뜰팁 전력

너는 새벽 노을이 되어

뜰팁 전력 '황혼' | 겨울신화

황혼기

1. 해가 지고 어스름해지는 무렵.

2. 사람의 생애나 나라의 운명 등이 한창인 고비를 지나 쇠퇴하여 종말에 이른 때.

깊은 밤이다. 잠뜰의 집에 머물던 봄의 신 수현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중간에 잠이 깨어 잠시 밤공기라도 쐬고자 나온 것이다. 하얗게 눈이 쌓인 마당에 서서 그는 겨울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내뱉은 숨이 찬 밤공기를 맞아 하얗게 영글었다. 

'3년이나 이어진 이 추운 겨울이, 이젠 끝날 때가 되었다.'

수현은 오늘 저녁에 잠뜰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혔고, 함께 겨울을 끝내러 가자고 청했다. 잠뜰은 나이가 많은 저의 할아버지를 걱정하였지만, 이내 할아버지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겨울을 끝내야 한다며 수현과 함께 가겠다고 하였다. 그녀 덕분에 이 겨울은 이제 끝날 것이다. 비록 그녀가 생각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형태가 되겠지만.

"자네, 잠이 오지 않는 건가?"

"아, 촌장님."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촌장 공룡이 마당에 나와 있었다. 가볍게 인사를 하며 그쪽으로 가보니 늙은 촌장의 손에 한 쌍의 신발이 들려있었다.

"잠깐 잠이 깨서 밤공기를 쐬러 나왔습니다. 촌장님께선 이 시간에 무얼 하고 계셨습니까?"

"잠뜰이의 신발을 손봐주고 있었네. 곧 먼 길을 떠날 텐데, 발이 아프면 안 될 것 아닌가."

공룡의 말에, 수현의 눈이 조금 커졌다. 자신은 공룡에게 잠뜰과 떠난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할아버지가 걱정하실 게 뻔하니 말씀드리지 말자고 잠뜰이 신신당부했기 때문이다. 공룡은 손을 놀려 마무리 작업을 하더니, 수현을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어차피 지금은 둘밖에 없으니, 더 이상 숨기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봄의 신이시여."

"..그걸, 어떻게..."

"하하, 나이를 먹으면 자연히 보이는 것이 많아지더군요. 이 늙은이, 긴 세월을 허투루 보내지만은 않았습니다."

마지막 매듭을 묶더니, 공룡은 만족스럽다는 듯 신발을 작업대 위에 내려놓았다. 수현은 그런 공룡을 가만히 바라보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살짝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말리지 않으시는군요."

"아이가 가겠다는데 어찌 막겠습니까."

"괜찮으신 겁니까? 당신도 잘 알다시피, 당신은..."

차가운 겨울바람이 불었다. 떠날 자와 머무를 자 사이로 불어 밤하늘로 흩어졌다. 수현은 바람으로 인해 잠시 멈췄던 말을, 이었다.

"잠뜰 씨가 돌아올 때까지 그 명이 버티지 못할 것이잖습니까."

"...."

춘분초는 봄신의 힘이 들어간 약초이다. 그 어떠한 질병도 치유할 수 있으나, 정해진 수명 이상으로 살게 할 수는 없다. 그리고 공룡의 수명은 거의 끝을 다해가고 있었다. 다른 누구보다 공룡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이 상태에서 춘분초가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그의 마지막이 질병으로 인해 고통스럽지 않게 하는 것뿐이다.

"생명의 시작을 관장하는 봄께서 제 삶의 마지막에 대해 잘 알고 계실 준 몰랐습니다."

"죽음을 짓밟고 새싹이 돋는 계절이 어느 계절이라 생각하십니까?"

"하하, 그것도 그렇군요."

공룡의 웃음소리가 밤하늘로 퍼졌다. 그는 자신의 집으로, 정확히는 잠뜰의 방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전혀 미련이 없다... 라고 하면, 거짓이겠지요."

공룡의 눈이 느리게 깜빡였다. 과거에 제 손녀딸과 함께 한 시간을 추억하고 있으리라.

"사실은 가지 말라고 하고 싶지만, 그리 붙잡는 건 늙은이의 욕심이겠지요. 아마 그 아이는 굳이 봄신께서 오지 않으셨어도 길을 찾아 떠났을 겁니다. 이유가 있어야만 바람이 부는 것은 아닌 법이니까요."

공룡은 다시 시선을 돌려, 자신이 손 본 잠뜰의 신발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애정이 가득한 손길로 그 신발을 손으로 몇 번 쓸었다.

"단지.... 조금 아쉬울 뿐입니다. 나의 인생의 아침과 낮을 바쳐서 키워낸 우리 잠뜰이의 가장 찬란할 낮을 보지도 못하고, 나는 황혼을 걷다가 밤으로 져버리겠지요. 그것이 아쉬워 괜히 촌장으로서 괜찮은 척 더 열심히 일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둠에 잠기는 것이 아쉬워 저녁노을이 마지막으로 붉게 타오르는 것이니까요."

수현은 말이 없었다. 이젠 황혼기에 접어든 그에게도 한때 한여름 낮처럼 찬란한 시간이 있었을 것이다. 황혼을 걷다 보니 그 시간이 그리웠던 것일까. 일전에 순록 떼를 사냥하러 직접 간 것도, 아직 자신이 남아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한 황혼녘 노을의 마지막 발악의 붉은 빛이었을까. 그러나 지나가는 시간을, 다가오는 죽음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은, 수현과 공룡 둘 다 알고 있었다. 공룡은 미소를 지으며 수현을 바라보았다.

"봄의 신이시여, 이제 이 늙은이는 황혼녘에 저무는 태양이 되어 스러질 겁니다. 저는 제 손주가 봄을 가져올 사람이라는 것을 믿지만, 아마 봄이 올 때까지 이 늙은 몸이 버티지 못하겠지요. 그러니 제가 볼 수 없는 것을, 봄의 신께 여쭙고 싶습니다. 우리 잠뜰이가, 봄을 다시 가져와 줄까요?"

수현은 순간 거짓을 말해주어야 할지 고민했다. 빈말로라도 잠뜰이 봄과 함께 돌아올 것이고, 당신이 그때까지 버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해주어야 할까. 하지만 결국 수현은 진실을 말하는 것을 택했다.

"...장담은, 드릴 수가 없습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유일하게 잠뜰 씨가 이 겨울을 끝낼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습니까.... 그러면 안심이군요. 가능성이 있다면, 분명 그 아이는 해낼 테니까요."

늙은 촌장은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그는 제 손녀의 신발을 두어 번 더 만지더니, 이내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밤이 아름답군요. 오늘 노을이 유난히 밝던데, 그래서일까요. 저의 황혼도 이처럼 아름다운 밤으로 질 수 있을까요."

수현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생명과 죽음의 계절의 주관자로 가장 죽음을 잘 알고 있으나, 동시에 그 자신은 불멸에 가까운 몸이기에 죽음을 가장 모르는 이였다. 그렇기에 그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담히 자신의 지난날을 추억하는 이 황혼기의 노인의 드높은 생각을 다 이해할 수 없었다. 단지 그의 표정이 잔잔하고 평안해 보이는 것이, 왠지 모르게 그의 코끝을 아려왔을 뿐이다. 차가운 밤공기 때문일 거라며 자신을 속이곤, 수현은 공룡에게 이만 들어갈 것을 권했다. 공룡은 미소 지으며 잠뜰의 신발을 현관에 두고는 저의 방으로 들어갔다. 이제 이 밤이 끝나면 자신의 손녀와는 완전히 이별하게 될 것이다.


다음날, 공룡은 조용히 눈을 떴다. 창으로 들려오는 겨울새의 지저귐이 아침이 밝았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공룡은 문득 집안이 너무 조용하다고 생각했다. 왜 그런가 생각하던 것도 잠시, 공룡은 제 눈앞에 놓인 약초로 가득한 상자를 발견하곤, 어젯밤 봄의 신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 기억에 씁쓸하게 웃던 공룡은, 문득 상자에 쪽지가 끼워져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접힌 종이를 펼쳐보니 손녀의 글씨체로 적힌 글이 보였다.

'할아버지, 저는 이 긴 겨울을 끝내기 위해 잠시 여행을 떠나요. 무사히 잘 다녀오겠습니다.'

쪽지를 읽은 공룡은 한동안 조용히 그 쪽지를 바라보았다. 몇 번이고 다시 읽더니, 그는 갑자기 손녀의 이름을 부르며 방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렇게 널 보낼 순 없었다. 이렇게 널 두고 내가 떠날 순 없었다. 떠나 보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었나 보다. 지금 가면 뒷모습이라도 볼 수 있을지 몰라. 그렇게 생각하며 공룡은 숨이 막히도록 달렸다.

"아...!"

마당으로 달려 나온 공룡은, 아무 발자국도 찍히지 않은 눈 덮인 마당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눈이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 내리는 눈이 발자국을 지운 걸 보아 그들은 이미 떠난 지 한참 되었을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공룡은, 잠시 숨을 고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늘이 태양의 새벽 노을로, 밝은 붉은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공룡은 그 아름다운 하늘을 바라보다, 이내 부드럽게 웃었다.

잠뜰아, 겨울로 저물어가는 마을은 황혼녘에 서 있는 이 할애비가 지키고 있을 테니

너는 새벽 노을이 되어, 떠오르는 봄을 가지고 와주려무나.

나지막이, 그렇게 동이 터오는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공룡은 제 손녀가 갔을 눈길을 조금 더 바라보더니, 이내 집 안으로 들어갔다. 잠뜰이 봄과 함께 돌아올 때까지, 이제 마을 사람들은 온전히 자신이 지켜야 했다. 자신의 황혼을 마지막으로 붉게 타올리겠다며, 늙은 촌장은 잔잔히 미소 지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고, 겨울이 무너졌다. 잠뜰은 자신이 쪽지에 쓴 대로 무사히 봄과 함께 돌아왔다. 하지만 잠뜰이 왔을 땐, 이미 공룡의 황혼이 끝나고 밤이 찾아온 후였다. 마을 사람들을 구하는 아름다운 붉은 노을로 타올라 어둠으로 져버렸다. 그의 황혼 끝에 찾아온 밤하늘은 고요하지만 아름다웠다. 평안하고, 그 무엇보다 아름다운 밤이 되어, 그는 봄과 함께 돌아온 제 손녀를 반겨주었다.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Non-CP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