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옷을 의뢰하시겠습니까?

#003 물빛 작업복

워터플래그 | 공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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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지를 향해 불어오는 바람에 바닷냄새가 실려 있다.

넘실대는 푸른 파도를 길잡이 삼아 작은 어선 여럿이 항구를 떠나고 있다. 만선을 기대하며 물살을 가르고 짠 바다향이 가득한 바람을 맞으며 나아간다. 하얀 갈매기 여러 마리가 날개를 펴고 부두 위를 빙글빙글 돌고 있다. 낚싯대와 그물을 손질하는 어부들의 손이 바쁘다. 활기가 넘쳐나는 항구의 모습이다.

다만 어딘가 모르게 평온과는 거리가 먼 분위기가 감돌고 있기도 하였다. 두 명씩 다니는 사람들은 상하 관계가 명백한 모습이었는데 난처해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는 이들이 여럿이다. 불안감이 퍼진 거리를 밟으며 잠뜰은 의뢰인의 집 앞에 도착했다. 습한 바닷바람이 그녀의 갈색 머리카락을 흔들고 지나간다. 검은색 반장갑을 낀 그녀의 손이 작은 나무문을 가볍게 두 번 두드린다. 안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이내 문이 열린다.

"엥, 잠뜰 씨?"

안에서 나타난 남자는 갈색 머리카락에 초록색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는 마치 아는 사람을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만났다는 듯 놀라고 있었다. 잠뜰은 그 반응이 익숙한지 신경 쓰지 않고, 무릎을 살짝 굽히며 정중히 인사하였다.

"골든 살롱 소속 디자이너, 잠뜰입니다."

"-크흠, 의뢰드렸던 공룡입니다. 어서 오세요."

공룡은 머쓱한 표정으로 헛기침을 하며 마주 인사하였다.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잠뜰의 얼굴을 자세히 살피더니,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공룡이 물었다.

"저기, 혹시 쌍둥이 동생 있어요? 아니면 친척 중에 식당 운영하는 사람 있다거나?"

"없습니다."

"진짜요? 완전 닮았는데…."

"…."

"아, 내 정신 좀 봐. 손님을 문 앞에 계속 세워뒀네요. 어서 들어오세요."

"실례하겠습니다."



공룡은 부엌 탁자에 잠뜰을 앉히고는 마실 걸 내오겠다고 하였다. 공룡의 부엌은 작지만 구석구석 사람의 손길이 닿아있었다. 작은 창으론 오후의 따스한 햇볕과 바닷새의 울음소리가 들어왔다. 부엌에서 눈을 살짝 돌리면 위층으로 향하는 사다리가 보인다. 침실은 위층에 있는 걸까? 밖에서 보았을 때 2층이 작은 발코니 같은 형태로 되어 있던 것이 기억난다. 공룡이 시원한 음료 두 잔을 가지고 잠뜰의 맞은편에 앉았다.

"제 친구에게 선물할 옷을 하나 의뢰하고 싶어서요."

"의뢰자분께서 입을 옷이 아닙니까?"

"네, 저랑 제 친구 둘 다 물일을 하는 사람들인데, 이 친구 옷이 다 해져서요. 튼튼한 거로 새로 하나 선물해주고 싶어요."

잠뜰은 속으로는 조금 의아하였다. 이곳은 한눈에 봐도 어업이 고도로 발달한 도시이다. 그러니 이런 작업 환경에 맞는 작업복들 역시 많이 발전해있을 텐데, 굳이 따로 비싼 돈을 들여 주문할 필요가 없어 보였다. 주문 제작을 맡기고 싶다 하더라도 이 정도로 발전한 마을에 장인이 없을 리도 없었다.

"작업복이면 이 마을에서도 좋은 옷을 많이 팔 텐데, 왜 굳이 외부인인 저를 부른 것입니까?"

"에이, 그냥 산 옷이면 안 입겠다고 뻐팅길게 뻔하잖아요. 이렇게 먼~곳에서 오신, 아~주 비싼 디자이너님께 무려 주문제작을 해서 만든 옷이라고 하면, 쉽게 거절하기 어렵잖아요? 선물 보낼 때 거절 못 하게 애들 손에 들려 보내는 거랑 비슷한 거죠. 아, 이거랑은 다른가?"

잠뜰은 어이가 없다는 듯 공룡을 바라보았다. 와 그 눈빛, 대충 칭찬으로 받아들일게요? 공룡은 가볍게 웃으며 대꾸했다. 뭐, 이곳 사정을 모르는 분이 필요했던 것도 있고요- 그렇게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무것도 아니에요, 잠뜰의 반문에 공룡이 손사래를 친다. 더욱 영문을 모르게 되었지만, 잠뜰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 친구분의 치수는 어떻게 됩니까?"

"…아!"

"아?"

"잘…모르겠는데…."

"괜찮습니다, 친구분의 치수를 직접 재면 됩니다."

"아니, 그건 안 되죠! 서프라이즈 선물이란 말이에요. 일부러 디자이너님 오실 시각에 맞춰서 볼일 보고 오라고 내보냈는데!"

"그러니까 지금 저보고 치수도 없이 옷을 만들라는 겁니까?"

"아, 말이 그렇게 되나?"

잠뜰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뭔가 공룡의 페이스에 휘둘리고 있는 것 같았다. 오랜 시간 일을 하며 무덤덤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고객을 만나면 또 아닌 것 같다. 공룡은 끙끙거리며 생각하더니 슬그머니 잠뜰을 바라보았다.

"그, 이미 입고 있는 옷은 몇 벌 있는데, 그걸로 어떻게 안될까요?"

"정확하진 않겠지만 가능합니다. 옷의 안감이 닳은 정도로 체형을 짐작할 수 있으니까요."

"우와, 디자이너들은 다 그런 걸 알 수 있어요?"

"아무나 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방금 그 말 되게 재수 없었다."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만."

"와 두 배로 재수 없어라. 옷 가져올게요."

공룡은 '농담인 거 아시죠?' 란 표정으로 눈을 찡긋이더니 옷을 가지러 위층으로 올라갔다. 잠뜰이 뭐 저런 사람이 다 있지 라고 생각하는 짧은 시간 만에 공룡이 옷을 가지고 내려왔다. 공룡의 말대로 여러 곳이 헤진 옷이었고 옷감 상태도 나빴다. 잠뜰은 옷의 상태를 살피고 줄자로 재며 치수를 어림하였다. 

"특별히 원하는 색이나 형태가 있으십니까?"

"어…아마 작업할 때 입을 것 같으니까 복잡한 장식은 없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색은 물에서 튀지 않게 푸른색 계열로요."

"알겠습니다. 친구분의 피부색에 어울리는 색을 고르고 싶은데, 피부색을 알려주시겠습니까?"

"…회색입니다."

마지막 답을 하기 전에 약간의 빈 시간이 있었다. 공룡은 답을 하고는 잠뜰을 반응을 살폈다. 잠뜰은 공룡의 말에 곤란하다는 듯 살짝 찡그린 표정이었다. 그 반응에 공룡은 조금 날카로워진 목소리로 물었다.

"문제라도 있나요?"

"친구분께서 그냥 회색 피부이십니까?"

"그렇습니다만, 옷을 사는 데 그게 문제가 됩니까?"

"…으음, 외람된 말이겠지만…."

잠뜰은 말을 고르는 듯 말끝을 흐렸다. 공룡은 한층 더 날카로운 눈빛으로 잠뜰을 바라보았다. 잠뜰은 공룡의 그런 분위기는 눈치채지 못한 채 말을 고르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음, 의뢰자분 눈에 다 같은 회색이겠지만, 디자이너 눈에는 24가지 정도로 다른 색으로 보여서, 단순히 회색이라고 말씀하시면 친구분의 피부를 정확히 알 수가 없습니다. 피부톤을 정확히 알아야 옷 색을 정할 수 있는데…."

"네?"

"아, 오해하지 마십시오. 의뢰자분을 탓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반인은 쉽게 알아차리기 힘든 차이일 뿐입니다. 다만 옷을 만드는 입장에선 정확한 색을 모르는 건 여간 곤란한 게 아니라서... 혹시 사진이 있습니까? 아니, 제가 회색 원단 몇 가지를 보여 드릴 테니 친구분의 피부색과 가장 비슷한 것을 골라주시-"

잠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푸핫 하는 큰 웃음소리가 났다. 가방에서 회색 원단 조각 몇 가지를 꺼내던 잠뜰이 놀라 공룡을 바라보았다. 공룡은 상황이 너무 웃기다는 듯 숨기는 기색도 없이 크게 웃었다.

"푸흣, 그러니까, 문제가 있는 게 내가 색을 제대로 안 알려줘서 그런 거였던 거예요?"

"…외람되지만 그렇습니다. 하지만 의뢰자분께서 의상 쪽 일을 안 하시니 의뢰자분 잘못이 아니고-"

"아아, 거기까지. 그것 때문에 이런 거 아니에요. 음, 이 원단이 그 친구 피부색이랑 가장 비슷해 보이네요."

공룡은 겨우 웃는 걸 멈추며 잠뜰이 꺼낸 원단 조각 중 하나를 골랐다. 잠뜰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공룡을 바라보았다. 무안한 표정을 짓던 공룡은 이내 볼을 긁적이다 입을 열었다.

"으음… 잠뜰 씨께 예민하게 굴어놓고 아무 설명도 안 하는 건 무례한 일이겠지요. 오시는 길에 우리 마을 사람들 보셨죠?"

"네, 그렇습니다."

"분위기 어땠어요?"

잠뜰은 잠시 이곳에 오는 동안 보았던 사람들을 떠올렸다. 공룡같이 둥근 귀에 살굿빛 피부를 가진 사람들과, 물고기의 지느러미와 같은 것이 얼굴에 돋아있는 회색빛 피부의 사람들. 그 중 한쪽이 다른 한쪽보다 아래인 것이 확실히 느껴지는 언행들이 떠올랐다. 잠뜰이 말을 아끼며 대답을 미루자 공룡이 웃으며 대신 말을 이었다.

"회색빛 피부를 가진 사람들은 '어인'들이에요. 어업으로 먹고사는 우리 도시에서, 어업을 도와주는 아주 유능하고 중요한 사람들이지요. 그런데 생김새가 우리가 흔히 아는 '평범함'과 다르다 보니, 보는 시선이 곱지 않을 때도 있어요. 예전에 각별이의, 그러니까 제 친구 옷을 만들어주려고 마을 디자이너분을 모셨는데, 그런 괴물이 입을 옷은 만들 생각 없다면서 바로 떠나더라고요. 그래서 일부러 이곳 사정을 모를 외부인인 잠뜰 씨를 불렀어요. 편견에 물들지 않고, 오직 고객으로 봐줄 사람이 필요했거든요. 그런데 회색 피부를 말할 때 망설이시길래, 차별적인 생각을 가지고 계신 분인 줄 알고 예민하게 반응했네요. 미안해요."

잠뜰은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말라며 고개를 저었다. 옷감 몇 개를 꺼내 천을 고르다가, 문득 공룡의 말에서 의문을 느낀 잠뜰이 물었다.

"그런데 어인 분들이 생업에 그렇게도 중요한 일을 도와주고 계시는데, 왜 어인 분들 쪽이 더 낮은 분위기가 된 겁니까?"

"…잠뜰씨가 계시던 곳은 신분제도가 없었나요?"

"있습니다. 위대하신 여왕 폐하 아래 이루어진 신분제도입니다."

"그럼 아실 텐데요."

공룡이 한쪽 턱을 괴며 잠뜰 쪽을 바라보았다. 쓸쓸하게 가라앉은 눈빛이 잠뜰에게 향한다.

"남을 위한 무조건적인 노동이, 강요 없이 생겼을 리 없다는 거요."

"…."

잠뜰은 공룡의 말에 답을 하지 않았다. 그의 말이 맞았다. 하인들이 귀족을 위해 일하는 것은 그들의 신분에서 오는 강요였지 선의로 그들을 돕는 것이 아니었다. 이 마을에서 인간과 어인의 관계는, 자신이 살던 세상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것 같았다. 아니, 그보다 더 심하다면 심할 것이다. 조용히 웃는 낯을 하는 공룡을 잠뜰은 잠시 건조하게 바라보다 이내 원단으로 눈을 돌렸다. 날붙이가 천을 자르는 소리가 시간을 잠시 채웠다. 

"…처음 클라데스 시장이 그들을, 어인들을 선보였을 때, 바로 알 수 있었어요. 저들은 절대, 정당한 방법으로 이곳에 온 게 아니라는 것을요."

천이 사락이는 소리 사이로 공룡의 목소리가, 과거의 기억을 가지고 흘러나왔다. 

"어인들을 한 명씩 지원해주겠다는 시장의 말을 들었을 때, 미쳤구나, 딱 그 생각이 났어요. 어쩜 저렇게 뻔뻔할 수 있을까. 어떻게 그렇게 이기적일 수 있을까. 같은 사람인데, 어떻게 저렇게 소유물 대하듯 잔인해질 수 있는 걸까. 그래서 원래는, 지원 안 받으려고 했어요. 그렇잖아요. 자세한 내막은 몰라도 어떤 일이 있었을지 뻔한데, 어떻게 뻔뻔하게 알겠다고 지원해주셔서 감사하다고 할 수 있겠어요."

그때 처음 시장의 연설을 들었을 때의 역함은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인간의 탈을 뒤집어쓰고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걸까. 아니, 인간이기에 그런 이기적인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걸까.

"그런데, 지원해 줄 어인을 고르라며 수많은 어인들을 보여줄 때, 그들 사이에 서 있는 각별이의 눈을 보고 말았어요."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그 호박색 두 눈을 마주하게 된 것은, 정말 우연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눈에 담긴 감정을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은 우연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잠뜰 씨, 슬픔과 우울의 차이를 아세요?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우울하다는 건 슬픈 감정의 일부에요. 나에게 있었던 나쁜 일들을 감정으로 쏟아 부어서 더 좋은 상태가 되게 하는 거죠. 그렇지만 우울은, 그럴 힘조차 없는 상태에요. 감정의 마지막 한 자락도 끊어버리고, 그저 끝없이 가라앉는 거죠. 이 일을 하다 보면 사고로 몸과 남은 삶을 잃어버리는 자들을 만나게 되거든요. 그러다 보면, 싫어도 그게 무엇인지 알아버리게 돼요."

수많은 경험으로 알 수 있었던, 텅 빈 눈동자의 의미. 그 군중 속에서 텅 빈 두 눈동자를 지나치지 못했던 것은, 알고 싶지 않았는데도 이미 비슷한 눈을 여러 번 마주쳤던 탓이었을 거다.

"다른 어인들의 눈은, 그래도 감정이 담겨있었어요. 이 자리에 온 것이 억울하다는 울분, 고향을 떠나온 것에 대한 슬픔, 어쩔 수 없으니 받아들이자는 체념, 새로운 곳에 대한 두려움 등등.... 저마다 무언가의 감정이 담겨 있었지요. 그 눈을 보는 것, 그 감정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무거웠는데, 각별이의 눈엔 그런 것조차도 담겨 있지 않았어요. 감정을 느낄 겨를 따위 없고, 더 이상 느끼고 싶지도 않다는 그 눈. 그 두 눈을 본 순간, 도저히 지나칠 수가 없었어요. 당장 거기서 꺼내주지 않으면 그대로 사라지겠다고 마음먹을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신청서를 제출했고, 각별이는 제 파트너가 되었죠."

잠뜰은 자신의 일을 하며 조용히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바느질하던 부분의 실을 매듭짓고, 가방 속에서 새로운 원단을 꺼내 필요한 만큼 길이를 잰다. 공룡은 과거의 일을 말하다가, 갑자기 재밌는 기억이 떠올랐다는 듯 가볍게 웃었다. 

"각별이가 집에 와서 어땠는지 알아요? 아주 예의 바른 척 행동했어요. 꼬박꼬박 존댓말에 부탁한 건 다 하고 말이에요. 그게 난 너무 웃겼어요. 내가 마음에 안 든다는 티 팍팍 나면서 아주 괜찮다는 척했다니까요? 하하, 그 때 기분이 참 이상했어요. 그들을 공격한 건 내가 아닌데 각별이 눈엔 다 똑같아 보일 걸 아니까 함부로 다가가기도 힘들고... 그런 와중에 얘는 나랑 말도 섞기 싫어하고. 아주 하루하루가 살얼음장이었다니깐요."

"…그건, 어쩔 수 없는 부분 아닙니까?"

공룡은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잠뜰의 반응이 새로웠는지 잠뜰 쪽을 넌지시 바라보았다. 잠뜰은 공룡과 눈을 마주치지 않고 옷감을 자르는 데 시선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옷감 쪽에 집중하고 있는 것 같진 않았다. 날붙이가 천을 자르는, 스산한 소리가 들린다.

"피해자의 입장에선 불편할 수밖에 없는 일이잖습니까. 그들이 보기엔 직접 공격한 자와 공격의 원인을 제공한 자가 별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함부로 다가가는 것조차 고통스럽게 할 수도 있으니, 원망을 듣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닙니까."

"…되게 신랄하게 말하시네요. 당한 게 많나 봐요?"

"…당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모두 당신 탓이잖아!

언젠가의 기억이 잠뜰의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온다. 누군가 원망 맺힌 목소리를 내뱉고 있고, 자신은 그 앞에 서 있다. 골든 살롱의 사장을 상징하는 배지를 내려놓고 돌아서는 순간과, 자신에게 기차표를 건네는 누군가의 모습이 어둠 속에서 떠올랐다가 이내 흩어진다. 원망을 듣는 것은 당연한 것, 그것은 오랜 시간 자신에게 되뇌었던 말이다. 익숙하고 당연해질 때까지, 계속-

"…뜰 씨, 잠뜰 씨! 이봐!"

"아."

공룡의 다급한 외침에 잠뜰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제서야 왼쪽 손가락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옷감을 자르던 가위에 옷감을 잡은 왼쪽 검지가 베여있었다. 공룡이 가위를 든 손을 잡아줘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손가락 전체가 날아갔을 뻔 했다. 

"감사합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느라 정신을 못 차려요! 아니, 이럴 때가 아니지. 붕대랑 약 가져올게요."

공룡이 붕대를 가져올 동안 잠뜰은 자신의 상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실수였다. 의뢰인을 앞에 두고 이렇게까지 과거 기억에 매몰되어선 안되었다. 이 일을 한 지 얼마나 되었는데, 가위에 손이나 베는 초보자 같은 실수를 저지르다니. 그나마 옷감에 피가 묻진 않았으니 다행인가. 공룡은 능숙한 손길로 잠뜰의 손에 붕대를 감아주었다. 공룡이 손을 빨리 잡아주어 상처는 크지 않았다.

"-당한 쪽이 아니라면."

"?"

"잠뜰 씨는, 저랑 비슷한 쪽이었나 보네요."

잠뜰은 두 눈을 깜빡였다. 붕대 매듭을 지은 공룡은 손에서 눈을 떼고 잠뜰을 올려다보았다.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잠뜰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용한 그 대답에 공룡은 작게 미소 지었다.

"하하, 그럼 우린 동지네요."

"…."

"걱정 말아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안 물어볼 테니까."

약과 붕대를 상자에 넣고, 공룡은 약 상자를 탁자 한쪽으로 치웠다. 잠뜰은 왼손을 몇 번 쥐었다 폈다 하더니 다시 작업을 이어갔다. 손이 다쳤지만 큰 상처도 아니었고, 고작 이 정도로 의뢰를 그만둘 생각도 없었다. 천이 잘리고, 실로 연결되는 소리가 몇 번 더 시간을 채웠다.

"…잠뜰 씨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어요. 아니, 맞겠죠. 그렇지만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못 할 짓 아니겠어요? 어느 쪽이든 상황을 좋아지게 하려면, 누군가는 움직여야 하는 법이죠."

공룡의 말은 시작은 느렸지만 갈수록 결심이 선 어조로 경쾌하게 빨라졌다. 그의 눈은 확신과 열정을 가지고 빛나고 있었다.

"나는, 내 최선을 다해서 나아갈 거에요. 우리의 과거가 너무 괴로운 시간으로만 남지 않게끔 말이에요. 시작점은 다르다 하더라도 지금 곁에서 일을 도와주고 있는 친구에요. 마을 사람들은 어인들에게 너무 편하게 대하지 말라고 하는데, 저는 진심으로 각별이를 제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각별도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주는 날이 와주면 좋겠고요. 내가 우리 마을 사람들이 저지른 일만 생각하며 각별이를 외면하면, 그건 내 책임에서 벗어나는 거잖아요. 뭐, 굳이 책임이 아니더라도 난 각별이와 정말 친구가 되고 싶고! 시작점이 다른 우리 두 사람의 간극을 좁히려면 꽤 험난하겠죠. 그래도 난 노력할 거에요. 내가 직접 한 일은 아니지만, 이 상황에서 벗어나게끔 돕는 것이 적어도 내 책임이라고 생각해요. 이게 내가 우리 '사람들'의 죄에 마주하는 자세에요. 도망만 쳐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아요."

공룡이 클라데스의 사람으로, 그리고 어인 각별의 파트너로 지내며 내린 결론이었다. 공룡 역시 긴 시간 동안 고민했을 것이다. 그 긴 시간동안, 공룡은 자신만의 답을 찾아내었고, 이제 그 답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옷 선물 하나 정도로 우리 사이가 변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래도 계속 노력하다 보면, 이런 어색한 대치상황에서 벗어나 어떤 형태로든 결말이 나있겠죠. 원망과 용서든, 아니면 진짜 파트너의 형태로든 말이에요. 언젠가는 자연스럽게 같이 식당에 가서 웃으며 밥을 먹을 날도 오겠죠. 혹시 몰라요? 내가 위험에 처했을 때 구하려고 달려올 정도로 친한 친구가 되었을지도 모르죠!"

아 물론, 우리 둘 다 그런 위험한 상황에 빠지지 않는 게 제일 좋겠죠? 공룡이 웃으며 덧붙였다. 잠뜰은 여전히 답이 없었다. 손을 부지런히 놀리고 있어 그의 말을 흘려듣는 것처럼 보였으나, 자신의 말을 귀담아들어 주고 있다는 것을 공룡은 알 수 있었다. 

"잠뜰 씨께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왕 같은 배를 탄 동지가 된 만큼, 잠뜰 씨도 힘내봤으면 좋겠네요. 이렇게 손에 상처 생길 정도로 걱정하지 말고요."

잠뜰은 그 말에 손을 멈추었다. 천천히, 잠뜰이 고개를 들어 공룡을 바라보았다. 

"서로 힘내봐요."

회색빛 눈동자와 검은색 눈동자가 서로 마주 본다. 

짧은 침묵이 있고, 회색빛 눈동자가 먼저 시선을 튼다. 잠뜰은 자신이 만들던 옷을 바라보며 손을 그저 놀렸다. 역시 단숨에 바뀌는 건 무리려나, 공룡은 낮게 웃으며 의자에 등을 기대고 잠뜰이 옷을 마무리 짓기를 느긋하게 기다렸다. 실을 자르는 소리, 천을 통과하는 바늘 소리, 창밖의 파도소리까지, 잔잔하게 들리는 작은 소리가 오후의 그 부엌을 채웠다.


"우와, 잠뜰 씨 실력 진짜 좋네요."

창으로 노을빛이 옅게 들어오는 시간, 공룡은 잠뜰이 완성한 옷을 들고 놀랍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후드가 있는 상의와 통이 넓은 반바지는 단순한 디자인이었지만 일하기 편해 보였다. 채도가 낮은 푸른색 옷감은 각별의 피부와 잘 어우러질 것 같았다. 옷감의 색은 자신이 각별과 함께 일하는 바다의 깊은 물색을 떠올리게 했다. 옷의 감촉이 매끄러운 것이 평범한 천에 무언가 하나 더 바른 듯하였다.

"푸른벚꽃잎과 여름별조개가루가 들어간 약품을 발라두었습니다. 염분과 습기에 옷이 상하는 것을 막아줄 것입니다."

"그런 것도 있다고요? 잠뜰 씨는 대체 어떤 세상을 돌아다니는 거예요?"

공룡이 놀랍다는 듯 웃으며 잠뜰을 바라보았다. 잠뜰은 탁자 위에 펼쳐두었던 원단과 의상도구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 작은 가방에 다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 많은 물건을 다 집어넣고, 잠뜰은 수트케이스를 덮었다. 공룡이 잠뜰을 배웅하기 위해 옷을 탁자에 내려놓고 문쪽으로 다가갔다. 잠시 말없이 가만히 서 있던 잠뜰이, 공룡에게 물었다.

"의뢰인과 저는 동지라고 하셨습니까."

"잘못을 저지른 쪽 사람들 편이라는 점에서 그렇죠?"

"의뢰인께서 요청하신 이 옷은, 의뢰인이 나아가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하셨었나요."

"그럼요, 잠뜰 씨가 제게 아주 큰 도움을 주셨죠."

공룡은 당연한 말을 한다는 듯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답을 해주었다. 질문의 의도를 알 수 없어서 의아해하며 잠뜰을 돌아본 공룡은, 조금 놀랐다. 잠뜰이 작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처음 보는 미소는 아주 작긴 했지만, 진심으로 다행이라는 기쁨이 담겨 있었다. 

"그런 면에서 도움이 되었다니, 영광입니다."

잠뜰은 이곳에 왔을 때처럼 공룡에게 정중히 인사를 하고는, 공룡을 스치고 지나갔다. 공룡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막연한 불안감이 들었다. 잠뜰의 표정이 기뻐 보였던 것은 다행이나, 그 표정이 너무 조심스러워보였다.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듯, 완벽한 타인의 이야기를 보는 것 같은 그 모습이 평범한 기쁨과는 거리가 멀어 불안했다. 공룡은 급히 잠뜰을 부르려고 몸을 돌렸으나, 이미 잠뜰의 모습은 사라져있었다. 노을빛이 집어삼킨 텅 빈 길거리만이 공룡의 시야를 채웠다.


'서로 힘내봐요.'

기차에 탄 잠뜰은 공룡의 말을 곱씹어보았다. 자신의 과거로부터 나아가고 있는 그의 모습은 당차고 빛났다. 자신이 가고 있는 길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확신에 차있었고, 자신 있게 비슷한 처지의 사람에게도 손을 내밀 수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나는 이곳에서 벗어날 준비가, 내 과거로부터 나아갈 준비가 되어 있을까?

"지금은… 다음 의뢰에 집중하자."

잠뜰은 스스로에게 다독이듯 중얼거렸다. 이것도 도망치는 것일까? 모르겠다, 지금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피곤한 듯 잠뜰은 의자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기차는 황금빛으로 부서지는 선로를 따라 다음 목적지를 향해 부드럽게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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