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을 넘어서
우리는 더 이상 바다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 뜰팁 전력 '흑막'
저 거대한 바다는, 언제나 저곳에 있었다. 영원히 건널 수 없는 벽인 마냥, 이 곳에 갇혀 지내야 한다는 것이 너희의 운명이라고 말하는 것 마냥. 해가 없기에 어두운 하늘 만큼이나 깊고 어두운 저 바다는, 그래서 끝이 보이지 않아 감히 건널 엄두도 들지 않게 하는 저 검은 물은, 우리를 이곳에 가두기에 무엇보다 적합한 울타리였다. 도시 이름을 해광(海恇, 바다를 두려워하다)이라 지었다는 것부터, 그 의도가 너무 투명하게 드러나지 않는가.
가끔씩, 광산에서의 고된 일이 끝나면 그 바다를 보러 갔다. 우리도 한 때는 저 바다 너머에 있는, 살아있는 인간들의 세계에서 왔겠지. 이쯤 되면 신은 참 잔인하다. 기억을 지울 거면 전부 지워버릴 것이지, 왜 '기억을 잃었다'는 기억은 남겨둬서,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는 과거를 그리워하게 만든 것일까.
그런 고민들을, 해변을 따라 철썩이는 파도 소리에 버리기 위해 그 바다에 갔다. 이제 와서 그런 고민을 해봤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찌 되든 나는 오늘도 이 어두운 밤 보다 더 어두운 굴속에서 일하며, 제값도 받지 못하는 채로 무거운 세금을 내는 일상만 반복해야 하는데. 과거의 내가 어땠을까 하는 고민은 그냥 사치일 뿐이다. 그냥 무슨 죄를 지어서 이렇게 되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 마음이 편했다.
그래, 분명히 그럴 거다.
어둠에 섞여 보이지 않는 수평선 끝을 바라보았다. 그래, 그러니까, 오늘까지만 저 바다 너머의 세상을 생각해보자. 딱 오늘까지만, 이 물로 가로막혀 있는 세계를 벗어나, 저 너머의 삶을 상상해보자.
경찰 구두로 물에 젖은 모래사장을 밟아 발자국을 남겼다. 곧 파도가 몰려와 자국을 쓸고 지나갔다. 그 자리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는 듯, 검은 바다로 모든 흔적을 가지고 가버렸다. 지금까지 저 바다는 저런 식으로 몇 명을 흔적도 없이 지워버렸을까.
고개를 들어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경찰이 되기 전에 매일같이 와서 바라보던 장면이다. 와서 떠올리지도 않는 과거를 생각하거나 절대 바뀔 리 없는 현실을 한탄한 뒤, 다신 오지 않겠다 다짐하다 결국 그다음 날도 현실에 지쳐 돌아와 바라보던 풍경이었다. 그건 경찰이 된 뒤에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저 바다는 여전히 우리를 이 해광에 가두고 싶어 한다. 아무런 기준도 설명해주지 않고 상위층과 하위층으로 우리를 나누어서, 상위층에게는 질리도록 매일같이 파티를, 하위층에겐 제대로 값도 쳐주지도 않는 고된 노동을 강요하는 도시에. 검은 바다는 이 도시에 우리를 우겨넣고, 나가지 못하게 가두고, 우리의 숨을 졸려놓았다. 벗어날 생각조차 못하도록 차갑고 단단하게.
입안에서 욕설을 몇 개 내뱉었다. 왜 우리가 이런 식으로 차별받아야 하지? 설령 우리가 생전에 죄를 지었어도,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알려주고 그걸 반성하면서 죗값을 치르게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노동시키며 또 다른 차별을 일으키는 것이, 그들이 말하는 정의인가?
내가 그들의 정의를 따라야 하는가?
"공룡님, 준비가 끝났습니다."
"...그래?"
아니, 내게 그들이 멋대로 정한 정의를 따를 이유 따윈 없다.
이유도 정당한 대가도 없이,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죄'로 이 바다로 둘러싸인 곳에 멋대로 가두는 것이 그들의 정의라면, 난 그 잘난 정의로 세워진 도시를 내 손으로 무너뜨릴 것이다.
검은 바다 위에 떠 있는 흰 배에 올랐다. 배에는 물을 마시고 변한 많은 야괴들이 있었다. 나처럼 아무런 설명도 없이 억압받다가 해광의 체계에 한이 시린 그들. 이제 이 배에 해광을 향해 품은 그들의 원한을 싣고, 언제나 바라보기만 했던 수평선 너머로 건너갈 것이다. 우릴 가두던 벽을, 우리에게 두려워하라고 강요하던 그 바다를, 우리는 이제 넘어설 것이다.
"모두 오랫동안 참았다."
목소리를 높였다. 야괴들이 일제히 나를 돌아보았다. 깊은 원한과 분노를 머금은 수많은 눈이 나를 바라보았다. 아마 나의 눈도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겠지.
"해광에 도착한 순간부터, 그들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않고 강요만 하였지. 우리는 항상 가장 아래에서 멸시만 당해왔다. 정당한 일을 해도 대가도 못 받았고,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들은 아무 이유도 없이 그들의 놀림감이 되었지. 단 한 번이라도 이 해광은, 우리의 편인 적이 없었다."
누군가 소리 높여 맞다고 외쳤다. 그들 모두 과거에 멸시당하고 모욕받던 때를, 그때의 울분을 떠올리고 있을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참지 않아도 된다. 지금껏 너희들이 참아왔던 분노를 모두 터트려라. 멋대로 기준을 나누는 것들, 설명도 없이 우리를 고생하게만 했던 잘나신 분들에게, 그들이 얼마나 멍청했는지 알려주자!"
우리는 더 이상 바다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두려워하던 그 바다를 건널 것이다.
"원하는, 그 무엇이든!"
이 썩어빠진 해광을, 전부 엎어버리자.
"마음껏 날뛰어도 좋다!!"
와아아!! 야괴들의 함성이 들렸다. 큰 소리와 함께 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때 바라보기만 하던 그 견고한 벽을, 어둠이라 해도 믿을 물로 가득 찬 바다를 건너, 기억날 리 없는 우리들의 고향으로 향했다.
야괴들 중 누군가 혁명이라고 외쳤다. 그래, 어찌 보면 이것도 혁명이지. 모든 것이 뒤엉키고 엉망이 되어도, 이유 없이 신분 구별하던 그 해광보단 낫지 않은가! 높은 자든, 낮은 자든. 모두가 공평하게 고통스러워하는 혼돈을 가지고 오리라.
이제 우리 차례다. 해광의 윗대가리들아, 잘 봐라.
혁명,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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