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료

먼 거리를 지나 온 해

멀리 가지 않아도 돼, 내가 너의 태양이 될 테니.

조각 by 휘안
7
0
0

색은 산란하는 것이다. 흡수된 빛은 보이지 않으니 산란하는 것만을 인간의 눈이 잡아내는 것이다.

단지 그 뿐인 것에 인류는 왜 그렇게 의미를 부여하고 그 아름다움을 이야기 하는지, 그래서 색을 보지 못하는 이들을 비참하게 만드는지.

어째서 색의 상실이 그토록, 그토록….

[ 먼 거리를 지나 온 해 ]

: 멀리 가지 않아도 돼, 내가 너의 태양이 될 테니.

온통 회색 뿐인 세상에 살면 무슨 기분일까. 볕 들지 않는 그림자 속에 살아가며 색채가 사람들을 기쁘게 만들지 못하는 곳, 색이 없는 사회. 그런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사물은 어떻게 다가올까. 빛나지 않는 무채색의 세상은 괴롭지는 않을까?

세이는 조이를 보며 깜빡, 상념에 빠져들었다. 이따금씩 마을에 찾아오는 저─,

"그렇다니까, 나는 무지개의 요정이잖냐. 이번에 다시 온 건 여기에도 색이 있기 때문 아니겠니."

그래, 저 간악한 사기꾼이 동생과 대화할 때면 드는 생각이었다. 저 놈이 세 치 혀로 조이를 잔뜩 홀려놓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아이가 좋아하니 멀리하라고 당부하기도 애매한 것이 현실이었다. 사기꾼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참 꾸준하게 '무지개의 요정'같은 소리를 지껄였으니 조이의 흥미를 끄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세이는 가끔 과거를 생각했다. 어쩌면 동생은 잃어버린 색을 되찾고 싶어하는 건 아닐까하고. 혹은 그날 온화한 화마가 그에게서 색을 앗아간 것으로 자신을 탓하는 것은 아닐지. 물론 아닐 가능성이 더 높으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조이가 단 한 번도 관련해서 자신을 원망한 적은 없었던 것이다. 담아만 두고 있을 수도 있긴 했지만…. 세이는 느릿한 움직임으로 골몰하던 고개를 들다가 가까이 얼굴을 들이대던 조이와 눈이 마주쳤다.

"!"

"헉, 누나 괜찮아?"

철푸덕 자빠지는 소리를 들었는지 조이가 허둥지둥 허공을 휘저었다. 어차피 보이지도 않으면서 괜히 신경 쓴다고 생각하며 세이가 바지를 털고 일어섰다.

"아저씨, 할 말 다 했어요? 조이, 다 들었으면 가자."

조이는 사기꾼을 돌아봤다. 눈이 안 보이는 것치고는 방향을 섬세하게 알았다. 분명 부모님의 영향이 있을 테다.

"어어. 그래, 곧 해도 질 것 같으니까 얼른 가봐라. 아마 이번엔 그렇게 금방 떠나지 않을 거야."

조이가 화색이 되더니 세이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내일도 올게요─같은 소리를 들으며 세이는 자리를 떴다.

조이는 세이를 올려다봤다. 손을 잡고 있으면 기척을 가늠하지 않아도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아저씨를 만나고 돌아갈 때면 자신의 누이는 생각에 휩쓸려 침잠하곤 했다.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자신은 아저씨를 만나면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즐거운데 세이는 그를 사기꾼이라고 불렀다. 혼잣말하는 것을 얼결에 엿들은 거라 대놓고 물을 수는 없었다. 단지 누이가 그 '무지개의 요정'이라는 걸 믿지 않는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히 알 것 같았다. 그래도 조이는 무지개가 궁금했다.


온기가 얼굴에 닥친다. 타닥타닥─, 나무로 된 건물이 화마를 견디지 못하고 우지끈, 무너진다. 세이는 어쩔 줄 모르고 망연히 앉아서 불 타오르는 집이었던 것을 본다. 다리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반대로 팔에는 힘이 절로 들어간다…, 품에서는 이미 정신을 잃은 동생이 고통에 찬 신음을 흘린다. 사방이 연기로 뿌옇게 흐렸다. 매캐한 공기가 눈을 찌르고 코를 찌른다. 목이 아프고 코가 매워서 숨이 잘 안 쉬어졌다. 어디선가 장작이 타는 냄새와 함께…, 그것을 뭐라고 불러야 하지? 아, 그래, 단백질이 익어가는 냄새가 어렴풋이 나는 것 같았다.

세이는 퍼뜩 잠에서 깨어났다. 식은땀에 젖은 베개가 축축했다. 숨이 가쁘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악몽의 후유증이었다.

'…조이는,'암순응되지 않은 눈을 가늘게 뜨며 시선을 돌린 세이는 곤히 잠든 동생을 발견했다. '아, 멀쩡하네….'

대저 악몽은 일대의 사람들 전부를 휩쓸고 가는 사념과 같은 것. 여러 사람을 괴롭히고 사라지는 현상이니 만큼 혹여 동생이 휘말리지 않았을까 두려웠다. 다행스럽게도 자는 모양새를 보니 악몽을 꾼 것 같지는 않았다.

가만히 새근거리는 조이의 숨소리를 듣던 세이는 조심조심 한 칸 뿐인 방을 나섰다. 완연한 밤일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보다는 밝은 새벽이었다. 규칙성 없는 색들의 나열로 된 이 마을의 건물들이 새벽의 미약한 빛을 받아 흐리게 산란한다.

다름을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 그 안에서 특이점을 가진 자신과 동생. 필연적으로 쫓겨날 수 밖에 없었던, 보지 못하는 맹인과 온도에 둔한 결함품. 부모를 잃은 아이들에게 세상은 그리 친절한 곳이 아니었다.

"사기꾼 아저씨, 아저씨는 완전 색맹이죠?"

세이가 사기꾼이라고 부르는 남자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무지개를 본 적은 있어요? 색도 구분 못하면서 왜 무지개의 요정이라는 거짓말 따윌 하는 거예요. 애들을 속여 먹으면 좋아요?"

"난 무지개를 찾고 있는 거야."

"무지개를 왜 여기서 찾아요."

"너는 색을 보잖아. 이곳의 불규칙한 빛의 산란을 너는 알 텐데."

"그거랑 아저씨랑 무슨 상관인데요."

도무지 말이 예쁘게 나오질 않았다. 세이는 속이 부글부글 끓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뭔지는 몰라도 집 앞까지 찾아오시는 건 좀 아니,"

"나는 항상 너를 기다렸어, 네 동생이 아니라. 그러니까 너무 걱정 말지 그래."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들, 정립되지 않는 의미가 머리 속을 맴돈다. 나를? 왜? 세이는 점점 밝아져오는 하늘을 흘끗 보며 희미한 두려움을 느꼈다.

"…아저씨 혹시 변태예요?" 맹랑한 어린아이처럼 그림자 속의 인물에게 말을 걸었건만, 역시 어른은 믿기 힘든 존재들이 맞는 것 같았다.

"실없는 소리 마. 너도 무의식 깊은 곳에서는 알 걸. 네가 내 첫 번째 무지개야. 그래서 너를 기다렸어."

세이는 그게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첫 번째 무지개라니, 그럼 두 번째나 세 번째도 있다는 말인가? 애초에 색을 보지 못하는데 무지개라는 건 또 무슨 소리인가. 그러니 저건 그냥 헛소리일 테다. 그래야만─.

"나는 스스로 색을 버렸어. 세상에 분명히 존재할 무지개를 찾기 위해서. 그리고 네가─," 세이는 그가 말을 끝맺지 않기를 바랐다. 바람이 무색하게도 할 수 있는 것은 없었지만. "─내 붉은 색이야."

※ 이하 미완 ※

카테고리
#오리지널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