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불멸자의 회고록 - 1부 3화
수레바퀴의 방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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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화면으로 보시는 것을 권장 드립니다.
*겨울 신화 × 이방인 크로스오버
1부 3화
수레바퀴의 방관자
하나. 인류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둘. 그리고 소멸했던 그 또한 변하지 않았다.
셋. 인류는 싸움을 시작했고,
넷. 불멸자는 그것을 방관할 수밖에 없다.
불꽃이 온 세상을 뒤덮었다. 끓어오르는 화염이 사람과 건물을 가리지 않고 집어삼켰고, 불타지 않은 건물엔 방사능에 피폭된 시신들이 넘쳐났다. 국가는 생존의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 외의 인원을 구조하지 않았다. 이 근방에서 구조된 사람은 손에 꼽았다.
인간들은 이런 말을 하더군.
슬픈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다고.
며칠. 고작 며칠간의 인류 역사상 가장 짧은 전쟁이었고, 인류가 쌓아온 모든 것을 앗아간 역사상 최악의 며칠이었다. 어떠한 생명도 살아남지 못했다. 나를 제외하고는. 하지만 과연 나를 생명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무엇도 남지 않은 공간에 홀로 존재하니 자연스럽게 생각이 많아졌다. 분명 살아 숨 쉬고 있으나, 과연 날 '살아있다'고 칭할 수 있는가. 주로 그런 번민이었다. 그리고 그런 번민들을 유일하게 챙겨온 펜과 노트에 적고는 했다. 속에서만 남기고 삭혔다가는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여름이라 그런지 비가 많이 내렸다. 방사능을 품은 비가 전쟁 이후 며칠째 끊이질 않고 내렸다. 마치 수십억의 죽음을 애도하듯. …여름께서도 이 광경을 보고 계신 걸까. 이젠 동등하게 마주할 수 없음을 알고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에 빗물이 들어왔다. 따가웠다.
날이 습하면 시체의 부패 속도가 빠르다. 방사능과 습기에 지속해서 노출된 시신은 단 며칠 만에 썩어 문드러진다. 처음엔 바라볼 생각조차 못했다. 그들이 금방이라도 너덜거리는 팔을 뻗어 내 다리를 붙잡을 것만 같았으니까. 왜, 왜 자신들을 살리지 않았느냐고, 왜 혼자 살아남았냐고 내게 물을 것만 같아 두려웠다. 미안하오, 미안합니다. 닿지 못할 사과만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아무도 듣지 못할 사죄였다.
전쟁 이후 몇 주, 몇 달, 어쩌면 몇 년일 지도 모를 시간이 흘렀다. 온갖 곳에 넘치던 시신들은 이젠 뼈와 약간의 살점만 남아 나뒹굴었다.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 예전보단 조금이나마 돌아다닐 만 했다. 하지만 연구소 근방은 여전히 갈 수 없었다. 가장 드높게 솟아있던 진보의 상징은 인류의 어리석음을 드러내는 탑이 되어 날 비웃었다.
정처 없이 도시를 걷다 보면 가끔 화마에 휩싸이지 않은 거대한 도서관을 마주쳤다. 칠이 다 벗겨진 간판에 흐릿하게 글씨가 남아 있었다. 시립 도서관. 저 거대한 불쏘시개나 다름없는 공간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의문이다. 도서관 앞을 지나간 횟수를 셀 수 없게 되었을 때, 썩은 문을 밀고 들어갔다. 호기심일까.
도서관엔 살아남은 책들이 빼곡했다. 그 과거의 지식들은 인간의 탐욕의 손길에 희생되지 않고 굳건히 자리를 지켰다. 100 철학, 200 종교, 300 사회과학…, 범주에 따라 분류된 도서들이 책장을 따라 정렬되어 있었다. 책등을 따라 손가락을 훑다가 한 권을 뽑았다. 「인간은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 제목이 다소 과격한 사회과학 서적이었다. 목차를 보니 각종 사회 문제에 관한 이야기와 원인, 해결 방안이 서술되었다.
책을 손에 들고 끝이 보이지 않을 듯 기나긴 복도를 바라보았다. 한동안은 여기서 틀어박혀 지낼 것 같다. 이 몸뚱이의 장점이라면 분명 세포만 튼튼해졌는데 생리현상이나 인간의 기본적 욕구들인 식욕, 수면욕 등을 반드시 충족시킬 필요도 없다는 것이니까. 이건 내가 몸을 차지하면서 생긴 현상 같지만, 어쨌든 장점이다.
…몇몇 책장 층과 층 사이로 백골이 보인다. 저 줄들은 건너뛰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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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다. 하늘을 두껍게 덮고 있던 먹구름이 모두 사라지며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도서관에 넘쳐나던 책들의 대부분을 읽었다. 그리고 언제까지나 여기서 기거할 수는 없는 노릇임을 깨달은 지도 오래였다. 떠나고 싶지 않았을 뿐. 먼지 쌓인 바닥을 신발 앞코로 툭툭 건드렸다.
정확히 몇 년이 흘렀는지 알 수는 없지만, 지금쯤이면 나를 알던 사람들은 모두 죽지 않았을까? 애초에 목표로 잡고 있던 '잊히는 것'은 달성한 것 같으니, 이젠 인류를 찾아봐도 별문제 없을 것이다.
다만, 어떻게 찾느냐가 문제다. 일단 배를 타고 가야 하겠지. 비행기는 전부 전쟁용으로 동원되었다가 불탔고, 걸어가는 건 미친 짓이고-대륙 단위를 걸어가는 사람이 어디 있나-, 자동차는 왜인지 모르겠지만 꺼려졌다. 게다가 멀쩡하게 남은 것도 없었다.
우선 내겐 세계 지도가 있다. 책이다. 기계 수리법을 찾아볼 수도 있다. 책으로. 그럼 배만 찾으면 되는데, 책으로만 배를 만들어낼 수는 없다. 젠장. 지리 책과 기계공학 책, 일지 노릇을 하던 노트와 펜을 챙겨서 오랜만에 도서관을 나섰다.
죽은 식물이 썩어 흙만 남은 화단을 한 번, 그동안 유리가 모두 깨져 콘크리트와 철골만 남은 건물을 한 번 쳐다보았다.
아인슈타인이 이런 말을 했다는 설(說)도 있다.
세계 3차 대전에서 무엇을 가지고 싸울지는 본인도 모르겠으나, 4차 대전에서는 나뭇가지와 돌을 들고 싸울 것이라고.
방사능은 산 것과 죽은 것을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을 파괴했다. 그중에는 인류의 문명도 있었다.
가는 길에 전쟁 이후로는 처음으로 박사의 집에 들렀다. 벽 한 면이 통째로 날아가기는 했지만, 운 좋게도 불타지 않은 건물들 중 하나였다. 방문 사유는 간단했다. 노트를 다 썼다.
깨끗한 공책을 한 권 챙기고 -아무 흔적도 없는 공책을 찾는 데 꽤 긴 시간이 걸렸다.- 노트북도 집어 들었다. 이 난리통에도 방전되지 않다니, 인류의 발전한 기술력이 놀라울 따름이다. 그래도 오랫동안 써야 할지도 모르니 여분의 배터리를 챙겼다. 시원하게 뚫린 벽으로 항구의 위치까지 파악했다. 훌륭한 수확이다.
뒤돌아서 집을 나가던 중 발치에 무언가가 걸려 내려다보았다. 검은 유리병. 해독제였다. 입안이 까끌거려서 잠시 쪼그리고 앉아 쳐다만 보다가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내 삶은 아니었지만 이젠 내 삶이나 다름없으니 하나의 길을 남겨두고 싶다는 변명을 하며.
항구는 제법 가까운 곳에 있었다. 바다로 이어지는 드넓은 강을 따라 듬성듬성 떠 있는 배들은 봐줄 만한 상태였다. 녹이 많이 슬지도 않았고, 계기판도 먼지만 수북할 뿐 큰 문제는 없었다. 선박 수리는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쉬웠다. 물론 책도 있었고, 항구 창고에 나뒹굴던 공구도 상태가 좋았지만.
지도가 그려진 책장을 찢어서 챙기고, 노트와 펜, 해독제를 제외한 나머진 항구 바닥에 내버려 두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모르지만 방사능을 인류에게 뿌리는 위험을 사전에 방지하고 싶었다. 나부터가 방사능 덩어리일 수도 있으니 최대한 바다에 머물면서 방사능을 털어낼 생각이다. 효과가 있을지는 알 수 없다. 그저 무턱대고 간 것보단 낫기를 바랄 뿐이다.
나무 바닥이 죄다 썩어서 콘크리트만 남은 항구에서 지도를 펼쳤다. 대륙엔 전쟁의 영향을 받지 않은 곳이 없으니, 외딴섬 정도는 가야 그나마 생명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 그럼 전쟁에 휩쓸리지 않을 만한 특별한 이유가 있는-,
"-슈팅 스타가, 어디 있었지?"
당연히 슈팅 스타가 있는 곳에 폭탄을 터뜨리는 머저리는 없을 것이다. 그건 본인을 포함한 온 인류를 죽이겠다는 소리니까. 그리고 내가 알기로 슈팅 스타는 드넓은 벙커와 함께 꽤 큰 섬의 지하에 보관되어 있다. 문제는 그 섬이 어디 있는지를 모른다는 것인데.
지도에서 가장 큰 섬부터 찾아봤다. 눈대중으로는 여기가 제일 넓은 것 같긴 한데, 산이 좀 많다. 그래도 가장 넓은 바다를 끼고 대륙으로부터 격리되어 있었다. 위도도 적절하니 아주 이상적이었다. 지도를 구석구석 뜯어봐도 이만한 곳이 없었다. 총리라면, 아니, 누구라도 그곳으로 가려고 했을 것이다. 사람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이니까.
「총리는 기자회견에서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안전하고 넓은 벙커로 피신시키겠다는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게다가 전쟁 직전 총리가 기자회견에서 했던 말을 떠올려보면 더더욱.
목적지를 정했으니, 이제 이 배를 잘 몰고 가기만 하면 된다. 배에 올라탔다가 다시 내렸다. 책에 배를 어떻게 조종하는지에 대한 내용이 있는지 찾아봤다. …없다. 도서관까지 다시 가기는 또 귀찮았다. 이렇게 인간적인 감정을 느끼게 될 줄은 몰랐다. 어쩔 수 없이 부딪히며 배워야겠다.
xXx
섬이다. 사람이 있는 섬이다. 나무로 쌓아 올린 감시탑 위에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금세 어디론가로 사라져버렸지만 희망이 보였다. 어디론가로 사라졌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알려야 해서 갔을 확률이 크고-자신을 보호하기 좋은 위치를 포기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이는 적어도 한 명 이상은 있다는 뜻이다.
섬으로 계속 다가갔지만 아무런 경고도, 공격도 없었다. 배를 뭍에 정차시키고 조심스럽게 내렸다. 갑자기 돌멩이가 그를 맞이하러 날아오는 등 이상적이지 못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몸을 낮췄다.
다행스럽게도 나를 맞이해준 건 돌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그것도 내 옷을 보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사람. 설마 알아봤나. 제발 아니었으면. 운명이시여 한 번만 협조해주소서.
"누구십니까?"
오, 감사합니다.
"이곳에 총리가 있습니까?"
"예?"
"지도자를 만나러 왔습니다."
"누구신지 먼저 말씀해주셔야겠습니다."
"바다 너머에서 왔다고 전해주십시오."
총리가 아직 살아있을지도 모른다. 잊혀지는 것을 원했지만 어느 정도는 그가 살아있고 날 기억하기를 염원했다. 그래야 그나마 설명해야 할 양이 줄어드니까. 시작하더라도 '제가 왜 살아있냐면-'으로 시작하고 싶었지, 자기소개부터 하고 싶지는 않았다.
숲으로 사라진 남자는 생각보다 빠르게 돌아왔다.
"이쪽으로 따라오세요."
칼, 활과 화살 등 예스러운 무기들을 몸에 달고 걷는 남자를 뒤따라가는 이상한 사람. 마을 주민들이 보면 어쩌나 싶었는데 남자는 길을 숲으로만 안내했다. 다른 건물들보다 유독 큰 목조 건물 앞으로 가기 직전에서야 마을로 들어설 수 있었다. 사람들이 신기한 눈으로 흘긋거렸다. 특히 옷과 노트북에 시선이 꽂혔다. 좀 감출 수 있을 만한 가방이라도 들고 올 걸.
퉁퉁. 남자가 나무 문을 두드렸다.
"들어가겠습니다."
넓고 황량한 방 안에 한 노인이 앉아 있었다. 30년 정도 늙었을 뿐, 화면으로 봤던 총리가 틀림없다.
"대화 나누세요. 밖에 있겠습니다."
노인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나도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따라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여기 계셨었군요, 총리님."
노인, 멸망하기 이전 시대의 총리가 씁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건 예전의 직함일 뿐이지요. 각별 박사께서도 무사히 살아계셨군요."
"…저를 기억하시는군요."
"물론이죠. 박사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의 목숨과 이 세상을 구하기 위해 힘쓰셨잖습니까."
다행이다. 박사가 유명했던 것이 이렇게 도움이 되었다. 나이 든 총리는 희끗희끗한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런데, 박사께서는 변하질 않으셨군요."
그래, 이게 본론이었다. 수십 년의 시간이 흘렀는데도 어째서 과거 그대로의 모습으로 찾아왔냐는, 총리와 나의 용건을 시작할 수 있는 공통의 서두.
.
.
.
"그럼, 이제 어떡하실 겁니까."
노인은 깊게 한숨을 쉬었다.
"…다시 시작해야죠. 인류의 문명을. 그리고, 우리가 안고 있는 이 재앙이 영원히 터지지 못하도록 지킬 겁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강력한 왕권의 왕국을 세울 겁니다. 그 누구도 우리가 지키는 슈팅 스타를 볼 수도, 알 수도 없도록 신성시하며 숨겨둬야죠."
그의 눈에 단단한 다짐이 보였다. 마치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살려내겠다고 당당하게 말하던 그 젊은 총리의 모습처럼.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박사.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제가 무엇을 할 수 있죠?"
"우리가 겪은 일들의 증인이 되어주시지요. 그리고 신화가 되어 주십시오. 우리가 죽더라도 우리의 후손들은 같은 과오를 범하지 못하도록, 박사께서, 부디."
총리의 눈은 간절한 염원과 애원을 담고 있었다. 인류를 위해 희생해달라는 이기적이고도 이타적인 애원을. 눈앞의 대상이 결코 거절할 수 없음을 아는 부탁을.
"인류를 위해 이곳을 영원히 지켜 주십시오!"
그건 살아 숨 쉬는 전설이 되어달라는 부탁이었다. 슈팅 스타를 그대로 둔다면 또 다시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그러니 부디 슈팅 스타(shooting star), 아니, 비성편(飛星片)을 신격화해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도록, 역사의 산증인이 되어 달라고.
아마 수백, 수천, 어쩌면 수만 년을 바쳐야 할 것이다. 인간들이 자신을 해할 수도 있으며, 내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도 있는, 무엇 하나라도 확신할 수 없는 일이 될 것이다. 마치 내가 신이었던 시절에 그랬듯이.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미련하게도 나는 여전히 그들을 너무도 사랑했으니.
총리, 지도자는 서둘러서 국가를 세우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강력한 왕권을 위해서는 왕좌에 앉을 수 있는 합리적인 이유나 자격 혹은 탄탄한 기반이 필요하다나. 무력이 제일 편하긴 하지만 그것만큼은 절대로 쓰지 않겠다던 선언을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지도자는 그 '합리적인 이유나 자격 혹은 탄탄한 기반'을 한 번에 채울 수 있는 것이 나의 존재라고도 말했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의 한가운데에서 살아 돌아온 자. 죽지 않는 자.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존재. 그는 나를 기반으로 삼으려 움직이고 있었다. 감탄이 나올 정도로 치밀하고도 야망에 차 있으며, 영리한 자였다.
작은 마을의 규모가 꽤 커지고 슈팅 스타가 금기어로 완벽히 자리 잡을 무렵, 지도자가 선언했다. 바다 너머에서 살아 돌아온 자에게 비성편의 수호자 역할을 맡기겠다고. 비성편에 문제가 생기는 일이 없도록 영원히 지켜줄 것이라고. 이 마을이 거대한 국가가 될 때까지, 기나긴 역사와 함께 비성편을 수호할 것이라고. 처음엔 시끄러웠다. 외지인에게 그렇게 중요한 업무를 맡겨도 되겠느냔 말이었다. 꽤 오랫동안 마을에 머물렀다고 생각했는데, 그들에게 난 아직 외지인이었다. 그러나 시간은 나의 편이 될 수 밖에 없다. 총리의 자세가 구부정하게 휠 무렵, 나는 비성편의 수호자로서 사람들에게 인정받았다.
그렇게 나는, 다시 신이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었다.
우습게도 처음 한 생각은 계절들에 대한 것이었다. 계절의 신들에게 발각당하면 어떻게 될까? 어차피 운명은 이 상황을 알고 있겠지만, 전쟁 발발 이전에는 농업의 비중이 적었다. 또한 인간들이 계절을 극복할 능력이 충분했으니 계절의 신들의 힘 또한 약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신은 절대적인 존재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운명이나 시간 등 이 세상을 만들어낸 존재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신들은 그렇지 않다. 운명과 시간은 그저 존재한다. 그들은 이 세상과 함께 생성되었고, 그들이 존재함으로써 운명이 만들어지고 시간이 흘러간다. 그리고 그런 존재들이, 그 개념을 통제한다. 그들의 선택으로 누군가의 운명이 생성되고 시간이 멈춘다. 모두 존재가 자신의 권능을 통제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만 알고 있을 뿐, 실제로 언제 어떻게 그 일이 벌어지는지는 당사자들을 제외한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반면 인간들이 처음 자연을 두려워하고 숭배하기 시작한 그 순간, 계절의 신들은 탄생했다. 신의 힘은 그들을 믿는 인간들의 수에 비례하며 그 신을 믿는 인간이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신은 자연스럽게 소멸한다. 운명은 그것을 '진정한 죽음'이라고 표현하고는 했다. 정리하자면, 운명이나 시간 같은 개념 그 자체가 된 존재를 제외한 대부분의 신들은 인간의 신앙심에 기대 존재를 유지한다.
그러니까, 소멸당하기 직전의 내가 나머지 세 신보다 월등히 강했던 것은 나머지 계절의 신들의 부재 때문이다. 그들이 봉인 당하거나 힘을 잃으니 인간들은 세 신을 서서히 잊거나 믿음을 포기했고, 홀로 남은 계절인 내게 그들의 믿음과 신앙, 또 두려움이 흘러들어온 것이다.
다시 나의 걱정으로 돌아와 보자면, 문명을 다시 세우고 있는 지금은 농업이 주력인 데다 가축까지 키우고 있었다. 아마 긴 시간 농경 사회로 남을 것이다. 과학이 발전하면 경계해야 할 요소가 많아지니까. 이건 내가 영향력을 회복한 계절의 신들의 눈에 띌 확률이 급등한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이건 내가 어느 겨울날 길을 걷다가 갑자기 떨어진 우박에 머리가 산산이 조각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몇 주간 걱정했지만 별다른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신들이 인간에게 무관심하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전쟁 이전부터 생각했던 것이긴 하지만 한낱 인간 주제에 본인을 신이라고 자칭하는 자가 있는데도 아무런 사건이 벌어지질 않는 것을 보면, 내 생각보다 더욱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이번 기회로 새삼 내가 특이했음을 체감했고 한 가지를 확신했다. 옛 동료들의 눈치를 조금 덜 봐도 될지도 모르겠다고.
공식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비성편의 수호자가 되고 나서 새로 옷을 맞췄다. 요즘 구하기 힘든 흰색 옷감으로 만든 화려한 옷이었다.
"위엄은 겉모습에서부터 나오는 법입니다, 박사."
치수를 재느라 뻣뻣하게 한쪽 팔을 들고 있던 내 모습을 보며 웃음을 삼키던 지도자가 말했다. 그러는 본인은 날 아직도 수호자가 아닌 박사라고 부르고 있으면서. 반박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이젠 그 칭호로 불리는 것도 조금은 반가워서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눈앞의 노인이 날 인간의 지위로 불러줄 마지막 사람일지도 모르니까.
지도자는 성치 않은 몸으로 완성된 옷을 직접 들고 왔다. 입은 모습이 궁금하다는 시답잖은 이유였다. 못 말리겠다며 웃다가 옷을 입은 모습을 보여주자 그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잘 어울린단다. 마치 예전에 많이 입었던 것처럼. 옷을 물끄러미 내려봤다. 그러고 보니 신이던 시절에 입던 옷과 비슷했다. 이렇게 치렁치렁한 옷은 오랜만이었다. 분명 익숙한데, 익숙해야 할 텐데, 낯설었다. 소매를 만지작거리다가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그를 돌려보내려 애썼다. 잘 됐는지는 알 수 없었다. 지도자는 지그시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그 미소와 느리게 걸어가는 뒷모습이 아득하게 먼 과거의 오랜 친우를 닮은 것 같기도 했다.
xXx
"국가로서 나아갈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총리의 건강이 악화할 무렵, 그의 첫째 아들이 찾아와 내게 말했다.
"왕이 되고 싶으신 겁니까?"
"…아뇨. 과거의 역사에서 왕이 되겠다고 날뛰다가 죽은 사람이 수십이고, 수백입니다. 그저 아버지의 소원을 이루고 싶은 겁니다."
그의 눈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굳건한 결단과 약간의 욕심.
"원하는 대로 하시지요."
제겐 단 한 번도 결정권이 없었으니.
난 비성편에 손을 대선 안된다는 경고이자 상징이며, 결국 수레바퀴의 방관자나 다름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바퀴가 틀에서 빠져나와 잘못된 방향으로 굴러가지 않도록 지켜보는 것 뿐이었다. 내 머리에 넘쳐나는 지식도 비성편 외의 것에 나누지 않겠다. 현명하지 못한 결정임을 알지만, 위험의 소지를 최대한 없애고 싶었다. 인류의 발전이 더뎌지면 내가 재앙에 대비할 시간도 늘어나겠지.
지도자가 사망하고, 지곤성의 주인이 등장했다. 사람들의 믿음을 가진 자들은 작은 섬을 여덟 갈래로 쪼개어 그 무리를 팔성국(八星國)이라 명명하였다. 나는 수호자에서 태양선인(太陽仙人)이 되었다. 여덟 개의 천체들의 중심, 태양계의 유일한 항성. 성군(星君)들의 자리는 아들의 아들에게, 누군가는 첫째 아들보다 유능했던 딸에게 왕위를 주었고, 자식이 아예 없다면 방계의 사람이 자리를 물려받았다. 그렇게 수백 년의 시간이 흘러 17대 지곤성의 성주가 자리에 올랐고, 29대 태음신관(太陰神官)이 내게 첫인사를 올렸다.
연구소 CCTV에 연결되었던 노트북이 소리를 낸 것도 그 무렵이었다.
빨간 머리에 너덜너덜한 옷을 입은 한 소년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내 시약을 들이켰다. 대륙을 떠나기 전에 저 약을 없애버렸어야 했는데. 뒤늦은 후회가 몰려왔다.
하지만, 저 아이가 이곳으로 온다면? 만약- 만약 바다를 넘어 팔성국으로 온다면? 조금은 이기적인 욕심이 머리를 스치는 것이다. 욕심이라는 것을 깨닫자마자 마음을 접었다. 영생을 끝내줄 해독제를 한참 노려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그가 나타나든, 영원히 모습을 보이지 않든.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기다리는 것 뿐이다.
"결국 영생의 독이 든 성배를 드는 이가 또 생기고 마는구나…."
저 아이가 내 편에 서주길 바라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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