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불멸자의 회고록

어느 불멸자의 회고록 - 1부 16화

우리의 종막

*잠뜰 TV 스토리 콘텐츠들의 2차 창작물로, 공식과 무관합니다.

*흰 화면으로 감상하시는 것을 권장드립니다.

*겨울 신화 × 이방인 크로스오버


1부 16화

우리의 종막


하나. 결국, 이렇게.

둘. 우리의 신념은,

셋. 우리의 마음은,

넷. 결국. 이렇게.

선인의 등 뒤에서 공룡 박사가 도사에게 속삭였다.

"저자를 노려도 소용이 없는 것 같군요. 그럼…, 배를 공격해요."

사실상 당장 전투를 할 수 있는 인원은 그 둘이 전부였기에, 눈을 한번 마주친 그들은 곧바로 궁궐의 잿빛 하늘 위로 비상했다. 총성이 천공을 메우고 대지를 울렸건만 천건성군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선인이 입술을 짓씹었다. 젠장, 또 뭔가 있군. 이젠 징그러울 지경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비행선의 앞에 붉은 방어막이 생겼다. 다른 시대의 무기와 현 인류의 이동형 무기 중 가장 뛰어난 성능을 지닌 도사의 공격에도 그것은 뚫리지 않았다. 두 사람이 허공에서 대화를 나누는 듯한 모습이 보였다.

"참 많은 것을 훔치셨군요, 성군."

"안타깝게도, 선인과는 달리 정직이란 미덕을 고수할 수 없는 삶을 살아와서 말입니다."

천건성군의 비아냥에 선인은 다시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붉은 혜성처럼, 피처럼, 또 저 자의 머리칼의 빛깔을 닮은 비행정과 그것의 방어막. 태양선인은 인류가 멸망하지 않고 다시 일어날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간 거의 궤멸하다시피 죽어 나가도 문명을 일으켜 세우는 모습을 본 것만 두 번이었다. 그러니 세 번이라고 못 하겠는가.

다만 그가 두려운 것은, 아주 높은 확률로 눈앞의 이들을 잃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곤성의 성주 수현, 도사 덕개, 이방인 공룡 박사, 태음신관 티티, 그리고….

잠뜰 천문관은 어디에 있지?

태양선인의 생각이 과거 인류를 구원했던 어느 인간에게 닿은 순간, 비행선이 커다란 소리를 내며 폭발했다. 천지를 뒤흔드는 거대한 폭음에 귀가 멀어버릴 것만 같았다. 설령 정말 멀어버린다 한들 지겹게도 아주 빠르게 회복되겠지만.

하늘에 떠 있던 두 사람이 지상에 발을 디뎠다.

"공룡 씨, 저거 당신이 한 거예요?"

"아-, 니요? 저 아무것도 안, 했, 는데?"

"아까도 댁이 비행선 하나 터뜨렸잖아요." 

"그때는 제가 타고 있었으니까 됐죠!"

상황 파악도 하지 못한 채 적을 잃은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목이 꺾여라 하늘을 보는 것뿐이었다. 심지어는 이방인의 우주선이 나타난 그 순간에도.

"에엥? 내, 내 우주선!"

"아니 잠깐만, 저건 잠뜰 천문관이랑 같이 없어졌다면서요?"

"없어졌었는데…, 설마?"

천문관인가. 문득 낡은 종이에서 보았던 사실이 한 가지 떠올랐다. 천 년 전의 우주선을 목이 부러져라 올려다보던 태양선인이 중얼거렸다. 그런데 저거….

"잘못 건드리면 다 죽을 텐데."

"예? 다 죽는다고요?"

그의 작은 말을 들은 태음신관이 경악했다. 선인이 창백한 안색의 신관을 빠르게 달랬다.

"걱정 마시지요. 유능하신 천문관께서 타고 계신 것 같으니 말입니다."

"잠뜰 천문관 말씀이십니까?"

용케 유능한 천문관의 정체를 알아챈 성주가 끼어들었다. 선인이 제멋대로 새어 나오려는 한숨을 억눌렀다. 진정시켜야 할 대상이 하나 늘었군. 잠뜰 천문관, 반드시 나의 기대에 부응해야 할 겁니다. 태양선인은 여전히 비행선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범상치 않은 만큼 능력은 좋고, 또 그것에 비례하게 비상(非常)한 자이니 조금만 지켜보시지요. 정 안 되겠다 싶으면 두 분께서는 도망가십시오."

"하지만 선인-."

"이제는 아시리라고 생각합니다만.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죽지 않습니다."

정확히는 무조건적인 불멸은 아니지만, 죽음의 조건이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니 조금은 과장되게 말했다. 저들은 그가 이렇게 말해야만 위기가 닥쳤을 때 이기적으로 굴어줄 것 같았다.

슬슬 아파지는 고개를 원상태로 되돌린 태양선인은 천건성군과 눈이 마주쳤다. 붉은 혜성의 눈에는 반역에 실패했음을 확신하는, 일종의 못마땅함이 서려 있었다. 그리고, 아주 약간의, 제대로 보이지 않기에 확신조차 할 수 없는 수준의, 절망감.

그 모습을 본 태양선인은 자신의 감정을 어떠한 표현으로 정의할 수 없었다.

천건성군은 반역자였다. 그리고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끝없는 눈치 싸움을 계속했던 이였다. 또, 지난 수백 년간, 친우가 될 수 있으리라고 믿어왔던 이였다. 그렇게 수 세기를 기다렸다. 그 시간을 기다렸지만 그들은 끝내 갈라섰다.

태양선인은 반역자의 실패를 통쾌하게 여겨야 하는가? 혹은 친우의 타락을 슬피 여겨야 하는가? 그것도 아니라면, 수 세기 동안 목표로 삼아왔던 바를 끝내 이루지 못한 남자에게 동정심을 표해야 하는가?

선인은 천건성군이 딱했고, 두려웠으며, 걱정되었고, 그와 동시에 증오스러웠다. 천건성군의 말대로 신념은 단순하고 단단해져도, 감정들은 두 눈을 똑똑히 뜨고 버젓이 살아 있었다. 어쩌면 이미 아주 오랜 시간을 살아본 경험이 있기에 감정을 수호할 줄 아는 것에 익숙한 것일 수도 있었다.

선인, 겨울은 감정이 풍부했기에 그 자리를 잃은 신이었으니 더욱 그것의 강력함을 알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감정에 휘둘린 것을 후회할지라도 감정을 품은 것 자체를 후회하지는 않았다. 감정이 있었기에 인간을 사랑했고, 안온한 겨울날 제 벗을 만날 수 있었다.

태양선인은 천건성군의 눈을 보며 슬픈 눈웃음을 지었다. 그래, 천건성군. 나는 그대를 연민합니다. 그리고 그대를 증오하지요. 이런 나의 모순 정도는 익히 알고 계셨잖습니까? 목 끝까지 올라온 말은 감히 뱉을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기에, 선인은 가볍게 떨리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의 상념은 성주의 단호하고 차가운 말 한 마디에 끊겼다.

"도사 덕개. 저 반역자를 당장 체포하라."

천건성군은 씁쓸한 미소를 내비쳤다. 하하. 붉은 혜성이 메마른 웃음소리를 두어 번 터뜨렸다.

"결국, 이렇게 되고 마는구나."

펑! 성군이 소매에서 무언가를 꺼내 바닥에 내던졌다. 연막탄이었다. 최후의 수단이었을까. 시야가 희뿌옇게 변해 한 치 앞도 구별할 수 없었다. 그의 곁에 있던 인간들은 연신 쿨럭대며 기침을 토했다. 아마 최루 성분이 들어 있는 모양이었다. 선인은 연기 속에서 위태로이 휘청이는 듯한 인형을 바라보았다.

"누구의 선택이 진정 옳은 것이었는지, 지켜보도록 하지요."

짙은 잿빛 안개가 걷힌 자리엔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검붉은 혈흔만이 이곳에 천건성군이 서 있었노라고 증언할 뿐이었다.

xXx

"슈팅 스타, 아니, 비성편을 미립자 단위로 분해할 겁니다. 그러면 더 이상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겠죠."

"그래요. 부탁합니다, 공룡 박사."

"드디어 제가 벌인 일의 책임을 지게 됐네요. 박사님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글쎄요."

아직은 잘 모르겠군요. 태양선인은 예의 그 느릿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의무가 끝났다고 생각하니 속이 시원하면서도 허전했다. 공룡 박사에게는 태연하게 말했지만, 당장 어디로 가야 할지부터가 난관이었다. 천 년간 쌓은 인간관계는 만날 수 없는 사람과 만나선 안 될 사람으로 나눌 수 있었다. 전자는 죽은 자요, 후자는 궐의 사람이었다.

그는 비성편의 날렵한 몸체가 분리되기 시작할 무렵 조용히 궁궐의 중정에서 빠져나왔다. 생각이 많아졌으니 시선을 두지 않게끔 하는 것이었다. 효과적이진 못한 행동이었다. 결국 생각의 흐름은 다시 비성편으로 튀었으므로. 달만을 바라보는 바다도 아니고, 이게 무슨 꼴인지. 자조 어린 미소가 입가에 들어찼다.

세상을 위해 만들어진 무기가, 세상을 위해 보호받고, 또 세상을 위해 사라지고 있었다. 이 모순, 아이러니란. 결국 한 번 잘못된 사상은 영원히 잘못되기 마련인가. 이것을 조금만 더 빨리 깨달았더라면 상황은 달랐겠지. 괜스레 무의미한 후회를 한번 해 보는 것이었다.

지곤성의 가장 큰 건물의 아래에는 자그마한 발코니가 있다. 사람 다섯은 설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작은 곳. 지곤성의 1대 성주는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이곳에서 작열하는 별들을 바라보곤 했다. 마찬가지로 가끔 발코니에서 생각을 정리했었던 태양선인은 그가 총리의 이름을 나직하게 속삭이는 것을 들었다. 그날 밤 이후로, 선인은 발코니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

요컨대, 약 천 년 만에 들르는 장소였다. 분명 낯설 것이라고 생각했건만, 기억 속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초대 성주에게 이곳이 지니는 의미를 알았던 걸까.

태양선인이 회상에 빠져 있는 동안, 익숙한 이가 발코니에 발을 들였다.

"여기 계셨었군요."

태음신관이었다.

"신관. 여긴 어쩐 일입니까?"

"분명 당신께도 가벼운 일이 아닐진대, 외딴곳으로 향하시기에."

신관이 조용히 선인의 곁으로 다가왔다. 지곤성의 궁궐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장소에 나란히 선 두 사람은 한참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 평화를 한동안 누리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었으니, 이것은 마지막으로 누리는 사치였다. 끝내 침묵을 깬 것은 태음신관이었다.

"…정말 떠나시는 겁니까."

이미 아는 것을 다시금 확인하는 문장이었다. 선인은 난간 위에 올라간 제 손을 들여다보았다. 부채를 잃은 손가락이 허전해 괜히 허공에서 주먹을 쥐었다 폈다.

"제 의무는 비성편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비성편이 사라지고 제 사명도 끝을 맞이했으니, 이젠 먼저 떠나간 이들의 곁에서 휴식을 취하고자 합니다."

아마도 영원할 휴식을. 구태여 그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태음신관은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가을, 내게 실망했습니까. 방금 전까지 피 튀기는 전쟁이 벌어졌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맑은 날의 우아한 노을을 들여다보던 태양선인은 궐의 중정으로 시선을 옮겼다. 공룡 박사와 잠뜰 천문관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아니, 투덕대는 것 같기도 했다.

선인은 그 모습을 보며 마음을 갈무리했다. 이젠 물러나야 할 때였다. 안온하고, 다정한 소멸을 향하여. 내게 주어졌던 운명의 종말을 향하여.

"태음신관. 그대와 수많은 전대 신관은 평생을 그림자 뒤에 가려졌던 나의 목소리를 대신 전해오며 함께 비성편을 수호해온 소중한 동료들입니다. 이제 하늘과 신화의 시대는 끝을 맞이했지요. 청컨대, 그대의 지혜를 백성과 이 세상을 위해 활용해주십시오."

그것은 태양선인이 세상에게 전할 마지막 말이었다. 한 시대의 종막을 선언하며, 그는 쌓아온 역사에 비해 단출한 은퇴식을 누리게 된 것이다. 선인의 유언과도 비슷한 청을 들은 태음신관은 지그시 미소를 지었다.

"필멸의 존재로서 불멸의 태양선인 곁에서 비성편을 수호해온 것은, 제게 크나큰 영광이었습니다. 선인께서 떠날지라도 그대의 의지와 지혜는 결코 끊기지 않을 것입니다."

태음신관이 묵례하자 태양선인도 따라서 고개를 숙였다. 몇 초간 그들은 그 상태를 유지했다. 감정이 벅차오른다거나 미련이 샘솟는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그저 한 시기의, 누군가에게는 삶의 마지막이 될 것이었다. 담담하고, 남이 보거든 건조하다고 나무랄 법한, 참으로 그들다운 작별 인사였다.

노을이 붉었다.

xXx

이제 다시는 사용되지 않을 처소로 향하는 태양선인은 옛 인연들을 떠올렸다. 봄, 여름, 가을, 덕개, 옛 인류의 구원자, 연구소의 후배, 총리, 성주, 천건성군, 신관, 공룡 박사, 천문관…. 죽음이 다가오면 주마등이란 것이 스쳐 간다던데, 나의 주마등이 바로 이것일까. 그렇다면 주마등 치고는 길었다. 오래 살았으니 스쳐 갈 기억도 많은 모양이었다.

옛 친우를 볼 수 있을까. 불멸의 존재에겐 죽음이란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의 숨이 끊기는 순간은 죽음이 아니라 소멸이라 불리운다. 그러니, 그가 지금 소멸한들 평범한 사후세계로 가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지난날의 공허로 돌아가게 되는 것인가. …조금은 내키지 않았다만, 이렇게 질긴 목숨을 부여잡는 것보단 나을 성싶었다.

처소의 문을 연 태양선인은 수없이 많은 회고록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저걸, 다 읽을 생각을 하는 미친 작자가 있을까? 앞으로 최소 3세기 동안은 없을 것 같았다. 보안을 중시해 신관에게도 보여준 적이 없긴 했지만 저걸 다 들고 가는 건 무리였다. 아니, 애초에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니, 책상 위의 검은 약병만 챙겨서…. 잠시만.

"사라, 졌다…?"

대관절 궐 내에 해독제를 훔칠 이가 어디 있단 말인가? 도대체 누가….

"…설마."

설마. 일말의 가능성이 머릿속을 가격하고, 태양선인은 인적이 드문 바다를 향해 뛰어갔다. 저주받은 바다 너머의 대륙과 가깝기에 흉흉한 소문으로 사람들의 접근을 차단했던 그 바다로.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고, 뛰는 것이 익숙지 않은 몸뚱이는 몇 번이고 휘청거렸다. 그러나 태양선인, 각별은 멈출 수 없었다. 지독하리만치 이기적인 그는 하나의 생명이 덧없이 지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러니, 부디, 그대에게 닿을 수 있기를.

하지만 언제나 그러하였듯, 운명은 그의 손을 들어주는 법이 없었다.

"-별이 참 밝구나."

다리부터 가루가 되어 사라지는 익숙한 뒷모습.

아, 너무도 늦어버린 것이다.

검은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한 밤하늘, 밝은 가루가 되어 밤하늘로 날아가는 라더, 썩어가는 나무 밑동 위의 빈 유리병. 모든 것이 한 가지를 가리키고 있었다. 천건성군의 목적은 처음부터 죽음이었음을. 그가 결국 원하던 바를 이뤄내는 모습을 태양선인에게 보여주고야 말았음을.

바닥에 남은 잔해를 쥔 태양선인이 그것을 손안에서 굴리다가 손바닥을 펼쳤다. 까끌까끌한 촉감과 반짝이는 모습이, 마치 별의 가루를 만지는 듯했다. 인간은 죽으면 별이 된다지. 선인은 천건성군이 직접 다가가 수를 놓았을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지상의 그림자는 그 어느 때보다도 찬란히 빛났다.

별이 밝은 밤이었다.

정작 그 아래에 선 이의 마음은 알지도 못하고.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Non-CP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