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ge] 온천
무지개는 해가 있을 때만 해의 반대편에서 보인다. 아주 간혹 깊은 산 속의 폭포를 들어가면 언제나 무지개가 떠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나 그도 해를 등져야 함은 마찬가지다. 그러니 밤에 무지개를 보는 것은 훨씬 더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와아.”
진예는 작은 탄성을 질렀다. 바닥과 테두리에 옥돌을 붙여 소박하면서도 정교하게 꾸민 작은 온천 위로 뭉게뭉게 김이 솟아오르고, 그 김에 작은 무지개가 피어나 있었다. 어두운 밤 탓에 사람이 다치지 않도록 태양을 대신해 밝게 타오른 화톳불 덕분이다. 잡인의 시선이 닿지 않도록 빙 둘러친 담장 곁에는 마침 새하얀 박달꽃이 흐드러져 더욱 고아했다. 그 박달꽃처럼 새하얀 목간용 적삼을 걸친 진예는 행여 자신이 그 풍경을 깨뜨리지 않을까 손가락 움직임 하나마저 조심하며 살금살금 걸어갔다. 그 뒤에 머리 절반이 하얗게 센 나이 든 상궁이 입가에 가득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따르다가 입을 열었다.
“그리 좋으십니까?”
“네, 정말 예뻐요!”
“비전하.”
앗. 진예의 두 뺨이 발갛게 물들었다. 별궁에서 ‘비씨(妃氏)께서는 말씀을 낮추시지요.’를 듣고 벌써 5개월, 태자비로 입궁한 지는 이제 한달 하고도 보름이 되어가나 여전히 할머니 연배의 상궁에게 말을 낮추기란 묘한 거북함과 자책이 함께 들었다. 시무룩한 강아지처럼 솔직하게 고개를 숙이는 진예를 보며 나이 든 상궁은 허리를 꾸벅 굽히는 것으로 어서 들어가라는 무언의 요청을 보냈다. 노인을 힘들게 하면 안 되는 법이다. 진예는 순순히 발끝부터 온탕 속으로 내밀었다. 물속에 잠긴 옥돌은 본래의 연한 옥색만이 아닌 오색 영롱한 광채를 수면 위로 은은히 흩뿌렸다.
“고단함이 조금은 가실 것입니다.”
상궁은 주름진 작은 손으로 물을 떠서 진예의 어깨 위에 뿌렸다. 적삼은 금방 젖어 살갗에 착 달라붙었다. 그러나 온천의 온기 덕분에 차갑게 느껴지진 않았다. 진예는 흘끗 고개를 돌려 물었다.
“자네는 아니 들어가는가?”
“궁인들을 위한 탕은 여기서 조금 떨어져 있나이다. 순번을 정해 번갈아 들어가오니 안심하소서.”
이렇게 넓고 예쁜데. 진예는 발가락을 까딱 움직이며 속말을 삼켰다. 양기가 충천한다는 단오가 되면, 그렇지 않아도 더운 날에는 여럿이 모여서 함께 몸을 씻고 시원한 과일을 먹으며 더위를 쫓곤 하는 민간의 풍습이 떠올랐다. 비록 지체가 달라 한 번도 함께한 적은 없었지만. 그래도 친척들과는 그럴 수 있었는데, 어쩌면 이제는 영영 못할 지도 모르겠다.
“나 때문에 공연히 자네가 일찍 쉬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네. 자네도 고단할 터인데. 내 고단함이 자네에게 비하겠나.”
진예는 나른하게 한숨을 쉬었다. 남들은 외유(外遊)라 부르는 행궁 걸음이나 진예의 목적은 ‘휴양’이 아닌 ‘봉양’에 있었다. 오랜 지병을 앓으시는 천자께서 효험을 보고자 행궁에 행차하시면서 며느리의 효성을 받길 원하시는 까닭이었다. 정작 친아들인 태자는 궁을 지키며 임시로 대리청정을 해야 했기에, 녹옥으로 바닥을 곱게 깐 탕에 천하절색인 며느리를 밀어 넣어 몸을 씻게 하고 시침을 들게 했다는 옛적 어느 혼군의 고사가 오싹하게 스쳐 갔으나 같이 가는 다른 이들의 명단을 보고 이내 머리에서 지워버렸다. 오랫동안 내궁을 지키며 존중받는 귀비와 숙비, 몇 년째 아끼는 정빈과 서 미인 등이 같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외에도 공주가 부마와 함께 찾아왔기도 하니, 비록 안심할 일이긴 하나 태자는 외로이 집을 지키는 꼴이었다.
‘조금이라도 사랑해주시면 좋을 텐데.’
군주는 가장 신뢰하는 이에게 빈집을 맡긴다. 그러니 대부분은 스물이 넘은 태자가 행차에 동행치 못한 것을 이상히 여기지 않을 것이다. 진예는 눈을 깜빡이며 수증기 너머로 펼쳐진 밤하늘을 보았다. 동쪽에서 휘영청 밝게 떠오른 보름달이 뭇별의 가냘픈 광채를 서서히 지우고 있었다. 어른거리는 수증기는 달에도 별에도 똑같이 동그란 무지개를 씌웠다.
이 물을 떠서 보내드리면 좋아하지 않으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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