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하는 너희에게
2인 1조 합작 | 청춘, 쉼표, 여행
Special thanks to 파트너 그림러 하양(@__White1_)님
"기사님, 저희 여기서 내려요!"
눈 덮인 산 아래에 시골 마을버스 한 대가 멈췄다. 오래된 차의 문이 열리고 다섯 명의 아이들이 버스에서 내렸다. 저마다 한껏 기대에 부푼 듯 큼지막한 가방을 하나씩 손에 든 채였다. 시골 버스가 떠나며 내뿜은 매연으로 잠시 모두 콜록거리다, 숨을 고른 후 눈 덮인 길을 따라 아이들이 걸었다. 하얀 눈길 위로 기대 가득한 아이들의 발자국이 여럿 찍혔다.
"야, 나 버스에서 멀미한 거 같아…."
"참아라. 토하면 버리고 갈 거야."
"아 각별 진짜 매정해…."
"이럴 줄 알았으면 버스 말고 수현 쌤 자동차 타고 오는 건데."
"어디 들렀다 오신다 하셨잖아. 그리고 어차피 그 낡은 차에 우리 다섯 명 다 못 타."
"그나저나 이 근처 인 거 같은데 어디지?"
"어, 야 저거 아니야?"
연갈색 머리칼의 소년이 가리킨 곳에는 작은 나무 펜션이 하나 있었다. 눈 덮인 나무들로 둘러싸인 2층 펜션을 보자마자 아이들은 버스를 타고 왔던 피로를 날려버렸다.
"펜션 좋아 보이는데? 누가 예약했냐? 잠뜰이었나?"
"드디어 믿냐? 내가 좋을 거라 했잖아!"
"야, 졸업 여행 얘기 꺼낸 건 나다? 나 아니었으면 이런 펜션 올 생각도 못 했잖아."
"공룡 멀미했다더니 펜션 보고선 바로 살아나네. 그냥 꾀병이었구먼. 역시 버리고 올걸."
"누가 졸업여행에 각별도 데려오자고 했냐."
"반 애들이 다섯 명인데 하나 안 데려오는 것도 웃기지 않냐."
"어 근데 우리 바베큐 각별이 사온다 하지 않았어?"
"각별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오늘 공룡 몫 바베큐 먹을 사람 선착순 한 명 받습니다."
"아, 그럼 내가 먹을래."
"야 라더, 이러기야?!"
"졸업 여행 날도 싸우냐? 그만하고 일단 짐부터 놓고 오자."
잠뜰의 말을 시작으로 아이들은 펜션으로 들어가 각자 방에 짐을 풀었다. 거실에 TV도 있다며 신기해하던 것도 잠시, 아이들은 바로 밖으로 나왔다. 사방이 눈으로 뒤덮인 마당을 보고, 졸업을 앞둔 혈기 왕성한 고등학생들이 그냥 방에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이들은 눈밭으로 달려 나왔다. 공룡이 가장 먼저 눈덩이를 뭉쳐 라더에게 냅다 던졌다.
"야 이…!"
"선빵 필승이다!"
그게 시작이었다. 아이들은 저마다 눈덩이를 뭉쳐 서로에게 던졌다. 장갑이 젖고, 귀가 빨개질 때까지 아이들은 달리고 눈을 던졌다. 한참을 그렇게 놀다 지쳤는지 아이들은 마당에 아무렇게나 누워 잠시 숨을 골랐다. 차갑지만 신선한 겨울 공기가 한가득 들어왔다.
"...좋다, 이런 거."
잠뜰이 가만히 웃으며 한 말에, 아이들은 모두 침묵으로 긍정했다.
열아홉과 스물 사이, 졸업을 앞둔 고등학교 삼 학년의 아이들. 지난 1년 동안 바쁜 수험 생활로 인해 놀기는커녕 마음 놓고 쉬어본 적도 없었다. 그렇게 숨 가쁘게 달려오고, 드디어 수험 생활이 끝났다. 누구는 만족하는 대학에 합격했고, 누구는 한 번 더 자신의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해 재수를 선택했고, 또 누구는 대학이 아닌 곳에서 자신의 꿈을 찾았다. 그렇게 전교생이 5명이 전부였던 작은 학교에서 1년을 같이 했던 아이들은, 이제 모두 자신의 길을 찾아 다른 곳으로 나아가야 했다.
'여행?'
'응, 우리 원하는 만큼 놀아본 적이 없잖아. 졸업하면 얼굴 보기도 힘들어질 테니, 마지막으로 다 같이 놀러 가자!'
그런 상황에서 마지막 추억이라도 만들자며 공룡이 여행을 제안했다.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내심 다들 이렇게 자신들의 학교생활이, 자신들의 십 대가 끝나는 것을 아쉬워했을 테니 말이다.
"야, 눈사람 만들래?"
회상에 잠겨 있던 잠뜰을 깨운 건 눈사람 만들자는 덕개의 목소리였다. 언제 지쳤냐는 듯 아이들이 다시 벌떡 일어나 눈덩이를 굴렸다.
"눈 되게 잘 뭉쳐진다."
"간밤에 눈 많이 왔다 했잖아."
"그러게, 도로 미끄러우니 조심하셔야 할… 공룡, 눈사람에 뭘 달고 있는 거야."
"토끼 귀! 수현쌤 닮은 눈사람 만들 거야."
"오, 괜찮은데? 수현쌤 오기 전에 만들어두자."
"하나도 안 닮았는데 보면 화내시는 거 아니냐?"
"초 치는 소리하지 말고 빨리 눈을 날라라 각별."
다시 아이들이 마당을 왔다 갔다 하며, 길고 힘든 수험생활을 함께 달려온 자신들의 담임선생님을 닮은 눈사람을 만들었다. 대학에 합격했을 때 누구보다 함께 기뻐해 주고, 재수한다는 결정에 긴 인생에서 겨우 일 년일 뿐이니 늦었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응원해준 자신들의 담임 선생님이었다. 그래서 졸업 여행을 갈 때 선생님도 함께 가자고 하는 말에 모두 당연하다며 동의했다. 그런 기억들을 생각하며 하얀 눈사람을 다 만들어갈 때쯤이었다.
"어, 야 쌤 오신다!"
"뭐? 아직 덜 만들었는데!"
멀리서 아이들의 선생님인 수현이 그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아이들을 보자마자 수현은 반갑다는 듯 두 팔을 들어 올려 흔들었다.
"쌤, 왜 이렇게 늦으셨어요!"
"하하, 미안. 눈이 많이 와서 차가 밀려서 그랬어. 뭐 하고 있었니?"
"눈사람 만들고 있었습니다."
"수현 쌤 닮게 만들어 봤어요!"
"귀는 제가 만들었어요! 어때요?"
"음…."
수현은 아이들이 만든 눈사람을 한참을 바라보더니, 슬쩍 눈을 피하면서 말을 이었다.
"...공룡이 안의 현대 예술세계를 이해하기엔 선생님이 아직 많이 부족한가 봐."
"그 말인즉슨,"
"너 완전 못 만들었대."
"쌤 너무해요!"
"하하, 그래도 날 닮은 눈사람 만들어주려 했다니 기쁜걸?"
"결국 닮진 않았다는 말이잖아요."
"각별아? 그렇게 일일이 말해주지 않아도 된단다."
수현이 가볍게 각별의 머리를 한 대 치면서, 여섯 명의 웃음소리가 그 겨울 마당을 가득 채웠다. 라더가 이왕 만든 거 아까우니 사진 찍어두자며, 방에서 자신의 폴라로이드 사진기를 가지고 나왔다.
"선생님이 찍어줄 테니 다들 눈사람 주변에 서보렴."
"예? 쌤을 왜 빼고 찍어요!"
"이거 타이머 기능 있어서 누가 안 찍어줘도 돼요. 그러니 쌤도 같이 서세요."
"맞아요, 다 같이 여행 온 건데 누구 하나 빼고 어떻게 찍어요?"
아이들은 웃으며 수현더러 얼른 이쪽으로 오라며 웃었다. 수현은 잠시 머뭇거리다니, 이내 못 말린다며 가볍게 웃고는 아이들 곁에 다가가 섰다. 라더가 사진기에 타이머를 설정하고 달려왔다. 그리고, 찰칵. 카메라의 셔터 소리가 들리면서 사진 한 장이 나왔다.
"엥 뭐야, 안 보이잖아."
"당연하지 멍청아, 폴라로이드 사진은 조금 있어야 보인다고."
"사진은 나중에 보고, 슬슬 배고프지 않냐? 바베큐 파티하자!"
"그럼 이만 들어갈까?"
겨울 해는 짧다. 눈에서 놀다 보니 벌써 서쪽 하늘은 노을의 붉은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배가 고프다며 아이들이 펜션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수현은 그런 아이들을 보며 가만히 웃으며 천천히 뒤따라갔다.
"잘 먹겠습니다!"
식탁에 앉은 아이들의 식사 전의 가장 행복한 목소리가 들렸다. 수현은 저마다 큰 고기를 잘라 먹는 아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다행히 각별에게 사정사정한 공룡도 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
"수현 쌤, 진짜 안 드시게요?"
"오기 전에 교장 선생님이랑 단둘이 식사하고 왔더니 체해서 못 먹겠어."
"와, 그건 좀 체할 만했다."
"휴일에 불러내는 상사라니 진짜 너무하네요."
"그렇지? 정말, 선생님 이해해주는 건 너희밖에 없다."
과장하여 우는 시늉을 하는 수현을 보며 아이들이 다시 한바탕 웃었다. 식사하며 아이들은 많은 이야기를 했다. 가령 공룡의 졸업사진이 이상하게 나왔다는 이야기나, 각별이 수능 끝나자마자 운동장에서 책을 불태워버린 이야기나, 야자 시간에 감독하던 수현까지 다 함께 라면을 끓여 먹은 이야기 말이다. 그런 소소한 이야기들을 말하고 엮으며 그들의 1년을 추억하고 있을 때였다. 덕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쌤, 그런데 저희 졸업하면 학교 폐교될 거란 거, 진짜예요?"
식탁에 잠시간 정적이 감돌았다. 하지만 아주 잠시였을 뿐이다. 전교생이 자신들 다섯 명이 전부인 학교였기에, 꽤 오래전부터 나왔던 이야기라 새삼스러울 건 없었다.
"응, 아까 교장 선생님 만나고 온 것도 그것 때문이야. 폐교 후에 선생님들이 어떻게 할지 물어보고 계신다더라고."
"뭐, 우리 입학할 때부터 나왔던 이야기잖아? 오히려 우리 졸업할 때까지 운영된 게 기적이라던데."
"그래도 좀 아쉽긴 하다. 졸업하고 나서 학교 공부하러 오는 게 아니라 놀러 오는 거 해보고 싶었는데."
"아주 놀 생각 밖에 없지 넌."
"당연하지. 학생의 본분이란 노는 것이다."
"그럼 선생님은 내년에 어떻게 하세요? 옆마을 학교로 가시는 건가?"
"아니, 이 학교가 선생님의 마지막 근무지란다. 이젠 그만둘 거야."
네? 아이들이 모두 놀란 눈으로 수현을 쳐다보았다.
"왜요? 쌤 저희가 첫 학생들이라 하지 않으셨어요? 은퇴할 나이는 아니시잖아요."
"개인 사정이 있어서 그래. 너희가 내 처음이자 마지막 학생들이 되겠네."
"아쉽다...스승의 날에 쌤이 일하시는 학교로 놀러 가고 싶었는데."
"그럼 저희 스승의 날에 쌤 어디로 보러 가야 해요?"
"어?"
수현은 놀랐다는 듯 눈을 조금 크게 떴다. 그러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아이들에게 물었다.
"너희, 나 보러 오려 했니?"
"당연하죠! 쌤은 저희의 마지막 선생님인걸요?"
"내년은 재수하느라 힘들겠지만, 그 다음연도엔 당연히 찾아가려 했는걸요."
"아 그러네, 그럼 내년은 스승의 날 말고 다른 날에 쌤 만나러 가야겠다. 언제가 좋을까?"
"그냥 내년 오늘은 어때? 수험 끝났을 때잖아."
"아, 좋다 좋다! 쌤 괜찮으시죠?"
수현은 잠시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밝게 내년에 만날 날을 생각하는 아이들의 기쁜 웃음소리를 귀에 담았다.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던 수현은, 싱긋 웃었다.
"그래, 좋아. 장소는 학교로 할까?"
"네? 내년에 폐교된다면서요."
"바로 철거되지는 않을 거야. 듣자하니 마을 회관으로 쓰자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더라. 성인이 된 너희의 마지막 학창시절이 있던 곳에서 만나는 게 더 좋지 않겠니?"
아이들은 수현의 말에 좋은 생각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공룡이 컵을 높이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럼 내년 오늘 날짜에 학교 운동장에서 만나는 거다!"
"공룡 넌 지각이나 하지 마!"
시끌벅적한 웃음소리와 함께 그들은 또 하나의 약속을 잡았다. 내년엔 운동장에서 캠핑하는 게 어떠냐는 농담도 함께, 그들의 저녁 식사가 마무리되었다. 설거지와 뒷정리를 마치고, 수현이 잠시 방으로 쉬러 들어간 사이 잠뜰이 고구마 두 봉지를 가져왔다. 이걸 위해 캠프파이어장이 있는 펜션을 골랐다며 의기양양하게 말하는 건 덤이었다.
"야, 캠프파이어 세 명 정도만 준비해도 충분할 것 같지 않냐?"
"그러네, 두 명 쉬는 거 몰아주기 할래?"
"안 내면 진 거, 가위 바위 보!"
각별의 제안에 공룡이 틈을 주지 않고 바로 큰 소리로 외쳤다. 갑자기 시작된 가위 바위 보의 승자는 공룡과 덕개였다. 기쁨의 환호성을 내지르는 덕개를 향해 잠뜰이 고구마 봉지를 주며 말했다.
"덕개, 너는 부엌에서 고구마 씻고 있어."
"뭐? 왜!"
"아까 밥 반 정도 태워 먹은 사람이 누구더라?"
"씻어오겠습니다."
"하하, 멍청한 자식들! 잘 준비하고 있어라!"
"공룡 저 자식 몫 고구마에 고추냉이 뿌려놓자."
"좋은 생각이야. 내 가방에 있을 거야 찾아올게."
"야 너무한 거 아니냐!"
노는 자에게 멀쩡한 고구마는 없다고 말하며, 잠뜰이 각별과 라더와 함께 캠프파이어를 준비하러 밖으로 나갔다. 덕개는 고구마 씻는데 심심하다며 거실의 TV를 켜고 소리를 키운 후 부엌으로 들어갔다.
공룡은 가위 바위 보 승리로 얻어낸 휴식을 즐기기 위해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엔 테라스로 통하는 커다란 문이 있었다. 조금 힘을 주니 오래된 나무의 이음새 소리가 나며 문이 열렸다. 테라스 안으로 들어온 공룡은, 차가운 겨울 공기에 잠깐 몸을 떨고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별 많다~!"
겨울 밤하늘을 가득 채운 작은 별빛들이 반짝였다. 차가운 공기와 산속에서 바라보는 밤하늘이 여행 온 소년의 마음을 들뜨게 한다. 이번엔 고개를 내려 캠프파이어장을 보았다. 세 명이 부지런히, 정확히는 게으름 피우려는 각별을 독촉하는 잠뜰과 라더가, 캠프파이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키득대며 공룡이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여기서 뭐 하니?"
"아, 쌤!"
"바람이 차네. 방 차가워지면 안 되니 문 닫아야겠다."
수현이 웃으며 테라스 안으로 들어왔다. 수현의 말에 공룡이 문을 닫아, 테라스 안이 잠시 오래된 나무 문의 삐걱거리는 소리로 채워졌다.
"캠프파이어 준비하는 사람 정하는 가위 바위 보에서 이겼거든요. 그래서 승자의 휴식을 만끽하고 있었죠."
"하하, 땡땡이치고 있었구나?"
"에이 쌤, 뭘 들으신 거예요? 정정당당한 승부였다니깐요?"
그래, 그래. 수현이 웃으며 공룡 옆으로 다가와 함께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덕개가 나와 잠뜰에게 고구마 다 씻었다고 말하는 것이 보였다. 이제 좀 쉬어보려나 하는 덕개에게 잠뜰이 얌전히 다시 들어가서 호일로 싸놓으라고 하는 모습에 공룡과 수현이 웃었다.
"쌤, 애들은 참 대단한 것 같아요."
공룡이 하얀 입김과 함께 말을 내뱉었다. 밤이라 그랬을까, 목소리가 조금 가라앉은 느낌이었다. 수현은 공룡을 바라보았다. 웃고 있지만 미묘하게 어긋난 표정이었다.
"...무슨 일 있었니?"
"하하, 너무 사소한 거라 얘기하기 민망한데…."
"사소하단 이야기가 괜찮다는 건 아니잖니."
그 말에 공룡은, 조금 표정이 변한 것 같았다. 이내 고개를 숙여버려, 수현은 공룡의 표정을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단지 그가 이야기할 준비가 될 때까지 조용히 기다려 줄 뿐이었다. 하얀 입김이 공기 중에 나왔다 사라지기를 몇 번 반복할 만큼 시간이 흘렀다.
"실은요 요즘, 대학 안 가겠다고 한 거… 잘못한 선택 같아서요."
수현은 자신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공룡을 보며, 잠시 과거의 기억을 꺼내보았다. 공룡은 수능을 앞두고 몇 달 전, 자신에게 와서 대학을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야기를 들었을 당시 수현은 적잖이 놀랐었다. 공룡의 성적은 꽤 좋은 편이었기에 나름 상위권 대학도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꿈이 생겼다고 말하는 공룡의 눈이 확고한 빛으로 반짝였기에, 수현은 그의 선택을 지지해주었다. 유튜브를 준비하고 있다며 자기 채널을 보여주던 공룡의 목소리는 한껏 들떠있었다.
"쌤도 아시다시피, 제 꿈을 위해서 대학을 안 가겠다고 했잖아요. 남들과는 조금 다른 길이라 부모님도 반대하셨었지만, 전 괜찮았어요. 잘할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요즘 보면 좀 자신이 없어요. 생각한 것처럼 일이 잘되지도 않고요."
"…"
"잠뜰이랑 덕개는 대학 간다 했고, 라더는 원하는 곳 가기 위해서 재수한다고 하고, 각별은 프로그래밍 쪽으로 이미 취업해서 돈 벌고 있잖아요. 다들 뭔가 나아가고 있는 것 같은데, 저만 머물고 있는 게 아닐까 싶어서요."
공룡의 입가에서 생기는 입김의 양이 한층 더 많아졌다. 아이들을 내려다보며 공룡이 말을 이었다.
"어렸을 땐 어른 되면 뭐든 잘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이제 이 졸업여행 끝나고 다음 주에 졸업식 하면 저도 이제 학생이 아니라 그냥 성인인데,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제가 꿈을 선택한다고 생각하고선 그냥 제 편한 대로 도망친 게 아닐까 걱정돼요."
수험이 끝나고, 내내 자신에게 던졌던 고민이다. 꿈이라 생각했는데, 그냥 수험생활에서 도망친 게 아닐까. 이 꿈이 정말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이 맞을까. 그런 고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다른 이들 앞에선 밝게 웃으며 고민을 가렸지만, 그렇게 가려진 고민은 해결되지 않고 그곳에 머물러 응어리졌다. 이게 과연 맞는 선택이었을까, 그렇게 고민만 깊어가고 있었다.
"공룡아, 네가 처음 내게 대학을 가지 않겠다고 말했을 때 생각나니?"
그 응어리진 고민들을, 수현이 따뜻하게 어루만져주었다.
"그때 날 찾아온 너는 수험생활이 힘들어서 도망치듯 다른 길을 선택한 학생이 아니었단다. 선생님은 아직도 그때 네가 보여준 유튜브 채널을, 그걸 보여줄 때의 너의 밝은 표정을 기억해. 그렇기 때문에 대학을 가지 않겠다는 네 선택을 기꺼이 응원해준 거야. 그날 내가 본 너의 모습을, 너는 거짓이라고 생각하니? 너는 내가 학생을 그 정도로 밖에 파악하지 못하는 무능한 선생님이라고 생각하니?"
"네?? 무슨 소리세요, 쌤! 당연히 쌤은 우리를 가장 잘 아시는 분인걸요! 제가 쌤을 얼마나 믿는데요!"
"하하, 그렇지? 그러니 너도 날 믿는 만큼, 내가 믿고 있는 너 자신도 믿어주렴."
수현의 말에, 공룡은 잠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수현은 단지 따뜻하게 웃음 지으며 자신의 학생의 얼굴을 마주 보아주었다.
"공룡아, 너는 이제 막 네 삶의 10대 끝에 쉼표를 찍고, 20대로 넘어가고 있어."
겨울밤의 시간이 천천히 그들을 지나가고 있었다. 차갑지만 아름다운 그 밤으로 수현의 말이 부드럽게 울렸다.
"10대에서 모든 게 결정되기에는 우리는 너무나도 긴 인생을 살고 있단다. 적어도 백 년은 더 이어질 긴 인생의 여행길에서, 너는 이제 막 그 첫 발걸음을 뗐을 뿐이란다. 실수하고, 흔들리고, 실패하는 날이 앞으로도 더 많을 거야. 하지만 그것들이 네 인생이 실패했다는 뜻이 아니란다. 그건 누구나 겪는 거고, 아주 당연한 것들이야. 그 실수들과 흔들리는 나날들이 있기에 너는 더 성장할 수 있는 거고, 더 먼 여행길을 걸을 수 있는 거란다."
아래에서 웃는 소리가 들려 수현은 잠시 캠프파이어장의 아이들을 내려다보았다. 드디어 다 완성했다며 환하게 웃는 아이들이 보였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별처럼 반짝인다고 생각한 아이들이었다. 그 아이들과 공룡을 향해 미소 지으며, 수현이 말을 이었다.
"잘못된 선택은 없어. 잘못된 곳에 발을 들여놓았다 생각했지만, 넌 그저 네 인생의 긴 여행길을 밟고 있을 뿐이야. 뛰어보고, 넘어져 보고, 충분히 흔들려보렴. 그 길에서 배우는 게 많을 거야. 어떤 선택을 하던, 너희가 선택한 여행길은 분명 아주 아름다울 거란다."
공룡은 수현을 마주 보지 못했다. 단지 밤하늘로 얼굴을 돌려, 소매로 눈가를 거칠게 비빌 뿐이었다. 항상 이랬다. 수험 생활 때, 지쳐서 그만두고 싶을 때, 수현은 항상 이런 식으로 반 아이들을 따뜻하게 감싸주었다. 힘들어하는 자신들의 등을 받쳐주어, 그런 날이면 실컷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울면서 힘든 걸 다 흘려보내고, 다음날 다시 열심히 달렸다. 그렇게 1년을 보내왔다.
"선생님은 언제나 여기서 너희를 응원하고 있을 거란다. 그것만 잊지 말아 주렴."
이제 그 1년이 끝났다. 우리는 모두 다른 방향으로, 우리만의 길을 찾아 떠날 것이다. 그 1년의 기억을 작은 교실에 두고, 먼 여행길을 떠난다. 하지만 이젠 두렵지 않을 것이다. 그 작은 교실에 있던 당신이 우리를 믿어 주었고, 지금도 믿어주고 있으니까.
"하하, 쌤 낯간지럽네요. 이만 내려갈까요?"
응어리진 고민을 풀어버린 공룡이, 부끄러워 차마 고맙다는 말은 못하고 이만 내려가자며 수현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대로 표정을 굳혔다.
"....쌤?"
시야가 머무른 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테라스에 있는 사람은 공룡 한 사람뿐이었다. 차가운 바람만이 잠시 그의 곁을 머무르다 겨울밤으로 흩어졌다.
공룡은 두어 번 눈을 깜빡이며 선생님이 있었던, 아니 있었다고 믿었던 곳을 바라보기만 했다. 먼저 내려가신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테라스와 방 사이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문이 열릴 때 나던 낡은 나무의 이음새 소리도 들리지 않았었다.
차가운 겨울 밤 속에서 단지 멍하니 서 있었을 때, 순간 어떤 생각이 공룡의 머리를 스쳤다. 절대 믿고 싶지도, 받아들이고 싶지도 않은 생각이었기에, 공룡은 머리를 흔들며 그 생각을 바깥으로 내보내려 하였다.
그렇지만 감쪽같이 사라진 선생님의 모습이,
차를 타고 왔다 했는데 마당에 주차하지도 않고 걸어오던 선생님이,
식사를 하지 않겠다는 그의 말이,
내년부터 선생님 일을 그만둔다는 그 말들이,
하나둘씩, 공룡의 머릿속으로 밀려 들어왔다.
그 기억들을 연결하니, 조금 전에 든 생각이 맞다는 단 하나의 절망적인 결론을 보여주었다.
"…말도 안 돼."
문을 열고, 달렸다. 확인해야 했다. 제발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해내야만 했다.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두 세 개씩 밟느라 넘어질 뻔 할 정도로 위태로웠다. 내려갈수록 감정이 가장 밑바닥으로 침전했다. 호흡이 빨라지는 것이 불안함이 아니라 뛰어서 그런 것일 거라 애써 믿었다.
'아닐 거야, 아니야.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럴 리가…!'
계단을 헛디뎌 공룡이 큰 소리를 내며 넘어졌다. 고구마를 가지러 부엌에 왔던 4명의 아이들이 큰소리에 놀라 다가왔다.
"공룡, 괜찮아? 그러게 왜 계단에서 뛰…"
"사진!"
"뭐?"
"쌤이랑 같이 찍은 사진!! 그거 어딨어?!"
"아마 거실 탁자 위에…야 뛰지 마!"
거실로 뛰어갔다. 넘어진 곳의 통증을 느낄 틈도 없었다. 끝없는 어둠에 밀려들어 가는 것 같았다. 부엌에서 거실로 이동하는 그 짧은 시간이 아주 길게 느껴졌다. 아니라고 속으로 되뇌기를 수백 번, 마침내 공룡은 뛰는 것을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숨을 골랐다.
탁자 위에 폴라로이드 사진이 한 장 놓여있다. 떨리는 손으로, 공룡은 사진을 집었다.
"…"
사진을 본 공룡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잠뜰이 의아해하며 다가왔다.
"대체 뭔데 그런…."
공룡의 손에서 사진을 낚아챈 잠뜰의 표정이 굳어졌다. 다른 아이들이 다가와 무슨 일이냐며 물었을 때, 잠뜰은 아무 말 없이 사진을 보여주었다. 사진을 본 아이들의 표정이 모두 어두운 낯빛이 되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사진을 바라보기를 한참, 마침내 각별이 모두가 애써 부정하던 사실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왜, 선생님이 안 찍혀있지?"
사진은 눈사람을 만들고 환하게 웃는 다섯 명의 아이들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오직 그 다섯 사람의 모습만을, 담고 있었다. 눈사람을 만들 때 생각하던 그들의 담임 선생님의 모습은 담겨 있지 않았다.
각별의 물음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덕개가 켜둔 TV에서 나온 뉴스 소리만이 거실을 채울 뿐이었다.
'오늘 낮, 폭설로 인한 눈길에 차량이 전복되어 황 모 씨가 숨졌습니다. 황 모 씨는 다음 주에 졸업식이 있는 모 고등학교의 선생님으로 밝혀져 시민들의 안타까움이 더해지고 있습니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사신님."
"신경 쓰지 말게. 마지막 추억도 못 만들게 할 만큼 인정 없는 자는 아니니까."
별빛이 흐드러진 겨울밤 아래, 수현이 누군가와 함께 서 있었다. 그의 몸은 아까와는 다르게 흐릿한 색채를 띠었다. 살아 있는 자의 색채가 아니었다.
"살아있을 때의 몸처럼 느껴지는 영체를 만들어 주었었는데, 마지막 여행은 잘 즐겼는가?"
"네, 사신님 덕분입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사신이 아니라 죽음이라니깐… 되었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짙은 갈색 머리의 소년이 눈밭으로 뛰쳐나왔다. 눈을 밟으며 달리길 몇 번, 이내 그는 미끄러져 넘어졌다. 넘어진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오열했다. 뒤따라 나온 아이들 중 더러는 공룡의 어깨를 잡고 그를 따라 울었고, 더러는 비통한 침묵을 삼켰다. 죽음은 그런 아이들을 바라보다 수현에게 질문을 던졌다.
"처음으로 맡은 학생들이라 했나?"
"네, 그랬습니다."
"첫 선생일이 고3 담임이라니, 꽤 힘들었겠군."
"하하, 아주 편했다 라고 말할 순 없겠지만, 그래도 나쁘진 않았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은, 십여 년간 학생으로 살아왔었던 아이들이 이제 자신들의 십 대의 마지막에 쉼표를 찍고, 성인으로 넘어가는 시기이지 않습니까. 그런 아이들의 청춘 중 한 장면을 제가 장식해줄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그래, 후회는 없었다. 그 작은 교실에서 웃고 울며 함께 했던 시간을, 수현은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의 처음이자 마지막 제자들과 이렇게 마지막 여행을 함께하고 떠날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단지 졸업식에 함께 참여할 수 없으리란 것이, 조금 아쉬울 뿐이었다.
"그럼, 이만 가봐야겠지요?"
수현이 죽음을 돌아보며 말했다.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이 거의 다해가고 있었다. 수현이 죽음을 따라가려 할 때였다.
"선생님!!"
눈 덮인 마당에서 저를 부르는 공룡의 소리가 들렸다. 시선이 저를 향하고 있지 않았기에 수현이 보이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마 들리리라 생각하고 외치는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전해질지도 모른다는 만에 하나라는 그 가능성에, 공룡은 목놓아 외쳤다.
"저희, 잊지 않을 거예요! 선생님이 가르쳐주신 것들, 위로해주신 말들! 함께 웃었던 기억들 전부, 잊지 않을 거니까! 그러니까!"
흐르는 눈물이 별빛을 담고 눈 위로 떨어졌다.
"내년 오늘에, 우리가 함께했던 그 학교에서! 꼭 다시 만나요!"
그리운 이를 부르는 그 외침이, 겨울밤을 가득 메웠다. 자신의 학생이 부르는 그 말에 수현의 눈이 커져, 밝은 별빛들을 가득 담았다. 눈물을 흘리는 아이들은 그저 그렇게 외쳤다. 닿을지도 모르지만 부디 닿기를 바라며, 이별을 준비하던 그들에게 조금 먼저 찾아온 이별의 끝을 붙잡고, 차가운 겨울로 외쳤다. 멍하니 아이들을 바라보던 수현은, 이내 웃으며 죽음을 돌아보았다.
"제 학생들, 정말 사랑스럽지 않나요?"
죽음은 말없이 웃었다. 쏟아지는 별빛이 이제 그만 떠나야 할 시간이란 것을 알려주었다. 그에게 주어진 마지막 시간도 이제 저물었다. 수현은 죽음이 안내하는 대로 그를 따라가다, 마지막으로 한 번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언제나처럼 따뜻하게 웃어주고는, 그 마지막 모습을 눈에 담았다. 부디 이 마음이 전해지기를 바라며, 그는 조용히 입술을 달싹였다.
이제 소년의 시기를 벗어나 더 넓은 세상을 향해 긴 여행을 떠날 내 아이들아.
졸업을, 축하한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