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여름날

헌옹수거함 by 헌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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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일 년 전 오늘 바닷가에 놀러 갔었다.

참 우중충한 한낮이었다. 비가 오는 건지 마는 건지 피부 점점이 느껴지는 차가운 물방울. 불쾌하게 젖어드는 신발 앞 축.
언제쯤 바꿔 들어야 손이 덜 빨개질까 고민하며 올라가는 아스팔트 길이 그렇게 멀었더랬다.

“좀 덜 살 걸 그랬나 봐.”

식식대며 올라가는 와중에도 너는 나를 보았다. 양손 가득 마트에서 산식재료를 들고서 뭐가 좋다고 실실 웃는지. 이 녀석의 여유는 안쪽 깊은 곳에서부터 샘솟는 샘물 같았다. 겉으로 드러나는 영역과는 별개라는 얘기다. 웃는 낯짝 아래로 땀을 비질비질 흘리는데, 금방이라도 상자를 내팽개치고 쓰러질 것 같았다. 나는 한심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게 뭐 하려고 고집을 부려. 술을 그만큼이나 사서는…”

“시간이 하루밖에 없잖아.”

굵고 짧게 즐겨야지. 의지가 느껴지는 중얼거림에 나는 코웃음을 가까스로 참았다. 소주 반 잔에 십만 원의 택시비를 날린 첫 외박을 기억이나 하고 있을까. 도서관에서 받은 수십 통의 전화는 왠지 모를 뿌듯함이 담긴 웅얼거림으로 가득 찼었다. 주량으로 누구를 이겼다느니, 밤을 즐기고 있다느니 뭐 그런 얘기들. 잘 놀고 있네, 한마디에 의기양양하게 재잘대더니 나중에는 제 기분에 겨워 폰을 알코올에 빠뜨리고 말았다. 그러면서 아침에 겨우 도착해서 하는 말이 ‘즐거웠으니 됐지’ 라니.
참 일관성 하나는 끝내주는 녀석이지 싶었다.

“오 무지개다.”

그가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고 소리쳤다. 저렇게 태평하다니 아직 덜 힘든가 보다. 그의 시선에 맞춰 고개를 돌렸다. 그리 높지 않은 하늘에 무지개가 아직 가시지 않은 구름 사이에 희미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너무 작은데. 곧 다시 쏟아지겠다.”

“그래도 예쁘잖아.”

조각처럼 걸려있는 빛은 이르게 켜진 가로등보다 흐릿했다. 오히려 즐거운 얼굴로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서 더 빛났다. 뭐가 저리 신이 날까. 딴죽을 걸었지만 그 모습이 싫지 않았다. 쏟아지면 다 젖겠지. 멈춰선 그의 보폭에 발을 맞췄다.
잠깐이면 사라질 기상 현상보다 그의 미소가 조금 더 오래 남았으면 했다.

나는 이제 그런 사람을 모른다. 없었던 셈 치자던 마지막 말은 그 앞의 모든 것들을 지워버리는 힘이 있었다.
지극히 합리적인 결정이었다. 역시 그렇겠지. 수십 번 같은 말이 오고 갔다. 그는 끝까지 한결같았다. 그를 꺾을 용기가 나지 않아 차곡히 쌓인 감정의 매무새를 정리했다. 축축하고 무거운 것에 감싼 결정의 끝이 조금은 뭉툭해졌다. 여전히 차가웠지만.

그는 함께해서 괴로웠던 기억부터 지웠다. 나는 괴로운 마음의 이름을 지웠다.
그는 행복했을 수도 있다는 가정을 없앴다. 나는 행복했던 이야기를 떨궜다.

“그래도 네가 잘 지내길 바래.”

깨끗하게 지운 덕분에 마지막은 그의 몫으로 남길 수 있었다. 그는 날씨처럼 지냈으면 했다. 차가운 연기에 뭉개진 건물의 지평선. 폐 속으로 들어차는 매캐한 도시의 흙내음.
떨어지는 물방울에서 느껴지는 작열감이 마지막으로 남았다.

이제 나는 그런 사람은 모른다.
다만 그날의 무지개를 추억할 뿐이다.

오늘은 뜨지 않을 무지개를 생각하며 천천히 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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