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쫑] 그래도 나랑만 해

[가비지타임/규쫑] 그래도 나랑만 해 - 4

규쫑 by 썬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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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현관문이다. 종수는 잊고 지내던 악몽에 다시 들어섰음을 자각한다.

문을 열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없다. 종수에게 이규를 보지 않는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때는 더 그랬다. 영상통화를 하는데도 충족되지 않는 뭔가가 분명히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는 이규의 부피가 고팠었던 것 같다고 종수는 회상한다. 그러니 꿈에서라도 이규를 봐야 했다. 그게 악몽인 걸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꿈에서 깨어나면 제 옆에 이규가 누워 자고 있다는 걸 아는데도, 익숙한 관성을 이기기 쉽지는 않다. 종수는 언제나처럼 홀린 듯이 문 앞으로 다가간다. 숨을 한 번 크게 고르고 에일 듯 시린─별다른 감촉이 없는데도 종수는 매번 뼛속을 파고드는 한기가 느껴진다고 생각한다─문손잡이를 잡아 돌린다.

문을 열면 현관에서 보이는 거실에 이규가 서 있다. 종수는 꿈에서만 유독 서늘해 보이는 그의 집안을 둘러본다. 그래도 오랜만에 보는 이규의 전 자취방은 조금 그리운 느낌을 주는 것도 같아서, 애써 마음을 다잡고 그를 부른다.

‘이규.’

하지만 목소리는 울려 퍼지지 않는다. 여기는 그런 공간이다. 모든 게 멈춰 있는데 이규와 자신만 이상하게 움직일 수 있는 공간. 오직 둘의 손이 닿은 것들만이 조금씩 움직이는 시늉을 한다.

소리가 전달되지 않는데도 이규는 자신을 돌아본다. 하지만 그 얼굴은 차갑기만 하다. 꿈에서 밖에 본 적 없는 얼굴이다. 현실에서는 눈을 마주치기만 해도 예쁘게 접히는 눈꼬리는 딱딱하게 굳어있기만 하다.

이곳에서의 이규는 웃지 않는다.

그걸 알고 있는데도 종수는 괜히 말을 건넨다. 듣지 못할 걸 알면서도 매번 반복한다.

‘나 왔어.’

이렇게, 가끔은 고개를 끄덕여 주기 때문이다. 종수는 그것만으로도 조금 안도한다. 종수는 그것을 위안 삼으며 애써 태연히 거실의 소파에 가 앉는다.

이규가 주방으로 향한다. 오늘은 물도 가져와 주는 날인가 보다. 종수가 소파에 앉아 얌전히 이규를 기다린다. 이곳의 이규로서는 드문 호의이지만, 이것도 현실과는 다르다. 이규는 보리차를 좋아해서 집에 항상 물을 끓여둔다. 아니면 자신을 위해 담가 둔 과일청으로 금세 에이드를 만들어 오거나, 없다면 주스라도 내온다.

물을 가져다준 이규는 그걸로 제 할 일이 끝났다는 듯 종수와 떨어져 앉는다. 오랜만에 꾸는 악몽치고는 꽤 운이 좋다.

이 꿈은 대체로 이규를 오래 볼 수 없다. 물을 내어 준 이규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 그때는 그게 끔찍했다. 현실에서도 혼자인데, 꿈에서까지 혼자인 게 정말 싫었다.

과거를 떠올리자니 괜히 우울해지는 기분이라 종수는 티브이라도 켠다. 내용을 알 수는 없다. 번쩍이는 화면과 달리 여전히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이규와 함께라면 늘 평화롭던 고요함이 여기에선 불편한 적막이 될 뿐이다. 원래의 이규라면 이렇게 조용할 틈도 없이 제 옆에 찰싹 붙어 시덥잖은 얘기를 나누겠지만, 꿈 속의 이규는 가만히 앞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다. 종수는 괜히 까끌까끌한 것만 같은 목으로 침을 삼킨다. 물을 마시고 싶지는 않다. 마신다면 진짜 이규가 주는 게 좋았다. 

종수는 머쓱한 마음에 괜히 집 안을 눈으로 훑는다. 이 꿈을 꿀 때마다 보게 되니 눈감고도 그릴 수 있는 풍경이다. 안 꾼 지 꽤 된 것 같은데도 그렇다.

지금의 신혼집 거실에도 있는 몬스테라가 여기에도 있다. 이규가 무럭무럭 키워내는 고사리도 있다. 수박 페페니, 홍콩 야자니, 여인초니, 고무나무니, 이규의 자취방에서부터 있던 식물들이 사진처럼 미동도 없이 박제되어 있다.

종수는 문득 엄마가 사서 줬다던 레몬 나무가 그립다. 영양제까지 열심히 줘 가며 키웠더니 그래도 제법 레몬 같은 걸 몇 개 만들어 냈다. 그게 왠지 사랑의 결실 같아 제법 마음이 뿌듯했었던 기억이 있었다. 종수는 지금 그런 증거가 고프다.

종수의 시선이 더 먼 곳을 향한다. 답답한 걸 싫어해 문을 열고 다니는 이규와 달리 이곳은 모든 문이 닫혀있다. 이규와 안고 자던 침실도, 이규의 냄새가 가득한 드레스룸도 모두 들여다볼 수가 없다. 침실로 들어갈 시도를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거기는 허락해 줄 수 없다는 듯 제 앞을 막아선 이규를 마주하고는 마음을 접었다. 종수는 꿈에서조차 이규에게 거부당하고 싶지 않다.

그렇게 멍하니 있다가 보면, 이규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잠에서 깨는 때다. 이규는 말없이 걸어가 현관문을 연다. 고요한 축객령이다. 마치 이곳은 네가 있을 곳이 아니라고, 내 공간에 더 이상 너를 두기 싫다고 말하는 듯 해서 종수는 또 한참을 미적거린다. 평소라면 그런 종수를 어르고 달래줄 이규는 여기에 없다. 이규는 현관문을 연 채로 언제까지고 종수가 나오기만을 기다린다.

결국 종수는 떨어지지 않는 발을 뗀다. 테이블 위에 있는 유리잔에는 물이 넘쳐 바닥으로 흐르고 있다. 분명 이규는 반쯤 만 채워 물을 가져다줬을 텐데도 그렇다.

그게 꼭 불안이 넘치는 제 마음 같아서, 종수는 애써 고개를 돌리고 문밖을 나선다.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현관문이 매정하게 닫히는 건 느낄 수 있다.

번쩍,

눈이 뜨인다.

 

 

* * *

 

 

눈앞에는 또 이규가 있었다. 종수가 뻐근한 눈을 깜빡이지도 못하고 부릅뜬 채로 이규를 바라봤다.

“종수? 괜찮아?”

이규가 말하는데,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말하는 이규를 바라서 그렇게 들린다고 착각하는 건지, 아니면 진짜 이규가 그렇게 얘기해주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종수는 두려움에 쿵쿵대는 심장을 가지고 이규를 불렀다. 아주 작은 목소리가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규.”

잔뜩 갈라진 제 목소리까지 들리고 나서야, 종수는 지금 이 상황이 꿈이 아닌 현실임을 자각했다.

“응. 종수.”

이규가 금세 몸을 붙여왔다. 종수가 그 품을 파고들었다. 이규가 느리게 종수를 껴안고, 그의 등을 토닥였다. 낼 수 있는 목소리 중 가장 보드라운 걸 건넸다.

“나쁜 꿈이라도 꿨어?”

“……응.”

종수는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이게 바로 제 이규였다. 상냥하고, 다정하고, 제 어리광은 모조리 기쁘게 받아주는 애. 자신에게 매정하거나 차가울 수는 없는 애. 그제야 안도의 숨이 터져 나왔다. 바짝 굳어 얼었던 몸이 따스한 체온에 조금씩 풀리는 게 느껴졌다. 종수가 이규에게 매달린 손에 더 힘을 줬다. 이규가 그런 종수를 가만가만 쓰다듬다 물었다.

“누가 꿈에서 너 괴롭혔어?”

“아니.”

“내가 가서 혼내줘?”

종수가 고개를 젓고는 낮게 웃었다. 자기가 자기를 어떻게 혼내준다는 거야. 그런 생각이 들어서였다. 이규는 종수의 웃음소리를 듣고 나서야 걱정으로 요동치는 심장을 조금이나마 진정시킬 수 있었다. 이규가 조심스레 종수에게 물었다.

“어떤 꿈 꿨는지 물어봐도 돼?”

“별거 아냐.”

종수가 나른한 숨을 내뱉고는 답했다. 이규가 종수의 머리칼에 입술을 부비며 채근했다.

“별거 아닌 게 아닌데.”

이규가 그렇게 얘기해도 종수는 말할 수 없었다. 이규에게 자신의 악몽 중 하나가 너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거기에 나오는 이규는 그라기보다는 그의 껍데기를 쓴 무언가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가능하다면 영원히 모르게 하고 싶은 내용이었다. 다정한 제 애인은 이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상처 받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얘기를 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오늘은 꿈에서 깬 이후에 바로 이규를 볼 수 있어서 종수는 참 좋았다. 이전처럼 허한 마음을 가지고 태평양 너머에 있는 이규에게 전화를 하지 않아도 돼서, 눈을 뜨자마자 진짜 이규가 곁에 있어서, 악몽 같은 건 생각도 안 나게 평소처럼 달콤하게 어리광을 받아줘서, 그것만으로도 종수는 마음이 빠듯하게 차올랐다.

종수가 이규의 품에 코를 더 박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이규는 살냄새도 따끈해서 코를 절로 부비게 됐다. 이규가 낮게 웃더니 종수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진짜 말 안 해줄 거야?”

“기억 안 나.”

“안 나면 다행이긴 한데…….”

미심쩍었다. 이규는 말꼬리를 늘이며 생각했다. 기억이 안 난다고 하기에는 너무 단호한 말투였다. 그런데 안 좋은 걸 굳이 또 떠올려야 하나 싶은 생각도 들긴 해서, 이규는 그냥 종수의 머리를 느리게 쓰다듬는 걸로 종수의 말 돌리기를 모르는 척 해야 했다.

그 손길에 종수가 만족스럽게 목을 울렸다. 역시 이규가 좋았다. 이규만 있으면 마음이 절로 편안해졌다. 불안함 같은 건 그의 다정에 금세 녹아 사라져 버렸다. 어느 순간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제 평화는 몽땅 여기에 둬버린 것 같았다.

“이규.”

“응?”

“너만 있으면 다 돼.”

거짓말. 이규는 생각했다. 그냥 옆에 있는 것만으로는 종수의 악몽을 막아줄 수는 없었다. 불현듯 종수를 덮치는 불안도 대비할 수 없었다. 그걸 해내고 싶다는 건 사실 터무니없는 욕심임을 알지만, 좋아하니까 그의 행복이나 평안을 바라게 됐다. 그걸 위해 할 수 있는 건 다 해주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알게 됐다. 자신이 있는 것 정도로는 종수를 지켜낼 수 없었다. 부족해도 너무 부족했다. 그걸 제일 잘 아는 건 자신이었다.

“진짜?”

하지만 이런 말을 하면 또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고 할 테니까, 이규는 그 마음을 꾹꾹 삼켜냈다.

“응. 깼는데 너 있어서 좋아.”

“그건 다행이다.”

“으응…….”

조금 더 이규의 품에서 부비적대던 종수가 고개를 조금 물렸다. 옷자락에 머리를 잔뜩 부빈 덕에 머리칼이 부스스해졌다. 이규가 종수의 앞머리를 손으로 슥슥 넘겼다. 드러난 이마가 잘생겨서 입술을 꾹 눌렀다.

“규우.”

이마에 닿는 입술을 느낀 종수가 조르는 소리를 냈다. 이규가 종수의 입술 위로 제 입술을 포갰다. 건조한 입 안 사이를 두툼한 혀가 상큼한 맛을 가지고 파고들었다. 종수는 달게 느껴지는 이규의 타액을 목구멍 너머로 넘겼다. 이규가 촉, 가벼운 소리와 함께 입술을 뗐다. 종수가 이규의 입술을 한 번 더 빨고 놓아주며 물었다.

“너 오늘도 뭐 먹고 왔어?”

“어제 너가 좋아하는 것 같길래.”

그 말의 의미를 생각하던 종수가 인상을 팍삭 찡그렸다. 어제 토마토 맛이 난다고 말한 게 좋아서 오늘은 일부러 다른 과일을 사 깎아 먹고 왔다는 소리였다. 부지런해도 너무 부지런했고, 깜찍해도 너무 깜찍했다. 잠에 취해 몽롱했던 정신이 확 깨는 느낌이었다.

“……짜증 나.”

자연스레 그 말이 나왔다. 이규가 클클대고 웃더니 코를 부벼왔다. 종수가 한쪽 눈을 찡그렸다.

“왜애. 싫어?”

좋아서 짜증이 났다. 이렇게 앙큼하게 구는 녀석을 대체 어디에 내보인단 말인가? 이 자식이 어디서 또 어떻게 굴 줄 알고 평생 애인으로만 산단 말인가?! 종수는 또 갑자기 엄청나게 분한 마음이 들었다. 역시 말뿐인 관계로는 만족이 안 됐다.

“오늘은 뭐 같애?”

평소라면 순순히 답을 했겠지만, 문득 어제 시청에서의 일이 생각나서 종수는 괜히 입술을 삐죽댔다.

“몰라.”

“알면서.”

“모른다고.”

“말 안 해주면 뽀뽀 없는데.”

종수는 자신이야말로 그 말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마음만 같아서는 그렇게 눈치 없이 굴 거면 평생 너가 그렇게 좋아하는 뽀뽀 같은 건 해주지 않을 거라 으름장을 놓고 싶었다. 다시 생각해도 남들 다 결혼하는 시청에서, 결혼은 안 하고 싶냐고 물었더니 냉큼 생각 없다고 답한 이규가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가 없어서 종수는 또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가, 이규의 손에 제지당해야 했다. 입술이 아니고 손이었다. 종수가 눈썹 한쪽을 삐딱하게 올렸다.

“너 치사하게 이럴 거야?”

“흐흐.”

웃는 모습에 약이 올랐다. 근데 그게 또 속도 없이 좋았다.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는 말을, 종수는 매번 이규를 마주할 때마다 절절히 깨달았다. 이규는 부글부글 끓는 종수의 속도 모르고 또 평소처럼 아양을 떨어댔다.

“왜애. 말해주면 되지.”

“…….”

종수가 이글이글한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기만 하자 이규가 좀 더 구체적으로 종수를 꼬셔댔다.

“오늘도 밥 먹고 과일 먹으면서 뽀뽀해야지.”

그건 해야 하는 게 맞긴 했다. 하지만 그놈의 자존심이 뭔지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결혼 준비를 하며 들었던 엄마의 ‘사랑하는 사람한테 자존심 세우는 거 아냐.’하는 말이 떠올라서 대답을 해야 하나 싶기도 했다. 이규가 매번 져주잖니. 하는 말에는 차마 답을 할 수가 없었기에 더 그랬다. 이규 앞에서의 제가 참 제멋대로라는 생각 정도는 있었기 때문이었다.

종수가 여전히 부리부리한 눈을 하고도 입을 달싹였다. 이규가 쪼삣대는 입술이 움찔거릴 때마다 쪽쪽 입을 맞췄다. 뽀뽀 같은 건 없다더니 냅다 입술을 부비고 있는 게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역시 이런 육탄전에는 이길 수 없기도 했다. 종수가 꿍얼댔다.

“………숭아.”

“응?”

적당히 알아들었으면 됐지, 이규는 가끔 꼭 이렇게 짓궂게 물었다! 종수가 다시 매서운 눈으로 이규를 바라봤다. 하지만 왠지 모를 부끄러움에 붉어진 얼굴로는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종수가 결국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를 한 번 더 냈다.

“복숭아.”

이걸 왜 해야 하는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즐거워 보이는 이규가 좋아서 어쩔 수 없었다.

“정답!”

이규가 활짝 웃으며 입술을 꾸욱 눌렀다. 악몽 따위는 몽땅 잊게 만들어 주는 생기였다. 그게 너무 좋아서, 또 마음이 잔뜩 부풀어 올라 뾰족뾰족한 가시를 세웠다. 이런 제 맘이 주체가 안 되는 탓에 종수는 입술을 말아 문 채 이규를 노려보고는, 몸을 돌려 누웠다.

“열받아.”

들으라는 듯 말하는 종수의 뒤에 이규가 찰싹 달라붙었다. 따끈해진 귀에 볼을 부비고, 일부러 바람을 불었다가 종수의 팔꿈치에 얻어맞을 뻔하고, ‘죽는다’ 같은 살벌한 말까지 듣고 나서야 이규는 평소처럼 재잘댔다.

“납작 복숭아라고 알아?”

“몰라.”

“말 그대로 납작한 복숭아인데, 맛있더라.”

“흥.”

“밥 먹고 깎아줄게. 응?”

가만히 보면, 이규는 매번 먹을 걸로 자신을 꼬셨다. 애새끼도 아닌데 그랬다. 고등학교 때도 당하지 않던 걸 서른이 넘어서 당하고 있자니 좀 기분이 묘했다. 이게 다 제가 이규한테 너무너무 길들었기 때문이었다. 그게 싫지는 않았는데, 괜히 또 분하기는 해서 종수가 베개를 끌고 와 얼굴을 묻었다. 퍽퍽 소리가 나게 때리기도 했다. 이규가 파하학 웃더니 조심스레 베개를 떼냈다. 그러고는 다시 종수의 귓가에 대고 달콤하게 속삭였다. 물론 장난기는 숨길 수 없었다.

“어제처럼 물고 뽀뽀할까?”

……하지만 끌리는 제안이었다. 종수가 멀리 보내고 있던 시선을 흘긋 돌려 이규를 바라봤다. 이규가 헤벌쭉 웃었다.

“바보.”

“응~”

“멍청이.”

“응응.”

바보 개. 종수가 그 말을 입으로 삼켰다. 퉁명스러운 말인데도 뭐가 좋다고 이렇게 웃어주는지 알 수가 없었다.

종수의 상식으로는 모든 선빵에는 그에 상응하는 대처이 있어야 했다. 그런데 이규는 매번 웃으며 자신을 대해줬다. 종수는 그걸 익숙하게 여기면서도, 가끔 참을 수 없이 간지러운 기분을 느끼기도 했다. 이럴 때면 이규의 얼굴을 보며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매번 모르겠다는 느낌이었다. 종수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애꿎은 침대 옆 스탠드만 한참을 노려보다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입술에 결국 또 투정을 부렸다.

“짜증 나, 진짜.”

“나는 너 좋아.”

그러니까 이런 점이 지나치게 치사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반사적으로 몸이 움찔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종수는 이규에게 베개를 뺏긴 탓에, 괜히 이불을 말아 안고 작게 답했다.

“……나도.”

이규가 새빨개진 종수의 귀를 톡, 건드리고는 몸을 일으켰다. 종수의 몸을 토닥이고는 조심스레 돌려 눕혔다.

“오늘도 나가려면 씻어야지.”

“응.”

나른하게 풀어진 종수의 얼굴에 쪽. 입을 맞췄다.

“김치찌개 해놨다?”

“좋아.”

종수의 손을 잡고 침대에서 일으키기도 했다. 종수가 오늘은 얌전히 일어나 침대에 앉았다. 이규가 종수의 눈곱을 또 살살 뗐다.

“오늘은 바로 씻으러 가?”

“응.”

이런 대답을 자신만만하게 하는 게 꼭 사촌 형 네 다섯살 배기 아들내미 같아서, 이규가 키득대며 종수의 엉덩이를 토닥였다.

“어이구. 장해.”

“뭐?”

“기특해~”

종수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그러고는 금세 인상을 와그작 찌푸렸다. 으르렁대는 소리가 나왔다.

“……애새끼 취급하지 마.”

“크크. 귀여워서 그러지.”

이규가 아랑곳하지 않고 종수의 볼에 마구 입술을 부볐다.

“흥.”

종수도 그게 싫지만은 않은지 콧방귀를 뀌긴 했지만, 여전히 얼굴을 대줬다. 일부러 쪼오옵 소리가 나게 마지막 뽀뽀를 한 이규가 다시 종수를 토닥였다.

“씻고 나와서 밥 먹자. 응?”

“……안 그래도 갈 거야.”

종수는 그제야 또 정신이 들었다. 이규 옆에만 있으면 멍하니 그가 주는 애정을 담뿍 받고 있게만 됐다. 심지어 그전에 짜증을 잔뜩 냈는데도 그랬다. 괜히 민망해진 종수가 벌떡 일어나더니, 몸에 감겨있던 이불을 이규에게 팩 던지고는 욕실로 향했다. 이규는 얌전히 그 이불을 맞아주고는 고개를 빼꼼 내밀어 새집이 잔뜩 지어진 종수의 뒷머리를 사랑스럽게 바라봤다. 어제는 두개더니 오늘은 세개인 것도 귀엽기만 했다.

욕실 문이 닫히기 전, 종수가 뒤를 돌아봤다. 이규가 손 뽀뽀를 날렸다. 종수는 또다시 사나운 눈을 하더니 문을 쾅 닫았다. 좋아하는 게 분명했다. 이규는 잠시 키득거린 뒤, 물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일어나 이불을 정리했다. 그 후엔 느릿한 걸음으로 거실을 향했다.

김치찌개가 올려져 있는 가스레인지에 불을 켰다. 적당한 때에 껐으니 다시 끓여 조금 더 졸이기만 하면 됐다. 마트에서 산 반찬을 꺼낼 접시를 꺼내놓고, 느리게 국자를 휘저었다.

이규는 김치찌개를 데우며 생각했다. 종수가 이상했다. 확실했다.

어제처럼 종수를 깨우러 갔더니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앓고 있길래 얼마나 당황했던가. 몇 번이고 불러도 깨지 않다 눈을 번쩍 떴을 때는 제가 더 놀랐다.

아무래도 전날 시청에서의 일이 마음에 걸렸다. 그 뒤로 아무렇지 않은 듯 굴려고 하는 것 같긴 했는데, 그게 아닌 티가 너무 났다. 그저께 딤섬을 먹고 나와서의 종수가 또 생각나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매번 자신만 있으면 된다는데, 도대체 그걸로 뭐가 어떻게 된다는 건지 알 수가 없어 제법 답답했다. 뭔가 숨기는 것 같기도 했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샌프란시스코에 오자는 말에 괜히 그러자고 했던 걸까. 이규는 최근 본 종수의 불안한 모습은 모두 이곳에 온 이후인 것 같아 마음이 씁쓸했다. 즐거워 보이는 이면에 위태로운 종수가 보여서 더 그랬다. 제가 모르던 8년 사이에, 이곳에서 종수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알 턱이 없어 속상했고, 종수는 힘든 일은 절대 말해주지 않을 애인이라 더 속이 쓰렸다. 문득 드는 생각에 이규가 찌개를 휘젓던 손길을 멈췄다.

나 혹시……. 믿음이 가지 않는 타입인 걸까.

그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런 생각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좋아하는 마음이 크면 별거 아닌 일에도 심각하게 생각하게 된다더니, 제 꼴이 딱 그랬다. 이규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누가 뭐래도 종수의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설 수 있는 건 자신이었다. 종수도 마찬가지였다. 제 속을 제일 잘 아는 것도, 저와 가장 가까운 것도 종수였다.

이건 종수가 워낙에 힘든 줄 모르고 힘든 걸 얘기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그건 그의 자존심이기도 했고, 그가 여기까지 버틸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고, 좋아하는 애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다는 배려이기도 했다. 이규도 그걸 알기는 알았다.

그래도 이규는, 걱정이 됐다. 마음이 쓰였다. 이걸 줄일 방법을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후우. 작은 한숨이 폭 새어 나왔다. 이렇게 된 거 밥이라도 잘 먹여야지 싶었다. 누가 뭐래도 한국인은 밥심이랬다. 계란후라이도 세 개 얹어줘야겠다. 이규가 바글바글 끓는 김치찌개를 보고 불을 줄인 뒤, 냉장고를 향했다. 달걀을 더 꺼내와야 했다.

 

 

* * *

 

 

종수는 수도꼭지를 어제보다 조금 더 뜨거운 쪽을 향하게 조절했다. 이규의 품에서 벗어난 몸뚱어리는 언제 데워졌냐는 듯 다시 싸늘해졌다. 금세 악몽의 기억이 종수를 다시 덮쳐와 고개를 흔들었다. 이곳은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

그래도 뜨겁게 떨어지는 물 아래에 서니 몸이 후끈하게 데워졌다. 종수가 머리 위에도 가만히 물을 맞다가 앞으로 축 내려오는 머리칼을 손으로 쓸어 넘기며 생각했다.

이규가 좋았다. 애새끼 취급을 말라고 하긴 했지만, 이규가 자신을 어르고 달래주는 것도 사실은 즐기고 있었다. 그걸 부정할 수는 없었다. 이규는 좋으면 좋기만 한 것 같은데, 자신은 천성이 그러지를 못했다. 너무 좋아서 짜증도 났고 열도 받는 거였다. 이게 못된 성질머리라는 걸 알긴 했다. 그런데 이걸 괜찮다 귀엽다 내내 받아준 건 이규였기에, 그의 앞에서는 이런 모습을 고치기가 참 힘이 들었다. 이규라면 귀여운데 굳이 왜 고치냐고 말했을 것도 같아서 더 그랬다.

역시 이규가 아니면 안 됐다. 이규랑 결혼이 하고 싶었다. 사귀는 걸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종수는 마음을 한 번 더 다잡았다. 그도 결혼이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으면 하는 생각은 여전했지만, 아쉽게도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속이 쓰린 결과라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그건 이미 그렇게 끝난 일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그냥 결혼이 하고 싶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이규는 제가 하는 건 다 좋아했으니까, 결혼도 결국 좋아해 줄 거였다. 그렇게 믿어야 했다.

어차피 오늘이 디데이였다. 레스토랑 예약은 어제 한 번 더 확인했다. 반지는 오늘도 들고 나갈 거였고 반팔이나 후드 대신 셔츠도 입을 거였다. 넥타이까지 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기분은 좀 내고 싶으니 셔츠는 필수였다. 예쁘게 보여야 되니까 이규가 좋아하는 하얀 셔츠로 골랐다. 오늘 프러포즈를 해야 모레까지 이것저것 준비를 하고, 사흘 뒤 아침부터 식을 올리러 갈 수 있었다.

종수는 문득 이 계획이 정말 무모하기는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히 한 걸까 하는 짧은 후회가 됐다. 답답한 마음에 물이 떨어지는 얼굴을 벅벅 쓸었다.

……되겠지?

약한 마음이 드물게 고개를 들었다. 멍하니 물을 맞던 종수가 그제야 샴푸를 짰다. 첫날부터 느꼈지만 역시 너무 단 냄새였다. 종수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벅벅 문질렀다. 역시 이규가 골라준 게 더 좋았다. 이규와 있다 보면 너무 당연하고 편한 것들이 그의 존재가 옅어지자마자 자기주장을 해댔다. 종수는 그럴 때마다 그 모든 게 그렇게도 거슬렸다. 종수는 그리 섬세한 성격은 아닌데도 그랬다. 순식간에 이규의 손길을 거친 뒤 제 옆에 있는 것들이 그리워졌다. 괜히 이규가 보고 싶어지기도 했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티가 나서 그럴지도 몰랐다.

이런 걸 보면 이제 자신은 이규 없이는 못 살 것 같았다. 살기야 살겠지만 잘은 못 살 게 분명했다. 그렇게 만든 건 바로 이규였다. 그러니 책임도 져야 했다.

이 결혼, 진짜 하고야 만다.

종수가 이를 바득바득 갈고 결심을 다졌다.

[후기]

안녕하세요, 썬칩입니다!

내용 상 여기서 끊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조금 짧게 가져 와 봤습니다ㅎㅎ 이전편 까지 조금 우당탕쿵탕 한 부분이 있었으니 잠시 쉬어가는 파트랄까요 ^q^! 다음편 부터는 또 종수에게 예기치 못한 시련!(!!)이 닥칠 예정이라 그 전에 한번 끊어봤어요ㅋㅋ

쫑수는 이규에게 말은 안 했지만, 미국에 간 후로는 이규가 자기를 모르는 척 하는 악몽을 종종 꿨을 거라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그 전의 종수의 두려움은 농구를 못하는 것이었는데, 미국에 간 후로는 이규와 헤어지는 것이 추가가 되었을 거라는... 아주 합리적인 추론이 있기 때문입니다 ! 하지만 이녀석은 좋아하는 애 한테 약한 모습 보이기 싫어하고, 걱정 많은 애인 걱정 시키고 싶지도 않고(그게 더 걱정을 부른다는 사실은 모른채ㅋㅋ), 무엇보다도 악몽이라 부정적으로 칭하는 것에 좋아하는 상대가 나온다는 걸 알리고 싶어하지 않아할 것도 같더라고요! ㅋㅋ (아마 이 뒤로도 이규는 영영 악몽의 내용을 모르지 않을까 싶습니다 ^ㅡ^...!)

다음편은 몇 번 더 들여다 보고, 이번주 내로 가져와보도록 할게요 ><~! 댓글이나 감상은 언제나 환영인 거 아시져~~!!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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