星返

저 별은 언제쯤 내게 돌아와줄지

*[밤을 보는 눈]의 2차 창작물로, 공식과 무관합니다.

*퇴고 X.


멍청한 놈.

나 하나 살리겠다고 자기가 그 바다에 뛰어들어?

새해에 사고 1주일 만에 버림받았던 일기장을 다시 꺼내 들었다. 평소였다면 보람을 느낄 만한 일이었겠나, 정작 난 누군가의 뒷담화를 꾹꾹 눌러 적고 있었다. 몇 줄을 달달 쓰고도 분이 풀리지 않아 펜을 집어던지고는 책상 위에 훅 엎드렸다. 팔에 막힌 목소리가 먹먹하게 흘러나왔다. 진짜, 재수 없어.

갈 것이라면 흔적이라도 남기고 가 줄 것이지, 미련한 그 부엉이는 아무것도 두고 가지 않았다. 하다못해 늘 빛을 내던 깃털 하나조차.

우울할 땐 디저트인데, 그걸 사러 갈 정도의 기력도 없고, 시간도 늦었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같이 있던 수호령 할배도 없고. 대체 나한테 남은 게 뭐야?

어두워진 시간을 빌미 삼아 일기장을 집어던졌다. 바로 침대 위에 풀썩 누웠건만 잠은 찾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눈만 감으면 떠오르는 그 익숙한 모습 탓에 오히려 잘된 일이라 믿었다.

그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달빛을 받아 반짝거리던 별 모양 머리 끈의 모순이란. 내 미래를 살리기 위해서라는 목표만을 바라보고는 본인과의 우정이 나의 가장 큰 축이라는 것은 예상하지 못하는 그 어리석음이란.

따듯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자는 생각에 침대에 누운 지 채 5분도 지나지 않아 몸을 벌떡 일으켰다. 본래의 계획과 달리 냉수를 벌컥 들이키고 식탁 위에 컵을 내려치듯 놓았다.

알 수 없게도, 이런 내 모습에서 몇 년 전 어른들이 술에 잔뜩 취해 인생을 논하며 삶이 쓰다고 술주정을 부리던 모습이 떠올랐다. 분명 그게 뭔 말도 안 되는 말이냐며 속으로 욕을 해댔었는데. 

"정말, 삶이 쓰네."

내가 말하면서도 어이가 없었다. 부엉이가 보면 또 고작 그 나이에 무슨 소리냐고 틱틱거리겠지. 그러면서도 또 걱정을-.

또, 다시, 그 애를.

한숨이 저절로 푹 새어 나왔다. 나도 참 미련하지. 술 대신 새벽 감성에 취해서는 청승맞게 인생이나 논하고 있고.

이 넓은 집이 이렇게 쓸쓸하게 느껴지던 때가 있었나? 아니, 그런 순간이 올 것이라 단 한 번이라도 생각해본 적이 있던가?

잔을 손가락으로 대충 밀어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궁상은 그만 떨고 잠이나 자야지. 내일부턴 새로운 디저트 맛집부터 찾아보자고.

눈 한 구석에 들어온 광경은 나를 잠시 멈칫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분명 저 사진 찍을 때 부엉이도 내 머리 위에 있었지. 저 때부터 사진이 싫다고 했었던가. 위로 삐죽 올라간 나의 시선과 앞으로 내민 목이 머리 위에 무언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나처럼 누군가를 잃어서 그런 걸까.

금빛 새장이 오늘따라 유독 쓸쓸해 보였다.

그 부엉이가 담기지 못한 사진, 그가 함께한 흔적, 그가 숨 쉬던 공간. 아직 지워지지 못한 지난날의 찬란했던 추억은 미소는커녕 슬픔만 불러왔다.

모든 곳에 네가 있는데, 정작 너는 없구나.

잠뜰은 방에 들어가 밤을 꼬박 새웠다. 일기장의 한 페이지를 과거의 친구와 우정을 향한 기쁨과 원망, 설움으로 가득 채우며.

xXx

덕개는 현관문 앞에서 눈치를 봤다. 최근 나타난 모든 일들은 해광 시에 큰 혼란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며칠째 활동을 중단한 대표 퇴마사가 그 카오스의 중심에 서 있었다는 이야기는 순식간에 해광 시 전역에 퍼져나갔다. 그리고 '그 퇴마사'와 친밀한 사이라 여겨지던 덕개는 등쌀에 떠밀려 어느새 사무실 문 앞에 있었다.

"그, 잠뜰 님? 안에 계세요?"

"여기서 뭐 하나?"

"악! 흐악!"

덕개는 갑자기 뒤에서 툭 하고 나타난 수호령의 목소리를 듣고 기겁했다. 내 심장, 내 심장…. 그는 갈비뼈를 부여잡고 한참 앓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저번에 만났던 거북이 맞으시죠?"

수호령은 눈이 커다랗게 떴다.

"거북이라니! 난 해광을 지키는 수호령이란 말이다!"

거북이 모양이긴 하지만, 아무튼 그렇다. 그는 조금은 자신감이 떨어진 목소리로 덧붙였다. 한동안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이를 견딜 수 없게 될 무렵, 덕개는 다급하게 주제를 찾아 헤맸다.

"잠뜰 님 만나러 오셨어요?"

"그래, 한동안 밖에도 나오질 않더구나. 지난 일 이후 해광 시를 떠도는 야괴들은 줄었지만, 퇴마사가 사라지니 시 전체가 혼란에 빠지더군."

깊게 한숨을 내쉰 그는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홀로 괴로워하는 사람이로구나."

"네?"

"네 우상 말이다. 막을 수 없었던 재앙을 자신 탓에 벌어진 인재라고 믿고 있어."

그 아이도 가엾지. 그 어린 나이에 이 고생을 했으니. 몇 백, 몇 천년의 세월을 보내온 수호령은 씁쓸히 고개를 저을 수 밖에 없었다.

"널 여기까지 밀어 넣은 친구 녀석들에게 전하거라. 해광 시 최고의 퇴마사에겐 그저 시간이 필요할 뿐이며, 금방 돌아와서 이전처럼 화려하게 빛날 테니 걱정은 말라고."

덕개는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갔다. 자신이 반쯤 타의에 의해 찾아온 것을 어찌 알았느냐는 질문은 나중으로 미뤄 두었다. 지금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보게, 잠뜰. 문 좀 열거라. 하고픈 말이 있으니."

문을 두드려도 응답이 없었다. 그 강아지 닮은 녀석이 계속 뻘쭘하게 서 있었던 이유가 이거였나. 하지만 그는 그저 멈춰 서 있을 수 없었다.

"직접 열어줄 생각 없다면 내 알아서 열고 들어가도록 하지."

반협박에도 문이 열리지 않자 그는 억지로 들어갔다. 거실 테이블 위에 잠뜰이 엎어져 있었다. 수호령이 무단침입하든 말든 신경조차 쓰지 않는 모양새였다. TV에선 뉴스가 시끄럽게 떠들어대고 있었다. 아직도 며칠 전 이야기였다. 그새 과장과 허풍이 들어간 기자의 말은 소설이 따로 없을 지경이었다. 이를 보다 못한 라더는 TV의 전원을 껐다.

"바깥세상에 소문이 창궐했더구나."

응답 없음.

"'해광 시 최고의 퇴마사'가 은퇴를 결심했다고."

응답 없음. 그는 딱한 표정을 갈무리했다.

"글쎄, 산책 한 번 하는 것은 어떠냐? 시간도 늦어서 사람은 없을 테니."

체감상 3초 뒤, 잿빛 시선이 느릿느릿 움직였다.

"이제야 여길 보는구나. 밤 산책 어떤가?"

잠뜰이 비척비척 방으로 들어갔다. 수락인지 거절인지, 그러자는 말인지 당장 꺼지라는 말인지 알 길이 없었다.

3분, 5분, 10분. 잠뜰이 문을 열고 나왔다. 외출복 차림이었다.

"수락이로군. 바다로 가지."

잠뜰이 눈에 띄게 움찔거렸다.

"글쎄, 약간의 이야기가 어려운가?"

잠뜰은 고개를 숙였다. 이전이었다면 분명 진즉 말을 쏟아내었을 텐데, 아직 한 음절조차 발음하지 않고 있었다.

"부탁이네. 하고픈 말이 있어."

잠뜰은 고분고분 움직였다. 해광 시의 수호령이 타인에게 이렇게까지 말해본 적이 없음을 퇴마사 또한 인지하고 있었으리라.

라더는 조각난 문 잠금장치를 발견한 잠뜰의 따가운 시선을 열심히 무시했다.

xXx

차가운 파도가 모래를 휩쓸었다. 모래사장에 남겨진 두 사람의 발자국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바다 특유의 짜고 비린 향이 폐 속이 가득 찼다.

"모든 일이 네 잘못인 것처럼 느껴지느냐?"

잠뜰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수호령은 숨을 크게 내뱉었다.

"글쎄, 그건 그 녀석의 선택이었다. 너를 진정 아끼기에 제 목숨 대신 살아달라 부탁한 거지. 이미 육체라는 겉껍데기 없이 불완전한 영혼만 남은 자신 대신 네가 더 살아달라고."

수호령은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그 역시도 부엉이를 딱하게 생각해왔다. 진정 지켜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참혹히 저 차가운 바다에 무너진 자. 진정 아껴줄 자를 바라보지 못하고 기꺼이 자신의 몸을 내던진 자.

"이 말이 잔혹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만, 살아있는 자는 살아가야 하는 법이지. 과거를 붙잡는다 한들 바뀌는 것은 없더구나."

둘은 한참 동안 바다를 바라보았다. 파도치는 물결과 바닷속에 침몰한 저 아름다운 별들을 응시하며, 침묵의 가치를 느끼며. 스르르 흐트러지는 옷자락의 감각을 선연히 느끼며.

"너를 두 번 살렸구나. 자신의 삶을 망가뜨리면서까지. 부엉이 녀석, 미련하기 짝이 없지."

잠뜰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력한 동의였다.

"그 자식, 정말 멍청하더라고요. 다른 방법이 있었을 텐데 굳이."

"그러게나 말이다."

수호령은 지그시 미소 지었다. 그가 이토록 어른스럽게 보인 적이 있었던가? 잠뜰은 그 질문에 아니라고 답할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밤바다에 은하수처럼 펼쳐진 별이 누군가를 떠오르게 만들었다. 그 시트린을 닮은 눈, 노란 별 머리 끈을.

잠뜰은 다짐했다.

더 이상 다가오는 파도를 두려워하지 않겠노라고.

자신을 살려준, 바다에 침몰한 저 별을 위해서라도.

"그 녀석 또한 너를 그리워하고 있을 게다. 어떤 방식으로든 너에게 찾아오려 하고 있겠지."

잠뜰은 별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걔는,"

수호령은 잠뜰도, 바다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공허한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저 멀리서 다가오는 작은 빛을.

"저게 뭐…?"

저 바다 수평선 너머에서 작은 나룻배가 다가왔다. 점점 빠르게, 한 승객을 싣고.

승객의 정체를 파악한 잠뜰의 눈이 커다랗게 변했다.

"저 자식이…!"

눈물이 나왔다.

좀 더 빨리 올 것이지, 하는 원망스러운 마음도 들었다.

"세 왕모께서 자비를 베풀었구나. 축하한다."

멍청한 놈.

조금만 더 빨리 돌아와 줬어야지.

기쁨의 감정(憾情)이 흘러나왔다.


*星返 - 별 星, 돌이킬 返. 별이 돌아오다.

*憾情 - 원망하거나 성내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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