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뱅]COLORFUL

종뱅절 추카추카해요 | 주제 : 무지개

※ 빨주노초파남보 에피소드 7개

※ 공백포함 약 9,000자


빨강

최종수는 병찬의 앞에서 과자를 먹는다. 이런 거 안 먹게 생겼는데 잘 먹는다. 크라운 제과의 쿠키의 명작. 오리지널 쿠크다스를 먹는 최종수의 입안. 아 분홍색이라고 표현해야 하나. 그렇다면 뭐 병찬의 입안은 외계인의 파랑인가. 그런 것도 아니면서 유독 최종수가 입을 열었을 때 보이는 어두컴컴한 붉은색. 다른 사람들 다 비슷비슷한 것 같은데 유독 최종수의 미세하게 벌어진 입안만이 병찬의 눈에 빨개보였다. 이건, 뭘까. 남의 입을 이토록 관심 가져본 적 없는 병찬이 짧은 고뇌를 한다. 인간의 몸에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게 선명히 보이는 연약하고 따뜻하고 부드러운 공간. 인간의 신체 부위 중에서 그나마 제일 빨간 곳. 땀을 많이 흘리는 최종수가 자주 물을 마셔서, 무언가를 먹고 삼킬 때마다 침이 고여서 건조해질 일이 없는 입. 빨간 입. 빨려들어갔다가 겨우겨우 빠져 나오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있을 것만 같은 저 너머 미지의 세계. 그게 최종수의 입안이라고. 빨간 박스에 담긴 쿠크다스를 씹어 삼키는 최종수.

- 너 혹시 나한테 뭐 할 말 없냐?

- 없는데.

- 으응……. 맛있어?

- 어.

나 혹시 얘랑 키스가 하고 싶나? 병찬은 스스로에게 물었고 대답하기 어려웠다. 해보지 않고서는 그 욕망의 근원이 어디에서 발현된 것인지도 알 길이 없었다. 키스가 아니라 확 그냥 깨물어 버리고 싶은 것일지도.

주황

최종수의 장도고등학교 농구부 유니폼. 등번호 23번. 오른쪽 겨드랑이 아래부터 시작되어 손목까지 내려오는 검은 슬리브. 유니폼 바지 아래로 오른쪽만 또 길게 내려오는 7부 타이즈. 검은 양말. 하여간 왼쪽오른쪽 컨디션에 맞추는데 눈으로 볼 땐 짝짝이. 처음 맞붙은 경기 때 최종수는 주황색 유니폼을 입고 별명에 걸맞는 싸가지로 병찬의 재활을 거듭한 무릎을 능욕했다. 능욕 당한 병찬의 무릎은 모르겠지만 병찬의 마음은 별로 화나지 않았다. 처음부터 불쌍한 애새끼의 트래시 토크에 신경이 긁히지 않는 스물한 살의 사나이. 병찬은 ‘최종수’ 하면 자연스레 코트 위에서 처음 마주했던 열아홉 살의 앳되고 진지하고, 자기자신을 의심하는 사람 특유의 불안이 엷게 비치던 최종수의 갸름한 얼굴이 떠올랐다.

장도고의 검은 유니폼을 입은 최종수가 블랙맘바 였다면 주황색 유니폼은 독침을 품은 장수말벌. 인간 박병찬은 장수말벌과 겨뤘다. 그리고 감독님께 무서워서 못하겠다고 너스레를 떨었던 덩크를 해냈지. 졌지만 잘 싸웠고. 이때까지만 해도 최종수라는 사람은 모르고 그의 농구만이 병찬에게 유일한 전부였는데.

분명히 쿨하게 보내줬던 경기였음에도 어느 날 병찬의 꿈에 등장하는 최종수는 장도고 주황색 23번 유니폼을 입고 농구공을 잡고 코트에 서 있었다. 스포트라이트라도 받은 듯 주황색 유니폼을 입은 최종수의 머리 위로 빛이 쏟아진다. 그애의 얼굴에 그늘이 진다. 손끝이 하얗게 변할 만큼 농구공을 단단하게 꾹 쥐었다. 그 모습이 어둠 속에서 링거대를 끌고 있는 어린 병찬을 다시금 코트로 이끌었다. 뜨겁게 일렁이는 스포트라이트 안으로 걸어가게 했다. 코트 안으로. 제 손으로 농구공을 다시 쥐기 위해서. 나도 다시 농구할래. 병원에 누워 있는 동안에는 농구 안 하고도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 사실은 무릎 재활하는 거 너무 힘들고 아팠거든. 이 짓거리 두 번은 못하겠다 싶었단 말이야. 그리고 엄마아빠가 너무 걱정하니까, 농구 안 하는 게 맞다는 거 머리로는 백 번 알겠는데. 나도 아는데. 그래도 나 농구 계속 해야 할 것 같아. 최종수 너랑 경기 뛰어보고 싶어. 고등학생 최종수의 커다란 손과 중학생 병찬의 손이 주홍빛 농구공에서 겹친다. 있잖아. 네 경기를 모조리 다 봤어. 할 수 있는 게 그것 밖에 없었어. 너 정말 잘하더라. 나만큼 하던데? 네 경기를 보면 나도…….

이런 이야기를 최종수에게 전해줘도 싸늘한 눈빛이 되돌아올 테다. 알면서도 병찬은 꿋꿋이 물어본다. 너 어젯밤에 심심했냐? 왜 내 꿈에 찾아오고 난리야? 최종수가 조금 겸연쩍어 하더니 나중에는 병찬을 향해 눈을 흘긴다.

- 내 꿈을 꾼다고?

- 엉. 형아 꿈에 우리 쫑수 단골출연 함. 어제 또 나왔거덩. 그냥 말해주는 거야. 별 뜻 없고.

- 우리가 꿈에서 뭐하는데?

- 농구.

그 대답에 최종수는 눈에 띄게 안도했다.

노랑

트레이에 한꺼번에 부어놓고 최종수랑 주섬주섬 나눠 먹는 맥도날드 감자튀김. 병찬은 이미 애저녁에 자신이 주문한 맥스파이시상하이치킨버거 다섯 개를 먹어치운 지 오래다. 콜라도 거의 다 마셨다. 햄버거를 세트로 다섯 개나 시켜서 노란 감자튀김이 트레이에 가득이다. 줄어들지도 않는다.

최종수는 식단 중이라더니 위아래로 놓인 햄버거 빵 중에 위에 덮인 것 하나를 병찬에게 버린다. 병찬은 또 그걸 받아서 먹었다. 최종수가 먹기 싫어 하면 병찬이 대신 먹고는 했다. 병찬은 먹는 행위를 좋아하지 않아도 편식이 없다. 언제부터 그랬더라. 아마 어릴 때부터. 병찬은 소스와 피클과 잘게 썰린 양상추가 묻은 빵 하나를 우적우적 먹고 삼켰다. 최종수는 빵 하나 없는, 햄버거의 형태를 잃은 햄버거를 먹는다. 오물오물. 조금씩 베어 먹었다. 최종수의 커다란 손에 비하면 햄버거는 초코파이 같다.

병찬은 노란 감자튀김을 케첩도 없이 집어 먹는다. 잘근잘근 씹는다. 느릿느릿 햄버거를 먹던 종수의 햄버거 아래로 소스 묻은 양상추가 흩어져 트레이에 후두둑 떨어진다. 병찬은 포장지를 정돈해서 다시 햄버거를 움켜쥐는 최종수를 빤히 바라보았다. 햄버거가 커서 최종수의 입이 가려진다.

- 아, 나 진짜 뭐 먹는 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 돼지 같이 처먹어놓고 갑자기 뭔 소리야.

- 진짜야. 오해하지 말라니까. 난 그냥 편식을 안하고 많이 먹는 거야.

- 뭉쳐놓은 햄버거 포장지는 옆 테이블에서 적선 받은 거냐?

- 종수야 너는 그거 먹고 돼? 움직일 수 있어? 그 대빵 커다란 몸뚱이가?

- 왜 또 시빈데.

- 종수야. 형아 감자튀김도 먹어.

병찬이 케찹 안 바른 길다란 감자튀김을 최종수 입술에 들이댄다. 노르스름하게 튀겨져 기름 냄새를 풍겼다.

- 하지 마. 식단 한댔잖아.

- 야, 너무한다. 그럼 이걸 내가 다 먹어?

- 네가 주문했잖아…!

- 아아, 제발제발제발. 이거 하나만 먹어주라.

최종수는 병찬이 내민 다섯 가닥의 감자튀김 중에서 딱 하나를 앞니로 물었다. 최종수의 입안으로 완전히 사라지는 감자튀김을 보며 병찬은 아이처럼 활짝 웃었다.

초록

박병찬의 농구화. 저 네온그린 컬러 농구화는 노수민의 분홍색 농구화 만큼 존재감이 뚜렷했다. 종수는 흰 티셔츠를 입은 박병찬이 지상고등학교 농구부 남자애들과 떠드는 걸 눈으로 좇았다가 다시 정면을 본다. 얼마 전 이규와 함께 갔던 스포츠 매장에서 이런저런 농구화를 직접 신어보다가 저 농구화를 본 적이 있다. 이전에는 저런 색의 운동화가 세상에 존재하는 지도 몰랐다. 쏜 화살처럼 날아와 박힌 농구화에서 종수가 시선을 떼어내지 못하니 곁에 있던 이규가 말했다. 아, 조형고의 은둔고수가 신는 농구화네. 종수는 네온그린 컬러의 농구화를 째려본다. 종수의 표정을 살피지 않고 이규가 계속 말한다. 가볍고 쿠션감이 좋대서 추천 많이 하길래 나도 이전에 한 번 신어봤거든. 좋긴 하더라. 종수 저 농구화 신어볼 거야? 종수는 단칼에 거절했다. 아니. 색깔이 구려.

박병찬을 생각하면 종수는 늘 기습을 당하는 기분이었다. 우산 없이 맞는 가랑비처럼 축축하게 옷이 젖는 종류가 아니라 갑자기 박병찬이 나타나서 웃으며 주먹으로 종수의 어깨를 있는 힘껏 퍽퍽 때리는 것 같았다. 맞고 나면 멍한 얼굴이 된다. 왜 박병찬이 자신에게 냅다 폭력을 행사하는 걸까. 결국 종수는 인터넷에 올라온 박병찬의 모든 경기를 찾아본다. 경기 관람하러 온 사람이 찍어 올린 조형고 농구부 영상을 포함해도 스무 편이 채 되지 않았다. 박병찬이 코트 바닥에 발 딛지도 않고 날아 다녔다던 부연중 경기 영상은 딱 하나 뿐이었다. 중학생이 찍는 것인지 숨소리도 미묘하게 섞이고 미숙하게 경기를 따라가는 화면에 종수는 멀미가 일어날 지경이었다. 그런데 감독님 말처럼 박병찬이 종수 자신보다 한 수 위인가? 아니. 종수는 지금 자존심을 세우는 게 아니다. 박병찬이 잘하긴 했지만 종수 자신보다 잘하는 건 아니다. 붙으면 이길 수 있다. 언제라도. 종수는 다시 슬쩍 눈동자를 굴린다. 박병찬의 발을 감싸는, 이규가 신었을 때에도 특별히 쿠션감이 좋았다던 환한 연두색의 농구화를 본다. 시선이 느껴져 순간적으로 눈을 깜박였을 때.

다가올 기습을 미리 예상해서 미간을 찡그린 종수와 웃고 있는 남자애들 사이에서 혼자 묘한 표정을 짓던 박병찬의 무심한 눈이 딱 마주쳤다. 분명히 안 웃고 있었는데, 금방 웃는다.

- 애들이 야식으로 치킨 먹자는데. 최종수 너도 나중에 부를 테니까 나와. 알겠지?

종수는 대답하지 않고 눈을 내리깔았다. 연두색 농구화가 시각적으로 강렬했다. 종수는 코트 위로 눈길을 돌렸다. 박병찬은 더 말을 걸지 않고 주변의 아이들과 대화를 섞었다. 종수는 지상고등학교의 바가지 머리 남자애랑 붙어 있는 노수민의 짙은 분홍색 운동화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구려. 전부 다 구려. 색깔이 못 생겼어.

파랑

박병찬이 입는 조형고등학교 농구부의 새파란 색의 후드. 유스캠프 마지막 날, 멀리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온 지상고를 배웅할 때 박병찬은 사람들 틈을 비집고 앞으로, 종수의 옆으로 왔다. 인사를 하기 위함일 뿐 종수의 옆에 오려고 의도한 건 아닌 듯했다. 야! 지상고! 잘 가. 또 보자고.

간만에 날이 좋아서 하늘이 파랬다. 담백하게 인사하고 조형고 부원들과 체육관으로 돌아가는 박병찬의 까만 뒤통수. 일부러 다듬어서 기르는 머리카락. 그 아래의 파란 옷. 종수의 좁다란 세계로 밀려 들어와 파도처럼 흘러넘치는 파랑. 파랑. 파랑…….

둘이서 함께 지내는 집안에서 박병찬이 그 파란 후드를 실내복으로 입고 있을 때 종수는 홀린 듯이 보게 된다. 박병찬은 마시던 물컵을 싱크대에 내려놓는다. 종수는 파란 후드를 입은 박병찬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박병찬은 기지개를 한 번 쭉 펴고 소매 고무줄이 느슨해진 후드를 팔꿈치 위로 쭉쭉 올렸다. 고무장갑 없이 맨손으로 설거지를 한다. 수세미에 물을 적신 후 세제를 묻혔다. 주먹으로 쥐었다 펴며 거품을 낸다. 달그락, 국그릇을 집었다. 얼마 전 종수의 생일이라 한 바가지 받아온 미역국을 오늘도 먹었다. 냉동실에 팩으로 5인분 씩 얼려 놓았다. 그릇에 거품 난 수세미를 문지르며 박병찬이 종수를 부른다.

- 야, 종수야.

- 왜.

- 그만 봐라. 형아 뚫리겠다. 왜? 할 말 있어?

- 안 뚫려. 아, 아니. 안 보고 있었어. 너한테 할 말 없어.

박병찬이 그릇을 내려놓고 뒤돌아 종수를 본다. 실내복으로 전락한 파란 후드의 빛이 바랬지만 여전히 파랑이다.

- 뭐래. 보고 있었잖아. 왜 거짓말 해?

- 뒤통수에 눈 달린 것도 아니면서 어떻게 확신해?

- 야 이런 걸로 박박 우긴다고?

- 우기는 거 아닌데?

흥. 종수는 박병찬에게서 고개를 돌려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을 본다. 박병찬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다시 몸을 돌려 설거지를 한다. 아, 같이 살기 전에 최종수 버릇 고쳐놨어야 했는데. 내가 애새끼를 너무 오냐오냐 해가지고. 하, 오늘 설거지 당번도 사실은 최종수였는데. 그냥 내가 마신 물컵 씻는 김에 다 같이 씻는 거지. 어우 내가 콩깍지 씌여가지고 너무 예뻐해주는 탓에 진짜 버릇 다 망쳤네. 흰 거품이 묻어난 그릇을 싱크대 안에 차곡차곡 내려놓으며 하여간 계속 박병찬은 뭐라고 뭐라고 중얼중얼거린다. 종수 욕은 아니었고 본인 신세한탄에 가까웠다.

군청

느리게 피어나는 봄. 인천의 밤바다. 병찬의 옆에서 종수가 나란히 걸었다. 올해 2월 초 고등학교를 졸업한 병찬은 부모님과 전화통화를 하는 중이다. 저 친구랑 놀고 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아 네네. 술 안 마셔요. 농구부 친구예요. 네, 먼저 주무세요. 병찬은 짧은 통화를 끊으며 인적 드문 밤공기를 씁 삼킨다. 조형고를 졸업하고 준향대에 입학하기 전까지 병찬은 부모님 댁에서 머물렀다. 종수도 이제 고등학생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같이 있을 거라고 생각을 못했다. 이 시간까지 뭐했더라. 농구하고. 카페에서 수다 떨고. 옆자리에 앉아서 최종수가 보여주는 유튜브 영상 같이 좀 보고.

- 야. 너 너무 늦은 거 아니야?

- 괜찮아.

- 여기 진짜 볼 거 없는데.

- 괜찮아.

- 그냥 부모님께 사정 설명하고 우리 집에 가서 잘래?

- 아니.

- 그럼 너 혼자 새벽 첫차 타고 갈 거야?

- 몰라.

병찬은 끙, 한숨을 쉬었다. 내가 너를 빨리 보냈어야 했는데. 미안하다. 지갑에 민증 갖고 있냐? 아무 데나 들어가서 술이나 마실래? 아 그런데 뭐 먹기 싫은데. 아까 너무 많이 먹어서. 종수를 향하던 물음은 점점 병찬의 혼잣말이 된다.

인천 바다는 어두웠으나 검지 않았다. 달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고 살아있는 생명처럼 출렁출렁 움직였다. 물은 빛이 되고 빛은 물이 된다. 종수의 옆에 병찬이 있었다. 무언가 종수의 가슴 안쪽을 서늘하게 스쳐갔다. 무엇인지 잘은 모르겠다. 할 말이 끊어졌고 종수는 가로등 밑에 선 병찬의 네이비 컬러의 도톰한 파카잠바를 보았다. 종수가 입술을 겨우 열었다. 뺨이 시렵다. 잘 경험해본 적 없는 감각이다. 눈꺼풀도 풀썩거리고, 입술은 무겁고, 이마는 뜨거운데 가슴은 쿵쾅대는 게 아무래도 감기 같았다.

- 너랑…….

- 응?

- 박병찬 너랑 바다 보고 싶어.

그러면 안 돼? 군청으로 꿈틀대는 하나의 생명. 기온이 뚝 떨어진 2월의 밤. 종수의 귀와 코끝과 손이 얼었다. 병찬은 웃지도 못하고 깨달았다. 아, 오늘 밤은 최종수랑 단둘이 보내겠구나. 그냥 계속, 밤바다를 보거나 쟤 얼굴을 들여다 보거나 하겠구나. 답변을 하기 위해 코를 훌쩍이며 다가온 병찬은 종수의 손을 잡는다. 차가운 온도에 헉 하고 깜짝 놀란다. 종수를 그 자리에 세워 놓고 헐레벌떡 24시간 열린 편의점으로 뛰어가서는, 매대에 남아있는 핫팩 일곱 개를 사들고 왔다.

보라

종수는 병찬을 기다리며 영화관 입구에서 가만히 앉아 있었다. 대형 쇼핑몰에 입점한 영화관이라 종수를 지나치는 사람이 많았다. 종수는 커다란 팝콘과 빨대 꽂은 콜라 두 개를 옆에 밀어두었다. 종수의 앞에 놓인 전광판에서 커다랗게 영화관 브랜드 스토리가 반복적으로 흘러나온다. 브랜드 컬러는 보라색. 영화관 M사. 종수는 이제 슬슬 보라색이 꼴도 보기 싫다.

[종수야 내가 진짜 미안한데.]

[영화표 취소해줄 수 있어? 나 상영시간 맞춰서 못 갈 것 같아.]

[뭐 문제가 생겼는지 갑자기 지하철이 중간에 멈췄어.]

[다음 거 예매해서 같이 보자.]

ㅠㅠ와 눈물 쏟는 캐릭터 이모티콘만으로 카톡을 미친 듯이 보낸다. 그 눈물 겨운 카톡이 마지막이다. 종수는 혼자 오리지널 팝콘과 캬라멜팝콘을 번갈아가며 조금 먹었고, 병찬의 도착시간을 예상한 뒤 표를 다시 예매했다. 약속시간보다 몇 십 분 일찍 도착한 자신이, 병찬와 나눠먹으려고 일찍 사놓은 팝콘이, 얼음이 녹아버린 콜라가, 자신의 곁을 지나가는 모든 커플이, 난데 없이 멈춰 버린 1호선 지하철이, 지금 이 자리에 없는 병찬이 너무너무 싫었다. 밉고 짜증스러웠다.

병찬은 약속시간보다 50분 늦게 왔다. 병찬은 숨을 몰아 쉬며 땀으로 젖은 앞머리를 손으로 대충 넘겼다. 종수가 사놓은 콜라를 뚜껑 열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단숨에 콜라 라지 사이즈를 비워냈다. 그러고는 한숨 푸우욱 내쉬며 하는 말이.

- 내가 진짜 빨리 오려고 했거든?

50분 넘게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고 사과부터 하란 말이야 박병찬 이 자식아, 라고 종수는 눈으로 말했다.

- 어. 근데.

- 종수 너도 서울 지하철 1호선이 얼마나 답 없는지 알잖아.

- 그런 것 까지 예상해서 더 일찍 나오라고. 너는 매번 그런 식이지.

종수야. 나 지금 너무 서운하다. 지하철이 중간까지 밖에 안 가는 줄 내가 어떻게 알겠냐고. 나도 여유있게 도착하려고 했어. 너무 놀라서 지하철 내리자마자 뛰어왔다니까. 나 지금도 가슴이 콩닥거려. 완전 초딩 때 계주선수로 뽑혔을 때보다 더 빨리 뛰어왔다고. 병찬이 그렇게 줄줄이 변명을 해도 이곳에서 병찬을 계속 기다렸던 종수의 마음은 풀리지 않는다. 병찬은 손으로 얼굴을 부채질 했다.

- 우리 영화 상영시간 언제야?

- 15분 뒤.

표를 취소하고 새로 예매한 후에 영화관 어플리케이션 캡쳐 화면까지 카톡으로 보내뒀는데. 지금껏 카톡 확인도 안 한 병찬 때문에 종수는 속이 쓰렸다. 데이트는 시작도 안 했는데 종수는 몸과 마음이 피곤해졌다.

- 어? 쇼핑몰 구경하거나 카페라도 가려고 했더니 별로 시간이 안 남았네. 화장실만 갔다가 오면 상영관 금방 들어가겠다.

- 그래. 난 두 시에 볼 영화 두시 오십 분에 보지만.

- 아이고, 형아가 잘못했다.

화장실을 가려던 병찬이 종수의 옆에 털썩 주저 앉았다. 종수는 눈에서 불꽃이 튄다. 아니. 그렇게 건성으로 잘못했다는 말 툭 던지는 거 말고, 조금 더 정식으로 늦어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면 좋겠는데 왜 그 말을 안 꺼내지. 너한테는 내가 기다리는 게 당연한 거야? 카톡으로 띡 미안하다고 하면 다야? 카톡으로 우는 이모티콘 100통 보내면 끝이냐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종수의 귓가에 병찬이 속삭인다. 종수야.

- 영화 볼 때 너랑 손 잡고 봐도 돼?

종수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지만 티가 나지는 않았다. 박병찬 장난해? 그런 걸로 내 기분 풀릴 거라고 착각하지 마. 너는 지금 내가 여기서 몇 분이나 기다렸는지 알기나 해? 최근에 우리 둘 다 바빴어서, 정말 오랜만에 하는 데이트인데. 또 나만 오늘 다른 문제 없도록 몇 번씩 약속 시간, 영화 예매시간, 팝콘콤보세트 쿠폰, 가야 할 카페가 여기 건물 몇 층인지, 같이 갈 식당 브레이크 타임이랑 인기 메뉴 더블 체크하고 나왔겠지. 너는 진짜 사람이 진지한 구석이 없어. 알아? 박병찬 너는 농구 할 때만 냉철하게 계산하고 센스있게 굴지. 넌 뭘 해도 허술하고 빈 수레가 요란하고 바보 같고 유치하고 우습고 멍청이 같아. 종수가 깊게 생각하느라 대답을 못하고 있는데 병찬이 옆에서 입술을 실룩대며 웃었다. 나중에는 소리내어 킬킬 웃었다. 땀으로 젖었다가 식어내린 커다란 손이 종수의 미지근한 손을 덥썩 붙잡는다. 최종수 너도 참.

- 손 잡는 거 하나에 뭔 생각을 그렇게 길게 하냐.

그거 생각 안 했거든. 영화 볼 때 손 잡든가 말든가. 종수의 표정은 싱겁게 가라앉았지만 일부러 모질게 병찬에게서 제 손을 빼내지는 않았다. 예상했던 데이트 일정과 시간이 다 조금씩 미뤄졌어도 병찬은 여기에 왔고 함께 영화를 볼 수 있다. 그럼 된 건가. 손등을 덮는 손바닥의 열기에 종수 마음에 걸린 불편함이 콜라에 섞인 얼음처럼 녹는다. 종수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 헤헤 웃는 병찬 얼굴에 죽빵 갈기고 싶은 걸 보면 영화 보는 내내 손 잡고 있어야 할 듯.

- 박병찬. 뭘 잘 했다고 처웃어.

아직 화가 덕지덕지 묻는 목소리다.

병찬과 종수가 앉은 벤치 앞 전광판에는 막 영화 예고편이 끝나고 또 다시 M영화관의 히스토리가 펼쳐진다. 화면에는 온통 영화관 M사의 브랜드 컬러, 보라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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