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해변의 셔터음

이별이 찾아와도 괜찮아. 내가 행복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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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김이 새하얗게 나오는 겨울,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겨울 하늘 아래로 아스팔트 도로가 길게 뻗어 있다. 가는 길은 하나, 오는 길도 하나.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일직선의 두 도로가 서로 옆에 붙어 만들어진 이차선 도로. 도로 위 자동차에서 창문을 내리면, 시선 저 끝 멀리 바다가 보이는 도로다. 길게 뻗은 길 위로 하얀 차 한 대가 달려가고 있다. 푸른 하늘에 구름이 하나 떠 있었다면 꽤 어울렸을 색이었다. 여섯명이 탈 수 있는 크기의 자동차의 닫힌 창문에 그 차가 스쳐 지나가는 나무와 겨울 하늘이 반사되어 보였다. 낙엽이 다 떨어진 나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상록수도 종종 있어 창문에는 하늘의 푸른색과 나뭇잎의 푸른색이 함께 비쳤다. 다른 창문과 달리 조수석의 창문만은 닫혀있지 않고 내려가 있어, 길거리의 풍경을 반사해 내지 않고 그 안의 사람의 모습이 그대로 보였다. 겨울바람이 그의 짧은 갈색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스쳐 어루만졌다. 

여섯명이 앉아있는 자동차는 많은 소리가 나지는 않았지만, 정적이지도 않았다. 그의 옆자리에 앉은 운전자 각별은 자동차가 정차해 있을 때 운전대를 검지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는 버릇이 있었다. 핸들 커버에 닿는 작은 톡톡 소리가, 운전자의 취향에 맞춘 라디오의 음악 소리 사이로 이따금 울렸다. 오늘 튼 라디오 BJ의 선곡은 부드럽지만 우울하진 않은 음악이 많았다. 뒷자리에 앉은 이들의 잠을 방해하지 않을 만큼 작은 볼륨으로 흘러나오는 음률은,  잔잔하면서도 겨울 여행을 떠나는 이들의 여행길에 어울렸다. 닫힌 창문의 선탠에 한 번 걸러져 들어온 겨울 하늘의 푸른 빛이, 가장 뒷자리에 잠들어 있는 라더와 수현의 자리에 색을 덧칠했다. 잠든 둘의 고른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렸다. 공룡의 바로 뒷자리에 앉은 잠뜰의 자리에선 이따금 진동 소리가 났다. 여행을 왔는데도 처리해야 할 일이 있는 것인지 연락 메신저가 몇 개씩 오는 것 같았다. 웅웅, 거슬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진동 소리가 들리면 그 후에 핸드폰 화면을 몇 번 두드리는 소리가 이어 들린다. 어떤 일은 직접 이야기해야 했는지, 수신음 몇번이 이어진 후 작은 목소리로 전화를 잠깐 이어가기도 했다. 잠뜰의 목소리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와 묘하게 어울렸다. 그 옆자리에 앉은 덕개에게선 아까 들른 휴게소에서 산 과자 봉지의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린다. 자신이 좋아하는 과자 봉지는 이미 뜯어서 작게 와그작대는 소리가 들린다. 각자의 공간에 앉아있지만 소리는 각 영역을 넘어 하나의 공간으로 녹아들었다.

"다 왔다, 내리자. 뒤에 자는 애들 깨워."

"라더 형! 수현 형! 일어나!"

"아 뭐야, 나 언제부터 잤어?"

"흐암, 각별 형 운전하느라 수고했어~"

"짐 챙겨서 내려, 카메라는 누가 챙길래?"

"내가 챙겨갈게."

마지막 대답은 공룡이 한 것이었다. 안전벨트를 풀고 내리면서, 짐짓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가볍게 지나가며 내뱉은 한 문장. 하지만 잠뜰은 옷을 정리하던 손짓을 잠시 멈추고 공룡을 돌아보았다. 잠뜰이 멈춘 사이 공룡은 차에서 내려, 잠뜰 쪽 문을 열고 카메라를 건네달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열린 문을 통해 겨울의 온도로 내려간 공기가 잠뜰의 손등을 어루만진다.

"너가?"

"왜? 싫어?"

"아니, 기특해서 그렇지~"

잠뜰은 씨익 웃으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차에서 내렸다. 그러고는 공룡의 손에 카메라를 쥐여주었다. 가볍고도 묵직한 무게가 손안에 느껴진다. 잠뜰은 잘 찍어보라며 그의 어깨를 두어번 두드리곤 앞서 걸어가는 다른 이들을 향해 갔다. 

공룡은 손에 쥔 카메라를 내려다보았다. 사용감이 조금 있는 하얀 카메라였다. 크기가 그렇게 크지는 않아서 공룡의 손으로는 한 손으로 드는 것도 문제 없어 보였다. 카메라를 좋아하는 잠뜰이 오늘 여행을 위해 집에 있는 여러 대의 카메라 중 하나를 골라온 것이었는데, 사용자의 손길이 언뜻 보였다. 많은 곳의 풍경을 담아서였을까, 작은 흠집 여러 개가 사용자의 귀중한 경험을 기록하듯 나 있었다. 그럼에도 관리가 잘 되었는지, 렌즈가 반짝이며 겨울 햇빛을 일부 반사해 냈다. 카메라에 연결된 긴 끈을 목에 걸고, 공룡은 앞서 걸어간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합류했다. 여섯의 발걸음은 각기 다른 속도와 발걸음으로 걷지만 동일한 방향으로 움직여, 마침내 파도 소리 들리는 해변에 닿았다. 

"바다다."

누가 먼저 바다 여행을 제안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어쩌면 아주 오래전에 농담삼아 했던 말에서 시작했을 지도 모르겠고, 어쩌면 누군가의 결심이 타이밍 좋게 누군가의 행동력과 맞물려 실현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시작은 언제인지 알 수 없지만 지금 그들은 바다에 와있었다. 

공룡의 검은 눈이 바다로 향했다. 한 겨울의 짙은 푸름이 해안을 향해 덮쳐오듯 달려왔다가, 하늘과 맞닿은 먼바다를 향해 물러난다. 마치 푸른 색을 온몸에 칠한 사람이 몸을 기울이는 것처럼, 하늘 끝까지 뻗어나가는 하이얀 파도소리를 내며 해안으로 다가왔다가, 깊은 바닷속으로 돌아가는 소리로 물러난다. 겨울의 바다는 다른 계절의 바다와 달리 깊은 푸름을 담고 있다. 풍덩 뛰어들어 그 안에 몸을 담그기에는 지나친 차가움이지만, 대신 눈에 담아내기엔 감히 단어로 다 표현도 못할 정도로 아름다운 파란색이다. 검은색 공룡의 눈에 그 푸른색이 담겨 넘실대, 작은 바다를 두 개 만들어내었다. 

"가위바위보 진 사람이 파도에 발담그기 할래?"

"이 날씨에?"

"그런 바보들이나 할 제안을 하다니 당장 하자."

"거부할 권리 같은 건 없는 거야?"

"안 내면 진 거, 가위 바위 보!"

사실 뻔한 결과다. 그들 중에는 늘 가위로 시작하는 사람이 있었기에. 덕개는 자신의 손을 원망스럽게 내려다보더니 다시 그들을 바라본다. 진짜로 해요? 진짜로 하지 그럼? 으아아아. 괴로운 소리로 외치는 덕개를 수현이 깔깔 웃으며 얼른 들어가라며 등을 떠밀었다. 덕개는 몇 번이나 발을 동동 구르더니 제법 용감한 소리를 지르며 해변으로 밀려드는 겨울 파도의 끝자락에 빠르게 달려들었다. 그러고는 담근 것 보다 더 빠른 속도로 발을 빼며 다시 달려 나왔다. 추워엇!! 소리 지르는 막내를 해변에서 바라보던 이들은 그 고함에 또 한 번 폭소하였다. 공룡도 푸핫하고 그 웃음소리에 자신의 것을 섞어 보냈다.

"모래에다 우리가 왔었던 흔적을 남기겠다."

"모래 낙서 하겠다는 걸 뭘 그런 비장한 말투로..."

"나는 토끼 그려야지~"

"야 그거... 너 내가 그려준 거 너무 좋아하는 거 아냐?"

수현은 일그러진 토끼 그림을 그리며 재밌어서 좋다고 웃었다. 공룡은 다른 이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 쭈그리고 앉아 모래 위에 손가락을 얹었다. 차갑고 조금 촉촉한 감촉이 손 끝에서 느껴졌다. 하지만 무슨 그림을 그릴지 생각이 나지 않아, 의미 없는 동그라미나 선만 몇 번 덧그렸다. 작은 모래 알갱이들이 손 끝에 달라붙었다. 그러다, 한 차례 크게 일은 파도가 해변을 덮쳤다. 공룡이 그리던 그림도, 다른 이들이 그린 그림도 모두 파도에 쓸려 나가 지워지고 말았다. 

"아, 내 회심의 역작이..."

"공룡바보라고 적은 게 각별님 회심의 역작이에요?"

"근데 슬슬 숙소 예약 시간 다 돼서 가야 해."

"그럼 마지막으로 픽셀리 하나만 적고 가자."

"그래, 사진도 찍고. 카메라맨 준비됐냐?"

"파도가 오면 어차피 그림 다 지워질 텐데?"

"그게 낭만이라며?"

공룡의 질문에 잠뜰이 밝게 웃으며 반문했다. 파도에 지워질 모래 그림을 그리는 것, 입에 자주 낭만을 담던 그가 할 법한 말이긴 하였다. 공룡은 잠뜰의 미소에 카메라를 들어 올렸다. 잠뜰은 사인을 확인했다는 듯 적당한 위치에 다시 자리를 잡고 모래 위로 손가락을 움직였다. 수현은 자신의 토끼를 한 번 더 남기겠다며 마찬가지로 옆에 허리를 숙이고 모래 그림을 그렸고, 라더는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제법 바다에 가까이 서 있던 덕개는 자신의 자리까지 밀려온 파도에 깜짝 놀라며 다른 이들이 서 있는 모래사장 안쪽으로 황급히 달려왔고, 그런 덕개의 움직임이 재밌다는 듯 각별이 웃었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한 발짝 떨어진 곳에, 카메라를 든 공룡이 서 있었다. 

가만히 그 풍경을 바라보았다. 다섯명이 함께 바닷가에 모여있는 그 풍경을, 그리고 카메라를 들고 서 있는 자신을. 철썩이는 파도 소리와, 겨울 하늘과 바다의 맑은 푸름과, 그 아래 있는 이들의 미소를, 이 카메라로 기록할지 말지 결정할 수 있는 자신이 서 있었다. 넘치도록 생동감이 넘치는 푸름과 그 웃음들을, 공룡은 카메라를 들고 서 바라보았다. 그의 입술이 소리를 담지 않고, 그 혼자에게만 하는 말이라는 듯, 작게 벙긋거렸다. 

"..."

있지, 나는 말이야. 사실 사진 찍는 걸 안 좋아해.

시간이 많이 흘러 사진을 다시 보면, 지금의 나와는 너무 다른 모습이 남아 있어서 어색했거든. 그렇잖아,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그때 찍은 사진이 아무 의미 없는 종이 조각이 되는 순간이 싫었고, 그때 내가 느껴야 하는 감정이 싫었어. 어쩌면 누군가의 그런 모습을 아주 가까이에서 본 기억 때문에 더욱 겁을 먹었는지도 모르지.

그래서 함께 사진을 찍는 걸 줄곧 피해 왔어. 너희와 함께 웃는 모습을 그 네모난 프레임 안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했어. 늘 좋은 모습만 보여주려고 노력하고, 늘 밝은 상황만 만들어주려고 노력하지만, 나는 항상 웃고 강하기만은 할 수 없거든. 약해지고 갈등이 생기는 순간, 다시 이전으로 못 돌아갈까 봐 두려웠어.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되면 그 사진을 보는 것이 다른 사진들보다도 많이 힘들 것 같아서, 그것보다는 도망치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그런데 말이지. 어느 순간부터는 괜찮아지더라.

언제부터인지는 몰라. 언제부턴가는 괜찮을 것 같더라. 이 관계가 영원할 거라는 동화 속 순진한 말 같은 건 하지 않아. 누군가는 그것을 진심으로 바라겠지만, 그리고 나 역시 오래오래 함께 가길 소망하지만. 어느 순간이든 끝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잖아. 그런데 그저, 이 관계는 나중에 끝이 나도, 좋은 매듭으로 마무리 지어질 수 있을 것 같더라고. 내가 가진 가장 예쁜 포장지로 감싸놓으면, 매듭을 지은 후 잘라버린 실 끝이 그렇게 쓸쓸해 보일 것 같지 않더라고. 이건 내가 가진 것 중 가장 값진 순간을, 가장 아끼는 포장지로 감싸둔 거라서. 언제 다시 보아도 이제는 끊어진 매듭보다 포장지 안의 내용물을 더 기쁘게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아. 

그래, 이제는 괜찮아.

"다 썼다!"

"야야 카메라맨! 파도 오기 전에 찍어!"

"다 모여봐! 안 나오면 발이라도 나오게 해!"

"공룡 너도 어떻게 나오게 해봐!"

"난 안 나와도-"

"그냥 손가락 브이 만들어서 렌즈에 걸쳐놔! 그렇게라도 나오게 해!"

이제는 두려워하는 그 순간이 와도, 이 순간은 행복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

사진이 그저 연출된 아름다운 추억의 한조각이 아니라, 과거 나의 경험 속 일부였다는 것을. 나는 이때 행복했었고, 나중에 이 사진을 보면서도 깨진 현실로 인해 슬퍼하기 보다는 그 시절 추억의 소중함을 안고 행복해할 감정이 더 크다는 것을, 이제는 알아.

이 사진에 파도 소리는 담기지 않을 거고, 내 눈으로 보는 푸름이 전부 담기지도 않을 거야.

우리의 사진 속에 있는 모래 그림은 이미 바다로 돌아가는 푸른 파도의 옷자락 끝에 쓸려 사라졌겠지.

이 사진에 있는 웃는 얼굴들이 나중에는 연락 한 통 안 하는 사이가 될지도 몰라.

찰칵

하지만, 나는 확신해. 

지금 셔터를 누르는 순간을, 나는 절대 후회하지 않아.

"봐봐, 봐봐."

"오오~ 꽤 잘 나왔는데?"

"내 얼굴만 너무 대빵만하게 나온 거 아냐?"

"그건 원래... 아악 누나! 누님!!"

"자자, 돌아가자!"

이제 이 장면은 영원히 남게 될 것이다.

공룡 그의 의지로 셔터를 눌렀다. 두려워하지도 않았고, 피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들이 함께 있는 모습이 아름답다고 생각해서, 그 안에 함께 있는 자신의 모습을 남기고 싶다고 생각해서. 사진 찍자는 그들의 목소리가 어떠한 부담감도 없이 그에게 다가왔기에. 그래서 그는 두려움 없이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언젠가 사진의 색이 바랄 것이다. 어떤 사진은 잃어버리고, 어떤 이들과는 함께 사진을 볼 수 없는 사이가 되어 버릴 것이다. 어떤 사진은 다른 이의 손에 의해 그들이 원하던 모양과 다른 방식으로 오려지고 찢어질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가 이 사진을 찍었다는 사실만큼은 계속 남아 있을 것이다. 

"푸핫, 하하하!"

공룡은 밝게 웃었다. 이번엔 한 발짝 떨어져 있지 않다. 여섯의 발걸음 안에 섞여 들어가 있다. 손에 들렸던 카메라의 무게가 훨씬 가벼워진 듯 느껴진다. 이별이 찾아와도 괜찮다. 그가 행복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그가 이 순간 이 사진을 남기고 싶어 할 만큼 행복했었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테니까. 

아아, 그래. 그는 정말, 진심으로. 지금 이 순간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잠뜰TV 썸네일러님이 시즌 그리팅 홍보용으로 그린 그림이 바닷가에서 그림을 그리는 잠뜰TV 멤버분들의 사진을 찍는 공룡님 컨셉이라 해서 관련해서 조금 적어보았습니다! 2024 시즌그리팅 굿즈가 올멤 굿즈 제작하는 것에 공룡님이 어떤 마음으로 임했는지 방송에서 풀어주셨던 거 생각하면 정말 굿즈가 더더욱 뜻깊어지더라고요. 무지개를 의미하는 픽셀리 멤버들을 떠올리며 모두 그날의 감동을 다시 한 번 느끼며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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