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은 기적이 아니다

1. 그런 걸 믿었던 때도 있었지.

마법은 기적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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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 하늘 높이 뜬 깊은 밤이었다. 그날의 달은 평소보다도 더 밝고 아름다워서, 밤하늘을 올려다본 사람들로 하여금 낭만적인 감정에 빠져들게 하였다. 별빛의 힘을 다루는 마법사의 이야기도 가볍게 믿을 수 있을 것 같은 날이었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밤을 즐기지 못하고, 밤하늘보다도 어두운 단칸방에 홀로 있는 사람이 있었다.

잠뜰은 딱딱한 바닥에 아무렇게나 앉아 있었다. 의자나 침대에 앉을 정신도 없었다. 자신의 집에 들어온 순간 그대로 무너지듯 앉았다.

‘전부…끝나버렸어….’

고된 하루였다. 병원비와 생활비를 한 번에 충당할 수 있는 60억이라는 거액의 상금이 걸린 게임에 참가하였다가, 겨우 끝내고 돌아온 길이었다. 끝냈다기보다는 어떻게든 살아 돌아왔다는 표현이 정확했다. 가상 세계 안에서 죽으면 진짜로 죽는 정신 나간 게임에, 거기에 살인을 즐기는 더 정신 나간 사람까지 있는 곳이었으니까.

잠뜰은 자신의 옷 호주머니를 뒤적여보았다. 자신이 늘 먹는 약통이 들어있었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면, 그 약통의 안이 텅 비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애초에 자신의 병에 효과가 별로 없던 약이긴 했으나 그 약 말고는 쓸 수 있는 약도 없어 늘 사던 약이었는데, 이제는 그 약값을 낼 돈도 없었다. 실버 소프트가 제안한 막대한 상금이 걸린 서바이벌 게임이 잠뜰의 마지막 기회였으나, 상금은 보기 좋게 웬 마법사 흉내 내는 사람이 가져가 버렸다.

나는 너희를 집으로 돌려보내 줄 마법사니까!’

“마법사는 무슨, 진짜로 본 적도 없을 거면서.”

그래, 어릴 때부터 먹어온 약 가짓수가 몇 개인데.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상금이 있다 하더라도 치료제가 없는 이상 어차피 마지막 날을 조금 미룰 뿐이었다. 그러니 상황은 크게 달라질 것은 없었다. 약이 없어진 지금, 그저 언젠가는 왔을 마지막을 더는 미룰 수 없게 되었을 뿐이었다. 그저 그런 것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오히려 현재의 시간에서의 현실감이 사라진다. 주마등이라고 해야 할까? 지금 당장 죽는 것은 아니지만, 괜히 어린 시절 기억이 떠올랐다. 게임에서 본 마법사나, 집에 오는 길에 지나친 시민들이 오늘 밤하늘이 마법같이 아름답다고 하는 말을 들은 것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잠뜰은 어린 시절, 진짜 마법사와 알고 지낸 사이였으니까.

마법이란 무엇일까?

인간이 오직 상상만으로 닿을 수 있는 것들을 마법이라 부를 것이다. 예를 들면, 손끝에서 불꽃이 피어오른다거나, 마른하늘에 눈을 내릴 수 있게 하는 것 등. 마법의 시대가 사라지고 기술의 시대가 되면서, 마법의 이름을 잊어버리게 된 이들에게, 마법은 상상만 한다면 전부 이루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기적의 단어였다.

소녀가 마법을 처음 만나게 된 것은, 여섯 살의 나이에 또래의 소년을 만났을 때였다. 마법의 시대가 저물고 기술이 그 자리를 대신해가는 시대에, 소년은 천진한 눈을 빛내며 소녀에게 다가왔다.

소년의 마법은 대단했다. 소년 본인은 마력이 부족하여 스크롤이 있어야만 마법을 쓸 수 있고 그마저도 보잘 것 없는 마법이라고 말하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마법을 아는 이들의 시선이었고 소녀는 마법 세계 바깥의 사람이었다. 알 수 없는 신비로운 세계의 일부를 자신도 안다는 점이, 소년과 거대한 비밀을 공유하게 된 것 같아 재미있었다. 기술의 시대를 이끌어가는 가문에서 자란 소녀에겐, 소년이 보여주는 것이 전부 처음이고 신기한 것들뿐이라, 소녀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자신은 마법을 온전히 알게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마법이란 무엇일까? 소녀는 그때까지만 하여도 마법이란 기적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였다. 시시한 일에 쓰일 뿐이라고 하겠으나, 어린 나이의 아이들에겐 조금 높이 뛰어오를 수 있는 마법조차도 기적이다. 상상 이상의 것을 보고 느끼며 매일이 즐겁던 나날들은, 그 마법에 기적이란 이름을 쉽게 붙이면서도 그 무게는 체감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기적이었다면, 마법은 기적이라는 단어로만 불렸지 마법이라는 단어로 새로이 이름 붙여질 이유가 없었다.

소녀가 그것을 깨달은 것은, 나이를 조금씩 먹은 소녀가 더 이상 소녀가 아니라 어른이 되었을 때였다.


마법은 기적이 아니다

1. 그런 걸 믿었던 때도 있었지


“넌 늘 머리 그렇게 묶는 것 같네.”

“응? 왜, 이상해?”

기억은 일곱 살 나이, 하나뿐인 친구와 언덕에서 뛰어놀던 그날을 비춘다. 소녀와 또래인 소년은, 소녀의 리본이 묶인 뒷머리를 가리켰다. 반 묶은 머리를 큼지막한 리본으로 묶은 모양이었다. 이상하냐는 소녀의 반문에 소년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잘 어울려. 하녀들이 묶어주는 거야?”

“아니, 우리 집사장님이 묶어주는 거야.”

“그 우락부락한 아저씨? 이런 손재주도 있고 의외네. 근데 좀 흐트러졌다.”

“어, 진짜?” 

소녀는 서둘러 시냇가에 자신의 얼굴을 비쳐 보았다. 뒤에까지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앞모습만 봐도 많이 흐트러진 게 보였다. 어쩐지 머리카락이 내려와 묘하게 시야를 가린다 싶었다. 소녀는 손으로 머리카락을 몇 번 만져보았지만, 뒤에까지 손이 안 닿아 그냥 손을 내려놓았다. 그 모습을 보고 쿡쿡 웃던 소년이 물었다.

“내가 다시 묶어줄까?”

“됐어, 넌 손재주 꽝이잖아.”

“대신 다른 재주가 있지.”

소녀는 무슨 소릴 하는 거냐며 큰 눈으로 소년을 바라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소년은 소녀의 눈을 마주 보며 두 손을 모아 손뼉을 한 번 쳤다. 그러자 소년의 검은 눈동자에 초록빛이 일렁거렸다. 그와 동시에, 소녀의 머리카락이 순간 가벼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머리카락은 보이지 않는 손이 있는 것처럼 위로 부웅 떠오르더니 공중에서 척척 움직이며 묶였다. 곧 소녀의 반묶은 머리 모양이 아침에 집사장이 묶어준 그대로 완벽하게 복원되었다.

“와, 와! 이거 뭐야? 어떻게 한 거야?” 

“후후, 천재 공룡님 실력이 이 정도지. 손재주는 없어도 마법으로 머리카락 움직이는 건 쉽다고.”

“너 전에 머리 묶어본 적 있어?”

“아니, 하지만 난 천재니까 평소 네 머리 형태만 보고도 어떻게 묶는지 알 수 있지.”

“...재수 없어. 다신 너한테 머리 묶어달라 안 할 거야.”

“아 왜!”

소년과 소녀는 어린 시절 서로밖에 없는 친구였다. 서로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것은 서로였고, 둘 사이에 숨기고 있는 비밀 같은 건 없다고 생각했다.

“아가씨, 돌아가실 시간입니다.”

“…응. 나 가볼게.”

“그래, 내일 봐. 기다리고 있을게.”

하지만 사실 소녀에겐 비밀이 하나 있었다.

“잠뜰아, 왔니? 몸은 괜찮고?”

“네 아빠. 문제없어요.”

“그래, 그래. 다행이구나. 의사 선생님은 오셔서 기다리고 계셔. 지난번이랑 똑같이 하면 돼, 알았지 우리 딸?”

“네, 아빠.”

“그럼 아가씨, 이쪽으로…”

소녀는 병을 앓고 있었다. 고작 일곱 살 어린 나이에 만난 의사가 몇 명인지 셀 수 없을 만큼, 큰 병이었다. 어린 나이엔 증상이 거의 없어 문제 되지 않지만, 열 살이 넘는 순간부터 서서히 몸에 문제가 생겨 결국엔 서른을 넘기면 걷지도 못한 만큼 몸이 망가지는 병이었다. 그것조차도 희망적인 사항이었고, 사람에 따라 심하면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모를 노릇이었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병이었는데다 잘 알려지지도 않은 희귀병이었다. 알려져있는 유일한 정보는. 어릴 때 그나마 치료를 해둬야 조금이라도 오래 살 수 있다는 것 뿐. 그래서 소녀의 아버지는 소녀가 어릴 때부터 백방으로 아이를 낫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다녔다. 아무리 비싼 약이라도 상자 채로 사들이고, 유능한 의사가 있다면 바다를 건너서라도 직접 데리고 왔다. 마음 같아서는 다치지 않게 바깥출입도 자제하라고 하고 싶지만, 아직 뛰어노는 것을 좋아하는 어린아이인데다, 언제까지 바깥출입이 가능할지 몰라 그는 딸아이가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돌아다니게 하였다.

아이가 어릴 때는 이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본인을 유능한 의사라고 칭하는 이들을 매일 만나는 것이 귀찮긴 하고 새로운 치료법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돌아다니는 것이 품이 많이 들긴 하였으나 문제가 되진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비싼 치료비를 턱턱 낼 수 있을 정도로 재정이 괜찮았을 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잠뜰 너 오늘은 머리 그냥 풀고 왔네?”

“으, 응? 아, 응. 요즘 집사장님이 바빠서, 나도 까먹었네.”

아이들은 자란다. 열 살도 안되었던 아이들에게도 시간은 똑같이 흘러서, 둘 모두 십 대 중반의 나이가 되었다. 그리고 불행히도, 잠뜰의 사정은 더 나빠졌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던가, 잠뜰 가문의 가세가 조금씩 기울기 시작하였다.

시대가 변하면서 잠뜰 가문의 사업이 조금 줄어들었다. 사실 다른 사업장이라면 그렇게 크게 문제가 될 수준은 아니었다. 사업하다 보면 적자가 생기는 일도 있으나 축적해두었던 자본으로 다시 재정비해서 시간을 들여 확장하면 되는 일이었다. 문제는, 잠뜰의 가문은 그 정도의 자금도 시간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십 년의 시간 동안 잠뜰의 건강은 빠르게 나빠졌다. 멀쩡하게 들판을 뛰어놀던 아이는 열 살이 넘자마자 마치 누군가 놀리기라도 하듯 건강상태가 급격히 나빠졌다. 어린 시절 귀하다는 약은 모두 먹고 좋다는 치료는 전부 해보았으나, 그것이 큰 변화를 불러일으키진 못했던 듯싶다. 그나마 다행이라는 점은 병의 진행이 조금은 늦춰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단지 그것뿐, 완치는 아니었다.

집안 사람들은 점점 더 멀리까지 출장 나가는 일이 많아졌다. 잠뜰의 부모님은 배를 더욱 자주 타게 되었고, 집사장조차도 잠뜰에게 쓸 수 있는 약을 찾고자 집을 비우는 일이 잦아졌다. 끝까지 남아있는 것은 잠뜰의 안전을 지켜야 하는 경호원 덕개뿐이었다.

건강이 나빠짐에 따라 잠뜰이 외출할 수 있는 시간 역시 점점 줄어들었다. 컨디션이 좋은 날을 고르고 골라 공룡과 약속을 잡았다. 소중한 친구에겐 자신의 병을 설명해줄 수는 없었다. 나을 가능성이 있기라도 한 병이라면 몰라도, 시한부나 다름없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지 않았다. 가족이 아닌 이들에게까지 약하게 보이고 싶지 않다는 자존심이었다.

공룡은 잠뜰과 만나는 시간이 줄어드는 것에 처음엔 섭섭함을 표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불평하지 않게 되었다. 잠뜰이 설명해주지 않아도, 그녀의 상태가 이전과 달라져 가고 있다는 것을 어느정도 눈치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만나는 곳은 신나게 뛰놀던 들판에서 앉아서 쉴 수 있는 카페로 바뀌어갔다. 그는 구태여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저 언젠가 잠뜰이 설명해주기를 기다리며 웃으며 잠뜰을 맞아주었다. 정말 심각한 일이었다면 말해주었겠지, 아마 그런 안일한 생각도 했을 것이었다.

“푼 머리도 잘 어울리긴 하는데…”

공룡은 오른손가락을 튕겼다. 그의 눈이 녹색으로 일렁였다. 길게 늘어져 있던 잠뜰의 머리카락이 공중에서 움직이더니 반으로 묶인 모양이 되었다. 공룡은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나 잠뜰에게 다가오더니, 목에 감고 있던 스카프를 풀어 잠뜰의 머리에 리본모양으로 묶어주었다.

“좋아하는 머리였잖아. 다음엔 리본도 갖고 와, 마법하는 친구 뒀다 뭐하니?”

“…”

마법…. 잠뜰은 그 단어를 입안으로 굴려보았다. 공룡은 잠뜰의 빈 잔에 차를 따라주곤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향긋한 향이 퍼져 나갔다. 너무 진하지 않지만,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 흔들 수 있는 향이었다.

“마법으로 병도 치료할 수 있어?”

그날은, 상당히 지쳐있던 날이었다. 연이은 치료, 어릴 때에도 먹어봤던 온갖 약. 그것들을 몇 년이나 반복해왔지만 좋아지기는커녕 나빠지기만 하였다. 이 덕분에 병이 느리게 진행되는 거라 하더라도 결국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은 무척 두려웠다. 몇백 개의 약을 구해와도 고작 조금 느리게 하는 것에 그친다는 것을 깨달을 때마다 계속 지쳐져 왔었다. 그렇게 지친 상태에서 오늘은 컨디션이 좋은 날도 아니었다. 본래라면 외출이 불가한 컨디션이었겠으나 몇 주 만에 상태가 그나마 안정되었고, 공룡을 못 본 지도 오래라 억지로 나온 날이었다.

다시 말해, 생각을 정리해서 말할 정도로 정신이 멀쩡한 날이 아니었다.

“옛날 이야기 보면 많이 나오잖아, 나이 많은 마법사가 마을에 들러서 병 고쳐주고 갔다 그런 거. 상상만 할 수 있는 일을 해내는 게 마법이잖아. 네가 보여준 마법만 해도 누구도 할 수 없는 일뿐이잖아. 너도 손끝에서 불도 피울 수 있고, 하늘도 날 수 있고… 그래, 지금도 봐. 이렇게 내 머리도 손 안 대고 묶을 수 있잖아! 그러니까, 병도 치료할 수 있는 거 아냐? 치료 마법 같은 것도 있을 거 아냐! 의사들이 못 고치는 병도, 마법으로는 낫게 할 수 있지?”

“잠뜰아 잠깐만, 천천히 말해. 진정해.”

공룡의 말에 정신이 돌아왔다. 자신이 공룡의 팔을 붙잡고 말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잠뜰은 서둘러 팔을 놓으며 변명할 거리를 찾았다. 갑자기 치료 마법을 저렇게 찾으니 누가 봐도 수상해 보였다.

“그냥,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필요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응, 알아. 걱정 마.”

공룡은 안심하라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눈치 못 챈 것인지 그냥 넘어가 주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잠뜰은 그 순간만큼은 그가 이 이상 묻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공룡의 답은 고민의 시간도 없이 바로 나왔다. 마치 이미 알아보기라도 한 것처럼.

“네 말대로 치료마법도 있긴 한데, 전문적으로 다루는 가문은 소수야. 우리 가문은 치료 쪽으론 잘 모르고… 해봤자 물리적으로 다친 걸 치료하는 정도. 애초에 치료마법은 전장에서 긴급하게 다친 경우를 치료하는 것 위주로 발달해왔거든. 질병 같은 복잡한 걸 치료하는 마법도 있긴 한데, 과거라면 몰라도 요즘은 의사들이 더 잘 알 거야. 그리고…”

“그리고…?”

“…기본적으로 치료마법은, 네 머리 모양을 이전에 정해놨던 모양대로 돌려놓는 것처럼… 원래 상태로 복구하는 것을 바탕으로 하거든. 그래서…”

다음 문장을 내뱉기까지에는 조금 더 시간이 걸렸다. 공룡은 단어를 입 밖으로 내보낼지 말지 고민하는 듯 한참을 망설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선천적인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마법은, 거의 없다고 봐도 돼.”

그 문장이, 어떠한 선고처럼 느껴졌다.

잠뜰은 이성적인 사람이다. 마법을 알고 있다고 한들 본인은 기술의 시대를 이끌어가는 가문의 외동딸이었고, 그렇기에 마법을 알지만 거기에 모든 걸 의지할 정도로 낭만을 품고 살진 못했다. 그랬던 그녀가 돌연 마법을 꺼낸 것은, 그저 잠뜰이 그 정도로 지쳐있다는 뜻이었다. 잠뜰 본인은 아마 그녀가 마법에 그렇게 기대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매 순간 이성적일 수는 없는 법이다. 몸이 지쳐있는 때라면 더더욱.

“…왜? 마법은, 사람이 상상하는 걸 다 이루어주는 거 아니었어? 기적인 것처럼 굴어두고, 왜…”

동화에서나 볼법한 기적을 바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그러한 것은 없다는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문장이 답으로 돌아왔다. 평소라면 타격 없었을 문장, 평소라면 오히려 그런 것에 기댈 리 없다고 웃어 보였을 문장.

그저 그날은, 그들의 ‘평소’가 아니었을 뿐이었다.

“미안, 내가 무슨 말을…나, 나 먼저 가볼게.”

“…응, 다음번 연락 기다릴게.”

마법이 정말 기적이었다면, 기적 말고 마법이라는 단어 자체가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문장을 잠뜰은 그날, 도망치듯 나온 그 자리에서 처음으로 깨달았다.

사람은 모든 순간 강할 수 없다. 하필이면 공룡과 이 이야기를 나눈 순간이 잠뜰의 약한 순간이었다. 오랫동안 지쳐있던 몸이 마음도 지치게 만들어 버렸다. 자신의 상태가, 어릴 때 잠깐 가지고 놀던 마법에 의지해야할 만큼 가망이 없어 보여서. 침대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요 몇 주간의 생활이, 자신의 남은 평생이라 생각하면 숨이 턱 막힐 것만 같아서. 이보다 더 나빠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서, 하고 싶지 않아도 죽음이라는 단어를 계속 떠올리게 되어서. 친구와 가족과 헤어지고 싶지 않아서. 그 모든 이별에 대한 두려움이 잠뜰을 약하게 만들었다.


이별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먼저 찾아왔다.

좋은 의사의 소식을 들었다며 아버지께서 배에 오르셨다. 운 좋게 근처에 우리 가문 사업과 협업하고 싶다는 회사도 있다고 하여, 동시에 일을 처리하기 위해 어머니도 함께 배에 올랐다.

그리고 그 배가 풍랑에 가라앉았다.

시신은 당연히 찾지 못했다. 급하게 출발하느라 평소보다 작은 배를 탄 탓이었을까. 구명정도 전부 부서질 정도로 심한 풍랑이었다고 하였다.

“….”

빈 관 두 개를 앞에 두고 잠뜰은 멍하니 앉아있었다. 검은색 드레스가 커다란 꽃처럼 둥글게 퍼졌다. 겹겹의 부드러운 천으로 만든 섬세한 드레스는 아이러니하게도 무척 아름다웠다. 방 안은 드레스 천이 스치는 소리조차 들릴 만큼 고요했지만, 잠뜰이 미동도 하지 않은 터라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잠뜰은 제 앞에 놓인 관을 바라보았다. 아니, 바라보았다는 표현은 너무 관대하였다. 바라본다는 것은 무언가를 눈에 담을 정신이 있을 때나 쓰는 표현이었으니 말이다.

빈 관은 붙잡고 울지도 못했다. 육신도 영혼도 담겨있지 않은 관을 두고, 그저 빈자리만 느껴지는 그 차갑고 딱딱한 상자를 앞에 두고 볼 수밖에 없었다.

“잠뜰아.”

잠뜰은 등 뒤에 들린 목소리에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누구인지는 알았다.

몸이 약한 자신 대신 장례식은 집사장이 주도하여 이루어졌다. 장례식에 참석한 손님들은 지금 모두 회랑에 모여 인사하고 있을 시간이었고, 사용인들도 모두 손님맞이를 위해 그쪽으로 갔다. 평범한 손님도 사용인도 아닌 사람은 하나밖에, 그래. 너밖에 없었다.

“마법으로…죽은 사람은, 당연히 못 살리지?”

“….”

공룡은 안타까운 눈으로 잠뜰을 바라보았다. 그의 검은 예복은 소매 끝까지 단정하게 단추가 채워진 것과는 반대로 여기저기 주름이 져 있는 것이 그가 얼마나 급하게 왔는지 알려주었다. 대답 없는 공룡의 침묵을 잠시 기다리다, 잠뜰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개를 들 기운조차 없는지 시선을 바닥으로 둔 채, 잠뜰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공룡 쪽을 향해 걸어왔다. 공룡은 서둘러 손을 뻗으며 잠뜰을 향해 다가가 흔들리는 그녀의 몸을 부축해 주려 하였다. 그러나 잠뜰은 공룡의 손을 쳐내었다. 손등의 화끈거림은 느낄 새도 없이 놀란 공룡을, 잠뜰은 쳐다보지도 않고 문장을 던지듯 물었다.

“덕개가 나랑 같이 있어달라고 부탁했니?”

“…안 부탁했어도 널 찾아왔을 거야.”

“안 그래도 되니까, 회랑으로 돌아가.”

“잠뜰아.”

“혼자 생각할 게 있어서 그래. 괜찮으니까 돌아가.”

“괜찮으면 내 얼굴 보고 말해.”

“못 봐.”

잠뜰은, 검은 장갑을 낀 손으로 자신의 얼굴 쪽으로 가져갔다. 어떤 상태인지 보지 않아도 뻔할 제 눈가를 가리기 위한 것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네 얼굴 볼 정도로 괜찮지는 않아. 보여주기 싫은 거야.”

“잠뜰아, 나는-”

“나 이제 마법 안 믿으려고.”

공룡은 말을 잇지 못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안 어울리는 말을 하는 것은 둘째치고, 정통성 있는 마법 가문인 공룡에게 이런 말을 하는 의도를 알 수 없었다.

“그게 기적이라고 믿었던 날도 있었는데. 어차피 나한테는 아무런 기적도 못 일으키는 거잖아. 병을 낫게 해준다거나, 죽은 사람을 살려준다거나. 그런 것 따위 간단하게 일어날 리가 없지. 그런데 자꾸 기대하게만 돼버려. 왜냐면, 왜냐면… 너랑 같이 보낸 모든 순간이 기적 같았으니까. 너랑 같이 한 시간과 감정 때문에 멋대로 기적을 꿈꾸게 되더라. 지금도 난 사실 너한테 안 좋은 마법이라도 좋으니 사람을 살릴 방법이 없냐고 묻고 싶어. 웃기지? 지금은 그런 것보다 가문의 후계자로서 우리 가문을 어떻게 할 것인지 생각해야 하는데 말이야.”

웃음이 나올 리 없었다. 자조적으로 내뱉는 잠뜰의 말은, 분명 듣는 공룡보다 잠뜰 자신의 마음을 더 후벼팠을 것이다. 그러나 공룡은 그것이, 단순히 부모를 잃은 사건 하나 때문에 내뱉은 말은 아니라고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아마도 오랜시간 조금씩 쌓여온 생각, 조금씩 짓눌려온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마법을 안 믿을 거고, 그래서 너도 안 믿을 거야. 자꾸만 기대고 싶어지고 현실에서 눈을 돌리게 되어버리니까. 이제 끊어내려고.”

“….”

“당분간은 찾아오지 마. 정리해야 할 것들이…많아서. 누굴 만날 정신이 아냐.”

공룡은 대답하지 못했다. 옅게 떨리는 어깨가 눈에 아프게 밟혔다. 이런 상황에서도 꼿꼿이 서 있으려 노력하는 친구에게 손을 뻗어 도와주고 싶었으나, 그 손은 움찔 떨리기만 할 뿐 다시 앞으로 뻗어지진 못했다. 지금의 잠뜰은 도와주려 건드리는 순간, 그대로 얼음처럼 산산이 부서져 버릴 것 같았다. 이대로 두고 가고 싶지 않았으나, 지금 자신의 존재는 잠뜰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밖에 없는 소중한 친구지만, 가족이 아닌 친구였기에. 인식하는 순간 넘을 수 없게 되어버리는 선이 있었다.

“알았어, 네가 그렇게까지 말했으니까. 연락 기다릴게, 언제나처럼.”

“….”

희미한 미소로 애써 감정을 숨긴 공룡의 표정은, 그래 봤자 십 대 소년이기에 온전히 표정을 숨길 순 없었다. 그러나 애초에 잠뜰은 공룡의 표정을 보고 있지 않았기에 그 행위에는 의미가 없어졌다.

잠뜰은 공룡 쪽에 시선을 두지 않고 아무 말 없이 관 쪽으로 몸을 돌렸다. 무언의 축객령이었다. 공룡은 그것이 그저 지금 당장 잠뜰이 감당해야 할 것이 많아 자신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어서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여 그는 검은 드레스를 입고 검은 장갑을 낀 손으로 표정을 가린 친구에게, 더 묻지 않았다.

공룡의 생각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맞았다. 다만 다시 여유가 생기면 연락을 할 거라는 공룡의 바람과는 달리, 장례식 이후 잠뜰이 공룡에게 연락한 일은 없었다.

그리고 공룡이 잠뜰의 가문 사람들이 모든 재산을 정리하고 종적을 감췄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은, 그로부터 2년이 지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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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 조용한 물범

    아니 레부님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다음화 어딨습니까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흐어어엉ㅠㅠㅠㅠㅠㅠㅠㅠ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고통이에여 이건ㅠㅠㅠㅠㅠ 뜰님을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지만 때론 마법도 이겨낼 수 없는게 있다는걸 잘 표현하셔서 보는 저도 눈물이 났습니다..ㅠㅠ걱정의 한탄과 한숨도 나왔구요... 치유되지 않을 슬픔이지만 다시 둘이 사이좋게 지냈으면 좋겠어여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레부님은 절 너무 잘 울리셔 진짜ㅠㅠㅠㅠ 그리고 마법사라는 소재가 오즈룡과 유사한 요소라는 걸 보고 이걸로 딱 크오를 한거 보고 우왕...놀랐습니당.... 레부님 최고 레부님 짱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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