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쫑] 그래도 나랑만 해

[가비지타임/규쫑] 그래도 나랑만 해 - 3

규쫑 by 썬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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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수.”

“으응…….”

쪽. 볼에 말캉한 입술이 닿았다. 종수가 반사적으로 팔을 휘저어 손끝에 걸리는 걸 잡아당겼다. 묵직한 무게가 위로 쏟아졌다.

“일어났어?”

“…….”

이규가 풀썩 쓰러진 침대 위에서 꾸물꾸물 자리를 잡다가, 종수의 손에서 힘이 좀 풀리자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의 옆에 모로 누워 아직 굳게 닫힌 눈가를 손으로 살살 만졌다.

“눈곱.”

“웅.”

이규가 눈앞머리를 손톱으로 살살 긁는데도 종수는 여전히 고롱대며 얼굴을 맡길 뿐이었다. 색색 내뱉는 숨소리가 평화로웠다. 이규가 종수의 코끝을 검지로 눌렀다.

“세수하고 밥 먹자.”

“응…….”

“대답만 할 거야?”

종수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이규가 낮게 웃으며 입술을 부볐다.

“나 아침에 장도 봐 왔는데.”

종수는 같이 가지. 라고 생각했지만, 잠긴 목에서는 좀처럼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계란국도 끓였는데.”

계속되는 이규의 말에도 좋아. 라는 대답은 우으응~ 같은 소리가 될 뿐이었다. 이규가 종수의 얼굴을 조물대며 다시 한번 그를 졸랐다.

“안 나가더라도 밥은 먹고 자. 응?”

종수가 한쪽 눈을 슬쩍 떴다. 울상인 얼굴을 하고 있던 이규가 금세 눈꼬리를 접었다.

“밖에 진짜 예뻐. 아침 먹고 나가서 차도 마시자.”

밥 먹고 자라고 했으면서. 종수의 입술이 절로 튀어나왔다. 이규가 거기에도 쪽! 소리가 나게 뽀뽀했다.

“쿠키도 사 왔다?”

듣자하니 죄 먹는 얘기뿐이었다. 종수가 눈을 감은 채로 웃었다.

“왜. 뭐야.”

이규가 종수의 볼에 얼굴을 부비며 거듭 물었다. 종수가 더 큰 웃음소리를 냈다. 이불 안에 있던 다리가 절로 들썩였다. 이규가 한껏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뭐가 그렇게 재밌어. 응?”

연신 입을 맞춰오는 건 덤이었다. 종수도 여전히 뻑뻑한 눈을 떠서 이규와 보조를 맞췄다. 이규가 종수의 뽀뽀에 금세 헤벌쭉한 얼굴을 했다.

“너, 크흠.”

“응~”

“왜 그렇게 먹이는 데 집착해.”

“너 비시즌일 때 살찌워 놔야지.”

“살찌워서 뭐 하게.”

이규가 짓궂은 미소를 짓더니 종수의 위로 풀썩 엎어졌다. 갑자기 제 위를 짓누르는 무게에 종수가 억! 소리를 냈다. 이규가 킬킬대며 종수의 볼을 앙앙 깨물었다.

“잡아먹어야지.”

“어떻게?”

이규가 잠시 종수를 보더니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종수의 눈썹이 까닥이기도 잠시, 이규가 늘어져 있던 종수의 몸을 뒤집어 제 위로 올렸다. 몸이 이불에 칭칭 휘감겼다. 순식간에 위치가 뒤바뀐 종수가 눈을 깜빡였다. 이규가 이불 안으로 슬금슬금 손을 넣어 종수의 엉덩이를 만졌다. 한 손에 착 감기는 감촉이 좋아 주물거리기도 했다. 그 손이 속옷 안으로 들어오는 것까지 아주 자연스러웠다. 은근하고 뻔뻔한 손길에 종수가 피식 웃었다.

“살찌워서 잡아먹는다며.”

“일단 맛만 볼까, 하고?”

흐음. 콧소리를 낸 종수가 이불을 대충 옆으로 치우고는 이규의 위에서 뭉근하게 아래를 비볐다. 아침이라 힘이 들어간 앞이 이규의 몸에 뭉개졌다.

“국 다시 데울 수 있지?”

“여기 가스레인지 화력 좋더라.”

종수가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않았다. 하여간 이규는 존나 앙큼했다. 종수가 자다 깨 바싹 마른 입으로 이규를 찾았다. 이규가 당연하다는 듯 종수의 입안을 파고들었다. 종수가 제 입 안에서 움직이는 이규의 혀를 느릿하게 반겼다. 계란국을 끓였다더니 이규의 입에서는 왜인지 토마토 맛이 나는 것 같았다. 텁텁한 혀나 볼 안쪽을 휘젓는 혀가 제법 상큼했다. 얼마 안 가 쫍! 하는 소리와 함께 입술이 떨어졌다. 종수가 중얼거렸다.

“토마토…….”

“토마토? 먹고 싶어?”

종수가 손을 들어 눈을 벅벅 비볐다가, 이규의 손에 저지당했다. 발개진 눈가에 또다시 보드라운 손길이 내려앉았다. 종수가 제 속눈썹을 가만가만 쓰는 이규의 손길을 느끼며 답했다.

“너한테서 토마토 맛 나.”

“아. 방울토마토 사 왔어. 씻으면서 몇 개 먹어서 그런가 보다.”

이규의 답을 들은 종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규가 또 실실 웃었다.

“어떻게 알았지?”

“맛이 나니까.”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한 어이없는 목소리에 이규가 파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흐흐. 귀여워.”

이규가 종수의 얼굴 여기저기에 다시 쪽쪽 입술을 부벼왔다. 종수는 이규가 하는 ‘귀여워’의 포인트를 여전히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이규의 간지러운 말은 좋아 다시 유순하게 눈을 감았다.

* * *

이규의 말대로 정말 맛만 보는 것으로 적당히 손장난을 끝냈다. 마음 내키는 데까지 하자면 할 수도 있었겠지만, 오늘은 고대하던 일정이 있었기에 아쉬움은 밤에 달래기로 했다.

종수는 사정 후 나른함을 핑계 삼아 꾸물꾸물 시간을 끌었다. 물티슈로 대충이나마 뒤처리를 해주는 이규의 손길까지 느끼고 있자니 정신이 말짱해졌고, 졸음이 가시니 가방 속의 반지를 또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려면 이규가 이 방에서 나가야 했다. 씻고 나왔다가는 이규가 머리를 말려준다고 또 들어올 테니, 그때는 들킬 가능성이 너무 높았다.

이규는 간단하게 씻고 나왔는데도 여전히 침대에 누워있는 종수를 보고, 또 다가와 침대에 걸터앉았다. 자고 일어나는 바람에 마구 뻗친 머리를 사락사락 넘겼다. 종수가 그 손길에 또다시 고롱댔다. 답지않게 느적대는 종수를 이규가 부드럽게 채근했다.

“종수. 씻어야지.”

“으응.”

“오늘따라 왜 이렇게 어리광이지?”

그 말을 들은 종수가 금세 눈을 새침하게 만들고는 따져 물었다.

“싫어?”

“흐흐. 아니?”

이규가 다시 종수의 위로 엎어졌다. 종수가 클클대며 이규의 귀를 깨물었다. 악! 작은 비명과 함께 고개를 든 이규가 동그랗게 잇자국이 남은 귀를 만지작대며 물었다.

“진짜 안 씻어?”

종수가 샐쭉 웃었다. 이규는 괜히 뽀뽀나 더 했다. 종수가 이번에는 이규의 볼을 와구 깨물고는 답했다.

“너 나가면.”

“무슨 상관이야?”

종수의 엉뚱한 말에 이규가 되물었다. 하지만 종수는 이규를 퍽 밀치고는 손까지 팔랑팔랑 휘저을 뿐이었다.

“빨리 가.”

“나 내쫓아?”

이규가 밀쳐진 상태로 얼떨떨하게 침대 아래로 두 발을 내리며 물었다.

“진짜?”

눈썹이 또 잔뜩 처진 채였다. 일부러 서운한 듯 구는 이규를 알아, 종수가 또 큭큭댔다. 이규가 어어? 진짜로? 같은 말을 또 해서 더 웃음이 났다. 하지만 이규가 아무리 귀엽게 굴어도 지금은 안 됐다. 종수가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강아지한테 어르듯 말했다.

“거실에서 기다려.”

“치.”

입술을 삐죽이는 이규에게 종수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계란국만 했어?”

“스팸이랑 계란후라이도 할 거야.”

“지금 가면 딱 되겠다.”

이규가 밉지 않게 종수를 흘기고는 몸을 돌렸다가, 다시 종수의 위로 와락 뛰어들어 종수의 얼굴에 입술을 마구 부볐다. 종수가 또 키득댔다.

이렇게 재밌다는데 어울려 줘야 할 것만 같았다. 이규가 종수의 코를 가볍게 깨물고는 몸을 일으켰다. 큰 덩치가 내려가니 매트리스가 출렁였다. 종수는 침대에 모로 누워 사라지는 이규를 끝까지 지켜보다가, 주방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잽싸게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거실을 살피며 성큼성큼 발을 내디뎌 가방으로 향했다. 내내 가방 안에 있었으니 별 문제는 없을 터였지만, 그래도 눈으로 봐야 안심이 될 것 같아서였다.

당연하게도, 또 다행히도 반지는 무사했다. 하지만 그걸로는 안심되지 않아 종수는 반지 케이스를 모조리 한 번씩 열어 확인까지 또 마쳐야 했다.

반지를 본다고 미적댄 만큼 재빠르게 씻고 나와서는 이규가 골라둔 옷을 입었다. 축축한 머리에 대충 수건을 얹고 나갔다. 이규가 기다렸다는 듯이 다가와 익숙한 타박을 했다.

“머리 또 안 말렸지.”

그 말에 종수는 그냥 이규의 품에 안기기나 했다. 이규가 부러 한숨을 쉬며 종수를 마주 안아 한 손으로도 머리를 털었다.

“너 감기 걸린다?”

“너가 말려줘.”

“너 혼자 있을 때는 진짜 어쩌려고 그래.”

혼자 있을 때는 이규의 말을 듣고 싶어서 꼬박꼬박 말렸었고, 지금은 이규가 앞에 있으니 말리지 않는 것이었지만, 종수는 오늘도 이 사실을 꾹꾹 눌러 삼켰다. 혹시라도 이 사실을 이규가 알게 돼서, 앞으로 머리를 안 말려주면 어쩌냐는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대신 이규에게 체중을 더 실어 안기고는 대꾸했다.

“너랑 계속 같이 있을 거야.”

수건 위로 뒤통수를 만지던 손이 살짝 멈췄다. 마주 안은 이규의 몸이 잘게 떨리더니 이냬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흐흐.”

“왜 웃어.”

“평생 내가 말려줘?”

“응.”

“아무도 못 말리게 하는 거야?”

“응. 너만 해.”

이규가 종수의 촉촉한 위를 앙 깨물고는 또 마구잡이로 뽀뽀를 해댔다. 종수가 가끔 눈을 찡그리면서도 고스란히 그 입술을 모두 받아내고는, 이규의 손에 이끌려 머리를 말리러 방으로 다시 향했다.

테이블 위에 빤히 놓인 드라이기에 종수가 슬쩍 시선을 돌렸다. 이규도 그런 종수를 알아 볼을 한번 꼬집고 의자에 그를 앉혔다. 위이잉 하는 소리와 함께 그리 뜨겁지 않은 바람이 새어 나왔다. 이규의 손가락이 종수의 축축한 머리카락 사이를 부드럽게 휘저었다.

종수가 제법 긴 시간 나른하게 그 손길을 즐겼다. 이규는 드라이기를 끄고 나서 종수의 머리칼에 입을 맞추는 것도 잊지 않았다. 종수가 고개를 돌렸더니 이번에는 입술 위로 입을 맞춰왔다. 종수의 입안에는 한국보다 매운 것 같은 미국의 치약 맛이 가득했다. 이규의 혀가 그 알싸함을 모조리 쓸어갔다.

그 뒤로는 이규의 손에 이끌려 얌전히 식탁에 앉았다. 종수가 식탁 위를 바라봤다. 김치, 햄, 계란말이, 김, 밥까지 여기서 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한국 느낌의 밥상이었다.

“밥을 했어?”

“아니. 햇반.”

이규가 국을 훌훌 저어 뜨며 답했다. 종수가 생수병을 따고 컵에 물을 따랐다.

“굳이 옮겨 담은 거야?”

뜨겁지도 않은지 국그릇처럼 보이는 보울 두 개를 한 번에 들고 온 이규가 자리에 앉으며 코를 찡긋댔다.

“한 척 좀 하려고.”

말은 그렇게 해도 조금이라도 더 좋은 식탁을 차려주고 싶은 이규의 마음을 종수도 알았다. 이규는 혼자서는 대충대충 먹으면서도, 저랑 먹을 때면 포장해 온 떡볶이 하나도 꼭 반질반질하고 예쁜 그릇에 가득 담아 내주는 애였다.

심지어 굳이 왜 그러냐는 타박에는 다른 말 없이 매번 설거지도 자기가 하겠다고 답하기도 했다. 굳이 귀찮은 걸 시키는 것만 같은 제 마음은 모르는 척하는 게 빤했다. 그렇다면 종수도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종수는 이규가 설거지까지 하게 두고 싶지 않았다. 간질간질한 그의 마음을 받았으면, 자신도 뭔가를 해주고만 싶었다.

다만 안타깝게도 종수에게 그만큼 보드라운 마음을 건네는 재주는 없었다. 그건 타고난 기질이 있어야지만 가능한 것 같았다. 그게 아니고서는 이규처럼 상냥하고 다정한 애 옆에서 인생의 반 이상을 함께 했는데, 여전히 간지럽게 구는 데 서투를 수는 없었다.

아무튼 종수는 좋아하는 애가 내내 마음을 쓰게 하는 걸로도 모자라─물론 그게 정말 좋은 것과는 별개로─ 몸까지 쓰게 하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자신은 가진 것 중 몸이 최고의 재산인 운동선수였고, 그래도 몸으로 하는 건 어떻게든 해낼 수 있었다. 그게 안 된다면 다른 방법을 찾으면 됐다. 신혼집에는 그런 이유로 식기 세척기를 사서 둔 거였다. 하지만 여기는 없는 게 분명해 보였으니, 간만에 몸으로 때워야 할 듯했다. 종수가 이규 몰래 설거지를 다짐하며 국을 떴다.

예상대로 시원했다. 이규는 종수가 잘 먹는 것 같아 보이자 그제야 뒤이어 수저를 들었다.

“내일은 김치찌개 할까?”

“응.”

종수는 연이어 케첩이 위에 뿌려진 계란말이도 먹고, 햄도 집어 우물댔다. 오물대는 종수의 볼을 보며 이규가 말을 이었다.

“돼지고기?”

“응.”

“많이 넣어서?”

종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규는 김치찌개도 잘했다. 국물은 텁텁하지 않고 개운했고, 고기는 매번 부드러웠다. 밥을 먹고 있는데도 이규에게 길든 입맛이라 그런지 상상만으로도 군침이 돌았다. 계란후라이 두세 개 얹어서 밥 비벼 먹어도 맛있겠다……. 문득 든 생각에 종수가 우물대던 걸 삼키고 다시 입을 열었다.

“계란후라이도 하자.”

“같이 비벼 먹게?”

“응.”

이규의 입꼬리가 또 예쁘게 올라갔다. 종수가 그런 이규를 흘긋 보더니 다시 열심히 수저를 놀렸다.

이규는 종수가 뭔가를 해 달라고 할 때가 참 좋았다. 종수가 원하는 걸 해줄 수 있는 게 기뻤고, 이런 걸 아무렇지 않게 얘기할 만큼 제 손을 잔뜩 탄 것 같아 뿌듯했다.

감기에 걸릴까봐 타박을 하긴 했지만, 머리 말리기도 고등학교 때부터 내내 해오던 것이라 그걸 양보할 생각은 없었다. 비록 종수가 이제는 이런 게 싫다고 하더라도─이럴 거라는 가정만 해도 이규는 속이 좀 쓰렸다─, 아마 몇 번은 더 졸라보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이규가 종수의 입가에 묻은 밥풀을 손으로 떼 입에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밥 더 줄까?”

“아니.”

종수가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이어 말했다.

“다 먹고 토마토 먹을래.”

참 속셈이 빤히 보여 귀여운 대답이었다. 이규가 낮게 웃으며 반찬을 종수 쪽으로 더 밀었다. 종수가 눈썹을 까닥이더니 계란말이를 집어 이규의 밥 위에 얹어줬다. 이규는 자기가 준비한 반찬이면서도, 뭐가 좋은지 헤실대며 종수가 올려준 걸 넙죽 받아먹었다.

* * *

식사를 마친 종수가 벌떡 일어나 싱크대로 향했다. 이규가 설거지하게? 라고 물었지만, 종수는 끄덕이기만 하고 재빨리 물을 틀었다.

“고무장갑 끼고 해.”

“너도 안 끼면서.”

“나는 안 껴도 너는 껴야지.”

“왜.”

이규는 안 그래도 건조한 애가 피부가 상하면 어쩌려고 그러냐, 같은 말을 하려다가……. 노선을 틀었다. 그렇게 말했다가는 말이 길어질 게 분명했다. 대신 종수처럼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내 맘이야.”

“이미 손에 물 묻혔어.”

“닦으면 되지.”

이규가 냉큼 수건을 갖고 와 종수의 손을 꼼꼼히 닦았다. 종수가 뚱한 얼굴로 이규를 바라봤다. 이규가 제 손을 닦아주는 게 좋은 것과 잔소리를 하는 게 못마땅한 건 또 별개였다.

이규는 진짜 자신을 무슨 작고 소중한 어린애 대하듯 했다. 동갑인 데다 키나 덩치도 비슷하면서도 그랬다. 종수는 그게 이규가 자신을 너무 좋아해서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을 하다가도, 가끔은 마음에 삐죽삐죽 날이 서곤 했다. 이규는 손을 다 닦고는 종수의 앙 다물린 입매에 뽀뽀를 쪽쪽 해주더니, 고무장갑을 들어 보이기까지 했다. 종수가 마지막으로 반박했다.

“손끝 둔해져서 싫어.”

“내가 할까?”

이규는 그렇게 대꾸하더니 당장이라도 자기가 고무장갑을 낄 것처럼 굴었다. 결국 종수는 이규가 들고 있는 고무장갑을 거칠게 낚아챌 수밖에 없었다.

“안 돼.”

이규가 실실대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종수가 거칠게 장갑을 끼고 설거지를 시작했다. 열받은 김에 수세미에 세제도 퍽퍽 짰다. 거품을 내는 손길도 거세기만 했다.

이규는 종수의 사나운 기세에도 자리를 옮기지 않고 그의 옆에 딱 달라붙어서 팔을 부비더니, 어느새 방울토마토를 가지고 와 종수의 입에 대 줬다. 종수가 이규를 한번 흘겨보다가 입을 벌려 낼름 토마토를 받아먹었다. 이규가 톡 튀어나온 종수의 볼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그게 몇 번이고 반복되는 내내 종수의 눈매에 들어가 있던 힘은 완전히 풀렸고, 이규가 정리하며 요리한 덕에 얼마 되지 않던 설거짓거리도 금세 끝이 났다.

고무장갑을 벗는 종수에게 이규가 마지막으로 방울토마토를 물려줬다. 종수가 당연하게도 이규가 있는 쪽의 치아로 토마토를 씹었다. 하지만 닿아야 하는 말캉하고 촉촉한 촉감이 없었다. 종수가 저도 모르게 볼을 좀 더 내밀었다. 여전히 기다리던 입맞춤은 되돌아오지 않았다. 종수가 결국 이규를 돌아봤다. 헤실헤실 웃고 있던 이규가 그제야 종수의 입에 쪼옵! 소리가 나도록 입술을 부볐다.

“토마토 맛있지.”

“응.”

이규가 웃으며 토마토 한 알을 제 입에 털어 넣었다. 그걸 보니 또 입맛이 돌았다. 종수는 막 잠에서 깼을 때 이규의 입에서 맛봤던 상큼한 맛을 떠올렸다. 역시 제가 원하는 건 그쪽인 것 같았다.

종수가 단숨에 이규의 목덜미를 낚아채 입술을 겹쳤다. 이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종수를 바라봤다. 종수가 입술을 붙인 상태에서도 피식 웃고는 눈짓했다. 눈이나 감으라는 뜻이었다. 이규가 혀를 움찔대면서도 유순히 눈을 감았다. 종수도 이규를 따라 눈을 감고는 반쯤 으깨진 과육이 들어찬 이규의 입안을 훑었다. 이규의 입안에서 막 터졌던 토마토의 상큼한 맛이 종수의 혀에도 닿았다. 종수는 그제야 뭔가가 찰랑찰랑 가득 차오른 것만 같은 마음을 느끼고, 만족스레 입꼬리를 올렸다. 이규의 따끈한 손이 제 등을 감싸오는 것도, 두 사이의 간격이 빈틈없이 가까워지는 것도 모두모두 마음에 들었다.

* * *

종수는 오늘도 반지가 든 가방을 마지막으로 준비를 마쳤다. 이규가 골라준 옷도 그가 입은 것과 비슷한 구석이 있어 마음에 들었다. 숙소의 전신거울에서 이규가 시키는 대로 오오티디인지 뭔지를 얌전히 찍어줄 정도였다. 그러고 보면 이규는 참 패션 센스가 좋았다. 뭘 모르는 제가 봐도 그게 느껴졌다. 특히 커플룩인 듯 아닌듯 보이게 옷을 참 잘 골랐다.

종수는 새삼 엄마의 조언을 다시 실감했다. 역시 결혼반지도 똑같은 디자인이 아니라, 같이 있으면 세트로 보이게끔 유사한 디자인으로 고르는 게 맞았던 것 같았다.

종수가 내심 뿌듯해하는 사이 이규는 빠르게 사진을 찍더니 현관을 나섰다. 나와서는 당연하게도 손을 맞잡았다. 이규는 왼손, 자신은 오른손이었다. 깍지 낀 손가락 사이로 이규가 하고 있는 커플링의 감촉이 느껴졌다. 그것만으로도 종수는 마음이 조금 들떴다. 이 손에 끼워진 반지를 제 손으로 바꿔 끼워줄 생각이었다. 커플링 말고 결혼반지로.

결혼반지를 낀 이규의 손은 이제 너무 많이 시뮬레이션을 돌려봐서, 눈을 감아도 생생할 정도였다. 하지만 종수는 몇 번이고 했던 상상을 또 했다. 오늘따라 상상 속의 반지가 더 반짝이는 것만 같아 마음이 뿌듯했다.

오늘의 첫 목적지가 바로 샌프란시스코 시청이어서 그런 게 분명했다. 바로 며칠 뒤 이규랑 식을 올릴 곳이었다. 시청인데도 관광지로 이름을 떨칠 만큼 예쁘기로 이름난 곳이니 한 번쯤 가봐야 하는 거 아니냐며, 이규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을 때는 사실 심장이 덜컹거렸지만……. 생각해 보니 사전답사라는 걸 갈 빌미를 이규가 마련해준 것 같아서 가장 컨디션이 좋을 둘째 날로 일정을 잡기도 했다.

이규의 옆에서 모르는 척 함께 훑는 시청 사진들은 역시 예뻤다. 몇 번을 봐도 마음에 들었다. 종수도 이미 조사 과정에서 모두 알고 있던 내용이지만, 이규가 한국 연예인도 여기서 결혼사진 찍었다는데? 오. 스몰웨딩 진짜 많이 한대. 같이 조잘대는 말도 흡족하기만 했다.

종수는 이규와 제 결혼식에 많은 사람을 부르고 싶지 않았다. 예쁜 이규는 자신만 봐야 했다. 시청은 공개된 장소이긴 하지만, 미국 사람들은 대체로 주변에 관심이 없으니 그 정도는 봐줄 수 있었다. 거기다 이곳은 미국 내 첫 동성결혼이 이루어진 역사가 있어 실제로도 동성 커플도 자주 식을 올리는 곳이라고 하니, 다른 곳보다는 훨씬 더 이목을 덜 끌 것도 같았다.

종수가 부푼 마음으로 이규를 바라봤다. 이규가 기다렸다는 듯 눈을 맞추며 웃었다. 그걸 가만히 보고만 있자니 이규가 입 모양으로 왜애. 하고 물어왔다. 종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규가 종수의 옆으로 좀 더 몸을 치대며 목소리를 냈다.

“왜애.”

“그냥.”

“그냥이라기에는 너무 예뻤는데?”

“……뭐래.”

종수가 고개를 팩 돌렸다. 귓가가 확 달아올랐다. 이규가 으하하. 웃음을 터뜨렸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깜찍하게 구는 애인을, 그가 짓는 미소를 평생 제 걸로 만들 곳을 향하고 있다는 게 참을 수 없이 들떴다.

마침 날씨도 끝내줬다. 어제 오후부터 갠 하늘은 오늘도 내내 쾌청해서 발걸음이 절로 가벼워졌다.

바뀌는 횡단보도 신호에도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게 걸었다. 맞잡은 손이 있어, 예쁜 날씨 아래 원하던 이규를 봐도 어제처럼 울컥하지 않았다. 앞으로 떨어지지 말자고 했으니까. 이규는 한번 내뱉은 말은 지키는 애니까. 신혼부부라고도 해줬으니까. 종수는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괜히 이규의 손을 더 세게 쥐었다. 거기에 응해주는 이규의 악력이 좋았다.

길을 가며 아이스크림도 하나 사 먹고, 고양이가 보이길래 사진도 찍고, 공원을 지나치며 큰 개가 달려와 인사를 하는 바람에─이규에게 달려왔다─ 공도 좀 던져주고 하며 느리게 목적지를 향했다.

종수는 빨리 시청을 보고 싶은 마음에 마음이 조급해졌다가도, 옆에서 아이스크림을 입가에 묻힌 이규라든가, 고양이를 찍겠다고 쪼그려 앉은 이규라든가, 개랑 똑같은 얼굴로 웃고 있는 이규를 보고 있으면 어느새 기분이 흐물흐물해졌다. 핸드폰이라도 들어 그 시간을 카메라에 담고 싶어졌다. 제가 찍은 건 이규만큼 멋들어지지 않을 걸 알아도 그런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도착한 시청은 명성에 걸맞게 밖에서부터도 예쁜 외관이었다. 관공서라기보다는 성당에 가까워 보이기도 했다.

정문에 가까워질수록 시청을 나오는 사람들이 더 자세히 보였다. 웨딩드레스나 턱시도를 입은 커플이 꽤 많이 눈에 들어왔다. 나오는 길에 키스를 해서 박수를 받기도 했다.

이규는 모르는 것 같았지만, 종수는 그들이 가지고 나오는 것이 결혼증명서인 것을 기민하게 눈치챘다. 물론 실제 효력이 있는 건 최소 10일 뒤에나 발부할 수 있고, 식이 끝나자마자 주는 건 기념품에 가깝다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실제로 그걸 가지고 나오는 사람들을 보니 심장이 크게 부푸는 느낌이었다. 종수는 자제한다고 했지만, 발걸음이 서서히 빨라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간단하게 짐 검사를 마치고 ─종수가 검은 봉지 안에 반지들을 넣어 놓는 바람에, 보안 요원에게 이규 몰래 반지를 보여주고 프러포즈를 서프라이즈로 계획 중이라 들고 다닌다는 설명을 해야 하는 해프닝이 있었다─ 들어선 시청 안은 기대했던 것보다도 웅장했다. 돔 천장의 층고가 주는 개방감이나 위압감이 대단했다. 둥근 천장에는 섬세한 조각들이 빼곡히 새겨져 있었고, 창으로는 은은하게 햇빛이 비쳐 들었다. 바닥과 가까운 곳에는 사람 키보다 조금 높은 조명들이 따뜻한 빛을 내뿜으며 실내를 밝히고 있었다. 매끈한 바닥에 그 빛들이 은은하게 맺혔다.

낮 시간대라 그런지 사람도 많았다. 중앙 계단에서는 막 결혼식을 끝낸 커플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옆에서는 다음을 기다리는 다른 커플들이 또 있었다.

종수는 보안 검색대 이후, 시청 중앙 홀에 들어섰을 때부터 빠르게 뛰는 심장을 느끼면서도 진정할 수가 없었다. 여기가 바로 후기에서만 보던 로툰다라고 생각하니 괜히 벅차는 감정이 들기도 했다. 이제 저 계단을 오르면 보이는 홀에서 결혼을 하게 되는 거였다! 종수는 다시 또 빨라지는 발걸음을 애써 달래며 2층에 들어섰다.

마침 결혼식이 진행 중이었다. 판사가 서약 내용을 읽고, 대답하고, 주변인의 박수를 받고, 사랑의 키스까지 나누는 순간을 종수는 거의 홀린 듯 바라봤다. 후기로만 접하던 장면을 실시간으로 보게 되니 몰입이 되는 걸 어쩔 수가 없었다. 며칠 뒤면 저 자리에 자신과 이규가 있으리라고 생각하니 더 그랬다. 종수는 지금만큼은 자신이 수상하게 굴고 있다는 자각도 하지 못한 채, 이규의 손을 더 꽉 부여잡기만 했다.

이규는 종수 옆에 조용히 서서, 그가 원하는 대로 맞잡은 손에 힘을 주며 반짝이는 종수의 모습을 오래 지켜봤다. 이런 데서 결혼하는 게 신기한 모양이었다. 드물게 티 나는 관심을 보이는 모습이 귀여워서, 이규는 그 뒤에도 3층이든 4층이든, 종수가 원하는 대로 모두 이끌려 다녔다.

종수는 이규와 손을 잡고 시청을 누비며 생각했다. 역시 이곳을 결혼식장으로 선택하길 잘한 것 같았다. 햇빛 하나도 괜히 신성하게 내리쬐는 것만 같은 이 공간에, 제가 열심히 고른 예복을 입힌 이규를 세워놓을 생각을 하니 정말 좋았다. 이규는 언제나처럼 제 앞에서만 보여주는 수줍고 신나는 얼굴을 보여줄 거고, 자신은 그런 그의 얼굴을 부여잡고 키스를 퍼부을 거였다. 증인으로 서준다던 동료가 정신 사납게 휘파람을 불기도 하겠지만, 그 정도는 기쁘게 들어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종수는 야무지게 사진을 찍고 싶은 장소를 모두 확인한 후, 그제야 내려가는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짧은 사이에도 카메라나 삼각대 같은 걸 들고 가는 커플들을 참 많이도 마주쳤다. 그걸 보니 이규는 손이 근질근질한 느낌이었다. 이 예쁜 곳을 배경으로 한 종수의 사진을 가지고 싶었다. 이규가 스쳐 지나가는 커플들을 보고 종수에게 넌지시 물었다.

“종수.”

“응?”

종수가 이규를 돌아봤다. 이건 너무 귀여운데…? 이규가 종수를 불러놓고는 말을 꺼내지도 못한 채 입을 살짝 벌렸다.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잔뜩 들떠 발갛게 상기된 얼굴이 자신을 향한 게,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었다.

“응? 이규.”

재촉하는 것도 너무, 사랑스러웠다. 이규가 괜히 손을 들어 얼굴 아래쪽을 쓸고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하마터면 여기가 어디인지도 모르고 당장에 입을 맞출 뻔했다. 그리고 그런 충동까지 참아내고 보니 욕망이 더욱 확실해졌다. 이런 종수를 꼭. 꼭! 갤러리여 담아 두고두고 꺼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 찍게 해주면 안 돼?”

“안 돼.”

“응?”

종수가 고개를 팩 돌리고는 걸음을 옮겼다. 이규가 얼떨떨하게 끌려가며 되물었다.

“……안 돼?”

“응. 안 돼.”

종수로서는 드문 거절이었다. 이규는 의아했다. 이렇게 기분 좋아 보이는데 왜 거절을? 그것도 싫다는 말이 아니라 안된다는 말을? 이규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재차 확인했다.

“진짜?”

“응.”

종수는 사진 같은 건 당연히 안 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서의 첫 사진은, 무조건, 결혼사진이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규는 종수의 속은 당연히 알지 못한 채, 거절하는 종수의 기분이 썩 나빠 보이지 않아서 더 알쏭달쏭했다. 하지만 싫다는 걸 굳이 강요하고 싶지도 않아서, 이규는 보폭을 좀 더 크게 내디뎌 종수와 나란히 발걸음을 맞췄다. 사진을 찍을 곳이야 많았다. 종수는 어디를 배경으로 세워놔도 멋지고 예쁜 피사체였다.

그래도 머쓱한 마음을 지울 수는 없어, 이규는 내려가면서는 괜히 이리저리 더 둘러보게 됐다. 확실히 높은 곳에서 전체를 봐서 그런지 결혼하거나 사진을 찍는 커플들이 더 많이 눈에 띄였다. 거기다 조금 전에는 내내 신나 하는 종수를 보고 있느라 몰랐는데, 동성 커플들도 제법 되는 것 같아 보였다. 그래서인지 종수는 내내 결혼하는 커플들에게서 눈을 못 뗐었구나 싶었다.

“여기 진짜 결혼하는 사람 많은가 봐.”

“어. 그렇대.”

“너 미국에 있을 때도 여기서 결혼하던 사람 있었어?”

“응. 여기서 했던 사람 꽤 있더라.”

그렇구나. 이규가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다시 종수와 손을 고쳐잡았다. 종수가 이규를 흘긋 바라봤다. 그러고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이번에 향한 곳은 결혼 서약을 하는 곳의 맞은편에 있는 2층 난간이었다. 종수는 거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다, 맞은편에서 계단을 오르는 커플을 보고는 이규를 불렀다.

“이규.”

“응?”

이규가 냉큼 답했다. 시선이 마주쳤다. 이규의 눈은 언제나 그렇듯 반짝반짝했다. 미미하게 상기되어 있기도 했다. 이규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들떠 보였다. 종수는 마음이 두근두근했다. 괜히 손을 고쳐잡게 됐다. 그러니 이 정도 질문은 먼저 해봐도 좋을 것만 같았다.

“너는 결혼 안 하고 싶어?”

“나?”

이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대꾸했다.

“응.”

종수도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이규가 잠시 생각을 하는가 싶더니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별로 생각 없는데.”

상상도 못 한 답변이었다. 종수의 머리에 순식간에 경고등이 울렸다. 이건 정말 종수의 상상에 전혀 존재하지 않던 답이었다. 종수가 이규를 다시 뚫어져라 봤다. 여전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런데 왜? 어째서?

순간 이규랑 결혼해야겠다는 제 말에 ‘이규도 그렇게 생각한다니?’ 하고 묻던 엄마의 말이 과거에서 날아와 꽂혔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종수가 더듬더듬 되물었다.

“……왜?”

목소리가 조금 떨리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이규는 잡고 있던 종수의 손을 더 부드럽게 만지며, 여상하게 답할 뿐이었다.

“지금도 충분히 행복하잖아.”

이규가 또 청량하게 웃었다. 종수가 참 좋아하는 얼굴이었다.

“너랑 이런데도 오고.”

그런데 오늘만큼은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더 듣고 싶지 않았다. 종수는 이규와 맞잡은 손에 땀이 스멀스멀 배어 나오는 것도 느꼈지만, 지금은 아무런 액션도 취할 수 없었다.

이규는 그 나름대로 순식간에 넋이 빠진 종수의 모습에 당황하는 중이었다.

시청에 들어선 종수는 누가 봐도 들뜬 모양새였다. 사람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어제의 항구와는 다르게 이리저리 분주하게 눈길을 주는 게 눈에 보였다. 그게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반짝반짝한 공간 안에 초롱초롱한 눈을 한 애인이 있으면 누구라도 그렇게 느꼈을 거였다. 종수가 이끄는 대로 내부를 휘젓고 다니며 그의 시선을 따라가는 것도 설레고 간지러운 기분이었다. 꼭 종수의 세상을 함께 엿보는 느낌이어서 더 그랬다. 사진 찍기는 뭔지 모를 이유로 거절당했지만, 그 말을 하는 종수도 통통 튀고 귀엽기만 했다.

그런데 순식간에 그 모습이 사라졌다. 뭔가 잘못될 거라는 낌새조차 느끼지 못했기에 등 뒤로 식은땀이 주룩 흘렀다. 이규는 빠르게 직전의 상황을 되새겼다.

종수의 질문은 하나였다.

‘결혼 같은 거 안 하고 싶어?’

하지만 그 답에 제대로 답 한 게 아니었나? 자신은 평생 결혼 같은 건 안 할 생각이었다. 종수 옆에 딱 붙어 살 작정이었다. 어제의 종수도 평생 함께할 거지, 같은 말을 했다. 그러면 당연히 결혼은 안 해야 하는 거였다. 이규는 종수와 사귀게 된 이후 결혼에 대한 마음을 완전히 접었었다.

실제로도 이규의 부모님은 결혼이야말로 안정적인 인생을 꾸리는 데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었다. 최고의 사윗감이니 남편감이니 하는 데서 높은 순위를 기록하고 난 후에는 심심찮게 맞선 자리가 들어오기도 했다. 이규는 종수 몰래 그 모든 것들을 처리하느라 제법 진땀을 빼곤 했었다. 종수는 제법 독점욕이 있는 편이라, 이런 걸 알게 되면 정말 내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섬세하고 예민한 그에게 새로운 부담을 지우고 싶지는 않았다.

결국 이규는 종수와 같이 살거라 선언하며 그와 고등학교 때부터 사귀고 있노라고, 그러니 맞선 같은 건 볼 수 없다고 부모님을 설득해야만 했다.

그 몇 년의 과정이 쉽지는 않았으나, 어쨌든 종수가 완전히 귀국하기 전까지 어떻게든 해냈다. 종수가 이걸 혼자서 했다는 걸 알면 속상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종수네 부모님이 자신을 예쁘게 보고 반겨주는 만큼 제 부모님에게도 그런 사랑을 받았으면 했다.

그래도 최근에는 더 유의미한 발전이 있었다. 두 분이 보기에도 좋아 보이셨는지 부쩍 엄마가 종수 얘기를 자주 꺼냈다. 그러고 보니 중학교 때부터 내내 종수 얘기만 하더니 그때부터 좋아했던 거냐. 누가 먼저 좋아한 거냐. 걔네 부모님도 아시냐. 종수도 한번 데려와라. 미국에서 고생한 애 밥이라도 먹이게. 옆에 있던 아버지도 별말이 없었던 걸 보면 아마 두 분의 생각인 듯싶었다. 그 말을 들은 날은 이규도 제법 신이 났었다. 종수와 진짜 가족이 되는 것만 같은 기분에 가슴이 부풀기도 했다.

이규의 입장에서는 고생해서 얻어낸 성과였고, 그 결과를 공유했을 뿐이었다. 도대체 뭐 때문에 종수가 이렇게 혼란스러워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혹시 좀 더 확실하게 말해야 하나 싶은 생각에 이규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종수. 나 결혼 안 해도 돼.”

와장창.

“너랑 평생 살기로 했잖아.”

종수는 제가 세웠던 모든 계획이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눈이 절로 뱅글뱅글 돌아가는 게 뻔했는데, 표정 관리를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

종수? 의아한 듯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도 아무런 대꾸를 할 수 없었다.

‘이규는 결혼을 하고 싶지 않을지도 모른다.’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가정이 생겼다. 그간 숱한 썰에서 봤던 수많은 결혼 반대 사유 및 이별 사유들이 우후죽순 떠올라 종수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결혼을 해서 서로를 책임지는 게 부담스러운가?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아직도 동성연애에 대한 걱정이 있는 건가? 덜해진 건 확실했다. 그렇다면 진짜 결혼이 별로인가? 그렇다면 예복은? 반지는? 결혼식 예약은? 잡아 놓은 호텔은? 와주기로 한 동료는? 아니, 이게 문제가 아니었다. 이런 건 얼마든지 다시 할 수 있었다. 단지 이규의 답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과 평생 같이 살기로 했으면서, 어제는 주말부부나 신혼부부니 같은 말도 했으면서, 왜 결혼은 하지 않는다는 건지 당최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문제는 최악의 상황이란 상황은 다 떠오르는데도 자신은 이규와 결혼이 하고 싶다는 거였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치달으니 더 확실해졌다. 이규와 결혼이 하고 싶었다. 그것도 너무너무. 안 하면 죽을 것처럼.

결혼증명서에 제 이름과 이규의 이름을 나란히 올리고 싶었다. 이렇게 좋은 사람이 내 배우자다, 내보이고 싶었다. 이규 몰래 준비한 예복을 꼭 입혀보고 싶었다. 남들이 다 하듯이 결혼사진을 신혼집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걸어놓고 싶었다. 그 앞에서 사진과 똑같이 입 맞추고 싶었다. 이규의 입에서 자기야, 대신 여보야, 같은 말도 듣고 싶었다. 여보, 왔어? 하고 앞치마를 입고 마중 나오는 이규를 보고 싶었다. 그런 이규의 허리를 감고 키스를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규는 그런 게 아니라면? 나 혼자만의 상상이었다면? 종수는 심장이 저 바닥으로 쿵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너무 혼란스러워서 귀가 먹먹했다.

제 꼴이 남들과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 준비를 하다 깨진 사람들도 처음에는 모두 달콤한 신혼 생활을 꿈꿨을 거였다. 그 과정에서 감당 못 할 트러블이 생겨 파혼하게 되는 거였다.

……이대로 가다가는 이규와 자신도 그렇게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종수는 덜컥 겁이 났다. 이 모든 욕망의 끝에 그들과 같이 헤어짐이 있다면, 종수는 견딜 수가 없을 게 분명했다. 스물두 살의, 미국을 향하던 최종수는 그 사실을 몰랐지만, 서른두 살의 최종수는 그걸 알았다. 모든 시련은 어느 순간부터 이규가 곁에 있어 괜찮은 것이 되었다. 그럴 때마다 종수는 어릴 적 엄마와 아빠 사이에 누워서 듣던, 우리 종수도 평생 자기편인 사람 만나서 사랑하고 결혼해야지. 같은 말을 떠올렸다. 평생 자기편인 사람. 그건 두말 할 것 없이 이규였다. 그런 애를 만났으니 결혼을 하고 싶은 거였다.

하지만 역시 결혼도 이규가 있어야 가능한 거였다. ‘이규와 결혼 후 별거하기’와, ‘이규와 결혼하지 않고 동거하기’ 중 꼭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종수는 아마 후자를 고를 것이었다.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건 이규의 존재가 제 옆에 있는 것이었다. 결혼은 부가적인 요소일 뿐이라는 걸 종수도 머리로는 어느 정도 이해했다.

하지만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심장이 바라는 게 달랐다. 곤란했다. 종수는 한평생 욕심을 잔뜩 부리며 살아왔다. 하고 싶은 건 꾸역꾸역 어떻게든 해냈다. 승리도 사랑도 쟁취했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라는 말을 믿었다. 어려울수록 도전 정신이 불탔다. 어떻게든 그걸 뛰어넘고 싶었다.

하지만 단언컨대, 종수의 인생에서 이렇게 큰 리스크를 지닌 건 없었다. 이건 뛰어넘을 수 없는 종류의 무언가 같기도 했다. 생각이 없는 애랑 굳이 결혼을 하고 싶지는 않으면서도 미치게 결혼이 하고 싶기도 했다. 물론 이규라면 제가 하고 싶다고 하면 들어줄 것도 같은데, 그건 또 싫었다. 자신이 원해서 하는 게 아니라 이규도 이 결혼을 원했으면 했다.

그런데 이걸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보통 이규와의 이런 일들은 솔직하게 말을 하면 해결이 됐는데, 이번 일은 말을 할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하지만 마음이 약해지기도 했다. 샌프란시스코에 온 건 사실, 너랑 결혼이 하고 싶어서였다고 하면 이규는 분명 기뻐해 줄 거였다. 이규의 그런 마음을 못 믿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건 안됐다. 역시 이규도, 자신이 말하기 전부터 같은 생각을 해주었으면 했다. 종수는 필사적으로 이성을 다잡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이 복잡한 머릿속으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였다. 하긴 하되 이 식을 미루는 것이었다. 그 시간 동안 자신은 없지만, 슬쩍슬쩍 이야기를 꺼내서 조금이라도 그의 마음을 더 자세히 파악해 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미루는 것조차도 못 할 자신을 알아서, 사랑을 인내심 있게 기다리며 욕심을 덜 내는 방법 따위는 모를 자신을 알아서, 심지어 그렇게 부추기고 길들이는 데 일조한 게 눈앞의 사랑이라서, 종수는 괜히 또 울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눈가에 열이 뜨겁게 올랐다. 사내자식답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어도 어쩔 수 없었다. 그냥 한없이 억울하고 속상했다.

제 마음이 본인의 말 몇 마디로 진창에 처박힌 건 상상도 못 한 채, 앞에서 안절부절 저만 신경 쓰고 있는 색싯감이 있어 더 그랬다.

종수가 어느 새인지부터 모르게 꾹 물고 있던 입술을 더 세게 짓씹었다. 툭. 뭔가 터지는 느낌과 함께 따끔함이 느껴졌다. 이규가 황급히 손을 뻗었다. 부드럽게 턱에 가해지는 힘에 따라, 종수가 이를 뗐다.

입술이 터진 건 자신이고, 그 입술을 씹어댄 것도 자신이고, 아픈 것도 자신인데, 왜 눈앞의 이규가 더 아픈 표정을 짓는지 종수는 알 수가 없었다. 이렇게 굴면서도 결혼은 생각이 없다니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도 역시 눈앞의 상대와 너무 결혼이 하고 싶어서, 종수는 또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씹어대려다 이규의 손에 제지당했다. 손에 잡힌 턱에 얼얼함이 느껴졌던 것도 잠시, 이규가 곧바로 손을 떼고 종수를 향해 한껏 눈썹을 늘어뜨렸다.

“종수…….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주 큰 일이 생겼지만, 죽었다 깨어나도 할 수 없는 말이었다. 이규에게 라면 더 그래야만 했다. 하지만 자신은 언제나 이규에게만 가장 많은 말을 했다. 부모님도 모르는 일은 이규는 알았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럴 수가 없다는 역시 속상했다.

눈앞의 이규에게는 어쩔 줄 모르겠다는 당황만이 가득했다. 진짜 어쩔 줄 모르겠기에 뛰쳐나가고 싶은 건 자신인데도 불구하고, 그런 얼굴을 한 이규가 야속한 것도 같았다.

[후기]

안녕하세요 썬칩입니다!

드디어... 본격적인 스토리라인에 돌입했군요 ^ㅡ^!! 1~2편이 '기'단계 였다면, 3편부터는 그래도 '승'단계로 돌입한 것 같아 드디어 한숨을 돌렸습니다........ 갈길이 구만리가 뭐야... 구만만리 같긴 한데 뭐 어떻게든 해 낼수 있겠죠? 흑흑

이규는 사실 너무 한국 애라(ㅋ) 종수랑 사귀고 난 다음에는 결혼에 대한 마음은 완전히 접었을 것 같아요. 당연함! 한국은 아직 동성결혼 합법화가 안됨!!!!!! 갑한민국은 더 큰 데한민국일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그러지 않는 편이 더 맛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호호... ... ...!!

이랑해에서는 별다른 고난 없이 꽁냥대는 것만 잔뜩 적었던 것 같은데(ㅋㅋ) 그래도 그랑해에서는?! 본격적인 갈등을 만들어낼 수 있어 이것도 나름대로 쓰는 입장에서 신나고 즐거운 것 같아요ㅋㅋㅋ 하지만 끝은 정말 꽉막힌 해피엔딩일 거니까! 저를 믿고(💕) 끝까지 함께 달려주신다면 기쁘겠습니다 ^ㅡ^!!

댓글 달아주시면... 앞으로 갈 길이 한참이나 남은... 장편연재러에게 아주 큰 힘이 됩니다... 이전 글에도 잘 읽었다고 댓글 남겨주셔서 너무 신났어요~!!🥹 저는 이런이런게 좋아서 드랍더비트를 하고 있으니 함께 얘기 해주시면 기뻐합니다!!


p.s) 아래 사진이 샌프란시스코 시청 외부! 와 로툰다입니다 ^ㅡ^ 중앙 계단을 올라가면 있는 조그마한 원형 홀에서 식을 올릴 예정 ! !!이에요! 넘 예뿌죠ㅠㅁ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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