뜰팁_단편

[뜰팁_초세여] 면접

10년 후의 이야기

* 본 글은 잠뜰TV '초능력 세계여행' 2차 창작 팬소설로, 모든 이야기는 허구입니다. 

* 글 속 대화의 경우 필요에 따라 입말을 사용하였습니다. 때문에 어법에 어긋난 말이나 표현이 다수 나옵니다.

“오랜만입니다. 잠뜰 학생.”

“아, 네. 오랜만이네요. 한 10년만인가.”

 

올해 초인가, 덕개 선배에게 IPS 직원이 찾아올 거란 이야길 전해 들었다. 자신들과 연관되어 있어서 그런 것 같고, 중요한 시기에 번거롭게 만들어서 미안하단 말과 함께. 별 대수롭지 않게, 우리 사이에 뭐가 미안하냐며 넘겼다. 엄연한 국제기구이니 할 일은 해야지. 그 사람들도 뭐가 좋다고 나까지 찾아오겠어, 하면서.

 

“분명 직원분이 찾아오실 거랬는데요, 덕개 선배가.”

“국장도 직원입니다.”

 

그런데 국장이다. 이 사람이 오는 줄 알았으면 우리 사이고 뭐고 선배 선에서 해결해달라 우겨보기라도 했을 텐데. 나중에 덕개 선배 보면 들들 볶아야지. 님 때문에 저는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아 이 중요한 대학 4학년 취준 시즌 직전에 막대한 악영향을 끼쳤습니다. 어떻게 보상해주시겠습니까? 공룡 및 덕개 능력 1회 이용권을 주십시오. 이번 황금연휴에 다 함께 여행을 가주셔야겠습니다.

 

“여전히 저를 어려워하시는군요.”

“역시 티 나는가 봐요.”

“아무래도요. 지인 직장 상사인데.”

 

국제초능력감시기구 국장, 김각별. 프라하에서의 눈물겨운 재회 이후 꾸준히 만나온 사람들과는 달리,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심지어 썩 좋지 않은 일로 만난 기억뿐이고, 특유의 위압감까지. 이 자리가 유난히 불편하다. 그래도, 다른 사람들한테 이야길 전해 들으며 내적 친밀감은 생긴 것 같았는데. 착각이었나보다.

 

“그래서, 용건이 뭐예요?”

“간단한 질문을 드릴 겁니다. 경우에 따라 오래 걸릴 수도 있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이미 일정 비웠는데 뭘…….”

“배려 감사합니다. 질문은 세 가지이며, 편하게 잠뜰 학생의 생각을 전해주시면 됩니다.”

“네엡.”

 

어디 한번 질문해보시지, 하는 투로 국장님을 바라본다. 생각도 읽는다고 들었는데, 왜 말로 시키는 거람. 부담스럽게.

 

“첫 번째 질문입니다. 초능력자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음, 잘 모르겠어요.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선배들이랑 라더가 근처에 있어서 그런가, 뭐라 콕 집어 말하기 어려워요. 특별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 이죠? 가끔은 부러운. 음……. 그 정도요.”

 

반은 거짓이고, 반은 진실이다. 초능력자 공룡, 초능력자 덕개, 초능력자 라더에 대해서는 수없이 많이 생각해봤지만, 통상의 ‘초능력자’에 대해 고민해본 건 손에 꼽는다. 그들을 별개의 개체인 마냥 묶어서 부르는 게 불편하다. 내게 그들의 초능력은 또니의 글솜씨나 티티의 춤 실력처럼, 내게 없는 재능. 딱 이 정도니까.

 

“두 번째 질문입니다. 당신의 학창 시절은 어땠습니까? 고등학교 때를 위주로.”

 

예상치도 못한 질문에 눈알을 데굴, 굴렸다. 초능력을 가진 사람을, 그때 처음 만나서 물어보는 건가. 학창시절, 학창시절이라. 나의 학창시절은 어땠더라. 친구들이랑 야자 째다가 걸려서 혼난 적도 있고. 선생님 몰래 커피 시켜 먹다가 걸린 적도 있고. 아, 수학여행도 재밌었는데. 그리고, 그리고……. 오랜 추억 속에서 공통된 한 가지를 찾아 내본다.

 

“같은 중학교에서 같이 올라온 친구가 둘 있었어요. 또니랑 티티.”

 

오래 고르고, 다듬은 말을 꺼낸다.

 

“놀 때는 잘 놀고. 성격도 맞고. 좋아하는 관심사도 비슷하고. 좋은 친구들이었어요. 둘 다 자신의 길이 뚜렷했어요. 커서 뭘 할지, 어떤 과를 진학할지. 근데 저는 아녔어요. 취미도, 관심 가는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었거든요. 걔들이 부럽더라고요.”

 

내 인생 최대의 방황기. 아빠가 원하던, 그때의 내가 목표로 하던 이름난 사립고 입시에 떨어지고 집 근처 인문계 학교를 들어갔을 때였다.

 

“그때의 저는, 남겨진 선택지를 묵묵히 따라가는 그냥 그런 사람이었어요”

“그것도 하나의 길이라 할 수도 있을 텐데요.”

“아뇨. 저는 박잠뜰이라는 사람이 진짜 바라는 게 뭔지 알고 싶었어요.”

 

그래서 아주 오랜 시간 자신과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다. 목표는 단 하나, 내가 원하는 나의 미래 찾기. 3년간의 고민과, 3년간의 여행. 6년이란 시간의 끝자락에, 나의 꿈을 찾았다.

 

“물론,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한 건 아녜요. 잠시 숨을 돌리고, 여행을 다녀 보고. 그러니 알겠더라고요. 남이 정해준 길을 따라 살아가지 않아도 되겠구나. 세상은 넓고, 그곳에 길 하나 내는 건 아무것도 아니겠구나.”

“숨을 돌린 곳이.”

“네, 세계여행 동아리. ‘여로(餘路)’에서 ‘여로(麗路)’로. 나의 삶을, 내가 원하는 것을 찾아 떠나는, 찬란히 빛나는 여행길로 바꿀 수 있게 만들어준 소중한 경험, 소중한 사람들이 있는 곳.”

 

늘 품어왔던 단어들이지만,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낸 적 없는 낯간지런 말들이다. 이걸 걔들한테 어떻게 말해. 국장님이 고요히, 날 바라본다. 충분한 답이 되었을까.

 

“알겠습니다. 그럼, 마지막 질문입니다.”

 

꼭 취업면접 같잖아. 괜히 긴장되는 마음에 컵을 톡톡, 두드린다.

 

“저희 IPS에 입사할 의향이 있으십니까?”

 

 

***

 

 

“예?”

“대우는 확실히 해드리겠습니다. 만약 다른 곳에서 스카웃 제의가 온다면 연봉은 배로…….”

“기, 기다려보세요. 질문 좀 해도 될까요?”

“네. 물론.”

 

정신이 아찔해진 것도, 저렇게 반응하는 것도 이해를 못 할 건 아니다. 국제기구. 그러니까, 따지고 보면, 유엔 산하 전문기구 총재님 급 인물이 하는 폭탄급 제안이지, 그저 평범한(?) 국내 최고 명문 대학에 진학한 게 다지. 게다가, 은연중에 남들보다 늦었다는 부담감을 안고 살아가고 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저를 왜요?”

“훌륭한 인재이시니까요.”

“구체적으로.”

“좋은 대학 들어가셨잖아요.”

“거기 박사들만 한 바가지잖아요. 저 고졸이에요.”

“아닙니다. 그리고 곧 대졸이시죠.”

“고작 국내 대학 학산데?”

“어휴, 충분하다 충분해. 애초에, 저희 학벌 가리고 그런 곳 아닙니다.”

“학고 뜰 정도의 학점을 받았을 수도 있잖아요. 허수라거나?”

“그러신가요?”

“아니 그러겠어요? 당연히 A밖에 없지.”

“그것 봐요. 우리의 준비된 인재. 잠뜰 학생.”

 

사회 초년생 괴롭히는 게 즐거운 건지 뭔지. 괜히 입꼬리가 올라가는 기분이다. 꿋꿋하게 정자세로 앉아 있던 자세가 조금씩 느슨해졌다.

 

“다시 다시. 저 무슨 과 진학했는지 아세요?”

“물론이죠. 심리학과시잖아요. 그것도 과탑이시던데.”

“아니 미친 그걸 아저씨, 아니, 국장님이 어떻게 알아요?”

“다 아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거기 들어가면 뭐하는데요?”

“전공을 살려서 일하시겠죠?”

 

잠뜰은 이 상황이 답답하다. 이유라도 알려주면 어디가 덧나나. 뭐가 재밌다고 다리까지 꼰 채로 날 보는 거야? 이렇게 막무가내인 사람이었다고? 진짜?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머리가 아파져 오는 것만 같다.

 

“이제 긴장이 완전히 풀리셨나 보네요.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네?”

“경계하는 상대가 하는 말에선 무게가 느껴질 수밖에 없잖아요. 그걸 풀고 싶었을 뿐이었습니다. 편하게 거절하고, 편하게 수락하시라고.”

 

꼰 다리를 풀고, 테이블 쪽으로 몸을 기울인다. 아차, 이건 내 습관인데.

 

“앞서 드린 제안은 진심입니다. 물론, 몇 가지 이유가 더 있습니다. 첫째, 초능력자의 존재를 알고, 그들에게 호의적이며, 과한 동정이나 동경을 가지지 않았으나, 초능력자가 아닌 일반인이시죠. 그리고…….”

“그리고?”

“잠뜰 학생. 당신에겐 재능이 있습니다. 저에게도, 누구에게도 없는 재능이요.”

 

초능력을 가진 사람조차 하지 못하는 것. 그런 게 있을 리가 있나. 잠뜰의 얼굴에서 의문이 피어난다.

 

“사람의 마음을 만지는 것이죠. 초능력의 인위적인 조작이 아니라, 사람 대 사람의 만남과 교류를 통해서.”

 

나는 강인한 사람이다. 칠흑 같은 과거를 나침반 삼아 나아갈 수 있는, 강한 사람.

하지만, 그만큼 담소한 사람이다. 혹시, 내가 자라는 새싹을 밟고 있는 게 아닐까. 내가 치운 돌에 누군가 맞는 게 아닐까. 내가 던진 말에 누군가 상처받지 않았을까. 내가 건넨 응원이 부담으로 들린 건 아닐까.

혹시, 만약에. 내가 그 연구원들과 같은 길을 걸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같은 방식으로, 사람을 대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이기에, 다른 이들에게 섣불리 다가가지 못했다.

 

“당신은, 상대가 큰 상처를 받지 않는 방법으로 접근합니다. 질문을 두려워하는 자에게는 침묵으로. 격려가 필요한 자에겐 응원으로. 그 과정에서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껍질을 건드려, 자극하죠. 무작정 남의 비밀이나 아픔을 건들진 않지만 묻어두지도 않는 거예요. 적절한 선을 넘나드는 외줄 타기. 그것이 당신의 재능입니다. 자각하지 못하셔도 이상할 건 없습니다. 이런 부류의 재능은 보통 그렇거든요.”

 

하지만, 나와 잠뜰은 달랐다. 먼저 사람에게 다가가는 걸 피하지 않았으며, 그 사람에 대해 알기 원했다. 그들의 아픔을 함께 짊어지고자 했고, 자신의 기쁨을 나누는 걸 행복이라 여겼다. 무엇보다, 관계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갈등은 극복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이게 마지막 이유입니다. 잠뜰 학생.”

 

다시 적막이 흐른다. 각별이 허투루 저런 말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잠뜰 나름대로의 고민을 시작했기 때문이랴.

얼마나 지났을까, 한참 고민에 빠져 있던 잠뜰이 입을 열었다.

 

“저는, 과거의 저처럼 부모님과 갈등 때문에 힘들어하는 아이들이나, 꿈을 찾지 못해 방황하는 아이들을 돕고 싶어요. 또, 가정 가정마다 있는 문제를 풀어주고 싶어요. 제가 겪어온 작은 경험을 나누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럼 더 좋은 선택을 할 수 있을 거고, 더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 그래서 이 과를 선택한 거예요.”

 

잠시 뜸을 들인다.

 

“하지만.”

“……하지만?”

“또 모르죠. 1년이라는 시간 동안 제 생각이 어떻게 바뀔지. 제가 원한다고 뭐 어디, 학교나 센터에 바로 배치될 거란 보장도 없고요. 어차피 1급이랑 2급 따려면 경력을 쌓든 대학원을 진학하든 해야 하잖아요? 이력서 맨 윗줄을 IPS로 채우는 거. 나쁘지 않을 것 같기도 하네요.”

 

음, 오히려 좋아. 잘 생각해볼게요. 하고 가볍게 덧붙이는 말에, 잠시 긴장했던 내가 우습게 느껴졌다. 고작 한 명이 뭐라고.

 

“뭐야. 왜 그렇게 멍하니 계세요?”

“아뇨……. 그냥. 긍정적으로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명함 두 개를 잠뜰에게 건넨다. 김각별, 박덕개. 두 명의 것이다.

 

“제 명함과, 덕개 팀장의 명함입니다. 둘 중 편한 곳으로 연락 주시죠.”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주변 풍경이 바뀐다. 차가운 공기, 밝은 햇살. 익숙한 거리 풍경. 잠뜰의 자취방 앞이다.

 

“아,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매서운 바람에 허겁지겁 패딩 모자를 뒤집어 쓰던 잠뜰이 각별을 본다.

 

“그런 동아리를 없앤 절 원망하십니까?”

“예전엔 그랬지만, 지금은 아녜요. 그러지 않았더라면 분명, 더 큰 일이 벌어졌을 테니까요.”

 

지금은 안다. 국장님은 누구보다 우리를 생각했던 사람이다. 초능력을 가진 세 명과 수현쌤은 물론이요, 그저 같이 있다는 이유로 위험에 처할 수 있는 잠뜰까지 걱정한 것이다. 그런 사람을 어떻게 원망하겠는가. 이제, 각별을 처음 보았던 어리고 미숙한 고등학생들은 없다. 그로부터 10년이란 시간이 흘렀고, 우리는 어른이 되었으니까.

 

“그렇다면, 당신을 두고 떠난 친구들을 원망하십니까?”

“그럴 리가요. 단 한 번도 그런 적 없어요.”

“단 한 번도…….”

“국장님?”

“……알겠습니다. 오늘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일정이 있어,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

 

 

그날 늦은 오후. 우리는 서면 보고를 위해 국장실을 찾았다.

 

“잘 다녀오셨습니까? 답변은?”

“고민해보겠답니다.”

“그런가요. 알겠습니다, 덕개 팀장.”

“그래도 올 것 같은데? 뭣하면 저희가 라더 데리고 졸라보죠!”

“그럴 필요까진 없습니다, 공룡 씨. 온전히 스스로 고민하고, 결정하게 두세요.”

“에휴, 우리 국장님. 인재 영입에 이렇게 소극적이셔서 어떡하나 몰라.”

 

말하는 내내 서류에 코를 박고 계시던 국장님이 우리를 향해 고갤 돌렸다. 무슨 일이지. 까불거리던 공룡도 급작스레 입을 닫는다.

 

“저는 잠뜰 학생이라고 안 합니다. 박잠뜰 씨라 부르지. 몇 년이나 지났는데.”

“…….”

“헙…….”

“다 보고 있었습니다. 이런 일이라면 귀찮아서 질색하는 공룡 씨가 선뜻 나서겠다니, 영 이상해서 말이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살펴봤더니.”

“아니~ 그게~ 선배 된 마음으로~”

“그래서. 굳이 제가 직접 가겠다는 거 말리고, 제 흉내나 내시면서, 그렇게 싫어하는 방법으로 능력 사용까지 하셨는데. 만족하십니까?”

“시정하겠습니다.”

“질책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래야 할 이유가 있었을 거라 믿습니다. 덕개 팀장은 늘 조심스러우니까요. 전할 말은 다 전했고, 거짓이나 과장 또한 없었으니 괜찮습니다. 다만…….”

“네. 주의하겠습니다.”

“……. 괜찮습니다. 두 분 다 피곤하실 테니, 돌아가서 쉬십시오”

 

재빨리 국장실을 뛰쳐나왔다. 아직도 심장이 쿵쿵, 거세게 울린다. 범죄 현장을 들킨 것만 같은, 아니, 범죄 현장을 들킨 것이지. 이래서 공룡이만, 한 명만 조용히 데리고 나온 건데. 잠뜰이를 향한 무형의 죄책감이 스멀스멀 기어오른다.

 

“야, 그래도. 잠뜰이 걔도 좋았다는 뜻이지?”

“응. 그건 그렇지.”

“짜아식. 우리 앞에선 그렇게까지 말 안 하더니. 역시 국장님 페이스가 치트키라니까? 사람이 진지해져. 아, 맞다. 우리 잠뜰이 졸논 응원 선물 주기로 한 거 있잖아…….”

 

재잘거리는 공룡의 수다 소리를 들으며, 집으로 걸어간다. 저 입은 지치지도 않는 걸까. 뭐, 그래도 저게 공룡이의 장점이다. 재밌는 이야기든 실없는 소리든, 공룡이의 이야길 들으면 잡생각이나 이런저런 걱정이 사라진다. 단순함에 동조된다고 해야 하나. 말재주가 좋은 것도 있고. 얘 여행 에세이가 잘 팔리는 것도 비슷한 이유이지 않을까 싶다. 점점 심장이 느려진다. 가팔랐던 숨이 가라앉는다.

 

“라더는 실용적인 거로 하자는데 그건 재미가…….”

 

속으로 크게, 숨을 뱉는다. 이제야 마음이 놓인다. 누구보다 복잡한, 무거운 고민을 안고 살아가던 너이기에 늘 신경이 쓰였지만, 직접 물어볼 용기가 나질 않았다.

너 우리가 밉진 않았어? 아무런 연락처도 남기지 못하고 떠나버렸는데? 세계여행 동아리가, 아픈 추억이 된 건 아니지? 너의 대피소이자, 숨 돌릴 틈. 자신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여유. 그 시절 잠뜰이에게 세계여행 동아리는 그런 곳이었는데. 우리가 그걸 빼앗은 거잖아.

널 속여서라도 내 마음이 편해야겠다는 의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더 큰 돌덩이를 안고 살아가고 있을까 봐. 그게 걱정되어서. 너는 너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 편이었으니까. 하지만, 너에게도 의미 있는, 소중한, 따스한 추억으로 남았구나.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야, 이번 연휴에 잠뜰이랑 여행이나 가자. 라더랑 수현쌤도, 다섯이서 다 같이.”

“엉? 갑자기? 덕개 니가 젤 바쁘잖아.”

“너네한테 그 정도 시간은 낼 수 있어. 동의한 거다? 숙소 예약 싹 돌린다?”

“당연하지! 야, 이번엔 공연 티켓팅도 해보자. 맛집은 나한테 맡기고!”

 

10년 전의 우리는, 갈피를 잡지 못해 방황했고 일상조차 견딜 여력이 없어 죽어갔다. 어쩔 수 없는 이별에 현실을 원망하기만 했다. 나 외에 다른 곳에 시선을 둘 여력이 없어서, 서로의 아픔을 보고도 모른 척하기도 했다.

그리고 10년 후, 우리는 각자의 여행길에 올랐다. 누군가는 더 넓은 세상을 전하게 되었고, 누군가는 그 세상을 희망으로 품었다. 누군가는 이미 자신의 길을 걸어가고 있으며, 누군가는 자신의 이륙을 준비한다. 모든 시작은, 그때의 소중한 시간으로부터.

 

네 말처럼, 우리들의 반짝이는 추억은, 현재의 우리를 이루는 밑거름이 되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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