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불멸자의 회고록

어느 불멸자의 회고록 - 1부 6화

그대의 신뢰

*잠뜰TV 스토리 콘텐츠들의 2차 창작물로, 공식과 무관합니다.

*흰 화면으로 보시는 것을 권장 드립니다.

*겨울 신화 × 이방인 크로스오버


1부 6화

그대의 신뢰


하나. 같은 얼굴, 비슷한 성격, 비슷한 시대.

둘. 운명이 선택한 영혼은 여러 번의 생을 거친다.

셋. 명계와 이승을 오가는 이들을 지켜보는 것.

넷. 그것이 불멸자의 숙명일지니.

알고 있는가? 새로 만난 사람의 얼굴이 과거의 연과 비슷하면 혼란이 오는 법이다.

정작 당사자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좋지 못했던 인연을 떠오르게 만드는 사람을 만나다니. …이름까지 똑같은 것이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다.

글쎄, 내게 큰 의미가 있는 구절은 아니지만.

시간은 흘러갔다.

내 직책 때문에 외부에 거의 노출이 되지 않다 보니 옛 인연을 닮은 자들을 다시 만날 일이 없었다. 그저 가끔 소식이 들어오면 태음신관이 알려주는 정도였다. 내 오랜 친우를 닮은 이는 궐 내의 최고 도사 자리에 올랐고, 그 천문관은 어쨌든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랬다고 생각했다. 유배 소식을 듣기 전까지는.

그 신분제 사회와 어울리지 않는 당돌한 말투에 언젠가는 위기가 찾아오리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큰 사건이 벌어질 줄은 몰랐다. 유배야 빈번하지만 천문학자를 유배 보내는 것은 그리 흔치만은 않은 일이니까.

신관을 통해 성주를 불러오라 일러두었다. 아마 시간이 걸릴 테니 지금부터 빠르게 머리를 굴려 그 천문관을 쫓아내선 안 될 합리적인 이유를 만들어내야 했다.

"성주님을 모셔 왔습니다."

그리고 생각보다 훨씬 일찍 도착했다. 왜 내 뜻대로 되는 일이 없는 걸까.

"들어오시지요."

성주가 조금은 당황한 모습으로 찾아왔다. 그도 그럴 것이, 누군가가 직접 찾아오면 찾아왔지 내가 먼저 데려오라 명한 적은 없었으니까.

"당황하셨군요."

"…예, 아무래도. 갑자기 절 찾으셔서."

"그다지 특별한 일은 아닙니다. 그저 유심히 지켜보던 이가 갑자기 사라졌다기에."

성주가 눈을 아래로 굴렸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고민하는 것이 분명했다.

"최근 천문관 하나를 유배 보내셨다 들었습니다."

"아, 네. 그자가 조금 큰 잘못을 해서."

"요즘 천문관의 역할로 궁궐에 들어오는 이들이 많이 줄었다는 것 알고 계시겠지요. 그 때문에 천문관들이 많이 바쁘다는 것 또한 말입니다."

지곤성의 성주가 조용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자가 도대체 무엇을 잘못했기에 적당히 끝내지 않고 유배까지 보내신 겝니까?"

"…일식을 잘못 계산했습니다."

"…정말, 큰 잘못을 했군요."

천문관이 일식 예보를 틀리다니. 중죄였다. 이러면 내가 잘 타일러서 다시 데려올 수도 없었다. 젊고 당당한 그 친구에겐 미안하지만, 당분간 공기 좋고 물 맑은 곳에서 요양을 하도록 내버려 두는 수 밖에 없겠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그 천문관은 제가 정성을 들여 지켜보던 이였습니다. 신관에게 따로 부탁해 소식을 전해 듣고 있었지요."

젊은 성주가 침음했다.

"선인께서 관심을 두던 자라 하여도, 천문관의 직책에 오른 자가 일식 날짜를 제대로 계산하지 못했으니. 다시 불러오긴 힘들 것 같습니다."

"당장 데려오라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그자는 비성편을 수호하는 데 필요한 존재입니다."

성주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만일 무슨 일이 생기거든 성주께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때 그 천문관을 데려오시면 되겠지요. 위급 상황이라는 곡절(曲折)로."

"선인께서는 곧 위급 상황이 찾아오리라고 확신하시는 겁니까?"

"…유감스럽게도. 머지않은 것 같습니다."

성주의 안색이 창백해지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저렇게 걱정하고 두려워해도 막상 닥치면 잘 해내겠지. 그것이 내가 여태껏 보아온 '봄'이자 '지곤성의 성주', 수현이었다.

"성주께서도 차분히 마음의 준비를 하시지요."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성주를 내보냈다.

위급 상황. 아마 그 상황이 닥치거든, 다들 우아하게 포장된 위급 상황이란 단어 대신 재앙이라 부르겠지. 그리고 다시 수백, 수천만의 인간들이 죽고… 또 일부만이 살아남아 재앙을 저지하려고 노력하리라. 몇 년이 걸리든 간에.

그 순간이 찾아왔을 때, 난 그들을 이끌어줄 수 있을까. 그들에게 더 나은 길을 알려줄 수 있을까. 과연 내가 더 나은 미래를 선물해줄 능력을 갖추고 있는가.

재앙을 잠재우고 난 뒤, 죽어버린 그 수많은 이들은. 그들은 어찌 되는가. 온 나라를 뒤덮을 슬픔과 통곡의 파도를 감당할 수 있는가.

절반은 쇠붙이에 피 흘리며 죽고, 절반은 절망에 서서히 익사할 것이다.

나는 그 틈에서 제정신을 유지해 다시 인류를 일으켜 세울 수 있는가. 총리처럼, 그 인간처럼. 인류의 역사를 재개할 수 있는가.

인간의 몸이 되었다고 마음마저도 인간처럼 변해가는 건지, 난 또 다시 사람들을 염려하고 있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구나…."

또 정이 들었어. 미련하게. 슬픔의 웃음이 소리 없이 새어 나왔다. 만일 태양 선인이라는 존재를 모르는 누군가가 그 초라한 모습을 보았거든, 그 순간을 '괴로운 자의 흐느낌'이라고 명명하였으리라.

책상에 놓인 부채를 만지작거렸다. 새하얀 절대적 존재가 다시 실수를 할 참이었다.

나의 업보를 만나야 할 시간이었다.

나는 옛 동료를 닮은 신관을 불렀다.

가장 풍요로운 계절의 신을.

"태양선인이시여, 부르셨습니까?"

"신관. 내 그대에게 묻고 싶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

.

.

가을은 참 상냥하고 냉혹한 계절이었다. 인간들은 늘 가을에게 감사했다. 한 해 동안 열심히 지은 농산물들을 수확해 가장 배불리 지낼 수 있는 시기였으니까. 다만 가을의 지배는 짧았다. 한 달 남짓한 기간의 여유를 주고는 가장 힘겨운 계절에게 자리를 넘기는 것이 가을이었다.

유난히 농사가 풍년이었고, 인간들이 '겨울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하던 때. 내가 수레바퀴의 자리를 조금 늦게 이어받으려 했던 때가 있었다.

"겨울. 당신이 이러면 안 됩니다."

가을의 표정은 아주 단호했다.

"어째서입니까? 가을은 인간들이 가장 살기 좋은 시기 아닙니까. 날씨를 염려할 이유도, 당장의 끼니를 걱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인간에게 평화로운 시기를 조금만 더 내어주면 인간들은 사계(四季)를 칭송할 텐데요."

"인간들이 가을에 농작물을 수확해서 풍요롭게 지낼 수 있는 건 제 덕이 아닙니다. 작물들이 익어갈 수 있도록 날씨를 이끌어주는 봄과 여름 덕분이지요."

봄은 씨앗을 뿌리기 가장 적절한 날을, 여름은 새싹이 자라나기 가장 적절한 날을 선물해줍니다. 가을은 신전 정원의 푸른 나뭇잎을 만지작거렸다. 이파리의 끝자락이 노랗게 물들었다.

"그러니 제 지배는 길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이 알맞은 때에 계절을 이어받아야 생명이 올바르게 순환하니까요."

그리고 그렇게 순환의 수레바퀴가 무사히 굴러갈 겁니다. 작은 것을 생각하는 마음에 커다란 것을 내버릴 수는 없습니다. 가을이 단호하게 말했다. 과도한 감정을 쏟는 것을 삼가라는, 나를 향한 경고이자 충고였다.

"겨울, 그대는 추운 시기가 사라지면 어찌 되는지 아십니까?"

"……."

"짧게 본다면 겨울의 말대로 인간들의 삶이 나아질 겁니다. 그러나 한 해가 지나고, 두 해가 지나면. 늘 따듯한 날씨가 이어지면. 인간들에게 해를 끼치는 동물의 덩치가 커지거나 수가 급격히 늘어납니다. 나약한 인간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겠지요."

가을은 인간을 생각했지만 사랑하지는 않았다. 그저 생명의 순환이라는 거대한 숲에 나뭇잎이 존재해야 하기에 인간들에게 최소한의 온정을 베푸는 것이었다.

"그것이 겨울의 존재 의의입니다. 생명이라는 저울에 올려진 추를 덜어내어 균형을 맞추는 것."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을의 말에 공감은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해는 할 수 있었으니까. 공명정대하고 냉정한 그 말에 공감하기엔 난 인간들을 어리석을 정도로 아꼈다.

…그런 가을은 대부분의 시간을 계절의 신전에 있는 작은 텃밭을 가꾸는 데 쓰고는 했다. 봄과 여름이 함께 꾸미는 정원만큼 크지는 않았지만, 나름 가을과 내게도 마음대로 꾸밀 수 있는 각자의 공간이 있었다.

가을의 공간은 늘 가장 화려한 색감을 자랑했다. 인간들이 땀방울 흘려가며 1년을 바쳐 키워내는 작물은 가을의 손끝에서 눈 깜짝할 사이 열매를 맺었고, 찰나의 순간에만 꺼내 입는 나무들의 옷은 가을의 눈길에 사시사철 붉고 노란 장경을 뽐내었다.

그 자그마한 공간을 가꿀 때면 가을은 늘 온화하게 웃는 표정을 지었다. 그곳은 가을의 일순(一瞬)이 영원이 되어 머무는 곳이었다.

난 봄과 여름의 정원보단 가을의 그 공간을 더 아꼈다. 정원은 너무 밝고 따스했으며, 내겐 낯선 생명들이 가득했다. 반면 적당히 차분하고 마른 듯한 그곳이 나에게 위안을 주었다.

그리고 내가 가을을 봉인하던 그날, 공간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붉은 나뭇잎은 모두 떨어지고, 열매 때문에 무거워진 고개를 푹 숙인 식물이 제 결실을 떨구고 썩어갔다.

지금쯤이면 다시 그 화려한 찰나에 멈춰 있을까.

.

.

.

나는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온 신관을 바라보았다. 책상에 놓인 부채를 말없이 만지작거리자, 어색함이 불편했던 신관이 손가락을 움직이면서 옷자락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은 초월자들의 존재를 믿습니까?"

신관이 고개를 들었다. 자기가 초월자면서 무슨 헛소리를 하냐는 눈빛을 날리며.

"나, 그러니까 태양선인을 넘어선 힘을 가진 자들 말입니다."

"아니요."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선인께선 태초에 팔성국이 탄생하던 그 순간을 아시겠지요. 여덟 명의 현인과 비성편을 말입니다. 대지가 피어나고, 인류가 문명을 쌓아가던 그 순간들 속에. 모든 것을 초월하였다고 불릴 존재는 오직 한 명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또 다른 초월자의 존재를 묻고 계시는군요."

신관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그리고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작은 열매를 가꾸는 모습을 구경하던 겨울을 발견한 가을의 눈빛과 닮아 있었다.

"아마, 당신이 존재한다 하시면 그 초월자는 존재하는 것이며, 없다고 말씀하신다면 없는 것이겠지요."

"태음신관. 당신이 날 과하게 믿는다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까?"

난 당신을 봉인했는데.

"그것이 저희의 의무인걸요. 유일한 초월자를 향한 무한한 믿음 말입니다."

"의무를 떠나서 말입니다. 생각해보면, 영원을 살아가는 내게. 당신은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 중 한 명에 불과하다고 볼 수도 있지 않습니까."

"방금 그 말씀을 함으로써 그렇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셨습니다."

…난 당신을 없애려 했는데. 이 순환의 수레바퀴를 멈추겠다는 명목하에 당신을 가장 먼저 봉인했는데. 영문도 모른 채 날 기다리는 당신을.

허나 가을, 그대는 어째서.

'겨울, 난 당신을 믿어요.'

내가 어찌나 완벽하게 그 믿음을 저버렸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붉은 계절에게 날카로운 얼음을 쏘아대는 잔혹한 창. 경악하는 봄과 여름. 그를 봉인하던 순간은 빌어먹게도 선명히 내 머리에 남아 있었다.

그 순간엔 이성이라 할 것은 닳아 없어졌었는데, 기억은 왜 아직도 또렷한가.

'어째서 그리 생각하십니까? 난 당신의 자리를 빼앗는 계절이니, 나를 원망하는 줄 알았는데요.'

'그렇기에 믿는 거죠.'

나의 시대의 끝을 받아들이고 물러난다는 것-,

"그것이 곧 제 믿음의 증거입니다, 선인이시여."

'그것이 곧 제 신뢰의 증거이지요, 겨울.'

신관의 모습에 붉은 계절이 겹쳐 보였다.

속이 울렁거렸다. 그대에게 너무도 미안해서. 그럼에도 너무도 고마워서.

"…그래, 그렇군요. 조금은 알겠습니다."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바다 너머에 있을 아무 고대 신전에 들어가 이 겨울이 살아있으니 당장 없애달라고 외칠까. 내 의무를 잊은 체하고 싶을 정도로 괴로웠다. 그만큼 신관의 말이 내게 죄책감을 안겨주었다. 내가 한 짓이 잘못되었음을 알았고 또 후회했으나 그동안의 후회는 이것과는 달랐다.

나는 살아있어야 한다. 그것이 총리와 약조이자 나의 의무였다. 나는 살아서 인간들의 문명과 평화를 지키고, 미래를 예측해 그들의 자멸을 막아야 했다. 미래를 보기는커녕 과거에서 허우적대는 내겐 너무 버거운 일이었다.

운명이시여. 어찌 내게 이리도 가혹하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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