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여, 부디 지지 마소서.

별이여, 부디 지지 마소서. 中

혁명 | 어쩌면 가능했을 지도 모르는 이야기

"왕실을 대표하는 짐이 단두대에 올라가는 건 어떻소?"

 "…!!"

찻잔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왕자의 손에 들려있던 흰 도자기 찻잔이 대리석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고, 갈색 찻물이 바닥을 적셨다. 그런데도 아무도 그 소리에 눈살을 찌푸리거나 돌아보지 못했다. 그들의 시선은 오직 생글거리는 웃음을 짓고 있는 국왕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잠뜰의 불안은 현실이 되었다. 응접실에 들어온 후부터 계속해서 예상하지 못한 일들뿐이었으나, 국왕의 이 발언은 정말 말 그대로 날벼락이었다. 입헌군주제에 쉽게 협력할 수 없다고 외치던 수현마저 당황했다. 설마 자기 자신이 직접 단두대에 올라가겠다는 말을 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라더는 창백한 표정으로 공룡을 돌아보았다.

"아바마마, 제발. 농으로라도 그런 말씀 마십시오."

"흐음."

 

라더의 다급한 말에도 공룡은 여유 있는, 그러나 장난으로 생각하긴 힘든 웃음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라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떠날 준비를 마친 것만 같다는 그 표정이 라더를 불안케 하였다.

 

"…진심으로 하신 말씀이라면 저는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입헌군주제고 뭐고 협력 안 할 겁니다."

"하나 왕성에 대한 백성들의 불만을 해소해야, 그들이 새로운 나라와 왕을 쉽게 받아들일 것 아니더냐. 그래, 이건 어떤가. 나의 폭정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던 왕자가 레지스탕스의 손을 잡고 짐을 몰아낸다는…"

"아바마마!!"

"폐하."

어느 아비가 아들더러 자신을 죽이라 하는가. 라더가 다급하게 공룡을 부를 때, 그 외침의 끝을 이어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여태껏 어떤 상황에서도 조용히 라더의 뒤쪽만을 지키고 있던 덕개였다. 공룡은 건조한 표정으로 덕개를 돌아보았다. 이미 자신의 목숨 같은 건 상정 범위 밖에 내버려두었다는 듯한 그 표정에, 덕개는 안타까운 한숨이 났다.

 

"폐하께선 어째서, 억지로 악역이 되려 하시는 겁니까?"

 

꿈틀, 공룡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라더를 두고 덕개는 공룡 쪽으로 한발짝 다가갔다. 공룡은 별거 아니라는 듯 슬쩍 웃었다.

 

"백성들에게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죗값을 치르겠다는 것이 어찌 악역을 자처하는 거란 말인가?"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부분까지 전부 끌어안으시려 하니 말씀드리는 것 아닙니까. 폐하, 왜 새로운 나라에 폐하의 자리는 생각지 않으시는 겁니까. 왜 당연하다는 듯이 폐하께서는 악으로 역사에 기록되고 사라지시려는 겁니까."

  

라더가 느낀 것을 덕개도 그대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덕개의 말에도 공룡의 표정은 변함없었다.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는 있었으나 완고하게 웃음만 지어 보일 뿐이었다. 평범한 방법으로는 국왕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덕개는, 짧게 한숨을 쉬곤 입을 열었다.

 

"돌아가신 왕비님의 유언 때문에 이러시는 겁니까?"

"그 입 다물라, 덕개."

 

국왕의 미소가 처음으로 사라졌다. 여태껏 짓고 있던, 자신의 목숨조차 남 일이라는 듯한 여유로운 태도가 사라지고, 날카롭게 굳은 표정만이 남았다. 자칫 분노까지 서려 있다고 느껴질 정도로 무거운 목소리였다. 그 기세에 각별은 흠칫 놀랐으나, 덕개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왕자님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폐하의 목숨은 생각하지도 않고 계시는 겁니까? 그렇게 일을 마치고, 나라와 왕자님은 남을 이들에게 다 맡겨버리고, 아무 미련없이 왕비님 곁으로 떠나시려는 생각이었습니까?"

"다물라 하였다."

"왕비님께서, 폐하는 걱정 안 하셨을 것 같습니까? 그리고 그리 떠나시는 것이, 진정 왕자님을 보호하는 길이라 생각하시는 겁니까? 왜 모르시는 겁니까. 왜 그리 어리석으십니까! 저희가 바라는 것은 폐하께서 모든 것을 안전하게 물려주고 떠나시는 게 아닙니다. 어려워도 함께 발맞춰 걸어가고 싶었던 겁니다…. 왜 그걸 몰라주십니까. 왜, 대체 왜 그리 쉽게 자신을 놓으시려 하시는 겁니까."

감정이 격해진다. 평정을 유지하려 노력하였으나 화가 났고 끝내 울음까지 묻어버릴 것 같았다. 왜 눈앞의 이 사람은, 그리도 쉽게 포기하려 하는 것일까. 남을 이들이 그에겐 정녕 함께 있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을 정도로 의미 없었던 것일까. 함께 노력해서 나아가겠다는 시도조차 안 하고 왜 떠나려고만 하는 것일까.

 

"저는, 폐하의 그런 모습이… 그리고 그걸 보면서도 아무 말 못하시는 왕자님을 지켜보는 것이, 서글픕니다. 폐하께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하신 일로 전부 결정하셔놓고는 그 고려대상 안에 폐하는 없는 것이 서글프고, 왕자님께 당신의 아버지의 마지막 기억이 단념하신 모습이 될까 봐 서글픕니다."

 

무거운 침묵이 한동안 장내를 짓눌렀다. 누군가 실수로 티스푼을 떨어뜨렸다면 그 소리가 모두에게 들릴 것이 분명할 만큼 조용했다. 덕개는 공룡을 응시하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공룡은 낮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에, 서 있는 덕개에게는 그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국왕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내가 무슨 염치가 있다고."

"폐하?"

 

한참 후에야 공룡의 마른 입술이 달싹였다. 여유 넘치던 국왕의 모습은 사라지고, 소중한 이를 잃은 과거에 갇혀 있는 평범한 사람이 그 자리에 존재했다. 목소리가 슬픔에 잠겨 떨리고, 단어 사이사이를 잇는 것이 힘겨워 보였다.

"내가 오만하여, 지킬 거라 자신하였다 잃어버린 이를 두고 무슨 염치로 살아가겠다고. 그렇게 살 자신도, 더는 없는데…."

"…."

"그러니, 도망치지도 못할 국왕의 마지막 책무라도 다하고 가겠다는 것인데…."

 

공룡이 덕개를 올려다보았다. 그제야 국왕의 눈에 담긴 슬픔이 보인다. 심장이 타들어 가는 고통이 힘겹게 국왕의 목구멍으로 삼켜 들어간다.

 

"그것조차도 마음대로 못하게 하는 것이냐?"

 

안타까움이 차올라 공기를 잠식한다.

덕개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저런 표정의 공룡은 처음 보았다. 덕개가 궁에 막 들어왔을 때 공룡의 모습은 늘 당차고 지혜로웠으며, 왕자가 태어난 이후에는 아들이 다칠까 봐 늘 불안해하고 초조한 모습이었다. 저렇게 진한 그리움과 체념으로 뒤범벅된 슬픈 표정을 보여 준 적은 없었다. 그 모습에 감히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단두대까지 갈 필요 없어요."

목소리가 들린 쪽은 수현의 뒤편이었다. 왕의 시선을 받은 잠뜰은 가볍게 묵례하며 발언을 요청하였다. 공룡은 한쪽 눈썹을 까딱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묵례하여 감사를 표하곤 잠뜰은 혁명단의 두 대표 쪽을 바라보았다.

 

"우리끼리 왕을 죽여선 안 됩니다. 백성들 중에는 아직 왕을 따르는 무리도 많아요. 그들을 납득시키지 못하면 결국 에투알은 분쟁이 계속 될 거고, 결국 우리가 추구하는 에투알과는 멀어질 것입니다. 그러니, 모두가 보는 앞에서 재판을 엽시다."

"재판?"

"네, 뤼미에르와 카타콤의 대표 각 다섯 명씩 참여하여 재판을 하는 겁니다. 국민들의 앞에서, 그들의 왕을 어떻게 할지, 그들이 정하게 하는 거예요. 국민을 대표하는 두 혁명단의 재판의 결과이니, 왕실을 따르는 국민들이라 하더라도 납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국민재판, 왕국인 에투알에서는 단 한 차례도 시행된 적이 없는 제도였다. 루시엔은 오른손을 턱에 갖다 대고 잠뜰의 말을 곱씹어 보았다. 그의 머릿속에서 재판의 실현 가능성과 그것이 가져올 효과가 저울질 되었다. 반면 수현은 다소 회의적인 말투로 잠뜰에게 답했다.

"만약 그 재판의 결과로 단두대 형이 나오면 어떡할 건가요? 왕성 지지 세력이 가만히 있을까요?"

"적어도 그들의 눈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멋대로 왕을 단두대에 세우는 것보다는 낫겠지요. 우리가 원하는 에투알은, 우리의 손으로 만들어가는 나라에요. 설령 왕이 죽는다 하더라도 국민들의 심판을 받은 것이어야 하고, 용서를 받는다 하더라도 국민이 용서한 것이어야 해요. 누군가는 보여주기 식 행사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죠.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새로운 시대로 넘어가야 하는 에투알 국민들 모두를 위한 선택이라 생각합니다."

"결과가 뻔한 재판인데, 의미가 있는가?"

 

국왕의 목소리에 잠뜰은 왕성 사람들 쪽으로 몸을 틀었다. 각별은 상황을 보려는 듯 조용히 그들을 응시하고 있었고, 라더는 한껏 불안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덕개는 다시 본래 자리로 돌아와 고개를 숙이고 있어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그리고 공룡은, 예의 그 지나치게 느긋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 스스로 재판장에 섰다 하더라도 그들의 분노가 잠재워지는 것은 아닐 터. 손에 무기를 들고 피를 묻히는 것 또한 익숙해졌을 자들인데, 재판이라고 결과가 달라지겠는가? 어차피 같은 결과라면, 왕자가 구시대의 악왕을 처벌하였다는 공이라도 가지게 하는 것이 낫지 않은가."

"폐하, 어느 백성이 제 아비를 벤 자를 왕으로 섬기려 하겠습니까. 국민들은 그렇게까지 잔인하지 못합니다. 분명 저희는 저희 손에 무기를 들고 일어나긴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중 그 누구도 진심으로 살인을 원한 자는 없었어요. 우리는 그저, 떠나보낸 자들에 대한 그리움이 너무 컸을 뿐이에요. 다시는 그 누구도 우리와 같이 슬픈 이별을 하지 않아도 되는 나라를 만들고 싶을 뿐입니다."

 

잠뜰은 여전히 의구심 가득한 표정으로 저를 쳐다보던 수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렇잖아요, 수현 대장. 살인을 저지르는 이가 하나라도 적게 하기 위해서 이 혁명을 빨리 끝내고 싶어 하셨잖아요. 피로 물든 혁명을 주장하면서도, 뒤에서는 혁명단들의 무덤 앞에서 울며 그들의 이름을 전부 하나하나 부르시지 않았습니까."

"…그건…."

 

애초에 왕성 세력에게 쫓기던 길거리의 잠뜰 자신과 아버지를 받아들여 준 것도 카타콤과 수현이었다. 자신은 필요에 의해 데려온 거라 할지라도, 그들이 혁명단 내부의 일과는 거리가 먼 저의 아버지에게도 얼마나 잘해주었는지는 아버지의 표정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카타콤 안에서의 생활은 강압적이거나 무력적이지 않았다. 마치 하나의 가족처럼 서로를 챙겨주는 곳이었다. 비록 강경파이긴 하더라도, 그런 곳의 수장이 악독하기만 한 자일 리 없었다.

 

"우린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가야 해요. 함께 말이에요. 함께 발맞춰 걸어가야 할 길에, 가뜩이나 발걸음이 꼬일 텐데 핏자국까지 찍을 필요는 없어요. 불가피한 항전은 있을 수 있지만, 피를 안 볼 수 있는 방안이 있다면 선택하지 않을 이유도 없죠."

잠뜰의 회색 눈이 반짝였다. 그녀의 대담한 발언과 당찬 태도는 혁명단과 왕성 세력 양측 모두를 휘어잡았다. 특히 라더는 감명이라도 받은 듯한 눈으로 저의 친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간의 시간이 흐른 후, 루시엔이 밝은 표정으로 손을 들어 발언을 요청했다.

 

"뤼미에르는 잠뜰 씨가 보여준 의지를 따르겠습니다. 왕성 측과 카타콤만 동의한다면, 재판 공지와 장소는 저희 측에서 준비하죠."

 

라더는 두말할 것 없다며 재판에 동의한다고 말했다. 적어도 단두대에 바로 가는 것보다는 이쪽이 살아남을 확률이 훨씬 높았고, 이 방식으로라면 국왕도 설득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각별은 이미 이 일은 자신의 손을 떠난 것이니 마음대로 하라며 동의하였고, 덕개는 오직 왕자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의사를 보였다. 남은 것은 에투알 국왕 공룡의 의견과 혁명단 카타콤의 단장 수현의 의견뿐이었다.

"이렇게까지 한다니…."

 

한참 후, 깊은 한숨을 내쉬며 먼저 입을 연 것은 수현이었다.

"그래요, 알겠습니다. 따르도록 하죠. 나도 내 사람들이 더 이상 다치는 걸 보고 싶진 않습니다. 잠뜰 씨 말대로 이 재판으로 우리의 울분이 해결되고 권력교체도 될 수 있다면, 피를 안 봐도 된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죠. 하지만."

 

수현이 날카로운 눈이 공룡을 향했다. 그의 황색 눈은 마치 목표를 놓치지 않겠다는 것처럼 번들거렸다.

"너무 안심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저희 카타콤은 너무 오랫동안 왕성에게 외면당한 자들이 모인 곳이니까요. 재판에서 저희가 편을 들어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으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편을 들어준다라, 그런 건 기대하지 않는다네."

마침내 재판 개최의 마지막 결정권자인 국왕의 입이 열렸다. 재판을 여는 것에 동의한다는 뜻이었다. 다만 그는 다른 이들과 재판에 대한 태도가 조금 달랐다.

 

"나는 어떤 결과라도 상관없으니, 충분히 의논하고 생각해보세. 다만 내가 어떻게 되든, 우리 라더가 왕이 되었을 때는 힘을 보태주었으면 좋겠군."

공룡은 재판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어차피 한 번 내려놓은 목숨, 왕자를 위해 쓰려 했으니 왕자의 고집을 들어주려고 할 뿐이었다. 이렇게 단두대를 가든 저렇게 단두대를 가든 그에겐 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라더와 덕개가 모를 리 없었다. 이렇게까지 해도 설득이 되지 않다니, 절망이 라더의 표정을 스치고 지나갔다.

 

"폐하. 본의 아니게 선왕비마마와의 약속에 대해 들었습니다."

잠뜰은 속으로 진정하려고 애쓰며 입을 열었다. 조금 전 덕개와 공룡의 대화로 엘레나 왕비가 얼마나 그에게 민감하고 중요한 주제인지 알 수 있었다. 당장 지금만 해도 국왕이 자신을 보는 표정이 차갑게 바뀌지 않았는가. 앞으로 재판이 열리고 왕이 교체된다 하더라도, 지금 국왕은 공룡이고 자신은 평민 나부랭이였다. 여기서 혀 한번 잘못 놀렸다간 그대로 머리와 몸이 분리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신중에 신중을 기울여 말해야 했다.

"저 역시 얼마 전에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혁명단의 일을 돕기 위해 잠시 나갔었는데, 아버지가 계시던 곳에서 화약이 터졌어요. 모든 것이 불타서 무너졌습니다. 아버지의 시체는 차마 수습하기도 힘든 형상이었어요.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애써 쓸어담아 땅에 묻고 돌아섰습니다. 아버지는 제 유일한 가족이셨고, 그분이 없는 저에게 돌아갈 곳은 남아있지 않았어요."

그날의 일을 떠올리니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그날의 불냄새가 여전히 자신에게 묻어있는 것만 같았다. 덤덤히 이야기를 꺼내기엔 아버지와 함께한 시간은 길었고 그 없이 지낸 시간은 너무나도 짧았다. 울컥하는 느낌을 짓누르며 잠뜰이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그런데도, 저는 끝까지 살았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을 하면서 하루하루 살아왔어요. 먼저 떠난 가족 중 그 누구도 곁에 가족이 일찍 오길 바라지 않을 테니까요. 제 삶의 저만의 목표를 잡고, 제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아버지께서 바라는 것이란 것을, 주변 사람들 덕분에 알게 되었으니까요."

혼자서라면 그 절망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자신도 눈앞의 공룡처럼 모든 걸 포기해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주변에 가족을 잃은 상처를 공유해준 사람들 덕분에 잠뜰은 일어날 수 있었다. 때로는 사람은 공감해주는 것만으로도 강해지니까.

그러나 국왕의 자리에 앉아있는 공룡에게는 그 누구도 지금껏 이런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을 것이다. 왕의 자리는 강인한 모습으로 아랫사람들을 이끄는 것이지, 약한 모습을 드러내며 도와달라 하는 자리가 아니었으니. 혼자서 슬픔을 삭히고 억지로 굳건한 모습을 보이느라 그는 이십여 년의 세월 동안 곪아버린 것일 거다.

"폐하께 라더에게 안전한 나라를 물려주는 것이 목표였다면, 그래서 더 이상 이루고자 하는 목적도 나아갈 의지도 없어 멈추고 싶으신 거라면… 이제부턴 라더와 저희가 만들어가는 나라를 바라보시는 걸 목표로 해주시면 안 될까요? 폐하께서 살아갈 내일에 라더의 자리를, 에투알 국민들의 자리를 마련해주실 순 없을까요?"

 

잠뜰은 그를 돕고 싶었다. 한낱 평민인 자신이 왕국에서 제일 높은 곳에 앉아 있는 그를 돕겠다는 것이 남이 듣기엔 웃기겠으나, 사람의 감정에 신분이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비단 라더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 역시 그와 같은 상황에서 도움을 받아 일어섰기에, 같은 아픔을 가졌는데도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하고 외롭게 자리를 지켰을 그를 돕고 싶었다.

잠뜰의 말에 공룡은 멍하니 그녀만을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은 아까와 같이 날카롭고 차가운 것은 아니었다. 조금은 놀란 것 같은 표정이었으나 다른 감정도 뒤섞여 있었다. 그러고는 옆에 앉아있는 저의 아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아들의 간절함과 불안함이 뒤엉킨 푸른색 눈동자가 공룡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답 없이 한참을 아들을 바라보다, 공룡이 느리게 입을 열었다.

"이름이… 잠뜰이라고 했던가?"

국왕의 시선이 잠뜰에게로 돌아왔다. 여러 가지 감정이 뒤엉킨 표정이라 잠뜰은 정확히 국왕의 생각을 읽어낼 수 없었다.

"좋은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구나. 새로운 나라에서 유능한 인재가 될 게야. 라더가 좋은 친구를 두었구나."

"폐하, 제 뜻은…."

"말하고자 한 바는 알겠으니, 이만 가보게. 다음에 보는 건 재판장이 되겠구나."

잠뜰은 말을 한마디 더 얹으려다 그만뒀다. 공룡의 입꼬리는 올라간 채로 그저 굳게 굳어 있을 뿐이었다. 긍정인지 부정인지조차도 알 수 없는 웃음이었다. 이 이상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부디 그의 마음이 변하였기를 바라며 잠뜰이 예를 올렸다.

"…재판 이후에도 다시 뵐 날을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국왕은 가만히 웃음 지을 뿐이었다. 끝까지 그의 뜻은 알 수 없었다.

몇 가지 세부사항에 대해 대략 이야기를 나눈 후 회의가 끝났다. 라더는 돌아가는 잠뜰을 멀리서 눈으로 배웅해주었다. 십년지기 친우 둘은 오고 가는 눈빛에서 괜찮을 거라며 서로를 다독인다. 응접실에서 물러나기 전, 국왕의 뒷모습이 잠뜰의 눈에 밟힌다. 신하도 물리고 저 혼자 응접실의 뒤쪽 문으로 나가는 모습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이 이상 할 수 있는 것은 없겠지, 잠뜰은 다른 혁명단원들과 함께 응접실의 앞쪽 문을 통해 나갔다.

정해지지 않은 미래를 위한 기나긴 길이 시작될 것이다. 그 끝에 있는 것이 모두에게 보다 나은 선택이기를 단지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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