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옷을 의뢰하시겠습니까?

#004 죽은 자들을 위한 연회복

블라인드 죽음의 왈츠 | 덕개

노을이 지는 시간, 붉은빛으로 물든 바다 위에 거대한 배가 한 척 떠있다. SP CRUISE라고 커다란 글씨로 적혀있는 배는 어떠한 파도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처럼 웅장한 모습으로 항구에 정착해있었다. 내일 열릴 선상파티의 준비를 모두 마친 배의 관리자들은 일찍 쉬러 들어갔고, 항구에서 배로 오르는 길만을 극소수의 관리인들이 지키고 서 있었다. 귀한 손님을 위한 출항 시간만을 기다리며, 이 크루즈는 태양이 바다에 삼켜지는 순간까지 가만히 이곳에 있을 것이다. 바다 밑으로 가라앉고 있는 태양의 붉은빛만이 마치 내일 일어날 일을 경고하듯 위태로운 빛을 띠었다.

선원들도 관리자들도 모두 퇴근한 시간, 선장실에 누군가가 서 있다. 창밖 수평선을 바라보며 말없이 서 있는 그의 황갈색 머리카락이 노을의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그의 검은색 자켓과 바지에 자잘하게 쓸린 자국이 여럿 있는 것이, 배의 어딘가에서 어떤 작업을 하고 왔나 보다. 그의 옆에는 그가 입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웨이터 유니폼 한 벌이 놓여 있었다. 이 배에 웨이터로 일하는 사람일까? 하지만 그런 것치곤 그의 자켓 주머니 안에 있는 지갑에는 그의 이름과 교수라는 직업이 선명하게 찍혀있는 명함이 들어 있었다. 짐작건대 배에 올라타기 위해서 작업자의 옷을 입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자가 왜 내일 출항할 예정인 배에 몰래 올라탄 것인지, 현재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기차 경적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선장실에 서 있는 남성은 아주 작은 소리라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곳은 부두이니 항구로 돌아오는 다른 배의 고동소리를 착각한 것일 수도 있다. 애초에 기차가 이런 곳에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똑똑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선실 문을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남성은 문쪽으로 몸을 돌렸다. 배의 관리자들이 모두 퇴근한 것은 이미 확인했다. 그러니 지금 선실 문을 열고 들어올 이는, 그가 이곳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기다리고 있는 사람뿐일 것이다. 

문이 열리고, 갈색 머리카락의 여성이 들어왔다. 그녀의 얼굴에 남성은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얀색 크라바트를 단정히 맨 여성은, 레이스가 장식된 모자에 사용감이 짙게 묻은 커다란 수트케이스를 들고 있었다. 남성을 향해 그녀는, 여느 때와 같이, 허리를 굽히며 정중히 인사하였다.

“골든 살롱 소속, 디자이너 잠뜰입니다.”

그녀의 등장에 조금 일그러진 표정을 짓고 있던 남성은, 이내 무언가 깨달은 것인지 표정을 풀었다. 그러고는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배 입구는 관계자들이 지키고 있을 거라고 편지로 말씀드렸을 때, 따로 방법이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더니. 정말이었군요."

그녀의 앞에서 걸음을 멈춘 남자는, 팔을 가슴 앞으로 가져오며 잠뜰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무용을 배우기라도 한 듯, 그의 몸짓은 우아하고 정중했다.

"먼 길 오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의뢰를 요청드린 덕개입니다."

잠뜰은 덕개의 안내에 따라 선장실에 놓인 탁자 위에 수트케이스를 올려놓았다. 의뢰인들에게 의상 제작을 위해 넓은 탁자를 준비해달라고 편지로 미리 말을 해두는데, 덕개의 분위기로 보아 그가 선장은 아닌 것 같아 선장실 탁자를 이렇게 마음대로 사용해도 되는지 조금은 의아했다. 

"의뢰하실 옷은 무엇입니까?"

수트케이스에서 필요한 의상도구들을 꺼내며 잠뜰이 물었다. 그 질문을 기다리고 있던 듯, 덕개는 싱긋 웃으며 답했다.

"상복을 한 벌 요청드리고자 합니다."




"…상복, 말씀입니까."

잠뜰은 조금 놀란 기색으로 반문하였다. 자신을 향해 웃으며 상복을 주문하는 의뢰인은 처음이었다. 덕개는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덧붙였다.

"하하, 제가 너무 축약해서 말했군요. 죽은 자들을 위한 연회에 참석할 예정이라, 그때 제가 입을 연회용 정장을 한 벌 만들어주시면 됩니다. 다만 죽은 이들을 위한 연회인 만큼, 상복과도 같이 단정한 모양새로 만들어 주시면 된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렇습니까."

조금은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지만, 잠뜰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이곳에 의뢰를 받고 온 사람이니, 자신의 의뢰인의 요청사항에 충실해야 했다.

"치수는 지금 재면 되겠습니까?"

 "아, 제가 이미 적어왔습니다. 여기-"

덕개는 안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 잠뜰에게 건네려다, 순간 손이 미끄러져 안주머니에 있던 종이 여러 장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덕개가 당황한 사이에 잠뜰이 종이를 집어 올렸다. 치수가 적힌 것으로 추정되는 종이와, 사진 한 장이 떨어져 있었다. 사진 속에는 덕개와, 덕개를 꽤 닮은 여성 한 명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사진을 떨어뜨린 걸 알아챈 덕개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잠뜰은 그런 덕개에게 사진을 돌려주며 물었다.

“혈육이십니까? 많이 닮으셨습니다.”

“…네, 제 동생입니다.”

덕개는 잠뜰의 손에서 빼앗듯이 사진을 받아, 조심스럽게 접어 다시 안주머니에 넣었다. 동생과의 사이가 아주 각별한 모양이군, 잠뜰은 그렇게 생각하며 덕개가 치수를 적어뒀다는 종이를 살폈다. 종이의 앞면에는 덕개의 치수가 상세히 적혀있었다. 

작업하기 수월하겠다고 생각하던 잠뜰은, 종이의 뒷면을 뒤집어보았다. 그러고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의뢰자분, 이것은…?”

종이의 뒷면에 적혀 있는 것은 또 다른 누군가의 치수였다. 덕개보다 키가 조금 더 큰 남성의 치수인 것 같았다. 잠뜰의 모습에 덕개는 웃으며 답해주었다. 짧은 순간, 그 미소가 섬뜩하게 느껴진 것은 왜일까.

“이 옷, 주로 제가 입겠지만 누군가가 빌려쓸 예정이거든요. 뒷면의 치수의 사람도 입을 수 있을 만한 옷을 만들어주십시오. 그 사람은 살짝 걸치기만 할 정도이니 너무 딱 맞을 필요는 없어요. 다만 몸을 가릴 수 있을 만큼 품과 기장을 넉넉하게 만들어주세요.”

잠뜰은 그 구체적인 의뢰에 속으로 의문을 삼켰다. 평범하게 입을 옷이 아닌 것이 명백했다. 상대는 걸치기만 할 것이고, 몸을 쉬이 가릴 수 있게끔 해달라는 요청도 의심스러웠다. 단순히 넉넉한 크기의 옷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치부하기엔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었다. 그러나 단지 미심쩍다는 이유로 의뢰를 거절할 순 없었다.

"알겠습니다."

"시원시원해서 좋네요."

덕개는 싱긋 웃고선 벽에 기대어 섰다. 잠뜰은 정장 형태 몇개를 생각하고선, 원하는 형태를 결정한 듯 케이스에서 원단을 추가로 꺼냈다. 그러고는 목탄으로 빠르게 선을 그었다. 옷본도 없이 잠뜰은 빠르고 정확하게 자신이 원하는 형태를 그려내었다. 잠뜰의 작업속도를 덕개는 놀랍다는 시선으로 지켜보았다. 

노을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 천을 통과하는 바늘 소리만이 시간을 채웠다. 선장실에 있는 어느 쪽도 말이 없었다. 잠뜰은 빠른 손놀림으로 옷을 만들었고, 덕개는 이따금씩 안주머니에서 사진을 꺼내 바라보았다. 옷이 만들어지기까지 좀 기다려야 할 것 같으니 잠시 일을 좀 하고 오겠다며 덕개가 자리에서 일어날 때였다.

"의뢰인, 하나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네, 물어보십시오."

"의뢰인께서 참석하시는 죽은 자들의 연회는, 내일 이 배에서 열리는 것입니까?"

미소짓고 있던 덕개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잠뜰은 그 작은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기차를 타고 이 배에 내렸을 때, 선장실에 오는 길에 잠뜰은 이 배를 잠시 둘러보고 왔다. 그곳에서 누군가가 '작업'하고 있던 흔적을 여럿 발견하였다. '무언가'에 대한 내용이 상세히 적힌 종이가 몇 장, 그리고 잠뜰 자신과 닮은 사람의 공연 포스터 한 장. '죽음의 왈츠'라고 적혀 있는 그 종이를 잠뜰은 오랫동안 바라보았었다. 

배에 의뢰인을 제외한 아무도 없는 시간, 평범한 연회용 배에는 어울리지 않을 내용들이 적힌 종이들, 그리고 그것을 숨기려는 흔적들. 

"그 죽은 자들은 어쩌다, 누구에게 죽게 되는 사람들입니까?"

그 흔적들을 연결하면, 떠오르는 가정이 있었다. 섣불리 단언하기 어렵지만, 의심만으로 지나치기엔 확신에 가까운 가정이. 배에 있는 사람이 눈앞의 의뢰인 단 한 명 뿐인 이라면, 이 일은 누가 했는지는 너무나도 명확하지 않은가. 

덕개를 돌아본 잠뜰은, 순간 흠칫 몸을 떨었다. 

새까만 감정으로 점칠 된 표정이 잠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차갑게 굳은 표정은, 그보다 더욱 차가운 눈으로 잠뜰을 응시하였다. 잠뜰은 마른 침을 삼키며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았다. 무거운 침묵이 공기를 메우며 잠뜰을 짓눌렀다.

긴장 속에서 시선이 마주하길 잠시, 덕개가 먼저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것까지는 아실 것 없습니다.”

이 이상 넘어오지 말라는, 명백한 경고였다.

"-의뢰인."

"하하, 이거 참. 제가 디자이너님을 너무 만만하게 본 것 같네요. 아는 사람이 있으면 안 되는데, 이거 곤란하게 됐어요."

철컥, 낯설지만 익히 들어본 적 있는 금속음이 들린다. 새까만 총구가 잠뜰을 향한다. 잠뜰은 그 끝을 들고 있는 덕개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입막음을 위해 쏘실 생각이십니까?"

"그렇다고 한다면?"

무심한 회안이 덕개를 향한다. 문자 그대로, 무감정한 눈빛이다. 자신의 목숨에 대해서 큰 상관을 쓰고 있지 않은 것만 같은, 지독히도 무심한 눈이다. 덕개는 말없이 잠뜰을 바라보다, 총구를 내렸다.

"농담이에요, 안 쏴요."

얼굴이 누구를 닮아서 좀 열받지만, 구별 못 할 정도로 멍청이는 아니고. 덕개가 혼잣말하듯 작게 중얼거렸다. 말없이 덕개를 바라보는 잠뜰에게 덕개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가 왜 당신께 의뢰를 맡겼는지 아시나요? 아무리 당신에 대해 알아보려 해도 정보가 나오지 않더라고요. 아, 걱정 마세요. 당신이 어디서 왔는지 같은 건 안 궁금해요. 제게 중요한 건, ‘이쪽 사람들’이 당신의 정체를 모르는 거니까. 제가 일을 벌여도 꼬리가 잡히지 않을 사람이 필요했을 뿐이에요."

"…."

"바꿔 말하면, 그쪽이 제 무엇을 알아간다 하더라도, 그것이 이쪽 사람들에게 새나갈 일도 없을 거란 거잖아요? 그런데 왜 굳이 번거롭게 일을 벌이겠어요."

덕개는 총을 뒷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여전히 웃는 낯을 유지하며 그는 선장실 문을 열었다.

"그냥 서로 일 보고, 깔끔하게 떠나는 게 모두한테 좋지 않겠어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덕개는 선장실을 떠났다. 혼자 남게 된 잠뜰은 작은 한숨을 쉬었다. 더 이상 파고들지 말고, 조용히 의뢰를 마치고 떠나라는 뜻인가. 

바늘을 다시 집어든 잠뜰의 시야에 무언가 들어왔다. 벽 한쪽 구석에 놓여있는, 어디서든 흔히 볼 수 있는 나무 상자였다. 특별할 것도 없는데 이상하게도 잠뜰의 눈에 띄었다. 

상자를 열어보니 안에 낡은 책이 한 권 들어있었다. 장갑을 낀 상태로, 잠뜰은 그 책을 꺼내 펼쳐보았다. 수많은 여백 사이, 단 한 페이지만이 글자가 적혀 있었다.

내가 준비한 무대는 마음에 들었나?

이제 다 끝났어. 모두가 죗값을 치를 때가 왔다.

고작 두 줄 뿐인 짧은 글, 그것이 전부였다. 잠뜰은 그 짧은 문장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이내 책을 덮고, 다시 옷을 만들던 탁자로 돌아왔다. 

날붙이가 천을 자르고 실을 천 자락을 통과하는 소리가 선실을 채운다. 옷을 내려다보는 잠뜰의 눈엔 짙은 고민의 기색이 서려 있다. 실과 실이 엮이는 사이사이, 고민이 빈 공간을 채우며 시간이 흘러갔다.



"디자이너님 실력은 정말 놀랍군요."

달이 머리 위로 높게 뜬 시각, 일을 마무리 짓고 선장실로 돌아온 덕개는 잠뜰이 만들어둔 옷을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흰색 셔츠에 검은색 정장 조끼는 상복과도 같이 정중한 느낌을 내었고, 긴 기장의 주황색 코트는 지나치게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연회용 정장에 어울리는 멋을 더해주었다. 코트는 덕개가 요청한 대로 품과 기장이 넉넉하였는데도 자연스러운 실루엣을 만들었다. 옷을 들고 서 있는 잠뜰에게 덕개가 웃으며 말을 건넸다.

"젊은 나이인데도 실력이 상당하십니다. 아, 이 나이에 교수가 된 제가 할 말은 아니겠군요."

"…."

"감사합니다, 디자이너님. 이걸로 의뢰는 끝이네요."

"의뢰인."

잠뜰이 느리게 입을 열었다. 옷은 여전히 덕개에게 건네주지 않고 자신의 손에 든 채로 말이다. 덕개는 무슨 일이냐는 표정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저는 의뢰인이 생각하시는 것 보다 이 일을 오래 했습니다. 긴 시간 동안 여러 의뢰를 하러 다니면서 많은 곳을 돌아다녔고, 많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중에서 의뢰인과 비슷한 분들도 여럿 만났습니다. 올라갈 길을 알 수 없는 밑바닥에 떨어진 분들, 혹은 그런 이들을 아주 가까이에서 바라보는 분들 말입니다."

덕개는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말의 의도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잠뜰은 담담한 말투로 말을 이어갔다.

"저는 그분들의 의뢰를 맡으면서, 밑바닥으로 떨어지게 된 이유의 시작과, 그 밑바닥에서의 고통을 많이 마주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일어나는 방법으로 복수와 분노를 택한 자들의 끝을 지켜봤습니다. 떨어지는 것의 시작은 모두 달랐으나, 그곳에서 분노로 일어나는 자들의 말로는 같더군요."

잠뜰은 잠시 자신이 의뢰를 맡았던 수많은 사람들을 떠올렸다. 과거를 떠올리는 것은 그녀에게 별로 즐거운 일은 아니었다.

"그들이 올라왔다고 말하는 그곳은 또 다른 밑바닥이었습니다. 복수 끝에 남은 것은 커다랗게 비어있는 구덩이의, 가장 어두운 밑바닥이었을 뿐입니다. 그곳에서 후회와 허망함으로 무너져가는 분들도 많이, 아주 많이 만나고 왔습니다."

과거의 기억을 헤집던 잠뜰은, 고개를 들어 덕개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앞에 또 다른 밑바닥으로 내려가려고 하는 자가 서 있었다.

"저는 의뢰인께서, 그들과 같은 길을 걷지 않길 바랍니다. 그러니 감히 요청드립니다."

회색빛 눈동자가 덕개를 향한다. 옷을 잡고 있는 그녀의 손은 그것을 내놓지 않으려는 듯, 힘이 들어있다.

"의뢰를, 물러주실 수 없겠습니까."

덕개는 말없이 잠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잠뜰은 덕개를 대답을 기다렸다. 그녀는 자신의 손에 들린 옷이 어떻게 사용될지 알고 있었다. 배에서 봤던 글들과, 상자 안에서 찾은 누군가를 향한 글귀와, 자신을 대하는 덕개의 태도에서, 잠뜰은 덕개의 목적과 의뢰를 요청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끝에 그가 어떻게 될 지 또한, 잠뜰의 눈에는 너무나도 선명하게 보였다. 잘 알기에, 잠뜰은 그가 이 의뢰를 무르길 바랐다. 

이내, 생글거리는 미소를 지으며 덕개가 입을 열었다.

"디자이너 님께선, 저와 같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보셨다고 하셨죠?"

"네, 그렇습니다." 

"그럼 그들에게도 저에게 한 것처럼 의뢰를 물러달라며 말렸겠군요. 그들이 디자이너 님의 말을 듣고 생각을 바꾸던가요?"

"…."

잠뜰은 답을 하지 않았다. 덕개의 말대로 잠뜰은 덕개와 같은 계획을 품은 자들을 여럿 만났고, 그에게 한 것처럼 그들을 설득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대답을 미루는 잠뜰을 바라보며 덕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싱긋 웃었다.

"제 대답도 정해져 있는 것 같네요."

잠뜰은 말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덕개는 작은 한숨을 쉬며, 그녀를 향해 큰 걸음으로 걸어왔다. 잠뜰의 손에 있는 옷을 보며, 덕개가 입을 열었다.

"당신의 뜻은 잘 알겠어요. 복수는 아무것도 낳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복수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멋진 말이죠. 모두 잘 알고 있는 격언이고요. 저도 다르지 않아요. 모를 수가 없죠. 내가 이 일에 무엇을 걸었는지, 이 결과로 무엇을 잃을지, 아주 잘 알고 있어요. 나는 더 이상 내 가족 앞에 떳떳이 설 수 없을 것이고, 내가 저지른 죄는 나를 그들과 똑같은 사람으로 만들어버리겠죠."

잠뜰이 말릴 새도 없이, 덕개는 잠뜰의 손에서 빠르게 옷을 받아들었다. 손 사이로 천이 스쳐 빠져나가는 감촉이 느껴졌다.

"그런데도, 나는 이 밑바닥을 선택할 수밖에 없어요."

옷은 이제 완전히 덕개의 손안에 있었다. 옷을 받아든 덕개는 쓴웃음을 지었다. 어둡게 가라앉은 표정은 이전처럼 차갑지도 냉철하지도 않았다. 그저 안타까운, 낭떠러지에 내몰린 사람의 마지막과도 같은, 인간적인 감정이 묻어 있을 뿐이었다.

"나와 같은 아픔을 겪었는데도 복수를 하지 않는 이들도 있다고 말해 주려 했나요? 미안하지만 별 설득력은 없어요. 그런 자들에겐 그냥 대단하다며 박수를 쳐주고 싶네요. 대체 어떻게 해야 이 매일같은 지옥을 딛고 살 수 있는 거에요? 어떻게 해야 그들을 용서하고 아무 일 없단 듯 살 수 있는 겁니까? 저는, 나는 도저히 그렇게는 못 하겠어요."

옷을 쥔 그의 손이 미약하게 떨린다. 그러나 이내 그는 다시 힘을 주어 떨림을 억지로 멈추었다. 자신은 멈춰선 안 됐다. 멈출 수 없었다. 이 앞에 있는 것이 지금보다 더한 밑바닥이더라도, 기꺼이 들어가야 했다.

"의뢰는 취소 안 합니다. 수고하셨어요, 디자이너 님."

잠뜰은 할 말이 더 있다는 듯 입을 달싹였다. 그러나 결국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이 이상은 자신의 말이 그에게 닿지 않을 것이다. 잠뜰이 과거에 겪은 수많은 사람처럼, 스스로 밑바닥으로 걸어 들어가는 그를 막을 수 없었다. 이 이상 이곳에서 잠뜰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이 또한 긴 시간에서 겪는 수많은 의뢰인들의 사연 중 하나에 불과한, 그러나 잊고 지나가기엔 잔인한 사건이 되어 과거에 묻힐 것이다.



선장실의 덕개를 뒤로하고, 잠뜰은 갑판으로 나왔다. 새벽에 가까운 시간, 출렁이는 밤바다의 소리가 귓가를 스친다. 하늘에 떠있는 달은 미약한 빛을 내었다. 새까만 밤하늘과 새까만 밤바다를 잠뜰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번 의뢰는 실팬가."

작게 중얼거린 혼잣말이었다. 잠뜰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이미 끝난 의뢰다. 의뢰인의 생각을 바꾸는 데 실패하고, 씁쓸한 결말로 기록될 의뢰. 끝난 사건을 계속 붙잡고 있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다음 의뢰가 아직 남아있으니, 그녀는 움직여야 했다.

기차 경적소리가 다시 났다. 새까만 하늘과 바다 사이로 빠른 바람이 불어왔다. 갑판에 서 있는 잠뜰의 머리카락이 흩날리는 듯하더니, 이내 검은 하늘로 삼켜 사라진다. 파도 소리만이 그녀가 떠나고 남은 빈 공간을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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