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어느 왕국의 이야기

하얗게 물들어 잊혀진 이름들에게 | 체스 술래잡기

레부 책갈피 by 레부
13
0
0

흑색 발걸음이 백색 계단을 밟았다. 흑색 퀸의 검은 머리칼이 그가 계단을 밟을 때마다 부드럽게 흔들렸다. 그의 호박색 눈은, 오직 단 한 사람을 찾고 있는 듯 집요한 빛을 띠었다. 그는 지금 백색 킹을 찾고 있었다. 왕국에서 지내던 이들을, 언젠가부터 내다 버릴 장기말 정도로만 여기는 왕을 죽이러 가고 있던 것이다. 스러져가는 왕국을 과거의 행복했던 그 때로 되돌리기 위해서, 한때 하얗던 그의 검도 검게 물들여버렸다. 

계단 위에서 누군가 내려온 것은 그때였다. 무적의 요새라 불리며 킹을 절대적으로 보호하는 룩, 공룡이었다.

"오셨습니까."

"비켜라. 너한테 볼일 없다. 내 목표는 오직 왕 하나다."

"비킬 수 없습니다."

"지금 나한테 개죽음 당하지 말고 도망치라고 말하고 있잖느냐."

"알고 있습니다."

각별의 검은 눈썹이 찌푸려졌다. 룩인 공룡과 퀸인 자신의 능력을 비교해보면 누가 우위인진 뻔하였다. 자신에겐 조금 시간 끄는 정도일 테지만, 공룡은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그런데도 공룡은 고집스럽게 자신의 앞을 막고 있었다.

"폰도, 비숍도, 나이트도 모두 내 앞을 막다 죽었다."

"그랬습니까."

"너희의 능력으로는 날 막을 수 없다."

"그건 두고 보면 알겠지요."

"너희의 왕은 날 막다 죽어간 너희를 기억조차 해주지 않을 것이다."

각별의 마지막 말에 공룡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한 손을 들어 올렸을 뿐이었다. 눈 깜짝할 새에 서른 개의 방패가 둥글게 돌며 공룡을 에워쌌다. 마력이 깃든 나무지팡이를 손에 쥐며, 공룡은 각별을 바라보았다.

"공격하지 않으실 거면, 제가 먼저 가겠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 군, 각별은 한숨을 쉬었다. 공룡의 눈빛은 검게 가라앉아 있었다. 제 한 목숨을 불살라 주군을 지키겠다는 그런 부류의 눈빛이 아니었다. 수많은 전우가 왕을 지키기 위해 죽었지만, 그런데도 그들의 왕이 저들을 장기말 취급밖에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눈빛이었다. 그래, 그것은 충심에 대한 체념이자 제 목숨에 대한 포기였다. 처음에 이 왕궁에 들어올 땐 저런 눈빛이 아니었을 텐데, 그런 무의미한 생각을 짧게 하곤, 각별은 흑색 검을 들어 올렸다.

접전은 길지 않았다. 계단에 부서진 방패의 파편들이 나뒹굴었다. 바스러진 백색 조각들을 밟으며 각별은 계단을 올랐다. 이 위에 잠뜰이 있을 것이리라.


"끝났군."

시간 종료를 알리는 소리와 함께, 백색 기둥 뒤에서 누군가 느릿하게 걸어 나왔다. 머리 위에 눈보다 하얀 왕관을 쓰고 있는 백색 킹, 잠뜰이었다. 승자의 미소를 지으며, 잠뜰은 여유로운 말투로 각별에게 말했다.

"추악한 반역자, 너의 패배다."

"하하, 내가 추악하다고?"

각별은 크게 웃으며 잠뜰을 돌아보았다. 비웃음이 한껏 담긴 표정이었다.

"고귀한 왕이여, 네 주변을 한 번 보아라. 부리던 수족을 전부 잃고 혼자 서 있는 네 모습이, 홀로 검게 물든 나와 무엇이 다를까. 이 왕궁에서 진정으로 추악하게 물든 건, 겉으로만 눈부시게 하얀 너 아니더냐."

"내가 곧 왕이며 국가다. 나를 지키다 사라진 것은 그들에게도 영광인 것을, 어찌 왕의 목숨을 그깟 신하들과 비교하는가. 그들을 대체할 것들은 차고도 넘쳤다."

"어느 나라의 왕이 백성들을 고기 방패로 여긴단 말이냐. 너 같은 것도 왕이라며 충성을 바치다 죽은 자들이 안타깝구나."

각별은 흑색 검을 던져버렸다. 모든 게 끝났다. 다시는 이전의 화목했던, 서로를 이름으로 부르며 지냈던 그때의 왕국으로 돌아갈 순 없을 것이다. 계단에서 만난 룩이 생각났다. 그 룩은 저가 가지고 있는 것이 잘못된 충심이란 걸 알고 있었을 거다. 하지만 그 충심을 따르지 않으면, 충성을 부르짖으며 먼저 간 전우들의 죽음을 무의미하게 만들기에, 억지로 자신의 앞을 막아섰을 것이다. 그 자의 심정을, 앞의 왕은 이해나 했을까. 아니 그 전에, 자신을 막다 스러진 이들의 이름을 기억이나 할까.

잠뜰은, 조용히 검을 빼 들었다. 상아로 조각한 것 같이 하얀 검의 끝은 날카로운 빛을 내었다.

"그래, 유언은 그게 끝이구나."

검이 움직였다. 하얀 섬광과 함께, 홀로 검은색이었던 퀸은 체스판 바깥으로 떨어졌다. 판 위에 남은 것은 오직 홀로 승리한 백색 킹 하나였다. 하얀 왕국에서 일어난 검은 파란은, 누구의 이름도 기억되지 않은 채 그렇게 막을 내렸다.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Non-CP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