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북두칠성
한 때 자신의 꿈을 찾지 못해 힘들어하던 모든 분들께 | 뜰팁 전력 '별자리'
"..그래서 이 문장을 해석해보면, '길을 잃었었던 그는, 북두칠성을 바라보며 길을 찾을 수 있었다.'란다. 주의해야 할 문법은..."
녹음이 짙어가는 여름. 여로 고등학교 1학년 1반에선 영어 수업이 한창이다. 붉은 색 펜으로 중요하다고 별표 표시를 하던 잠뜰은, 조금 어두운 표정으로 방금 수현이 해석한 문장을 다시 읽어 보았다.
"자, 그럼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잠뜰이는 진로 상담해야 하니까 이따 수업 끝나고 상담실로 오렴."
"...네."
수업이 끝났다는 걸 알리는 종이 울렸다. 수현은 책을 챙겨 교실 밖으로 나갔고, 잠뜰도 필기구를 정리하였다. 진로 상담이라는 말에 잠뜰의 표정은 한층 더 어두워졌다. 작은 한숨과 함께 잠뜰은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교실 창밖으로 보이는 푸른 하늘에 하얀 구름이 자유로이 흘러가고 있었다.
잠뜰은 상담실의 책상을 사이로 수현과 마주 보며 앉았다. 책상 위에는 수현이 가져온 아이스티 두 잔이 놓여있었지만 잠뜰은 마시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빨리 이 시간이 끝났으면 하고 바랄 뿐이었다. 어차피 아빠가 바라는 대로, 거짓말로 의사가 되고 싶다고 해야 할 뿐인 시간이었기에, 잠뜰은 진로 상담 시간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학기 초에 냈던 진로 희망서를 보면, 잠뜰이는 의사가 되고 싶은 거구나?"
"...네."
"흐음."
수현은 잠뜰의 대답에 잠시 무언가 생각하더니, 의대들이 쭉 적혀있는 종이를 한 장 꺼내 내밀었다.
"그렇구나. 잠뜰이 성적이면 여기 의대들까진 갈 수 있을 것 같아. 원한다면 선생님이 더 자세히 알아봐 줄 수 있어. 그런데 잠뜰아."
"네?"
"왜 선생님은 잠뜰이가 별로 의대에 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까?"
잠뜰은 화들짝 놀라며 수현을 바라보았다. 수현의 따듯한 눈이 잠뜰을 향하고 있었다.
"아, 아니에요 선생님. 저는 정말로 의사가...."
"잠뜰아."
수현은 잠뜰을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선생님한텐 아들 같은 아이가 세 명 있단다. 그래서 아이들이 거짓말 하는지 아닌지는 바로 알아볼 수 있어."
"......"
"선생님한테 잠뜰이가 생각하고 있는 걸 솔직하게 말해줄래?"
잠뜰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수현은 그런 잠뜰을 보채지 않고 느긋하게 기다려주었다. 한참을 망설이던 잠뜰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선생님 말씀이 맞아요... 저는 의사가 되고 싶지 않아요. 진로 희망서에 의사라고 적은 이유는 아빠가 그걸 바라기 때문이에요. 처음엔 아빠도 바라는 일이고, 저도 어느 정도 성적이 되니까...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아니에요. 아빠 기대가 부담스럽고, 의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때마다 숨이 막혀요. 문제를 풀 때마다 하나 틀리는 거에도 집착하게 되고, 그것 때문에 또 스트레스가 쌓이고... 제가 지금 하고 있는 게 정말 절 위한 건지 모르겠어요."
잠뜰은 두 손으로 아이스티가 담긴 잔을 꾹 잡았다. 손이 흔들리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한 번은 이런 생각들로 너무 힘들어서, 아빠께 말씀드려본 적이 있어요. 의사가 꼭 되어야만 하냐고요. 그랬더니 아빠가 저에게 물으시더라고요. 달리 하고 싶은 일이 있냐고. 그 말에 전,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어요. 꼭 하고 싶은 일이, 이루고만 싶은 꿈이 저한텐 없거든요. 대답을 못하니까 아빠가 그러시더라고요. 정말 하고 싶은 일이 생기고, 제가 그걸 위해서 모든 걸 내던질 수 있다면 그러라고. 그렇지만 당장 그러고 싶은 것도 용기도 없으면, 아빠 말대로 의사가 되라고요. 나중에 아빠 말이 맞다는 걸 알게 될 거라고, 그러시더라고요..."
아이스티 컵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 때문에 컵이 흔들려, 안에 있던 얼음들끼리 부딪혀 조금 탁한 소리를 냈다.
"솔직히, 아빠 말씀이 맞는 건 알아요. 당장 되고 싶은 것도 없으니 일단은 의사 목표로 공부하는 게 나중에 절 위해서라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선생님, 저는 정말 의사가 되고 싶지 않아요. 달리 되고 싶은 건 없지만, 되고 싶지도 않은 의사를 위해 이렇게까지 숨이 막히도록 공부를 계속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이렇게까지 힘들게 하는 게 저 자신을 위한 일인가요?"
이야기 하다 보니 감정이 조금 북받쳐 올랐다. 잠뜰은 진정하기 위해 아이스티를 한 모금 마셨다. 약간은 씁쓸한 차가움이 느껴졌다.
"아까 수업 시간에 해석해주신 문장 있잖아요. '길을 잃었었던 그는, 북두칠성을 바라보며 길을 찾을 수 있었다.' 저는, 그런 북두칠성이 없는 것 같아요. 자신이 가야 할 길을 확실히 알려주는 길잡이 별이 저한테만 없는 것 같아서, 너무 힘들어요. 어떻게 해야 할지, 이젠 정말 모르겠어요."
잠뜰은 고개를 숙였다. 이야기를 들은 수현은 한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잠뜰은 속으로, 자신이 너무 칭얼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언제나 선생님들 사이에서 모범생이라고 불렸는데, 이런 거로 고민하는 자신이 괜히 한심해 보였다. 선생님이 이런 자신을 이상하게 보는 것 아닐까 하는 걱정도 들었다.
"잠뜰이가, 혼자서 고민이 많았겠구나."
하지만 수현은 잠뜰의 예상과 많이 다른 말을 해주었다. 자신에게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말해주기보다, 자신이 힘들었다는 것에 먼저 공감해주었다. 고개를 들어 수현을 바라보니, 여전히 자신을 따듯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잠뜰이 아버지 말이 맞을지도 모르지. 지금 당장 하고 싶은 일이 없다면 사회에서 인정 받는 의사라는 직업을 위해 공부해 두는 것이, 흔히 말하는 '실패하지 않는' 일이니까. 사실 선생님들 사이에서도 이런 일이 있으면 고민을 많이 해. 너희에게 진정 무엇이 행복한 일인지 아는 게 어렵거든. 설령 네가 의사가 되어 수백 억을 벌어들여도 네가 행복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고, 네가 좋아하는 일이라 해도 당장 오늘 먹을 밥 값도 내지 못하는 삶을 살게 된다면 그것도 진정으로 행복한 삶이라고 할 순 없지. 꿈을 생각하는 건 그래서 어려운 일인 것 같고, 그런 아이들을 어떻게 이끌어 줘야하는 지에 대해선 선생님들도 아직도 많이 고민 중이란다."
수현이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지 말을 멈췄다. 잠뜰은 아이스티를 다시 한 모금 마셨다. 아까보다 조금 더 달아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잠뜰아, 적어도 나는 말이야, 네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찾는 게 제일 우선이라고 한다. 미래의 네가 행복해지는 길이라 할지라도, 네가 확신이 없고 네가 원치 않는 일이라면, 그래서 너를 불행하게 하는 거라면, 나는 그 길을 가는 너를 말릴 거야."
수현은 티스푼으로 자신의 아이스티를 서너번 저었다. 컵 안에 생긴 작은 소용돌이로 얼음들이 흔들렸다. 그 소용돌이를 잠시 바라보던 수현은, 티스푼을 내려놓고 잠뜰을 다시 바라보았다.
"선생님 이야기를 조금 해주자면, 원래부터 선생님이었던 게 아니란다. 다른 일을 하다가 선생님이 되었어. 주변에서 좋은 자리라고 추천해줬던 자리였지. 그 일은 돈도 많이 주었고, 과하게 할 일이 많거나 그런 것도 아니었어. 흔히 요즘 사람들이 말하는 이상적인 직업이었을지도 모르겠네. 하지만 선생님은 그 일을 그만뒀어. 그 곳에 있는 하루하루가, 점점 더 괴로워졌거든. 그리고 이곳으로 와서 선생님이 되었지."
"선생님께서 원하셔서 선택한 직업이신 건가요?"
"그렇단다. 지금은 그때보다 돈도 훨씬 적게 벌고 신경 쓸 일도 많아졌지만, 선생님은 후회하지 않아. 이 곳에서의 하루하루가 행복하고, 아이들의 웃음을 보는 게 즐겁거든."
문득 수현은 자신이 그 곳에서 구해온 세 아이들을 떠올렸다. 비록 연구소에서 나온 후 힘든 일이 많았지만, 그 밝은 미소를 보고 있으면 오늘날 이 길을 선택한 자신을 절대 후회하지 않았다.
"선생님 말이 너무 많아졌네. 그러니까 선생님이 하고 싶은 말은, 네가 원하지 않는데도 단지 안정적인 수입과 사회적 위치만을 바라보고 선택하는 거라면, 그 길은 선생님이 추천하지 않는다는 거야. 경험자로서의 조언이란다."
잠뜰은 수현의 말에 마음이 동하는 것 같았지만, 여전히 확신이 없어 보였다. 고민하고 있는 것일 거다. 그 마음을 아는 수현은, 다시 입을 열었다.
"아까 잠뜰이가, 잠뜰이의 북두칠성은 없는 것 같다고 말했지. 하지만 그건 틀린 말이야. 잠뜰이한테도 잠뜰이의 길을 밝혀주는, 다른 이가 정해준 것이 아닌 오직 네가 선택한 북두칠성이 있을 거란다. 지금은 단지, 하늘에 구름이 많이 끼여서 보이지 않는 거야."
"하지만 결국, 제가 북두칠성을 찾지 못하면 어떡해요? 결국 마지막까지 구름이 걷히지 않으면 어떡하죠? 그제야 다른 사람이 정해준 길을 걸어가기엔 늦지 않을까요? 다른 사람들에게 뒤처져서, 모두가 절 놀리면 어떡하죠?"
"그럴 땐 말이야 잠뜰아, 네가 네 북두칠성을 찾으러 다니며 네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렴. 어떤 일에도 무의미한 일은 없어. 네가 단지 방황했을 뿐이라고 생각하며 걸은 그 길에서도 너는 배운 것이 있을 것이고, 성장한 부분이 있을 거란다. 그것들을 바라보면서, 다시 네가 원하는 방향을 잡으면 된단다. 늦었냐고? 전혀 그렇지 않아. 너는 그들이 보지 못한 세상을 보고 온 거니까. 설령 돌아가게 된다 하더라도, 그들이 정해준 북두칠성을 네가 강요받은 게 아니라 선택한 거라면, 너는 결코 늦지 않았단다. 손가락질 하는 사람들? 그들은 너를 모르고, 너의 단편만 바라보고 평가하려는 이들이란다. 그런 사람들은 앞으로 네가 나아갈 길에 전혀 도움 되지 않을 사람들이니 신경 쓰지 말렴. 그런 이들에게 신경 쓰기엔 너는 너무나도 소중한 사람이란다."
소중한 사람, 그 말이 잠뜰의 마음에 그렇게 따듯하게도 와닿았다. 수현은 의대들의 이름이 적혀 있던 종이를 구겨 쓰레기통에 버렸다. 잠뜰에게 더는 필요 없는 것이었기에.
"집에 가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보렴. 아버지랑도 이야기 한 번 더 해보고. 잠뜰이의 삶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니고, 네가 나아갈 길은 다른 누가 대신 걸어줄 수 있는 것도 아니란다. 네가 걸어갈 길, 그 길을 밝혀줄 북두칠성, 모두 네가 정하는 거야. 지금 당장 정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저, 그 북두칠성을 찾으러 걷는 그 길이 네게 즐겁고 행복하다면, 선생님은 언제까지나 네가 걸어갈 길을 응원할게."
잠뜰은 무언가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 눈빛엔 확신이 들어있었다. 잠뜰은 일어나 수현에게 고맙다고 인사하곤 상담실을 나왔다. 그녀의 반짝이는 눈을 보며 수현은 다행이라는 듯 부드럽게 웃었다. 집으로 향하는 잠뜰의 표정은 밝았고, 내딛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노을이 져가며, 조금 이른 별들이 동쪽 하늘에서 반짝였다.
"이제 슬슬 시계탑 인형들이 나올 때가 됐는데..."
체코 프라하의 광장, 그 푸른 하늘 아래 잠뜰이 시계탑을 올려다보며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람이 잠뜰의 머리카락을 살짝 흔들었다. 그 시원한 기분을 잠뜰은 잠시 느껴보았다.
수현과 상담하고 나고 얼마 후, 잠뜰은 아버지와 오랫동안 이야기를 했다. 의대를 가지 않겠다는 말에 잠뜰의 아버지는 화를 냈지만, 결국 자신의 딸의 결정을 지지해주기로 하였다. 그 후 잠뜰은 자신이 바라는 꿈을 찾기 위해 세계 여행을 시작했다. 여행 경비를 준비하는 과정은 생각보다 힘들었지만, 바라지도 않던 의대를 목표로 독서실에서 공부할 때보단 숨이 막히진 않았다.
"뭐야, 이 이상한 동호회는!"
광장 끝에서 들린 목소리로 인해 잠뜰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순간 어떤 생각이 든 잠뜰은 그곳으로 달려갔다. 모퉁이를 돌기도 전에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 자신이 오늘날 이렇게 자신의 길을 걸을 수 있게 도와준 그 동아리 사람들의 목소리. 모퉁이를 돌자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고, 그녀의 발소리를 들은 것인지 그들이 뒤돌아보았다.
"넌...!"
시계탑의 소리가 광장에 울려 퍼졌다. 기다리던 인형이 나오는 장면을 놓쳤지만, 잠뜰은 그 순간 그런 것은 전혀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들을 바라보며 잠뜰이 밝게 웃었다.
잠뜰은 아직도 자신의 북두칠성을 찾고 있다. 세계 여러 곳을 돌아다녀 봤지만, 아직 뚜렷하게 하고 싶은 일을 발견하진 못했다. 그렇지만 잠뜰은 더 이상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꿈을 찾으러 걷는 걸음이, 자신의 북두칠성을 찾으러 가는 그 모든 과정이, 잠뜰에겐 더없이 행복했으니까. 아마 잠뜰의 북두칠성을 가리던 구름이 걷히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진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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