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리(順理)

주간창작 챌린지 6월 1주차: 무지개

황제의 처소가 있는 태청궁 위로 무지개가 내렸다.

예로부터 무지개란 오색으로 빛나는 긴 몸을 가진 짐승이나, 다리와 꼬리가 없어 용과 같은 상서로움은 갖추지 못한 것이라 하였다. 내린 자리에 재앙을 가져온다 하는 그 무지개가 황제의 머리 위에 드리운 것이니 이는 분명 흉조였다.

나라의 점복을 전담하는 관상감에서는 이 괴이한 일이 의미하는 바를 알기 위해 서둘러 천기를 읽고 점을 쳤다. 그 결과를 태청궁에 전하기도 전에 황제에게서 명이 내려졌다.

“오색이 궁에 비치는 것은 곧 반란이 일어날 징조이니, 무지개의 끝이 가리킨 동쪽에서 반역을 꾀하는 이를 잡아들이라.”

명을 들은 궁 안 모든 이들의 짐작대로, 그것은 천문과 점술에 능하다 알려진 승지 박병찬의 간언에 따른 것이었다.

옥에서 불려 나온 최종수가 포승에 묶인 몸으로 끌려온 곳은 황제의 어전이었다. 갑작스럽게 밀어닥친 의금부 관원들에 의해 제국 동쪽 국경을 수호하는 장군의 신분을 박탈당하고 수도로 압송당한 지 꼬박 이레가 지난 날이었다.

양어깨를 짓눌려 돌바닥 위로 무릎 꿇려 앉혀지자 짧아진 머리카락이 이마 위로 흘러내렸다. 익숙해질 수 없는 감촉이었다. 최종수는 고개를 세차게 저어 시야를 가리는 머리카락을 털어버렸다.

그동안 아무리 부정을 해도 믿어주는 이 하나 없는 추국이 세 번 있었다. 첫 번째 추국이 있던 날, 나라의 풍습과 법도에 따라 기르던 머리카락은 죄인의 신분이 되었다는 표시로 잘려 나갔다. 죄가 확인되기도 전에 머리칼을 자르는 경우는 없다. 그러니 최종수에게는 죄가 있는 것이다. 실제로 모반을 하였건 그렇지 않건 중요치 않다. 황제께서 그에게 죄가 있다 생각하시니, 최종수에게는 죄가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오래전 서거한 선황제는 강력한 군사력으로 제국을 건설한 사람이었다. 선황제는 그의 혼곤한 생에서 세 가지를 키웠다. 첫째는 영토다. 그는 주변 여섯 나라를 함락시켜 통일 제국을 세운 뒤, 국왕의 칭호를 버리고 스스로 시황(始皇)이라 칭하였다. 둘째는 욕심이다. 더 이상 무너뜨려 차지할 영토가 남지 않자 그의 탐욕은 다른 곳으로 향했다. 금을 입힌 벽돌로 세운 거대한 황궁 안에서 금은보화와 미녀에 둘러싸여서도 그는 만족할 줄 몰랐다. 제국 안의 누구보다도 많은 것을 가진 이였지만 끝없이 탐내고 빼앗았다. 셋째는 의심이다. 스스로 쌓아 올린 거대한 권력과 엄청난 부를 탐내는 이가 있을 것이라 의심하고, 황제의 귀한 목숨을 노리는 자가 있을 것이라 의심하였다. 그는 백성이며 신하는 물론이고 정비와 후궁, 자식들까지 모두를 의심하고 경계하며 살다 생을 마감하였다.

시황의 정비에게서 장자로 태어나 자란 현 황제는 마음이 약하여 야욕의 부덕은 피해 갈 수 있었으나 의심을 물려받은 사람이었다. 후궁을 계속 바꿔 들여도 좀처럼 후사가 태어나지 않으니 불안이 피어나고, 불안은 더욱 의심을 키워내었다. 결국 그의 눈은 사냥 중 낙마하여 세상을 떠난 아우, 긴 병을 이겨내지 못한 아우를 거쳐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막내 이복형제이자 백성들에게 크게 사랑받는 젊은 장군 최종수에게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형님의 성정을 아는 최종수는 스물여섯의 나이가 되도록 어느 집안과도 연줄이 생기지 않도록 혼례를 피했으며, 장군 직위를 제외한 어떤 관직조차도 받지 않았다. 열일곱에 궁을 떠난 이래 수도에 다시 발을 디딘 적조차 없었다. 그렇게 낭떠러지 위에서 외줄을 타듯 조심스럽게 살아왔건만, 마침내 황제의 근원 없는 의심에 덜미를 잡히고 만 것이다.

평소라면 황제의 명을 기다리는 많은 대신으로 가득 차 있을 어전은 비어 있었다. 종횡으로 30간을 훌쩍 넘기는 넓은 실내에는 정면에 보이는 단상 아래에 작은 탁상을 마주하고 앉은 서기가 하나, 벽 쪽으로 약상자를 곁에 두고 앉은 어의가 하나, 그리고 최종수가 끌려들어 온 입구 쪽에 호위병이 둘 서 있을 뿐이다. 드넓은 영토의 각지에서 올라오는 보고를 매일 받아야 하는 제국의 황제를 위해 건축된 널따란 어전은 사람이 없어 광활해 보일 지경이었다.

최종수는 고개를 들고 옥좌가 놓인 단상 위로 시선을 주었다. 옥좌에 앉은 황제는 곁에 바짝 붙어 선 키가 크고 날씬한 남자와 작은 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최종수와 열다섯 살 차이가 나는 큰 형님은 보지 못한 9년 동안 놀랍도록 변해 있었다. 의심은 그의 얼굴을 빨리 늙도록 만들었고, 불안은 몸을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제국 전체를 가혹한 법과 무거운 세금, 과도한 노역으로 짓누르고 있는 황제는 타고난 풍채마저 잃고 오그라들어 있었다. 황제가 광증을 앓고 있다는 풍문이 떠도는 것도 이해가 갈 정도의 모습이었다.

옥좌 곁에 선 남자는 황제가 유일하게 신뢰한다 일컬어지는 승지 박병찬이었다. 관상감의 말단 관리로 궁에 들어와 황제를 직접 보필하는 측근의 자리까지 올라간 이였다. 세간의 평은 좋지 않다. 황제의 총애를 등에 업고 방자하게 군다는 말부터 세 치 혀로 마음 약한 황제를 이리저리 휘두르고 부추기는 간신이라는 평까지, 박병찬에 관한 나쁜 소문은 최종수가 있던 먼 동방 국경 지대까지도 날아오곤 했었다.

제국을 세우고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확립한 부친에 비해 내세울 만한 업적이 없는 것을 불안해하는 현 황제는 토목 공사에 열을 올렸다. 반란이 일어나는 것을 막을 생각으로, 점령한 나라의 국경 성벽을 모두 허물고 언제든 대군이 진입할 수 있도록 길을 닦았다. 제국 곳곳에 시황과 자신의 거대한 동상이며 기념비를 세웠다. 제국 영토 전체를 둘러싸는 거대한 장벽 건설을 시작했다. 시황이 건설한 왕성에도 황제의 명에 따라 거대한 연못이 만들어지고, 황금 누각이 세워지고, 심지어는 산에서 날라 온 바위를 쌓아 올려 만든 거대한 폭포까지 지어졌다.

선황제 시절부터 시작된 강압적인 통치와 무거운 세금에 더해, 끝없는 토목공사에 동원되는 백성들의 불만은 상당한 것이었다. 그렇다 해도 제국의 주인인 황제를 향한 험담을 입에 담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결국 백성들의 저주는 황제를 부추겨 토목 공사를 하도록 종용하고, 그에 필요한 자금을 만들기 위해 세금을 올리도록 한다는 간신 박병찬에게 향하고 있었다.

들리는 소문이 어디까지 사실인지는 몰라도, 사람을 다루는 데 능숙한 자이니 그리 어렵지는 않았으리라. 처음 만난 9년 전부터 이후로 4년간 그는 최종수마저 이리저리 밀고 당기며 흔들어 놓곤 했었다. 그런 그이니 소심하고 늘 불안해하는 황제를 휘둘러 원하는 바를 이루는 것은 손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허리를 깊숙이 굽혀 귀를 가까이하고 황제의 옥음을 듣던 박병찬의 눈동자가 어전 한가운데 동그마니 꿇어앉혀진 최종수에게 향했다. 생각을 읽기 어려운 새카만 눈동자가 최종수와 시선을 맞춘다. 그 눈은 마지막으로 보았던 5년 전과 달라지지 않았다. 이제 야전에서 말을 달리고 눈비를 맞지 않는 만큼 매끄러워진 피부며 몸을 감싼 호화로운 비단옷, 묶지 않고 흘러내리게 둔 긴 머리칼이 낯설 뿐이다.

박병찬이 허리를 펴고 몸을 일으켜 똑바로 섰다. 모아 쥔 접부채를 제 턱에 대고는 목소리를 높인다. 상당 부분의 격식을 치워버린, 대국의 황제에게 하기에는 터무니없이 편한 태도였다.

“죄인이 도착했습니다, 폐하.”

“그, 그래….”

황제가 움찔거리며 최종수를 보았다. 후궁의 배에서 태어났다지만 같은 아비의 피를 물려받은 동생일진대, 최종수를 향하는 황제의 눈에서는 친애의 조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백성들의 지지에 눈이 멀어 황제의 자리를 탐하는 적을 향한 증오뿐이다. 그러면서도 심약한 마음 탓에 무릎 꿇려진 죄인조차 똑바로 노려보지 못하고 위엄 없이 흔들리는 눈빛이다.

광대한 제국의 주인이 곁에 선 박병찬의 소매를 어린아이처럼 잡아끌었다. 박병찬이 다시 허리를 굽히니 그의 귀에 무언가 속삭인다. 그러면서도 불안한 눈은 계속해서 최종수를 흘끔거린다. 박병찬이 몸을 일으키며 답했다.

“예. 분부 받들겠습니다, 폐하. 제가 직접 확인하도록 하지요.”

박병찬이 황금빛으로 빛나는 단상에서 계단을 걸어 내려왔다. 한쪽 다리를 절어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걸음이었다.

5년 전, 박병찬은 국경을 넘어와 백성들을 약탈하던 유목 오랑캐들을 몰아내던 중 무릎에 화살을 맞고 말았다. 막사 안에서 최종수의 품에 안겨 의원의 도착을 기다리던 박병찬은 탄식처럼 중얼거렸었다.

“의원은 부를 필요 없었어. 이제 내가 이전처럼 달릴 수도 말을 탈 수도 없다는 건 이미 알아.”

섣부른 말에 화를 내는 최종수를 향해 박병찬은 희미하게 웃었었다. 깊은 체념과 서글픔이 섞인 미소였다.

“아무래도 순리에서 벗어날 수가 없군. 이 부상을 피할 수 있었다면 어떻게든 발을 빼려 했건만.”

그리고 박병찬은 굳게 입을 다물어버렸었다. 최종수가 무엇을 물어도 더는 한마디도 답하지 않았다.

나라가 제국으로 성장하기 전부터 대를 이어 천문과 점복을 담당하는 관상감의 하급 관리로 일해온 집안에서 태어났다던 박병찬이었다. 가풍에 따라 천기를 읽고 점을 치는 법을 자연스레 익혔다 했었다. 밤새워 하늘을 올려다보며 다른 이의 시간과 어긋나 사는 것도 싫고, 점쟁이로 살아가는 것도 싫어 일찌감치 무과시험을 보았다 했다. 무장으로서 출중한 재주를 갖춘 이였지만 집안 내력으로 얻은 지식 때문인지 이따금 그는 그런 알 수 없는 말을 던지곤 했었다.

열일곱 나이에 부친인 시황의 상을 치르고, 태자였던 큰형님이 새 황제로 즉위하는 것을 지켜본 후 바로 궁을 나온 최종수와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다. 지엽적인 반란이 계속 이어지던 북방의 땅, 흩날리는 눈보라 속에서 마주친 그는 최종수를 보고 몹시 놀란 얼굴을 했었다.

“허어…. 이런 곳에… 계실 분이 아닌데…. 왜 여기에….”

최종수의 신분이며 이름을 듣기도 전에 그런 말부터 던진 박병찬은 이내 몹시 곤란한 표정으로 얼굴을 찡그렸었다. 의문과 불쾌감으로 심기가 불편해진 종수가 이유를 추궁해도 박병찬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말과 표정의 의미에 대해 알게 된 것은 그 후로 4년이 지나, 다리를 절게 된 박병찬이 제국 수도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한 날이 되어서였다.

비단 스치는 소리를 내며 박병찬이 최종수의 앞에 와 섰다. 조심스레 다리를 굽혀 왼쪽 무릎을 꿇고 앉는다. 최종수와 박병찬의 머리가 같은 높이가 되었다. 보지 못한 5년 동안 꾸준히 노력을 한 것인지, 거의 굽히지 못하던 오른쪽 무릎은 이제 어느 정도 움직일 수 있게 된 모양이다.

검과 활을 놓은 5년 동안 믿을 수 없이 부드러워진 두 손이 최종수의 어깨를 시작으로 몸을 훑어 내려갔다. 숨겨진 무기나 암기는 없는지 몸 구석구석을 더듬고, 포승은 제 역할을 하는지 살핀다. 느긋하고 꼼꼼히 일을 마무리한 박병찬의 손이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아무것도 없사옵니다, 폐하. 포승 역시 단단합니다. 죄인은 갓난아이처럼 무력하오니 안심하시옵소서.”

즐거운 기색의 보고가 어전의 천장을 울렸다. 그러고도 박병찬은 몸을 일으키지 않고 최종수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옥에 갇히고 추국을 당하는 이레 동안 상해버린 얼굴을 살피고는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웃었다.

“폐하. 제가 입궁하기 전 무인으로 북방에서 3년, 동방에서 1년을 보냈다는 이야기는 알고 계시지요? 저는 그 4년간 이 자와 같은 전장에 있었습니다.”

박병찬은 달라졌다. 검고 또렷한 눈은 이전과 같다 생각했지만 그 외에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 그는 이제 최종수가 아는 전장의 무인과 다른 이였다. 내젓는 손동작은 나긋하고 그 소매에서는 향내가 풍긴다. 말투는 간지러워지고 목소리에도 희미한 교태가 서렸다.

“최 장군은 당시부터 오만하고 모든 이들을 눈 아래로 보는 자였지요. 저 역시 이 자의 방약무인한 태도나 말에 여러 번 마음이 상했었습니다. 천기를 거스를 헛된 욕심을 품은 자는 역시 태가 나기 마련인 법이지요.”

최종수는 속으로 혀를 찼다. 딱히 누군가를 낮잡아 보고 대한 적은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단둘이 있을 때면 신분도 계급도 무시하고, 고작 두 살이 많은 나이를 내세우며 말을 놓던 박병찬 쪽이 오만했던 것이 아닌가. 물론 구태여 지적하지 않고 내버려둔 것은 최종수였지만.

박병찬이 몸을 일으켜 세우자 황금 단상 위에서 위력 없는 목소리가 날아왔다.

“승지. 감히 황제에게 역모를 하려 한 자는 어찌하여야 하는가?”

“제국 이전의 법에 따르면 반란을 일으킨 자는 참수하고, 모반에 그친 경우는 장형 후 유배를 보내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 가담자들은 모두 신분을 박탈하고 장형에 처하도록 합니다. 허나 시황께서는 역모는 중죄 중의 중죄이니 꾀한 것만으로도 같은 처벌을 하라 명하셨습니다. 하여 선대에는 반란을 실제로 일으킨 자도, 반란을 꾀한 자도 모두 참수, 가담자들 역시 모두 참수형에 처하신 것으로 알고 있사옵니다.”

“그대의 의견은 어떠한가, 승지?”

최종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여기 앉은 사람을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물건처럼 취급하며 처분에 대해 논하고 있는 두 사람이 쥐고 있는 것은 최종수의 목숨 하나가 아니다. 동방 국경에서 최종수와 가깝게 지내던 참모들, 병사들의 모든 목숨인 것이다.

“황제 폐하! 맹세코 저는…!”

외쳐 부르짖은 순간 무언가 입을 막았다. 최종수의 앞에 버티고 선 박병찬이 손에 든 쥘부채 끝으로 최종수의 입술을 찍어 누른 것이다.

“무도한 죄를 꾀한 자라 그리 속된가? 어전에서 폐하의 허락도 없이 함부로 입을 놀리는군.”

최종수는 그대로 입을 닫고 말았다. 박병찬의 말 때문은 아니었다. 최종수는 그대로 눈을 내리깔고 입술을 누른 쥘부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부채의 겉대에는 제국 북방 영토에서만 나는 수수한 풀꽃이 섬세하게 새겨져 있다. 이건 최종수가 알고 있는 물건이었다.

북방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던 열여덟 살의 일이었다. 어린 나이지만 장군의 직위를 달고 있는 최종수의 목숨을 노린 자객이 있었다. 병으로 부모를 모두 잃고 하나뿐인 오빠를 만나러 왔다며 도움을 청한 젊은 여자에게서 독 바른 비수를 맞은 최종수는 막사에서 사흘을 꼬박 앓다 깨어났었다.

눈을 떴을 때 처음으로 본 것은 박병찬의 얼굴이었다. 피로로 주위가 검게 물든 눈을 한 박병찬은 깨어난 최종수를 향해 환하게 웃었었다.

“넌 여기서 이렇게 죽을 운명이 아니야. 순리가 널 지키고 있으니 어서 털고 일어나.”

그건 박병찬이 신분도 계급도 한참 높은 최종수에게 처음으로 반말을 한 순간이었다. 묘한 그의 말이 신경 쓰여서, 곧이어 박병찬이 피곤한 눈두덩을 누르며 자객이 지니고 있었다는 온갖 암기들을 보여주는 데 정신이 팔려서 그만 그의 무례를 지적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었다.

북방의 여름꽃이 새겨진 쥘부채는 자객이 가지고 있던 물건이었다. 부채 끝에 달린 장식을 당기면 부챗살 사이로 손톱만 한 작은 칼날이 나타나는 암기다. 누군가를 해치기에 그리 쓸모가 있을 것 같지는 않은 무기였다. 독을 더한다면 약간은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싶은 정도일까.

최종수는 끝을 뾰족하게 갈아낸 비녀며, 바늘이 튀어나오는 손거울 따위의 암기들을 구경한 뒤 모두 태워버리라 말했다. 하지만 박병찬은 이 특이한 쥘부채가 꽤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었다.

이듬해, 늦더위 가득한 막사 안에 함께 누워 있었을 때 박병찬은 쥘부채를 꺼내 펼쳐 땀에 젖은 최종수의 이마며 어깨를 향해 바람을 보내 주었다. 겉대에 새겨진 무늬를 보고 그 부채임을 알아챘지만, 최종수는 부드럽게 불어오는 바람에 그냥 눈을 감고 말았다. 부채 안에 숨겨진 칼날이 자신을 향할지도 모른다는 의심 같은 건 조금도 떠오르지 않았었다.

박병찬의 쥘부채에는 그 작은 칼날이 아직 그대로 달려 있을까. 그렇다면 위험천만한 일이다. 암살을 몹시 두려워한 시황께서는 내전 안에 황제를 제외한 누구도 무기를 가지고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법을 만들었다. 작은 무기라도 지니고 들어온 것이 발각되면 사형에 처해지는 것이다. 법은 엄격하게 지켜져, 내전 안의 호위병조차 무기는 지니지 못하게 되어 있다. 내전은 오직 황제만이 허리에 검을 차고 있을 수 있는 공간이었다.

박병찬의 쥘부채에 관해 길게 생각할 상황은 아니었다. 지금 죽음에 가까이 서 있는 것은 박병찬이 아니라 최종수일 것이다. 여기서 이렇게 죽을 운명이 아니다. 순리가 널 지키고 있다. 박병찬의 그 말은 어디까지 내다보고 한 말이었을까. 지금 이 자리에서도 순리는 최종수를 지키고 있을까. 박병찬이 해준 말들은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일까.

입술을 누르던 쥘부채가 떨어져 나갔다. 박병찬은 옥좌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입을 열었다.

“제 의견을 말하라 하신다면, 저는 시황께서 내리신 말씀이 진정 옳다고 생각하옵니다. 반역을 생각하고 준비하는 것 역시 반역을 행한 것과 진배없는 중죄. 참수하셔야 옳을 것입니다. 또한 이 자는 나라에 어지럽히려 한 죄에 더해 같은 피를 나눈 형제를 해하려 한, 하늘도 용서치 않을 중죄인이옵니다. 참수 후에 그 목을 내걸어 이 자의 죄상을 세상에 널리 알려는 것이 응당할 줄로 아뢰옵니다.”

북방의 눈보라보다 차가운 목소리가 내전을 울렸다. 말문이 막힌 최종수는 박병찬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황제와 최종수 사이에 선 박병찬의 옆얼굴은 혹독한 의견과 마찬가지로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문득, 최종수를 향한 박병찬의 한쪽 눈이 살며시 감겼다 다시 뜨여졌다. 그러는 동안 얼굴의 다른 부분은 털끝만큼도 바뀌지 않았다. 그건 반란을 진압하던 북방의 전장에서, 유목 오랑캐와 싸우던 동방의 전장에서 박병찬이 보내곤 하던 신호였다.

신호를 보낸 박병찬은 최종수를 향해 검을 휘둘러 어느새 등 뒤로 다가온 적을 처치하기도 했었고, 최종수의 멱살을 붙잡아 땅에 쓰러뜨려 그를 노리는 창을 피하게 해주었고, 늙은 대장군 앞에서 최종수의 잘못을 사뭇 모질게 비난하여 오히려 동정을 사게 해주기도 했었다.

날 믿어라. 내가 어떤 짓을 하더라도 놀라지 말고, 움직이지 마. 그런 의미를 담은 신호가 최종수를 향해 살그머니 날아온다. 마음이 편해지는 건 아니지만, 믿을 수밖에 없다. 전장에서 여러 번 최종수를 살려낸 박병찬이다. 고맙다는 말을 할 때마다 고개를 저으며 같은 말을 반복한 사람이다. 순리는 널 여기서 쓰러뜨리지 않아.

박병찬이 하늘을 보며 읽어낸 운명, 순리가 무엇을 준비하고 어디로 이끌어가는지 최종수는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이제는 그저 믿고 흐름을 따라가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호송 수레에 실려 수도로 압송되던 중, 최종수에게는 두 번의 탈출 기회가 있었다. 용케 몸을 빼낸 휘하의 참모와 측근 병사 몇이 계속해서 뒤를 밟으며 따라왔던 것이다. 어느 고을의 옥에 갇혀 하룻밤을 보내게 될 때면 적어진 호위와 야음을 틈타 참모가 접근했었다.

“장군께서 억울한 누명을 쓰신 것은 저희가 잘 압니다. 이대로 끌려가시면 모진 고형을 당하실 것이고 이후는 어찌 될지 모르겠습니다.”

소란을 피워 최종수를 탈출시킬 테니, 이후에는 함께 동방의 오랑캐들에게 투항하건 남쪽으로 바다를 건너건 하자는 거였다. 어설프고 미래가 보이지 않는 계획이었다. 최종수는 그의 제안을 두 번 모두 거절했다. 결국 참모는 장군을 걱정하여 뒤따르는 이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더 모습을 비추지 않았었다.

달리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니었다. 참모의 말대로 수도에 압송되어 추국을 당할 것이고 그 과정에 고형도 있을 것이다. 황제께서 직접 거론하신 죄를 거두어 가실 리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최종수는 이 흐름을 따라야 했다. 4년 전, 부상당한 다리를 절며 나타나 수도로 돌아가기 전에 들려줄 이야기가 있다고 했던 박병찬의 말을 믿어야 했다. 무수한 생과 사의 기로에서 번번이 최종수를 살려둔 운명, 그 순리가 가리키는 것을 끝까지 보고 싶었다.

그 날, 그 밤. 굽혀지지 않는 다리를 끌며, 박병찬은 최종수를 병영 밖으로 끌어내었다. 한참을 걸어 도착한 언덕에 주저앉은 박병찬은 구름 한 점 없는 밤하늘을 한동안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최종수에게 하늘이 내린 운명이 존재하듯이 박병찬에게도 주어진 운명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건 최종수의 운명과 얽히게 될 것이었다. 자신의 앞날을 궁금해하던 열다섯의 박병찬은 절대 해선 안 된다는 부모의 명을 어기고 제 미래를 알기 위해 몰래 천기를 읽고 점을 쳤었다. 몇 밤이나 하늘을 거듭 읽고, 배운 모든 점술을 동원해 보아도 나오는 결과는 같았다. 박병찬의 운명은 제국의 막내 황자 최종수의 것에 닿아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게 싫었던 박병찬은 가업대로 관상감의 관리가 되어 궁으로 들어가는 길을 피하기로 결심했다. 황실의 사람과 만나지 않도록 멀리 떨어진 곳으로 도망치기로 했다. 그리하여 무관이 되었고, 열여덟 살이 되던 해에는 자원하여 북방으로 향했었다.

“그런데 딱 일 년이 지났더니 네가 거기 와버린 거지.”

부연 달빛 아래서 박병찬은 부옇게 웃었다.

한번 열어버린 미래는 걷잡을 수 없이 선명해졌다. 최종수의 것도, 박병찬의 것도 더욱 뚜렷하게 읽히기 시작했다. 한 번이라도 어긋난다면 이 꼬여버린 운명을 풀어낼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다른 결과가 만들어질 수 있기를 빌었고, 피하고자 노력했다. 자신이 본 것이 틀렸기를 간절히 바랐다.

“넌 시황의 아들로 태어났고 현 황제의 동생이기도 하지. 그런 귀한 몸인데도 늘 가장 위험한 곳에 뛰어들어 싸웠어. 그런데도 큰 부상 하나 없이 계속해서 살아남았지. 자객의 습격을 받아도, 다리가 부러진 말에서 굴러떨어져도 너는 죽지 않아. 네 운명의 끝은 아주 멀리에 있고, 그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순리는 널 지킬 거야.”

최종수는 한참 망설이다 물었다. 어느덧 품게 된 지 오래된 마음이 던지는 질문이었다.

“왜 그렇게… 나와 얽히기 싫었던 건데?”

박병찬의 얼굴이 잠시 달빛만큼 파랗게 굳었다. 그리고는 이내 장난 섞인 울상을 지어 보였다.

“이거 봐. 이거. 내 오른쪽 무릎. 이건 네 운명 때문에 생긴 부상이다. 너랑 얽히지 않았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야.”

고개를 돌려 하늘을 올려다보던 박병찬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는 거지. 여기까지 와 버렸으니 이젠 따르는 수밖에. 이 순리의 흐름에서 빠져나갈 방법이 보이지 않아.”

최종수는 박병찬을 따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검은 하늘 한편으로 물러선 달 아래 무수한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 하늘이 일러주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최종수는 한마디도 듣지 못한다.

“박병찬.”

“응?”

“네가 말하는 순리는… 대체 뭐야?”

“필요한 것이 적절한 순간에 나타나는 것. 불필요한 것이 적절한 때에 치워지는 것. 그것이 순리야.”

어지럽게 흩뿌려진 별들에서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던 것처럼, 최종수는 박병찬이 하는 말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박병찬이 최종수를 돌아보았다. 입술은 웃고 있으나 생각을 읽기 어려운 새카만 눈동자는 몹시 진지하게 빛나고 있었다.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어. 5년이 지나면 넌 날 다시 만날 거야. 그때 나는 몹시 변해 있겠지만, 넌 날 믿어야 해. 그 뒤로는 널 위해 준비된 흐름을 따라오기만 해. 그러면 넌 네가 바란 것들, 바라지 않은 것들 모두를 갖게 될 거야….”

그 말을 시작으로 긴 이야기가 이어졌던 밤이었다. 그 말 그대로 최종수는 5년간 박병찬을 보지 못했었다.

황금 벽돌이 깔린 바닥 위로 비단신을 신은 발이 움직인다. 박병찬은 옥좌에 앉은 황제 곁으로 돌아가기 위해 조금 휘청이는 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반쯤 계단을 올랐을 때, 황제가 옥좌에서 몸을 일으켰다. 쥐어짜 낸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승지 박병찬. 그 말이 진심이더냐?”

황제의 두 손은 초조하게 황금빛 용포를 쥐어뜯고 있었다. 안색이 창백해지고 있다. 벽가에 앉아 있던 어의가 황제의 상태를 알아채고 급히 약상자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박병찬은 계단 중간에 멈춰선 채 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송구하오나,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이온지…?”

“같은 피를 나눈 형제를 해하려 한 자는 하늘도 용서치 않을 거라는 말이 진심이냔 말이다! 너도… 너도 그리 생각하는 게냐?”

“폐하….”

“아니다! 짐이 아니야. 그놈들이 먼저 그런 것이다! 놈들이 짐의 목숨을 노리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런데도 네가 감히 짐을 힐난하는 것이냐!”

황제의 얼굴은 시체처럼 하얗게 질리고 목소리는 높게 갈라져 비명이 되어 있었다. 창백해진 것은 최종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북방에서 보낸 마지막 해, 모든 반란이 제압되었음을 보고하기 위해 수도에 다녀온 전령은 현 황제의 하나뿐인 동복동생이자 영민했던 둘째 황자가 사냥 중 낙마하여 며칠을 눈뜨지 못하고 누워있다 세상을 하직했다는 소식을 가져왔었다. 세간에는 황제께서 손을 쓰신 것이 아니냐는 소문이 돈다는 이야기도 함께였다.

전령에게 허튼소리 옮기지 말라 일갈했지만, 최종수는 그날 밤 가슴을 옥죄는 기분이 되어 병영 밖을 걸었었다. 그러다 초지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던 박병찬의 발에 걸려 넘어질 뻔했었다.

최종수의 이야기를 들은 박병찬은 코웃음을 쳤다. 황실 일원의 서거이자 눈앞에 앉은 이의 형제가 죽은 일을 두고 지나치게 스스럼없는 태도였다.

“우연한 사고이건, 뒷손이 있었건 어느 쪽이면 어때? 그 분께 주어진 수명은 그게 전부였던 거지.”

“말조심해. 내 형님의 일이다.”

“난 오늘 여기서 네게 맞아 죽을 운명은 아니니 상관없다.”

“박병찬!”

최종수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지자 박병찬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안타깝지만… 그럴 수밖에 없도록 판이 짜여 버린 거야. 그분은 비켜주어야 했던 거지.”

늘 그렇지만 박병찬은 모호한 말로 끝을 맺었고 이후로는 종수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그 이듬해, 동방 국경으로 이동한 최종수는 오래 자리보전하고 있던 셋째 형님이 끝내 병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셨다는 소식을 들었고, 둘째 형님 때와 비슷한 소문이 돈다는 이야기도 들었었다. 그때의 최종수는 박병찬에게 굳이 그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 그 모든 것은 황실에 거듭 닥쳐온 불행에 만들어진 헛소문이길 바랐었다. 알고 싶지 않았던 진실이었다.

단상 위 황제의 얼굴은 더 이상 새하얗지 않았다. 이젠 타는 듯 붉어져 있었다. 가늘던 목소리에도 힘이 붙었다. 철판을 긁어대는 목소리로 박병찬을 비난하고 있었다.

“네가 감히! 네놈을 그리 아끼고 믿었거늘…! 네놈이 짐을 그리 생각하고 있었단 말이냐! 겉으로는 간이라도 빼어줄 듯 살살 웃으며 속으로는 하늘도 용서치 않을 중죄인이라 비난하고 있었더란 말이냐! 네가 감히! 네가!”

아니라 부정하고 죽을죄를 지었다 비는 박병찬의 말은 황제의 외침에 번번이 지워져 버리고 말았다. 급기야 황제는 더듬거리며 허리춤을 뒤지더니 보검을 뽑아 들었다. 금빛 비단 수건으로 환약을 받쳐 들고 단상을 향해 달려오던 어의가 히익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쳤다.

최종수의 기억에 큰형님은 검술에 그리 능한 분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의 동작은 실제로 눈앞의 박병찬을 베겠다는 것보다는 위협에 가까운 것이었다. 오래 전장에서 멀어져 있었다 해도 그걸 박병찬이 알아채지 못했을 리 없다. 그럼에도 박병찬은 쥘부채를 들었고, 장식 고리를 당겼다. 검을 막듯 들어 올린 쥘부채 끝에서 튀어나온 칼날이 황제의 손등을 할퀴었다. 놀란 황제는 비명을 터뜨리며 박병찬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최종수는 앉혀져 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 동작만으로 묶여 있던 포승은 쉽사리 끊겨 나갔다.

박병찬이 단상의 계단에서 떠밀려 떨어진다. 가슴 깊이 검이 꽂힌 채. 그를 받아내기 위해 내딛는 네댓 걸음이 아득할 정도로 무거웠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전투 준비를 알리는 느리고 진중한 북소리처럼 귓속을 울렸다. 천겁처럼 길어진 그 순간, 최종수는 모든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박병찬에게 준비된 운명. 박병찬에게 주어진 순리. 그가 왜 그것을 그리도 피하려 했었는지.

순리는 박병찬에게 최종수의 운명을 위한 준비를 맡겼던 것이다. 박병찬은 최종수와 몹시 각별한 친분을 쌓을 것이었으며, 부상으로 전장에서 물러나 수도로 돌아가게 될 것이었으며, 가업을 따라 입궁할 것이었고, 황제의 눈에 들어 측근이 될 운명이었다.

그는 필요한 날 필요한 순간 황제의 거처에 무지개가 드리우도록 태청궁 후원에 폭포를 만들어 물안개가 피어오르도록 획책했으며, 관상감보다 먼저 천기를 읽어냈다며 역적 최종수를 추포하여 수도로 압송하도록 황제를 부추겼다. 그렇게 최종수와 황제가 마주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 긴 세월 간직해온 쥘부채의 칼날로 최종수가 묶인 포승을 끊었고, 겁이 많은 황제가 결국 검을 찌르도록 이끌었다. 그건 결국…….

사방 30간이나 되어 호위병들이 달려오는 데에도 한참이 걸리는 이 넓은 공간 안, 유일한 무기인 검이 최종수의 팔 안으로 떨어졌다. 박병찬의 가슴에 꽂힌 채로.

박병찬은 제 가슴에 꽂힌 칼날을 양손으로 움켜쥐고 당겼다. 검이 빠져나온 순간 박병찬의 비명과, 박병찬의 피가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최종수의 눈앞에 보검의 검 자루가 놓였다. 그를 향해 완전히 미쳐버린 모습을 한 황제가 달려들고 있었다. 모반을 하였다 의심하는 동생, 자신을 비난하였다 의심하는 신하를 맨손으로라도 찢어놓겠다는 듯 갈퀴 같은 손을 내뻗고 있었다.

최종수는 박병찬을 한 팔로 끌어안고 다른 손으로 검 자루를 잡아 그대로 휘둘렀다. 제국의 주인을 위해 정성껏 벼려진 은빛 칼날이 한순간 등잔 불빛을 반사해 오색으로 빛났다. 검날에서 피어난 무지개는 검의 궤적을 따라 황제에게로 곧장 날아가 꽂혔다.

황제가 고꾸라지자 달려오던 호위병들이 발을 멈추었다. 망설이고 있었다. 황제께서 붕어하셨다면, 다음으로 황위를 이을 황실의 핏줄은 오직 최종수 장군뿐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친 것이다.

어의가 주춤주춤 최종수의 눈치를 보며 기듯이 다가와 쓰러진 황제를 살폈다. 맥을 짚고, 코와 입에 귀를 대어 숨을 확인한다. 마지막으로 가슴 위에 귀를 대어 심장 소리를 살핀다.

몸을 일으킨 어의는 어깨를 떨며 최종수의 등 뒤에서 주저하고 있는 호위병들을 향해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리고 좀 더 의미가 명확해지도록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최종수를 향해 큰절을 올렸다. 곧 호위병 두 사람도, 탁자 앞에 얼어붙어 있던 서기도 최종수를 향해 큰절을 하였다.

“새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세!”

떨리는 목소리의 삼창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최종수는 축 늘어진 박병찬을 끌어안은 채 숨을 헐떡이며 서 있을 뿐이었다.

필요한 것이 적절한 순간에 나타나는 것. 불필요한 것이 적절한 때에 치워지는 것. 그것이 순리야.

박병찬은 그렇게 말했었다. 최종수는 이런 걸 바라지 않았다. 황제의 옥좌에 앉으려는 생각 같은 건 한 적이 없다. 최종수의 기회를 위해 둘째 형님이, 셋째 형님이 일찌감치 치워지는 것을 바란 적 없었다. 끝내는 최종수의 자리를 위해 황제인 큰 형님마저 목숨을 잃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박병찬이 지금 이 상황에서 치워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박병찬은 흔들림 없는 검은 눈 아래 미소를 띠고 말했었다.

너는 네가 바란 것들, 바라지 않은 것들 모두를 갖게 될 거다.

아니다. 박병찬의 말은 틀렸다. 최종수는 이제 바라지 않은 것들만 가득하니 갖게 되었다. 오직 바란 것 하나는 지금 그의 품 안에서 서서히 식어가고 있었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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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도 여러 번 다뤄진 형가의 진시황 암살 미수 사건을 참고했습니다.

동양권에서 무지개는 본디 불길한 일, 재앙의 상징이었습니다. 꼬리가 없고 머리만 둘 달린 불길한 짐승이라거나, 용과 달리 강물을 훔쳐 마셔 기근을 일으킨다거나, 왕궁 위에 떠오르면 역모가 일어난다거나 하며 옛 사람들은 두려워했다고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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