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은 기적이 아니다

3. 정말 그렇게 생각해?

마법은 기적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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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는데도 안 와서, 데리러 왔어요.”

잠뜰의 회색 눈동자가 창밖 밤하늘의 별빛을 가득 담은 채로 커졌다. 부드럽게 미소 짓는 그 얼굴로부터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의 옷에 별처럼 반짝이는 건 하나도 없었는데도 어째선지 밤하늘을 닮은 것 같다고 생각해 버렸다. 책 속 한 장면을 그대로 잘라내어 마법으로 칠해 빚은 상황 같았다. 이곳에서 재회할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아니, 애초에 재회할 생각 자체가 없었다.

“진…짜 공룡이야?”

“설마 했는데, 진짜 나 못 알아본 거예요? 이거 실망이네.”

“우리가 마지막으로 본 게 거의 십년 전인데, 내가 어떻게 알아봐. 그냥 좀 닮은 사람이구나 싶었지.”

“그래요? 난 한 번에 알아봤는데.”

공룡이 키득 웃었다. 잠뜰은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고 긴장한 눈으로 공룡을 노려보았다. 진짜 옛친구라 하여도 수상쩍은 게 한둘이 아녔고, 진짜 공룡이라면 현재 자신의 모습 따위 더더욱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우리가 같은 게임에 참가한 거, 우연이야?”

“우연이었으면 좋겠어요?”

“말 돌리지 마.”

“말은 그쪽이 돌리고 있는 거 아니에요?”

“내가 뭘?”

“나한테 할 말 없어요?”

부드러운 어조로 공룡이 물었다. 잠뜰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가, 이내 말뜻을 이해하였다. 그러나 잠뜰은 말을 하는 대신 입술을 꼭 다물었다. 대답 없는 그녀의 반응에 공룡은 작게 웃으며 한숨을 쉬었다.

“우리, 되게 오랜만에 만났는데.”

“….”

“당신이 한마디 말도 없이 이런 낯선 나라로 도망쳐버린 후 처음 만나는 거잖아요, 안 그래요?”

웃는 표정은 여전했지만 조금 전보다 말투가 약간 뾰족해졌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원망이 담겨있는 듯했다.

“어린 시절 나는 되게 순진했던 것 같아요. 기다리고 있으면 당신한테 연락이 올 줄 알고, 얌전히 기다렸죠. 늘 그랬으니까. 먼저 연락해봤자 돌아올 답은 지금은 나올 수 없다는 똑같은 답일 게 뻔했고, 아무리 오래 걸려도 그래도 연락을 해줬으니까. 그런데 그렇게 오래 기다렸더니 연락은 당신이 아니라 부동산 업자한테서 듣게 되었더라고요? 얼마 전에 좋은 땅이 통째로 경매에 나와서, 있던 거 다 허물고 새로운 건물 지을 거라고요. 어릴 때 닳도록 문턱을 넘었던, 당신 집이 있던 땅에 말이죠.”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땐, 믿지 않았다. 믿을 수 없었다. 연락이 올 시기가 평소보다 한참 늦긴 하였다. 기다리던 것이 달 단위가 아니라 년 단위가 되었을 때, 불안한 마음이 스멀스멀 마음속에서 피어올랐었다. 하지만 그래도 기다렸다. 네가 10살이 된 이후로, 연락은 매번 더 늦어져 왔으니까. 그때마다 평소보다 연락이 늦어 걱정하여도, 결국 너는 매번 다시 연락을 주었었으니까. 지나치게 늦어지는 것이 걱정이 되었지만, 마지막에 그렇게 헤어졌기에 쉽사리 연락하지 못했다. 그것이 너를 존중하고 친구로서의 우리 관계를 지킬 방법이라고 믿었으니까.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만큼 뛰어 도착한 곳에서, 내가 뭘 봤을 거라 생각해요?”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줄 알았던 거대한 저택이 전부 무너진 것을 눈으로 보고서야, 그제야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먼지만 날리는 황무지 사이에서 정신을 놓은 사람처럼 터덜터덜 걸었었다. 함께 다과를 먹었던 정원이, 시답잖은 무도 대회를 열었던 홀이, 같이 밤하늘을 구경했던 다락방이. 어린 시절을 다채로운 감정으로 가득 채웠던 공간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사라져있었다. 벽이나 담장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무너진 돌무더기를 여린 손으로 뒤적였다. 손바닥이 다 까져 피가 맺혔는데도 그만두질 못했다. 그럴 리 없다고 주문처럼 되뇌며, 무슨 환각 마법이라도 걸린 게 틀림없다며, 결계 해제 스크롤을 몇장이나 날렸는지 모른다. 뒤늦게 찾아온 가정교사가 자신을 말리며, 아무것도 없음을 확인시켜 줘서야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있죠, 그때 난 꼬맹이는 아니었지만, 어른도 아니었어요. 그런 미숙한 아이의 하나밖에 없던 친구가, 반평생을 함께하고 앞으로도 함께할 거라고 믿었던 사람이, 한마디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는 걸 알았을 때 어떤 기분이었을 것 같아요?”

“….”

“그 당시 나한테 위안 삼을 수 있던 건, 당신의 이름을 장례식장에서 발견 못했던 것 뿐이라고요. 내가, 당신의 평소 몸 상태를 어렴풋이 알던 내가, 무슨 생각까지 했는데….”

웃으면서 말을 이어가던 공룡의 말이, 잠시 멈췄다. 하필이면 달빛이 잠시 그늘져서 그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둘 다 차라리 표정이 가려져 다행이라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잠시간의 정적 후, 공룡은 다시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그 뒤로 몇 달을 당신 흔적을 찾는 데 썼어요. 당신의 저택에서 일했던 시종들의 흔적을 좇고, 저택과 사업장을 산 쪽을 찾아가 돈을 어디로 어떻게 전달했는지 추적했죠. 당신 주치의로 일했던 사람이 어디로 새로 출장을 가진 않는지, 빚이 있다던 은행엔 서류가 남아있는 건 아닌지. 단서가 될 수 있는 건 전부 찾았어요.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은 하나같이 ‘모른다’더라고요?”

은행빚은 이미 깔끔하게 갚았고, 사업장이나 저택 매매 문서는 서류처리가 완료되어서 이전주인에 대한 정보가 없다고 하였다. 사용인들은 워낙 소수였는데다 대부분 다른 나라로 이동했고, 그나마 국내에서 다른 가문으로 이동한 사람들도 본인들도 하루아침에 퇴직금 받고 쫓겨난 거라 그 뒷이야기는 모른다고 하였다. 주치의도 마지막에 진통제로 사용될 약을 평소보다 많이 받아 간 채로 계약이 끝나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였다.

정보를 추적할 수 있는 방도가 모두 끊겼다. 갓 성인이 된 애송이의 방법으로는 도저히 작정하고 잠적한 잠뜰을 찾아낼 수 없었다.

“그래서 마법을 이용하기로 했어요. 스크롤이 있어야 겨우 마법을 쓰던 애송이가 이젠 맨손으로 이렇게 11층 창문으로 올라오는 마법도 쓸 수 있다고요. 대단하죠?”

가지고 있는 것을 전부 이용하기로 하였다. 가문의 인맥, 비전 마법, 자신의 마력까지 전부. 기술의 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의 방법으로는 추적이 불가능해진 이상, 마법으로 기적을 일으켜보기로 하였다.

그날부터 필사적으로 마법을 배웠다. 손에 물집이 잡히도록 마법진을 베껴 썼고, 리바운드가 올 때까지 마력 운용을 연습했다. 유능한 가정교사가 있었기에, 지나치게 무리한다고 걱정을 받는 것 이외에는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어린 시절 도망치기 바빴던 가문 서고의 사서로부터도 책의 내용에 대해 직접 배우기도 하였다. 그 덕에 비약적으로 성장한 마력을 근거로 가주의 자리를 일찍 이어받은 공룡은, 자신의 가문의 영향력을 점차 확대해나가기 시작했다. 기술 시대에 숨어지내는 다른 마법 가문과도 연을 적극적으로 이어가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의 범위와 수사망을 넓혀갔다. 특수부대라고 이름을 가려놓은 마법사들의 부대에도 참여하여 마법을 이용하여 정보를 찾았다. 그 과정에서 마법사들 사이에서 가문의 위치는 공고해졌고, 덕분에 더 많은 가문의 협력을 얻어낼 수도 있었다. 어떤 ‘특별 협력’ 건은 성공시키느라 억 단위의 부채도 발생하였으나,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기도 하였다.

‘키가 좀 컸나.’

그렇게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려가던 어느 날, 공룡은 문득 거울에 비친 자신의 눈높이가 조금 높아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계절은 함께했던 어린 시절보다 더 빠르게 변해갔고, 공룡의 키는 그 시절로부터 한참이나 자라있었다. 손의 크기도, 목소리도, 서 있는 자세조차도 변해서 어린 시절과 똑같은 것은 친구와 똑같은 갈색 머리카락 정도였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공룡은 문득 불안해졌다. 다시 만난다면 너는 나를 알아볼 수 있을까? 이렇게나 많이 변했는데. 그리고, 나는? 다시 너를 만난다면 나는, 너를 알아볼 수 있을까? 내가 변한 만큼 너도 변했을 텐데. 우리 둘 다 너무 변해버려서, 함께한 시간보다 떨어져 있던 시간이 길어져서, 이대로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치면 어떡하지?

‘….’

하지만 그렇다고 수색을 포기할 순 없었다. 고작 그런 ‘만에 하나’를 상상하며 그만두기엔 그들은 서로밖에 없는 친구였다. 현재가 어떻든 과거의 그 사실만은 변치 않는 진실이었다. 그러니 이런 식으로 끝나선 안 되었다. 마지막 만남의 형태가 어떻게 되든, 잠뜰에게서 직접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그걸 위해 그 ‘특별 협력’도 했던 것이니까.

몇 년간의 긴 추적 끝에, 마침내 잠뜰이 마지막으로 이동한 나라를 특정할 수도 있었다. 흥신소 형태의 회사를 운영하기 시작한 것은 그쯤이었다. 정보가 될 만한 의뢰는 전부 받아들였다.

‘…찾았다.’

그리고 마침내, 실버 소프트 사와 연관된 의뢰를 받았을 때. 하얀 서류 몇 장 사이에서, 너를 발견할 수 있었다.

힘들게 찾은 너를 이깟 게임에서 잃을 수는 없었다. 부자들의 악취미로나 보이는 게임 따위에 기회를 빼앗길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 회사에 잠입하여 게임을 전부 부수고, 단 두 가지의 원칙을 세워 게임을 다시 만들었다. 하나는 내가 이 게임에서 우승하는 것, 다른 하나는 너를 죽게 하지 않는 것.

그 모든 것을 이룬 지금, 남은 것은 너를 만나러 가는 것뿐이었다.


마법은 기적이 아니다

3. 정말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내가 지금 널 반갑게 맞이해주길 바라는 거야?”

잠뜰은 냉소를 머금으며 입을 열었다. 회색 눈동자가 공룡을 노려본다. 입꼬리는 괴롭게 비틀린 듯 올라가 있다.

“그래, 나도 너 엄청 보고 싶었어. 이 게임의 상금 전부 채간 너한테서 어떻게 해야 돈을 뺏어올 수 있을까, 그 생각만 했거든!”

목소리가 격양되었다. 처음엔 작게 나오던 목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자신을 몇 년 만에 만나러 와준 친구라는 생각보다는, 자신의 상태를 다 들켜버렸다는 불안이 더 크게 작용했다.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에 자신을 막아줄 이성은 사라져버리고, 채 다듬지 못한 감정이 멋대로 발산되었다.

“게임 설계자랬지? 그럼 내 정보 다 봤을 거 아냐? 나한텐 돈이 필요해. 희소병이라 약값이 한두 푼 드는 게 아니야. 약을 복용해도 간헐적으로 쓰러지는 날이 있어서 입원비용도 필요하고 그런 날은 일을 전혀 못해. 돈을 벌 방법이 없는 나한텐 이게 살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어. 그런데 결국 우승은 네가 했더라? 하! 아까 장례식장에서 내 이름 발견 못 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댔나? 조금 기다리면 진짜 볼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런데 이제 와서 어린 시절 운운하면서 찾아오면, 내가 뭘 말해주길 바라는 거야?”

적당히 말을 내뱉으려던 입은 점점 제멋대로 움직였다. 그 말에 진심이 어느 정도 담겼는지 거짓은 또 얼마나 담겼는지 내뱉는 잠뜰도 알 수 없었고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저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저 두 개의 검은 눈동자의 시야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공룡의 표정에서 이전까지 짓던 웃음은 사라져있었지만, 아무 말 없이 잠뜰을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 표정이, 그의 태도가, 왜인지 마주 보기 거북했다.

“아무 말도 못 하네? 왜? 실망했어? 고작 열 살도 안 됐던 시절에 시작해서, 성인이 되기도 전에 끊긴 옛날 인연 하나 가지고 여기까지 온 거야? 그때의 여유롭고 밝게 웃던 아이 생각하며 온갖 고생 하며 찾아왔더니, 돈에 찌든 사람만 남아있어서 실망했지? 그런데 어떡하냐? 그게 사실인데. 안타깝게 되었네요 하면서 박수는 쳐줄 수 있는데! 그거 듣고 그만 가줄래? 네 표정 보고 있기 역겹거든?”

우리는 다시는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어.

큰소리를 연달아 내느라 호흡이 가빴다. 잠뜰은 공룡으로부터 고개를 돌리고 숨을 골랐다. 이걸로 끝이다. 어린 시절을 가득 채웠던 추억을 끊어내었다. 무엇이 어렵겠는가, 이미 가족 같은 사람들에게서도 도망쳐왔는데. 이제 와서 유일한 친구 하나에게 더 그렇게 한들 크게 달라질 것 없었다. 몇 년 만에 다시 이어가기엔 진작 끊긴 관계고, 망가진 관계를 다시 여유롭게 이어붙일 시간도 자신에겐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실망했냐고 물었나요? 네, 맞아요. 실망했어요.”

그리고 그 결과로 당연한 대답이 돌아온다.

잠뜰은 자신의 주먹을 꾹 쥐었다. 새삼스러울 거 없었다.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는데도, 막상 직접 듣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나 보다. 시선을 맞추고는 아무렇지 않게 보낼 수 없을 것 같아 잠뜰은 고개를 돌렸다.

“…그래, 실망하게 해서 미안하네. 그러니 이제 그만-”

“당신 말고, 나한테.”

끊어진 뒷말을 쉽게 잇지 못했다. 예상하고 있던 대답이 아니었다. 농담하는 말투도 아니었다. 당황한 잠뜰이 묻기 전에 공룡이 먼저 말을 이었다.

“당신이 이렇게 말하면서 스스로 상처받으며 사람을 내쫓게 되기 전에, 좀 더 빨리 찾아왔어야 했는데. 왜 나는 그렇게 어렸는지. 힘이 없었던 나한테 실망이네요.”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집사님과 경호원님께도 이런 식으로 말했던 거죠?”

쿵, 심장이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잠뜰은 공룡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예상치 못했던 두 사람을 지칭하는 단어의 등장에 심장 고동이 빨라진다. 이건 몇 년 만에 재회한 친구 관계를 정리하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였다.

왜 네 입에서 그 두 사람이 나와?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야?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의문이 순식간에 속에 쌓였다. 당황과 함께 약간의 격한 감정도 차오르는 것 같았다. 네가 뭔데, 나도 묻어두고 아껴서 꺼내보는 그 두 사람 이야기를 함부로 꺼내?

“진심을 숨기고 일부러 정떨어지게 저급한 말만 골라 말해서, 상대가 당신한테 실망해서 떠나게 하려고 일부러 가시 돋친 말만 골라 하는 거. 지금 나한테 한 것처럼 두 사람을 떠나보낸 거 아니에요? 피해 끼치기 싫어서.”

“무슨, 소리를…허, 그렇게라도 믿고 싶은 네 착각이겠지.”

“물론 당신이 한 말이 전부가 거짓은 아니겠죠. 하지만 전부 진심인 것도 아니잖아요?”

공룡은 그 말을 하며, 잠뜰 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한 발짝, 두 발짝. 잠뜰의 감정을 따라 그 역시 약간 격양되었는지, 걸어오는 발걸음 소리 사이로 그의 목소리가 점점 크게 들렸다.

“애초에 오래 살고 싶으면 집사님과 경호원님을 두고 혼자 왔을 리도 없죠. 혼자보단 그 사람들의 도움을 받는 게 당연히 당신 몸 상태를 생각하면 현실적으로 의미가 있을 테니까. 그 사람들에게 신경 쓰고 싶지 않게 하고 싶어서 혼자 떠났다 해도 적어도 주치의와는 자세히 상의했을 테고요. 하지만 그것도 없이 그냥 혼자 도망치듯 여기까지 온 거면 그렇게 세세하게 고려할 만큼 병을 이겨내고 싶은 건 아니었잖아요.”

“적당히 해. 네가 뭘 안다고 지껄여?”

“내가 왜 모를 거라고 생각해요? 더 아는 걸 말해볼까요? 당신은 그렇다고 당신을 그대로 포기하고 싶지도 않았다는 거. 그래서 나라를 이동하면서도 계속 일을 하려고 했었고. 이 게임에도 참가할 만큼 절박한 순간도 있었다는 거. 한 가지 선택에 마음을 다 쏟기엔 당신은 너무 벅차 있었고, 그렇기에 그대로 포기하고 싶은 마음과 살고 싶은 마음 다 진심이었다는 거. 떠났을 당시에 그 두 가지 진심 중에서 한 가지만 내보였을 뿐이라는 거. 그래서 진심인 동시에 거짓이라는 걸, 내가 정말 모를 것 같아요?”

머릿속을 훤히 내보이는 것만 같았다. 잠뜰은 정곡을 꿰뚫는 말을 하며 다가오는 공룡이 불편하여,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나려 하였다. 하지만 애초에 벽 쪽에 가까이 있었던 데다 방 역시 작아서, 공룡은 어느새 코앞까지 와 있었다. 살짝 허리를 숙여 잠뜰과 눈을 맞춘 공룡은 확신에 찬 듯 웃었다.

“어때요? 꽤 잘 맞죠?”

“…너…!”

“하하, 당신이 어린 시절과 너무 변해버려서 내가 못 알아보면 어떡하지 걱정했었는데, 필요 없었네요. 그 솔직하지 못한 행동과 그에 비해 눈에 빤히 보이는 생각 같은 건 어린 시절이랑 똑같네요.”

심리적 압박을 가하려는 의도로 거리를 좁힌 거였는지, 공룡은 원하는 반응을 끌어내고는 여유롭게 웃으며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덕분에 잔뜩 긴장하던 몸이 조금은 풀려 호흡하는 것이 편해졌다. 잠뜰이 진정하길 기다린 것인지, 공룡은 약간의 시간을 두곤 다시 말을 이었다.

“집사님과 경호원님은 다 아는데도 당신 말에 적당히 져준 것 같은데, 난 그렇게 할 생각 없어요. 난 그분들처럼 당신을 가족처럼 돌보러 온 것도 아니고 마음이 따뜻한 사람도 아니거든요.”

“….”

“그분들이 당신 말에 속아준 건 당신을 위해서겠죠. 이렇게 말하면 당신도 상처 입을 걸 아니까 그만 말해주길 바라서 접어준 걸 거에요. 그분들은 당신의 마음을 나보다도 더 잘 알고 있을 거예요. 당신의 몸상태까지 정확히 알고 계실 테니까 나보다도 더 당신을 제대로 지지해줄 준비를 하고 있었겠죠. 사람은 언제나 한가지 마음만으로는 살 수 없으니까, 그 모순된 마음도 이해하고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똑똑한 당신은, 그런 당신을 생각해주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용했어요. 그건 당신이 잘못한 거예요. 당신을 생각해주는 사람들에게 가장 아픈 방법으로 상처를 준 거니까.”

“나는….”

그의 말이 맞았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대부분은 맞았다. 저택에서 그렇게 도망치듯 떠나온 것은 어느 정도 의도한 바가 맞았다. 내일을 기대할 수 없는 가문의 미래와 자신의 몸이라는 침몰하는 배에, 자신의 가장 소중한 두 사람을 태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잠적해버리면 그만인 이웃 친구와는 다르게 그들은 최측근이었다. 언제나 자신의 편을 들어주었던 그들을 떼어놓을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잠뜰은 알고 있었다. 비단 잠뜰 뿐만이 아니라 소중한 이가 있는 이라면 누구나 알법한 방법을, 소중하기에 아무도 시도하지 않는 방법을, 선택하였다.

“…네 말이 맞다 해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아.”

그러나 그뿐이었다. 과거형으로밖에 말할 수 없는, 이미 한참 전에 지나간 시간의 사건이었다.

“이미 옛날 일이야. 집사 아저씨와 덕개를 두고 떠나온 지 몇 년이나 지났고, 이젠 어디 있는지 알 길도 없어. 안다 해도 돌아갈 생각도 없고. 의사들이 어려서부터 질리도록 알려준 마지막 시간이 이제 얼마 안 남았어. 살고 싶은 마음과 이대로 끝내고 싶은 마음 둘 다 진심인 건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이걸 혼자 감당해야 한다는 생각 역시 변하지 않았어.”

만약 상황이 반대였다면, 떠나간 이가 공룡이고 남은 이가 자신이었다면, 잠뜰도 말없이 가버린 공룡을 원망했을 것이다. 하나밖에 없는 친구 아니었냐고, 그렇게 날 믿지 못하였냐면서 화를 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자신은 그런 만약을 생각하면서까지 다른 사람이 짊어지고 있었을 감정의 부채를 신경 써줄 여유가 없었다. 모순적인 두 가지 마음 모두 진심이라곤 하지만, 결국 여기까지 선택해서 온 것은 잠뜰 자신이었다.

“말도 없이 떠났던 건 미안했어. 네가 의미가 없었던 게 아니라… 이런 상황을 다 설명해주기 싫어서 그랬어.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는 거랑 직접 내가 설명하는 거는 다르니까. 이렇게 되어도 자존심은 있었으니까. 네 앞에서 초라해지고 싶지 않았어.”

가문 식구들은 하루종일 붙어있으니 자신의 약한 부분을 보여줄 수 있더라도, 공룡은 아니었다. 공룡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몰랐다면 그날, 장례식장에서 절대 잠뜰을 그렇게 혼자 두고 나오지 않았을 테니까. 절대 그것이 자신들의 마지막 만남이 되게끔 하지 않았을 테니까.

말을 하면서 잠뜰은 감정을 진정시켰고, 명확한 자신의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이제는 눈을 보면서 자신의 과거를, 오랜 친구를 떠나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시선을 올려 공룡과 눈을 맞추었다. 조용하게 가라앉은 검은색 눈동자가 자신을 마주 본다.

“네 마법이 날 찾아낼 정도로 대단해진 건 알겠어. 하지만 그게 내 상황을 딱히 달라지게 하진 않잖아. 이건 내가 감당할 문제고, 오직 나 혼자서만 감당해야 할 책임이야. 그러니까 이만 돌아가.”

“싫어요.”

결심한 것에 비해 상대의 대답은 지나치게 빨리 나왔다. 그 단호한 기세에 잠뜰은 조금 황당했다. 남은 힘들게 힘들게 말 정리해서 했더니, 이 자식 내가 한 말 하나도 안들은 거 아냐? 약간의 짜증이 올라와 입 밖으로 내뱉어졌다.

“너 내 말을 듣기는 했-”

“우리 마지막에 헤어졌을 땐 당신이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었죠? 그러니 이번에도 당신이 먼저 끝내자고 하는 건 사양이에요. 이번엔 나한테 선택권 줘요.”

“뭐? 지금 유치하게 순서 따지는 거야?”

“네, 나 당신 말마따나 순수하고 몇 년 전 추억 하나 붙들고 허우적대는 녀석이라 유치하게 굴 거예요.”

“야 너 그거 담아둘 거야?”

“잠뜰.”

손 끝이 움찔 떨렸다. 재회하고 나서 처음으로 불려본 이름이다. 공룡을 바라보니 어처구니없는 농담이나 하던 그의 표정은, 여전히 미소 짓고 있었으나 약간 그늘이 져 있었다.

“내가 이렇게 여유로워 보이지만, 사실 아니에요. 이건 당신이랑 못 만난 사이에 기른 습관이거든요. 웃는 가면을 쓸 수 있는 습관. 그러니까, 사실…나, 지금 되게 초조하거든요.”

왜 아니겠는가. 몇 년 만에 다시 찾은 친구는 눈에 띄게 힘들어 보였고, 이제 마지막 날도 얼마 안 남았을지도 모른다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 완전히 포기하고 싶은 것도 아니지만 다시 나아가기엔 너무 지쳐 일어나라고 하기엔 미안할 정도다. 그런 상황에서조차 침착하게 웃으며 대화할 수 있었던 것은 그저 그가 길러온 가주로서의 습관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습관대로 끝까지 행동하기엔 공룡은 지금 가주로서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저 그의 소중한 오래전 친구를 찾아온 것뿐이었다.

“당연히 나는 당신이 이대로 모든 걸 놓아버리길 바라지 않죠, 하지만… 하지만. 당신의 그런 선택을 아집이라고만 생각하지도 않아요. 당신이 한 말이 모두 진심일 거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모두 거짓말일 거라고도 생각 안 하니까. 나는 당신을 잘 안다고 말했지만, 그것보다도 당신을 잘 아는 사람은 당신이니까. 당신이 어떤 삶을 살아왔고 어떤 고민을 했고 어떤 마음으로 여기까지 왔는지, 그래서…그렇기에 마지막으로 어떤 선택을 할지 결정해야 하는 건 당신뿐이니까. 그걸 알고 싶지 않아도 잘 아니까,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유치하게 굴게 해줘요.”

공룡은 알았다. 자신은 잠뜰이 가지고 있는 고민이 무엇인지는 알아도, 그 무게만큼은 절대 알 수 없을 거라는 것을. 장례식장에서 눈물 없이 울던 너를 그대로 두고 나온 그날 이후로, 오롯이 혼자서 그 무게를 감당해왔다는 것을. 그렇기에 자신이 왈가왈부할 권한은 사실상 없다는 것도 잘 알았다. 자신의 신분은 기껏해야 어린 시절 만났던 친구일 뿐이었으니까. 잠뜰을 찾겠다고 결심했을 때에도, 찾아봤자 의미 없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미 잊었을 수도 있고, 알아본다 하더라도 반기지 않으리라는 것도, 깔끔하게 끝내지 못했던 관계를 제대로 마무리 지으려는 것조차도 네겐 껄끄러울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그놈의 어린 시절 친구라는 신분 때문에 와야만 했다. 앞서 말한 모든 것을 알고 있었지만, 알고 있어도 와야 했다. 딱 한 번만, 고작 어린 시절 친구라는 신분 핑계를 대고 잠뜰에게 해야 할 말이 있었다.

“나랑 어디 좀 같이 가요.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요. 하고 싶은 말도 있고. 그걸 듣고도 혼자 가겠다고 하면, 다시는 안 찾아올게요.”

그것은 설득이 아니라 부탁이었다. 매력적인 조건으로 제안하는 것도, 과거의 일에 책임지라는 겁박도 아닌, 차리리 애원에 가까운 부탁이었다. 논리적으로는 잠뜰의 말이 맞다는 것을 알면서도 겨우 감정을 핑계로 억지를 쓰는 비이성적인 방식이었다. 대기업이 준비한 게임을 자신의 마음대로 부순 후 승자의 의자에서 여유롭게 웃고 있던 그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스스로 입으로 초조하다고 하였으니 말 다했다.

잠뜰은 공룡을 바라보았다. 이대로 자신이 고개를 저으면 공룡은 아마 물러나 줄 것이다. 그러니 굳이 그의 부탁에 응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그래. 마지막이라면. 어차피 속마음까지 다 들킨 상황에서 마지막이라면, 말도 없이 사라졌던 것에 대한 값으로 들어주는 것 정도는 해줘야 하지 않을까. 정말 마지막이니까, 더는 도망갈 곳도 없을 만큼 끝에 끝이 찾아왔으니까.

“…알았어.”

한참의 고민 끝에 짧게 대답하였다. 공룡은 그 대답에 물기 어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부드럽게 웃는 표정이지만, 여유롭진 못한 감정적인 표정. 그 표정에 대해선 굳이 묻지 않았다. 공룡 역시 곧 그 표정을 눈 깜빡임 몇 번으로 지워버렸다. 그는 한 손을 잠뜰에게 뻗으며 말했다.

“자, 손 줘요.”

“손은 왜?”

“날아갈 거 거든요. 당신 혼자선 못 날잖아요?”

“…뭐?”

“나는 거 싫어요? 싫어도 할 수 없어요. 나 텔레포트는 혼자서밖에 못한다고요. 걸어가기엔 거리가 너무 멀고, 이 시간엔 쓸만한 교통편도-”

“아니, 그게 아니라. 날아가? 맨몸으로? 농담해?”

“아, 그게 문제에요? 나 참, 잊었어요?”

공룡은 픽 웃으며 몸을 돌리곤, 창가로 걸어갔다. 그러곤 자신이 들어오느라 살짝 열려있던 창문을 양손으로 잡곤 더 활짝 열었다. 밤하늘을 지나온 밤 공기가 밀려들어 왔다. 바람의 방향을 따라 공룡이 고개를 돌려 다시 잠뜰을 바라보았다. 달빛을 담은 듯 눈이 반짝였다.

“나 마법사라는 거.”

마법이 일어나도 믿을 것만 같은 밤하늘 아래, 그 마법을 일으킬 수 있는 마법사가 서 있었다. 아주 오래전, 자신의 어린 시절을 가득 채워졌던 친구가, 그 시절과 똑같은 웃음을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공룡의 머리카락을 스친 바람이 잠뜰의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잠뜰은 창 너머 밤하늘과 그 앞의 공룡을 바라보며 망설였다.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이미 오늘 상식을 부수는 사건이 너무 많이 일어났다. 그리고, 정말 이렇게 따라가도 괜찮을지에 대한 고민도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었다. 공룡은 그런 잠뜰을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손을 내민 채 잠뜰이 다가오기를 기다려주었다. 마침내 잠뜰이 결심을 굳힌 듯, 공룡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러곤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은 손을 대범하게 공룡의 손 위에 텁 얹었다. 공룡은 잠뜰의 움직임이 웃겼는지 푸흡 웃고는, 그 손을 부드럽게 잡아주었다.

공룡은 물밀 듯 자연스럽게 창밖으로 한 걸음씩 이동하였다. 잠뜰도 공룡을 따라 창틀에 발은 얹었다가, 문득 제 발아래를 슬쩍 내려다보았다. 그러곤 어두운 밤의 차폐물 따위 아무것도 없는 11층의 높이를 체감해버렸다. 그제야 갑자기 집 나갔던 현실감이 훅 돌아왔다. 이거, 내가 밤하늘에 홀려서 터무니없는 선택을 해버린 거 아닐까??

“자, 잠깐만. 역시 이건 좀 무모한 거 같-”

“저런, 늦었어요!”

공룡은 활짝 웃더니, 그대로 창틀에서 발을 떼어 공중으로 몸을 던졌다. 얄미운 표정에 뭐라고 할 틈도 없이, 잠뜰의 몸도 그대로 어두운 허공으로 던져졌다. 발 디딜 곳이 순식간에 사라지자 잠뜰은 사색이 되어버렸다. 이 자식 지금 내가 당황하는 거 즐기는 거 아냐?! 속으로 공룡을 욕하는데 세찬 바람이 불어와 순간적으로 눈을 감았다. 세찬 공기가 살갗을 스치는 느낌이 드는 동시에 몸이 빠르게 어디론가 밀려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내 그 방향이 중력을 따른 아래쪽이 아니라 위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다 한순간에, 모든 움직임이 멈추었다.

“이제 괜찮아요. 눈 떠봐요.”

나긋한 공룡의 목소리에 잠뜰은 살며시 눈을 떠보았다.

그리고 그 눈에 별바다가 담겼다.

머리 위와 좌우로 그 끝을 가늠도 못할 드넓은 별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시야를 가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높이를 가늠할 수 있는 것은 땅 아래 발을 붙이고 있었을 때보다 훨씬 더 가까이에 있는 구름뿐이었다. 그 구름마저 거의 없는 맑은 날이라, 손을 뻗으면 그대로 별을 잡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고개를 아래로 내려보았다. 몇 분 전만 해도 자신이 있었을 도시가, 이제는 위치를 정확히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작아져 있었다. 여러 도시의 불빛이 매우 작은 점이 된 채로 발아래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그 불빛의 크기는, 어렸을 때 처음으로 공룡과 비밀 문을 함께 통과해서 이동한 높은 첨탑에서 내려다본 것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작았다.

“어때요, 꽤 나쁘지 않죠?”

별바다 속에서 마법사는 웃었다. 비현실적이고, 비상식적이었다. 그러나 그만큼 아름다웠다. 현실의 상식을 아름다움과 바꾸어 주변의 공간을 칠한 것 같았다. 마법이 일어날 것만 같은 밤하늘이라고 했던가, 그렇다면 지금은 그 마법이 내려와 머물고 있는 것일 거다.

“응, 표정 괜찮네. 좋다는 거로 알아들을게요.”

“...우리 어디로 가는 거야?”

“그건 도착할 때까지 비밀로 할래요. 그전에 잠깐 이쪽 봐볼래요?”

“어? 왜?”

고개 돌리자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공룡과 눈이 마주쳤다. 공룡의 눈동자에 밤하늘과 제법 어울리는 녹빛이 짙게 감도는 것이 보였다. 곧이어 주위의 공기가 가벼워지는가 싶더니, 몸이 따뜻해지는 게 느껴졌다.

“하늘 위는 춥죠? 할 수 있으면 외투도 벗어주고 싶은데, 지금 손 놓을 수가 없으니 이 정도로 만족해요.”

“지금 손 놓으면 어떻게 되는데?”

“번지점프 해봤어요?”

“아니.”

“그럼 줄 없이 하는 번지점프는 더더욱 안 해봤겠네요. 경험해보고 싶으면 지금이 기횐데, 원해요?”

잠뜰은 좌우로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런 잠뜰을 보며 공룡은 푸핫하고 웃었다. 소리가 막힐 것이 없는 드높은 창공이라 멀리까지 그 웃음소리가 퍼졌다.

이질적인 풍경이었다. 높은 하늘은 바람도 불지 않았다. 흔들리지도 않는 갈색 머리카락과 곱게 휜 눈매가 보였다. 빛을 내는 도시는 전부 발밑에 있으니 아마 그걸 볼 수 있는 광원은 머리 위 달이나 작은 별들일 것이다. 자신이 살던 마을은 발아래 아주 작은 점이 되어서, 이제 그곳에서 품었던 고민은 아무래도 좋아질 것 같다. 비현실적인 일인데 이제 반박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이제 어차피 거의 죽은 목숨인 게 확정이다 보니 오히려 초연해진 것 같다. 이젠 비현실적인 일에 놀랄 힘도 안 남았다. 마지막으로 신기한 볼거리라라도 즐기고 가는 것에 감사할 지경이었다.

“그런 생각하게 하려고 데리고 올라온 거 아닌데.”

“어?”

“원한다면 또 데리고 올라와 줄 테니까, 그렇게 마지막인 것처럼 말하지- 아, 아니에요.”

공룡은 말을 하다가, 퍼뜩 깨달은 듯 순간적으로 맞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곤 스스로 말을 막으며 고개를 가볍게 흔들었다. 잠뜰에게로 고개를 돌려, 맞잡지 않은 다른 손의 검지를 세워 그 자신의 입술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마지막이라는 걸 빌미로 부탁하는 건 딱 하나만 하기로 했으니까, 이건 취소.”

잔잔하게 웃으며, 그렇게 말하였다. 잠뜰은 대답하지 않았다. 공룡 역시 딱히 대답을 바라진 않았는지 곧바로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그는 마법으로 길을 찾는 것인지, 한 손으로 여러 고리가 주변에 회전하고 있는 흰 구체를 만들어 공중에 띄웠다. 잠뜰은 그런 공룡을 바라보다 다시 별이 가득한 하늘로 눈길을 돌렸다. 작은 방 창문으로 보았던 달이 커다랗게 빛나고 있었다. 역시 현실감이 없는 광경이라고 생각하였다.

‘또 데리고 와주겠다, 라.’

마지막으로 만들 추억으로 좋은 광경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조금, 아주 조금은, 한 번 더 올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고, 그렇게 생각해버렸다.

마법구에 집중하느라 공룡은 그 표정을 읽지 못하였다. 오로지 마법이 일어나는 날에 어울리는 밤하늘의 달만이 그 속마음을 품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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