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
글리프 주간창작 챌린지 6월 1주차 / 쟁준 재유준수
등 뒤로 문이 닫혔다. 시끌벅적한 소리를 내며 부원들이 숙소를 나섰다. 조용히 좀 하라며 준수가 경고했고, 재유는 그런 준수의 옆에 서서 헤드셋을 꼈다.
“아, 차가.”
차가운 물방울이 툭 하고 떨어졌다. 진원지를 찾아 주위를 둘러봤으나 물이 튈 만한 곳은 없었다. 착각인가 싶어 준수가 다시 앞을 바라보자, 이번엔 손등에 물을 맞았다.
“비 온다.”
재유가 그렇게 말하자마자 투둑투둑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많은 양은 아니었으나, 밖에 서 있기엔 불쾌한 그런 정도였다. 다섯의 소년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학교를 향해 달렸다. 다행히 크게 젖지 않고 실내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무지개
w. 오준
종소리가 울렸다. 학생들은 기다렸다는 듯 교실을 뛰어나갔다. 수업을 마친 선생이 나가는 것보다 빨랐다. 그 사이, 창가 맨 뒷자리의 준수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교실이 잠잠해질 때까지 뒷문 옆에 서서 기다리던 재유가 슬쩍 발걸음을 옮겨 준수의 앞에 섰다.
“준수.”
한 번 부른 것으로는 쉽게 깨어나지 않을 듯했다. 앞자리 의자를 빼 앉은 재유가 다시 한번 말했다.
“일어나라, 준수.”
“응....”
대답한 거치고 여전히 미동 없는 몸이었다. 시계를 힐긋 본 재유가 결국 준수의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일어나라 쫌. 돈가스 다 뺏기겠네. 그렇게 중얼거리며 세 번쯤 몸을 흔들었을까, 드디어 준수가 인상을 팍 찌푸린 채로 몸을 일으켰다.
“이제 인났나.”
“재유? ...아, 미안. 좀 피곤했나....”
“얼른 가자. 오늘 돈가스다. 빨리 안 가면 다 털린다.”
재유가 준수의 팔을 잡고 끌었다. 어정쩡하게 끌려가던 준수가 잠 다 깼다며, 놔달라고 외치는 소리가 텅 빈 교실에 울렸다.
“오늘 학교 끝나면 영화나 보러 가까.”
마지막 돈가스 조각을 입에 넣은 재유가 말했다. 준수는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의문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재유를 쳐다보았다. 그 시선을 가만 바라보던 재유가 아, 하는 소리를 냈다.
“오늘 연습 쉬는 거 그새 까먹었나.”
“...아, 맞다....”
오늘은 몇 없는 휴일 중 하나였다. 본격적으로 장마가 시작되기 전 체육관 보수 공사를 한다고 했었다. 공사가 좀 진행이 되면 공사와 연습이 병행 가능한데, 초반에는 체육관 자체를 폐쇄하고 진행해야 한다는 것을 감독님을 통해 들었다. 매일 농구를 하는 게 당연해서 그런지, 그걸 까먹고 있었다.
“와. 뭐 선약 있나.”
“아니, 그냥 숙소 있으려고 했지.”
“이런 날 또 놀아줘야지. 수업 끝나고 니 반 앞으로 가께. 기다리라.”
준수가 마지막 한 숟가락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담임 종례 개 느리잖아. 굳이 안 기다려도 시간 널럴할걸.”
맞나. 재유가 그렇게 말하며 킥킥 웃었다.
예상대로 종례는 늘어지고 또 늘어졌다. 했던 말을 똑같이 하는 담임 덕분에 학생들의 불만 소리가 점점 커져갔다. 결국 여기저기서 지방 방송이 튀어나올 무렵 겨우 종례가 끝났다. 준수가 든 것도 얼마 없는 가방을 챙기고 있을 때, 뒷문 밖에서 준수!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보지 않아도 그게 재유인 것을 알 수 있었다. 가방 지퍼를 잠근 준수가 뛰어나갔다.
창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침에 한두 방울 떨어지던 것이 지금은 소나기가 되어 쏟아지고 있었다. 계단을 내려가며 빗소리를 듣던 준수가 말했다.
“...비 너무 많이 오는 거 아냐? 그냥 숙소 갈까?”
재유가 고민하듯 침묵을 지켰다. 그래도 휴일을 이렇게 보내버릴 순 없었다. 건물 현관까지 나온 재유가 신발을 갈아신었다.
“...정류장까지 경주다. 늦게 간 사람이 영화 쏘는 걸로.”
그러고는 준수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총알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준수가 급하게 신발을 갈아신고는, 야! 하고 도망한 자를 쫓으며 소리를 질렀다. 빗물에 축축하게 몸이 젖어갔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재유는 비겁하게 시작한 만큼 꼭 이겨야 했고, 준수는 저놈을 잡아 따져야 했다.
학교에서 정류장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결국 먼저 출발한 재유가 먼저 도착해 정류장 빗물받이 밑으로 쏙 들어갔다. 곧 준수가 뛰어 들어오더니, 재유의 어깨를 콱 쥐었다.
“진재유....”
재유가 과하게 아픈 척하며 어깨를 비틀었다.
“아아, 미안타 준수. 아니 누가 그래 느리게 신발 갈아신을 줄 알았나.”
반성하는 태도가 전혀 없는 재유에 준수가 손에 힘을 주었다. 엄살이었던 어깨에서 진짜 고통이 느껴지자 재유가 항복이라며 미안한 듯 두 손을 모았다. 그제야 준수가 어깨를 놔주었다.
“아야야... 준수 내 어깨 빠개질 뻔했다.”
“엄살피우지 마. 내가 진짜 그랬겠어? 너까지 없으면 우리 농구부 망해.”
하하... 하고 재유가 웃었다. 이후로는 계속 침묵이었다. 그러나 딱히 그게 불편하다고 느껴지진 않았다. 곧 버스가 도착하고, 버스에 탑승한 둘은 목적지로 향했다.
버스에서 내려 영화관으로 달려갈 땐, 빗줄기가 많이 약해져 있었다. 건물과의 거리도 멀지 않아 비를 많이 맞지 않고도 무사히 건물에 입성했다. 빗물에 몸이 축축했지만, 다행히 영화관 입장이 거절된다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둘은 화장실로 직행해 휴지로 몸을 닦았다. 대충 젖은 것이 수습되자 표를 사기 위해 무인 발권기로 향했다. 문제는 여기서 일어났다. 볼 만한 것이 없었다.
“너 전에 뭐 재밌어 보인다고 한 거 있지 않았어?”
준수가 기억을 더듬어 재유가 보고 싶어 했던 영화를 찾았다. 그러나 이미 상영이 종료된 지 한참이었다. 지금 예매가 가능한 것으로는 청소년 관람 불가 영화뿐이었고, 그나마 볼 만한 코미디 영화는 한 시간하고도 삼십 분이 더 지나야 상영 시간이었다.
“...이거 볼래?”
여기까지 온 게 아까워서라도 그냥 돌아갈 순 없었다. 준수는 그 영화를 두 장 예매했고, 붕 떠버린 시간 동안 카페에서 시간을 죽이기로 했다. 둘은 영화관 옆에 있는 카페에 앉아 멍하니 음료를 마셨다. 그새 옷이 많이 말라 의자에 앉을 수 있었던 것이 다행이었다.
“...이거 재밌을까?”
준수가 표 두 장을 흔들며 물었다.
“그냥 평범할 것 같다. 저번 주에 아들이 봤다고 한 것 같은데.”
“아, 물어보지 마. 그 새X들 백퍼 스포할걸.”
재유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음료는 십 분 만에 동이 났다. 한 시간 남짓 남은 시간을 그냥 앉아있기 민망해 준수가 케이크를 두 조각 사 왔다. 그걸 육십 분에 걸쳐 먹고 있자니 케이크 맛도 잘 느껴지지 않아, 괜히 웃음이 났다. 재유를 쳐다보니 마찬가지인 듯했다. 결국 소리 내서 킥킥 웃고 말았다.
영화는 무난했다. 코미디 영화답게 중간중간 웃긴 장면도 있었고, 여느 한국 영화가 그렇듯 눈물이 날 법한 구간도 존재했다. 두 사람 다 딱히 울지는 않았지만, 적당히 촉촉해진 감성으로 영화를 끝까지 보고 나왔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 약해졌던 빗발이 완전히 멎었다. 구름에 가려졌던 태양이 빛을 내뿜고 있었다.
“다행이다.”
돌아갈 땐 젖지 않아도 되었다. 휴,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쉰 두 사람이 다시 정류장으로 향했다. 저 태양 위에, 무지개가 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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