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여, 부디 지지 마소서. 上
혁명 | 어쩌면 가능했을 지도 모르는 이야기
푸른색의 고급진 무늬로 장식된 벽에 붉은 융단이 깔린 방, 이곳은 에투알의 왕비 엘레나가 지내던 방이다. 그녀가 세상을 뜬 지 벌써 20여 년이 지났지만, 그녀의 방의 모습은 그녀가 떠난 그 날로부터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시간을 멈추어 둔 것 같은 그 방의 한 벽면에는, 벽 전부를 덮을 만큼 커다란 그림이 걸려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갈색 머리카락의 남성이 서 있었다. 에투알의 국왕 공룡은 과거를 되짚는 것 같은 눈길로 그림을 바라보았다. 밝은 옷을 입은 여신이 그 나라의 국기를 한 손에 높이 들고서, 각계계층의 옷을 입은 사람들을 이끌고 있었다. 이곳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나라에서 일어난 민중 혁명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라고 하였다. 오른손으로 조심스럽게 그림을 어루만지며, 공룡은 이 그림을 처음 사 왔을 때의 엘레나와의 대화를 회상했다. 왜 이런 그림을 걸어두었느냐고 엘레나에게 물었을 때, 그의 왕비는 웃으며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미래가 이 그림 안에 담겨 있노라고 말했었다. 그 날의 밝은 그녀의 미소가 떠올라, 국왕은 가만히 웃음 지어 보였다. 공룡은 그림에 한 발짝 다가가 이마를 가볍게 대었다. 눈을 지그시 감고, 혼잣말하듯, 나지막이 속삭인다.
"다녀올게요, 엘레나."
별이여, 부디 지지 마소서.
by. 레부
"국왕께서는 어째서 저희 둘을 부르신 걸까요?"
에투알 왕성의 귀빈 응접실, 웅장함이 느껴지는 거대한 방의 한가운데에 있는 거대한 탁자 가에 있는 십여 개의 의자 중, 두 자리가 채워져 있었다. 짙은 풀빛 머리카락에 그보다 밝은 녹안을 가진 남성과, 검은 머리카락에 금안을 가진 남성이었다. 레지스탕스 뤼미에르의 지도자 루시엔과 카타콤의 단장 수현이었다. 그들 앞에는 궁정 요리사가 솜씨를 발휘한 갖가지 다과와 향 좋은 차가 준비되어 있었지만 둘 다 손도 대지 않았다. 안에 무엇이 들어있을 줄 알고 함부로 먹겠는가. 왕께서 곧 행차하실 거라는 시종의 안내가 있었는지도 시간이 꽤 흘렀다.
"난들 알겠나, 모르니 당신도 나도 얌전히 이곳에 끌려온 거지."
그러나 수현도 루시엔의 질문에 답을 낼 수 없었다. 왕성으로 오라는 부름을 받았을 때부터 계속 생각해오던 질문이었다. 아침에 갑자기 군병들이 수현의 집에 들어와 국왕이 찾으니 따라오라고 지시하였다. 그 말에 영문을 알 수 없던 수현은 국왕께서 자신을 찾는 이유가 뭐냐고 물었는데, 돌아오는 군병의 답변은 자신들도 이유는 모른다는 것이었다. 다만 제 발로 따라오지 않으면 남은 것은 강제 연행밖에 없다 하였기에, 수현은 그 반협박에 따라 제 발로 군병을 따라가는 것을 택했다. 자신이 혁명단의 근거지에 있을 때 오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그들의 마차에 올랐다. 왕성 대문 앞에 도착했을 때, 수현은 자신과 비슷한 표정으로 온 루시엔을 만날 수 있었다. 루시엔도 상황 파악을 전혀 못 했다는 표정이었기에, 둘은 얌전히 군병이 이끄는 대로 이곳 응접실로 올 수밖에 없었다. 전국이 혁명의 분위기로 무르익고 있던 이 시기에, 왕성으로 진격할 것을 계획하고 있던 수현에게는 이 상황이 낭패였다.
"그것이 아니라, 어떻게 정확히 저희 둘을 부를 수 있었느냐는 말입니다. 양측 레지스탕스에 고위층 사람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카타콤의 단장인 수현 님과 뤼미에르의 지도자인 저를 불렀잖습니까. 이는 이미 폐하께서는 혁명단의 계층 구조를 정확히 파악하고 계시다는 것 아닙니까. 어쩌면 근거지도, 그리고 저희의 계획도…."
"…."
루시엔의 말에 수현은 조용히 생각해보았다. 왕성 세력에 지도자가 누군지 새어 나가면 위험하므로, 수현과 루시엔은 지금까지 최측근이 아닌 이상 직접 얼굴도 드러내지 않았고, 명령 전달 체계도 여러 과정을 거쳐 복잡하게 만들었었다. 어지간한 머리가 아닌 이상 이 체계를 꿰뚫어 보아 자신들을 찾는 건 어려울 텐데, 국왕은 그들의 자신감이 무색하게 지도자 둘을 정확히 불러낸 것이다. 어쩌면 에투알 국왕은 세간에 알려진 것 만큼 멍청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현은 한참을 침묵하더니 이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됐다, 이제 와서 죽기밖에 더하겠나? 어차피 혁명에 가담한 이상 내일 살아있을 거란 보장도 없었고, 우리의 공석을 대비해 혁명단의 미래를 이끌어줄 후임도 이미 다 결정해놨잖은가."
"그건 그렇죠. 그런데…"
루시엔은 수현의 뒤쪽에 서 있는 사람을 흘끗 바라보았다. 두 지도자와 달리 이 자리에 초대받지 못한 채로 따라왔기에 의자에 앉지 않고 서 있는 갈색 머리카락의 여성이었다. 그녀는 고요하고 조금은 어둡기까지 한 표정으로 잠자코 제자리에 서 있었다.
"잠뜰 씨는 왜 따라온 겁니까?"
"군병이 들어왔을 때 함께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혼자 가겠다 했는데, 왕을 만나러 가는 거면 자신이 도움이 될 거라며 따라가게 해달라더군. 그래서 일단은 호위 명목으로 같이 왔네."
"그래도, 위험할 텐데…"
그때, 문 앞을 지키던 근위병들의 움직임이 달라졌다. 곧이어 시종이 왕의 행차를 알리자, 수현과 루시엔은 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네 명의 사람이 들어왔다. 그들 중 가장 앞에 서 있는 국왕 공룡을 향해 수현과 루시엔은 예를 올렸다. 국왕은 웃으며 그들에게 앉아도 좋다는 손짓을 해 보였다. 수현은 자리에 앉으며 루시엔에게만 들릴 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왕자가 오는 것까지는 예상했는데, 각별 대신도 올 줄은 몰랐군."
"그러게 말입니다."
국왕과 함께 들어온 세 사람 중 하나는 국정의 대부분을 도맡아 하고 있는 각별 대신이었다. 실권을 거머쥐고 있는 만큼 그가 저지르는 횡포 또한 적지 않았으니, 혁명단에게 있어선 원수와도 다름없는 자였다. 각별은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공룡의 의자를 밀어 넣어주곤 그의 왼편에 앉았다. 저들을 보고선 표정을 찡그린 것을 보아 각별 역시 왜 이곳에 불려 왔는지 정확한 이유는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공룡의 오른편에는 왕을 지지하는 세력들의 희망이라고 불리는 라더 왕자가 앉았다. 자리에 앉을 때 그는 수현의 뒤편에 있는 자와 눈이 마주쳤다.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고, 눈을 마주친 잠뜰 역시 아무 말 없이 가볍게 응시하다 시선을 피했다. 라더의 의자를 밀어 넣어준 호위 덕개는 짐짓 그것을 모르는 척하며, 그의 오른편 뒤쪽에 섰다.
"한잔 하겠나? 이번에 차를 끓이는 자가 물을 아주 기가 막히게 맞춘다네."
"…호의에 감사드리나 괜찮습니다, 전하."
"독은 안 들었는데 말이지."
왕의 짓궂은 농담인지 그들의 마음을 꿰뚫어 본 후의 진담인지 모를 말에 수현은 순간 움찔했다. 그러나 왕은 그에 신경 쓰지 않고선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수현의 뒤에 선 잠뜰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뒤쪽에 서 있는 젊은이는 부른 기억이 없는데?"
"아, 제 호위로 따라온 자입니다. 불편하시다면 밖에 있으라 하겠습니다."
"그럴 것 없네. 호위라면 분명 크게 신임하고 있는 자일 테니, 내게도 꽤 귀한 객일 터. 그렇지 않으냐, 라더야?"
자신의 이름에 라더는 반사적으로 그렇다고 대답을 하고선, 찻잔을 집어 들며 놀란 마음을 가라앉혔다. 별 의미 없었던 것일 수도 있으나, 마치 잠뜰과 자신의 관계를 알고 있다는 듯한 느낌도 들었었다.
응접실에 있는 사람 중 그 누구도 에투알 국왕의 뜻을 정확히 헤아릴 수 없었다. 모두 숨기려 최선을 다했으나 누를 수 없는 의문을 표정에 띄웠다. 단지 덕개만이 묵묵하게 같은 표정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느긋하게 차 향을 즐기고 있던 공룡은 그들의 의문을 풀어주겠다는 듯 찻잔을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내가 왜 불렀는지 다들 의아해하고 있겠지. 그리 겁먹을 것 없네. 오늘 내가 그대들을 부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에투알의 국왕 공룡은, 왕과는 거리가 먼 장난기 있는 듯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기존의 전제군주제를 폐지하기 위해서라네."
"네?"
"폐하!"
응접실에 있던 모든 이들이 국왕의 말에 당황했다. 라더는 들고 있던 찻잔을 떨어뜨릴 뻔했고, 각별은 당황한 눈으로 공룡을 부르며 단박에 돌아보았다. 누구보다 놀란 자들은 두 레지스탕스의 대표였다. 어느 왕국에서, 어느 국왕이 먼저 전제군주제를 끝내자고 제안한단 말인가. 적어도 왕성 쪽 사람들은 논의를 마치고 온 줄 알았는데, 왕자와 대신의 반응을 보니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잠뜰 역시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표정의 변화가 없는 것은 오직 자리를 지키며 호위를 하고 있는 덕개 뿐이었다.
"폐하, 농이 지나치십니다."
"농이 아니라네, 각별 대신."
"수백 년간 이어온 에투알 왕조를, 폐하의 대에서 스스로 끊으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오랜 기간의 전통을 불사르고, 폐하는 물론 왕자 저하마저도 평민으로 내몰겠다는 말씀입니까?"
"왕조를 끝내겠다는 말은 아니라네. 왕가는 유지하되 권력을 옮기는 것이지."
"그게 무슨…"
"입헌군주제를 생각하고 있으신 겁니까?"
저도 모르게 내뱉은 루시엔의 말이었다. 각별과 대화하던 공룡은 루시엔 쪽을 바라보았다. 왕의 시선을 받은 뒤에야 자신이 왕에게 발언을 허락받지도 않고 말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루시엔은 곧장 사죄하려 하였으나 공룡은 마음에 든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역시, 선생 일을 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많은 것을 알고 있군. 여기 자리에 입헌군주제를 모르는 이들을 위해 짐 대신해 설명해주겠나?"
"과, 과찬이십니다. 부족한 제 지식으로는, 입헌군주제는 먼 옛날 여러 이국에서 시행된 정부 형태로, 헌법 체계 아래서 군주의 권력이 제한되고 의사 결정이 국민을 대표하는 의회에서 투표로 진행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국왕이 존재하되 군림하지 않기에, 왕조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설명이었다며 공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엔은 겸허히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그의 설명에 각별 대신은 잠시 말문이 막혀 침묵했다. 느닷없는 제안에 저는 날벼락을 맞은 것 같은데 침착하게 단어 설명이나 하고 있는 이 자리가 현실감이 없었다. 반박할 말을 고민하는 새에 입을 연 건 다른 이였다.
"하지만… 그건 더 이상 왕이 아닌 것 아닙니까?"
공룡의 오른편에 앉아 있던 라더 왕자였다. 존재하되 군림하지 않는 군주라니, 그로서는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다. 어렸을 때부터 훌륭한 군주가 되어야 한다며 하루에 몇 시간씩 어려운 왕위 계승 수업만 들으며 자란 그에게는 생소하다 못해 당황스러운 이야기였다.
"왕자."
그런 그를 이해한다는 듯이 공룡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아들을 불렀다.
"제왕학을 배울 때, 왕이란 무엇이라고 배웠느냐?"
"…백성을 위해 존재하는 자, 자신보다 백성을 우선시해야 하는 자입니다."
"그래, 잘 배웠구나."
흡족한 듯한 웃음소리가 났다. 공룡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공부에 매진하던 어린 아들의 기억이 떠올라 조금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이내 다시 눈을 떠 아들을 바라본다.
"왕의 정의는 군림하는 존재가 아니다. 백성을 위해 존재하는 자지."
"…아."
"우리가 지금껏 다른 이들보다 많은 특권을 누려왔던 것은 오로지 백성을 지키기 위해서였고, 그들 위해 군림했던 것은 백성들이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였을 뿐이다. 그 형태가 조금 변하는 것뿐이야. 군림하지 않는다 하여 왕이 아닌 것이 아니다. 백성을 생각하고 위하는 존재라면, 여전히 왕인 게야."
"…소자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라더가 고개를 숙이며 공룡의 말에 동의하였다. 찻잔을 거칠게 내려놓는 소리가 들린 건 공룡의 왼쪽이었다.
"지나친 이상론입니다."
각별 대신은 생각을 끝냈는지 입을 열었다. 이 상황이 어처구니없는 것인지 격양된 감정을 어떻게든 잘 갈무리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백성들이 스스로 의견을 결정하는 기구? 수십 명의 투표로 이루어지는 의사 결정? 그거야말로 분열을 일삼는 것 아닙니까? 어느 의사 결정 기구이든 지배자는 필요합니다. 형태에 따라 이름만 다를 뿐, 최종 결정권자가 존재해야 집단의 분열이 심해지지 않는 겁니다. 이 의사결정 형태로는 작은 정책을 결정하는 것도 수개월이 걸릴 것이며 결정 과정에서 두 부류로 나뉘어 감정 골이 깊어질 수 있습니다. 비효율적이고 갈등을 유발하는 구조입니다.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제껏 나랏일을 해본 적도 없는 이들 아닙니까. 인수인계는 언제 이뤄질 거며 제대로 되겠습니까? 글도 못 읽는 사람이 절반인데?"
각별은 마지막 말을 하며 혁명단 대표 뒤에 서 있는 호위라는 자를 바라보았다. 조롱이나 비하의 의미는 없었다. 단지 외투의 앞주머니에 편지로 추정되는 종이 쪼가리를 소중하게 끼워 넣고 있던 잠뜰의 모습이 생각났을 뿐이었다. 그는 다시 공룡에게로 눈을 돌렸다.
"지금껏 옛날 방식을 고집해온 이유가 무엇입니까, 폐하. 기존의 방법이 그저 사리사욕을 채우는 자들의 아집이 만들어낸 방식에 불과할 뿐이라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혼란을 방지하고, 빠르게 의사결정하여 하나라도 많은 이들을 돌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새로운 방식, 좋습니다. 낡은 관습은 버리고 악습은 고치는 것은 나라 발전을 도모하지요. 그런데 이렇게까지 그 근간부터 흔들어 제도를 고쳐야 하겠습니까? 오히려 반대에 부딪혀 첫 시작부터 헛발질 할 것이 분명합니다. 백성을 진정 생각하는 거라면, 무엇이 옳은 방법인지 부디 재고해주십시오, 폐하."
잠시간의 정적이 감돌았다. 왕실에서 최고 권력을 쥐고 흔들었던 자의 입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괴리감이 들긴 했으나, 틀린 말은 아니었다. 국가를 다스리는 이들이 분열되고 혼란이 인 틈을 타 신흥 기득권층이 부패를 일삼을 수도 있고, 외국에서도 그 틈을 파고 침략해 올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한 국가에서 수백 년간 이어온 제도인데, 아무리 부패했다고 하나 근간까지 썩어있었을 리는 없었다. 각별은 썩어버린 가지만 쳐내고, 그 근간은 살리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공룡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각별, 그대의 말대로 혼란이 올 수도 있지. 그러나 그대의 눈엔 지금 이 나라의 상황은 혼란이 아닌가? 현 왕실의 체제로 갈무리할 수 있는 단계는 이미 넘었어. 그리고 백성들 역시 더는 그 방식대로 따르지 않을 것이네. 현 체제에 불만을 품어 이미 반발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이 상황에서 기존 체제를 유지하고 개선해내겠다는 말이 오히려 설득력이 없어. 그렇다고 왕을 아예 폐위시키는 것 역시 기존 왕정체제를 따르는 이들의 반발을 살 테지. 그러니 이 형태가 가장 분열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안이네. 의사결정은 조금 느려지겠지만, 애초에 우리의 모든 일은 백성들의 뜻을 받들어 그들의 편의를 도모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 아녔는가. 그들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옳지."
단호한 왕의 결정에 각별은 더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낭패라는 심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을 때, 그를 지그시 바라보던 공룡이 돌연 입을 열었다.
"나는 그대가 처음 궁에 들어왔을 때를 기억하고 있네, 각별 대신."
갑자기 옛이야기를 꺼내는 저의가 무엇인가? 이미 잊은 지 오래인, 옛날의 풋내기일 뿐인 시절인데. 각별은 고개를 들어 그의 국왕을 바라보았다. 공룡은 덤덤히 이야기를 이어갔다.
"중산층의 자제로서 어떤 뒷배도 없이 오로지 스스로의 힘으로 궁에 들어와서, 스스로의 노력과 재능으로 그대의 세력을 넓혀갔지. 그리고 모인 힘으로 기존 악습을 고쳐가려고 했었고. 그대가 올리는 제안은 늘 파격적이어서 기억하고 있었어. 그렇지만… 그러한 제안들은 이미 궁을 장악하고 저들만의 이익을 꾀하던 늙은 대신들에 의해 늘 거절당했지.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그대가 올리는 정책도, 그리고 그대도 변했어. 내가 국정을 제대로 운영하지 않은 탓에, 그대와 같이 유능한 젊은 관리들도 변해버린 것이지."
엘레나를 독살한 자의 진범을 공룡은 몰랐다. 이런 이성적이고 인간적인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도 그렇기 때문일 것이다. 알았을 경우는 굳이 상상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이다. 모두에게 상처만 주고 누구도 얻는 것이 없을 테니.
"그대는 스러지는 왕국 속에서 변해버린 것뿐이야. 그러니, 새로운 나라에서 다시 시작해주게. 짐은 그대가 완전히 변해버렸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네."
각별은 마른 침을 삼켰다. 국왕이 한낱 신입 관리였을 자신의 과거를 기억하고 있을 거라곤 생각 못했다. 수십 년간 왕의 신임을 얻어왔으나 오늘처럼 진심을 내보인 적도 없었다. 그러니 자비로운 왕의 마지막 자비라 생각하고, 그저 이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과거와는 확연히 변해버린 자신은, 진정 무엇을 하고 싶었던 걸까. 혼란스러운 심정을 속으로 가라앉히며 그는 고개를 숙였다. 이야기가 마무리된 것을 확인한 공룡은 다시 레지스탕스의 두 대표 쪽을 향했다.
"하지만 각별 대신의 말도 일리가 있어. 아무런 인수인계도 없이 국민더러 무에서부터 시작하라고 하는 건 무리니… 기존에 있었던 신하들이 새로운 행정체제의 일정 비율을 차지한 채로 시작하고,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면 투표로 다시 뽑는 것도 고려해볼 수 있겠지. 자세한 건 후에 여기 있는 혁명단 대표들과 다시 논의하도록 하세."
"폐하께서는 봉건제도의 정점에 서 계셨는데도, 이런 제도로의 변환의 문제점을 정확히 짚고 그 해결책도 깔끔히 알고 계시네요."
감탄했다는 듯한 루시엔의 말에 공룡은 눈을 두어 번 깜빡이더니, 픽 웃음을 지었다. 그러고는 그에게 다소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혹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란 그림도 알고 있나?"
"예? 예, 입헌군주제를 이뤄낸 7월 혁명을 그린, 거장 들라크루아의 그림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그리고 짐의 왕비의 침실에 걸려 있는 그림이기도 하네. 왕자가 태어나기도 전에 걸려있었으니 벌써 20년은 넘었겠군."
공룡은 이곳에 오기 전에 보고 왔던 그림을 떠올렸다. 세월이 많이 지났는데도 그 그림은 빛이 바래지 않고 여전히 저만의 색을 유지하고 있었다. 주인이 없어 시간이 흐르지 않은 방처럼, 그 그림도 변하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이제는 상황이, 그림이, 시간이, 조금은 변할 것이다.
"짐과 왕비는 오랫동안 그림 속 혁명이 이뤄낸 나라를 꿈꾸었었네. 짐의 첫 번째 이유는 짐의 아이에게 혼자 모든 걸 감당해야 하는 이 막중한 책임감의 자리를 물려주고 싶지 않아서였고, 왕비의 첫 번째 이유는 나라의 주인이 백성인 만큼 그들이 스스로 그들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지. 그 그림을 자신의 방에 사서 걸어둔 이도 왕비였고, 먼저 짐에게 입헌군주제를 제안한 이도 왕비였네. 참, 멋진 왕비였지."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는 공룡의 얼굴에 다정함이 스쳤다. 엘레나 왕비가 떠난 지 이십여 년이 흘렀으나 왕비에 대한 그의 기억은 전혀 바래지 않았다.
"우리 둘은 시간을 들여 천천히 그 제도를 시행하고 싶었네. 준비도 많이 했었어. 하지만… 알다시피, 상황이 여의치 않았지. 그래도 그때의 마음은 잊지 않았기에 그 그림을 계속 걸어두었네. 왕비의 죽음으로 결국 무야 되고, 내가 과거에 묻어버린 정책이었지만, 늦은 지금이라도 다시 그때의 바람을 이루고 싶네."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루시엔은 안타까운 표정을 들었다. 공룡은 다 옛날 일일 뿐이라며 괜찮다는 듯 고개를 흔들어 보았다. 조금의 침묵이 흐르고, 루시엔이 헛기침을 하며 정적을 깼다.
"뤼미에르로서는 이 제안을 마다할 이유가 없습니다. 저희가 원하는 것은 에투알의 국민 그 누구도 권력에 의해 핍박받고, 착취당하고, 소중한 목숨을 잃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마땅히 국민에게 있어야 할 권리를 평화로운 방법으로 되찾아주시겠다는데, 오히려 감사할 따름입니다. 빠른 시일 안에 공룡 폐하를 새로운 에투알의 왕으로 선포하는 식을 준비하겠습니다."
"아니, 새로운 에투알의 왕이 되는 건 내가 아니네. 내 아들이지."
갑작스러운 발언에 응접실이 술렁였다. 오랫동안 준비해오며 이 정책을 제안한 이가, 정작 왕위에 앉지 않겠다는 말인가? 앞으로 정책이 변하면서 혼란스러운 상황이 계속될 텐데, 국정을 잘 알고 있는 기존의 왕이 참여해주는 것이 가장 좋을 일이었다. 예상치 못한 말에 루시엔도 각별도 당황한 기색을 표했다. 가장 당황한 이는 당연히 갑자기 선위를 받게 될 라더였다.
"아바마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부디 명을 거두어 주십시오!"
"짐도 이제 많이 늙었네, 왕자."
공룡은 라더를 돌아보았다. 조금은 지친, 단지 평범한 사람의 힘없는 미소가 에투알 국왕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간다.
"젊은 날에 네 엄마를 잃고, 그 후론 정신도 차리지 못하고 너와 왕국을 지키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국정에 매달려야 했어. 그마저도 옳은 방향으로 이끌지 못했지만… 홀로 버틴 시기가 길었던 만큼, 많이 지쳤단다. 짐은 이제 쉬고 싶구나."
"하지만…."
"그리고 왕이 교체되는 게 보기에도 좋지."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의 라더를 두고 공룡은 시선을 옮겼다. 그와 두 레지스탕스의 대표 두 명의 눈이 마주쳤다.
"그대들은 알 테지, 국민들의 왕실과 나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다는 것을. 당장 카타콤의 단장만 봐도 알 수 있다네."
"…부정은 안 하겠습니다."
"후후, 시원시원하니 좋군."
떨떠름한 수현의 마지못한 대답에도 공룡은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밝게 웃었다. 수현은 입 밖으로 아직 내뱉진 않았으나 석연치 않은 기분으로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 속내를 국왕이 또 꿰뚫어 본 것 같아 불편했다.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으며, 에투알의 국왕은 말을 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기존 세대의 왕이 그대로 자리에 있는 것은 국민들에게 반감을 일으킬 수도 있네. 모든 것이 바뀐다고 하였는데, 기존 기득권의 정점에 서 있던 자가 그대로 있다면 앞뒤가 안 맞아 보일테니. 입헌군주제라는 제도가 처음 시행되는 만큼, 국민들이 완벽히 이해하기 어려울 것 아닌가."
"…."
루시엔은 국왕의 말을 들으며 속으로 상황을 재보았다. 그의 말이 맞았다. 전국에 현 왕실을 규탄하는 혁명의 불길이 번지고 있다 하나 모든 이들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기존 왕실에 대한 충성심이 여전히 남아 있는 이들 역시 적지 않았다. 또한 혁명단 내부에서도 단지 권력을 얻고 싶어 가담한 자들도 있었다. 그러니 이전 왕조를 피로 숙청하는 것은 혁명 이후 국민들을 하나로 만드는 걸 어렵게 할 것이며, 숙청한 자들에게 지나치게 권력이 쏠리게 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기존 왕실을 그대로 끌어안고 가는 것 역시 지금 분위기에선 무리였다. 그 맹점을 국왕 공룡은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해결책도 말이다.
"그렇기에, 내 아들이 새로운 왕이 되어야 하는 거네. 기존 세대의 낡은 왕이 아닌, 새로운 왕. 국민들과 함께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갈 왕 말일세."
루시엔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각별은 탐탁지 않았으나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공룡은 여전히 긴장된 표정을 짓고 있는 제 아들을 돌아보았다.
"라더야."
"…예, 아바마마."
"내 선조들의 죄, 이전 시대의 악습, 옛 사고. 전부 내가 가지고 갈 테니,"
차기 에투알 국왕을 바라보는 공룡의 눈엔 그보다 조금 더 먼 미래가 담겨 있었다. 그만큼 따스한 표정이었다.
"너는 새로운 시대를 여는 왕으로, 역사에 기록되거라."
라더는 코가 시큰해진 것을 느꼈다. 아버지이자 에투알 국왕의 눈을 라더는 한참이나 마주 보았다. 그러곤 자리에서 일어나, 왕의 앞에 서 오른손을 심장에 얹고, 허리를 굽혔다. 에투알 왕족의 전통 예였다.
"명, 받잡겠습니다."
왕의 명을 받드는 왕자를, 국왕은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숙인 왕자의 머리를, 어릴 적 그랬던 것처럼 두어 번 쓰다듬어주었다. 당황한 아들의 얼굴에 공룡은 웃으며 자리에 앉으라 하였다. 조금은 평화로운 분위기가 응접실을 맴돌았을 때였다. 수현이 손을 들고 공룡에게 발언을 요청했다.
"카타콤은, 본 결정에 따를 수 없습니다."
평화롭게 마무리되던 분위기를 단숨에 부숴버리는 발언이었다. 의아해하는 라더와 루시엔과는 달리 공룡은 별 미동 없이 계속 말해보라는 듯 손짓을 하였다.
"왕실과 귀족들의 폭정 아래 백성들이 몇 명이 죽은 줄 아십니까. 부당하게 자신의 것을 빼앗긴 이들의 수를 헤아릴 수는 있을 거라 생각하시는 겁니까. 뤼미에르, 그대들은 모르겠지요. 그대들의 혁명단에 들어간 이들은 다들 부유하니까. 천천히 비폭력적으로 나라를 바꿀 수 있다는 여유로운 소리나 하는 자들만 모인 집단이니까! 하지만, 우리는… 우리 카타콤은 다르단 말입니다."
수현의 마지막 말에는 울분이 묻어 있는 것 같았다. 카타콤의 사람들은 가난한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귀족들에게 재산도 가족도 모두 빼앗기고, 더 이상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른 채 방황하던 이들을, 수현이 가족으로서 끌어안으며 데려온 곳이었다. 대부분 왕정 아래에서 소중한 것들을 빼앗겨 왔고 빼앗기는 것에 이골이 난 이들이었다. 싸우지 못하는 이들도 뒤에서 보급 역할이라도 하겠다며 필사적으로 몰려들었고, 그런 이들을 부족한 물자인데도 어떻게든 다 받아주는 곳이 카타콤이었다. 그렇기에 카타콤의 단장인 수현은 시간이 없었다. 왕정을 치는 혁명의 길을 선택한 것도 그런 이들을 위해서였다. 왕실에게 잃은 것을 복수해주고 싶은 자들의 염원을 이루어주고, 이런 고통에서 빠르게 한 명이라도 많이 해방해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뤼미에르의 여유롭고 평화로운 방식을 이해하기에는 너무나도 깊은 상처를 받은 이들을, 수현은 아주 가까이에서, 아주 많이 봐왔었다.
"조금만 밀어붙이면 되는데, 이제 와서 왕실 놈들과 손을 잡겠다고? 여기까지 온 백성들의 화는 어떻게 감당하시려 그럽니까? 겉으로 보기엔 왕실은 여전히 건재한데! 지금 당장 내 사람들에게 가서, 그대들의 가족을 죽인 이는 아무런 죗값도 치르지 않고 한적한 궁정에서 잘 먹고 잘살 거라고, 그리 말할 수 있습니까!"
수현의 말은 지나치게 격양된 감은 있었으나 중요한 논점을 짚고 있었다. 고위계층에 대한 민중의 분노는 무시할 수 없는 문제다. 수현이 이끄는 카타콤은 그중에서도 특히 강경파가 많았고, 그런 이들을 납득시키기에는 공룡이 제안한 정책은 지나치게 유했다. 각별이 지나친 이상론이라고 말한 것에는 이러한 이유도 있었다. 수현은 자신의 사람을 아끼는 만큼 그들의 분노를 허투루 흘려보낼 수 없었다. 루시엔은 돌연 큰 목소리로 외친 수현의 태도에 당황하여 그를 진정시키려 하였다.
"수현 님, 지나친 비약입니다! 조금 진정하세요, 어전입니다!"
"난장판이군. 폐하, 저들끼리 의견 취합도 안되는 자들이 정말로 국정을 운영할 수 있다 여기시는 겁니까?"
"허, 아무리 난장판이고 더러워 봤자 각별 대신께서 해온 짓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텐데?"
"…뭐라?"
"수현 님!"
"그만."
공룡이 박수를 두 번 치자, 응접실 내의 격양된 분위기가 조금은 진정되었다. 수현은 각별을 한동안 노려보다 고개를 돌렸고, 각별은 답답하다는 듯 자신의 목 주변의 크라바트를 거칠게 풀었다. 루시엔은 갑자기 날카로워진 분위기를 중재하느라 안절부절못하였으나 공룡은 도리어 즐거워하는 듯했다.
"앞으로 나라를 이끌어갈 이들의 활발한 설전을 들으니 기분이 좋군."
"폐하, 농을 하실 때가 아닙니다."
"짐은 언제나 진심이라네, 덕개."
잠자코 서서 대화를 듣고 있던 잠뜰은, 문득 공룡의 눈빛이 왠지 모르게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여유와 노련미가 담긴 행동이라 생각했으나, 의아할 정도로 느긋했고 지나치게 객관적이었다. 저 눈에 담겨있는 감정을 본 적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다만 놓쳐선 안 되는 무언가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을 뿐이었다. 기억해내려고 애쓸 때, 공룡의 말이 이어졌다.
"카타콤 단장의 말도 일리가 있네. 그렇다면…."
공룡은 가볍게 웃었다. 이미 그 말을 할 것을 예상하였다는 듯한 웃음이었다. 그제야 잠뜰은 그의 눈빛에 담긴 감정이 무엇인지, 어디서 읽었었는지 생각해냈다. 혁명단원 중, 백성들을 착취를 일삼던 고위 귀족의 거처에 폭탄을 던지러 가려던 자가 가지고 있던 눈빛.
"왕실을 대표하는 짐이 단두대에 올라가는 건 어떻소?"
모든 판단을 끝내고, 자신의 목숨에 더 이상 미련이 없는 자의 눈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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