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불안의 온도
승대재유 승재
*약 1만자
15℃
그날 경기가 시작하기 30분 전, 임승대는 체육관 화장실 맨 마지막 칸에 쳐박혀 있었다.
깨져나간 타일 조각이나 윙윙거리는 환풍기의 팬 소리 따위는 제대로 인식되지 않을 정도로 세상이 잠깐, 좀 어질어질했다. 심장이 쿵쾅거리며 비정상적으로 크게 뛰었다. 빨라진 호흡, 차가워진 손끝. 개의치 않은 얼굴을 하려 애썼지만 그게 정말로 잘 됐는지는 확신할 수 없는 낯빛. 임승대는 잠시 한숨을 크게 쉬었다가, 한 손으로 제 머리를 아무렇게나 헤집었다. 등골을 조여드는 듯한 감각, 뱃속이 오그라드는 불쾌한 감각이 가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심호흡.
손에 얼굴을 묻고 숨을 고른다. 조금 호흡이 진정되면 나갈 셈이었다. 너무 질질 끌지는 말고. 어디 다녀왔길래 이렇게 늦게 오냐고 괜히 감독님이 화를 낼 만한 시간이 되기 전에. 지익, 화장실 바닥 위로 신발 끄는 소리가 들린 것은 그 무렵이었다.
타박, 타박, 타박.
"임승대."
타박, 타박, 타박.
"……."
"니 거깄지."
이윽고 발걸음 소리는 정확히 임승대가 쳐박혀 있는 칸 앞에서 멈춰 섰다. 키는 조그마한게 눈치는 더럽게 빠르다. 가만히 윗니로 입술을 짓이겼다. 임승대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우예 알았나."
"니 신발 다 보인다."
어이없다는 투였다. 진재유의 어조는 평온했다. 덜컹, 하는 소리가 잠깐 들려왔다. 아마도 임승대가 들어있는 칸의 문인지 그 옆 벽인지에 등을 기대고 선 듯 했다. 임승대는 황급히 아무렇게나 쭉 뻗고 있던 다리를 거뒀다. 아무 생각 없었는데, 지금껏 신발코가 삐쭉 화장실 칸 너머로 튀어나와 있었다.
"볼일 보는 거 아니면 고마 슬슬 나오지? 거 처박혀 있다고 뭐가 되나."
"…뭔…!"
순간적으로 발끈 해서 무어라 쏘아붙이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였다. 진재유의 어조는 사뭇 여전히 태연자약했다. 아니, 좀 놀리는 것 같기도 하고?
"니 설마 오늘 첫 시합이라고 쫄아서 거 숨어 있나?"
"뭔 소리야, 누가 쫄았다고…!"
그리고 그건 갓 열다섯 난 중학생 남자애의 자존심에는 그냥 넘어가기 힘든 어그로였다. 쾅! 결국 기어이 임승대는 화장실 문을 그대로 열어젖혀 그 자리를 그대로 박차고 나왔다. 옆칸 벽에 비스듬하게 기대 서 있던 진재유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임승대가 확, 인상을 징그렸다. 속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 덤덤함, 대수롭잖다는 표정. 저절로 속이 꼬였다.
"이제야 나오네."
"……."
"가자, 슬슬 우리 경기 시작이다."
무어라고 화일지 짜증일지 기싸움일지 모를 것을 뱉으려 잔뜩 장전해뒀던 기세가 푸쉬시, 그대로 꺾인다. 임승대는 자신에게서 아무것도 묻지 않고, 아무것도 신경쓰지 않는 듯한 태도의 진재유를 노려보다 가만히 발을 질질 끌어가며 그 뒤를 따른다. 그렇게 앞서 타박타박 걷는 동글동글한 뒤통수를 빤히 바라보다가.
"왜, 내 여 쳐박혀 있던게 웃기드나."
굳이 그렇게 빈정거린 것은 마지막 자존심의 발로였다. 진재유가 우뚝, 걸음을 멈춰서더니 고개를 꺾어 뒤에 있던 임승대를 올려다본다. 순순히 대답이 흘러나온다.
"뭔 소리가? 낸 아무 말도 안 했다. 왜 또 혼자 헛다리 짚고 앞서나가서 생각하는데."
할 말이 없었다. 반쯤 화풀이가 맞았으니까. 진재유가 힐끗, 임승대를 돌아보더니 말을 이었다.
"아, 설마 아까 쫄아서 숨어있다고 해서 그러나. 니 성질 안 긁으면 엔간치 안 나올 것 같아서 그랬다."
달래서 끌고 나오기엔 시간 너무 오래 걸리잖아. 임승대가 그 말을 들으며 허, 하고 헛웃음을 터뜨린다. 애초에 달래서 데리고 나와줄 만큼 그렇게 다정한 사이도 아니면서. 쿵쾅거리는 심장은 아직도 뛰고 있었다. 원래 친했던 것도 아니고, 농구부에서도 그렇게 붙어 있는 사이도 아니고, 동학년 가드랑 센터라서 호흡은 맞춰야 한다지만, 사실 아직 공식 경기 같이 뛰어본 적도 없고. 딱 그정도의 거리감을 가진 사이 주제에. 저런 식으로 말을 하는게 웃겼다. 그 사이에 진재유는 또 발걸음을 옮겨 걷기 시작한다. 빠르게 성큼성큼 걸어 그 뒤를 쫓아갔다.
"재유."
이번에는 제법 부르는 톤이 친절해진 채로였다. 물론 진재유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큰 변화가 없었지만.
"와."
"니는 공식 경기 첨 아니지."
"뭐, 그렇지."
진재유는 농구를 잘한다. 초등학교 저학년, 꽤 어릴적부터 시작했다고 들었다. 개인상도 탔었고, 선배들을 제치고 경기에 출전하는 일도 빈번했다. 농구를 시작한지 그렇게 오래되지는 않은 임승대와는 사정이 다르다.
"그럼 니는 긴장도 안 되겠네, 지금."
꼬인 속을 숨기려는 시도도 안 했다, 이번엔. 다시 한 번 진재유가 걸음을 멈춰선다. 이번에는 고개를 꺾어 올려다보는 게 아니라 그대로 몸을 돌려 임승대를 마주한다. 시선이 부딪혔다. 진재유가 어이없다는 듯 픽, 웃었다.
"니 지금 첫 시합이라고 긴장해가 이러나?"
"……."
성질 희한하게 부리네.
의외로 진재유는 그렇게 중얼거린 이후로는 더 뭐라 타박의 말을 얹지 않았다. 다 안다는 투였다. 심호흡이나 하고, 어차피 코트 들어가면 긴장할 틈도 없이 뛰어다니게 될 테니까 정신 단디 붙들고 있어라. 괜히 지금 성질부리지 말고. 그렇게 말하며 진재유가 임승대의 어깨를 툭, 친다. 그러더니 다시 뒤돌아 발걸음을 옮겼다. 체육관 복도는 아무도 없이 적막했다. 그 뒤를 빠르게 다시 쫓아간 임승대가, 마지막으로 진재유를 불렀다.
"재유."
"또 와 부르는데."
이건 진짜로 인정한다. 좀 고약한 심보에서 비롯된 물음.
"니도 긴장되나?"
나도 지금 다 털렸으니까 너도 좀 털려 보라는 마음으로. 그치만, 억울하잖아. 나만 이렇게 쪽팔리게 다 털린 건. 임승대는 일부러 유유자적하게 웃으며 물음을 던졌다. 다행스럽게도, 제 귀에 듣기에도 입 밖으로 흘러나간 어조만큼은 느긋하게 들렸다. 진재유는 이번엔 돌아보지조차 않고 체육관 문을 열기 위해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댄 채로, 밀지 않고 대답했다. 자존심이 상한다던가, 망설였다던가, 꾸며냈다던가 하는 것이 단 하나도 느껴지지 않은 말투다.
"뭘 그런걸 묻나? 당연히 긴장되지."
"……."
"그게 당연한 기라."
긴장이 나쁜 것도 아니고. 시합 앞둔 선수면 당연한 거 아이가? 진재유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게 말하더니 가자, 늦겠다 하며 안쪽으로 먼저 발을 들여 타박타박 걸어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그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임승대는, 가만히 왼쪽 가슴에 다시금 손을 올려 보았다.
미친듯이 쿵쾅거리던 심장은 여전히 잦아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17℃
"재유."
"……."
"재유우."
"……."
"진잼민이, 자나?"
"아, 쫌! 잠 좀 자자!"
왈칵, 짜증이 먼저 돌아온다. 그 목소리를 듣고 있자 하니 사뭇 유쾌한 기분이 들었지만 웃음을 삼켰다. 웃는 소리를 입 밖으로 냈다간 어떤 신경질이 되돌아올지 모른다. 임승대는 모른 척 재빠르게 표정을 바꾸고 (어차피 불을 죄 꺼서 어두운 방이었지만) 말꼬리를 주욱 늘려서 낮췄다.
"쉿, 목소리 낮춰라. 감독님이랑 코치님 듣는다."
싸구려 모텔의 벽은 썩 두껍지 않았다. 떠드는 소리가 넘어갔다간 내일이 시합인데 왜 이시간까지 안 자고 시끄럽게 굴고 있냐고 혼날게 분명했다. 진재유가 조금 바스락바스락거리며 이불 밑에서 자세를 바꾸더니 임승대의 쪽으로 돌아누웠다. 한참 잠에 빠져들 무렵 깨운 모양인지 눈가에 졸음이 묻어나 있었다. 한숨을 한 번 쉬더니 입을 벙긋거린다. 목소리는 한결 낮춘 채였다.
"와 부르는데."
"나 잠이 안 온다."
"…고마 자라, 컨디션 관리 해야제."
진재유의 대답은 언제나 담백하다. 차갑다기엔 따스하고, 따스하다기엔 냉정하고, 냉정하다기엔 다정하다. 그런 주제에 특별한 감정을 싣는 법이 없다. 그냥 딱 정론을 말할 뿐. 그게 가끔 못내 서러울 때가 있었다. 더 정확하게는, 그 너머를 엿보고 싶을 때가 꽤 자주 있었다.
"…재유."
"또 와."
"나 심장이 ... 너무 뛴다."
거짓말로 부리는 어리광은 아니었다. 치기 어렸던 중학생 시절 이후로 임승대는 오로지 진재유에게만큼은 불안을 숨기는 일이 없었다. 정확하게는, 불안은 나쁜 게 아니라고, 당연한 거라고 그렇게 말해준 이후부터. 그리고 아마 진재유도, 그리고 당사자인 임승대도 몰랐을 것이다. 거기서부터 애초에 항복이었다는 사실을. 진재유는 가만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러더니 임승대의 가슴팍에 손을 얹는다. 갑작스러운 신체 접촉에 흠칫 놀랐으나, 임승대는 애써 태연한 낯을 유지했다.
"내일 시합 때문에 그러나."
"어, 쫌…."
"…등치는 산만한 아가."
"…불안해가 그러지. 긴장해서."
"쫄았나."
웃음기 어린 목소리였다. 중학생 때였다면 발끈했겠지만 이젠 그 정도 놀림에 일일히 반응할 나이는 지났다. 임승대는 되려 한 번 몸을 웅크린 다음, 옆에 앉은 진재유의 낯을 빤히 올려다본다. 잠깐 고민한다. 진재유 무릎에 머리를 얹어버릴까, 말까. 징그럽다고 쳐내려나? 고민은 길었지만, 결국 행동으로 옮기진 못하고 몸을 웅크리기만 했다. 그 상태로 임승대는 모른 척 낮게 웃음을 흘린다.
"그런갑지."
"손 마이 간다, 승대 니."
실실거리는 임승대의 낯에서 시선을 떼어낸 진재유가 가볍게 한숨을 뱉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임승대가 괜히 조르는 듯한 어조로 급하게 그 뒤에 말을 붙였다.
"근데 괜히 놀리는 거 아이다. 농담도 아니고."
"……."
"진짜로…심장이 너무 빨리 뛰는데, 나. 그래서 그런지 잠도 안 온다."
이번엔 반쯤 칭얼거리는 어조였다. 숫제 어리광이다. 스스로도 그걸 알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런 식으로 괜한 어리광을 부려 틈을 억지로 파고들 때에만 보여주는 진재유의 그 너머, 그거 하나 때문에. 보여주는 낯, 내어주는 한켠의 틈 때문에. 니 진짜 손 마이 가네. 한 차례 했던 그 말을 다시 반복하며, 피곤하다는 듯 한숨을 쉬면서도 진재유는 가슴에 얹지 않은 다른 쪽 한 손을 임승대의 등에 얹는다.
"알았다. 이라믄 되나."
다시 한 번 흠칫. 한 겹 천 위로 피부에 와닿는 미적지근한 체온의 감각 때문에, 전신의 근육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느라 입에서는 반 박자 대답이 늦게 흘러나온다.
"…어어."
그러더니 진재유는 임승대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꾸물꾸물, 앉았던 몸을 다시 눕혀 이불 안쪽으로 파고든다. 임승대의 가슴께와 등에 얹은 손은 그대로라, 마치 어정쩡하게 끌어안은 모양새가 됐다. 진재유가 잠깐 침묵했다가, 중얼거렸다. 소곤거림에 가까웠다.
"숨 쉬어라."
"........"
그제야 임승대는 깨달았다. 지금껏 자신이 숨을 집어삼킨 채로, 멈추고 있었단 사실을.
"내 따라서."
가슴팍 위에 얹혀진 손이 오르락내리락한다. 진재유가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니 진짜 심장이 빠르게 뛰긴 하네. 손은 이윽고 척추를 타고, 미끄러진다. 가슴팍을 두드린다. 천천히, 토닥토닥. 최대한 손길에만 신경을 기울여, 그에 맞춰 숨을 쉬려고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들이켜는 숨소리, 내쉬는 감각. 그에 따라 척추 라인을 따라 등을 쓸어내리는 온기와, 가슴팍을 규칙적으로 두드리는 다른 쪽 온기. 그리고 꼭 제 품에 쏙 들어온 것만 같은 존재감. 소곤거릴때마다 웅웅거리는 공기. 사락, 바스락거리는 싸구려 모텔의 이불.
...임승대는 순간적으로, 엇박자로 숨을 집어삼켰다.
"니 어째…점점 심장 빨리 뛰는 것 같다. 맞춰서 숨 쉬라니까…."
진재유가 졸린 듯한 어조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느릿느릿하게 가슴팍을 토닥였다. 그러더니 하품을 한 번 한다. 임승대는 대답조차 하지 못한 채, 빳빳하게 굳은 채로 가만히 동그란 뒷통수를 내려다봤다. 점점 토닥이는 손길이 느려지는 것으로 봐서는 곧 잠들 것 같은 눈치였다. 가슴팍인지, 팔뚝인지에 진재유가 뱉는 숨이 그대로 와 닿아 피부를 간질였다. 눈을 질끈, 잠깐 감는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워야 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19℃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랬는데, 이 빌어먹을 감각은 도통 적응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전학오고 나서 출전정지가 일 년. 그 덕에 사실 공식 경기를 뛰어다닌지야 그렇게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중학교 시절부터 농구를 했으니 임승대도 이제는 마냥 영 초짜는 아니다. 매 경기마다 처음 경기 나가보는 애새끼마냥 심장 졸이며 쫄아 있을 이유는 없다는 소리였다. 그런데도 그날 아침만큼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면서도 기묘한 불쾌감을 먼저 자각해야 했다.
아, 이 감각. 오랜만인데.
멍한 두뇌로 생각한다. 고개를 몇 번 흔들어서 털어내려고 해도 도통 잘 되지 않는다. 누군가 아스팔트 도보에 뱉어 놓은 껌을 밟은 것처럼, 끈덕지게 붙어 떨어지지 않는 듯한 감각. 임승대는 결국 그것을 떨쳐내는 것을 포기하고, 기묘하게 평소보다 빠르게 뛰는 맥박과 속이 조여드는 듯한 느낌을 잠깐 곱씹는다. 마치 아주 오랜만에 찾아온 익숙한 친우를 맞이하듯.
"승대, 컨디션 나쁘면 미리미리 말해."
오만상을 쓰면서 새까만 져지를 걸치고 버스로 설렁설렁 걸어나오는 임승대를 힐끗 본 이규가 한 마디 보탠다. 임승대는 구깃구깃 구겨져 있던 표정을 억지로 폈다. 속이 꼬이건 말건 느긋한 척 웃는 건 오히려 쉽다.
"그런 거 아냐~악몽을 좀 꿔서."
거짓말이다. 꿈조차 안 꾸고 잤다. 멀쩡히 자고도 영 긴장 때문에 상태가 좋지 않을 뿐이다. 하지만 이규에게는 그런 사소한 거짓말을 파악할 능력이 없을 뿐더러 굳이 그걸 파헤칠 이유조차 없을 것이다. 태연자약하게 어슬렁거리듯 다가오는 임승대를 보던 이규는 금방 시선을 떼어내 다시 집합하는 농구부원 수를 헤아리기 시작했다. 괜히 말을 조금 보태는 건 예의상의 걱정에 가깝다.
"그래, 결승전이잖아. 컨디션 조절 잘 하고."
"어어."
대강 대답한 임승대는 져지 주머니에 찔러넣었던 휴대폰을 꺼내 단톡방을 열고, 공지로 올라온 경기의 대진표를 재차 확인했다. 의미 없는 행위다. 오늘 있는 시합은 결승 하나뿐, 상대가 누구인지도 이미 알고 있다. 뭐든 시선 돌릴 곳이 필요해서 움직였을 뿐이다. 물끄러미 대진표를 보고 있자면, 새까만 글자가 마치 점멸하듯 계속 깜빡이면서 시야 안에 박혔다. 무언가 많은 생각들이 소용돌이치나, 제대로 언어화되지도 못한 채로 다시 사그라들길 반복한다. 의식적으로 집중해 언어로 끌어올리지 않으려 노력한 탓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더 생각하고 싶지 않아 화면을 끈다. 심장은 여전히 불쾌하게 쿵쿵거리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움켜쥐듯 심장께의 옷자락을 그러쥐었다가, 놓으며 임승대는 생각한다. 이 감각의 근원이 어디 있는지를.
생리적 반응으로서 불안을 지각하는 건 오랜만인데.
"자, 자. 다들 가방 잘 챙기고, 버스 타라."
주위의 소리를 백색소음마냥 흘려들으며 임승대는 계속해서 생각에 열중한다. 물 흐르듯 버스에 차곡차곡 올라타는 인파에 섞여 버스로 올라타면서도. 대충 그냥저냥 적당한 자리를 잡아 한구석에 쳐박히면서도. 괜히 앉으면 좁은데 누가 옆에 앉을까 싶어 옆자리엔 가방을 던져두면서도. 사고는 빠르게 흐른다. 이거, 그러니까…가라앉히고 조절하는 방법. 진재유가 알려줬는데….
'숨 쉬어라.'
생각하고 싶지 않은 목소리가 어지러운 사고 틈을 비집고 재생된다.
'내 따라서.'
심호흡.
가슴께와 등에 얹힌 손, 미적지근한 체온, 느릿하게 두드리는 리듬과 같은 것들. 떠올릴수록 심장은 여전히 거세게, 미묘하게 빠르게 뛴다. 호흡을 내뱉으면 풀어지나 하다가도, 숨을 들이켜면 다시 흉부가 꽉 조여드는 것 같았다. 그날의 밤 이후로, 아니, 사실 정확한 기점을 확신할 수는 없으나, 아무튼 지상고를 떠난 이후로 애초에 다시는 느껴본 적 없는 감각이었다. 분명, 그래서 괜찮아졌던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부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니, 한 번도 괜찮아진 적이 없었나.
왜, 하필 오늘. 아니, 오늘이라서?
…뛰는 심장. 귓가에서 시끄럽게 울리는 소리. 이거 어떻게, 어떻게 해결하더라. 그러니까, 심호흡…. 누가….
"…재유, 나…."
습관적으로 도와줄 익숙한 사람을 찾으려던 임승대가 무언갈 깨닫고 입을 다문다. 아, 그래. 더 이상 진재유는 없다. 두고 온 사람은 임승대다.
가만히 손으로 눈가를 덮어 가린다.
"X발…."
21℃
따라서 임승대에게 불안은 다음과 같은 현상으로 정의된다. 빨라지는 심박수, 불안정한 호흡, 동공 확장, 차가워지는 피부, 그리고 심장이 조여드는 감각, 뱃속이 오그라드는 느낌. 불안을 다스리는 법은 이제 쉽다. 아무렇지도 않은 낯을 가장하는 법도 금방 익혔다. 잘 아는 사람이 찬찬히 들여다보면 깨질 낯이긴 하나 애초에 임승대의 가짜 얼굴을 그렇게 깊게까지 들여다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진재유가 없으면, 정말로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근본적인 문제는 이 불안이 툭하면 그 가짜 얼굴을 유일하게 꿰뚫어 볼 수 있는 사람 앞에서만 찾아온다는 것.
"안그러나? 니, 내만 보면 약간 쫄아 있다아이가."
"내가?"
임승대는 그렇게 반문하고는, 모른 척 텅 빈 소주잔을 흔들었다. 재유, 나 잔 비었다. 철제 테이블 너머로 슬쩍, 눈꼬리를 늘어뜨리며 웃는다. 고만 좀 마셔라, 내일 훈련 있다. 그렇게 타박하면서도 진재유는 반 좀 덜 되게 남은 소주병으로 손을 뻗었다. 자연스럽게 말을 돌리려는 수작이 통했나, 하고 생각하는 순간 진재유가 다시 입을 연다.
"우리 중학생 때 기억하나?"
"…뭐어."
그래, 순순히 안 넘어가주겠다 이거지. 투명한 잔 위로 투명한 소주가 콸콸 쏟아지는 걸 바라보면서, 진재유는 아무렇지도 않은 어조로 말을 이었다.
"니 첫 시합 때."
"아."
돌이켜 봐도 쪽팔린 기억 말이지. 임승대는 대답 없이 모른 척 진재유가 채워 준 소주잔을 그대로 비웠다.
"천천히 마셔라. 아무튼…그때도 니 되게 쫄아 있었는데."
"재유, 굳이 쪽팔린 이야기를 꺼내야겠어?"
"내는 요즘 니 보고 있으면, 그때랑 딱히 다른 점을 못 느끼겠어서 하는 소리다."
말허리를 끊어먹고 가볍게 타박했지만, 진재유는 굴하지 않는다. 그러더니 단번에 비워낸 임승대의 잔 위에 이번엔 절반만 소주를 따라 주며 잔소리를 얹었다. 적당히 마셔라. 임승대는 이번엔 잔에 손도 대지 않고, 빤히 진재유를 바라봤다. 여전한 불안. 여전한 초조함.
여전한 감각들.
티내지 않고 웃는다.
"내가?"
"그렇게 안 그런 척 웃는 버릇도 여전하고."
젠장, 진재유. 어디까지 꿰뚫고 있을 셈이야? 입속으로만 욕설을 짓씹었다. 정작 진재유는 그렇게 말해놓고 불판의 고기를 뒤집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시선이 임승대에게서 떨어져 불판으로 향한 걸 확인하고 나서야, 임승대는 슬금슬금 가슴팍으로 손을 올렸다. 심장은 여전히 뛰고 있었다. 쿵, 쿵…. 아니, 그렇지. 심장은 원래 뛰지. 하지만 이렇게 거슬릴 정도로 뛰나? 시끄러울 정도로?
"이왕이면 긴장했다고 해줘, 재유. 쫄았다고 하면 없어 보이잖아."
"그게 그거지 뭘…. 근데 긴장할 일이 대체 뭐 있다고 그라는데?"
"긴장 안 한다니까, 이제 시합 전에 쫄 만큼 초짜도 아니고."
언제적 얘긴데 그러는 거야. 고등학교 때 진작 졸업했다고…. 목끝까지 올라온 이야기를 꾹꾹 눌러담고 여유로운 어조로 대꾸하지만 진재유의 시선은 임승대의 낯에 따라붙어 이번엔 떨어질 줄을 모른다. 집게를 내려놓더니, 불쑥 갑작스럽게 상체를 훅 숙이더니 팔을 뻗었다. 덥썩, 진재유의 손이 그대로 가슴팍에 와 닿았다.
…갑작스럽게, 거리감이 확 줄어든다.
"…아니, 그게 아이라. 낸 시합 전이라칸적 없는데."
반사적으로 숨을 참았다. 동그란 눈동자, 셀 수 있을 정도로 자잘하게 박힌 주근깨가 지나치게 가까웠다.
"니 요즘 내만 보면 쫀다고, 내만 보면."
쿵, 쿵. 시끄럽게 여전히 심장은 뛰었다. 거슬릴 정도로. 불안정한 호흡, 불쾌할 정도로 낯익은 느낌. 동그란 눈동자가 한 번 데구르륵, 굴렀다가 임승대를 올려다 보는 것을 빤히 마주보고 있다가….
훅, 물러난다.
"이 봐라, 지금도 심장 엄청 뛰지."
"…뭐, 뭐, 뭐, 뭐 하는데!"
그렇게 대수롭잖게 말하며 팔을 걷어내는 진재유 덕에, 잠깐 버퍼링이 걸렸다가 펄쩍 뛰었다. 진재유는 다시 개의치 않는 낯으로 숙였던 상체를 바로한 채였다. 얼굴에 화끈화끈하게 열이 오르는 게 느껴졌다. 저게 미쳤나, 진짜…. 거울을 보진 않고도 시뻘겋게 얼굴이 달아올랐을 것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임승대가 휙, 고개를 돌려 눈을 피하고 손부채질을 했다.
"니 심장 뛰는 거 자각은 하고 있나 싶어서, 직접 들어 보라고 그랬다."
"진잼민이 니는 퍼스널 스페이스라는 게 없…하, 됐다."
"볼 거 다 본 사이에 그런게 와 필요하노."
할 말이 없었다. 임승대는 입술을 꾹 말아 물었다. 그 사이에 진재유는 태연자약하게 다시 놓아둔 고기 집게를 집어든 참이었다. 그러더니 말을 잇는다.
"글서 내는 고등학교 때 일 때문에, 아직도 미안하다고 좀 쫄아있나 했지."
"아니, 그게 아이라…. 그거는 사과하고 다 끝낸 일이잖아. 니도 괜찮다매."
반사적으로 변명에 가까운 어조부터 대뜸 튀어나왔다. 그러는 사이에 겨우겨우 달아오른 얼굴이 가라앉는다. 진재유는 힐끗, 임승대를 눈짓하더니 대꾸했다.
"그러니까."
"……."
"그런데도 쫄아있길래 뭐 있나 싶었다. 아님 말고, 됐다."
그렇게 말하며 시선을 돌리는 사이, 임승대는 반사적으로 손을 올려 진재유가 얹었던 가슴팍 언저리를 더듬었다. 여전히 심장은 불유쾌할만큼 시끄럽게 뛰고 있었다. 속이 뒤틀리는 감각도 여전했다. 다시금 되짚는다. 임승대가 지난 시간 내내 불안이라고 정의 내렸던 증상들. 빨라지는 심박수, 불안정한 호흡, 동공 확장, 차가워지는 피부, 그리고 심장이 조여드는 감각, 뱃속이 오그라드는 느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지금껏 불안이라고 명명해왔던 증상에 아무래도 다른 이름을 붙여야 할 것 같다는 예감이.
퇴고 안했어용
캐해 좀 어긋난 거 진짜 개 많은데 433 나오고 나서 바로 잡기 시작한 플롯이라 어쩔 수 없다 사실 안쓰고 처박아둘랬는데 이번주유료분에서 승재 《당함》...
불안과 사랑은 일맥상통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해서 CP연성입니다
230613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