뜰팁_단편

[뜰팁_미수반] 나의 작은 손님

나의 바른길, 너의 바른길

⚠️미스터리 수사반 EP.9 월성동의 등불 스포 주의⚠️

▶ 토요일 오전 11시 25분.

▶ 약속보다 조금 이른 시간. 5분도 전에 도착해 자릴 잡은 곳은, 길성동 한 피자 레스토랑 구석입니다. 수현은 오늘 이곳에서 아주 중요한 사람과의 약속이 있습니다. 

수현에겐 오랜만의 휴일 점심 약속이다. 최근 들어 잔업도, 긴급출동도 잦았던 탓에 주말만 되면 기절하기에 십상이던 탓이랴. 때마침 화창한 날씨에, 자연스레 미소가 지어진다.

“수현 형사님……. 맞으시죠?”

“앗, 네! 성화 경찰서 수현 경사입니다. 혹시 송재준 씨이신가요?”

“네, 제가 송재준입니다. 이것 참, 죄송하고 감사드려서 어떻게 해야 할지…….”

“에이, 아녜요. 되려 제가 더 감사하죠.”

“무슨 소리세요. 형사님이 아녔다면……. 저는 정말……. 제 여동생이…….”

잠깐의 정적이 흐른다. 재빨리 수현이 말을 돌린다.

“아, 참. 이전엔 그렇게 말씀드렸지만, 함께하셔도 괜찮아요.”

“어휴, 괜찮습니다. 제가 있음 되려 방해가 될 수도 있고. 무엇보다, 이미 볼일을 만들어놨지 뭡니까? 아하하.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네요. 그럼 나중에 길성 사거리 은행 앞에서 뵙겠습니다. 조심히 볼일 보세요.”

▶ 경찰인 나를 불편해하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나의 의도를 알고 빠져주는 느낌에 가깝습니다. 또, 나를 신뢰하고 있네요.

완전히 시야 밖으로 벗어나기 전, 송재준은 웃음과 함께 꾸벅 인사를 건네왔다. 그에 화답하듯, 수현도 고갤 숙여본다. 성품도 그렇고 성격도 그렇고. 좋은 사람이다. 멀어져가는 송재준의 뒷모습을 보고, 시선을 돌린다. 수현의 다음 일은, 제 앞의 손님을 맞이하는 것이다.

“오랜만이야.”

수현을 살며시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본다. 목소리도 한 톤 올려보았다.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이 손님을 탈탈 털어보기 위해서. 조심스레, 손님의 이름을 부른다.

“소희야. 아저씨 기억해?”

윤소희. 수현의 작은 손님. 어쩌면, 명광파 사건의 가장 큰 피해자일지도 모르는 아이다.

***

▶ 소희를 어디서 만났지? 다시 떠올려 봅시다.

<상기>

“근데 애도 유통책으로 써?”

“미친 거 아냐?”

 

순대는 쌈장이니 소금이니 하는 장난스러운 농담 사이로 진실 하나가 쏘아졌다. 잠뜰의 말이 끝나자 숨통이 트인다. 그제야 마주하기 싫은 잔혹한 현실을 받아들인다. 크지도 않은 동네. 애를 시켜 배달할 때부터 이상하다 싶었다. 애가 안쓰러워서라도 자기들이 직접 포장해갈 텐데. 세탁소 지하에서 양귀비를 재배할 정도니, 말 다 했지. 마을 전체가 중독된 거다. 그 중독이 마약이든, 자신의 이익이든.

우리 미스터리 수사반이 해결한 사건 중 가장 규모가 컸던 사건. 한 마을과 한 기업, 조직이 얽히고설킨 연쇄살인 및 마약 유통 사건. 그곳에서 마주친 한 아이. 부모에 의해, 자신도 모르게 마약을 옮기고 있던 작은 아이.

마약 유통에 소희까지 이용했다는 걸 깨달은 우리는 분노를 감출 수 없었다. 감추지도 않았고. 소희의 부모를 비롯한 월성동 주민들. 그리고 명광파. 누구 하나 용서하지 않을 것이고, 누구 하나 놓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래서 지금, 나는 이 자리에 있다. 반드시 해야 할 업무는 아니다. 그저 사소한 것 하나라도 놓치기 싫은 나의 고집이다.

“야채 없는 것도 괜찮아요? 피망 매워서 싫은뎅. 아조씨가 싫음 말구.”

“아냐, 소희 원하는 거로 시켜. 아저씨는 전부 좋아해.”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있자, 직원이 메뉴판을 건네주었다. 다행히 날 기억하나 보다. 하기야, 얼마 지나지도 않았으니. 곧이어 소희가 고른 페퍼로니 피자에 음료수 두 개를 더해 주문했다. 잠깐, 송재준 씨가 탄산을 먹이나?

“난 콜라보다 사이다.”

“삼촌이 탄산 먹는 거 괜찮대?”

“어차피 우리 재준 씨는 내가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몰라. 여기 없잖어.”

“그, 그래…… 그럼 사이다 하나, 콜라 하나로 부탁드려요.”

소희를 이곳까지 데려다준 사람은 송재준. 월성동 분식집 주인, 송아정 씨의 오빠이자 소희의 외삼촌 되는 사람. 소희의 양가 부모님 모두가 마약을 유통한 탓에, 소희를 돌보아주고 있다. 짧은 조사와 관찰 결과에 따르면, 소희를 친딸처럼 아낀다고 한다. 원래 조카를 귀여워했지만 제 여동생과 매제를 향한 분노가 더해졌으리라. 더 좋은 환경에서, 더 좋은 방식으로 키우려 한다는 이야기도 했다나.

“아조씨, 삼촌하구 숙모하구 언니하구 나하구. 잘 지내나 물어보려고 나 불렀죠?”

“음~ 이걸 어쩌나. 벌써 들켜버렸네.”

“아조씨도 참 고생이네. 경찰이 그런 일도 해요? 선생님한테도 충분히 이야기했는데. 삼촌이랑 숙모는 잘 챙겨줘요. 언니도 나 엄청 아껴주고. 여기도 저번에, 내 생일에 왔었어요. 그러고 나서 집 가서 케이크에 촛불도 불고…….”

날 안심시키려는 것처럼 재잘재잘 떠든다. 그 사이로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들뜸이 느껴진다. 잘 지낸다는 것은 티끌 하나 없는 진심이다. 가족끼리 있었던 일, 학교에서 있었던 재밌는 일. 친구들과 놀았던 이야기, 삼촌네랑 처음 여행을 갔던 이야기. 이런저런 이야길 듣다 보니 벌써 음식이 나왔다. 눈에 띄게 밝아졌다. 많이 변했구나, 소희야.

“자, 접시에 덜어줄게. 뜨거우니 조심하고?”

“넹~. 잘 먹겠습니다!”

▶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그렇지 않나요?

<상기>

“물론 용돈도 받아요! 그거로 장난감도 사고 다 하거든요. 부럽죠?”

“부러운가……. 힘들 텐데 엄마한테 이야기해본 적은 없어?”

“네에. 그래도 다녀오면 엄마가 잘했다고 눈깔사탕 사줘요. 배달 다녀오면 엄마가 소희 예뻐해 주니까 좋아요.”

 

- 전제 조건을 만족해야만 얻는 사랑

- 분명 작은 동네인데 어린아이를 배달시키는 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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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성동 골목. 내 눈앞에 있던 것은 부모의 요구를 충족시켜야 부모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걸 깨달은, 가면을 쓴 아이였다. 소희는 어른의, 익살의 가면을 쓰고 있었다. 자신이 세상의 이치와 부조리를 빨리 깨달은 척. 티브이에 나오는 어른들에게 일침을 날리는 아이를 연기하고 있다. 그게 자신이 상처받지 않는 유일한 회피로니까. 그런 아이들에겐 잘못이 없다. 가면을 쓰며, 어른을 흉내 내는 것이 삶을 살아가는 방법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을 테니.

하지만.

<상기>

“어머님. 철저히 어머님 중심이잖아요. 정말 소희가 좋아해서 하는 게 맞나요?”

소희에게 말을 걸기 조심스러웠다. 아니, 무서웠다. 가면을 들춰보는 것이 소희에게 상처로 돌아갈 테니까. 보이기 싫은 현실을, 텅 빈 민얼굴로 마주하는 것이 저 아이에겐 고통스러울 테니까. 그래서 총구를 송아정 씨에게 돌렸다. 가면의 끈을 맞추는 것보단, 이게 안전해. 게다가 이미 써봤던 총이잖아.

“소희야. 사실 아저씨가 소희를 보고 싶어 한 이유가 하나 더 있어.”

“엥? 뭔데요?”

“소희야, 소희는…….”

목소리가 잘게 떨린다. 송골송골, 손에 땀이 맺히기 시작한다. 명백한 긴장의 신호다. 흡. 작게 숨을 들이킨다.

“소희는, 소희가 왜 삼촌 집에 있는지 알고 있는 거지?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

“……. 미안해, 소희야. 그냥.”

“응, 알아요. 엄마 아빠가 나쁜 일 했잖아요. 맛소금이 아니라 마약이었어요. 나쁜 거.”

잊어줘. 미안해. 괜한 걸 물었네. 미처 흘러나오지 못한 말들. 정작 소희는 별일 아니라는 듯 사이다를 홀짝인다. 여전히 소희는 어른스러워지려 노력한다.

‘소희는 짧은 시간 동안 누구에게도, 부모님이 어디 갔는지, 언제 돌아오는지 물어보지 않았어요. 아마, 이미 알고 있는게 아닌가 싶어요.’

소희 상담사님의 말이 맴돈다. 이게 옳은 일일까? 끊임없는 의문이 날 덮친다. 주먹을 꾹 쥔다. 진정하자. 괜찮아. 상담사님도 괜찮다 하셨어. 이건, 내가 해야 하는 일이야.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야. 다 알잖아. 왜냐하면.

다시 소희를 살핀다. 우리 똑똑한 소희. 소희는 분위기를 읽을 줄 알고, 다른 이들의 의중을 살피는 데 능하다. 무얼 아는 채 해야 하는지, 무얼 모르는 채 해야 하는지 안다. 소희는,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뭘 원하는지 쉽게 알고, 그 일을 군말 없이, 조용히 하는 아이다. 어디서나 귀염받는 착한 아이. 아, 이건, 정말이지.

‘어릴 적의 나와 같구나.’

▶ 경찰로선 알아가야 하겠지만 나로선 알고 싶지 않았습니다.

- 전제 조건을 만족해야만 얻는 사랑

- 분명 작은 동네인데 어린아이를 배달시키는 심리

- 경찰로선 알아가야 하겠지만 나로선 알고 싶지 않음

내가 정말 두려웠던 건, 나의 과거를 들추는 것.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오르게 하는 그 작은 아이. 나의 거울 같은 아이와 대면하며, 그 아이를 제대로 바라보는 게 두려웠다.

내 상처는 아물었다. 시간은 상처를 낫게 하니까. ‘이젠 괜찮아.’, ‘진짜 중요한 건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현재니까.’ 이렇게 말하며, 그렇게 살아오니 괜찮아졌다. 하지만, 내겐 후유증이 있는 것이다. 지울 수 없는 흉터가 있는 것이지. 나와 같은 아이들, 나와 같은 가정. 그런 것들만 보면 순간 숨이 막힌다. 아, 저 익숙한 가면. 나와 색은 다르지만, 모양이 같구나. 아, 저 익숙한 주장. 내용은 다르지만, 그 의중은 같구나. 머리칼부터 내 숨통까지. 모든 걸 죄려 하는구나!

“소희야, 부모님이 미워?”

“으응, 모르겠어요. 나쁜 일을 한 건 미운데.”

“응, 미운데?”

“…….”

“천천히 말해. 힘들면 말 안 해도 괜찮아.”

“아냐. 말할래. 대신 다른 사람들한텐 비밀이에요? 선생님이나, 학교 선생님이나. 아, 삼촌한테도. 꼭. 아저씨 경찰 아저씨니까 말해주는 거예요.”

“물론이지.”

“그냥……. 엄마랑, 아빠랑 있었을 때보다 지금이 더 즐거워요. 놀러 안 다니고, 맛있는 거 안 먹어도. 학교 마치고 친구들이랑 놀고. 나 정말 나쁘다. 그죠. 일 도와주는 건 당연했던 건데.”

눈에 띄게 소희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그랬구나. 살며시 입꼬리를 올린다. 소희를 안심시키기 위해. 또, 쿵쿵 뛰는 내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수없이 떠오르는 단어들을 거르고 걸러, 겨우 한 문장을 던진다. 실수하면 안 돼.

“아냐. 왜 그게 소희가 나쁜 거야.”

“…….”

“소희가 원하는 걸, 할 수 있게 돼서 기쁜 건 당연한 거야.”

“정말요?”

소희의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

“당연하지. 소희야. 너는 네가 원하는 걸 해가며 살아가야 해. 그게 옳아. 그게 맞는 거야. 네가 재밌는 거, 네가 즐거운 거. 그런 걸 해야지. 물론, 가끔은 싫은 일도 해야 할 거야. 공부 같은 거. 하지만 소희야, 소희는 이제 뭐가 잘못됐던 건지 알고 있잖아.”

고갤 작게 주억거린다. 얇은 머리칼 사이로 툭툭 떨어지는 눈물이 보인다. 나의 작은 손님. 소희는, 착한 아이가 되길 원한다. 어른들을 곤란하게 하는 질문은 하지 않고, 진실을 함구했다. 내가 원하는 길을 가기보다는, 다른 사람이 원하는 길을 가곤 했다.

소희라면 알 것이다. 제 부모님이 저지른 범죄를. 비단 마약뿐만 아니라, 제 자녀의 삶을 마음대로 조종하려 했다는 걸. 이 또한 부모로서 중죄라는 걸. 하지만, 소희는 부모님을 미워하지 못한다. 부모를 미워하는 아이는 나쁜 사람이니까. 어떻게 사람이 완벽하겠어, 다 참고 이해하고 지나가는 거지. 한숨을 푹 쉬고 넘어가려 할 것이다.

“예의 바른 아이. 착한 아이. 물론 중요하지. 하지만 소희야. 스스로에게 한번 이렇게 질문해봐. ‘소희야, 너는 정말 행복하니?’”

나는, 소희가 그런 삶을 살아가지 않길 원했다. 나와 같은 길을 향하지 않길 원했다. 진정한 배려와 양보가 무엇인지. 좋은 인내와 나쁜 인내가 무엇인지 알았으면 했다. 어리광도 피우고, 가끔은 사고도 치며, 꿈을 찾지 못해 힘들어도 보고, 씨름 끝에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향해 달려가며, 해냄의 성취감을 느끼길 원했다.

“소희야. 너는 지금, 바른길을 찾아가고 있는 거야.”

***

오후 2시. 길성 사거리 은행 앞. 수현 아저씨와 헤어지고, 삼촌과 만나기로 한 곳.

마음이 가벼워졌다. 울어서 그런가. 아저씨는 신기하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고민을 하는지 다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내가 말할 수 있도록 잘 이끌었다. 독심술이라도 할 줄 아나?

“아조씨도 매정해. 맛있는 거 먹는 애나 울리고.”

“하하…….”

어딘가 어색하고 미안할 때 일부러 흘리는 웃음소리다. 나도, 이 상황이 어색하고 고마워서 흘린 농담이다.

행복한 일. 내가 하고 싶은 일. 어렵기만 하다. 아직은 노는 게 좋아. 아니지, 계속 노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언젠가 공부는 해야겠고. 아저씨는, 하고 싶은 일이 생기니 공부가 재밌어졌댔지. 그 하고 싶은 일이 경찰이었나?

“아저씨, 아저씨.”

“응, 소희야.”

“나는 경찰 안 할래.”

“어, 어……? 어, 그렇구나…….”

“대신, 아저씨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 사람 이야기 들어주고. 같이 이야기해주는 거.”

“상담사 말이야?”

“응. 범인을 잡는 건 아저씨들이랑 언니들이. 남겨진 사람들은 내가. 어때? 괜찮지.”

“멋지다. 소희라면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다시 행복해지는 걸 보고 싶어. 어른이 되면, 그게 내 행복이 될 거야. 그게 바른길이라 생각해. 뭐, 지금은 공부보단 노는 게 행복하니 나중에.”

그게 내 행복이 될 거야. 윤소희, 많이 컸다. 저런 멋진 말도 하고. 이건 스스로 감탄해도 될법한 명대사다. 어디 드라마에 나올법한데. 크으.

“그럼 수현 아저씨. 수현 아저씨는 여전히 경찰이 재밌어? 행복해?”

“나? 아저씨는…….”

***

▶ 에필로그 _ 찰나, 우물 밖 토끼

나는 나 자신을 가두었다. 아니지, 가둔 게 아니라 자릴 잡은 것이다.

적당히 햇빛도 들어오고, 바람도 불지 않고. 궂은비를 막아줄 천장도, 목을 축일 물도 있으니 괜찮았다. 너무나도 협소한 탓에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 하나 없어 답답했지만, 괜찮았다. 웃음으로, 사랑으로 날 반겨주는 우물 위 사람이 있으니 괜찮았다. 그게, 우물 벽을 타고 올라가는 것보다야 나았으니까. 그 벽은 너무나도 높아 보였고, 험난해 보였다. 이끼 낀 곳이 한둘이 아니라 힘을 조금만 준다면 미끄러질 것 같았다. 또, 내겐 갈고리 같은 단단한 발톱도, 긴 다리도 없었으니.

어느 순간, 내 마음에 의문 한 방울이 맺혔다. 우물 밖에 사는 친구의 한 마디 때문이었다.

“너 진짜 답답할 정도로 착하다. 이제 어른인데, 마음대로 좀 하면 어때?”

상처가 된 건 아니다. 그냥, 마음대로 하면 뭐가 어떠냐는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그것도 온종일, 아니지, 며칠간. 꼬리에 꼬릴 물고 이런저런 생각이 머릴 뒤덮었다. 마음대로, 마음대로 해도 괜찮은 걸까? 남에게 피핼 주는 건 아니고? 부모님의 기대는? 애초에, 내가 뭘 마음대로 해야 하는 거지? 이미 나는 잘 살아가고 있는데? 이대로, 내가 살아왔던 대로 살아간다면. 나만 참는다면 아무런 갈등 없이 조용히 살아갈 수 있을 텐데?

이어지는 사고의 끝에서 작은 불꽃이 튄다. 작디작은 빛 망울이 일렁인다. 기억났다. 내가 하고 싶었던 것. 어린 토끼의 작은 꿈. 하지만, 부모님이 싫어했던 그것.

그 순간, 나의 의지는, 나의 꿈은, 인생의 여느 때보다 선명해졌다.

가장 깊은 우물에 도달했던 토끼가 수면 밖으로 고갤 내민다. 이제, 토끼는 다리에 힘을 싣는다. 숨을 들이쉬고, 저 위를 바라본다. 넘을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벽. 한평생 나를 가로막았던 그 벽. 숨을 후, 내쉬고, 용기를 발판 삼아, 높게 뛰어오른다. 그 무엇도, 그 어떠한 것도, 토끼를 막을 수 없었다. 토끼는 기어코, 하늘을 날았다.

이미 다 자란 토끼에게 벽은 너무나도 낮았다. 어이없을 정도로 낮은 벽에, 토끼는 웃는다. 뭐야, 별거 아니었잖아. 이렇게 낮고, 이렇게 작은 곳에서 내가 평생을 살아왔단 말이야? 그곳을 나온 후에야, 토끼는 자신이 있던 곳이 어딘지 알게 되었다. 우물, 우물이었다. 이 좁디좁은 곳이 내게 주어진 전부라 생각했다. 내 세상은, 내가 거머쥘 수 있는 세상은 이렇게나 넓은데!

우물 밖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시리도록 아름다웠다. 끝이 보이지 않는 수평선. 부드럽게 감싸오는 바람. 찬란하게 빛나는 밤하늘.

순간, 토끼에게 한 줄기 빛이 안겨 왔다. 줄곧, 염원해왔던 한줄기의 별똥별. 토끼는 조심스럽게, 그 빛을 쥔다. 그리고, 우물을 향해 소리친다.

“어머니, 아버지. 철저히 부모님 중심이잖아요. 정말 내가 바라왔던 건―”

내가 진정 바라왔던 것, 내가 되고 싶었던 것. 나의 옳은 길, 나의 바른길.

▶ 나는 행복한가?

“응. 아저씨는 경찰을 할 수 있게 되어서 너무너무 행복해.”

나의 대답은 언제나 같다. 그때도, 지금도. 나는 이 순간이 너무나도 행복해.

어떤 부모든, 세상의 화살을 받아 내주는 역할을 한다면 아이는 그 그늘에 있을 수밖에 없다. 그늘 속의 가시보다, 세상의 화살이 더욱 위험하니까. 그렇기에 아이는 통증을 감내한다. 내가 말을 잘 들으면 되니까. 어차피 인생이 그런거랬으니까. 나름의 방어기제도 펼쳐본다. 이렇게 지속되는 통증은 아이를 둔하게 만든다. 자신이 그늘에 갖힌 걸, 어느순간 망각하게 된다.
하지만, 아이들은 뒤를 돌아 본다. 그리고 깨닫는다. 아, 여기는 그늘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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