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옷을 의뢰하시겠습니까?

#002 불에 타지 않는 옷

초능력 세계여행 | 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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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로고등학교 정문 앞. 한 흑발의 남자가 누군가를 기다리듯 서 있다. 황금빛 눈동자는 기다리는 사람을 찾는 듯 부지런히 움직인다. 아니, 다시 보니 주변에 누군가가 자신을 보고 있지는 않은 지 경계하는 눈빛이다. 눈가에 피곤함이 짙게 묻어있었다.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에 남자의 하얀 토끼 귀가 쫑긋했다. 고동색 자켓에 하얀 크라바트를 단정히 메고, 검은색 가죽 장갑을 낀 여성이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분명 이 시대와는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그녀가 마치 그곳에 없는 듯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녀를 알아챈 건, 그녀의 발걸음이 향하고 있는 그 흑발 남자 뿐인 것 같았다. 회색 레이스로 장식된 검은색 모자 아래로 갈색 머리카락이 흔들린다. 자신 앞에 온 여성에게 남성이 조심스럽게 묻는다.

"혹시 만나기로 했던…?"

"골든 살롱 소속, 디자이너 잠뜰입니다."

잠뜰은 가볍게 허리를 굽히며 자신을 소개했다. 남성도 마주 인사하였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제가 의뢰를 드렸던 수현입니다."



"이쪽입니다."

수현은 잠뜰에게 길을 안내하며 걸어갔다. 약속 장소를 여로 고등학교로 한 것이 무색하게 그들은 꽤 긴 길을 걸어갔다. 학교가 시야에서 보이지 않을 만큼 먼 곳에 오자 구불구불한 골목길이 있었다. 수현은 그 골목에 따닥따닥 붙어있는 작은 집들 중 하나로 잠뜰을 안내했다. 

"조금 멀지요? 죄송합니다. 저희가 숨어 사는 입장이라 집 주소를 직접 적어드리기에는 너무 위험했거든요."

"괜찮습니다. 누구에게나 사정이 있기 마련 아닙니까."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손님이 오셨는데 마땅히 내드릴 게 없네요."

수현은 미안한 웃음을 지으며 따뜻한 물 두 잔을 내왔다. 잠뜰은 고맙다며 컵을 받아 부엌 의자에 앉았다. 작은 집에 네 명이 같이 사는 것인지 탁자 주위에 의자가 네 개 있었다. 

탁자 위에 놓인 작은 액자가 잠뜰의 눈에 들어왔다. 일곱 살쯤 되었을까? 어린 남자아이 세 명이 앞의 의뢰자와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짓고 있는 짙은 갈색 머리카락의 아이와, 졸린 표정을 짓고 있는 연갈색 머리의 아이, 그리고 조금 겁에 질린 것 같은 표정의 하늘색 머리카락의 아이가 찍혀있었다. 

"이 집에서 아이들과 함께 사시는 겁니까?"

"아, 네. 세 아이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지금은 요 앞에 놀러 갔는데 아마 저녁쯤에 돌아올 겁니다."

"그렇습니까."

잠뜰은 물 한 모금을 홀짝였다. 차나 커피 같은 기호품을 누릴 수 없는 환경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어차피 그런 것들에는 큰 신경을 쓰지 않았다. 수현은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실은 오늘 의뢰가 아이들과 관련이 있습니다."

"아이들의 옷 제작을 맡기시는 겁니까?"

"아뇨, 아뇨. 옷은 제가 입을 거예요. 그것이…."

수현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하다는 듯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어디까지 밝혀도 되는지 고민했다는 것이 조금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음…잠뜰씨께선 초능력이 있다고 믿으시나요?"

"초능력이요?"

"그러니까, 마법 같은 거 말이에요."

수현은 잔뜩 긴장한 눈으로 잠뜰을 바라보았다. 잠뜰은 수현의 말뜻을 잠시 생각해보다가, 물을 한 모금 다시 마시고, 컵을 내려놓았다.

"믿습니다."

"…정말요?"

"당장 제가 의뢰인 분을 만나러 온 과정이 마법 아니면 설명이 불가능하거든요."

잠뜰은 자신이 이곳에 오기 위해 타고 온 기차를 생각했다. 하늘에 난 선로를 따라 황금빛 가루가 흩날리는 기차를 타고 다니는 것을 마법 말고 다른 것으로 설명하는 것이 더 어려울 것이다. 수현은 초능력의 존재를 단박에 믿는다고 말하는 잠뜰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잠뜰 씨가 살던 세상은 이런 능력이 널리 알려진 곳이었나요?"

"아니요, 저도 이 일을 하기 전엔 마법의 존재도 몰랐습니다."

"그렇군요. 이곳도 마찬가지입니다. 대중에게 마법, 그러니까 초능력의 존재 같은 건 알려져 있지 않아요. 하지만 알려지지 않았다고, 존재를 믿는 사람들이 적다고, 초능력을 가진 이들이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에요. 잠뜰 씨, 당신이 물었던 이 사진 속의 아이들은, 초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수현은 탁자 위의 사진에 눈길을 주었다. 아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눈에 담는다. 따뜻하지만 조금은 쓸쓸한 시선이다.

"의뢰를 드리는 입장에서, 숨기는 게 있어선 안 되겠죠.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이 세상에서도 초능력은 흔한 것도, 잘 알려진 것도 아니에요. 그 이유는... 이 능력이 자연발생적인 것이 아니라, 연구실에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컵을 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짧은 침묵이 이어진다. 말하기 힘든 것을 목 아래서 겨우겨우 끌어내어, 입 밖으로 어떻게든 내뱉으려고 하는 것 같았다.

"저는…그 비인도적인 일에 참여했던 사람입니다."

"…."

"연구실에서 제 역할은 그 아이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그들의 상태를 체크하는 것이었습니다. 경계심이 강해져 연구원들의 말을 못 듣게 하는 상황을 막고, 아이들을 좋은 말로 설득하여 실험을 원활히 진행하는 것이 제가 하는 일이었죠. 아이들이 그런 일을 당할 때도, 늘 웃으며…."

수현은 말끝을 흐렸다. 자신의 과거를 꺼내놓는 것이 괴로워 보였다. 잠뜰은 말없이 그를 기다렸다. 다시 입을 연 수현은, 이번엔 사진을 바라보지 못했다.

"그렇게…그렇게 꾸역꾸역 살다가, 더 이상은 도저히 못하겠어서, 그곳에서 나왔어요. 아픈데도 꾹 참고 괜찮다고 하는 아이들 말을 듣는 게 싫어서, 성과를 냈다고 칭찬을 듣는 것도 구역질이 나서… 내가 아직 일말의 양심은 지킬 수 있는 사람이길 바라서, 아이들의 손을 잡고 그곳에서 나왔어요. 그 뒤로 연구소의 추적을 피하느라 이곳저곳 옮겨 지냈고… 지금은 보다시피 이곳에서 잠시 지내고 있죠."

잠뜰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만나자고 한 곳이 집에서 그렇게나 멀리 떨어진 곳인 이유를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전 그 아이들에게 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해달라고 할 수도 없을 만큼 큰 죄를요. 지금은 어리니까 잘 몰라서 웃을 수 있는 거겠죠. 나중에 아이들이 커서, 나와 그 연구소가 자신들에게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아는 날이 온다면, 아마 아이들은… 더이상 제 앞에서 웃어주지 않겠죠. 그렇다는 것은 아이들이 그곳이 얼마나 잘못된 곳인지 깨달은 거니, 기뻐해야 하겠지만… 지금은 그게, 조금 먼 미래이길 바라는 작은 욕심을 부리게 되네요."

수현은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죄책감이 그를 크게 짓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하하, 이야기가 새버렸네요. 오늘 의뢰 드릴 사항은 막내 아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불을 사용하는 능력을 가졌는데, 능력이 안정화되지 않았어요."

수현은 멋쩍게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그는 이 아이라며 사진 속 하늘색 머리카락 아이를 가리켰다. 

"연구소에 있었을 땐 방화의복이 잘 갖춰져 있었어요. 그냥 평범한 장갑처럼 보이던 것도 다 비싼 방화도료가 엄청나게 발라져 있어서 행여 아이들이 다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됐죠. 그런데 연구소를 탈출한 후엔 다 버렸어요. 아이들에게 무서운 기억으로 남을까 싶기도 하였고, 그런 끔찍한 곳에 있었다는 과거를 버리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나온 이후에 아이가 실수로 능력을 잘못 사용해서 제가 화상을 입은 일이 있었거든요."

아, 크게는 안 다쳤어요. 수현은 걱정하지 말라며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다만… 아이가 그 이후로는 저에게 다가오는 걸 두려워하더라고요. 저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들에게도요."

"…."

"큰아이들 중 하나는 공간을 이동하는 능력이 있거든요? 예전에 화상 입었을 때도 재빨리 물이 있는 곳으로 이동해서 크게 안 다친 거였고…. 어쨌든 그러니까 자기는 다치기 전에 피할 수 있으니 괜찮다고 말해도 아이가 끝까지 안 듣더라고요. 다른 아이는 사람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데…. 막내아이 생각을 읽으니까 저 몰래 떠날 생각까지 하고 있더래요. 다행히 설득해서 말렸지만…."

긴 한숨이 수현의 말 사이로 새어 나온다. 그날의 불안해하던 아이들의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저는 다쳐도 상관없고, 아이도 곧 능력을 잘 다룰 수 있게 될 거라고 믿는데, 아이가 너무 불안해하더라고요.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잠도 제대로 못 자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아이가 안심하게끔, 불에 타지 않는 옷을 입고 다가가면 괜찮겠냐고 물어봤어요. 그러면 아이가 만에 하나 실수하더라도 아무도 안 다칠 거라고 했더니, 그건 안심이 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찾아보는데…. 가격도 가격이지만 하루종일 입고 다닐 만큼 가벼운 소재로 만들 수 있는 곳은 많지 않더라고요. 예전에 연구소 시절에 의뢰했던 공방에 연락하면 틀림없이 꼬리를 밟힐 테니 그럴 수도 없고…."

수현은 과거의 이야기를 마치고 잠뜰을 바라보았다. 회색 눈동자가 그를 마주 본다.

"그런 와중에, 당신에 대한 소식을 들었어요. 어떤 옷도 만들어 줄 수 있다고,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옷들도 의뢰하면 만들어주는 사람이라고."

조사해도 정보도 신원도 나오지 않는 이상한 사람, 그러나 그렇기에 신원 없이 쫓기고 있는 자신들이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 수현에게 잠뜰은, 가장 절박한 상황에 몰린 자신에게 온 유일한 기회였다.

"저희를, 도와주실 수 있나요?"

수현의 황금색 눈동자가 간절한 빛을 내었다. 잠뜰은 그 눈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녀의 지난 여정에서, 그와 같은 눈동자를 만나본 게 몇 번이더라. 숫자를 세는 것을 포기하는 건 언제쯤이었더라. 

자신이 그 눈동자를 했던 건-

"알겠습니다."

마지막 생각을 잠뜰은 급하게 머릿속에서 지웠다. 긴장되었던 수현의 표정이 단번에 기쁨으로 물들었다.

"정말 가능한 건가요??"

"불에 타지 않고, 입을 때 불편함이 없이 가벼운 옷을 만드는 거라면, 좋은 재료가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옷이 만들어지는 데 몇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의뢰인께선 그동안 한숨 주무십시오."

"네? 손님을 모셔두고 그럴 수는…."

"최근에 잠을 잘 못 주무셨잖습니까. 상태가 안 좋은 게 눈에 훤히 보입니다. 아이들도 중요하지만, 의뢰인께서 쓰러지기라도 하면 그게 더 큰 일이잖습니까."

잠뜰의 말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수현은 결국 알겠다며 배려에 감사하다고 하였다. 잠뜰은 수현의 치수를 잰 후 옷이 완성되면 깨우겠다고 하였다. 

수현이 방에 들어가고 나서, 잠뜰은 가방을 뒤적여 재료를 찾았다. 옷감 몇 개를 보다가,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잠뜰은 그것들을 다 다시 넣고 커다란 실타래를 하나 꺼냈다. 뜨개질은 오랜만인걸, 속으로만 그렇게 말하며 잠뜰은 손을 움직였다.



똑똑, 노크 소리에 수현은 퍼뜩 잠에서 깼다. 시계를 보니 시간이 꽤 많이 흘러있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잠을 잔 게 얼마 만이더라? 수현은 급히 옷매무새를 다듬곤 문을 열었다.

"잠뜰 씨!"

"옷이 완성되었습니다. 입어보십시오."

잠뜰은 수현에게 옷을 건넸다. 수현은 떨리는 손으로 잠뜰에게서 옷을 받아 들었다.

잠뜰이 준 옷은 평범한 가디건처럼 보였다. 보라색 실로 뜨개질을 해서 만든, 가벼우면서도 부드러운 옷이었다. 그런데 만져보면 평범한 실과는 다른 감촉인 게 느껴졌다. 옷을 입어보니 품이 넉넉하면서도 부한 느낌 없이 수현에게 딱 맞았다. 잠뜰이 시범을 보여주겠다는 듯 성냥을 꺼내 옷에 불을 가까이 댔는데, 옷은 그을림 하나 없었고 불의 열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놀란 토끼 눈이 된 수현에게 잠뜰이 설명해주었다.

"용암지대에서 자라는 반달꽃의 꽃가루를 사용하였으니 웬만한 불에는 타지 않을 것입니다."

"놀랍군요, 그런 것도 있나요?"

"의뢰자분께선 순간이동도 하고, 정신도 읽고, 불도 다루는 아이를 돌보고 계시는데, 아직도 놀랄 일이 남아있으십니까."

"하하, 그렇네요. 이런 게 진짜 가능하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만족하십니까?"

"네, 물론입니다. 이제 아이를 더 가까이서 돌봐줄 수 있게 됐어요."

"…."

잠뜰은 밝게 웃는 수현을 잠시 응시하다, 이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의뢰인께선, 진심으로 아이들을 아끼시고 계시군요."

"…그렇게 좋은 단어로 표현할 일은 아닙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잖아요. 제 잘못으로 그리된 아이들이니, 제가 책임지는 것뿐-"

"의뢰인."

자신을 부르는 잠뜰의 목소리에, 수현은 옷에서 눈을 떼고 잠뜰을 바라보았다. 잠뜰은 표정은 옅게 웃고 있었지만, 미소가 늘 기쁠 때만 짓는 것이 아니란 것은 그가 제일 잘 알고 있다.

"정과 죄책감을 착각하지 말아주십시오. 죄책감은…."

울부짖는 누군가의 짧은 순간이 잠뜰의 머릿속에 떠오른다. 멍하니 무언가만을 바라보는 과거의 잠뜰의 시간이 짧게 스치고 지나간다.

"…정말 필요한 이들만 가져야 하는 감정입니다."

그 말을 하는 잠뜰은, 수현이 그녀를 이곳에 데려온 후 처음으로 보이는 감정표현인 것 같았다. 그 감정이 무엇인지 정확히 집어낼 수 없었다. 죄책과 후회가 설핏 느껴졌다. 그러나 아주 잠시, 착각이라 느껴질 법한 짧은 시간이었을 뿐이다. 

"의뢰인께선 지나친 죄책감을 가지고 계십니다. 의뢰인께선 아이들을 그곳에서 살려낸 분이십니다. 잘못된 것을 깨닫고 바르게 행동했습니다. 세상엔 잘못되었다는 것도 모르는 이들이 많고, 알면서도 그릇되게 행동하는 이들은 그것보다 훨씬 많습니다. 의뢰인께선 적어도, 그들보다는 훨씬 좋은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내가 죄인인 것이 변하지 않습니다. 내가 그 아이들을 아낀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내 죄를 덜기 위한 자기 위안일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진심이 아닌지는, 의뢰인의 손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옷을 만드는 사람이라, 손으로 사람을 보거든요."

"제 손이요?"

"이전에는 실험실의 연구자라고 하셨잖습니까. 손이 거칠어질 일은 없는 자리이지요. 그렇지만 의뢰자분의 자질구레한 흉터도 있을 만큼 거칠지 않습니까. 아이들에게 진심이 아닌 자는, 그 손이 이리 거칠어질 리 없는 법입니다."

수현은 멍하니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자신도 모르는 새에 흉이 많이 져 있었다. 연구소에서 탈출한 이후로, 아이들을 배곯지 않게 하려고 생전 해보지도 못한 일들을 하며 돈을 벌고, 추적을 피하고자 늘 긴장하며 살다 보니, 그 처절한 과정에서 흉이 생긴 줄도 모르고 살아왔나보다. 

"저는… 제 손이 이리된 지도 몰랐습니다."

"의뢰인께서 아이들을 진심으로 위하는 마음도, 그렇게 단순히 깨닫지 못했을 뿐인 겁니다."

"…."

"죄책감에 짓눌려 아이들을 아끼는 자신을, 그리고 의뢰인분을 진심으로 아끼는 아이들의 마음도 부정하지 말아주십시오. 제 추측이지만, 그 아이들은 아마 의뢰인의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이, 진심으로 의뢰인분을 아끼고 있을 것입니다."

수현은 옷소매를 만지작거리며 식탁 위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탈출해서, 그 팔찌를 끊고, 정신없이 도망치다가 숨을 돌리는 마을에서, 공룡이가 떼를 써서 찍은 사진이었다. 보고서에 넣기 위한 사진이 아니라, 처음으로 찍고 싶어서 찍은, 자유를 얻은 후의 첫 사진이었다. 아무리 추운 곳으로 도망쳐도 불평하지 않고 도리어 자기를 걱정해주던 아이들, 자신이 피곤을 못 이기고 깜빡 졸았을 때 지켜주겠다며 자신을 빙 둘러싸고 망을 보던 아이들이었다. 자신을 위해주는 것이 어린아이들이 잘 몰라서라고만 생각하고 그들로부터 눈을 돌렸었다. 알고 있지만 아니라고 애써 부정하고 책임감으로만 응하겠다고 다짐했었다. 

이제는, 그 외롭고 괴로운 기억에서, 벗어나도 괜찮은 걸까?

"제가 정말, 그리해도 괜찮을까요?"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다. 그가 가장 바라왔던 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죄책감과 책임감으로 스스로를 누르고 있었지만, 그라고 그것을 정말 원했을 리가 없었다. 

잠뜰은 고개를 끄덕였다. 짧은 반응이었지만 그만큼 명확했다. 수현은 명쾌한 그녀의 대답에 짧게 웃었다. 나중에 당신과 닮은 사람을 만나면, 재밌는 관계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 우스개 농담을 한다. 

"저는, 우리의 이야기가 해피엔딩이었으면 좋겠어요. 초능력을 가져서 특별한 것이 아니라, 그 존재 자체만으로 특별하다는 것을 아이들이 알길 바라요. 능력은 그들의 일부일 뿐이지 그들의 전부가 아니라고요. 그렇기에 두려워할 필요도, 부담감 가질 필요도 없다는 것을 알면 좋겠어요. 괴로웠을지도 모르는 그 과거를 전부 잊을 수 있을 만큼 행복한 새로운 시간들을, 아주 많이 쌓을 수 있길 바라요. 그렇게 해서 아이들이 아주 행복한 결말을 가지길 바라요."

"그 결말 속에, 의뢰인께서도 분명히 있을 겁니다."

수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서 잠뜰의 의뢰는 끝났다. 짐을 정리하고 나서려 하자 수현이 아쉬워하며 불러세웠다. 

"벌써 가십니까? 먼 길 오시느라 힘드셨을 텐데 더 쉬다 가시지 않고요. 아이들도 곧 돌아올 텐데, 소개해드리고 싶습니다."

"호의에 감사드리지만, 디자이너는 꽤 바쁜 몸인지라. 마음만 받겠습니다."

아쉬워하는 수현의 배웅을 받으며 잠뜰은 길목을 나섰다. 또각거리는 검은 구두의 소리가 길거리에 울린다. 다음 장소로 가기 위해 자신의 기차역으로 향하며, 잠뜰은 스스로를 자책하던 수현의 모습을 떠올렸다.

"죄책감이라."

발걸음을 멈춘다. 모자챙이 아래로 내려가 잠뜰의 표정이 어둡게 그늘졌다. 작은 혼잣말이 이어진다.

"그런 건 저한테나 어울리는 말입니다, 의뢰인 분."

다시 구두 소리가 이어진다. 어두운 골목길로 빨려 들어가듯 소리가 이어진다. 스스로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가듯, 나올 생각도 수단도 없다는 듯 소리가 저편으로 멀어져간다. 언제까지 이어질지 알 수 없는 소리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을 것이다. 그 소리를 내고 있는 당사자 역시,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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