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불멸자의 회고록

어느 불멸자의 회고록 - 1부 1화

끝의 오류

*잠뜰TV 스토리 콘텐츠들의 2차 창작물로, 공식과 무관합니다.

*원활한 스토리 진행을 위해 원작의 전개를 각색하였습니다.

*과학적 고증이 많이 부족합니다.

*흰 화면으로 보시는 것을 권장 드립니다.

*겨울 신화 × 이방인 크로스오버


1부 1화

끝의 오류


하나. 신은 죽지 않는다.

둘. 다만 신은 소멸할 수 있다.

셋. 신의 소멸은 인간의 죽음과 같다.

넷. 그런데 이건 대체 무슨 일인가.

겨울은 눈을 떴다. …눈을, 떴다. 소멸당해 살지도, 죽지도 못한 상태로 가히 셀 수 없는 세월을 보내는 중이었으나. 인류를 열려 죽이려 했다는 혐의로 결코 빠져나갈 수 없는 연옥에 갇혀 의식만 부유하던 중이었으나. 겨울은 다시 그 눈을 떴다.

의식이 가장 먼저 돌아왔고, 그다음은 촉각이었다. 등에 평평한 바닥이 닿았다. 눈이라기엔 딱딱했고, 나무라기엔 거칠었다. 돌바닥일까.

그제야 시야에 파란 하늘이 들어왔다. 그리고, 웬, 잿빛 네모나고 거대한 덩어리들. 저게 뭘까. 하나같이 하늘을 찌를 듯 높게 솟은 것이, 신들과 직통으로 소통하기 위한 창구인 걸까. 잘만 하면 악수도 가능하겠군.

무언가 귀를 막던 것이 빠져나오듯 소리가 서서히 크게 들렸다. 웅성거리는 소음이 주변을 둘러쌌고, 멀리서는 알 수 없는 굉음이 연신 흘러왔다.

슬슬 허리가 아파와 눈을 질끈 감고 몸을 일으켰다. 마지막 전투에서 추락한 후유증일까. 시야가 얼룩덜룩하게 물들어 흐릿하게만 남아있던 그 당시의 기억들이 밀려왔다. 어깨에 꽂히던 화살촉, 그 인간, 나의 마지막 말. 그리고, 하얀 눈가루.

"저기, 괜찮으세요?"

어깨를 톡톡 두드리는 느낌에 뒤를 돌았다. 낯선 얼굴의 누군가가 이상한 옷을 입고 이상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인간을 닮은, 괴생명체?

"누구…"

"갑자기 쓰러지셨어요. 연구원이신 것 같은데, 괜찮으신가 싶어서요."

옷차림도, 말투도, 얼굴에 걸친 것도 희한한 누군가는 주변에 나뒹굴던 물건들을 줍기 시작했다. 가만히 앉아있자니 눈치가 보여 따라서 줍던 와중, 고리가 달린 얇고 작은 판을 주웠다. 뭐에 쓰는 거지.

"오, 각별 박사님이시군요. 어쩐지 얼굴이 익숙하더라니, 유명한 분이셨네요. 여기저기서 많이 봤어요. 만나서 영광이에요."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그 이름은 어떻게 알았지. 일단 뻣뻣하게 고개를 끄덕거려 본다. 누군가는 실실 웃더니 짐들을 전부 담은 가방을 내 품에 넣었다.

"머리만큼은 멀쩡하시길 바랄게요!"

내 머리? 갑자기 왜? 무심코 뒷덜미에 손을 가져다 댔지만 당연하게도 아무 문제 없었다. 주변에서 수군거리던 사람들도 슬슬 흩어지고 있었다. 이젠 가방을 품은 채 거리에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난 누구고, 여긴 어디인가. 공허한 물음에 답해줄 자는 없었다.

그 누군가가 목에 걸어주고 간 무언가를 손에 쥐었다. 목에 걸었으니 목걸이 아닐까? 아예 목에서 빼서 이리저리 살펴봤다. 가운데엔 그림, 그 아래엔 글자가 적혀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문자와 큰 차이가 없어 다행이었다. 각별, 생명공학박사. 그러니까, 나는 생명공학박사라는 신분을 가진 각별이라는 사람인가. 심지어 아주 정밀한 그림 속엔 나와 닮은 얼굴의 남자가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머리칼이 검게 물들긴 했지만, 틀림없이 내 얼굴이었다.

인류의 시간은 아주 많이 흘러갔고, 문명이 번성했다. 그리고 이건 환각에 불과하다. 이게 내가 가장 먼저 내린 결론이었다.

운명께서 심심한 나머지 짓궂은 장난을 치셨나 보군. 운명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순진하고도 잔혹한 면이 있어서, 한 영혼을 점찍어놓고는 질기게 괴롭히곤 했다.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사고에 휘말리게 하고서는 본인만 살아남게 한다거나, 괴로움에 익사한 영혼이 다시 태어났을 땐 선천적으로 지독한 병에 시달리게 한다거나. 그들은 인간으로 살아가 본 적이 없기에, 인간의 고통을 알지 못하기에 가장 잔인했다. 이번 장난엔 역사 속에 묻혀야 할 몰락한 신이 그 대상인가.

길거리는 유리로 벽을 세워 내부가 훤히 보이는 건물들로 꽉 막혀 있었다. 투명한 유리로 높은 건물을, 한두 채도 아니고 수백 채를 세우다니. 분명 왕실에서 엄청난 양의 세금을 걷어가 만들었겠지.

"박사님!"

하얀 로브, 비슷한 옷가지를 걸친 남자가 다급히 뛰어왔다. 설마 날 찾는 건가?

"아, 커피 사러 간다던 분이, 20분째 안 오시길래, 헉, 허억…,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싶어서 왔는데…."

어떻게 둘러댈지 머리를 팽팽 돌렸지만, 정작 생각을 거치지 않고 툭 튀어나온 대답은 지극히 형편없었다.

"…길을 잃었습니다."

"…어휴, 그럼 그렇지, 또 길을 잃으셨겠죠. 나 왜 뛰어왔지. 박사님 길치인 거 알면서."

남자가 익숙하다는 듯 실없이 웃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잘 통한 것 같다. 일단 남자를 따라서 멋쩍게 웃어 보였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그러니까, 커피도 못 사고 방황 중이셨나 보네요."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고, 우리 박사님도 참. 머리도 좋으신 분이 대체 왜 맨날 다니는 길은 못 외우실까! 됐어요, 연구소나 얼른 갑시다. 설마 손에 자기들 커피 안 들려있다고 미아 될 뻔한 사람한테 뭐라고 하지는 않겠죠."

길, 은 옛적에 벗의 집을 찾아가던 시절에도 잘 못 외웠었지. 설마 내 기억이 반영되는 걸까? 운명의 환각이 그렇게 치밀하게 설계될 수 있던 것이었나?

생각해보면 기이한 점이 한둘이 아니다. 환각을 만든다면 기존에 오랫동안 자리 잡았던 인류의 문명을 배경 삼아 만드는 것이 운명의 입장에서도 쉬울 텐데, 굳이 얼마 되지 않은 것이 분명한 시간대에, 굳이 옛날 옛적에 소멸당해 이 시기를 알지 못하는 나를, 굳이 닮은 얼굴의 인간을 골라 나의 의식을 집어넣을 필요가 있었는가? 사실 이 정도의 문명을 몇백 년째 유지해온 시점이라기엔, 저 거대한 창문에서 [급격한 문명의 발전에 적응하지 못한 사회의 약자들]이란 글자가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안 따라오시면 버리고 갈 거예요!"

아, 생각을 잠시 접어두었다. 버림받기 전에 저 구세주를 따라가야만 하니.

xXx

연구소에 들어가는 과정은 몹시 혼란스러웠다. 입구에 서자마자 당연히 무언가를 할 것으로 기대하듯 날 쳐다보는 남자-그 신분증 같은 얇은 판이 보이질 않아 끝까지 이름을 알 수 없었다.-라거나, 다행스럽게도 명치를 바라보는 시선에 눈치를 채서 판을 건네자 잠시 날아오는 의아한 눈빛이라거나.

허리까지 오는 기계의 검은 부분에 대자 투명한 가림막이 열리는 것을 보니 그 판은 신분증 뿐만 아니라 일종의 열쇠의 역할까지 하는 모양이다. 아무래도 그 남자는 내가 직접 열쇠를 사용할 거라고 생각한 것 같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 껍데기 안에 들어있는 알맹이가 몸의 이전 주인에 비해 여간 멍청한 것이 아니다 보니.

건물 안에 완전히 들어서고 나서도 혼란은 계속되었다. 동그란 무언가를 누르자 한 면이 전부 유리로 되어 있는 좁은 방이 드러나고, 그 안에 잠시 들어가 있었더니 방이 서서히 올라가 건물의 상부로 올라가는 신기한 현상을 경험했다. 남자는 그 방을 엘베라고 불렀다.

여하튼 긴 복도를 지나 넓은 방으로 들어가자 사람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그들은 내게 일제히 꽂히는 시선에 움츠러들 틈조차 주지 않고 달려들었다. 다들 나에게-정확히는 약 30분 전 나갔다가 타의적으로 길을 잃어버린 가엾은 박사에게- 전하고픈 말이 많은 것 같았지만, 워낙 많은 목소리가 한 번에 겹쳐 제대로 알아들은 말은 없었다.

"에이, 박사님 안 그래도 피곤하실 텐데 너무 괴롭히지 마시죠!"

날 데리러 왔던 그 남자가 아니었다면 몇 분은 더 붙잡혀 있었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그의 지원 덕분에 '생명공학박사 각별'이라고 표지판이 붙어 있는 방에 들어갈 수 있었다. 내 이름이 달려 있고, 책상이 하나밖에 없는, 즉 널찍한 개인실이었다. 드디어 혼자였다!

푹신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생각을 시작했다.

두려울 정도로 발전한, 심지어 아직도 급격한 상승세를 그리고 있는 인류의 문명. 날 닮은 인간. 알 수 없는 건물들과 직책. 운명의 장난이라기엔 이상한 구석이 많다. 운명은 변수가 많은 상황을 싫어한다. 그 이름답게 직접 통제하고 주무를 수 있는 환경을 몹시 선호하기 때문이겠지. 그런데 굳이 이렇게 변화가 많은 시대를 만들어낸다고? 운명께서?

기이한 점이 너무 많아 합리적인 결론이 나오지 않았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다림 뿐. 이 현상이 운명의 장난이라면 쉽게 질려하는 운명의 특성상 오래 가지 않을 테니, 머지않아 다시 무(無)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그나저나 이 껍데기의 본 주인은 원래 뭘 하던 사람이었을까. 책상에 얹어진 보라색 액체를 보니 약을 만들던 사람이었을까? 그런데 보라색 약도 있나? 연금술?

금속제 서랍장을 열자 종잇조각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뭐가 중요한지, 뭐가 시답잖은 내용인지 알 길이 없으니 일단 위에 있는 것부터 읽어보기 시작했다. 연구 예산에 관한 서류와 매몰차게 거절당했다는 작은 쪽지, 휘갈긴 필체로 빼곡하게 적혀 알아볼 수 없는 메모장, 글씨는 수상할 정도로 반듯하지만 모르는 단어만 가득한 종이.

맨 아래에 깔려 있던 열쇠 하나. 내 직감이 그 절반은 이해하지 못한 종이 쪼가리들은 몰라도 이 열쇠만큼은 아주 중요한 물건이라고 외쳐댔다. 혹시 잠긴 서랍장이 있을까? 일단 가까운 곳부터 뒤지다 보면, 아, 있다! 열쇠를 꽂아 넣고 돌리자 매끄럽게 돌아갔다.

서랍장 안에는 손바닥만 한 수첩과 검은 유리병이 있었다. 유리병은 책상 위에 얹어두고 수첩을 펼쳐 들었다.

2057년 5월 24일.

방사능 면역 연구에 진전이 없다. 이대로 가다간 국가의 지원마저도 끊겨 버릴 텐데, 어쩌지? 예산은 어떻게든 사비를 털고 대출을 받아 마련해본다고 해도, 실험 허가가 나지 않으면 답이 없어. 반드시 대책을 찾아야 해.

2057년 5월 30일.

6월부터 지원이 끊긴다.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재료들은 이제 엄두조차 낼 수 없어. 오늘 마지막으로 재료들을 받아야 해. 최대한 많이, 활용도가 높은 것들로. 실험은 -뒤는 사납게 줄을 그어 지웠다-

2057년 6월 4일.

실험체가 없다. 빈민가에서 쥐를 잡아 올까? 아니, 미친 짓이지, 제 2의 흑사병을 불러온 인간으로 역사서에 길이길이 남고 싶은 거냐, 각별? 정신 차려. 목표는 최대한 많은 사람을 살리는 거야. 질병을 일으켜 안 그래도 힘든 시민들을 더 괴롭히는 게 아니라.

2057년 6월 9일.

신을 볼 수 있다면 얼굴에 주먹질이라도 하고 싶다.

2057년 6월 15일.

이젠 어떻게든 선택을 해야 해. 재료들이 더 오래 버티지 못할 거야.

2057년 6월 17일.

지킬 앤 하이드.

2057년 6월 18일.

부디 내가 지킬 박사로 기억될 수 있기를.

뒷장에는 한참 여백이 이어지다 수첩의 후반에 글이 남아 있었다.

2057년 6월 27일.

내 사무실 문을 잠그고, 창문을 꼼꼼하게 가렸다. 팀원들이 시작하고 나서 실험을 시작할 생각이긴 하지만 혹시 모르니까.

19시 50분. 내 시약을 복용했다. 실험이 성공한다면 세포의 재생 속도가 빨라지고 보호 능력이 생겨 방사능이 핵을 파괴하기 전에 세포가 이를 막거나 설혹 파괴되더라도 완전히 죽기 전에 빠르게 회복시킬 것이다. 미래는 알 수 없다. 미래의 나는 내가 아닐 수도, 인간이 아닐 수도, 생명이 아닐 수도 있다. 부디 내게 인류를 살릴 길이 주어지길.

19시 53분. 약간의 어지럼증과 메스꺼움. 예상했던 증상.

19시 5-

20시 29분. 잠시 기절했었다. 신체 외적 혹은 정신적인 이상은 없는 것으로 추정됨.

21시. 불안할 정도로 아무 일도 일어나질 않는다. 왜지?

21시 50분. 시약 복용 2시간 경과. 눈에 띄는 변화는 찾을 수 없음.

22시. 확인을 위해 칼로 팔을 살짝 찔러 봤으나 따갑기만 함. 실험 실패.

2057년 6월 28일.

7시 45분. 출근하자마자 실패한 실험 자료들을 정리하다가 손을 살짝 베였고, 상처가 순식간에 아물었다. 어제 밴드를 붙여 놓았던 상처도 확인해보니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

1차 목표 달성, 실험 성공.

이젠 세포 회복이 어느 정도까지 가능한지 확인해봐야 한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방사능에 노출되는 것인데, 냅다 분쟁 지역에 찾아가서 '제가 방사능에 피폭되도록 해주십시오'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거기까지 갈 수도 없고, 그렇게까지 극단적으로 확인해보려 했다가 그대로 픽 쓰러져 삶과 작별해버리면 그것도 곤란하다.

2057년 7월 2일.

웬만한 상처들은 다 빠르게 회복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 속도라면 심장에 총을 맞아도 관통상이라면 살아남을 수도 있겠다. 극단적으로 서술하자면 심장에 말뚝이 꽂혀도 빠르게 뽑기만 해도 살 수 있다. 과다출혈은 조금 위험하겠지만. 시약이 조금만 더 안정화된다면 방사능 때문에 죽어가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왜 하필 많고 많은 무기 중 말뚝인가?

2057년 7월 3일.

실험 결과를 정부에 바로 말하기엔 걸리는 점이 있다. 과연 정부에서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 약을 사용해줄까? 약이 힘든 사람들에게 닿을 수 있을까.

정부에게 소식을 전한다면 충분한 지원을 받을 수는 있겠지만, 그 모든 무고한 생명들을 위해서 그 약이 쓰이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전쟁과 멀지만 권력과는 가까운 이들에게 먼저 가겠지.

메일을 작성하긴 했지만 보낼 엄두가 나질 않았다. 이후에 벌어질 추잡한 일들을 보고도 내가 조용히 버텨낼 수 있을까?

2057년 7월 4일.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세포의 회복 능력이 이렇게까지 빨라진다면 세포의 노화까지 늦추는 것 아닌가? 아니, 어쩌면 노화 자체를 막을 수도 있다.

떨어져나간 살점을 채우기 위해 세포가 분열하고, 그 분열된 세포의 분열 횟수가 50번에 달하면 세포는 죽는다. 하지만 세포에 회복 능력을 부여한다면? 세포가 분열할 때마다 텔로미어가 닳지 않는 -지금 텔로미어에 대해 실험을 할 수는 없지만- 상황이라면?

인류는 영생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그게 과연 축복일까?

2057년 7월 6일.

내 가설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시약이 더 필요하다. 즉 정부의 지원이 필요하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새벽에 메일을 보냈다. 역시나 답변은 빨랐다. 성과가 있다면 재료의 목록을 보내달란다. 돈으로 보내주지 않는 것을 보아 내 주장을 완전히 믿지는 못하겠다는 소리. 와중에 전쟁에서 이길 수단을 하나 더 가지는 건 구미가 당겼겠지.

어쩌겠나.

내가 만들어낸 것에 대한 확실한 답을 얻을 수 밖에.

2057년 7월 12일.

또 다시 만들어냈다. 이 시약이 인류의 희망이 될 수 있을까. 혹은 저주가 되어 손가락질 당할까.

바로 뒷장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알아듣지 못한 말이 꽤 됐지만 적어도 이 박사가 어떤 상황에 부닥쳐 있는지는 대강 인식했다. 그리고 낮은 책장 뒤 벽에서 반짝이는 기계가 오늘이 7월 15일임을 알렸다.

그런데 이건 내가 찾을 수 없는 수준으로 철저한 보안에 맡겨져야 하는 물건 아닌가? 왜 이리 허술하지?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시종일관 조용하거나 사람 웃음소리가 작게 들리던 바깥에서 뭔가 톡톡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혹시 몰라 수첩을 주머니에 숨겼지만 문이 벌컥 열리는 일은 없었다.

"박사님, 퇴근 안 하세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문을 열자 날 데리러 왔었던 그 남자가 어딘가 초췌하지만 맑게 웃고 있었다. 이제 머리를 굴릴 시간이다. 퇴근은 무슨 뜻일까. '안 하냐'고 물어보는 것을 보니 항상 이 시간쯤에 했던 모양이다.

"슬슬 해야지."

"아, 다행이에요. 오늘도 야근한다고 하실까 봐 걱정했거든요. 박사님이 집에 늦게 가시면 저도 빼도 박도 못하고 야근인데, 아무도 없는 연구소에 혼자 있으면 무섭다고요! 나흘 연속은 아무리 박사님이어도 좀 아니라고 생각하시긴 하나 보네요."

"…그냥 먼저 하지 그랬습니까."

"어떻게 그래요! 제가 박사님을 두고 가면! 우리 박사님은! 그대로 도시의 미아로 등극해서! 밤새 거리를 헤매실 텐데! 이 후배는 걱정이 돼서! 잠도 못 자고 밤을 꼬박 새워버릴지도 몰라요!"

남자는 극적으로 말을 쏟아내곤 눈썹을 늘어뜨리며 심장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이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집에 가지. 제발."

xXx

이상하게 생긴 말 없는 마차에 타고 후배라는 작자의 칭얼거림과 신세 한탄을 들어주며 집에 도착했다. 힘들다. 인류는 그간 이런 삶을 살아온 것인가.

…그리고 나는 왜 돌아가질 않는가.

이 정도면 뭔가 있다. 운명 이상의 존재가 개입했든, 말도 안 되는 우연이든 간에. 이쯤 되니 슬슬 오기가 치밀었다. 끝까지 차분하게 굴어주마. 마치 운명의 머리 꼭대기에서 모든 것을 예상했다는 듯. 실상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지만.

"겨울, 종종 드는 생각인데, 자네는 너무 독특해."

"어떤 의미에서 말입니까?"

"그냥, 여러모로. 조만간 큰 사고 한번 치겠어. 아차, 방금 그건 말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잊어라."

"그렇게 말씀하시면 더 잊기 힘들잖습니까…"

"걱정 말거라. 잊게 될 테니."

과연, 어찌나 운명다운 답변이었고, 어찌나 운명다운 결과가 나왔는지.

운명이시여, 제게 무엇을 바라는 것인지 알 길은 없사오나 결코 당신께서 바라시는 대로 행동하진 않겠나이다. 어느 정도는 예상하지 않으셨나이까? 아니, 진즉 알고 계셨겠지요.

소멸자로 돌아가 안락하기 짝이없는 생활을 계속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하지만 과거의 내가 울분에 휩싸여 하얗게 얼려버리려 작정했던 인간들의 후손을 보고 싶은 마음은 더더욱 없었다. 내 만일 신들의 영역으로 돌아가 운명에게 따질 기회가 주어진다면 운명은 가벼운 체험일 뿐이라며 개구지게 웃고는 넘어가려 하겠지만, 지금도 옛 벗의 얼굴이 아른거리는 판국에 체험이 웬 말인가!

당장이라도 신의 기억을 저장하는 곳으로 돌아가 벌어졌던 일들을 살펴보고 싶지만, 감정(憾情)스럽게도 나에겐 이제 방대한 양의 기록을 남길 권리 따위 없었다. 전지전능하던 신은 이기적인 인간 탓에 격분했고, 이기적인 인간 덕에 광폭한 역사를 멈출 수 있었다. 그 방대한 기록과 함께.

기록을 남겨주지 않는다면, 내가 남길 수밖에.

집 안에는 벽의 두 면에 책장이 올라선 방이 있었고, 그 사이에 자리 잡은 책상엔 십수 권의 공책이 있었다. 척 봐도 더럽고 너덜한 것들이 절반을 차지했다. 남은 것들의 절반은 비교적 최근에 쓰여서 그나마 모양새가 양호한 것. 그리고 나머지는 비어있거나 한두 장만 쓰였다. 깨끗한 공책 한 권을 꺼냈다.

그리고 이것이, 지금까지의 상황이자 기록이다. 만일 이전의 주인이 돌아와도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도록, 혹여 내가 무(無)로 돌아가지 못한다 하여도 미래에 약간의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며.

짧지만 정신없었던 일들을 모두 적고 나니 몸이 축 처지는 것만 같았다. 묘하게 무기력하고, 간단한 행동조차 제대로 해낼 자신이 없고…

"아니 박사님은 피곤하지도 않으세요? 막 몸이 처진다거나? 아무런 힘도 안 들어간다거나? 없어요? 진짜요? 세상에, 당신 사람 아니죠? …앗, 죄송합니다. 그렇게 쳐다보지 마세요!"

아, 이게 그 후배가 말했던 피곤이라는 감각인가. 조금은 우습게도 이 피로함이 발생하는 데엔 피곤의 개념에 대해 알려준 사람의 기여가 가장 큰 것 같다.

이 나약해 빠진 인간의 몸으로 버텨서 뭐하나. 푹신한 침대에 털썩 드러눕자 -오, 편하다. 굳어있던 허리가 펴지는 듯한 느낌- 잠이 몰려왔다. 눈가루가 되어 사라지기 직전과 비슷한 기분이었다. 그 까마득한 과거의 그날처럼.

"모두가 사라지는 게 정답이 아니었다고요!"

…아직 그대의 말이 통하길 바랄 수밖에 없겠군요.

카테고리
#2차창작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