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은 기적이 아니다

2. 이제는 마법 따위 믿지 않아

마법은 기적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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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슬픔에 가라앉았던 그날로부터 시간은 무던히도 흘렀다. 흐르는 시간 속에서 잠뜰은 가문의 일을 처리하며 성인으로 자랐다. 그 시간 동안 집사장 라더와 경호원 덕개는 잠뜰의 곁을 충직하게 지켜주었다. 비록 가문의 재정 상황이 좋지 않은 상태였고, 그들이 모시는 아가씨의 몸 역시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지만, 이대로 그들 세 명은 언제나 함께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아가씨, 지금 뭐라고-”

“들은 그대로예요.”

그렇기에 아가씨의 부름에 한자리에 모인 곳에서 듣게 된 그 소식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오늘부로 우리 가문은 해체됩니다.”

무덤덤한 말투, 고요한 표정. 그들이 모시는 아가씨는 마치, 사업체 현황을 보고해보라고 지시하듯 차분히 말하였다. 그 말의 내용과는 전혀 다르게 말이다. 라더와 덕개 모두 크게 당황하여 바로 답할 문장을 떠올리지 못했다. 그들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잠뜰은 차분히 말을 이어갔다.

“모두 나 오랫동안 따라오느라 고생 많았어요. 이 정도면 충분해요. 이렇게까지 의리를 지키는 사용인들은 잘 없다는 거, 새로 이직할 가문에서 아주 잘 알아줄 거예요. 그러니 이제 여기서 전부 해고할게요. 일해준 값만큼은 안돼도 퇴직금이랑 다른 가문 이직용 추천서는 준비해뒀어요.”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아가씨! 저희가 돈 때문에 가문에서 일한 게 아니잖습니까! 그리고 저희가 모두 떠나면 혼자 어쩌시려고요!”

“내 약값 때문에 두 사람 고생하는 거 보는 게 더 고통스럽네요. 이제 두 분 다 나 책임지지 말고 갈 길 가라고요. 슬슬 노후도 생각해야죠, 언제까지 내 뒷바라지만 할 거에요?”

“아가씨 대체-!”

“사업체를 정리하신 게 다 이걸 위해서였습니까?”

당황하여 언성이 높아진 덕개의 말을 가로막으며 집사장은 비교적 차분한 말투로 물었다. 그러나 그의 말끝은 경호원보다도 더 갈라져 떨리고 있었다.

“저는…저는, 아가씨의 몸 상태에 맞게 사업을 줄여 집중하시려는 줄 알고 사업 정리를 도와드렸던 겁니다. 새롭게 약을 찾지 않으시고 현재 상태를 유지하는 처방 위주만 하신 것도, 현재 정리하는 것에 집중하고 싶어서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지금 상태를 정리하고 미래에 다시 나서겠다고 하셔서, 아가씨께서 하시는 일을 도와드린 겁니다. 그런데-!”

“집사장, 내게 미래가 남아있다고 생각해요?”

“!!”

순간적으로 집사장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말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자신이 평생을 모신 주인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온 상황을 순간적으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었다. 잘못 들었다고 차라리 믿고 싶었던 그 문장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눈을 보고 아니라는 것을 가까스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받아들인 후엔,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동시에 화가 났다.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돌아가신 전 가주님과 마님께서 얼마나 아가씨를 살리고자 노력하셨는데, 그렇게 말씀하시면 어떡하십니까!”

“그래요, 정말 노력하셨죠. 사업장을 전부 말아먹고 가문의 재산의 팔 할이나 날려 먹으면서까지 말이에요.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남은 게 뭐죠?”

“아가씨!!”

“내 몸은 나아졌나요? 바깥외출이야 할 수 있죠. 하지만 새로운 약을 시도하기엔 이젠 지나치게 허약해졌어요. 유지 요법에 집중해야 겨우 외출이 가능한 정도죠. 좋은 점도 있어요, 덕분에 이전보다 돌아다니기 편하다는 거요. 이 정도면 서른 살까지는 혼자 돌아다녀도 될 것 같아요, 그 이후에 어떻게 될진 모르지만.”

“아가씨, 고집은 그만 부리십시오!”

“고집은 당신들이나 그만 부려요!”

잠뜰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커졌다. 높아진 목소리에 라더와 덕개 모두 순간 입을 다물었다. 잠뜰은 두 사람을 다소 격양된 감정을 담긴 눈으로 바라보며 쏘아붙이든 말했다.

“이딴 내 몸에 무슨 미래가 있다는 건데요? 둘 다 알고 있잖아요! 이미 다 끝난 일에 희망이라는 미련을 붙잡고 있던 건 우리 부모님이셨지 내가 아니에요. 그 많던 재산을 그 쓸데없는 희망을 불 지피기 위해 다 털어 넣었고요! 희망을 태운 재라도 남았어야 하는데 아쉽게 이제 그런 건 없네요. 이 땅은 빚 갚는데 전부 털어 넣을 거고요. 이미 문서는 다 작성해뒀어요.”

탁자 위 잠뜰의 손이 미약하게 떨렸다. 그것이 쇠약한 몸으로 큰소리를 낸 것의 여파였는지, 아니면 이제부터 할 말 때문인지는 알지 못했다.

“솔직히 나, 이제 그만하고 싶어요. 내가 어릴 때부터 먹은 약 가짓수가 몇 개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새로운 걸 먹을 때마다 기대했다가 마음이 무너진 건 몇 번이라고 생각하냐고요! 나는 마음이 돌처럼 강한 사람이 아니에요. 아주 평범한 사람이라고요. 부모님과 아저씨들은 날 살리기만 하면 다 될 거라고 생각했겠죠. 그런데 난 아니에요. 난 이제 희망을 품기도 지쳤다고요. 그러니까 그냥 이대로, 내 남은 시간에 온전히 집중하게 해줘요. 여러분이 주는 희망을 삼키는 게 이제 더이상 못 버틸 만큼 힘들고 두려워요. 당신들이 내가 살길 바라며 신경 써주는 손길이 버거워요. 그 기대에 못 미치는 제가 쓸모없게 느껴질 때마다 내 자존감이 난도질당하는 느낌이에요. 그러니까!”

다음 문장을 잇기까지, 잠뜰은 잠시 숨을 골랐다. 자신이 내뱉은 말에 진심이 어느 정도 담겨있는지 그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 그저 듣고 있는 두 사람의 표정을 볼 자신이 없었기에, 잠뜰은 고개를 숙여버렸다. 마지막 문장을 내뱉는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우리, 이제 그만해요. 그만하고, 각자 갈 길 가요.”

그 뒤론 두 사람이 무슨 말을 했는지, 어떤 표정이었는지 잠뜰은 기억하지 못했다. 단지 겨우 올려본 두 사람의 표정이 지켜보기 힘들 정도로 마음 아프게 변해서, 도망치듯 그 자리에서 떠났던 것이 기억난다. 세상에서 자신을 가장 아껴주고 또 가장 사랑하는 두 사람에게, 누구보다 큰 상처를 남긴 채로 자신으로부터 끊어내었다. 잠뜰은 그렇게 자신의 한평생을 살아온 집으로부터 떠나왔다.


마법은 기적이 아니다

2. 이제는 마법 따위 믿지 않아


그 뒤로 잠뜰은 여러 나라를 전전했다. 아무도 그녀를 모르는 곳에 도착할 때까지 몇 번이고 나라를 옮겨갔다. 누가 찾아올까 봐 두려운 것처럼 이동하였고, 자신의 이런 몸에 이상함을 느낄 사람들을 피해 이동했다. 어느 날은 너무 아팠고, 또 어느 날은 너무 외로웠다. 힘들게 떠나온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도 몇 번 하였다.

그러나 돌아갈 수는 없었다. 돌아가면 또 똑같은 일이 반복될 것이고, 어차피 이젠 돌아갈 집도 없으니까. 잠뜰이 자신의 손으로 직접 모든 걸 정리하고 떠나왔으니까.

‘…남은 시간은, 앞으로….’

아홉번째로 옮긴 나라에 도착했을 때, 잠뜰은 자신에게 남은 시간을 손으로 세어보았다.

직감적으로 이것이 자신의 마지막 나라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평생동안 의사들이 경고했던 나이까지도 얼마 남지 않았다.

복잡한 심경이었다. 거의 예언처럼 자신의 일평생을 갉아먹었던 선고문이었기에. 이제 와서 두려운 마음도 있었고, 이제 와서 동요할 필요가 있나 라는 마음도 있었다. 모순적이게도 그러했다. 남의 발목을 잡고 싶지 않아 혼자 책임지기 위해 여기까지 도망쳐온 마음과, 남에게 도움을 요청해서라도 조금 더 해보고 싶은 마음 모두 사실이었던 것처럼. 여태껏 걸어온 길이 양쪽의 경우를 늘 재고 따져야 하는 살얼음 같았던 탓인지, 자신의 마음도 한 가지에만 전부 주지 못했다. 전부 포기하고 주저앉고 싶었으면서도, 마지막까지 발버둥치고 싶은 마음 모두 진심이었다.

“서바이벌…게임…?”

실버 소프트에서 주관한 그 게임 공고문을 보게 된 것은 그런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워 넘칠 때쯤이었다. 그 어떠한 내용보다 상금 60억이라는 단어가 눈길을 끌었다.

정기적으로 장기 입원이 필요하여 경제활동을 하기 어려운 현재의 자신에게, 그 서바이벌 게임은 돈을 벌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그리고 서른이 넘게 되면 자신이 바로 죽지 않는 한 어떤 형식으로든 장기입원을 해야 했기 때문에, 아무 곳에서나 객사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돈은 반드시 필요했다. 마음 한구석에선 어디서든 객사하는 것이 무슨 대수냐 싶기도 하였지만, 이왕이면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티는 게 낫지 않을까, 또 가더라도 비교적 편하게 가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잠뜰은 그렇게 생각하며 신청서를 작성하였다.

“…여기다.”

포기하고 싶으면서도 나아가고 싶은, 그런 모순적이고 애매한 감정으로 제출했던 신청서는 의외로 단번에 합격하였다. 잠뜰은 안내된 장소에 미리 와 기다리고 있었다. 비밀리에 진행되는 곳이기 때문에 안내된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주최 측에서 개인차량으로 이동한다고 하였다.

잠뜰은 호주머니에서 약통을 꺼냈다. 진통제가 딱 한 알 남아있었다. 이제 약값도 없기에 정말 마지막 진통제였다. 마른침을 삼키고, 잠뜰은 그 약을 꺼내 목 뒤로 꿀꺽 넘겼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이것이 마지막 기회였다.

잠시 후, 검은 봉고차 한 대가 잠뜰 앞에서 멈추었다. 검은 정장을 입은 사람 서너 명이 차에서 내려 잠뜰의 신원을 확인하였다. 그들은 잠뜰을 차에 태운 후, 안대를 씌웠다. 어차피 알아봤자 이를 사람도 없는데 수고스러운 짓을 한다고 생각하였다. 차량은 덜컹거리며 비포장도로를 달려, 점점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세상에 닮은 사람이 세 명은 있다는 말을 느낄 때는 종종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닮은 경우가 있을 수 있나?

참가자들을 처음 봤을 대 잠뜰의 감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진으로만 봤던 라더 집사장 젊은 시절 모습과 덕개 경호원과 똑같은 얼굴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순간 동일인인 줄 알고 흠칫했던 순간도 있었다. 도망치듯 떠나왔고, 다시는 만날 생각 없던 두 사람이었기에 그들을 만났을 때의 준비 따위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당연하게도 동일인물은 아니었다. 하기사, 십 년에 가까운 세월을 안 보고 지낸 사람들을 다시 만나는 거야말로 마법 같은 일이었다. 다행히 성격이 딴판이었기에 처음에만 당황스러웠고 이후에는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그 둘을 구별해내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이상하게 신경 쓰이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제 얼굴에 뭐 묻었나요?”

녹색 옷을 입은 채로 마법사 오즈 역을 맡은 갈색 머리 남자였다. 익숙한 느낌도 있긴 했으나 그것보다도 신경 쓰이는 것이 있어 게임 진행 중에도 힐끗거렸더니, 사람 좋게 웃는 표정으로 그가 먼저 물었다.

“아, 아뇨. 죄송해요.”

“괜찮아요, 너무 잘생겨서 바라볼 수도 있죠.”

“그건 절대 아니니까 걱정 마시죠.”

“이야 단칼이시네.”

시덥잖은 농담을 던지고는 그는 키득거리면서 웃었다. 잠뜰은 눈썹을 찌푸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이 남자는 뭔가 이상했다. 마치 두 사람이 한 몸에서 연기하는 것 같았다. 신경 쓰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칠 수 있지만, 병상에 누워 있으면서 늘어난 것은 사람 표정 읽는 기술뿐이었던 지라 잠뜰은 그의 미묘한 변화를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특히 지금처럼 저 능글거리는 표정을 짓는 상태가 될 땐, 대체 어떤 생각을 하는 것인지 전혀 예측되지 않았다.

그런 시선을 즐기는지, 혹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부 꿰뚫어본 것인지. 남자는 잠뜰을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너무 그렇게 경계하지 마요. 이래 봐도 난 당신들을 집으로 데려다 줄 마법사니까.”

의미심장한 말, 알듯 모를듯한 표정. 잠뜰이 뭐라 물어보기도 전에, 그는 이미 저쪽 무리로 합류해있었다. 표정이 묘하게 진지해진 것으로 보아 잠뜰만 구분할 수 있는 ‘다른 사람’ 상태로 바뀐 것 같았다.

“…캐릭터에 너무 과몰입한 거 아니야?”

잠뜰은 혼잣말을 중얼거려 보았다. 진짜 마법사를 만나본 적도 없을 거면서. 마법 같은 건 게임 안에나 존재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게 편한 환상인데 말이야.


“마법사는 무슨….”

이야기는 다시 돌아와, 불도 켜지 않아 어두운 잠뜰의 방이다. 의미 없는 과거 회상은 여기까지다. 결국 잠뜰의 인생에서 마법은 어릴 때 잠깐 가지고 놀던 장난감에 불과했다. 병을 고쳐주지도 죽은 자를 되살려내지도 못하는 것이고, 집으로 돌려보내 준다는 마법사는 사용자가 입맛대로 코딩해 만든 캐릭터 설정일 뿐이었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환상에서 벗어나면, 결국 머무를 곳은 어둡고 차가운 자신의 단칸방이었다.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 병원에서도 나왔으니 그냥 이 좁은 방에서 남은 삶 동안 누워있으려나. 이곳에 와서 알고지낸 사람도 없으니까 마지막까지 혼자 있겠지. 그것조차도 얼마나 가능하려나. 이제 와서 새삼 미래가 어떨지 고민하는 것도 사치이려나….

똑, 똑.

생기 없는 정적을 뚫고 노크 소리가 들렸다.

처음엔 잘못들은 줄 알고 가만히 있었다. 두 번째 노크소리가 들렸을 땐 방을 잘못 찾아온 누군가의 실수인 줄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잠뜰을 찾아올 사람은 없었고, 택배나 공무원 방문이라고 하기엔 지금은 지나치게 늦은 시간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랬기에 잠뜰은, 세 번째 노크 소리가 들릴 때에서야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이 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이에 벌써 네 번째 노크소리가 들렸다. 이만큼 두드렸는데도 사람이 안 나왔는데 초인종을 누르지 않은 상대도 대단했다. 깊은 밤에 이웃 주민들을 배려할 줄 아는 세심한 사람인가 라는 생각을 하며 살펴보려고 문 앞에 서 있었을 때,

잠뜰은 노크소리가 문쪽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똑, 똑.

소리가 나는 쪽은 문이 아니라, 오히려 문의 정반대 쪽이었다.

그것은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하나는 문의 정반대 쪽에 있는 것은 이 단칸방의 유일한 창문이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잠뜰의 방은 11층이라는 것이었다.

“….”

잠뜰은 천천히 방의 창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베란다가 없는 대신 이 방은 커다란 여닫이 창문이 하나 있었다. 두 손으로 잡고 안쪽으로 당기면 열리는 여닫이 창문은, 조금 숙이면 사람도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컸다. 바깥쪽으로 화분을 놓을 수 있을 만한 창틀도 나 있었다.

그리고 그 창틀을 만들었을 사람은 분명, 그것이 사람이 밟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아, 드디어 봤네. 그럼 이제 들어가도 될까요?”

그 밤은, 마법 같은 것을 쉽게 믿어버릴 것 같이 아름다운 밤이었다.

창밖을 가득 메운 그 아름다운 밤하늘을 배경으로, 누군가가 창틀을 밟고 서 있었다. 검은 바지, 흰 셔츠. 짙은 녹색 외투. 밤바람에 가볍게 흔들리는 갈색 머리카락에, 밤하늘을 그대로 담아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 행색은 많이 달랐지만, 낮에 게임 속에서 봤던 그 사람이었다.

잠금장치를 걸어두지 않은 창문은 그의 손에 가볍게 밀려 열렸다. 방 안으로 들어오는 그의 발걸음은 깃털과도 같이 가벼워, 큰 소리 없이 사뿐하게 내려앉았다. 그 모든 몸짓이 무겁지 않고 우아했다. 달빛 아래 그의 갈색 머리카락이 빛나고, 생글거리는 미소가 저를 향한다.

“또 만났네요? 달이 참 아름다운 밤이죠?”

현실감이 하나도 없는 광경이었다.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실린 밤 공기의 서늘한 온도가,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창가 앞에 서 있는 남자 뒤로 보이는 밤하늘은,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그 순간만큼은 별빛이 가득하였다. 그 별빛으로부터 오는 모든 빛의 방향을 아는 듯, 남자는 그 밤에 어울리는 나긋한 목소리로 잠뜰에게 인사를 건넸다.

“뭐, 뭐야 당신! 우리 집은 어떻게 알았어요?”

“게임 데이터 베이스에 적힌 참가자 정보쯤이야 진작에 외워 놨었죠.”

“창문으로는 어떻게 들어온 거예요? 여기 11층인데??”

“음~ 날아서?”

거짓말할 정성도 없는 이상한 헛소리였다.

잠뜰은 기가 막혀 반박하려 했지만, 순간 현기증이 나 말을 멈추었다. 게임 시작 전 먹은 마지막 진통제 효과가 다 떨어진 모양이었다. 잠시 침입자에게 뒀던 시선을 거두고 자신의 호흡에 집중하였다. 숨을 들이쉬고 천천히 내쉬는 과정을 대여섯 번 반복하고 나니 두통이 그나마 가라앉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침입자고 뭐고 전부 피곤해졌다. 조목조목 반박하려던 잠뜰은 그저 긴 한숨만 쉬었다.

“하…당신 헛소리에 어울려줄 기운 없어요. 경찰 안부를 테니까 그냥 조용히 가요.”

“어쩌나? 제 용건은 당신한테 있는데.”

“난 할 말 없어요.”

“머리 그냥 풀고 있네요? 좋아하던 모양으로 묶고 있을 줄 알았는데.”

뜬금없이 뭔 소리야? 잠뜰은 눈살을 찌푸리며 상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남자는 의미심장한 미소만 지어 보일 뿐이었다. 속을 알 수 없는 저 표정이 잠뜰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양갈래 머리 모양 말하는 거예요? 그건 그냥 게임 데이터가 정해준 거거든요?”

“아니, 그거 말고. 게임보다 훨씬 전에, 그쪽이 좋아하던 머리 모양 있잖아요.”

“무슨….”

남자는 대답 대신 생글거리는 표정으로 자신의 오른손가락을 튕겼다.

그 소리가 귓가에 닿은 동시에, 잠뜰의 머리카락이 손 하나 대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

잠뜰은 움직이지 못했다. 이 감각을 알고 있다. 손 하나 대지 않았는데도 움직여지는 머리카락, 그리고 그 순간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힘으로부터 오는 약간의 들뜨는 기분까지. 가장 처음 그 아이가 묶어줬던 그때의 감각도,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 그 남자 쪽에서 푸른 리본이 날아와 머리카락에 묶여 마무리되었다.

잠뜰은 이제는 다 자라 뒤통수에 닿을 수 있는 길이의 자신의 팔로, 머리카락을 더듬어보았다. 손끝으로 어린 시절 누군가가 수도 없이 묶어주었던 그 반묶음 모양이 느껴졌다.

“어때요, 솜씨 아직 그대로죠?”

설마.

잠뜰의 회색 눈동자가 작게 흔들리며, 창가에 선 사람을 향했다.

분명 검은색이었던 그의 눈동자는 맑은 녹빛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익숙한 각도로 올라간 그 입꼬리는 어린 시절 잘 아는 누군가의 것이었다.

기술이 삶의 구석까지 자리 잡은 현시대에서는, 마법사는 이제 게임 속에서나 자연스러운 존재였다. 하지만 그라면, 너라면, 그런 상식조차도 비틀어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렇게 내 앞에 서 있는 것일 것이다.

어린 시절, 버리려고 하였고 묻었다고 믿었던 기억 속. 서로에게 서로밖에 없던 시절, 반짝거리는 눈으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던 옛 친구.

“기다리는데도 안 와서, 데리러 왔어요.”

마법이 일어나도 믿을 것 같이 아름다운 밤하늘 아래에서, 마법사는 그 밤하늘에 어울리는 환상적인 미소를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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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8

댓글 2


  • 열정적인 청새치

    저 좀 죽을것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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