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지은은 오늘 새벽 늦게 잠들었다. 다미가 인생에 대한 한탄을 늘어놓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다미가 울면 그 틈을 타 우선 오늘은 자고 내일 생각하자는 식으로 얼버무리며 눈을 감을 수 있었지만 오늘은 웬일인지 멍하게 주절거리기만 하는 탓에 거의 아침이 되어서야 쓰러지듯 잠들게 되었다. 다미는 지은이 잠든 것을 확인하고 그제서야 눈물을 쏟아냈다.
우리는 일 년 전 오늘 바닷가에 놀러 갔었다. 참 우중충한 한낮이었다. 비가 오는 건지 마는 건지 피부 점점이 느껴지는 차가운 물방울. 불쾌하게 젖어드는 신발 앞 축.언제쯤 바꿔 들어야 손이 덜 빨개질까 고민하며 올라가는 아스팔트 길이 그렇게 멀었더랬다. “좀 덜 살 걸 그랬나 봐.” 식식대며 올라가는 와중에도 너는 나를 보았다. 양손 가득 마트에서 산식재
소설 내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더라. 유예성은 머리를 감싸쥐었다. 동생이 쓴 소설에 빙의한 것도 모자라 이번에는 게임에 빙의라니! 차라리 소설 쪽은 동생이라는 깊은 연결고리라도 있지, 게임은 정말이지 저와는 딱히 깊은 관련이 없었다. 그나마 여기가 게임 속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던 건 자신의 눈앞에 게임에서나 나올 법한 시스템 창이
색은 산란하는 것이다. 흡수된 빛은 보이지 않으니 산란하는 것만을 인간의 눈이 잡아내는 것이다. 단지 그 뿐인 것에 인류는 왜 그렇게 의미를 부여하고 그 아름다움을 이야기 하는지, 그래서 색을 보지 못하는 이들을 비참하게 만드는지. 어째서 색의 상실이 그토록, 그토록…. [ 먼 거리를 지나 온 해 ] : 멀리 가지 않아도 돼, 내가 너의 태양이 될 테니
무지개. 마지막으로 고개 들어 무지개를 바라본게 얼마나 되었던가. 내 기억속 남은 처음이자 마지막 무지개. 아름다웠지. 그림에서 보던 것 처럼 빨간색부터 보라색까지 선명히 보이진 않았지만, 그래도 난 그 무지개가 참 기억에 남았다. 이젠 볼 수 없지만. 나는 눈이 멀지 않았다. 나는 햇빛 알러지가 있는것도 아니다. 나는 색을 보지 못하는것도 아니다. 나
무지개 공기 중의 물방울에 산란된 햇빛이 자아내는 아름다운 오색빛깔의 둥근 선. 보는 사람의 감탄을 자아내는 알록달록함. 그리고 지구가 멸망하기 전이라면 아름답게 느껴졌을 단어. “어서 대피해!”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오고, 모두가 일사분란하게 지시에 따라 이동하기 시작한다. 먹던 음식을 내팽겨치고 급하게 배낭을 집어들고 이동하는 사람,
나는 무지개를 쫓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결말은 다 다른 이야기지만, 무지개를 쫓는다는 발단을 어떻게 생각해낸 것일까? 무지개를 희망, 미래, 가능성, 의지, 기타 등등……. 여러가지의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나는 무지개를 ‘허상’으로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더 그런 걸지도 모른다. 어릴 적, 우연히 접한 책의 영향으로 무지개를 잡아보려 한 적이 있다. 지금
오랜만에 아무 일정도 없는 주말이었다. 은퇴를 한지 넉 달밖에 되지 않은 탓에 기존의 루틴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대만은 아침 일찍 일어나 헬스장에서 운동을 마치고 돌아왔다. 그리고는 밀린 집안일을 시작했다. 운동복을 세탁하고 청소기를 돌리고 나자 이제 겨우 오전 11시였다. 하루가 왜 이렇게 길지. 대만은 할 일이 없어서 걸레를 들고 와 집안의 모든
로즈 케네디가 말했다. ‘폭풍 후엔 새도 노래하는데 사람은 왜 한 줄기 빛에 만족하지 못하는 걸까?’ - 어느 월요일, 힐데브란트는 평소와 다를 것 없이 드래곤 홀을 걸었다. 수업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지만, 이제야 도착하는 아이들이 곳곳에 있다. 섬에서는 지각이 미덕이다. 교실로 들어갈 생각 없이 복도를 헤매는 아이도 있고, 아예 학교에 오지 않
“아, 정말로 이러기야?” 기원은 미간을 찌푸린 채 손을 내밀어 툭툭 쏟아지는 비를 받아냈다. 오늘 꿈자리부터 영 별로였어. 엄청 커다란 괴물한테 쫓겨서 기운이 다 빠진 채 일어났지, 덕분에 학교는 지각. 컨디션 탓에 동아리 시간엔 목소리도 제대로 안 나왔고. 수업시간에 잠깐 존 것이 걸려서 혼자 벌청소 하다가 끝났는데… 이제는 소나기까지? 오늘 하루종일
나의 사랑스러운 진주, R에게. 안녕 아가. 네가 이 편지를 발견하게 되었다면 우린 아마 네 곁에 없겠구나. 그리고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일거고. 그렇지? 지금 곤히 자고 있는 너의 동그란 이마가 보이는데, 어찌나 깊이 잠들었는지 침을 무슨 은하수 흩뿌리듯이 흘리는데 덕분에 내 소매가 축축하단다. 어떻게 닦아도 닦아도 계속 나오는 건지. 혹시 무슨 문제가
긴 노래가 이어졌다. 무지개를 불러오기 위한 제의였다. 가리는 긴 천을 들어 허공에 펼쳤다가 거두기를 반복하며 노래를 불렀다. 무지개를 불러오기 위한. 실은 그들이 부르는 것은 비님이었다. 가뭄을 없애줄. 갈증을 사그라뜨릴. 그러나 비님은 폭풍을 불러오고 검은 물로 땅에 자리한 대부분을 쓸어갈 두려운 존재라, 주민들은 무시무시한 괴물로 변할 수 있는 비님보
눅눅한 잿빛 하늘이 온몸을 내리누르듯 무거웠다. 야나기 마시로는 우중충한 하늘을 올려다보곤, 창문을 밀어 닫았다. 세상이 전부 물 속에 가둬진 습기가 호흡을 타고 폐 안까지 들어차는 기분.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있다면 아마도 우울감, 이라는 단어가 그냥저냥 잘 어울렸다. 이대로 물에 섞여들어갈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약속도 없고, 친구들과 간간히
가장 빛나는 청춘의 나이에 어울리는 다채로운 사람이었다. 나는 정반대로 거무칙칙하고 우울하기 짝이 없었고. 다행인건 나는 그런 내 속마음을 감추고 멀쩡한 모습만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은하야.” 낯간지럽게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평소 활기차고 쾌활한 모습은 어디로 가고 어색함에 손등을 메만지는 소년이 있었다. “백강윤.” “어. 그
비가 찾아오면 으래 산등성이에는 무지개가 걸렸다. 소년은 밭일하던 손을 멈추고 일곱 빛깔의 아름다운 아치를 쳐다보았다. 이마에 붙은 흙을 손으로 털어내고 허리 숙여 김을 매는 어머니에게 물었다. “정말 아버지는 무지개 보물을 찾았을까요?” 어머니는 말이 없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에 대해 물으면 늘 침묵으로 일관했다. 하지만 소년은 아버지에 대해 잘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