 엄청 대단한 애라고 떠받들었다. 초등학교 때만 해도 누구랑 누구 사귄대! 하면 놀리기만 했는데, 중학교가 도대체 뭐라고. 전영중이랑 사귀어서 아주 특별할 것도 없는데. 그냥 우리 사이가 남자친구, 여자친구가 된 것뿐이지.
전영중은 농구부 때문에 잘 만날 수 없었다. 학원 끝나고 저녁 먹기 전에 잠깐 들려서 얼굴 보러 가는 게 다였다. 학교 건물 뒤편으로 손잡고 얘기만 했다. 방학이 되어 시간 나면 영화 보러 가거나 룸카페 만화카페는 갔다. 금방 깨질 것 같았는데 100일 200일 됐다고 어디서 본 건지 인형 가져다주고 사탕 꽃다발을 손에 쥐여줬다. 그리고 진짜 어울리지도 않게 손으로 쓴 편지도. 그런 거까지 다 받고 나니 흠, 이거 꽤 나쁘지 않은데? 하고 생각했다. 나 좋다는 애가 누가 봐도 키 크고 멋진 애라 기분 좋았다.
"정현이 형은 여자친구랑 자주 싸운대. 농구부 때문에 바쁜 게 서운하다고."
전영중은 농구부 사람들 얘기를 종종 했다. 어차피 내가 농구 얘긴 하나도 못 알아들어서 적당히만. 그중에서도 누가 여자친구가 있더라, 같은 얘기를 했는데 보통 그 사람들 얘기는 좋지 않았다. 우리는 안 싸워서 다행이야. 그런 말을 굳이 하지 않아도 얘가 무슨 의도로 얘기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래, 우린 진짜 안 싸웠다. 서운한 것도 없고.
그런데 깨졌다. 수능 보기 딱 1년 전에.
잠깐 얼굴 좀 보자길래 일부러 잘 하지도 않는 화장까지 하고 만났다. 그리고서 걔가 하는 말이 헤어지자는 말. 더는 못 사귀겠다는 말. 숙소 있는 학교로 진학해서 겨우 만났더니 하는 말이 이거라고? 어제만 해도 내가 좋다며. 내가 제일 좋다며. 주말에 만나고 싶다며! 사람 놀리는 것도 아니고. 화가 났다. 자존심 상해서. 꼴사납게 매달리는 것도 싫어서 모진 말이나 했다. 어, 나도 사실 너 별로 안 좋아했거든? 잘 지내. 아는 척하지 마. 그렇게 말하고 일부러 집까지 빙 돌아서 갔다. 집으로 가는 길에 친구한테 전화 걸어서 펑펑 울었다. 나 차였다. 중학교 때부터 쭉 사귄 전영중한테.
생각해보니, 고백했던 날도, 차였던 날도 단지 내 놀이터였다. 전영중한테 차이고 대학에서 훨씬 잘생기고 키 큰 남자랑 사귈 거라고 다짐했는데. 사귀긴 개뿔, 대학교 문턱도 못 밟게 생겼다.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수능날 사람 혼을 쏙 빼놓는 게 어딨냐. 미워 죽겠다. 얜 대학 붙었겠지? 농구 잘한다고, 주전 됐다는 말도 있었는데. 한숨을 푹 쉬었다.
벤치에 누워 눈을 감았다. 한파라는데 하나도 안 춥다. 이러다 감기 걸려 죽을지도 모른다. 아, 그냥 대학 떨어질 거면 그냥 죽여줘! 재수하기 싫어! 전영중도 싫어! 수능 다시 치기 싫어! 그렇게 생각하며, 두 손 꼭 잡고 얼어 죽길 바랐다. 그래. 변사체나 되자. 강남이니까 뉴스 하나는 나겠지. 이런지 10분도 안 된 것 같은데 손이 따뜻했다. 날이 추워서 벌써 천국으로 갔나? 엄마 아빠, 미안해. 전영중, 고자나 돼라.
"그러다 입 돌아가. 여기서 뭐 해?"
익숙한 목소리에 두 눈이 번쩍. 진짜 천국인가 했으나 역시나 현실. 따뜻한 핫팩이 손을 녹였다. 맨날 보던 추리닝 말고 코트 쫙 빼입은 게 얼어 죽을 건 자기 같은데. 여자친구랑 놀다 오냐? 엉? 재수 없다.
"수능 잘 봤어?"
"아니, 너 개싫으니까 말 걸지 마."
또 모진 말을 한다. 아, 난 정말 남 상처 주는 데 도가 텄나 봐. 그런데 전영중은 물러나지 않았다. 전남친 전여친이 모여서 껄끄럽게 뭐 하자는 건지. 양말도 없이 슬리퍼만 끌고 나와서 발이 시리다. 귀도 떨어질 것 같다. 주머니 안에 손이랑 같이 찔러 넣은 핫팩만 겨우 따뜻하다. 아 그냥 집 들어갈까. 엄마가 갈비 해놨다는데.
"할 거 없으면 나랑 영화 보자."
"너 수능 안 봐서 수험생 할인 못 받잖아."
"집에서 보면 되지."
"팝콘은?"
"카라멜."
"음료수는?"
"제로 콜라."
말 없이 두 손을 내민다. 그러면 알아서 전영중이 내 손을 잡고 끌어당겼다. 언제 또 큰 건지, 목을 젖히는 게 힘들다. 얘 백퍼 대학 붙었겠지. 안 붙었으면 나한테 이러지도 않을 거고. 전화해서 나한테 대학 떨어졌어 이 지랄을, 아. 헤어졌으니 그런 전화도 안 하겠다. 재수 없다. 전영중 손을 잡고 개네 집으로 향한다. 누구는 수능 개같이 망해서 롱패딩에 수면 바지 입었는데. 옆에 있는 전남자친구 전땡땡 씨는 연예인처럼 입으셨네요. 하필이면 어떻게 성도 전 씨냐.
"너 진짜 개싫어."
"뭐? 나 방금 틀렸어?"
수능날 망하고 전남친이랑 영화 보는 사람도 나밖에 없을 거다. 그리고 수능날 전여친이랑 영화 보는 얘도 얘밖에 없겠지. 끼리끼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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