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불멸자의 회고록

어느 불멸자의 회고록 - 1부 7화

이상 천문 현상

*잠뜰TV 스토리 콘텐츠들의 2차 창작물로, 공식과 무관합니다.

*흰 화면으로 보시는 것을 권장 드립니다.

*겨울 신화 × 이방인 크로스오버


1부 7화

이상 천문 현상


하나. 흔히 경험과 지혜는 비례한다고들 한다.

둘. 그렇다면, 왜? 어째서일까?

셋. 나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넷. 시간과 생각 또한 비례하기 때문이라고.

"선인, 며칠 전에 북서쪽 하늘에서 붉은 혜성이 관측되었다고 합니다."

붉은 혜성?

"천문관의 말에 따르면, 그것이 역모의 징조라더군요."

"그렇군요."

종종 신기할 때가 있다.

팔성국 이전의 인류에서 천문학은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한 학문이 아니었다. 봉건제와 농업이 주를 이루던 시기에나 그 가치를 높게 샀지, 진즉에 타 학문에 밀려난 별의 흐름은 놀라우리만치 날카로운 정보를 내놓을 때가 있었다. 그간-인간이 되기 전과 후를 막론하고-의 경험으로 보아, 이번도 꽤 정확한 예언을 내놓은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가끔은 신으로서의 경력이 도움이 된다. 몇 만 년간 쌓여온 통계라고 해야겠지만.

통계라 함은, 사례가 많을수록 더욱 정확해진다. 주사위도 여섯 번을 굴리면 어느 한 숫자만 많이 나오고, 어느 숫자는 아예 나오지도 않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그 주사위를 수천 번, 수만 번을 넘어 더 많이 굴릴수록 숫자들이 나오는 수의 비율은 점점 균형을 갖춰간다. 그렇게 통계는 적확해진다. 그렇다면 몇 만 년간 사례를 쌓아온 통계는 어떨까?

그래. 내 감은 제법 쓸만하다. 그 말을 하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 그 감이 내게 소리 없는 아우성을 부리며 경계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무슨 일이 곧 벌어질 것이라고. 불안해서 죽을 맛이었다.

근 몇 달간, 팔성국은 고요했다. 천문관 하나가 유배를 갔고, 천건성군은 원래 서야 할 자가 아닌 외부인이 그 자리를 차지하였으며, 지곤성의 주인이 불길함을 느꼈음에도. 팔성국은 고요했다. 끔찍할 정도로.

"…폭풍 전야인가."

붉은 혜성이 금방 움직이리라 생각했건만, 생각보다 조용했다. 찾아오지도 않았고, 대외적인 움직임을 보이지도 않았다. 나한테까지 찾아온 것을 보면 분명 뜻을 함께할 누군가를 찾고 있는 것 같은데, 굳이 바깥에서 나서지 않는 이유가-

아, 그런 것인가.

팔성국이 평화로운 것이 아니라 내 처소 주변에 비바람이 닿지 않은 것인가.

천건성군은 비성편에 무언가를 하고 싶어 한다. 그 행동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 길은 없지만 다른 국가와의 커다란 전쟁 한 번 치른 적 없던 팔성국을 크게 뒤집어엎을 법한 일이리라. 게다가 바다 너머의 진실을 아는 자라면 비성편의 민낯 또한 알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전 인류를 상대로 자행되었던 인질극의 흔적.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하고 끔찍한 무기.

그 붉은 혜성은 너무도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xXx

신관이 외출한 사이 바깥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찻잔을 떨구는 듯한 소리에 온 신경이 밖으로 쏠렸다. 어려운 명을 받고 한숨을 푹푹 내쉬는 늙은 신하, 왕에게 상소를 올리려는 젊은 신하, 새로운 발견을 보고하려는 도사와 천문관, 궁의 마당을 쓸고 닦는 종, 심부름 나온 궁녀. 궁궐의 중심에 위치한 선인의 초소 부근에는 유동 인구가 많았다. 그러니 큰 소리가 나는 것은 그다지 특별한 상황은 아니다.

다만 계속되는 침묵이 거슬릴 뿐.

보통 소음이 난 찰나에만 잠시 조용하다가 다시 활발해지는 것이 보통의 궐이건만, 오늘은 유독 긴장된 공기가 흐르고 있는 것 같았다. 이상할 정도로 계속된 고요함에 창을 슬쩍 돌아보았다. 바다 너머에서는 건물 안에서 밖을 내다보기가 편했는데, 유리가 아니라 창호지가 발라진 창문이라 밖이 보이지 않았다. 특히 선인의 방은 두텁게 발라놓은 것이 단점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방금 전까진 밝지 않았나?

아무리 시간 감각이 이상해졌다지만 그새 해가 질 리는 없는데. 잠시 구름에 가려졌다기엔 밝기의 변화 없이 계속 어둡기만 했다. 마치 태양을 새까만 먹을 칠한 종이로 감싸버린 것처럼.

이상하다. 무언가 잘못된 것이 분명하다.

이곳에 정착하고 나서 한 번도 열리지 않은 창을 밀어젖혔다. 늘 관리가 잘 되는 덕인지 별 문제 없이 열렸다. 순백의 부채를 힘 있게 펼쳐 얼굴을 가렸다.

그렇게 수 세기 만에 내다본 바깥은 절정에 이른 일식처럼 어두웠다. 한동안 일식은 없을 예정인데도.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음을 감지했다. 부채로 얼굴을 가리는 것조차 잊은 채 창문 밖으로 상체를 뺐다. 노란 홍채가 놀라 세를 넓혔다. 그 순간, 모든 인간이 별을 보이지 않는 하늘을 올려다보았으리라.

"대체 무슨…!"

하늘에 새까만 물체가 떠 있었다. 그것은 여태껏 그런 광경을 맞이한 적 없던 이들에게 끔찍한 공포와 무력감을 안겨주었다. 꼭, 바다를 건너오기 이전의 세상이 만들어낸 물건처럼 차갑고 딱딱하게 생긴 것. …어딘가 익숙하지 않은가?

"이-, 이상 천문 현상이 발생했습니다!"

"네, 저도 보입니다, 신관."

어린 신관이 동요하는 것이 느껴지자 최대한 태평하게 대답했다. 잘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신관은 다급하게 멈추어 숨을 골랐다. 말을 이어가는 신관의 얼굴에서 당황과 옅은 희망이 느껴졌다.

"혹시, 선인께서는 저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아뇨. 저도 처음 봅니다."

"그렇다면…,"

확신을 얻기 위해 다시 한번 저것을 살펴봐야 한다는 생각에 돌아봤을 땐, 이미 너무도 늦은 뒤였다. 감쪽같이 사라진 거대한 물체는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등을 돌리자 창백한 낯빛의 신관이 날 바라보고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이 기이한 상황 속에서 등 뒤로 느껴지는 바람이 참으로 부드러웠다. 그것이 세상을 뒤흔들 필연이 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너무도 오랜만에 맞이하는 세상의 바람이라.

"다만-,"

젊은 도사가 입을 떡 벌린 채 아무것도 남지 않은 하늘을 보고 있었다. 뚫어져라 간절히 바라보다 보면 누군가 나타나 온화하고 차분한 말투로 친절하게 설명해 줄 것이라는 듯이. 유감스럽게도 이상 현상의 정체를 아는 이는 없었고, 흐릿하게나마 짐작할 줄 아는 자는 그 도사가 마주하기엔 한참이나 높은 지위에 올라 있었다.

기나긴 화평의 시기는 끝났다.

이제 혼돈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저것이 등장함으로써 비성편이 위협받겠군요."

훗날 신관은 말하리라.

그토록 밝은 빛을 받으며 서 있는 선인의 모습은 오로지 그 순간뿐이었노라고.

성주에게 전하십시오. 비상 상황이 찾아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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