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판 종뱅 리퀘였던 것

종뱅. 종수병찬.

* 스핀으로 올려 주신 썰을 베이스로 조각글 연성.

* 로판 풍을 원하셨지만 종뱅 이름으로 로판은 제가 못견뎌서… 어느 시대 어느 배경인지 구분 안되도록 모호하게 썼습니다. 원하는 시대 원하는 배경으로 상상해서 즐겨주세요.ㅋㅋ

한 주의 가운데 날, 그 하루의 중앙을 약간 지난 시간. 황태자에게는 황실 북쪽 별궁에 머물고 있는 속국의 왕자를 찾아가 함께 차를 마시는 일정이 있었다.

그건 퍽 기이한 행사였다. 차와 다과가 놓인 탁자 앞에 마주 앉아 있으면서도 두 사람은 결코 서로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황태자는 말 한 마디 없이 고개를 돌려 좁고 긴 창 밖으로 비치는 나뭇가지의 그늘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부드럽게 물결치는 검은 머리칼도, 무겁게 침잠한 색 옅은 눈동자도 마치 그대로 조각상이 되어버린 것처럼 움직임이 없다. 탁자 너머에 앉은 속국의 왕자는 엷은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눈을 내리깐 채 조용히 차를 마신다. 이따금 대답이 돌아올 리 없는 가벼운 질문을 던지기도 하고 스스로 답을 하며 고개를 끄덕이기도 한다. 그러는 동안 어깨를 덮도록 자라나게 둔 머리칼에 둘러싸인 얼굴도, 짙은 검은 눈동자도 황태자를 향해 들어올려지는 법이 없다.

정해진 한 시간이 지나면 황태자는 잘 마셨다는 인사 한 마디와 함께 손도 대지 않고 식도록 버려둔 찻잔 앞에서 일어나 돌아보지 않고 떠난다. 황태자 일행이 퇴장하여 문이 닫히고 나면 그제야 누군가 조그맣게 흘리는 안도의 한숨이 얼어붙은 응접실의 공기를 깨뜨리는 것이다.

자리한 이들 모두의 숨을 틀어막듯 거북한 이 행사는 황제께서 아들인 황태자에게 친히 내린 명령으로 시작된 것이었다.

제국의 통일 전쟁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연합군이 무참히 패배한 후, 연합의 중심이 되었던 왕국의 1왕자 박병찬은 볼모로서 제국의 수도로 끌려왔다. 황제는 박병찬과 동행한 수행원 대부분을 도착한 그 날 바로 목을 베었다. 목숨을 건진 것은 박병찬이 태어났을 때부터 돌보아 왔다는 늙은 시종 하나와, 열 살 남짓한 어린 시동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황제는 황태자에게 명을 내렸다. 왕자 박병찬을 찾아가 주에 한 번 함께 차를 마시며 친교를 다지도록 하라.

대륙에서 가장 긴 역사와 전통을 가진 왕국의 왕자가 볼모의 신세일지언정 다음 황제의 자리에 오를 황태자와 어울릴 정도로 정중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것, 그리고 연합군에 가담했던 서부 지역 왕국들 어느 곳에서건 반발의 기미가 보이는 즉시 수행원들과 마찬가지로 목이 날아갈 거라는 두 가지 의미를 과시하기 위한 행사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오늘의 차 모임 역시 평소와 다를 바 없을 거였다. 별궁의 응접실에 도착한 황태자 최종수는 인사도 없이 탁자 앞에 앉아 침묵을 지켰고, 맞은편에 앉은 속국의 왕자 박병찬 역시 언제나 그랬듯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그려 붙인 채 시선을 내리깔고 있었다. 방 저편에 대기중인 시종과 호위병들 역시 얼어붙은 듯 조용히 서 있을 뿐이다.

그 고요함은 평소와 다른 달그락 소리로 깨어졌다. 발목을 접질렸다는 시종을 대신해 오늘 처음 차 시중을 들게 된 어린 시동은 차와 다과가 담긴 은쟁반을 내오는 동안 내내 벌벌 떨었다. 급기야 탁자 앞에서 제 발에 걸려 비틀거리며 쟁반을 뒤엎고 말았다. 빠르게 몸을 일으킨 박병찬이 찻주전자를 쳐내어 뜨거운 차를 뒤집어쓰는 일은 피할 수 있었지만, 쟁반 위에 놓여있던 찻잔이며 접시, 과자 따위가 황태자의 무릎 위로 고스란히 쏟아져 내렸다.

황급히 곁으로 달려온 의전관이 미묘하게 눈썹을 치켜 올리고 최종수의 얼굴을 살폈다. 황태자의 의중에 따라 행동하겠다는 의미였다.

황태자의 무릎 위에는 과자를 잘라 내놓기 위한 작은 은제 칼이 떨어져 있었다. 황실의 일원에게 날붙이를 들이대는 것은 크나큰 중죄다. 이 일을 위협으로 간주할 것인지 단순한 실수로 다룰 것인지는 황태자의 판단에, 아니 정확히는 그의 기분에 달렸다.

최종수는 천천히 눈을 돌려 탁자 건너편에 서 있는 왕자를 바라보았다. 먼저 시선이 닿은 것은 열 살 남짓한 어린 시동의 어깨를 감싸 안은 박병찬의 손이었다. 뜨거운 찻주전자를 쳐낸 손등이 붉게 물들어 있다. 긴장으로 굳어 있는 목을 지나 창백해진 얼굴로 시선이 올라간다. 북쪽 별궁의 작고 수수한 응접실에서 처음으로 황태자와 볼모 왕자의 시선이 마주쳤다.

전쟁에 패배하고 비참한 인질이 된 자신의 처지를 모른다는 듯 늘 미소를 띠고 있던 입술이 바짝 얼어붙어 있다. 체념인지 여유인지 모를 느긋함이 감돌던 검은 눈동자가 빛을 잃고 끝없이 깊은 심연이 되어 있다. 그게 제법 마음에 들어 최종수는 슬쩍 웃었다. 그리고 한 손을 들어 호위병에게 신호했다.

“끌고 가라.”

호위병 둘이 달려오자 박병찬은 품 안에 감추듯 시동을 한층 더 바짝 끌어안았다.

“전하!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입니다. 실수였을 뿐입니다. 벌하는 것은 제게 맡겨 주십시오.”

그 말과 동시에 벽가에 서 있던 발목을 접질린 늙은 시종이 비틀거리면서 무릎을 꿇고 바닥에 이마를 붙이며 엎드렸다. 제 부상으로 인해 어린 시동에게 오늘의 차 시중을 맡겨야 했던 그는 죽은 사람 같은 안색을 하고 있었다.

“전하. 부탁드립니다. 저를 따라 어린 나이에 부모와 헤어져 이 먼 곳까지 오게 된 불쌍한 아이입니다. 굳이 처벌이 필요하다면 제가 받을 것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무엇이건 할 터이니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박병찬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이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최종수는 박병찬의 눈을 노려보았다.

황태자의 머릿속에는 몇 년 전 전장에서 보았던 그의 모습이 아직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지우려해도 지울 수 없이 각인된 광경이다. 백마에 올라 전장을 누비는 박병찬은 거침없는 돌풍이었으며 죽음의 화신이었다. 황태자가 이끄는 지원 병력이 도착했을 때 박병찬이 이끄는 부대는 두 배 가까운 제국군을 거의 괴멸에 가깝게 몰아가고 있었다. 새로 합류한 대규모 지원 병력을 피해 퇴각할 때도 박병찬은 가장 후미를 지키는 여유를 보였었다. 제국군의 승리로 끝난 전투였지만 최종수는 박병찬에게 승리했다는 생각을 도저히 가질 수 없었다.

이제서야 겨우 겁먹고 공포에 떠는 박병찬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허나 가슴 속을 검게 물들여가는 이 역겨운 감각은 무엇일까. 좀 더 확실하고 분명한 승리를 쥐게 된다면 이 불쾌감도 사라질까.

최종수는 볼모를 향해 뚜렷한 비웃음을 흘렸다.

“무엇이건? 그대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기나 할까. 그대는 가진 것도 힘도 없지. 게다가 그런 몸을 한 꼴이니.”

조소와 함께 흘러나온 말에 구석에 엎드려 있던 박병찬의 늙은 시종이 홱 고개를 쳐들었다. 주름 가득한 얼굴이 안타까움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시종의 시선과 마찬가지로 황태자의 시선 역시 볼모 왕자의 무릎을 향하고 있었다. 부서져 쓸모 없어진 오른쪽 무릎.

그 아비인 왕이 제국 황제 앞에 무릎 꿇고 항복 선언을 하는 순간에도 왕자 박병찬은 순응하지 않았었다. 황제의 근위병들이 그를 억지로 붙잡아 쓰러뜨리고 머리를 바닥에 짓눌렀을 때, 황제는 친히 그의 오른쪽 무릎을 부수었고 끝내 무릎 꿇도록 만들었었다.

박병찬의 표정에는 언뜻 변함이 없었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창백해진 얼굴에 살짝 돌아온 핏기는 분노일지, 황태자의 주의를 잠시 돌린 것에 대한 안심인지 알 수 없었다. 박병찬은 품 안에 숨어 울고 있는 시동을 등 뒤로 보내어 감추었다.

“예, 전하. 비록 이런 꼴이지만 용서를 구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최종수는 한 번 더 박병찬의 오른쪽 무릎에 눈길을 주었다. 제국의 것에 비해 소박한 왕궁 알현실을 울리던 소리가 되살아난다. 결코 무릎 꿇지 않겠다 외치던 박병찬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채운다.

“무엇이건.”

황태자는 팔걸이에 양 손을 올리고 느긋하게 몸을 젖혀 등받이에 기대었다. 왕좌에 앉은 황제처럼.

“그럼 당장 무릎 꿇고 시동의 목숨을 구걸해보시게.”

엎드린 늙은 시종의 머리가 한층 더 올라온다. 태어났을 때부터 장성할 때까지 돌보아온 일국의 왕자가 불편한 몸으로 굴욕을 당하는 모습에 울상이 된다. 박병찬의 등 뒤에 서 있는 어린 시동은 그와 반대로 눈물이 딱 멎어버렸다. 제가 저지른 실수가 얼마나 커다란 일인지를 드디어 깨달은 듯 울지도 못하고 얼어붙어 있었다.

침묵 속에 서 있던 박병찬이 긴 숨을 내쉬었다. 박병찬은 천천히 몸을 굽혀 그 자리에 꿇어 앉았다. 제대로 쓸 수 없는 오른쪽 무릎 때문에 몇 번이고 크게 휘청이면서. 도와주려는 시동의 팔도 뿌리친다.

겨우 쓰러지지 않고 무릎을 꿇는데 성공한 박병찬이 최종수의 발 앞에 깊게 고개를 숙였다.

“전하. 어린 아이의 실수였을 뿐이옵니다. 그 어떤 나쁜 뜻도 없었습니다. 부디 용서하여 주시길 간청 드립니다. 서툰 행실에 대해서는 제가 충분히 혼을 내고 교육할 터이니 너그러운 마음을 보여주십시오.”

분노도 망설임도 한 점 섞이지 않은 단단한 목소리가 용서를 구한다. 황제 앞에서도 자의로 무릎을 꿇은 적 없는 이가 최종수의 앞에 무릎 꿇고 간청한다.

이윽고 박병찬의 머리가 들렸다. 최종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용서의 대답을 기다린다. 최종수는 천천히 손을 들어 등 뒤에 다가선 호위병들을 물렸다. 어째서 승리감이 들지 않을까. 왕자의 신분으로 태어난 자를 무릎 꿇고 빌도록 만들었는데도.

“왕국을 잃고도 무릎 꿇지 않았으면서 고작 시동 하나 때문에….”

혼란스러운 마음에 무심코 중얼거리고 말았다. 무릎 꿇은 채 올려다보는 박병찬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전하의 말씀이 옳기 때문입니다.”

“내 말…?”

“지금의 저는 가진 것도 힘도 없습니다. 그러니 제가 가진 이 적은 것들이나마 모두 소중히 지키고 싶은 것입니다. 그를 위해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깊이를 알 수 없는 짙고 검은 눈동자가 고요하게 반짝이며 최종수를 바라본다.

최종수는 어지러움을 느꼈다. 그건 머리가 아니라 심장으로부터 시작된 현기증이었다. 황태자는 눈 앞에 무릎 꿇은 이 남자를 후려쳐 쓰러뜨리고 싶은 것인지, 혼자 힘으로 일어설 수 없는 그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우고 싶은 것인지 스스로의 마음을 알 수 없어졌다.

문득 깊고 곧은 눈동자, 그 잔잔한 검은 호수 위로 바람 한 점이 불어가는 것이 보였다. 아직 완전히 사그라들지 않은 돌풍의 한 자락이.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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